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음 날 밤,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각, 막시밀리안은 소스라치듯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창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소리를 들었던 탓이다. 일어나, 막시.
―일어나, 날 찾으러 와.
멀리서부터 전송 마법으로 날카롭게 전해 온 듯, 오히려 곁에서 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일 때보다 더 선명한 음색. 막시밀리안은 옆자리부터 살폈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전에 떠난 듯 시트도 차가웠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도 했다.
‘뭐지.’
그는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오늘 종일 먹은 거라고는 맑은 스프와 요른이 주었던 마들렌 비슷한 과자 한 조각밖에 없는데도 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요른이 기껏 먹여 준 거니까 토할 수는 없었다.
요즘 너 너무 잘 못 먹잖아. 기력 보충하려면 차라리 아주 단 걸 조금만 먹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자, 이거 한 조각만, 응. 그렇게 요른은 부엌에서 구워온 손바닥 반만 한 마들렌 하나를 손가락 사이로 집어, 다시 한입 크기로 서너 조각으로 떼어 차례차례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로 토해 내서는 안 된다.
그래, 어제저녁에 요른이 먹여 줬었다. 막시밀리안은 되새겼다. 그러니까 요른은 이 성안에 있다.
여덟 살 때 그 하얀 새를 골목길에서 만나 붙들었으며 스물여섯 살 때 파국을 맞았다. 그리고 회귀해서 이번 생에는 인간이 된 그와 혼인했다.
둘은 2년간 길드원으로 떠돌며 지내다가 고성의 정식 주인이 되었고, 금색별 신분증 소유자로서의 특권을 이용해서 연차를 말도 안 되게 늘리는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해서는 년당 두 달 은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특별 수당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해서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었다.
어제저녁에 그가 바로 이 성의 부엌에서 만들어 준 계피 마들렌을 먹었고 그 성분이 아직도 핏속에 돌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기억이 다 맞다.
아니, 그가 준 마들렌의 성분이 아직도 핏속에 돌고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 기억은 다 가짜일 수도 있다.
막시밀리안은 움츠린 채 느릿느릿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금이라도 동작이 흐트러지면 행로가 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의 단단하던 현실과는 달리 지금 방 안은 온통 구멍이 뚫려 있는 듯했다. 벽도 허공도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아니, 손가락 하나만 잘못 뻗어도,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빨려들어 버릴 통로들로 가득 찬 해면체처럼.
‘마약인가.’
뇌까리며 그는 요른이 그간 성 부지에서 뭘 찾고 있었던 건지 새삼 돌이켰다. 역시 엘데였나 보다.
막시가 성을 매입했다는 걸 알게 된 직후, 요른은 흥분해서 좁은 호텔 방 안을 몇 바퀴나 뱅뱅 돌다시피 하면서 자신이 정착하면 하고 싶었던 일들에 대한 얘기를 쏟아 놓았다. 와중에 그는 어떤 약초, 대륙에서는 한 번도 재배와 판매, 유통이 허락되어 본 적이 없는 양치식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판매는 허락된 적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암암리에 소비는 되는, 가루를 내어 코로 빨아들이거나 액체로 만들어 삼키거나 과자로 만들어서 먹어도 좋다는 그 잎사귀.
[소비를 금지하는 법령은 없으니까, 어디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걸 꺾어다가 약을 만들면 불법도 아니잖아.]
조잘대며 요른은 식물학 지도 위에서 성의 위치를 검지 끝으로 쿡쿡 찔러 댔다. 대륙 남단의 수풀 지대에 잘 자라는 풀이니, 성 근처에도 분명 있지 않겠냐는 거다.
[그걸로 뭘 하게?]
막시밀리안이 놀라서 묻자 요른은 당시 눈을 반짝이며 답했었다.
[놀려고.]
[뭐 하고 놀게? 엘데는 황국에서만이 아니라 천제국에서도 유통이 금지된 식물이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응응. 그래그래.]
요른은 막시가 재미없는 소리를 할 때면 늘 그렇듯 엄지와 검지로 상대의 입을 주둥이처럼 모아 잡아 말을 막아 버렸다.
