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새벽의 밤) (26/30)

1.

요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덩이의 입구는 좁지 않았다. 웬만한 우물이나 짐승용 함정보다 지름이 배는 넓으리라. 요른은 양팔을 활짝 벌린 채로도 손끝 하나 아무 걸릴 데도 없이 삼켜져 버렸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도 워낙 깊이 떨어져 내린 탓에, 바닥에서 올려다보니 이제 입구는 우물처럼 좁게 보였다. 그래서 마치 그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초점을 좁혀 오히려 제 쪽에서 요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채로.

괜찮아. 요른은 왼팔을 움직여 보려 애쓰며 생각했다. 하지만 팔꿈치가 으깨지다시피 한 탓에 부유 술법의 인을 맺을 수가 없었다.

정령 마법은 직접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외부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몇 가지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터였다. 불의 정령께 청해 빛무리를 높이 띄운다거나. 그러나 혀를 깨물어 버린 터라 주문을 외기도 힘들었다.

괜찮아. 속삭이는 동안 검은 동공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구덩이의 맨 위에서부터 허공을 관통하고 요른의 눈까지 꿰뚫어 머릿속 더, 더 깊은 심연까지.

그러자 어떤 기억이 여전히 두텁게 가려진 채 혼 속에서 휘영청 살아나왔다.

구덩이에 빠진 지 반나절, 어쩌면 그 이상이 지난 후에야 요른은 처음으로 외롭고 억울해졌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빨리 와 주면 좋겠다. 바보 막시.

* * *

“그만 좀 따라다녀.”

그러나 일주일 후, 갓 깁스를 푼 팔을 만지작거리며 요른은 나무 뒤의 인물에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왼팔 깁스를 푼 기념으로 요른은 성 주변 부지의 북벽 근처를 혼자 산책하고 있던 터였다. 마스크나 후드도 없이 얼굴을 환히 드러내고 백발도 다 늘어뜨린 채로.

샬로테의 시골 영지 중에서도 이 고성 주변은 말로 한 시간쯤 떨어진 촌락 하나를 제하면 온통 숲과 황무지뿐으로, 거의 아무도 지나다닐 일이 없다. 거기에 더해 막시밀리안이 부지 주변에 엄중하게 담을 쌓고 사적 소유지임을 선포하는 경고문을 걸어 놓은 건 물론 문지기 겸 산지기까지 고용해 둔 덕에, 이 안에서라면 그는 타인을 각성시킬 걱정 없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돌아다니다가 요른은 일주일 전 바로 요 근처에서 한번 구덩이에 빠져 버리긴 했었다. 하지만 구출도 되었고 상처도 다 나았으며, 이제 그 함정은 막아 두기도 했으니 이제 다 지난 일이다. 깁스도 진작에 풀었어도 되었는데 같이 사는 누군가가 워낙 노심초사하길래 이틀 반이나 더 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때 찾으려다가 실패했던 약초를 다시 찾으러 나서도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떤 멍청이가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서 뭘 할 수가 없었다.

흑발 청년이 얌전히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들킨 주제에 습관대로 여전히 걸음 소리는 완전히 죽인 채였다.

요른은 그 꼴을 보고 애써 턱에 힘을 주어 웃음을 참았다. 반려의 몰골은 성안에서 볼 때도 말이 아니었지만 햇빛 아래 꺼내 놓고 보니 더 처참했다. 예쁜 본판에다가 매번 저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막시가 겸연쩍은 듯 눈은 못 맞추면서도 목소리로만 가만가만 물어 왔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괜히 돌아다니는 거 아니랬지.”

요른이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는 듯한 투로 말했다.

“부지 전체에 전송 마법진 촘촘하게 설치해 두겠다, 그리고 혹시 망가진 데는 없나 며칠에 한 번씩은 확인하겠다고 했잖아. 난 사람 피해야 하니까 누가 접근하면 목소리나 모습이 나한테 바로 전달되게끔 말이야. 그러니까 네 미행술도 나한테는 소용없을 거라고 했어, 안 했어. 멍청아.”

