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5/30)

에필로그

9월 말 초가을, 오전 일곱 시, 페랑 수도의 오델리 용병 길드 건물 앞. 선선한 공기 속에 마흔여덟 살의 로트만 피셔는 게시판에 나붙은 벽보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의뢰 수는 많았다. 종잇장이 겹겹이 붙어 있는 가운데 직원이 수시로 나와서 신청이 접수된 건 떼어 가고 새것을 붙여 놓고 갔다. 삼십 분쯤이 더 지날 때까지 로트만은 게시판을 살피며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스물이나 갓 넘어 보이는 젊은이들은 도착해서는 흘긋 눈길만 주고도 금방 결심한 듯 접수처 쪽으로 들어갔다. 로트만은 왠지 켕겨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게 맞는 의뢰가 뭔지 알아서 저러는 건 아니지. 만용을 부리기 쉬운 나이라 돈이 되면 아무거나 골라서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 젊은 길드원들은 많이들 죽는다. 살아남아도 몸이 상해서 전처럼은 활동할 수 없게 되기도 하고.

‘치료 마법으로 웬만한 상처는 다 고칠 수 있던 시절과는 다르니까.’

로트만은 자신이 젊었던 시절을 회고하며 조금 씁쓸해졌다. 세계는 달라져 버렸다.

타블로의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눈에 띄게 몰락해 가고 있다. 정령 마법은 치료계부터 가장 먼저 쇠퇴했고, 성황은 2년 전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착실히 늙어 가는 중이었다.

2년 전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페랑의 사업가들이 개국했던 공화국이 초반부터 위태로웠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대륙 통일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한 세력이 다스리기에는 너무 컸던 탓이다.

갈라져 지내던 자들을 억지로 한 나라로 묶어 놓으니 각 지역과 계층 간에 갈등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결코 헤르타와 같은 수준으로 정령 마법을 쓸 수 없었던 지도부는 시간 내에 손을 쓰기는커녕, 그 소식조차 접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었다. 대륙 전체를 다스린다는 건 인간의 평범한 무력과 정보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공화국은 안에서부터 무너져 갔다. 분쟁이 극대화되면서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들끓었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를 죽여 가며 온 나라에 피가 뿌려지던 어느 날 성황이 돌아왔다.

그녀를 누가 불러들인 건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빨리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바다 건너에서부터 왔으면서 배를 타고 온 흔적조차 없었기에 더욱 이상했다. 마치 대륙 간에 어떤 틈새를 채우는 문이 열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하여간 그녀는 천제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쓰러져 죽어 가던 자들을 모두 치료해 주었다.

최소한 대륙민은 그렇게 믿었다. 그녀가 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그날, 몇 시간쯤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다쳤던 자들이 모두 멀쩡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성황은 돌아왔을 때부터 이미 쇠락한 모습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나중에 그녀 스스로도 공식적으로 밝혔다. 자신은 이제 전과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고.

대륙은 타락하여 그 질서는 이미 무너져 버렸다. 정령 마법은 점차 사라져 갈 것이고 성황 자신도 그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그 책임을 반란자들에 돌리지는 않았다.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늙고 약해진 몸으로 황성 발코니로 걸어 나와 그녀는 광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전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고요. 인간이 제 손으로 만들고 행하는 것도 결국 모두 자연이지요. 공화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황국이 쇠락하고 공화국이 선 것도 결국은 일종의 순리였던 셈입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입니다.

선포하듯 말한 다음 그녀는 발코니 위에서 오히려 공화국의 수상이었던 필립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으며, 그와 함께 대륙을 다스려 갈 것을 약속했다. 입헌 군주국의 형식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사후에는 온전히 공화국으로 이전될 수 있게끔 서로 도와 다스리겠다고. 그녀는 전송 마법을 써서 그 약속을 수도 시민은 물론 마지막 힘을 다하듯 근교 도시민에까지 퍼뜨렸다.

‘어쩔 수 없잖아.’

로트만은 당시 성황국 수도까지 찾아가 그녀의 말을 직접 들었던 기억을 되새겼다.

‘어쨌거나 타블로의 질서는 정말로 무너져 가고 있어. 그러면 공화국으로 이전하는 수밖에. 정령 마법이 없어지면 우리 다음, 늦어도 다다음 세대 정도부터는 정말로 각자 자기 손에만 의지해서 살아야 할 테니까.’

아무런 절대적인 질서도 없이, 그저 여기저기 아찔하게 골이 파인 세상을 그때마다 싸워서 이기고 건너뛰어 가면서. 지금 이 길드에서 우리가 하는 일처럼. 

로트만은 다시금 찬찬히 게시판을 살폈다. 귀금속 수송 호위 의뢰, 귀족가 관광여행 특별 호위병 모집.

신 르핀 해양왕국 독립군 용병 모집, 그로쉔 왕국 독립군 용병 모집.

아르테 왕국 북부 숲의 마물 퇴치단 모집.

로트만은 괜히 검붉은 수염을 긁적거렸다. 성황이 돌아왔다고 해도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었다. 그녀의 통치력이 예전 같지 못한 만큼 내전은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고 치안도 나빠졌다.

일단 황국 체계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개별 왕국들이 있다. 보수적인 그로쉔 왕국은 공화국으로의 이행이라는 계획에 반대해 자국만이라도 이전과 같은 절대왕정 체제로 돌아가고자 독립운동을 벌였고, 옛 르핀의 한 줌 남은 귀족들은 이 틈을 타서 멸망한 나라를 복구하길 원했다. 전쟁이 격화되자 그 틈을 타서 도적도 여기저기 들끓었다.

거기 더해서 마물도 문제였다. 공화국파가 반란 때 병사로 활용했던 마물들은 한창 혼란하던 때에 축사에서 마구 도망쳐 나와 숲이며 산에 숨어 버렸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물을 공격해 잡아먹거나, 가끔은 근처 마을까지도 습격했다. 여행은 극히 위험해졌고 서식지 근처의 마을 주민은 늘 공포에 떨었다.

흑마법사들이 있었더라면 사정이 좀 나았으리라. 그러나 2년 전 그날, 무슨 연유인지 그들은 안 그래도 반쯤 썩어 있던 몸이 갑자기 완전히 가루가 되면서 죽어 버렸다. 그러니 마물을 마법으로 통제해 줄 자는 이제 없었다. 검으로 때려잡을 수밖에 없으니 각 도시 성기사단이 하루에도 몇 번씩 주변을 정찰하며 지키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감당이 안 되니 이런 민간 용병 길드에도 자주 퇴치 의뢰가 들어오는 거지.’

페랑 수도의 이 오델리 길드는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대륙에서 이름값은 가장 높다. 마물 퇴치는 위험한 일이지만 이 정도 길드쯤 되면 심심찮게 의뢰가 들어오기는 하는 법이다.

하지만 역시나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로트만은 고민했다. 그는 마검은 쓰지 못한다. 하지만 의뢰주명과 의뢰비로 보건대, 퇴치라고 쓰여 있어 봤자 사실상 생포를 원하는 거다. 그러면 오히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곰이나 검치호 덫을 놓아 잡은 적이야 많으니까. 게다가 이건 혼자서 하는 의뢰가 아니라 여럿이 같이 받는 의뢰다. 그러면 실력자들 틈에 섞여 들면 된다.

무엇보다 그는 어제 진 도박 빚을 떠올렸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로트만은 의뢰를 맡아보기로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 곁을 스쳐 먼저 앞으로 향했다.

로트만은 멈춰 섰다.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저렇게 키 크고 기골 좋은 청년이 제 키만 한 대검까지 등에 멘 채 지나가는데도. 청년이 문득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로트만은 자신을 쳐다보는 줄 알고 긴장했다.

미인이군.

다소 천박한 표현이라 생각하면서도 로트만은 뇌리에 담은 채 한숨마저 내쉬었다. 몰락 귀족인가? 저런 얼굴에 저런 자세라니, 옷차림은 평범해도 결코 평민 출신일 수는 없다. 그러다가 청년이 빙긋 웃기까지 하는 바람에 그는 심장이 멈출 뻔했다.

그러나 청년은 로트만을 향해 웃은 건 아니었다. 스물 중반, 끽해야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마흔여덟 살 길드원의 세 발자국 뒤쯤을 향해 저음의 결 고운 목소리로 불렀다.

“들어가자.”

그러자 청년에 비해서는 다소 키가 작고 선도 가늘어 보이는 사람 한 명이 총총 뛰듯이 따라갔다.

로트만은 그를 보고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탄식했다. 그 낙낙한 밝은색 옷을 차려입은 자는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데다가, 얼굴 위로는 안에 의료용 천을 덧댄 은 마스크까지도 겹쳐 썼기 때문이었다. 낯을 많이 다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움츠러든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흑발 청년과는 달리 전혀 자기 기척을 숨기지 않는 태도며 동작이었다. 그가 앞서간 동료의 손을 잡으며 멈춰 서길래 로트만은 짐작했다. 부부인가?

요즘은 세상 살기가 워낙 힘들다 보니 부부 용병도 없지는 않으니까.

얼굴이 저런데도 스스럼없이 구는 걸 보니 제 짝이 많이 잘해 주나 보다. 생각하며 로트만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도 한때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도박 빚으로 쫓기는 인생을 몇십 년간 반복하면서 이제는 희망을 잃어버렸다.

두 젊은이가 먼저 길드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야 로트만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이미 접수처 앞에 서 있었는데, 직원이 튕기듯 일어나며 반겨 주는 모습을 보며 로트만은 조금 놀랐다.

“막……!”

직원은 그러나 이름을 부르려다가 주위를 살피고는 말을 삼켰고, 대신 손만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여행은 어땠나?”

“무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마물 퇴치 맡으려고?”