[정부가 너무 융통성이 없는 거야. 그래 봤자 그 자체로 피우는 거 정도는 신경 안정제에 가까운걸. 기술이 있는 사람이 화학적으로 이거저거 섞어서 합성 약물로 만들 때 위험해지는 거지. 나라면 그 풀을 써서 진짜 재밌는 물건을 만들 수 있어. 환각 작용을 훨씬 더 강화해서…… 아, 안심해! 다른 사람한테는 안 써.]
[그럼 누구한테 쓰려고.]
막시가 답을 짐작하면서도 묻자 요른은 역시나 눈이 다 감기도록 방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막 샬로테의 편지를 받고 요른이 잔뜩 들떠있었던 밤 딱 한 번만 나왔던 이야기다. 이주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준비를 시작한 후에는 오히려 진정하고 약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린 듯이 보여서 안심했는데, 성에 오자마자 탐험한답시고 수풀을 다 뒤지며 산책을 다니길래 다시금 불길한 감이 들긴 했었다.
‘마들렌에 섞었구나.’
막시밀리안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요른을 찾아야 한다.
요른은 성 내에도 전송 마법진을 여기저기 붙이고, 오행 술법의 조각상을 그 사이마다 두어 감시망을 그물처럼 깔아 두었다. 상대가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술사가 인만 맺으면 금방 파악할 수 있게끔. 그러니 막시밀리안이 움직이면 금방 알아채고는 적당히 피하다가 제가 잡히고 싶을 때면 알아서 잡혀 주리라.
내게 약을 먹여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숨바꼭질? 요른이 가끔 청해 오곤 하는 그 다소 거친 침실 놀이의 일종인 걸까. 잡혀서…….
떠오른 표현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잡혀서 당하고 싶기라도 한 걸까.
숨이 막혔다. 그는 겨우 한 발짝씩 내디뎌 침실 한쪽의 옷걸이 쪽으로 갔고, 석조 벽들의 찬 기운을 막으려 재킷 하나를 위에 걸치고 실내용 구두를 신었다. 그 동작만으로도 시야가 깨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제부터는 성내를 헤매며 요른을 찾아내야 한다. 반려가 걸어 온 놀이에 응해 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복도로 나가는 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자 발밑이 흔들렸다. 깨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바닥이 무너지려는 듯했다. 전생부터 수백 번도 더 꾸었던 꿈. 회의장 한가운데, 성검의 재료가 요른의 몸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시야가 녹아내리며 발밑이 사라져 버리던 감각.
그 바닥없는 꿈에 일주일 전부터 더 깊은 지층 하나가 더 겹쳐졌다. 증상이 아니라 최초의 원인이 된 부분을 파고들 듯이 악몽은 훨씬 더 오래된 과거를 향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함정에 빠뜨렸다.
추락시켰다.
포획했다.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요른이 먹여 준 마들렌은 토해 내면 안 된다. 그 가느다랗고 투명하리만치 나긋한 손가락이, 가장자리만 살굿빛으로 달아오른 수정 같은 손톱이 입술에 와 닿았었다. 한 조각씩 떼어서 내미는 동작에 물들어 하얀 속눈썹이 내려앉은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까 토해 내면 안 된다.
막시밀리안은 위 부근을 손으로 누른 채 복도를 곧게 따라 걸었다. 그러나 걷는 도중에도 풍경이 몇십 번은 바뀌었고 그는 곧 자신이 어디에, 혹은 어느 시절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요른이 장담했던 대로네. 환각 작용이 엄청나.’
생각하며 막시밀리안은 눈앞에 손을 들어 거리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손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다른 사람의 손, 훨씬 더 어린 소년의 손으로 모습을 바꾸어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눈을 감았다 떴지만 그러자 오히려 고성의 복도가 다 프란첸 본성의 복도로 바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십 년 전, 유디트가 아이를 두 번째로 유산했던 때쯤의 모습 그대로.
‘작동하는 방식은 알겠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는 게 머릿속에 상기시키는 장면이 더 짙다.
현재가 불러낸 기억이 현재를 덮어 버린다.
‘기억이라고 해 봤자 다 직접 겪었던 일만도 아니지만.’
되뇌며 막시밀리안은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더 뒤로 물러나듯, 자기 자신도 몰랐던 추억 속으로 깊이 빠져들 듯이 되어 버리곤 했지만.