“응. 진짜 잘 작동하나 보네.”

“그래. 알았으면 그만 따라다니고 돌아가. 할 일도 많으면서.”

그 할 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요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은 요 일주일 내내 바빴다. 아무리 말려 봤자 소용없이 저 혼자 푹 빠져서 바빴기에 오늘도 일부러 서재에 내버려 두고 인사도 없이 몰래 빠져나왔던 거다. 그런데도 또 어떻게 알아채고 제 쪽에서 미행을 걸어 왔다. 막시가 몇 걸음 다가오며 청했다.

“그럼 아예 같이 도와줄게. 뭐 찾는 거 같던데.”

“찾는 김에 혼자 산책도 좀 하려고 나온 거니까 내버려 둬. 알아서 저녁쯤에 돌아갈게.”

“같이 찾으면 더 빠를 거야. 도와주게 허락―.”

“산책도 하려고 나온 거라니까!”

요른이 빽 소리를 질렀다.

“좀 내버려 둬. 또 사람 묶어 두려고 그래? 걱정한다는 핑계로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거, 너 전생이랑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

막시밀리안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요른은 일부러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듯이 말들을 벼려 내며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막시가 차마 시선을 거두지도 못하고 요른과 눈을 마주 보고 있다가 더듬더듬 뱉어 냈다.

“……너무 늦지는 않게, 돌아와 주면…….”

그러나 그마저도 상대에게 뭔가 강요하는 듯이 느껴졌던지 그는 곧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성 쪽으로 등을 돌렸다. 막시가 요른 몰래 매입해 들였던, 작지만 폭이 좁은 탓에 훌쩍 높아 보이는 3층짜리 고성. 요른은 그 뒷모습을 보며 몰래 킥킥 웃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야.”

막시밀리안이 얼른 돌아보았다. 요른은 짐짓 화난 얼굴을 유지하며 톡 쏘았다.

“딴짓하지 말고 돌아가. 그리고 돌아가면 좀 쉬어. 멍청한 짓 그만하고.”

“응.”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로 쉬라고. 알았어?”

“응.”

“또 저래.”

하여간 나 속이는 게 지난 이십 년간 아주 몸에 배었어.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리고는 요른은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막시밀리안이 잠시 이쪽을 응시하며 침잠된 듯 서 있다가 멀어져 갔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요른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짜증도 나서 한숨으로 마무리했다.

‘뭐, 쟤도 알고는 있으니까.’

요른이 자신을 진짜로 밀어내려고 그러는 게 아니란 건 막시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반응을 즐기느라 일부러 자꾸 지난 시절 얘기를 들먹인다는 걸. 그러니까 저렇게까지 매번 받아 주고, 매번 뼛속까지 괴로워하는 거다. 있는 힘을 다해서 응답하듯이.

요른은 막시를 원망하지 않고 막시도 전혀 외면하려 들지 않는다. 둘 다 어떤 식으로든 그 시절까지도 추억으로 함께 돌이키는 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한쪽은 즐기고 한쪽은 고통받으면서야 떠올리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 과거를 향해서도 손을 맞잡고 있고 싶은 마음은 같다.

함께 했던 과거라면 뭐든 다 가져가고 싶다. 속속들이 간직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몇 번이고 눈앞의 불처럼 선명하게 돌이키고 싶다.

서로 사랑하니까 당연지사 아닌가. 요른은 왠지 변명하듯이 주워섬겼다. 그냥 그렇게 쉽지가 않은 일일 뿐이지.

‘바보 자식.’

요른은 중얼거리면서도 발밑을 잘 살피고 다니려 애썼다. 저번처럼 또 함정에 걸려 반나절쯤 실종되어 버리면 막시밀리안은 아예 병상에 누워 버릴지도 모른다. 회복 마법도 한계가 있지, 저 혼자 눈 밑이 거무죽죽하게 질려서 일주일 내내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걸 타인이 어떻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저런 멍청하고 섬약한 반려를 배려하려면 처음부터 함정 따위에는 빠지지를 말아 주는 수밖에 없다.