직원은 당연한 듯 물었고, 청년도 끄덕이며 신청서를 내밀었다. 직원은 바로 서명하고 인을 찍어 되돌려 주었다.

“아직 몇 명 더 모아야 해. 사실은 자네랑 파트너로 충분할 테지만, 그래도 구색을 갖추려면…… 알지? 아마 이틀, 사흘은 기다려야 할 거야.”

청년은 말없이 끄덕거렸고, 밝은색 소매가 긴 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한 동료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한발 물러서 팔짱만 끼고 있었다. 로트만은 둘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들이 나가기를 기다려 자신도 접수처에 신청서를 제출했을 뿐이었다.

직원은 얼굴을 찡그렸고, 신청서와 로트만을 번갈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트만은 겉으로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런 반응이 보통인데 말이지.

* * *

사흘 뒤 오전 일곱 시 반, 용병 다섯 명이 서신을 전해 받고 길드 앞에 모였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어깨는 넓으나 키는 작아 어딘지 꽉 눌러 놓은 듯 생긴 남자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인원이 너무 적지 않나?”

“금색별 신분증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의 동료인 듯한 다른 자가 말을 받았다. 붉은 광택이 나는 짙은 고동색 곱슬머리 여자로, 키가 크고 늘씬하며 허리가 굵고 곧았다.

둘은 각자 자신을 모리스, 카밀라라고 소개했다. 페랑과 아르테 출신의 마검사란다. 둘이 일부러 성을 대지 않는 걸 눈치채고는 로트만도 이름만 댄 후 자신을 그로쉔 출신의 포획꾼으로 소개했다. 모리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포획꾼이면 덫 설치, 뭐 그런 쪽으로 허가를 받은 거겠네요.”

퇴치였다면 원래는 끼어들 급의 의뢰가 아니라는 투였다. 로트만도 익숙한 대접이라 그저 끄덕거렸다.

모리스와 카밀라는 ‘마검사’로 팀에 들어왔다. 그런즉슨 혈통은 귀족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성기사 급까지 올라가 보았던 귀족.

길드를 떠도는 몰락 귀족의 수는 적지 않다. 공화국 시절 재산을 몰수당하고, 입헌 군주국이 선 후에도 돌려받지 못한 채, 페랑 사업가들이 대안으로 추천한 증권 투자마저 실수하는 바람에 용병 일을 택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대귀족들이나 공적이 있는 자들은 다 살아남았지. 휩쓸려서 금방 이런 일까지 하게 된 거라면 별 의미 있는 귀족은 아니었던 거잖아.’

“그렇죠. 그, 저는 마검은 못 씁니다. 마검사 분들께서 잘 지켜 주셔야죠.”

로트만은 일부러 비굴하게 말하면서도 내심 투덜댔다. 그러고 나서 셋은 모두 아까부터 가만히 서서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만 있던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키가 크고 무척 고요한 인상을 주는 흑발의 마검사와 얼굴을 은 마스크로 가린, 후드까지 푹 눌러쓰고 높은 카라를 목 앞에서 버클로 묶어 고정해 버린 마법사.

직원이 보내왔던 서신에 따르면, 둘 다 금색에다가 별까지 붙은 신분증을 가진 자라 한다. 길드에서 발행하는 다섯 가지 신분증 중 가장 높은 등급을 소지한 셈이다.

길드 신분증의 급수와 그 발행 조건은 대륙 전체 차원에서 정해져 있는데, 은색 이상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은 마법사와 마검사뿐이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금색을 가진 자들은 전 대륙에 이십여 명, 금색에 다시 별까지 붙은 건 대여섯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니, 사실 그 대여섯이라는 숫자도 속임수라는 설도 있다. 실은 딱 두 명뿐이고, 애초에 그 둘만 따로 표기하기 위해 별을 붙인 건데, 길드에서 둘의 신상을 감추어 주려고 그래도 손에 꼽을 숫자는 된다고 허위로 등록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로트만을 비웃던 모리스가 둘에게는 공손히 말을 건넸다.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덕분에 오늘 많이 배우겠군요.”

카밀라도 그 뒤를 따라 예를 갖추어 보이면서도 살짝 둘의 눈치를 보았다. 뭐 하는 작자들이지?

페랑 사업가 놈들이 민간 학원을 열어 평민에게도 마법이며 마검 사용법을 자유로이 가르치긴 한다지만, 페랑 내에서도 5년, 대륙 전체로 치면 고작 2년 전부터다. 그 학원생들이 실전에서 저 정도 수준을 갖추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니까 이 두 놈은 귀족일 수밖에 없다. 전직 성기사와 마법사가 용병으로 돌아선 것이리라. 그런데 귀족 젊은이 중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자라면 대체 누구인가?

‘이름을 못 들어봤을 리가 없는데. 얼굴도 그렇고.’

“기레스라고 합니다.”

흑발의 청년이 말하며 악수할 겸 장갑 낀 손을 내밀어 왔다. 로트만이 못 이기고 결국 툭 뱉어 물었다.

“진짜 이름 아닌 거 같네. 가명이죠?”

“예.”

청년이 별 감추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지만, 로트만이 얼른 중재에 나섰다.

“에이, 길드에 가명 쓰는 사람이 한둘입니까. 원 신분증에 길드 신분증을 추가로 쓰는 사람도 있지만 길드 신분증만 쓰는 사람도 있고요. 다들 사연이 있죠. 자, 마물 얘기나 합시다. 그래서 이건 어떤 놈이라고요?”

“의뢰계약서를 다 읽지도 않고 맡았습니까?”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을 읽어 보면, 다섯 마리가 섞인 놈 같습니다.”

모리스가 쏘아붙인 직후 다행히 자칭 기레스라는 청년이 얼른 끼어들어 답했다.

“하지만 그 후로 더 섞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뭔데요.”

“인간도 섞여 있는 듯이 보였다는 소수 증언이 있거든요.”

카밀라가 침착하게 묻자 청년도 담담하게 답했다. 로트만은 눈썹을 찡그렸다. 알 게 뭐야. 우리야 시킨 일만 하면 되잖아. 그러나 모리스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러면, 그게 아직도, 말하자면 머릿속은 인간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가능성은 적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면 생포는 안 되죠.”

모리스가 팔짱을 낀 채 엄숙히 선언했다.

“아무리 용병이라도 사람의 도리가 있지, 죽여 줘야 합니다. 저 망할 외국 놈들한테 산 채로 팔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바로 그 외국 놈들한테 팔아넘길 거니까 돈이 되는 거 아냐.

로트만은 모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냥 죽여 퇴치하는 거면 아무리 위험한 의뢰라 해도 이 정도로 쏠쏠하지는 못하다.

2년 전부터 교역이 정식으로 재개된 이래, 바다 건너 천제국 상인들은 성황국의 마물을 무슨 특산물처럼 밀수해 들이고 있었다. 그쪽에서는 진귀한 생물로써 엄청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한다.

이번 의뢰도 명목상 퇴치라고 되어 있지만, 의뢰주가 천제국의 상인인 걸 보니 사실상 생포가 목적인 게 뻔하다. 그래서 의뢰금도 퇴치의 몇 배에, 아니, 이번에는 무슨 특별한 경우인지 열 배에 달했던 것이다. 로트만은 방금 기레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호가의 배경을 짐작했고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두 분,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길드에서 받은 의뢰는 무조건 수행해 주셔야죠.”

“그냥 마물이 아니라 사람이 섞였다지 않소.”

“그 몸에 사람이 섞였다고 해도 머릿속도 사람이라는 건 아니잖습니까. 안 그래요, 기레스 씨?”

“예.”

의외로 기레스도 순순히 끄덕여 보였다.

“그저 형상이 남아 있는 것뿐이고 의식은 완전히 잠식되었을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오히려 극히 낮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극히 낮다지 않습니까.”

카밀라가 고개를 젓자 로트만이 다시 끼어들었다.

“솔직히 여러분, 저는 이제야 의뢰비가 왜 그렇게 높았는지 이해가 가는데요? 인간 형상이 남아 있으니 특별하다 이거 아닙니까. 사람 닮은 마물이 어디 흔합니까? 상품으로서는 아주 고가품이 될 만하죠.”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천박하게 합니까?”

“직접 맞닥뜨려보면 보다 확실해질 겁니다.”

분위기가 격해지기 전에 기레스가 다시 끼어들었다.

“성대 등 음성 조형 기관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인간적인 반응을 해 올 겁니다. 혀가 있다면 말을 걸어 올 수도 있고요, 아니더라도 어떤 신호를 보내오겠지요.”

“그럼 그런 경우에는 확실히 사살해 주기로―.”

“그렇다 해도 의뢰는 의뢰니까요, 생포한 다음에 생각―.”

“일단 서식지로 가 보죠.”

카밀라와 로트만이 서로 상대의 말을 잘라 가며 뱉는 걸 기레스가 가볍게 손짓하며 잘라 들었다.

“저는 로트만 씨 얘기에 찬성입니다. 어차피 생포해서 관찰해 봐야 인간 부분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도 있을 테니, 그다음에 죽여 줘도 됩니다. 그러니 목적지로 이동해서 원래 계획대로 포획해 놓고 나서 다시 얘기하죠.”

“……알겠습니다.”

모리스와 카밀라가 로트만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거두면서 대로 쪽을 턱짓해 보이며 앞장섰다. 그러면 지금 바로 길을 떠나자는 뜻이다.

기레스도 끄덕거리고는 바로 걸음을 옮겨 말을 매어 둔 곳으로 갔고 로트만도 뒤따랐다. 기레스가 능숙하게 흑마에 올라타기 직전, 로트만은 아까 자기편을 들어 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인사했다.

