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8/30)

3.

고성의 부부침실, 탁자 위에 얹어 놓은 회중시계의 큰 바늘은 새벽 두 시를 가리켰고 침대의 연하늘색 시트는 별빛과 등잔불빛을 동시에 받아 녹색으로 일렁거렸다.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몸 위에 앉아 속삭였다.

“막시.”

막시밀리안은 두꺼운 검은 천으로 눈을 덮은 채, 침대 등받이 쪽에 높이 쌓인 쿠션에 등과 어깨를 기대고 반쯤 앉다시피 누워 있었다. 그의 허벅지 위로 살며시 걸터앉아 요른은 조금씩 소리를 높여 가며 이름을 불렀다.

누운 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요른은 탁상 위 램프의 조도를 낮춘 후 상대의 눈가리개를 벗겨 냈다.

천 아래에서 막시밀리안은 동공이 풀린 채 눈을 뜨고 있긴 했으나 방 안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제 머릿속 환각에만 갇혀 있는 것이다. 요른은 그 암회색 눈동자 한가운데를 똑바로 응시하며 전송 마법을 써서 명했다. 음성이 귓속 깊은 곳을 파고들어 거기에서부터 섬모를 뒤흔들게끔. 올라와.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그리고 그는 막시밀리안의 손바닥 안을 가만히 검지 끝으로만 쓸어내리고는 손을 거두었다. 잡아 주지는 않고, 그러나 막시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잡아챌 수 있게끔 그의 무릎 바로 옆에 늘어뜨린 채로.

막시밀리안이 눈을 흐리게 깜박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로 돌아온 거 같지는 않았다.

약효가 떨어지려면 아직 두 시간도 더 남았다. 요른은 굳이 회중시계를 보지 않고도 짐작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세 시간도 넘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몸도 편안히 눕혀 환각 안에만 가둬 두었으니, 감각이 다시 외부를 향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리라.

‘그래도 다행이야.’

요른은 되씹었다. 아무리 잘 합성해 냈다 한들 엘데 성분의 약물을 써서 환각을 유도하는 데에는 부작용의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발작이 일어나면 진정제와 해독제를 들고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막시는 잘 버텨 주었다.

어제저녁 요른은 막시밀리안에게 마들렌을 먹인 후 손을 잡고 침실로 데려왔다. 옆에 누워서 놀아 달라고 꾀었더니 그는 순순히 말을 들었고, 요른이 고개를 돌린 채 몰래 주문을 외워 조금 강한 수면 유도 마법을 쓰자 금방 잠들었다.

삼십 분쯤 재워 약이 충분히 뇌까지 퍼졌겠다 싶자 요른은 그의 눈에 천을 덮어씌운 채 뺨을 때려 강제로 깨워 냈다. 귀에는 숨바꼭질을 재촉하는 듯한 말을 속삭여 암시를 주면서.

막시가 몸을 움찔대기 시작하자 요른은 그의 한쪽 손을 깍지껴 잡고 조금씩 끌어당겼고, 다른 쪽 손으로는 미리 준비해 둔 도구로 침대 옆 탁자의 상판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발걸음과 유사한 소음을 내어 둘이서 손을 잡고 함께 복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막시밀리안은 곧 요른의 의도대로 고성의 복도를, 그러니까 실제로는 자기 생애의 갈래들을 끊임없이 헤매는 환상 속에 잘 안착했다. 요른은 가느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세 시간 넘게 요른은 논문에서 읽은 대로 치료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이삼십 분에 한 번 정도만 슬쩍 개입해서, 막시의 머릿속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곤 했다. 답으로는 더듬더듬 다 부서진 문구만 돌아왔지만 요른은 금방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둘이 함께 지나왔던 장소들이었으니까.

막시밀리안은 물을 때마다 늘 다른 곳에, 다른 방이나 풍경 속에 있었고 순조롭게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 다행이다. 요른은 생각했다.

엘데를 이용한 치료의 임상 사례를 담은 책에 따르자면, 피험자가 환각에 저항하려 애쓰면 오히려 한 장면 속에만 갇혀 버리는 등 부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는 진행이 되지 않으며 폐쇄감으로 인한 공황 발작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막시는 닥친 환각을 다 그대로 받아들였고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종국에는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3)

그 마지막 심연에서부터도 막시가 어떻게든 자력으로 빠져나오게끔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혼자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 후 결국 답을 찾게끔. 책에도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요른은 그러기 싫었다.