기억 중에는 그 자신이 살면서 직접 겪었던 일도 있었으나 글월로만 접했던 장면도 있었다. 역사서, 편지, 논문으로만 접했던 사건이나 소재들, 회화며 조각품에서 받았던 인상, 그리고 소설로 읽으며 공상했던 것마저 모두 머릿속에 차곡차곡 기억으로 쌓여 서로 엉망으로 엉킨 채였다.
그런 면에서 기억은 상상과 엄밀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때 꾸었던 꿈이나, 풍문을 전해 듣고 받았던 인상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기억이 되어 버리곤 하니까.
‘이게 그리웠어, 요른?’
막시밀리안은 이 비슷한 감각을 알고 있기는 했다. 요른이 어릴 적 성내 공간을 마구 섞어 놓던 것과 비슷하다. 분명 살롱으로 들어갔는데 방 반쪽은 도서관으로 변해 있었고, 도서관 창문을 열고 나오면 창고였으며 창고에서 술통을 열면 그 안은 남의 침실이곤 했다.
이제 요른 자신은 그런 권능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인 내게 약을 먹인 걸까, 막시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의 중심을 이루는 줄기 하나가 올이 스르륵 풀려 버리려는 걸 애써 다잡았다.
‘안 돼.’
막시밀리안은 제 양손과 옷매무새를 내려다보았다. 환각이 성뿐만이 아니라 막시 자신까지 좀먹어 가고 있었다. 생김새가 바뀌고 인격마저도 달라져 간다. 그는 자신이 누구로 변해 가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돼. 이러다가는…….’
이 성안에는 막시가 도저히 기억해 내고 싶지도, 문을 열고 싶지도 않은 방이 있다. 그런 방들은 아주 많지만, 개중에서도 지금은 정말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이 있다.
‘정신을 유지하자. 나는 막시밀리안이야. 그건 잊지 말자.’
막시밀리안은 새삼 손으로 명치께를 억눌렀다. 속이 뒤틀렸고 머리가 쿵쿵 울렸다. 일주일 내내 거의 먹은 게 없는 몸에 버터와 설탕에 잘 섞은 약물이 들어온지라, 뇌가 오랜만에 들어온 소중한 영양분인 줄 알고 허겁지겁 먹어 치워 버린 것이다. 버티기가 어려웠다.
‘안…….’
머릿속이 마치 둥그런 쟁반처럼 반 바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고, 뇌가 덴 듯이 점멸하더니 훅 꺼져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불이 들어왔다.
꿈속에서 사람은 가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소설이나 연극 속의 인물이 되기도, 이야기로만 전해 듣고 상상했던 타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채로야 비로소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를 색채와 질감을 바꿔 기억해 내고 똑바로 마주한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돌이킬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어떤 것들을.
‘안 돼.’
그는 생각하며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사냥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을.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식을 마쳤으면 신방에 들어야지.”
별장의 주인인 티베르 투트 푀르데는 장갑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 * *
아르테 왕국의 자작, 어제 갓 혼례를 올린 푀르데 가문의 티베르는 복도를 걸으며 부러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는 척했다. 그의 금발 반려는 장난기가 많아 늘 이런 식이다. 신혼 밤에조차도 한 손에 잡혀 주지를 않고, 사라져 숨바꼭질을 하려 들고.
그래도 소용없다. 티베르는 조그맣게 입 밖으로 이름을 내어 불렀다.
“아드리안?”
허공에 장치된 보이지 않는 실들이 저절로 조율되듯 진동했다.
“아드리안.”
9월의 초, 그러나 조금씩 목청을 높여 부르자 성안의 공기가 봄의 선율처럼 부풀어 올라 남실거렸다. 멀찍이 숨어 있는 누군가를 불러세우고 또 물결에 실어 보내오듯이.
바보 아드리안. 티베르는 웃어 버렸다. 그 탁월한 마법사는 성의 벽도 바닥도 공중도 온통 전송 마법의 그물로 덮어씌워 놓다시피 했다. 누군가 성안에서 제 이름을 속삭이듯이만 불러도 얼른 듣고서 그쪽으로 걸음해 올 수 있게끔. 그래 놓고 숨바꼭질을 해 봤자다.
아니, 이상하잖아. 제 반려가 실제로 이쪽으로 종종걸음쳐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면서도 티베르는 생각했다. 전송 마법진을 이용한 그물은 보통 상대를 피하려는 목적 아닌가? 어째서 마법을 건 술사 자신이 마치 덫에 걸린 듯 이쪽으로 와 준단 말인가.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지만 어쨌거나 아드리안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제 반려의 품에 안겨 주었고, 티베르도 그 등을 마주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복도의 창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을 거의 새하얗게 반사하는 백금발을.