별 머저리 같은 새끼를 다 보겠네. 아니, 사람이 살다 보면 좀 함정에 빠지고 팔도 부러지고 그럴 수도 있지. 그 정도 우연을 못 견뎌서야 대체 앞으로 창창한 세월을 어떻게 버티려고 그러냐. 저런 등신 새끼가 평생 내 짝이다, 염병할. 요른은 욕을 무척 사랑스럽게 입 속에서 굴리면서 풀숲을 헤치고 걸었다.

일주일 전에도 오후에도 요른은 어떤 약초를 찾느라 이렇게 성 북쪽의, 정돈이 덜 되어 발밑이 풀숲처럼 엉킨 지대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반이 갑자기 꺼지면서 하강했다.

그가 빠졌던 건 고성의 옛 주인이었던 자가 파 두었던, 사십 년도 더 넘은 함정이었다. 아르테의 옛 자작으로 이름은 티베르 투트 푀르더던가 뭐던가. 치렁치렁한 백금발이 꽤나 화려했다던 자작부인 아드리안네와 함께 이 성을 여름 별장으로 즐겨 썼지만, 지역이 몰락하면서 매도는커녕 철거 비용을 들여야 할 지경이 되자 그냥 버려 놓고 떠났다고 한다.

이 부근은 한때는 사냥터로 유명했던 지역이라니 성의 부지에 짐승 등이 잘못 들어오는 일도 있었을 터다. 그런 놈을 노려 잡으려고 함정을 파 놓았다가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떠난 것이리라. 그리고 그 함정이 최근 지형 변화를 겪으면서 입구가 더 확장되고 바닥은 훨씬 더 깊은 저변으로 꺼져 버린 것이다. 2년 전부터 기후 변화가 심해지면서 대륙의 지반도 불안정해졌으니까.

요른은 왼쪽 팔꿈치가 부서지고 혀도 다친 채 몇 시간을 함정 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한밤중에야 겨우 요른을 찾아냈다.

막시는 함정 속으로 휙 떨어지듯 한 발에 뛰어 내려오더니, 상대 몸의 부러진 곳들을 확인하고는 단단한 들것에 실어 미리 장치했던 밧줄 끝의 고리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단검 두 자루를 벽의 안정된 부분에 번갈아 박아 가며 타고 올라가더니 위에서 마저 밧줄을 잡아당겨 요른도 올려 보냈고, 단검도 끝부분에 묶어 두었던 사슬을 당겨 회수해 갔다.

하여간 신체 능력은 정신 나간 것처럼 좋은 애야. 그 와중에도 요른은 감탄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성에 돌아와서 요른은 미리 만들어 두었던 마법진과 약물의 힘을 빌려 혀부터 회복시켰고, 그다음 주문을 외워 스스로 팔도 접붙였다. 뼛조각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대충 형태를 만들어 놓고 나서 막시한테 깁스를 둘러 굳혀 달라고 하자 작업은 끝났다.

치료가 끝나자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아 주고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서 머리도 감기고 말려 주었다. 요른은 긴장이 포근하게 풀려서 달게 잠들었고 다음 날 오전 늦게 기분 좋게 눈을 떴다.

반면 막시밀리안은 한잠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요른이 깨어나 보니 그는 여전히 바깥에서 입었던 의복을 그대로 걸치고 침상 곁에 앉아, 작고 희미한 램프 하나만 몹시도 어둡게 켜 놓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어스름한 탓에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아마 요른을 깨울까 봐 조도를 높이지 못한 것이리라.

“무슨 편지야?”

요른이 채근하며 보여달라고 하자 그는 겨우 종이 넉 장을 탁자 위에서 집어서는 이불 위에 차례로 늘어놓았는데, 수신인이 샬로테 폰 크라우스로 된 편지는 넉 장 모두 행간도 여백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서되어 있었다. 요른은 서두를 조금 읽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함정에 빠진 게 샬로테 잘못은 아니잖아. 왜 그 사람한테 이런 걸 써.”