로트만은 동시에 그 뒤에서 제 덩치에 비해 너무 큰 백마에 올라타는 마법사를 가리켰다. 신기하게도 올라타는 데에 무리는 없어 보였는데, 백마가 무릎을 꿇다시피 몸을 낮춰 주었기 때문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분은 아까부터 아무 말씀이 없으시네요.”

“성격이 수줍어서요.”

기레스가 딱 자르는 투로 받았지만, 로트만은 지지 않고 이번엔 말 위에 올라 따라가며 물었다.

“에이, 마법사분들은 보통 말씀 아주 잘하시던데? 저분은 아까 인사도 안 받아 주시더라고요. 그래도 주문은 잘 외우시는 거 맞죠?”

“네.”

“부부세요?”

기레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말 속도를 높여 앞서가 버렸다. 명도 높은 청백색 옷을 입은 마법사도 뒤를 따랐다.

마법사의 그 몸태가 이상하게 뇌 속 깊은 곳을 건드려 로트만은 혼자 고개를 갸웃했다.

페랑 수도의 오델리 길드 본점에서부터 아르테 북부의 숲까지 넷은 이틀을 여행했다. 한 번은 민박에서 잤고 한 번은 노숙했는데, 민박에서 기레스와 마법사는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고 객실로 먼저 올라가 버렸다. 방에서 따로 시켜 먹겠다는 것이다. 모리스가 꽤 적극적으로 술을 권했는데도 그랬다. 다른 셋과는 친해질 일 없다는 태도였다.

사흘째 그들은 목적지 근처 마을에 도착해 길드원 전용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 날 새벽, 숲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말을 묶어 둔 후 나머지는 걸었다. 마상에서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주변이 빽빽해진 탓도 있었지만, 벌써 마물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말들이 겁을 먹기 시작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단, 막시밀리안의 흑마는 차분했다. 카밀라와 모리스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저건 군마다.

대마물전 경험이 많은 군마다. 저 가짜 이름을 쓰는 자는 아무래도 성기사 중에서도 꽤 높은 직급을 맡았던 귀족인 게 틀림없는데, 어째서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걸까. 게다가 만약 그랬다면 어쩌다 용병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몰락해 버린 건가.

부근의 숲을 수색하며 덫을 놓다가 밤이 깊어져 길드원들은 잠자리를 준비했다. 모닥불을 켜 놓고 한 명씩 돌아가며 보초를 서기로 했는데, 지난번 노숙 때도 그랬듯, 기레스는 자기가 마법사 몫까지 불침번을 서겠다고 했다. 카밀라가 결국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체력에 무리가 가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기레스가 답하는 사이 마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미리 담요를 겹겹이 깔아둔 자리에 드러눕더니 순식간에 푹 잠들어 버렸다.

카밀라도 모리스도, 로트만도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레스는 다가가서 마법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며 웃을 뿐이었다.

아주 잡혀 사는구만. 넷 다 동시에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길드원 넷이 다 자리를 잡고 나자 사위는 모닥불 타는 소리만 남기고 고요해졌다. 모리스가 맨 먼저 보초를 섰고 그다음 카밀라, 그다음으로 기레스의 순서가 왔다. 기레스가 보초를 선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로트만이 뒤척이며 일어났다.

아직 교대할 시각은 아니었다. 다만 로트만은 자신은 체력을 크게 아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덫은 이미 아까 다 설치해 두었으니 자기 일은 대충 끝난 셈으로, 전투에는 참가할 이유도 실력도 없다. 그러니 이 금색별 신분증의 소유자와 얘기나 나누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마물을 많이 상대해 보신 모양입니다?”

로트만이 슬쩍 불 곁으로 다가와 기레스에게 말을 붙였다.

“어째, 역시 성기사셨나요? 아니면 지금도…… 혹시 이쪽은 그냥 휴가 중 부업이신가?”

기레스는 답하지 않았지만 딱히 귀찮은 티도 내지 않은 채 청아하게 다물린 표정만 그대로 지켰다. 로트만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운을 떼었다.

“마물이란 게 그,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레스는 역시나 답이 없었다.

로트만도 물론 알고 있기는 했다. 성황이 돌아온 후 죄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르핀 왕국 멸망을 계기로 한을 품은 흑마법사들이 여러 동물을 섞어 만들어 낸, 지극히 공격적인 성향을 띄는 생물.

재위 시절 성황은 흑마법도 결국 정령 마법을 응용한 것뿐이라고 우겼었지만 나중에는 대륙민도 다 알게 되었다. 르핀의 마법사들이 앙심을 품었든 말든 타블로의 질서가 강고했다면 애초에 그런 합성은 불가능했으리라.

그러니 공화국이 선 후에야 타블로가 쇠락한 건 아니다. 순서는 반대다. 마물이 곧 타블로 쇠락의 증거였기에, 페랑의 공화주의자들도 여론의 지지를 얻어 흑마법사들과 협력해 나라를 뒤집으려 일어났던 것이다. 헤르타가 귀환해서도 자연의 순리니 어쩌니 하는 소리나 하며 꼬리를 내린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말이죠, 저도 공식 설명은 압니다만. 다른 전설도 있잖습니까. 타블로가 그냥 쇠락했던 것만이 아니라 실은 새로운 신이 강림했던 거라고요.”

단순히 있던 게 낡아 가기 시작했던 게 아니라 전혀 다른, 훨씬 더 높고 아름다운 신이 내려왔었다. 그런 음모론 같은 얘기를 믿는 자들도 있다.

그 신의 힘을 빌려 흑마법사들은 마물을 만들었고 페랑의 사업가들은 세상을 뒤집었다. 그러나 신께서 2년 전 그날, 공화국을 버리고, 대륙민을 버리고, 자신이 이 땅에 남겼던 모든 흔적마저도 다 지우고 떠나신 바람에……. 로트만은 떠올리며 기레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청년 쪽으로 눈을 준 채로도 그는 머릿속으로는 다른 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등 뒤에 잠들어 있는 마법사의 몸태가, 그가 말에 올라타던 동작의 윤곽이 자꾸 뇌리를 쿡쿡 찔러댔기 때문이다. 로트만은 문득 자신이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자체가 저 마법사로 인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왜지?

내가 왜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거지?

‘잊혀진 신’ 전설은 소수 정신 나간 작자들의 발명품이다. 저희끼리 강림식이며 기도식을 치르느라 구걸과 흡사한 모금 활동을 벌이고 다니는데, 멀쩡하게 자기 생활이 있는 자라면 그런 데에 마음을 기대지는 않는다. 로트만도 차라리 도박판을 다닐지언정 한 번도 그런 교리에 진심으로 마음이 끌려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갑자기 이 처음 보는 마검사 청년에게 숲 한가운데에서 이런 걸 묻고 있는 것이다. 로트만은 변명하듯이 주워섬겼다.

“아니 그, 마물을 워낙 많이 보아오신 분 같으니 의견이 어떠실까 해서…….”

“음모론이죠.”

다행히 기레스가 일축해 주었다.

“타블로의 질서가 없어지면 믿을 게 각자 자기 손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두려워서 차라리 이 쇠락 자체가 또다시 어떤 다른 신의 질서이길 원하는 겁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죠.”

로트만은 어물거렸지만, 어쩐지 청년이 앞만 보며 말하면서도 의식은 뒤의 마법사를 향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 기레스가 몸을 일으키며 가슴께의 끈을 당겨 비스듬히 풀어 두었던 대검을 등에 곧게 찼고, 동시에 허리의 장검을 빼 들었다.

로트만도 눈치를 채고 다른 사람들을 깨웠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느라 마법사의 몸에 손을 댄 순간 눈앞이 하얗게 녹았다.

뭐지?

정신을 차려보자 기레스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포획꾼은 전력 외라고 생각한 탓인지 성기사끼리만 쓰는 용어로 얘기했지만, 로트만도 아주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다.

카밀라는 왼쪽, 모리스는 오른쪽을 맡아서 도주로를 차단하고 정면으로만 주의를 끌어라. 생각보다 덩치가 크니 몸 전체를 빠뜨릴 함정은 못 쓰겠다. 다리만 노리는 덫이 있는 쪽으로 유인하되 직접 접근하지는 말고, 나무들 뒤에서 낮게 움직이며 이물을 던져 소리만 내라. 상체에서 촉수를 쏠 수 있는 듯하고, 중량감이나 움직임으로 보아 날지는 못하며, 밤눈은 나쁘지만 귀가 대단히 좋은 종류다.

그는 마법사에게는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뭔가가 이미 약속되어 있는 듯했다. 포획꾼이 돌아보자 마법사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바닥이 쿵쿵대더니 거대한 것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다섯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로트만은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친.’

장성한 검치호의 다섯 배는 될 듯했다.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으로 추측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그새 많이도 먹었나 보다. 다리를 가눌 수가 없는 채로도 로트만은 생각했다. 마물은 배변을 하지 못해 먹는 대로 전부 다 몸에 섞인다. 안 맞는 걸 먹으면 독처럼 작용해 죽어 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잘 섞여서 한없이 커지는 예도 있다. 이번 마물은 후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면서도 머리 한구석에 의심이 섞여 들었다. 로트만 자신이 하는 생각이라기보다 마치 타인, 한때 자기 자신이었던 타인이 구시렁대는 것처럼. 아닌데.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야. 원래 마물은 뭘 먹든 무조건 다 섞였어. 안 맞는다고 죽어 버리는 일 따위는 없었는걸. 게다가 요즘 것들은 상처를 입히면 쓰러뜨릴 수 있잖아? 중상을 입히면 죽기도 하니 그 시체를 갖고 마검을 만들지. 하지만 예전에는 아무리 잘라도 죽질 않아서 토막토막 내서 상자에 담는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살아 있는 토막을 갖고 마검을 만들었고, 그걸 또 복속시키느라 성기사들은…….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지? 로트만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이 빠져 아무것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는데 머릿속 목소리만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반면 모리스나 카밀라는 파랗게 질리긴 했지만 자세는 흩트리지 않고 재빨리 각자 위치로 이동했다.