막시밀리안의 자기 자신이라는 게 뭔가. 어차피 요른이 반은 섞여 있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막시가 지금 그 골목길에 있는 거라면 더욱더 그렇다. 우리는 그때부터 어차피 늘 둘로서의 하나였으니 지금도 둘이서 같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 사실은 내가. 요른은 미간을 가볍게 찡그렸다.

침대 곁 의자에 앉아, 관조적인 진행자로서 상대와 일 피트 남짓 거리를 둔 채 손만 잡아 주고 있던 요른은 일어나서 좀 더 바싹 다가갔고,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무릎을 올려놓고 체중을 실었다.

“막시밀리안.”

그리고 조금씩 속삭여 이름을 부르다가 마침내 전송 마법으로 귓속을 직접 파고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올라오라, 내게로 오라고.

“……등신 같은 게 진짜.”

그 와중에 욕도 같이 나와 버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 중에도 제일 등신 같은 쪽으로만 인간적인 새끼. 아주 피곤해 죽겠다. 요른은 상대의 머리통을 세 대쯤 쥐어박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대신 입술에 키스했다.

살갗만 아슬아슬하게 압박하는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막시밀리안은 중독자 특유의, 사지 근육이 간헐적으로 강직되는 듯한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상대의 눈동자 한가운데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른이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지금 어디야?”

“너한테.”

튀어나온 답은 발음이 어눌했고 어법상으로도 어긋났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어느새 요른의 한쪽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요른은 반대쪽 손으로 그의 귓가와 목덜미를 마저 쓸며 전했다.

“그래. 올라와.”

괴물은 함정 속에서 시커먼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은 까마득한 입구를 올려다보다가 텅 빈 벽을 발톱으로 덤벙덤벙 짚어서 금세 기어올랐다. 그리고 네 발로 뛰어 정원을 가로질러 정자 속 벤치로 돌아왔지만, 거기엔 희끄무레한 향기만 남아 있었다.

잔향에 코와 입술이 닿자 털과 허물 일부가 벗겨져 나갔다. 눈 아래부터 턱까지만은 제법 인간처럼 보이게 된 검은 괴물은 다시 앞뒷발을 겅중겅중 놀려 성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성문을 열자마자 그는 사방이 온통 돌로 된 방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문밖에서 분명 마르티넷의 파찰음과 어린애 비명을 들었지만 들어와 보니 체벌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가 닿았던 귀부터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채 머리를 쿵쿵 부딪쳐 다음 방의 문을 열자 복도가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완만하게 위쪽으로 뻗어나갔다.

마도 학원 강의동의 복도를 기어오르다가 괴물은 어떤 얼룩을 밟았다. 누군가 다리를 걸려 넘어지면서 가방 속 잉크병이 깨져 새어 나온 흔적이었는데, 그 푸른색에 닿은 순간 괴물의 뒷다리가 기사 생도복을 입은 소년의 다리처럼 변해 버렸다. 두 다리로 걸어서 모퉁이를 돌자 지하 실험실 한가운데에 텅 빈 의자가 놓여 있었으며 무심코 그 가죽끈들을 건드리자 앞다리가 팔과 손으로 변했다.

괴물은 의자 위로 올라가 손으로 다락문을 열었다. 실험실 천장은 진창처럼 변한 복도로 이어졌고 그 바닥에는 말채찍 소리,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메아리처럼 남아 있었다. 징그러운 새끼가.

막시밀리안은 숨을 헉 몰아쉬었다. 메아리를 삼키자 입과 목 안에 사람의 혀와 성대가 지어졌던 탓이다. 그는 거의 온전히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 채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가파르게 경사지는 통로와 기나긴 계단을 거쳐 그는 여러 방을 더 지나왔다. 황국의 회의장, 간부들이 둘러앉았던 자리, 그 자신의 핏자국과 그 핏자국 사이로 대검이 놓였던 흔적. 막시밀리안은 서둘러 달렸다. 그 흔적을 남긴 자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앞서가서 아직도 한참은 더 높은 미래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리다 보니 울컥 눈물이 솟았고 마음속에 거의 확신과도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요른도 아까 이렇게 와 주었던 거다.

