소설리스트

5화 (30/30)

5.

요른은 눈을 떴다.

해는 중천에 뜬 지 오래였다. 정오쯤 되었을까. 다리를 움직이자 엉덩이 사이에서 열과 통증이 퍼졌고 배도 살살 아팠다.

옆에 누운 놈의 종아리를 차 주려다가 그는 어젯밤 자기가 자초했던 바라는 걸 깨닫고는 그만두었다. 게다가 옆엣놈처럼 보였던 건 이불이 뭉친 덩어리였을 뿐으로, 그 바보는 침대에 있지도 않았다.

급히 몸을 일으키며 요른은 상대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꺾었다. 다행히 발코니 문이 열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형태와 농도의 그림자가 문틈으로 햇볕처럼 스며들어와 카펫에 고인 모습도.

요른이 잠시 그 음영만 쳐다보고 있노라니 막시밀리안이 곧 몸을 돌려 침실로 돌아왔고,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었다.

“잘 잤어?”

“응. 너 어디까지 기억해?”

“네가 저녁에 나한테 마들렌 먹인 거.”

막시밀리안이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거기 약 들어 있었지? 네가 언젠가 얘기했던 환각제. 넌 부지에서 엘데 찾으러 다녔던 거고.”

“응.”

“그다음은 조금 희미한데…… 우리 같이 잤던 거 같아. 네가 위에서 해 보고 싶어 했고. 맞아?”

“응, 응. 그치만 약 다신 안 쓸 거야.”

요른이 얼른 되받자 막시밀리안이 의외라는 듯이 반려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요른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가 말이야, 평소보다 더 잘 느끼긴 하던데 대신 오래가질 못하더라고. 그 약이 그런 부작용이 있는 줄 몰랐어.”

막시의 입매가 약간 굳었다. 요른은 신이 나서 조잘댔다.

“게다가 날 다른 이름으로 부르더라. 나탈리? 그거 네 흑마 아냐? 너 그런 취향도 있었어? 기분 나빠서 다신 안 하려고. 넌 그냥 제정신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럴 리가, 그건, 아냐, 말이든 뭐든, 내가 널 다른 이름으로, 그건 아닐…….”

진지하게 주워섬기는 꼴을 보다가 요른은 웃음을 터뜨렸다. 막시밀리안도 농담인 걸 깨닫자 겨우 한숨을 내쉬고는 손안에 얼굴을 묻었다.

피곤할 테지, 요른은 생각했다.

그 약은 사람 뇌를 지나치게 활성화시킨다. 몇 주에 걸쳐 천천히 타들어야 할 재료에 기름을 들이붓고 하룻밤 만에 찬란하게 태워 버리는 식이니까.

 그래서 아까 놀라서 급히 일어났던 거다. 그걸 써서 수 시간 동안 환각 체험을 한 다음 요른 자신보다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었을 리가 없는데, 막시는 멀쩡하게 가운까지 걸치고 성큼성큼 발코니로 나가 버렸다.

“막시, 혹시…….”

요른은 잠시 고민하다가 상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질문 몇 가지를 골라 놓고 고개를 돌렸지만, 막시밀리안은 이미 모로 누워 있었다. 호흡과 맥을 확인해 보니 그냥 그대로 도로 잠든 것 같았다.

‘역시 그렇게 빨리 정신이 들 리가 없지.’

그럼 아까는 어쩌다 발코니로 나갔을까? 완전히 약에서 깨어나서 바람을 쐬러 나갔다기보다는 차라리 환각의 연장 아니었을까. 꿈에서 겪었던 걸 반복하거나 이어 가려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면서도 요른은 일단 막시의 신발을 벗기고 몸을 질질 끌어다가 침대 한가운데에 똑바로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막시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깨어났지만, 수프를 몇 술 뜨고 양치를 마친 후 금방 도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내리 자고 나서야 그는 여러모로 회복되었고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와 제 손으로 밥도 요리해서 먹고 잠도 제대로 챙겨 자면서 일을 진행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막시는 요른더러 서재에서 잠시 얘기할 수 있겠냐고 물어 왔다. 요른이 응하자 막시밀리안은 대륙 남단 및 인근 지역 지도를 가져와서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샬로테가 영지 부흥을 잘만 계획한다면, 근처 농촌 마을을 특색 있는 소도시 정도로는 불려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샬로테의 영지는 원래 르핀 왕국의 전성기 때는 흥했어. 르핀이 멸망하면서 완전히 시골 한지가 되어 버린 건데, 지금 르핀이 다시 일어났잖아. 잘만 하면 오히려 전쟁을 핑계로 민간 물자 수송은 살려서 이 부근을 교통 요지로 삼을 수 있어.”

“어…… 그거랑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 당장은 상관없어. 하지만 치료소 개설도 그렇고 부지 개축 공사도 그렇고, 이 지역이 다시 어느 정도는 흥해야 우리도 시설이나 물자 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사실 여기까지 공사를 하러 오겠다는 업체를 찾기가 힘들었거든. 입찰 경쟁을 시키기는커녕 오겠다고 해 주는 것만으로도 꽤 웃돈을 얹어 줘야 했어.”

막시밀리안이 계약과 관련해서 오간 편지 몇 통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한적해서 사람이 잘 안 오는 건 좋지만 너무 없으면 장기적으로는 살기가 힘들지. 우리 둘만 잘살려고 해도 결국 더 큰 공동체에 얹힐 수밖에 없긴 해.”

막시밀리안은 샬로테에게 보낼 도시 개발 기획안도 이미 다 짜 놓은 거 같았다. 요른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저놈 저거, 저러다가 샬로테가 영지 재정관 같은 걸로 채용하려고 욕심내면 어쩌려고. 그거 금색별 길드원에 비하면 연봉도 얼마 안 될 텐데. 그 시선을 격려로 착각한 듯 막시가 요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소통할 방법도 더 연구해 볼게.”