“누군가는 실질적으로 책임을 져야지.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한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게 맞아.”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설명했다.

“샬로테가 성을 손질해 주겠다고 했었잖아. 손질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서 넘겨주겠다고 했으니, 거기에는 당연히 위험 요소의 제거도 포함돼. 그러니까 따져서 충분히 보상을 받아낼 수 있어.”

“뭘 어떻게 받아낼 건데?”

“일단 우리 성이랑 북쪽 마을 사이에 치료소를 개설해서 술사 두 명 이상을 상시 배치해 달라고 요청할 거야. 네가 많이 다쳐서 스스로 마법을 못 쓰는 상태가 될 수도 있으니 그럴 때는 외부 치료사가 와 줄 수 있어야 하잖아.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갔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런 한지에 누가 근무를 하러 오겠어. 지금까지 치료소가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지.”

“응. 하지만 지금은 인력 공급이 넘쳐 나. 지방 귀족의 성내 주치의로 일하던 자들 중 실직자가 많거든. 마을에서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라고 들었으니 샬로테만 잘 설득하면 돼. 우리가 비용 일부를 부담한다고 나서면 거절하진 않을 거야. 다만, 외부 치료사가 방문한다면 넌 아무리 아파도 마스크에 후드를 쓰고 기다려야겠지. 몸을 직접 보이기도 어려우니 검진 방식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그건…… 아슬아슬하네. 그런 비상 상황은 되도록 없는 게 좋겠다.”

“응. 처음부터 없는 게 훨씬 더 좋으니까, 역시 성내 부지 전체를 한번 뒤집고 새로 정비하려고 해.”

“어…… 응?”

“편지 두 번째 장부터는 그 공사를 부탁하는 내용이야. 샬로테가 안 들어 주면 내가 민간 업체에라도 연락해서 개인적으로 진행해야겠지만, 일단은 영주이자 매도인에게 요청하는 게 옳은 순서지.”

“알았어. 그런데 막시, 일단…….”

“내 생각엔 샬로테가 공사 건은 들어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면 내가 민간 업체를 찾고, 계약 조건도 일일이 조율해야 하니까 일이 좀 더 많아질 거야. 공사 자체는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 진행되어야 하니까 길드 쪽과 맞춰서 휴가 일정도 변경하자.”

“응응 그래, 근데 막시.”

요른이 웃으면서 멀쩡한 쪽의 팔로 반려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 좀 자자. 자고 나서 편지 다시 한번 읽어 보고 보내. 너 샬로테랑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 읽어 보니까 너무 무서워. 글씨가…… 너는 원래도 정서체긴 하지만 이건 뭐, 완전 기계로 찍은 거 같네. 말투도 지나치게 사무적이야. 너 또 마음 가라앉히려고 감정 다 배제하는 그런 거 했지? 성기사 때 습관 못 버리고.”

“…….”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해. 나도 좀 더 자고 싶으니까, 나 재워 줄 겸 해서. 자, 올라와. 응?”

“응.”

막시밀리안은 얌전히 답하고는 편지를 정리하고 침대로 올라왔다. 옷이라도 평복으로 갈아입고 오려고 했지만 요른이 조르는 통에 그냥 겉옷만 벗고 속옷 차림이 된 채였다. 그는 그대로 반려의 오른손을 꼭 잡고 몸을 붙였다.

하지만 잠들지는 않았던 게 분명했다. 요른이 아침에 깨어나자 막시밀리안은 얼른 저도 눈을 감고 있었던 척했으나 그걸 눈치 못 채기엔 둘이 한 침대에서 잔 세월이 벌써 2년도 넘었다. 요른은 상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고 오른손을 쳐들었지만, 막시밀리안은 재빨리 일어나서는 부엌으로 갔다.

잠시 후 막시가 환자용 식사를 준비해서 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요른은 어쨌거나 배는 고팠기에 허겁지겁 먹어 치웠고 막시는 접시를 치워주고 나서는 서재에 틀어박혀 버렸다. 아마 빨리 편지를 마저 써서 까마귀 발에 묶어 주려고 그랬으리라.