탑 쪽에서부터 왔구나. 티베르는 눈치챘다. 고도가 높은 곳 특유의 희박한 향이 제 짝의 머리칼에 남아 있었던 탓이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이 성에 탑이 있었던가?
이 조그만 별장용 성은 종탑이나 망루가 딸려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드리안이 순간 품에 더 바짝 붙었다가 고개마저 들어 눈을 마주 보는 바람에 생각이 흩어져 버렸다. 티베르는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
나긋한 손가락들을 깍지껴 붙잡은 채 티베르는 복도 한쪽 벽을 따라 걸었고 아드리안이 비스듬히 뒤에서 따랐다. 신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둘의 걸음을 따라 복도가 변해 갔고 손의 감촉도 달라졌다. 티베르는 왜 걸을수록 제 손에 잡힌 반려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는지, 손가락들이 뼈만 남은 듯 말라가는지 의뭉스러웠다. 창밖에서도 풍경이 변해 갔다.
전쟁 중이었지.
황혼인지 핏빛인지 모를 서녘을 배경으로 병사들의 시체더미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한 풍광을 내다보며 티베르는 문득 기억해냈다. 자신들은 전 대륙이 전쟁에 휩쓸린 시대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는 걸.
전쟁이 심화되자 중부의 티베르 투트 푀르데 자작도 황국으로 불려가 성기사로 임했다. 그 탓에 원래의 시골 영지에서 사귀었던 연인인 아드리안과는 거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최근에야 겨우 잠시나마 휴가를 내어 혼인식을 치르고 신혼을 보내기 위해 이 고성 별장으로 여행을 온 것이다.
그러나 돌이키다가 티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은 은애로우신 성황의 치세 아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전쟁이란 말인가? 성황 치세에 전쟁 따위가 어떻게 애초에 발생할 수나 있나. 게다가 기사 작위는 받았어도 평생 사실상 문관에 가깝게 살았던 내가, 어떻게 황국 수도에까지 불려가 전장 한가운데에서 그런 대검을 휘둘렀을 수가 있다는 건가?
시술을 받았던 덕분이었어. 그는 곧 자문자답하듯 기억해 냈다.
황국이 위기에 몰린 나머지 그와 같은 문관마저도 합성 강화병이 되는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지하 실험실의 의자에 묶인 채 마물 가루며 녹인 용액을 피부의 상처, 눈과 코로 공급받았던 감각이 생생했다.
고성 복도, 티베르는 아드리안의 왼손을 제 오른손으로 잡고 끌고 가다가 문득 뒤돌아보았고 제 손이 시야에 들어온 덕분에 깨달았다. 그래. 그리고 곧 잠식되기 시작했었지.
강화병이 된 덕분에 티베르는 한동안은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잠식이 시작되면서 그는 검을 잡았던 오른손부터 천천히 마물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몸에 워낙 여러 조각이 섞였던 탓에, 보통 마물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강력하고 말할 수 없이 흉측한 합성 마물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더라? 티베르는 시커먼 맹수처럼 발톱이 자라 가는 손으로 아드리안의 손을 끌며 채 생각했다. 아드리안의 깡마른 손등이 푹 파여 여기저기 피가 배어 나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잠식 때문에 강제로 휴가를 받았던가? 그랬나 보다. 어차피 은퇴해야 할 겸, 완전히 마물이 되어 버리기 전에 혼인하라고 성황께서 허가를 내어 주셨던 거 같다. 신혼까지는 치러 한을 푼 다음 명예롭게 자살하라고.
그랬구나. 티베르는 납득하고는 제 반려를 이끌며 계속 복도를 따라 걸었다.
둘은 몹시도 오래 걸었다. 티베르는 경사진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짚으며 한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신방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아래로 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걷고 또 걷자 복도 양옆으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과 창과 문들이 뚫려 나왔고 창밖 풍광도 해가 지고 또다시 뜨듯이 변해 갔다. 무엇보다 아드리안의 모습도 변했다.