“응?”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없어. 미안. 그래도 앞으로 가야 하니까.”

막시가 마저 설명했다. 정령 마법은 앞으로 이십 년 정도면 눈에 띄게 약해질 테고, 삼십 년쯤 되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신은 몰라도 요른은 전투형 길드원으로 일하기 어려워질 텐데, 남는 건 요른의 언어 능력이다. 

요른은 수십 개국의 언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더 배울 수도 있다. 앞으로 올 시대에 그 능력을 썩히는 건 아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타인과 소통할 수 없다면 언어를 몇 개를 하든 아무 발휘할 길이 없으니까, 길게 보면서 요른이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요른도 같이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막시는 사무적인 투로 말했지만 왠지 귀끝이 점점 발갛게 달아올랐고, 요른은 신기해서 그 귓바퀴를 쭉 잡아당겨 보았다. 막시밀리안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요른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담았다. 막시가 세상의 흐름에 자신의 패를 걸어 보려 드는 건 굉장히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한구석에 몸담은 남의 영지에 대해서든 대륙의 이삼십 년 후 미래에 대해서든.

2년이 지났다. 너도 이제야 돌아오고 있구나. 요른은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따라 중얼거려 보았다.

날들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9월을 지나 10월도 중순으로 넘어가면서 가을은 보다 선선해졌지만 추울 정도로 내리막을 걷지는 않았고, 이른 저녁은 창밖의 황혼과 창 안의 모닥불 덕분에 오히려 따스하고 고즈넉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성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요른은 막시가 마들렌을 먹고 잠들었던 이튿날 발코니에 나갔던 사정을 짐작하게 되었다.

출발 당일에는 새벽부터 둘 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늘 요른보다 짐이 적었으며, 요른의 짐 중에는 정령학이나 오행학, 약학적으로 예민한 것도 많아서 챙기는 걸 남이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요른이 아직 옷방이며 서재, 부엌을 오가며 짐을 싸는 동안 그는 이미 행장을 갖춘 채 얌전히 침실 벽에 기대어 서서 기다렸다.

카펫의 잔털이 발코니의 창유리가 떨궈낸 빛무리를 잔잔하게 머금고 흔들렸다. 내려다보고 있다가 막시밀리안은 표정이 묘하게 변했고, 시계를 보고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고 생각했는지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정원과 부지, 숲과 먼 황야까지 눈 아래로 둔 채 그는 난간 앞에 서서 꽤 오래 머물렀다. 요른이 침실에 들렀다가 눈치채고는 따라 나와서 물었다.

“뭐 해?”

“곧 떠날 테니까 한번 눈에 담아 두려고.”

막시밀리안이 얼른 돌아보며 답했지만, 말투에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기에 요른은 꼬집어 내듯 물었다.

“진짜 그게 다야?”

요른은 막시가 망설이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는 상대가 미간을 찡그리기 전에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달쯤 전부터 가끔 꿈을 꾸거든. 탑 위에 서 있는 꿈이야.”

“어느 탑?”

“이 성의 탑.”

“여긴 탑이 없는데.”

“응. 아직 지어지지 않은 탑이야.”

막시가 어딘가를 시선으로 가리키고 싶은 듯 허공을 훑었다.

“쉽게 증축할 수 있을 만한 설계도 아니잖아. 그래서 위치가 어디쯤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 이 성의 탑이었고 꽤 높았어. 부지는 물론이고 성 전체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성안의 방과 복도며 지하까지도 다 투명하게 내려다보일 정도로. 그 기억이 나서 여기서나마 따라 해 본 거야.”

“그래. 그래서 구경 잘했어?”

“아니.”

막시밀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안 보였어.”

“아까는 뭐든 다 내려다보였다면서.”

요른이 묻자 막시는 망설였다. 말하기 싫다기보다는 설명이 잘 안 된다는 태도였지만, 곧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보려는 듯 미간이 굳어진 채로 그는 한마디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응. 뭐든 다 보였지만 대부분 가려져 있었어. 그림을 결코 감추지는 않지만 베일을 씌워서만 내놓은 것처럼. 성이나 부지의 어떤 부분들은, 분명히 원래는 뭔가가 거기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도, 지금도 실은 거기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도 전혀 보이지가 않아서 답답하고 불안했어. 그런데도…….”

요른은 막시의 표정을 보며 더는 이어지지 못한 문장을 멋대로 상상해 보였다. 그 풍경이 몹시도 평온하고 좋았다. 탑을 올라오는 동안 그 나선 계단이, 밟아온 타일과 문양 하나하나가 눈을 무척이나 따스하게만 멀게 해 버린 듯이.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는데도 전망은 아름다웠다. 그때 막시밀리안이 덧붙였다.

“그냥 우리가 늙어서 눈이 많이 나빠졌던 걸 수도 있고.”

“우리가?”

우리가, 늙어서. 그 두 마디 때문에 이미 뭉클했으면서도 요른은 굳이 캐물었다.

“그럼 나도 거기 있었어?”

흑발의 청년이 요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물네 살의 마법사는 긴장해서 허벅지 옆에서 살짝 주먹을 쥐었다. 암회색 눈동자의 동공을 통해 훨씬 더 먼 곳에서부터 다른 자가 이쪽을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늙어서 눈도 안개처럼 흐려지고 귓속도 얼룩져 버린 어떤 자가 까마득한 탑 위에 선 채로.

시월 중순, 아침 햇살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처럼 둘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발코니 밑에서 그림자로 잦아들었고 막시밀리안의 눈 속 가장 검은 부분이 문득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아볼 수 없는 추억을 그리워하듯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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