그 뒤로 일주일간 막시밀리안은 바빴다. 샬로테가 실제로 치료소 건은 받아들였으되 부지 공사는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을 만한 민간 업체를 알아보느라 바빴고, 몇 군데와 연락이 닿은 후에는 엎치락뒤치락 조율을 하느라 바빴으며, 시간이 남을 때면 직접 성안과 부지를 돌아다니며 위험 요소를 살피고 뭔가가 눈에 띄면 잘 쓰지도 못하는 도구를 써서 제거하거나 제거에 실패해서 손을 다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요른도 나름대로 도와주려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구박해서 먹여 봤자 먹은 것보다 더 많이 토해 버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위장병이 도졌는지 피까지 같이 토하는 걸 본 후로 요른은 먹이려고 애쓰는 걸 포기해 버렸다. 잠은커녕 깨어 있는 동안에도 신경성 현기증에 엉망으로 시달리고 있길래 회복 마법을 걸어 주려고도 해 봤지만, 막시는 이상한 핑계를 대고 슬그머니 어딘가로 피해 버리기나 했다.

제 반려가 고작 일주일 사이에 말린 생선처럼 비틀어져 옷 품이 남아돌고 낯도 시커메진 꼴을 보며 요른은 반은 즐거웠지만, 반은 찔리기도 했다. 사실 막시는 처음부터 좀 여유를 두고 정착하고자 했는데, 요른이 졸라 댄 탓에 예정보다 훨씬 일찍 휴가를 받아서 성에 짐을 풀어 버렸던 것이다.

막시는 고성이 아직 위험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워낙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성이니만큼 샬로테가 기본적인 손질은 했다 쳐도 전문가가 따로 살펴야 할 위험 요소가 안팎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따라서 부지 전체를 점검하고 주변에 응급 시설도 확보하고 나서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냈었다. 그러니까 막시가 일주일 전에 샬로테한테 편지를 써서 요청한 건 사실 그의 계획대로라면 둘이 성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다 갖춰져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요른은 고성 매입 소식을 듣자마자 팔짝팔짝 뛰면서 지금 당장 가서 살자고 졸라댔었다. 그래서 둘은 약 2주일 전, 샬로테의 마지막 편지를 거의 받자마자 이주해 왔고, 요른은 도착하자마자 신이 나서는 성내와 부지 곳곳을 다 탐험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고작 닷새 만에 함정에 홀랑 빠져 버렸다.

‘쟨 지금 사실 나를 침실에 가둬 놓고 못 나오게 하고 싶겠지.’

매번 올라다니기 좀 귀찮긴 하지만, 밖에서 만에 하나라도 누가 들여다볼까 싶어 일부러 3층에 둔 부부침실에 말이다. 그 튼튼한 침대 기둥에 발목이라도 묶어 놓고 싶으리라.

요른 생각에도 그게 옳았다. 함정에 빠진 건 이래저래 요른 자신이 자초한 거니, 일단은 사고 친 놈 하나만 콕 집어서 탓하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막시는 그건 못 한다. 그는 제 반려의 소위 자유를 손톱만큼이라도 제한하는 짓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요른이 평소에 후드며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미 제멋대로 무시무시하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성에 와서 요른이 혼자 밤낮으로 나돌아다니는 걸 말리지도 못했고, 지금도 요른한테 작작 좀 나다니라고 구박하느니 아예 부지 전체를 다 엎어서 정리해 버리겠다는 거다.

‘멍청한 놈.’

팔꿈치 뼈도 다 붙고, 깁스도 풀어 자유로워진 왼팔을 올려 요른은 괜히 백발을 쓸어올렸다. 함정에 빠진 건 요른 자신 탓이었으며 사실 나오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나는, 뭐, 네가 이렇게까지 맛이 가 버릴 줄은 몰랐지.’

그러나 중얼거리자 마음속에서 가느다란 메아리가 돌아왔다.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랬던 거지. 