그는 꼬챙이처럼 바싹 마르고, 머리털이 새하얗게 세고 어깨가 비굴하게 굽어지며 허리마저 구부정해졌다. 부여잡힌 손의 고통이 그의 몸은 물론 정신까지도 순식간에 망가뜨린 듯이. 티베르는 가슴이 아파 말을 걸었다.
“아드리안.”
그러나 마물로 변해 가는 목에서 그 이름은 으르렁거림처럼만 튀어나왔기에 상대는 겁에 질린 듯 더욱더 어깨를 움츠렸다.
“아드리안…….”
티베르는 소리를 죽여 보다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 음성은 말 못 할 폭언으로 변해 상대를 후려쳤고 아드리안의 뺨에는 실제로 채찍으로 후려쳐진 듯한 자국이 남았다. 그 충격 때문인지 아드리안이 무릎을 꿇고 찬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티베르의 손만은 놓지 않은 채였다. 티베르는 반려의 엉킨 머리칼을 쳐다보다가 자신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며,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복도가 어떤 황폐한 진창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땅은 끈적거렸고 티베르는 허리까지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를 일으켜 주려다가 죗값으로 얼굴에 채찍을 맞은 것이다.
아드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티베르도 덕분에 진창에서 빠져나와 계속 걷기 시작했다. 티베르는 어쩔 줄 모르고 수도 없이 뒤를 돌아보면서 제 손안에 잡힌 흰 손을 가만가만 마주 쓰다듬어 주려 애썼지만, 갈퀴 같은 발톱이며 뻣뻣한 털이 살점을 뚫어 깊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었다.
티베르는 걸음을 늦추고는 아직 멀쩡한 다른 쪽 팔을 뻗어 아드리안의 어깨를 쓸어 주려 했다. 그러나 티베르의 눈앞에서 그 손길은 주먹질로 변해 상대의 배를 후려갈겼고 그로쉔 마도 학원 생도복을 입은 열댓 살의 아드리안은 또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지듯 넘어졌다.
경련을 일으키고 기침하면서도 백발의 학원생은 금방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재킷에는 온통 밟힌 자국과 흙얼룩이 남은 채.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보고 티베르는 그의 팔에, 그리고 생도복 아래로도 온몸에 불그죽죽한 흉터가 새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티베르는 급한 마음에 아드리안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걸었다. 티베르의 오른팔은 이제 완전히 괴물의 형상으로 변했기에 아드리안의 손은 그 털에 찔려 보랏빛으로 붓고 발톱에 관통된 부분이 썩어 손가락이 거의 끊겨 나갈 지경이 되었다.
도망치듯 복도를 헤매고 또 헤맨 끝에 마침내 둘은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티베르는 반려가 편히 쉴 수 있게끔 방 한가운데의 튼튼한 의자에 그를 앉히고 등허리에 쿠션을 대어 주었다. 그러자 쿠션이 개화하듯 올올이 풀어지더니 아드리안의 사지를 가죽끈처럼 휘감아 의자에 고정시켜 버렸다.
티베르가 깜짝 놀라 아드리안의 어깨와 가슴, 허벅지와 무릎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끈을 풀어 주려 들자 그 손길 그대로 톱으로 울퉁불퉁하게 그은 듯한 상처가 열리며 피가 터져 나왔다. 아드리안의 몸에 원래 새겨져 있던 흉터와 일치하는 상처였다.
티베르는 깜짝 놀라 제 시커먼 손들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곳이 어느 연구소의 지하 실험실이라는 걸 깨닫고는 아드리안을 차라리 의자째로 들어 도망 나왔다.
분명 복도로 통하던 문을 열었으나 둘이 도달한 곳은 어느 성의 석조 지하실이었다. 그 한쪽 벽에 의자를 기대어 놓고 나서야 티베르는 마침내 아드리안을 묶은 끈을 풀어 줄 수 있었다. 그러자 그가 풀어내는 동작을 따라 가죽끈이 아드리안의 벗은 등을 마구 후려쳤다. 어린 아드리안을 말채찍으로 열세 대, 마르티넷으로 서른 대를 때린 후에야 티베르는 끈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미안해 견딜 수가 없어서 티베르는 아드리안의 상처투성이 몸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의 강력한 양팔이 조여드는 대로 여린 생물의 뼈가 우득우득 부서져 나가면서 전신의 형상 자체가 변했고 마침내 어깨뼈 어느 관절이 완전히 망가지더니 날개마저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봄날, 둘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정원 한가운데의 석조 정자 벤치에 누워 있었다. 아드리안이 티베르의 가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뭐라고 물었고 티베르는 제 입 속에서 혀를 움직여 답했다. 당연하지. 날아도 돼.