염병, 우습게 봤더니 저 두 놈도 성기사는 성기사구만. 로트만은 눈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기레스가 한 손으로 로트만의 멱살을 잡아 올려 허공에 적당히 휙 던지고는 마물을 유인해 덫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로트만은 몸이 까마득히 높이 떠올랐다가 멈추더니 나뭇가지들 틈새로 옮겨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손으로 떠받쳐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법사구나.’

그는 금방 알아챘고 소름이 쭉 끼치는 걸 느꼈다.

눈앞에서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기레스의 뒤를 쫓는데도 그 때문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천상의 음악.

그리고 지옥의.

발탄……. 낯선 음소들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춤추는 사이 로트만의 몸은 굵다란 나무의 몸체에서 주지가 갈라져 나오는 오목하게 파인 곳에 안착했다. 내려다보자 그가 설치했던 덫이 부서져 나가는 게 보였다. 너무 약했다.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에 맞춰서 만든 건데, 그 후에 더 자랐을 걸 예상해서 맞춘 건데도 크기도 강도도 모자랐다. 동작을 저어할 정도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기레스가 장검을 휘둘러 무릎처럼 보이는 곳 뒤쪽의 근육을 잘라 내자 마물은 주저앉았다. 그 순간 청년은 대검으로 바꿔 들고, 이번에는 허리인지 가슴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부분을 관통해서 땅에 푹 꽂아 넣었다.

마물의 움직임이 멈추자 카밀라와 모리스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둘은 자신들이 사실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덫도 망가져 버렸으니, 사실상 기레스 혼자서 잡은 셈이다. 기레스가 둘을 돌아보더니 가만히 설명하듯 말했다.

“척추가 하나만 있는 종류라 다행이었습니다. 부수지 않고 옆으로 충격만 주었으니 재생은 가능합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움직이는 모양을 보면 대충 압니다.”

“……대체 얼마나 많이 싸워 본 겁니까?”

기레스는 답하지 않았다. 로트만도 천천히 나무를 타고 내려와 마물을 살폈다.

아무리 저만한 대검을 꽂는다 해도 마물이 땅에 이렇게 쉽게 고정되지는 않으리라. 아마 마법사가 흙의 정령에게 빌어서 땅의 광물 성분과 검의 광물 성분을 서로 결속시켜 줬든가 했겠지.

포획꾼 역할을 맡은 자로서 로트만은 함정에 설치해 두었던 그물을 되가져와 마물의 몸을 촘촘하게 감쌌고, 기레스의 조언을 받아 중요한 부위에 철근을 박아넣었으며, 마법사에게 부탁해 철근들을 구부려 다시 그 끝을 서로 사슬처럼 엮었다. 마법사는 여전히 모습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전송 마법으로 이쪽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대화도 엿듣고 있는 듯했다.

“다 됐군요.”

“이송은 어쩔 겁니까? 생각보다 너무 커서, 이건 우리끼리는커녕 말들을 써도 무리가 있어요. 숲길은 좁기도 하고요.”

“마법사가 도와줄 겁니다.”

“어떻게요.”

“부유 마법이요.”

“예?”

기레스의 답에 모리스가 잔뜩 찌푸린 채 뱉었다. 그건 천제국 쪽 마법 아닌가?

“무슨…… 정령 마법과 오행 술법을 둘 다 쓸 수 있다고요?”

“예.”

두 대륙의 술법 모두를 쓸 수 있는 자가 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기레스가 짧게 끊으며 미간을 찌푸리는 통에 셋 중 아무도 더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법사는 마물의 몸에 먼저 부유 마법을 걸어 놓고 나서야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나타냈다. 길드원들은 조금 걷다가 말에 올라타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고, 마물의 거대한 몸이 이십 피트쯤 떨어진 허공에서 나뭇잎을 우수수 쓸어 떨어뜨리며 따라오는 양을 이따금씩 돌아보았다. 저 정도 무게를 구름처럼 지탱하다니.

오행 술법인가 뭔가 쪽은 실제로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저 마법사는 상당한 고수가 아닐까 하는 짐작은 갔다. 게다가 마법사는 입으로 주문을 외는 것 같지도 않았다. 모리스가 기레스에게 묻자 천제국 쪽의 술법은 구어 주문이 아니라 미리 그려 둔 진과 조각해 둔 주물, 손으로 맺는 인을 통해서 쓰는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 시간 반쯤 그렇게 말을 몰자 숲의 입구가 나왔다. 마을로 향하며 로트만은 마음이 어두워졌다. 아까 마물이 온몸에 철근이 꽂혀 묶인 채로도 중얼대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것은 제법 명확한 르핀어로 중얼거렸다. 아마 허공에 붕붕 떠 있는 지금도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왜 하필 인사야, 빌어먹을. 로트만은 생각하며 말 위에서 혼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말을 했다고 다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로트만이 말했고, 두 몰락 귀족은 찡그린 채 듣기만 했다. 기레스와 마법사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가끔 서로 눈길만 교환했다.

마을의 길드 전용 호텔에 도착해 넷은 직원들더러 마물을 소위 위험물 창고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작은 마을의 분점이라도 오델리 길드인 만큼 마물 전담 직원이 있었는데, 그도 포획물의 덩치를 보고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창고의 이중 철문을 다 닫고, 자물쇠를 삼중 사중으로 잠그고 빗장까지 질렀다. 그 양을 확인하고 나서야 넷은 지하 식당으로 들어왔다.

기레스는 마법사와 함께 얼른 객실로 올라가고 싶은 듯했지만, 단순 식사가 아니라 회의를 하는 거니 동석해 달라고 다른 셋이 몇 번이나 부탁해서야 겨우 잡아들 수 있었다. 식탁에 앉기는 앉았으되 기레스는 몸이 대체 어떻게 된 작자인지 그렇게 움직여 놓고도 버터를 바른 따뜻한 흑빵이나 씹어 댔고, 마법사는 아예 마스크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로트만은 푹 삶은 커다란 고깃덩이를 시켜 놓고 열심히 썰었고 다른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먹으면서도 로트만은 열심히 설파했다.

“죽여 주세요, 살려 주세요도 아니고 안녕하세요가 뭡니까. 진짜 사람으로서 의식이 남아 있으면 그런 식으로 말을 안 하죠. 기레스 씨, 사람 조형 기관만 빌려서 마물이 장난치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능성은 있죠.”

“아니, 아직 의식이 있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괴로워서 살짝 정신이 나가서 그렇게밖에 말을 못 하는 거고요.”

“모리스 씨, 솔직히 말합시다. 의뢰비가 이천 굴덴입니다. 한 사람당 이천. 이거 싫어요? 당신들 귀족이면서도 이런 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인신매매는 안 합니다.”

“인신매매라니요, 저게 솔직히 어딜 봐서 사람―.”

“속이 사람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사람인 거죠.”

로트만이 포크로 삿대질까지 하자 모리스도 욱해서 뱉었다. 카밀라가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자, 우리끼리 얘기해 봤자 소용없고. 경험 많은 분들께 여쭤봅시다. 특히 이런 일은 마법사분이 잘 아시겠지요.”

그녀가 말하자 셋의 시선이 다 은 마스크 위로 쏠렸다. 말을 꺼냈던 카밀라가 점잖게 이어 갔다.

“기레스 씨도 그렇지만 당신도 굉장히 실력 있는 분 같던데, 마물 생태를 연구한 적도 있으시겠지요. 어떻습니까, 저 마물을 인간으로 보십니까?”

“길드에서 결정해 줄 일입니다.”

의외로 기레스가 끼어들었다. 마치 마법사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예상했던 것보다 덩치가 크니 수송차 준비에 시간이 걸리긴 할 테지만, 늦어도 모레 새벽엔 마물을 싣고 페랑의 길드 본부로 떠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간부들에게 판단을 맡기면 됩니다.”

“그치들이야 어쨌거나 의뢰주 요구에 따를 겁니다. 뇌물을 주어서라도 관청의 간섭도 피해갈 테고요.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결정해야 해요. 아직은 마물이 생포 당시 입은 상처를 못 이기고 죽어 버렸다, 수송 과정을 못 견뎠다 이 정도로 핑계를 대고 넘어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럼 세 분이 결정하십시오. 저희는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두 분이 우리 중 마물에 대해 제일 잘 아실 테니까 의견을 부탁드리는 거…….”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기레스가 딱 잘라 말하고는 남은 흑빵을 종이에 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사도 그 뒤를 따랐다.

지하 식당 구석, 셋만 남아 앉은 식탁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셋 다 순간 깨달아 버린 탓이었다. 그들은 마법사로부터 꼭 마물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 마법사의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어 보고 싶었다.

특히 로트만은 자기 마음을 깨닫고는 커다란 고기 요리용 포크를 꽉 잡은 채 헛웃음을 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몇 시간 전 숲에서 마법사는 그의 몸을 옮겨서 나무 틈에 숨겨 주었다. 부유 술법과 나무의 정령을 이용한 마법을 조합해서 쓴 것이었으리라. 덕분에 로트만은 마지막 순간 그가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어 버렸고, 이제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발탄…… 발탄더스. 이상한 문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로트만은 속으로 되뇌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런 거지, 사실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목소리라도 한 번만 더 들어 보면 알 것 같은데. 그러나 로트만은 문득 눈을 들어 모리스와 로베르토의 안색을 살피고는 그 투명한 홍조 위로 자기 안색도 거울처럼 비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랑에 빠졌군.

‘미쳤나.’

로트만은 자신이 그 마법사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음성을 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대체, 돌았나.’