요른은 무심코 입맛을 다셨고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울리는 가운데 사위는 고요했고 발밑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한쪽 팔이 망가졌다고 부유 마법을 못 쓸 건 아니었다. 왼손 오른손 대칭으로 인을 못 맺는다면 오른손으로만 차례대로 맺어서 처리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조금 더 식이 복잡하고 효과가 약할 뿐이다. 그러니 부유 마법은 함정 바닥에 구른 후에도 충분히 쓸 수 있었고, 사실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다만 하강하는 순간 그 까마득함이 따스했다. 요른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일주일 전의 밤을 반추했다. 덫에 걸려 그 함정의 입구가 네 눈동자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게 좋았다. 굳이 스스로 빠져나오느니 그 감옥 속에 봉인된 채 네가 약속대로 와 주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오래전에 그랬듯이.

나는 그저 너를 기다리고 싶어서, 일부러 아무 마법도 쓰지 않고 팔도 혀도…… 날개도 부서진 채 누워 있었던 건데.

가려져 있기에 더 그리운 추억을 반복하면서.

인간이 된 후 기억해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결국 막시가 당부한 대로 해가 지기 전에 성에 돌아와 지하 부엌으로 향하며 요른은 새삼 곱씹었다.

기억하는 능력도 일종의 권능이다 보니 마왕일 때와는 그 힘의 차원이 달라져 버렸다. 마왕에게는 과거도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백 년 전 일이든 천 년 전 일이든 모든 순간이 걸음하기만 하면 언제나 방문할 수 있는 이웃집처럼 활짝 열려 있었고, 실제로 찾아가서 살펴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 시절 살았던 어떤 사람의 눈을 빌려서든, 맹수나 새, 벌레의 의식, 심지어 흙이나 광물의 몸체를 빌려서든.

하지만 인간이 된 후 요른은 자기 자신의 머리 하나에만 갇혀 버렸다. 그 조그만 뇌를 통해서는 고작 이십몇 년간 그 몸으로 직접 살아온 생애만 돌이킬 수 있었고, 그나마도 제멋대로 윤색되고 빛바래기 일쑤였다. 심지어 정신을 차려보면 어떤 것들은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렇게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기억 중 하나가 막시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다.

그 골목길의 만남. 요른은 자신이 그때를 떠올릴 수 없는 이유는 이해했다. 그는 당시 자아조차도 없다시피 했기에 막시가 이름을 불러 줘서야 처음 깨어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스스로 돌이키려고 해 봤자 온통 어스름한 빛얼룩만 맴돌 뿐이다. 아직 땅과 하늘로 갈라지지 않고 출렁이는 태초처럼.

‘사람으로 치면 태어나는 순간인 건데,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요른은 지하의 소형 부엌에 한쪽에 의자를 놓고 털썩 주저앉으며 속으로 투덜댔다.

부엌이라 해 봤자 수도꼭지와 아궁이가 있어 물과 불을 쓰기 쉽게 마련해 둔 공간일 뿐, 1층의 큰 부엌처럼 조리 시설이며 식기가 완비되어 있는 건 아니다. 원래는 하인이 자기들 야식만 따로 준비하던 부엌이었을 텐데, 요른은 서랍이 많은 작은 선반 네 개를 가져다 두고 새로 마법을 조합해 낼 때나 약물을 만들어 낼 때 실험실 용도로 쓰고 있다.

‘마왕일 때야 막시 머릿속에 들어가서 실컷 봤지. 어린 시절 막시의 눈을 빌리든, 어른 된 후의 기억을 뒤지든. 보고 또 봤었어. 좋아하는 장면이었는데…… 이젠 그렇게 볼 수도 없고, 막시 눈을 빌려서 봤던 것도 벌써 2년이 넘었으니 점차 희미해져 가고.’

어쨌거나 마왕일 때도 막시의 눈을 통해서만 봤었다.