응, 손잡아 줘. 같이 날아서 성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마물화된 목을 통해 그 음성은 전혀 다른 색과 의미를 품고 허공으로 튀어나와 으르렁거렸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사람이 타고난 본분대로 걸어야지, 왜 날아? 너, 그런 짓을 했다간…….
제 협박을 들으며 티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 동작 때문에 아드리안은 벤치에서 밀려 떨어져 까마득한 함정에 빠져 버렸다.
“아드리안!”
티베르는 외쳤으나 외침은 전혀 다른 포효가 되어 천둥 쳤다. 내 거야!
“아드리안……!”
아드리안을 구하려고 그는 손을 뻗으며 함정 속으로 함께 떨어졌지만, 함정 속의 어둠은 사방에서 그의 모습도 목소리도 전혀 다르게 반사해냈다. 내 거야! 그 새를 잡으려고 함정을 설치했던 건 바로 티베르였고, 이제 그는 덫에 걸린 것을 포획하려고 함정 속으로 직접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곳에 묶어 가둬 두고는 밤낮으로 제 것으로만 삼으려고.
신방에 도착했다.
아드리안은 함정의 바닥에 거꾸러져 있었다. 티베르는 그의 부러진 사지를 밧줄로 단단히 묶고, 미리 장치해 두었던 고리에 걸어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동작 때문에 지진이 일어 바닥이 더 푹 꺼진 바람에 둘은 더욱더 컴컴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렸다.
낙하하는 동안 티베르는 반려를 지키려는 듯이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긴 가시처럼 일어선 가슴과 배, 팔목의 털로, 이미 사지가 다 뒤틀려 묶여있는 새하얀 몸의 살점을 엉망으로 꿰뚫어서 제 몸과 아예 하나로 엮어 버렸다.
둘은 곧 눅눅하고 물컹한 바닥에 도달해 파묻혔다. 피를 토하며 컥컥대는 생물의 양 날개를 한 손에 하나씩 잡아 꺾어 내며 거대한 악마 같은 괴수가 된 티베르는 짖어 댔다. 행복하게 해 줄게.
이렇게, 이렇게. 그는 상대의 어깨깃과 덮깃을 모두 솎아 내며 전했다. 그 목소리만은 티베르의 심장 속에서나 몸 밖의 어둠 속에서나 똑같이 지독히도 감미롭고 순진했기에, 괴물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마저 제대로 전했다. 꼭 행복하게 해 줄게, 요른.
“막시밀리안.”
요른도 마침내 차갑게 식어 가는 입술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막시밀리안은 앞발을 올려 요른의 뺨을 발톱으로 긋고 또 그으며 쓰다듬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에서만은 그는 다른 자일 수가 없었다. 이곳은 그의 생일이었으니까. 그가 악마가 된 탄생일, 새의 날개를 꺾고 요른의 막시밀리안으로 태어난 장소.
응, 요른. 괴수가 으르렁대며 하얀 새에게 답했다.
이리 와. 내 성으로 와. 나랑 있으면 행복하게 해 줄게. 어딜 가는 것보다도 더, 네가 무엇이 되는 것보다도 더.
알지? 둘이 서로 좋아하면 둘 다 아주 행복해져. 요른, 우리 단둘이서만…… 달콤하게 컹컹대며 괴물은 미세한 쇳조각들을 아교로 뭉쳐서 붙여 놓은 듯한 입술로 상대의 입술에 키스했다. 요른의 입술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자 괴물은 그의 귓가에 입 맞추며 긴 혀끝을 목에 박아넣고 피를 빨았다.
신혼의 밤이 시작되었다.
괴물은 요른의 탁한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의 피에 푹 젖은 바지를 벗겼고, 제 사타구니 한가운데에 자라난 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더없이 세심하고 완만한 동작이었기에 성기의 요철이 몹시도 느리고 고통스럽게 상대의 입구와 뱃속을 찢어 놓았다.
그래도 괴물은 동작을 멈추지도, 상대의 몸을 붙든 손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붉게 질척이는 안을 헤집으며 절정에 달해 갔다.