그는 마법사의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성별도 알지 못했다. 골격으로 보아 젊은 남자로 짐작이 가긴 했지만 키 큰 여자라 해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고, 나이에 비해 몸이 탄탄한 중년이나 장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트만은 그를 사랑했고, 틀림없이 다른 둘도 그랬다.

“……그럼 우리끼리 결정해야죠?”

로트만은 마른 입술로 겨우 말을 내었다. 다른 둘도 돌아보았지만 운을 떼지는 못했다. 카밀라가 부끄러운 듯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뭔가 좋은 방책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일단 마실 것부터 시키죠. 얘기가 길어질 텐데.”

카밀라가 던진 수는 나쁘지 않았다. 고기 요리에 맞추어 질 좋은 독주를 댓 잔쯤 들고 나니 셋은 인류애가 충만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십 년은 사귄 절친처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며 주변 사람들의 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특히나 로트만은 술을 마시면 늘 그렇듯, 도박에서 되지도 않을 패를 받아 놓고는 돈을 걸 때의 심경이 되어 패기 있게 외쳤다.

“죽이죠, 뭐!”

“그렇지!”

모리스도 기분 좋게 노래의 대구처럼 받았다. 로트만이 열심히 끄덕거렸다.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렇죠. 그런 걸 팔아넘기면 쓰나, 음. 얼굴 모양도 살짝 남아 있고 말도 하는데, 음. 아무리 돈을 준대도 기분 찝찝하죠. 죽여 주는 게 낫지.”

말하면서 로트만은 실제로 좀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랬군. 그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술김에 하는 말이긴 했지만, 사실 아침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벌써 걱정하고 있긴 했지만 한편 후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취기와 타인의 설득을 빌려서라도 자신도 실은 이쪽을 선택하고 싶었던 거다.

물론 이천 굴덴이면 도박 빚 원금을 다 갚아 버릴 수 있다. 드디어 반은 해방이다. 그래도 역시 사람 얼굴을 달고 르핀어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해 대는 물건을 팔아넘기긴 싫다. 그건 잠정적 인신매매로, 저 잘난 척하는 모리스 말이 맞다.

‘내가 그래도 아직은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네.’

로트만은 기분이 좋아져서 육포 작은 접시 하나와 맥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다른 사람들도 와인이며 독주를 한 잔씩 더 시켰고, 내일 아침 사람이 섞인 마물을 최대한 고통 없이, 그리고 일부러 살처분했다는 걸 길드에 안 들키게끔 솜씨 좋게 죽여 줄 방법에 대해 토의하다가 헤어져 객실로 향했다.

계단참에서 다른 둘이 저희 방 쪽으로 걷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로트만도 등을 돌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모리스와 로베르토, 기레스와 마법사는 둘씩 같은 방을 썼지만 그는 혼자 남아 일인실을 받았다. 기레스네의 바로 옆방을.

그래서 그는 모리스나 로베르토와는 달리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척하면서 손쉽게 옆방의 열쇠 구멍에 눈을 붙여 볼 수 있었다.

실망스럽게도 열쇠가 안쪽에 꽂혀 구멍을 막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람. 그만 돌아갈까 생각한 찰나, 맑은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귀에 들어왔다.

로트만의 시야가 파드득 하얀 불꽃이 튀듯이 점멸했다. 포기할 수 없다. 여기 그것이 있다. 그가 평생 원해 온,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어떻게 잊고 있었지? 어떻게 그냥 돌아갈 생각을 했지?

그런데 그게 뭐더라?

로트만은 고급 호텔 숙박객의 지갑을 훔쳐 연명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도박과 달리 도둑질은 끊었지만 몸에 밴 기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옛 도둑, 현 도박꾼이자 포획꾼인 자는 제 방으로 돌아가 짐 속에서 철사 몇 줄과 나사 조이개를 꺼내 가져왔고, 열쇠 구멍을 쑤셔 꽂혀 있던 열쇠를 천천히 돌려서 밀어냈다.

객실 바닥에 열쇠가 떨어지면서 소리를 낼까 봐 순간 아찔했지만, 다행히 철사로 미리 고리를 만들어 두었던 부분에 대롱대롱 걸려 문짝 안쪽으로만 늘어졌다. 로트만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구멍에 눈을 딱 붙이고 이리저리 희번득거렸다.

오래 헤맬 건 없었다. 마법사가 기레스의 몸을 밀어붙이며 천천히 침대 쪽으로, 그러니까 열쇠 구멍의 거의 정면 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둘이서 왈츠를 추듯이 손을 잡고 가슴을 맞붙인 채. 마법사의 목소리가 첫새벽의 새소리처럼 로트만의 귀를 뚫었다.

“막시밀리안.”

그게 그 흑발 청년의 진짜 이름이었다.

바로 알 수 있었다. 로트만은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사물을 아무나 밖에서부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붙여 놓은 이름이 아니라, 그 사물 자체로 조각된 듯한 이름. 그는 저 마법사의 막시밀리안이다. 그리고 마법사, 아니, 저분은……. 청년이 웃으며 마법사의 눈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요른.”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상대의 후드와 은가면을 차례로 벗기고 그 입술에 키스했다. 폭포 같은 백발이 청년의 손가락 사이로 흐드러졌다.

로트만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우리를 버리셨어요?

원망이 먼저 몸을 지배했다. 왜? 설마 우리의 목숨 따위를 구하려고? 당신을 사랑해서 죽는 게 훨씬 나았어.

삶이 별거 있을 거 같아? 세상 따위가? 이렇게 살다 가는 게 다야. 다들 어정쩡하게 못되어 처먹어서 어정쩡한 죄만 짓다가 죽을 때가 되면 썩어서 죽어. 그때 우리는 당신을 가졌어. 당신을 갖고 싶어서 미쳐서 날뛰다가 서로 죽이고 죽을 수가 있었어. 그걸 어떻게 빼앗아 가 버릴 수가 있어?

가장 아름다운 멸절을 줘 놓고 어떻게 도로 가져가 버릴 수가 있어? 요른, 요른. 우리의 왕이여. 단 한 사람의 반려이자 유일신이여.

생생한 장면들이 색유리 파편처럼 뇌를 찢으며 되돌아왔고, 믿어 온 가짜 서사가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로트만은 문에 몸을 쿵쿵 부딪치기 시작했다. 굳이 열거나 부수려고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느라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로트만?”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카밀라가 말했다.

“이게 뭐 하는 짓……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안 아파?”

모리스도 걱정하듯 말하며 로트만의 어깨에 손을 댔다. 로트만은 그러나 이 두 작자도 결국 마법사의 방을 엿보러 왔다는 걸 눈치챘고, 냉큼 몸을 일으켜 등판으로 열쇠 구멍을 가리며 뱉어 냈다.

“꺼져.”

“뭐?”

“가!”

로트만은 으르렁거리며 문 앞에 팔을 벌려 섰다. 눈앞이 시뻘게진 가운데 그는 깊이 깨달았다. 아까 자신은 가짜 생각을 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속여 넘겼다.

옳은 일은 개뿔. 로트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징그러운 반쪽 얼굴을 단 마물 놈을 죽여 없애 버리고 싶었다. 속이 인간이든 뭐든 그딴 건 아무런 상관없다. 그놈은 처음부터 요른의 힘을 통해 빚어진 생물이니까 질투가 나서 죽이고 싶었을 뿐이다.

게다가 감히 요른이 인간 흉내를 내서 써 준 마법에 둥둥 떠서 실려 갔다. 그분의 힘에 푹 안겨서. 인사도 우리에게 한 게 아니었겠지, 제 마왕님께 했던 거겠지. 그러니 죽여 버려야 한다.

로트만은 자신이 그저 모두를 죽여 없애 버리고 싶은 것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두 놈도 마찬가지로.

이자들도 요른을 보았다. 가면을 쓰신 모습이나마 그 외양과 몸태를 며칠이나 곁에서 눈에 담았다. 이 문짝은 더하다. 이 문짝 놈은 로트만 자신이 복도에 쫓겨나 있는 동안에도 계속 객실 안에서 요른의 얼굴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다. 감히, 감히.

로트만은 빌어먹을 문짝을 몸으로 몇 차례 더 들이받다가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앞으로도 휘둘렀다. 그러나 성기사들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카밀라가 로트만의 명치를 찼고 로트만은 문짝에 등을 박았다. 그 바람에 이미 잠금이 풀려 있던 객실 문이 활짝 열려 버렸다.

포획꾼이 방 안으로 나동그라지자 카밀라와 모리스는 눈길로 그를 쫓았다. 그러다가 그만 환하게 드러난 요른의 얼굴까지도 함께 시야에 담고 말았다.

두 몰락 귀족은 어떤 빛에 눈이 멀어 버린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바닥을 차고 요른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서로 어깨가 부딪치는 바람에 균형을 잃었고, 얼굴이 몹시도 괴롭게 일그러지더니 허리의 검을 뽑아 망설임도 없이 이십 년 지기의 목을 노렸다. 그때 막시밀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는 한 손에 하나씩 둘의 멱살을 잡아 올려 각각 벽 쪽으로 던졌고 로트만의 명치를 차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요른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로트만은 그 와중에도 눈물을 흘렸다. 왜 인간의 마법을 쓰십니까?

왜?

그러나 로트만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요른이 치료계 정령 마법 중 수면 유도를 쓴 탓이다. 약과 함께 써야 하는 마법인데, 막시밀리안이 유리병에 들어 있던 액체를 셋의 입에 정확히 사분지 일씩 털어 넣었기에 일은 쉬웠다.

“또야?”

요른이 얼른 마스크와 후드를 도로 덮어쓴 채 목소리를 낮춰 투덜거렸다. 막시밀리안이 사과했다.

“미안해. 열쇠에 고정 장치도 붙여 둬야 했는데, 방심했어.”