자신은 지금 과거에서부터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요른은 아까 그를 데리러 미래에서부터 내려왔었다. 탑의 청량한 공기를 머리채에 품고 내려와, 기억을 마주하기 두려워 비겁하게 타인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자에게 맞춰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얼마나 먼 미래에서부터 와 주었던 걸까. 그렇게 높이 멀어진 후에도 이 어두운 방들을 어느 하나 잊지 않고서, 미로 속에 온통 진동하는 현들의 그물을 깔아 놓은 채.

너는 늘 그렇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과거를 남김없이 들여다보고 명민하게 듣는다. 마치 항상 그런 탑만을 지으며 올라가 오직 거기에서부터만 다시 내려다보는 듯이. 지상과 지하의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굽어보는 고결한 전망대를.

신의 눈동자를 가진 자.

“나도 거기까지 갈게.”

꼭 따라갈게. 어떻게든. 다짐하며 막시밀리안은 사람의 것에 불과한 무거운 다리를 놀려 요른이 둘의 성안에 남겨 놓은 흔적들을 계속 따라갔다.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 계단참을 넘어서서야 그는 마침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아드리안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창틀 안에 달이 떠올라 백금발을 새하얗게 달궈낸 순간을 노려 이름을 불렀다.

“요른.”

요른이 돌아보고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품었다.

“잘 왔어.”

그리고 막시밀리안이 이미 덥석 잡아 버린 손을 제 쪽에서도 힘을 주어 마주 잡고 끌어당겼다.

“여기서부터는 나랑 같이 가. 내 탑으로 올라가서, 딱 거기서부터만 둘이 같이 내려다보는 거야.”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요른은 얼른 몇 마디 덧붙였다.

막시밀리안은 깜짝 놀랐다. 그건 그가 생각했던 탑과는 전혀 달랐다.

자신은 결코 그런 자리에 오를 권리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요른이 그런 탑을 설계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필 그런 장소를 마련해 두고 자신을 기다려 주리라고는.

약속이 은실로 짠 자수처럼 성내의 허공에 수놓여 반짝거렸지만 막시밀리안은 그 한 오라기도 믿지 않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아마 이곳은 정말로 막시 자신의 환상 속의 성이고 그리하여 자신은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을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요른의 목소리로 재생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차마 원하지는 못했으되 사실은 늘 듣고 싶었던 비열한 말을.

고성의 침실 안, 요른은 반려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몸 위에 앉아 있었다.

상대의 허벅지와 배 사이쯤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은 채 방금 입 밖에 냈던 말을 돌이키며 요른은 자신의 입매와 눈가가 불명확하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스스로 더듬어 봐도 알 수 없을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요른은 다리 사이를 적시는 열감에 집중해 그 위로 가만가만 골반을 움직였다.

막시밀리안의 성기는 아까부터 평복 바지 속에서 눈에 띄게 부어 있었다. 환각 속에서 성행위를 한 탓이리라. 천을 사이에 두고 제 성기와 회음부를 상대의 앞섶에 문지르듯 앞뒤로 움직이다가 요른은 가벼운 숨을 토해 냈다.

“막시.”

아직 깨워내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꿈에 숨을 불어넣어 부풀리듯 조심스러운 음색으로만 재차 물었다.

“막시, 지금 어디야?”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막시밀리안은 손을 뻗어 반려의 허리께를 매만지면서 서서히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근육이 강직되어 뻣뻣한 두 손이 끈질기게 벨트가 있는 곳을 찾으려 드는 걸 느끼며 요른은 웃음을 참았다. 파자마 차림이라 벨트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요른은 스스로 바지와 속옷을 벗어 침대 밑으로 집어 던지고는 상대의 손을 제 앞쪽으로 이끌었고, 굳은살로 딱딱한 손바닥이 금방 여린 곳을 까슬까슬하게 파고들자 막시의 바지 단추를 풀고 허벅지 밑으로 끌어내렸다.

신혼의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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