새는 안팎으로 짓찢기고 부러진 채 괴물이 몸을 흔들 때마다 피만 토해 냈다. 그러나 괴물은 자신이 멈추지 않을 걸 알았다. 이대로 한번 절정에 이르러봤자 그는 또다시 요른을 가질 것이며, 그러느라 더욱더 타락해서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도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 그곳에서 다시 또 요른을 가질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모든 것을 후회했다.
그는 어린 시절 요른에게 날지 말라고 했던 것도, 요른을 봉인했던 것도, 고립시키고 통제하며 남의 손까지 빌려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던 것도, 성검이 되는 운명을 맞게 했던 것도 후회했다. 그는 요른이 자신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다른 모든 순간을 미치도록 후회했고 할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으며 실제로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분명 되돌려 놓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후회할 수 없었다.
그를 처음으로 손에 넣었던 장소.
여기다. 요른의 피투성이 몸을 제 앞에 네발로 엎드리게 한 후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며 막시밀리안은 되뇌었다. 요른은 엎드린 채 고통 때문에 진창에 이마를 박았고 그 바람에 둘은 더 까마득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보이지 않는 가시덤불이 검은 바닥의 속살로부터 기어올라 와 요른의 양팔을 묶고 재갈처럼 입마저 틀어막았다. 덕분에 막시밀리안은 그 미동도 못 하는 몸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다. 여기다.
우리 둘의 기억의 마지막 고향은 여기다.
그로쉔 수도의 어두운 골목길, 내가 덫을 놓았고 네가 거기에 빠져들었다. 너는 날개를 접고 내 손을 잡았고 나와 함께 내 성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너는 조각나 성검이 되어 죽었고 이제는 평생 얼굴과 몸을 가리고 살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나와 단둘이서만 시골의 고성에나 갇혀 있어야 한다. 죽어 회귀하기까지 했는데도 이게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길이다. 한 번 더, 아니, 수십 번 더 회귀한다 해도 더 나은 길은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와 나는 처음부터 만나지 않는 게 좋았다. 나는 후회하려면 다름 아닌 바로 이 순간부터 후회해야 한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전혀 후회할 수가 없다.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여기 이 순간만은.
그러니 어디로 나아가든 마찬가지다. 우리의 성은 영원히 이 심연을 내려다보며 지어진다. 내가 여덟 살 때 한 마리 새를 잡아 빠뜨렸던 덫 위에. 내가 지상에서 하는 모든 짓은 위선이다. 얼마나 내가 네 웃는 얼굴을 보려 노력하든,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을 보태든, 나는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된 악은 후회하지조차 못한다.
나의 요른.
거슬러 온 생애의 어느 순간 속에서보다 훨씬 더 끔찍한, 마침내 완벽한 악마의 모습이 된 막시밀리안이 상대의 허리를 으스러뜨리듯 붙든 채 마침내 안에 사정했다. 그는 성기를 한번 빼내었지만 요른을 똑바로 눕힌 후 곧바로 다시 입구를 헤집고 들어갔다. 하얀 새는 양 손목이 덤불에 감겨 활짝 열린 채 숨조차 고르지 못하고 그를 맞아들였고, 멍으로 얼룩진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채 겨우 속삭였다.
“막시밀리안.”
괴물은 눈을 깜박거렸다. 착각인가?
“막시.”
그러나 목소리가 다시금 귓속을 꿰뚫었고 막시밀리안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착각이 아니다. 요른의 음성은 분명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얼굴은 분명 아래에 있는데도.
괴물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함정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입구도 형형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청은색 눈동자.
어느새 아침이 움터난 지상, 겨울 하늘이 그대로 보석으로 굳은 듯한 눈동자가 막시밀리안을 저 먼 곳으로부터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아래를 헷갈렸구나. 막시밀리안은 멍한 가운데에도 속으로 뇌까렸다.
기준이 틀렸어. 요른이 있는 쪽이 항상 위인데. 하얀 마법사가 혀를 쯧 찼다.
“등신 같은 게 진짜. 야, 올라와.”
그가 손을 뻗은 채 채근했다.
막시밀리안은 망설였다. 그러나 음성이 귓속을 거의 예리한 얼음송곳으로 찌르듯이 파고들어 왔다.
“행복하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