그는 복도를 살피고는 문을 닫았고, 세 사람이 널브러져 있는 방으로 돌아와 각각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카밀라와 모리스부터 양어깨 위로 둘러업었다. 객실에 데려다 놓으려는 심산이다. 아주 잠깐 본 것뿐이니 내일 깨어나면 꿈인 양 잊어버리리라. 약과 마법의 부작용으로 머리야 좀 아플 테지만 숙취겠거니 하겠지.

요른은 섭섭해서 마스크 밑에서 입이 좀 삐죽 튀어나온 채로 막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못 했다.

하려고만 들면 꼭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긴다. 마스크도 벗고, 옷도 벗고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도 하니까 그런가.

‘역시 정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계속 떠돌아야 하는 이유야 잘 알고 있었지만,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갇혀 살면 되잖아. 어느 성 지하에라도 콱 처박혀 버리면 막시랑 실컷 할 수는 있겠지.’

막시밀리안이 둘을 데려다주러 나간 사이 요른은 침대에 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고민하며 로트만의 상태나 살피고 있으려니 곧 막시밀리안이 돌아왔지만, 로트만도 마저 객실로 옮겨 놓으러 금방 다시 나가버렸다. 그동안 요른은 얘기를 꺼낼 준비를 했다.

막시가 돌아와서 문을 닫고, 잠그고,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우고 고정 장치까지 마저 덧끼우고 나자 요른은 도로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

“우리 정착하자.”

“안 돼.”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저었고, 요른이 입을 대놓고 툭 내밀자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뭐라 더 설득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지만 말은 못 하고 상대의 왼손만 꼭 잡았다.

요른도 마주 그 맨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제 약지에 낀 반지가 괜히 막시의 약지에 부대끼게끔 손가락을 살짝 겹쳤다. 한참 손만 잡고 있다가 요른은 다시금 털어놓았다.

“난 평생 갇혀 있어도 괜찮은데.”

“안 돼.”

막시가 딱 자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요른도 그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마음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 떨군 고개나 쥐어 오는 손의 온기가 그림자처럼 새겨 오기에 안다. 그런 걸 막시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제 반려가 한평생 높은 성탑이나 지하에만 숨어 사는 걸.

요른도 충동적으로 내뱉긴 했지만, 자기 속을 찬찬히 더듬어 보자 결이 다른 상념들이 들썩거렸다. 사실 평생 혼자 갇혀 있는 건 싫다. 막시도 같이 있어 줬으면 한다. 물론 막시는 낮에는 나가서 일을 해야겠지만, 저녁에는 꼭 돌아와서 밤은 자신과 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무 불만 없이 언제까지라도 갇혀 지낼 수 있는데.

아니, 불만이 없을까?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손을 꽉 쥔 채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요른은 그 새카만 머리칼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이 인간이 된 건 고작 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2년간의 경험은 미래를 예감하기엔 충분했다. 사실은 불만이 없게 될 리가 없다. 고작 몇 년 후 자신은 울며 화를 낼 테고, 십 년쯤 지나면 미쳐 버리거나 최소한 어딘가 비틀리고 말리라. 마왕이던 시절의 정신 상태를 전제해서 평생 괜찮을 거니 뭐니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약해 빠진 몸에 정신으로 너는 잘도 버텼었구나.’

요른은 눈앞의 청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인간 주제에 그는 십 년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기괴한 생물을 사랑하며 용사가 되겠답시고 버텼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상대가 더욱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마법사는 청년의 뺨에 손을 대서 시선을 들게 하고는 입술에 키스했다.

청년도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북받쳐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요른은 숨을 멈추고는 상대의 이마에 이마를 마주 댔다.

인간이 된 후에야 요른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사랑받았던지 알 수 있었다. 마음을 비교해서 재는 건 의미가 없다지만, 그릇이 달랐던 건 사실이다. 호텔 방 침대에 앉은 채 백발의 마법사는 제 반려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알았어. 계속 여행이나 하자.”

막시는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문득 흔들려 그대로 요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지금 말해 줘 버릴까.

막시는 속으로 짧게 되뇌었다. 하지만 막시 자신이 많이 기대하고 있는 일이었고 요른도 기뻐할 일이었기에, 모든 게 완전히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입 밖에 내기 싫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실망해 버릴 확률이 백분지 일의 일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일찍 털어놓고 싶은 거잖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토해 내 봤자 짐은 더 무거워지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다잡으면서도 막시밀리안은 머리 한쪽으로는 속삭이듯 생각했다. 미안해. 지금 당장 정착할 수는 없지만, 두 달 후면 아마도 그 비슷하게는…….

정착하기 어려운 건 요른 때문이다. 요른은 한 장소에 머무르면 이목을 끌게 된다. 마스크며 옷으로 둘둘 감아 가려 놓아도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오래 접하면 결국 기억을 되찾는다.

요른 얘기로는 있었던 일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라고 한다. 일들이 남긴 흔적,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생물들의 기억을 왜곡해 둔 데에 불과한데, 사건 자체의 힘이 워낙 강한지라 어떤 계기로 그 흔적마저도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요른 자신의 모습이나 음성은 거의 각성제처럼 강력한 계기가 된단다.

“전 같으면 복원의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가 다시 되돌리면 되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까.”

요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었다.

더 무서운 건, 예전과 달리 이제 그들은 실제로 요른을 가지려고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까 모리스나 카밀라처럼 서로 싸움이 붙어 난장판이 되긴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요른은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내버려 두면 싸움의 승자는 요른을 덮치고, 범하고, 죽을 때까지 범한 다음 뼈까지 우득우득 씹어먹어 버리리라. 물론 막시밀리안이 허하지 않을 테고 요른도 알아서 방어할 테지만,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떠돌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둘 다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검문소를 통과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세계에서 그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면서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나 요른이라는 이름도 서류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니까.

때문에 둘은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다시 성행하기 시작한 민간 용병 길드에 등록하기로 했다. 개중에서도 가장 평판이 좋은 페랑 수도의 길드에.

길드 신분증은 일반 신분증을 대체할 수 있다. 최고급 신분증을 발급받으면 대륙 전체를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건 물론, 정부의 특수 허가증을 더하면 천제국으로도 건너갈 수 있다. 길드원 일 자체가 끊임없이 여행을 요한다는 것도 장점에 속했다.

길드원이 된 지 두 달 만에 둘은 급속 승진해서 금색에 별까지 달린, 사실상 그 둘만을 위한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그 후 둘은 한곳에 길어야 닷새 이상 머무르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단, 막시밀리안이야 원체 체력도 좋고 행군에도 익숙하지만, 요른은 몸이 그리 튼튼한 편은 아니었다.

‘마법사로서는 강하게 남아 준 건 다행이지만.’

막시밀리안은 새삼 곱씹었다. 요른이 인간이 되면서 힘을 다 잃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의 권능은 인간의 특수한 지능 같은 것으로 그 형식을 바꾸어 남아 주었다. 어느 나라의 언어든 금방 배우고 어떤 질서에 의지하는 마법이든 문제없이 익히는 식으로.

그래서 마법사로서는 대단히 강하지만, 몸은 아무래도 약하다. 노숙을 연속으로 서너 번만 하고 나면 버티기 어려워할 정도로.

정착시켜 주고 싶다. 막시밀리안은 수천 번도 더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실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 착실히 실행해 왔다. 아직 용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시절 카를한테서 사들여 뒀던 작은 고성을 떠올리고는 그 배우자인 샬로테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죽은 카를의 아내인 샬로테, 그로쉔 남부 시골의 새 영주가 된 자는 토지 사정에는 어두웠지만 금전에는 깐깐했다. 막시밀리안이 구매 계약서와 정황 증거를 기억 그대로 위조해 보내면서 소유권을 주장하자 샬로테는 상대가 카를의 생전에 성을 구매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믿어 주는 듯했지만, 대금 지불 여부는 따지고 들었다. 자기들 쪽에 기록이 전혀 없다면서.

지불 기록이야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이해했다. 폰 프란첸이 폰 린하우스에게 대금을 치렀던 문서야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프란첸이던 시절에 썼던 돈을 아까워하는 대신 그는 샬로테에게 일단 향후 2년간 대금의 삼분지 일을 나누어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나머지 빚은 성에 살면서 갚게 해 달라는 조건을 덧붙여서. 샬로테는 받아들였고, 추가 비용을 치른다면 사람이 살 수 있게끔 성을 미리 손질해 놓겠다고까지 제안해 왔다.

이제 그 2년이 지났다. 일반 길드원이나 심지어 각국 정부에서도 손을 대기 힘들 최고급 의뢰만 맡다 보니 돈은 빨리 벌렸기에 빚을 갚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기는 고급 생선 요리를 먹는데 제 반려는 왜 매일같이 버터 바른 흑빵 따위만 먹어 가며 절약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요른을 달래는 게 아슬아슬했지.

샬로테는 만족한 듯 막시밀리안과 그 반려를 성주로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 왔고, 다만 아직 성을 손질하는 중이니 두 달만 더 기다려 달라, 그 후에는 와서 살아도 된다고 서면으로 약속해 주었다.

‘요른에게는 두 달 후에 얘기해야지.’

막시밀리안은 가만가만 돌다리를 짚듯이 생각했다. 두 달 후 샬로테가 정돈된 성의 스케치를 보내오면서 만족하는지, 더 손질을 원하는지 여부를 물어 올 때 요른에게도 같이 보여 주어 의견을 청하면서 알려 주면 된다.

‘그때부터는 요른도 좀 더 몸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둘 다 길드원 일은 계속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일 년 중 계절이 제일 좋을 때, 혹은 차라리 너무 나쁠 동안은 성에서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달에서 석 달 정도는. 주변 부지까지 다 사들였으니 성탑이나 지하에 갇힐 필요도 없이 그 안에서는 그냥 평범하게 돌아다니면 된다.

