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도 한 가운데의 투트 크라흐트 별장, 금발의 마법부 장관은 닷새 전부터 침실에만 갇혀 있었다.
남이 가둬 둔 게 아니라 스스로 연금한 거다. 커튼을 창마다 몇 겹으로 드리우고 문도 빗장까지 잠가 둔 채 그녀는 고용인과 근위병에 명해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식사만 한밤중에 문 앞에 놓고 가라고 했다.
3년 계약을 맺고 고용된 저택 관리인, 전 같으면 하인장이라고 불렸을 직책을 맡은 자는 한숨을 쉬며 별장 복도를 떠돌았다. 벌써 세 번이나 수상이 그의 머릿속으로 말을 전해 장관의 안부를 물어 왔었기 때문이다. 분명 린다에게 직접 묻다가 워낙 답이 없으니 관리인에게까지 내려온 것이리라. 관리인도 그때마다 그저 솔직하게 답했다. 투트 크라흐트 장관께서는 내내 침소에만 처박혀 계신다고.
그러나 관리인도 집주인의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했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만 하자면 사실 그도 집에 가서 제 방에만 처박히고 싶었다. 가족도 만나지 않고 집 안에서도 딱 제 방 안에만.
‘그래도 월급을 받아야 하니까 매일 나와서 일을 하는 거 아니야.’
미화원 등 다른 고용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게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복도를 걸어 정원으로 나오며 관리인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장관은 회의도 빼먹고, 집무실에도 나가지 않아도 월급이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그럴 리는 없지. 저러다간 경질될걸.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직책에서 잘리는 것 따위 아무래도 좋을 만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렇겠지.
마음속에서 조그맣게, 그러나 현실로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불길한 속삭임이 피어났다. 관리인은 얼른 고개를 털어 버리고는 합성목의 상태를 살피러 장미정원 옆 온실에 들렀다.
크라흐트 장관은 마왕의 힘을 이용해 섞어 낸 신종 식물들을 워낙 싫어해서 제 정원에서도 농장에서도 기르지 않으려 들었지만, 몇 주 전 다른 부처의 장관이 자랑스레 모종을 선물해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한 그루만은 온실 한쪽에 따로 심었었다.
일부러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심었는데도 고무나무와 알라만다, 덩굴장미, 사과나무와 엉겅퀴가 섞인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식물은 겨우내 부쩍 자라나 온실 천장에까지 이르러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신왕의 힘이 안팎으로 감돌아 다섯 그루의 수종이 안에서 고루 잘 섞인 건 물론 낯선 온실의 햇볕과 물, 흙도 나무 안으로 잘 섞여 들어 준 덕이다.
관리인은 그러나 온실에 들어가 식물을 올려다보고서 숨을 멈추었다. 정원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어떻게 며칠 만에 이 거대한 나무가 이렇게 죽어 갈 수가…….
탄식처럼 생각한 순간 식물의 썩은 몸체가 그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관리인은 옆으로 뛰었지만 긴 나뭇가지가 그의 어깨를 채찍처럼 후려치는 걸 피하지는 못했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고통 속에 뒹굴며 눈치챘다. 식물들이 다 죽어 가고 있다.
나무와 꽃 대부분이 썩어 시든 가운데 강한 것 몇 종만 살아남아 서로 살기 어린 태도로 대치했다. 엎드린 채 관리인은 문득 숨쉬기가 힘들다고 느꼈다. 온실 안은 후끈후끈했고 산소가 희박했다. 마치 식물들이 서로 공기를 두고 싸우기라도 하듯이, 입을 앙다물고 제 안에 들어온 호흡을 남에게는 내어 주지 않으려고 애쓰기라도 하듯이.
장미정원 바깥의 본뜰, 검정알나무의 숱을 치고 있던 정원사는 잠시 가위를 멈췄다. 온실 쪽에서 누군가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을 찌푸린 채 머리를 털어 버렸다.
‘듣기 싫어.’
남의 목소리 자체가 거슬린다기보다는 공기가 남의 목소리를 실어다 주는 게 싫었다.
비명 같던 소리는 곧 잦아들었다. 그러나 새소리며 나뭇잎에 깃든 바람 소리, 멀찍이서 말이 푸르릉대는 떨림이 여전히 귓가를 간지럽혔기에 정원사는 점점 더 어금니를 깊이 깨물며 입술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곧 관목에서 등을 돌려 눈앞에 멀리까지 풍요롭게 열린 풍경을 보았다. 너비가 수백 피트는 되는 정원.
구름 그림자, 풀잎의 톱니 같은 가장자리와 나무 꼭대기에 걸린 미풍, 벌레의 날갯짓과 뙤약볕을 반사하는 모래알들이 시야를 메웠으며 발밑에서는 벅찰 정도로 진한 흙내음이 올라왔다. 모두 다 공기가 전달해 주는 것들, 그분이 전해 주시는 것들.