둘이 처음 만났던 순간이지만, 기억해 줄 수 있는 건 막시밀리안뿐이다. ‘요른’이 탄생했던 순간을 요른 스스로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공유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제 그 기억은 전적으로 막시밀리안의 안에만 살아 있다. 그러니까 사실 그가 알아서 다 챙겨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요른은 무릎 사이에 작은 사발 같은 걸 놓고, 선반 위에서 조그만 나무 공이 같은 것을 가져다가 약초를 찧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첫 만남 기념일 같은 걸로 정해서 매년 챙겨 주고, 시도 지어 주고 어디 화가한테 주문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상으로도 만들어서 벽에 걸어 놓고 정원이며 계단참에도 늘어놔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이 성에는 작으나마 화랑 용도로 설계된 방도 있는데.

‘그런데 멍청한 똥개 새끼는 저런 꼴이나 되어 버리고.’

그 기억이 그렇게 싫은가?

싫은 건 아니겠지. 요른은 찧은 풀을 천 주머니에 싸고, 위쪽 선반에 넣어 두었던 다른 재료들을 꺼내 섞을 준비를 하며 되뇌었다. 

무서운 걸 거야.

생각하며 요른은 당시 막시의 머릿속을 뒤지느라 가 닿았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요른은 이번 일주일 내내 제 반려가 그렇게까지 망가져 버린 이유를 어렴풋이라도 짚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해결책, 아니, 차라리 어떤 극단적인 치료책을 시도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테고.

촉매가 될 용액을 유리병에 부어 놓고 주문을 외우며 요른은 머릿속으로 계속 투덜거렸다. 원래 이 약초는 침대에서 쓰려고 했던 건데. 막시한테 먹여 놓고 덮쳐 달라고 시키려고 했다. 움직임은 둔하고 부정확해지겠지만, 환각 작용이 강하고 이래저래 충동을 부추기는 약이니 재미있는 짓을 해 주겠지 싶어서. 그런데 망할 치료 용도로나 쓰게 생겼다.

치료제로 쓰는 법은 곁다리로만 읽은 것뿐이라 사실 지식이 깊지도 못하고, 부작용이 나타날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른은 잠시 손을 멈추었지만, 곧 다시 용액을 증류해 순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편이 낫다.

막시가 아무리 기본 체력이 좋고 젊대도 자꾸 저러다간 골병이 들 테니 한번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번에 많이 심해서 그렇지, 저렇게 가끔씩 곪아 버리는 것 자체는 처음도 아니니까.

돌이키자 문득 입 속이 짜릿해졌다. 요른은 손을 올려 자기 입술을 매만졌다. 역시 웃고 있다. 깨닫고 나자 뱃속 한참 아래까지 전율이 번졌다. 막시가 망가진 꼴은 정말 귀엽다. 아직 모자란다. 더, 더 몰아붙여서……. 

그러나 요른은 곧 백발을 괜히 벅벅 긁어 흐트러뜨리며 한숨을 내쉬었으며, 재료들을 착즙하거나 태워 고운 가루로 만든 후 비율을 맞추었다. 한때 식물이던 새하얀 결정 더미를 내려다보며 그는 다짐하듯 뇌까렸다. 난 사람이야.

막시는 사람이고, 나도 이제 사람이야. 그러니 머리 공유도 못 해서 지금 이렇게 힘들게 약이나 먹여서 속을 읽어 내려는 거잖아. 2년이나 되었는데 슬슬 받아들여야지.

요른은 자신이 황궁 혼인식 때 내걸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아직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발음했던 문장을.

‘더 지체하지는 말자.’

곱씹으며 요른은 픽 웃어 버렸다. 그리고 곧 짧은 주문을 외워 촉매를 중심에 두고 재료들을 모두 섞어 냈다.

이제 1층 부엌으로 가져가서 이걸 섞어 버터 과자라도 구워내면 된다. 동물성 지질에 섞었을 때 가장 잘 흡수된댔으니까. 버터야 막시가 싱싱한 걸로 구해다 놨고, 밀가루에 설탕도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냥 버터 과자는 좀 평이하지 않나, 이왕 하는 거 계피도 섞어 볼까. 황국은 물론 천제국에서도 유통과 판매가 금지되어 있는 약물을 과자에 넣을 준비를 다 해 놓고 요른은 향신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