막시밀리안은 샬로테에게 특히 서재를 확장하고 깨끗하게 손질해 달라고 부탁했고 책도 미리 주문해 주길 청했다. 철학, 윤리학과 법학, 세계사, 소설, 여행기까지 골고루.

전의 요른이라면 사람들 머릿속을 읽어 지식을 흡수했겠지만 지금은 책으로 읽어야만 한다. 그런 만큼 인간이 된 후 그는 책 읽는 걸 몹시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특히 따뜻하게 불을 땐 방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담요에 감겨서 읽는걸. 성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다 보니 얼굴에 멋대로 미소가 감도는 걸 느껴 막시밀리안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백발 청년이 그를 내려다보며 왠지 킥킥 웃더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막시밀리안이 물었다.

“어디 가?”

“떠나야 하잖아.”

요른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쟤들 깼을 때 내가 있으면 또 자극돼. 아직 자고 있을 때 얼른 도망쳐서 다른 숙소 가야지.”

맞는 말이긴 했다. 이럴 때면 둘은 쪽지만 남겨 놓고 자리를 떠 버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손을 붙잡아 앉혔다.

“잠시만.”

그는 상대의 손등에 키스했고, 요른이 얌전히 앉아 있는 사이 그의 행군화를 가져와서 발 옆에 놓고는 욕실로 가서 작은 수건 하나도 따뜻한 물에 적셔왔다.

요른은 방 안에서는 실내화를 신고 있던 터였다. 막시밀리안이 노숙 말고 숙소에서 잘 때는 발이라도 좀 편하게 있으라고 푹신한 걸로 사다 줬었다. 막시는 상대의 발에서 실내화를 조심스레 벗겨 내고 수건으로 발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닦아 낸 다음 막시밀리안은 그의 발을 한쪽씩 주무르기 시작했다. 발등과 굳은살이 살짝 배기기 시작한 뒤꿈치, 발바닥의 움푹한 아치를 거쳐 발가락 끝의 동그란 살까지 지압하고 나서 그는 고개를 내려 제 손보다 아주 조금 더 큰 발에 키스했고, 발목 위까지 감싸는 면양말을 신기고, 그 위로 가벼운 행군화를 신겨 준 다음 끈도 단단히 묶어 주었다. 요른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일어나도 돼?”

“응. 가자.”

막시밀리안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요른도 양손을 꽉 잡아 일으켜 주었다.

요른이 일어나면서 반동을 이용해 제 반려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랬다가 막시의 쇄골 바로 아래쯤에 걸려 있던 동그란 금속이 뺨에 배기는 바람에 살짝 고개를 틀었고, 막시밀리안이 그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은 호텔 밖으로 나와 말을 타지는 않고 끌기만 하며 조용히 걸었다. 아직 길이 좁으니 외곽으로 나가서야 올라탈 생각이었다. 이 밤중에 이 작은 마을에서 다른 민박을 구할 수도 없는지라, 차라리 근처 소도시까지 이동하기로 둘은 의견을 굳혔다.

막시밀리안은 굳이 위험물 보관소 쪽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스름한 풍경이 제 쪽에서부터 그의 뒷머리로 비쳐 들었다. 오늘 숲에서 잡아들였던 건 아마 카를의 편지에 쓰여 있었던 그 마물이었으리라. 인상착의가 일치한다. 얼굴 반이 사람이었던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가문의 문장도 어깨 쪽 피부에 눌어붙은 자.

소피아로부터 나중에 사정을 전해 들었던 바 있다. 그것은 한때 카를의 외조부, 르핀 왕국의 기사였던 귀족으로, 성황의 지시하에 르핀 왕국 마법사들이 진행했던 강화병 실험에 말려들어 잠식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이렇게 인연이 되어 직접 포획하게 될 줄은 물론 몰랐지만.

그 안에 아직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소피아는 드물게도 확신이 없는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었다. 아마 한때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그러나 생각을 털어 버리고 말을 몰아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나 요른이 나서서 어쩌자고 우길 일은 아니다. 다른 길드원들, 이전 세계를 기억하지 못하고 현세에만 속하는 자들 스스로가 결정해야만 한다.

과거는 조금씩 쇠진되어 간다.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곧게 쳐든 채 속으로만 되새겼다.

사람들의 기억과 기록된 역사 속에서만 지워진 게 아니다. 물질적으로 남은 마지막 유물인 마물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요른이 인간이 된 후 마물들은 약해졌다. 무엇보다 아무거나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게 가장 타격이 컸다. 종으로서 정해진 게 없다 보니 각자 제 몸에 맞는 음식을 알아서 실험하며 찾아야 했는데, 자꾸 틀린 걸 배 속에 넣고는 중독되어 죽어 갔다.

우연히 제 몸에 맞는 걸 찾아 먹고 더 강해지는 마물도 있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예다. 마물은 아마 성기사나 길드원들이 굳이 손을 대지 않더라도 십여 년 내로 대부분 자연 소멸하리라. 그때까지 기다리려면 당장의 피해가 너무 크니까 퇴치하고 다니는 거지만.

‘과거의 흔적이 다 밀려나고 나면 요른도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겠지.’

둘은 마을 외곽의 텅 비다시피 한산한 구간에 다다라 말에 올라탔다. 고삐를 잡은 채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그게 언제쯤이 될까. 기억이 남은 자들……. 현 세대의 모든 생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간들이 다 죽어 버린 후에는 가능할까.’

그러나 그때쯤이면 막시밀리안과 요른 자신도 이미 죽고 없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말 목을 내려다보았다.

요른은 사실 죽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의 본질을 이룬 정수는 다시 세상 만물 사이로 스며들리라. 그러나 한 고정된 인격과 육신으로서의 ‘요른’은 사라진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으로서 수명이 다해 죽는다.

요른이 막시 자신보다 먼저 죽을 리는 없다. 막시밀리안이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끔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걱정이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특히 따뜻한 숙소에서 잠들기 직전, 요른과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을 때면 내가 죽고 나면 얘는 어떻게 될까 하고 갑자기 가슴이 콱 메어오곤 했다. 억누르느라 입을 꾹 다문 채 상대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요른이 제 쪽에서 귀신같이 알아채고 면박을 주었다.

“걱정 좀 그만해, 좀.”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웃기네. 넌 나한테 죄책감 안 느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해서 맨날 제일 나쁜 상황만 머릿속에서 찾고 있잖아. 잠시라도 그냥 행복하면 불안해하고. 직접 안 읽는다고 모를 거 같아?”

요른이 기세등등하게 말하더니 막시의 뺨 한쪽을 검지와 엄지 사이로 쭉 잡아당겼다.

마음을 못 읽게 된 후, 그는 오히려 추측하고 알아맞히는 데에 재미가 들린 듯했고, 가끔 틀려도 기대가 배신당한 게 또 나름 재밌는지 마구 웃어 버리곤 했다. 마왕일 때는 몰랐던 맛이라면서.

혹은 정말로 내가 틀린 건지, 아니면 네가 부정하느라 우기는 건지 잘 생각해 보라면서 유혹하듯 살살 꼬실 때도 있긴 했다. 침대에서 막시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행위를 시킬 때 자주 그랬다. 그러면 막시밀리안도 못 이긴 척 결국 응해 주곤 했다.

아무튼 요른은 막시가 제 사후를 걱정할 때마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잡아당기거나, 머리카락을 뽑거나 주먹으로 머리통을 쥐어박은 후 달래듯 말해 주곤 했다.

“네가 죽으면 우린 죽음으로 연결되겠지. 달라질 건 없어.”

“…….”

“막시, 넌 참…….”

당연한 소리라 요른은 끝까지 뱉지는 않았다. 그저 픽 웃으며 상대를 한 대 더 쥐어박았을 뿐이다. 막시밀리안도 생각했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나는 사람이고 차별하는 자야. 그러니 죽음보다는 삶을 통해 너와 만나는 게 더 좋아.

되뇌며 그는 상대의 몸을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아 매만지곤 했다. 언제나 마지막 단말마처럼만 피어나는 생의 현재를 빌어.

요른은 사람의 몸에 갇혔으면서도 사고방식은 여전히 마왕이다. 아마 그는 정말로 끝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막시밀리안은 짐작했다. 제 반려가 죽으면 슬퍼하겠지만, 바로 그 슬픔과 고통을 통해 상대와 연결되었다고 느끼리라. 사라진 게 아니라 관계가 변화한 것뿐이며 삶을 통해서 만큼이나 이제는 고요한 죽음을 통해 그를 만나는 거라고.

막시밀리안이 주는 거라면 요른은 끝까지 뭐든 다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상실도 슬픔도 고통도. 하지만 막시 자신은 그럴 수 없다. 그는 요른이 죽으면 재빨리 자살할 것이다. 다른 길은 남지 않는다.

여러모로 근심과 불안에 떨다가도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안긴 자세가 불편할까 봐 품에서 놓아 주었고,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몸을 바짝 붙이고 손만 꼭 잡은 채로 잠들었다. 가끔씩 막시는 요른이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요른은 막시가 목에 사슬 끈으로 걸고 있는 반지를 손바닥 안에 담아 보면서.

마법사는 손으로 험한 일을 하지 않으니 반지를 끼고 있어도 괜찮다. 하지만 마검사는, 특히 막시처럼 여러 종류의 검을 써서 마물과 싸우는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반지가 우그러들 수도 있고 손의 감각이 한 끗이라도 어긋날 수도 있으니 따로 빼서 목에 거는 게 낫다.

‘우습지.’