정원사는 알고 있었다. 늦어도 황성 발코니에 선 그분의 모습을 뵈었을 때부터는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이렇게도 자기 몸 안에만 갇힌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아닌 온갖 다른 것들을 다 듣고 보며 느낄 수도 있는 건 모두 왕의 권능 덕분이라는 걸.
왕께서 즉위하신 후부터 세상은 늘 미치도록 아름답기만 했다. 사람들 사이사이를, 생물과 사물의 틈새를 신왕의 권능이 가장 깨끗하고 맑은 공기처럼 빈틈없이 채우고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모든 것 사이에 있으며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분, 만민의 왕. 눈에 비치는 것은 왕의 권능에 씻긴 채로만 전해 왔으며 들리는 것도 향으로 실려 오거나 피부에 닿는 것도 그러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정원사의 눈 귀에, 피부와 코, 가끔은 머릿속에 직접 실려 오는 풍경은 그 한가운데에 반짝이는 실금이 가듯 한 가지 사실만을 드러냈다. 그건 단 한 사람이었다.
그 맑은 공기는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이었다.
“요른.”
정원사는 가위를 손에서 놓친 채 그 여리고 촉촉한 이름을 입에 담았고, 입술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요른……. 요른.”
정원사는 눈앞의 풍경을 보았다. 잎사귀를 보았고, 하늘을, 구름을, 사물들의 그림자와 푸른 초목과 나비의 날개를 두루 보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사방 어디에나 그분이 계셨다. 아름답고 투명하고 사랑스러운 요른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고, 귓가에서 남실거렸고 온몸의 살결에 푹 닿아 있었으며 숨 속에 젖어 들어왔다. 다만 끔찍한 점은 그녀가 바로 그 사방 모든 것과 그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 돼.”
중얼거리며 그녀는 수풀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수풀 쪽에서도 그녀를 쏘아보았다.
적이다, 그녀는 생각했고 수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순간 어딘가에서 또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녀는 흠칫하며 귓가에 손을 대었다. 그 빌어먹을 소리와도, 멀찍이서 소리를 지른 자와도 그녀는 요른을 공유하고 있었다.
“안 돼.”
그녀는 가위를 쳐들어 수풀을 베고 나비를 손안에 짓이기고 꽃을 갈가리 찢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흙을 들쑤셔 벌레 하나하나를 잡아내어 죽였다. 요른, 내 요른.
내 거야. 내 거.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면서도 머리 한쪽에 그녀도 잠시나마 의문을 갖기도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우리는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이렇게도 명확한 진실에 전에는 눈멀어 있다가 며칠 새에야 돌이킬 수 없이 깨달아 버린 걸까. 이 모든 게 단 한 사람이라는 것. 이렇게나 무궁하며 무한한 신성이 요른,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이름도 있고, 그 이름에 꼭 맞는 너무도 예쁜 몸도 얼굴도 있어 지금 한번 피어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음률처럼 살며시 웃기도 하는 자라는 걸. 내가 이 손안에 가질 수 있는, 지금 당장 가져야만 할.
누가 왕을 이런 작디작은 존재로 전락시켰는가.
아니, 각성시켰는가.
어느 쪽인지 그녀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끊임없이 그 이름을 부르며 어느새 흐느낄 뿐이었다. 요른, 요른.
내 요른.
“요른.”
필립도 집무실에서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서류들을 차례로 읽었다.
그는 린다의 머리로 말들을 보내는 건 이제 포기했다. 그녀가 답하지 않는 건 아마 필립과 비슷한 심경에 잠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의 힘을 필립과 공유하는 게 싫고 무서운 거다.
아마 그녀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필립을 사랑했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우리라.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져 오는데, 기쁘기는커녕 요른을 사이에 끼고 증오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감히 너 따위가 그분의 힘을 빌려 쓰다니, 하고.
‘린다는 원래 요른을 엄청나게 싫어하기도 했으니까. 여러모로 혼란에 빠져 있겠지.’
필립은 한숨을 내쉬고는 각 부서에서 오늘 오전에 갓 올려보낸 보고서들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마법부 보고서. 마물들이 축사에서 자꾸 난폭하게 싸움을 일으킨다. 서로 싸울 뿐만이 아니라 몸이 안에서부터 쩍쩍 갈라져 죽어 버리는 것들도 있다.
농축산부 보고서. 합성 식물들은 모종 단계에서부터 켜켜이 부서져 죽어 가고, 합성 동물들마저 내장과 뼈가 갈라져 죽어 버리곤 한다.
산업부 보고서. 섞어 낸 인공 보석들도 마찬가지다. 광물이 서로 잘 섞이지도 않는 데다가, 이미 성공적으로 합성해 둔 것들도 부서지고 깨져서 망가져 버린다. 마치 섞인 성분들이 그 섞음의 매개가 되어 준 것을 두고 뒤늦게 서로 다투기라도 하듯이.
여론 특별조사회 보고서. 사람들 사이의 다툼도 점차 잦아지고 있다. 숨어 틀어박힐 저택과 제 방이 있는 부유층은 알아서 서로 거리를 취하고 모임을 삼가지만, 다세대 주택, 술집이나 민박에서는 상황이 악화된 지 오래다. 술 취한 민중은 아무 시빗거리도 없는데도 갑자기 싸움을 일으켜 살인까지도 이르곤 한다.
서로 공기를 사이에 두고 그 소유권을 다투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구경꾼 하나가 농담처럼 했던 말을 부처의 실무자는 밑줄까지 쳐서 보고서에 담아 두었다. 필립도 그 문장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짚었다.
“필립.”
그때 눈앞의 풍경이 흔들리는 바람에 필립은 무심코 종이들을 구겨 쥐었다.
“왕이시여.”
수상은 한참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 배 속이 쑤셨다. 요른의 얼굴도 몸도 너무 가까이 있었다. 당장 그 옷을 벗기고, 맨살이 서로 꽉 닿게 안고는 집무실 탁자 위에 엎드려 놓고 안까지 파고들고 싶을 정도로.
필립의 성기가 터지도록 불어나 허벅지를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구하게 방긋 웃으며 수상에게 서류 한 질을 내밀어 왔다. 막시밀리안이 작성해 준 서류다.
“준비해 주세요, 수상.”
“뭘 말입니까, 전하.”
“결혼하려고요.”
요른이 필립의 녹안을 빤히 응시했다.
“짐작은 하고 계셨지요? 우리 막시랑 결혼하려고요. 그치만 성황은 결혼 안 했었으니까 황국 전통 의식 같은 건 없겠다, 그렇죠?”
마왕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끄덕거렸다.
“하지만 여덟 왕국의 왕들은 결혼했었잖아요. 프란첸이 그로쉔 출신이니까 그로쉔 국왕 혼인식 형식을 따르기로 해요.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치르고 싶으니까 아주 간소하게요.”
열심히 조잘대다가 요른은 고개를 갸웃하며 필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수상?”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필립이 쉰 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그는…….
요른.
필립은 그 이름을 입술 사이로 소리 없이 되뇌었고, 입과 혀가 그 발음에 온통 베여 나가는 듯 끔찍하게 상처 입었다. 이 이름조차도 그의 소유다.
막시밀리안은, 그는 당신에게 그 이름을 선사한 자다. 누구든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이 그의 것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게끔.
그는 당신에게 이름을 주고 형상을 부어 땅에 붙잡은 사람이다.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요른이다. 우리가 아무리 당신의 이름을 불러봤자, 그 모습과 얼굴을 숭배하며 사랑해 봤자 우리는 영원히 막시밀리안의 요른을 사랑하며, 그를 갖길 원하는 꼴이 될 뿐이다.
당신은 오직 그만의 것이기에 단 한 사람이다.
‘막시밀리안 자신은 아주 최근에야 깨달은 거겠지.’
그 성기사는 이제야 제 운명을 받아들였다. 감당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이 변하다 못해 아예 부서질 각오를 하고 상대의 몸도 혼도 매일같이 그대로 취하고 있고, 그래서 ‘요른’도 갑자기 둑이 터져 버린 듯한 기세로 노골적으로 온 세상에 훅 짙게 깨어 나오고 있다.
‘알고 있어. 우리는, 요 몇 주 당신네 둘 다를 눈앞에서 보아온 자들은 이미 뻔히 다 알아. 민중이야 아직 의식하지는 못하는 거 같지만, 마음 어딘가에서는 결국 다들 알고는 있을걸. 자기들이 이미 빼앗긴 자를 두고 다투고 있다는 걸.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선포까지 해야 하나? 꼭 직접 낱낱이 알려 줘야 해? 필립은 자신이 수상으로서 고심하고 있다고 믿으려 애썼다. 그러면 민중은 정말로 돌아 버릴걸.
절망해서 미쳐 버릴 거야.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다 돌아 버릴 테고.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몰라.
멸망이다. 수상은 생각했다. 그 혼인식 날이 대륙이 멸망하는 날이 되리라. 그러나 필립은 자기 안에 훨씬 더 유치한, 그러나 사실은 우습도록 더 가깝고 간절한 고통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굳이 보여 줄 것까진 없잖아.
필립은 의자 손잡이를 꽉 쥐면서 자신의 얼굴도 눈도 벌겋게 달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굴러떨어질 듯했고 무서워서 사지가 떨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필립 자신이 그 둘이 정식으로 맺어지는 모습을 전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굳이 혼인식을…….”
“해야죠.”
요른이 잘라냈다.