아르테 왕국 북부 숲 근처, 말을 걸려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오면서 막시밀리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막시 자신의 체온이 옮아 든 백금 반지는 지금도 셔츠 밑으로 따뜻한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궁성에서의 혼인식은 마지막 순간에 파장되어 버렸다. 반지 교환이 이루어졌어야 할 차례에 하객들이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고, 주례를 맡은 필립도 주저앉아 버렸으니까. 때문에 요른은 인간이 되자마자 식부터 다시 올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엔 신분증이 없어 무리였기에, 둘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시청이 아닌 길드 주관으로 정식 부부가 되었다.

2년 전 그날, 둘은 대륙 남단의 숲을 빠져나와 근처 마을로 천천히 걸었다. 흑마법사들이 변형시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옛 ‘검은 숲’을.

요른이 막시밀리안이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생물들의 기억을 지웠는지 설명해 주었기에, 막시는 숲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일단 제 예복 재킷을 벗어 반려의 머리 위에 후드처럼 씌웠고 셔츠를 찢어 얼굴에도 둘러 주었다.

둘 다 수중에 돈은 없었지만 주머니에 회중시계는 있었으며 예식용 귀걸이도 달고 있었다. 덕분에 돈 대신 패물 일부를 내놓고 마을에서 숙소를 구할 수 있었고, 앞으로의 행보를 정할 때까지 그곳에서 이틀 밤을 머물렀다.

숙박 첫날,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충격으로 얼떨떨한 가운데 혼자 뭔가를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곁에 누운 요른에게도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요른은 바로 답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어.]

[응?]

막시밀리안은 이해하지 못한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왕이 완전히 각성했는데도 세상이 멸망하지도, 성검이 강림하지도 않았으니 고대 예언은 이루어지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막시밀리안은 결국 그 운명이 어떻게든 다시 쫓아와 둘의 덜미를 잡을까 봐 근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른은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다면서 웃었고, 어떻게 풀어 낼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차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예언은 이루어지지 못했잖아, 막시. 그러니까 이루어진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시간을 가둬 뒀던 질서가 무너졌다는 얘기야. 지금부터는 소위 고대인의 예언 따위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게 될 거야.]

한때 마왕이었던 자는 방긋 빛을 내듯이 웃었다.

[성황이나 천제의 질서라 해 봤자 현세의 것일 뿐이야. 그 정도 작은 것의 멸망을 위해 혼돈이 강림할 리가 없잖아? 반면 고대인들의 세계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하나의 대륙처럼 꽁꽁 묶어 포괄하는 거였는데, 그 질서에 구멍이 뚫려 버린 거야. 그네들 입장에서는 세계 멸망이겠지.]

[그럼 말하자면, 네 진짜 상대는…….]

[그래. 그놈들이었던 거지 뭐. 나도 뭘 알고 일부러 행동한 건 전혀 아닌데, 네가 물어서 돌이켜 보니까 그렇네. 구질구질한 고대인 놈들 같으니.]

막시와 자신은 지금 마왕 강림 전설이 예언이 아니라 옛 신화나 소설 취급받는 세상에 와 있는 거라고 요른은 마저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고대 문서들도 곧 같은 수순을 밟으리라고.

고대인들의 진술을 옮겨 적은 사본들은 대부분 버려질 거다. 원본은 보관되긴 하겠지만, 사료로써 다뤄지는 거지 예언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단, 고대 문서 중 표현 등 형식이 유려한 것들은 문학으로서 살아남아 필사되며 미래까지 유통되긴 할 텐데, 용사와 마왕 전설도 그에 속한다면서 요른은 왠지 자랑스레 웃었다.

세계는 이제 온전히 현재에만 맡겨진 거야. 하얀 청년은 뒤척이며 속삭이더니 막시의 품으로 쑥 들어와 가슴께를 킁킁거리다가 그대로 안겨 잠들었다.

다음 날 숙소 방의 문과 창문을 다 가리고 빗장까지 잠가 둔 후,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잠시 방에 남겨 두고 혼자 시내로 나와서 후드와 마스크를 구했다. 작은 마을이라 고급품은 구할 수 없어 일단 거친 목면으로 된 옷에 나무 마스크만 샀다. 그거라도 입고 쓴 채로 요른은 막시와 함께 페랑의 소도시까지 우편 마차를 타고 이동했고, 오델리 길드 분점을 찾아 자신들을 등록시켜 달라고 했다.

오델리에서는 처음에 당연히 미심쩍어했지만, 둘이 의뢰를 맡아 처리하는 실력과 속도를 보고는 금방 받아들여 승진시켜 주었다. 누런 종잇장이었던 신분증은 두 달 만에 도금된 얇은 금속으로 바뀌었고 곧 다른 길드들에서도 둘을 빼 오려 난리가 났다.

그즈음 해서 막시밀리안은 페랑의 길드 측에 혼인식을 주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길드는 기꺼이 승낙했고 대신 다른 길드로 나가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시청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이 김에 정식 신분증, 혼인증서도 만들어 주고 의뢰비 배급률도 조정해 주겠다면서. 막시와 요른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며칠 후 둘은 예비부부로서 페랑 수도 서편에 자리한 길드 전용 호텔의 예식홀에 입장했다. 그날만은 요른은 마스크가 아니라 베일을 쓴 채였다. 막시밀리안은 주례의 지시에 따라 잠깐, 아주 잠깐 베일을 들쳐 반려의 입술에 키스하고 서약의 말을 나눈 후 반지를 교환했다.

길드의 혼인식은 시청에서보다도 더 간소했고, 음악도 몇 곡 없었고 악대도 손이 거칠었으며 전체가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예식을 치러야만 했다. 막시밀리안은 돌이키며 새삼 뇌까렸다.

그런 장난감 같은 금속 반지, 서약의 말과 입맞춤 따위 사실은 무엇도 지켜 줄 수 없는 놀음에 불과하더라도 바로 그 놀이가 필요했다.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 버렸다면.

타블로도 시간의 질서도 쇠락해 버렸다면 남은 건 놀이뿐이다. 알맞은 소품을 갖추고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더는 절대적일 수 없다면, 어떤 의미와 장면들이 최소한 무대 위에서만은 진실일 수 있게끔. 그러니 요른도 숲에서 나오자마자 예식부터 치르자고 졸랐던 거다.

막시밀리안은 혼인식이 진행되던 내내 빌었고 그 후에도 하루에 몇 번씩은 빌며 다짐했다. 내가 이렇게도 어리석은 인간이라도, 이미 수만 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이 연극 속에서만은 네게 진실로 순수한 영원을 약속할 수 있기를. 너와 평생 놀며 네 반려를 연기할 수 있기를. 죽음도 뛰어넘어서.

“죽음도 뛰어넘어서.”

예식 때의 서약을 입 안으로 조용히 되새기며 이제 혼으로 치면 스물아홉, 육신은 스물일곱 살이 된 막시밀리안은 마을과 소도시 사이를 잇는 어두운 황야로 나섰다. 요른도 바로 뒤에서 따라오면서 손끝으로 작은 불빛을 밝혀 허공에 올려 보냈다.

소도시까지는 한 시간쯤 달려야 한다. 도착하면 거의 새벽이 되어 버리긴 하겠지만, 그러면 숙소에서 정오 정도까지 쉬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

길이 울퉁불퉁하게 험해지자 뒤따르던 요른이 백마를 탄 채 바로 옆으로 다가왔고, 막시에게 혀를 삐죽 내밀어 보이더니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도 그 뒤통수를 이삼십 피트 밖으로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따라갔다.

요른은 험한 길을 더 잘 달린다. 말을 다루는 기술이 다른 면에서는 그리 좋지는 않은데, 한번 올라타면 균형만은 잘 잡는다. 말이 워낙 요른에게 마치 반한 듯이 잘 따라 줘서 그렇기도 하다.

거리를 맞춰 달리다 보니 검기만 하던 동녘이 푸르게 어스름해졌고, 소도시의 창문 불빛이며 굴뚝의 흰 연기가 먼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른이 말의 걸음을 살짝 늦추고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길고 낙낙한 밝은색 옷으로 사지를 감싸고, 머리에는 후드를 깊이 덮고 은 마스크를 쓴 채였다. 그래도 그 윤곽은 마치 밤의 어둠이 그대로 태양이 된 양 막시밀리안의 시야를 꿰뚫었다. 그리운, 한때 눈먼 빛인 줄 알고 받았으나 그림자 속에서야 천천히 몸을 찾은 신탁처럼.

―막시.

요른이 전송 마법으로 말을 전해 왔다. 어딘지 조급한 기색을 읽고 막시밀리안은 웃어 버렸다. 이제 반려의 목소리만 듣고도 심경을 꽤나 잘 파악할 수 있었던 탓이다.

―배고프…….

“숙소 찾으면 객실에서 빵부터 먹자.”

막시밀리안이 먼저 전했다.

“밤에 갑자기 움직였으니 배고플 거야. 식당은 안 열었겠지만, 아까 빵이랑 귤, 호두 챙겨왔어. 식기만 달라고 해서 먹고 자자.”

―응.

요른이 배시시 웃더니 등을 돌려 다시 말의 목을 톡톡 두드렸다.

막시밀리안은 잠시 멈춘 채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밝고 낭창한 몸과 그 몸이 움직이며 제 앞으로, 옆으로, 온 사방으로 비춰 내는, 바르지도 어긋나지도 않은 채 그저 영원히 변하고 또 변해 가기만 할 세계를. 

어쩔 수 없어. 그는 속삭이듯이 생각했다.

요른은 막시가 이렇게 말하면 싫어한다. 기껏 사람까지 되어 줬는데도 헛소리를 한다고. 그래서 막시는 입은 다문 채 제 안에서만 깨닫곤 했다. 너는 여전히 내 신이야.

언제나 그토록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있으니.

그리고 막시밀리안은 고삐를 채어 자신도 그의 풍경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