“난 막시 거야. 당연히 대륙의 생물과 무생물 모두한테 다 정식으로 보여 줘야지. 사람들은 물론 새나 벌레한테까지도, 발밑의 돌멩이나 모래알한테도 보여 주고 들려주고 싶어.”
결국 눈물을 떨구며 필립은 속으로 힘없이 뇌까렸다. 악마. 그 아름다운 왕은 필립의 눈앞에서 과연 악마처럼 웃으며 영롱하게 조잘거렸다.
“식을 준비해 주세요, 수상. 사람들 머릿속으로 초대의 말을 보내는 건 제가 직접 할 테니까요. 응?”
다행이다. 필립은 고통 때문에 정신이 없는 채로도 생각했다.
망명 간 성황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해 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 * *
“이거 먹어.”
왕이 공화국군 여단장에게 닭고기 스프 그릇을 내밀었다. 둘이 나란히 침대에 누운 채였다.
막시밀리안은 멍하니 턱 밑에 디밀어진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요른이 가만히 머릿속으로 답해 주었다. 아르테 자치주 바닷가 레스토랑 부엌에서 가져온 거고, 지방에서는 유명한 식당이라고. 막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그릇에 다 퍼 놓은 걸 전송시켜 버리면 어떡해. 누가 주문한 걸 텐데.”
“괜찮아. 요즘 식당 파리 날려. 솥에 가득 남아 있으니 한 국자 더 퍼내기만 하면 될걸.”
대륙 어딜 가나 상업은 전에 없는 침체기다. 사람들이 각자 제 방에만 처박혀 건조품 따위나 들며 연명할 뿐 도무지 밖에 모이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사실을 전하듯 말했다가 연인의 안색이 변하는 걸 보고 왕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못 받아들인 건가?
아니, 받아들였기에 괴로워하는 거겠지. 요른은 그릇을 허공에 동동 띄워 놓고 재촉했다.
“먹어. 너 요즘 너무 말랐어. 며칠 새에 그렇게 빠져 버리는 게 어딨어?”
말해 놓고 요른은 상대의 속을 읽고는 급히 덧붙였다.
“물론 그래도 네 몸은 훌륭해! 네 몸 너무 좋아. 네가 어지러워하거나 아플까 봐 그러는 거지, 난 너 말라도 쪄도 너무 좋아!”
“……숟가락도 줘.”
“응.”
요른이 얌전히 은 숟가락도 하나 넘겨주었다. 막시밀리안이 두어 번 떠넘기는 흉내만 내다가 그릇을 도로 침대 위에 놓았다. 속이 안 좋아서 더 넘길 수 없는 것 같았다. 요른은 쯧 혀를 차고는 그릇을 거실 식탁 위로 전송시켰다.
밤 아홉 시, 둘은 막시의 작은 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막시는 아직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요른은 막시의 잠옷을 헐렁하게 걸친 채였다.
요른은 저녁 여섯 시에 아래 속옷만 걸친 맨몸으로 막시의 사택에 찾아왔다. 거실에 살그머니 내려앉더니 옷을 달라고 빽빽 조르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은 자기 잠옷 여벌을 입혀 줄 수밖에 없었다. 입혀 놓자 요른은 킁킁 소매와 목깃 냄새를 맡아보고는 만족한 듯 침대에 누웠고, 막시더러도 얼른 곁에 누우라고 졸랐다.
덕분에 둘은 해도 아직 지지 않은 때부터 침대에 누워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요른이 가끔 막시의 허리께를 만지고, 막시도 가만히 손을 들어 요른의 뺨을 쓰다듬긴 했지만 딱히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공유했을 뿐이다.
몇십 분은 흐른 후에야 요른은 몸을 일으켜 막시에게 스프를 권했고, 실패하자 다시 그저 서로 꼭 껴안고 두어 시간은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또다시 요른이 먼저 운을 떼었다.
“어제 필립한테 혼인식 준비를 부탁했어. 네가 준비해 줬던 서류 들고 가서.”
“응.”
연인이 가슴께에서 속삭이는 걸 막시는 듣고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어차피 뇌로 전달받아 알고 있던 일이다.
그래서 스프를 삼킬 수도 없었던 거다. 막시는 한참 그냥 누워만 있다가 연인에게 속삭였다.
“너 좋은 냄새 나.”
“알아.”
“무슨 냄새야?”
“네가 좋아하는 냄새.”
요른이 킥킥거렸다. 자기 자신이라야 다 막시한테만 맞춘 거다. 하지만 막시 안에는 그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워낙 크니까, 드러난 부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니까 물어 오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정확히 무엇의 어떤 냄새일지는 요른 자신도 모른다. 막시가 아직 기어 다니던 때 접했던 것들은 물론, 태어나기도 전부터 몸속에 멀고 먼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갖고 있던 기억을 그러모아 정결하게 섞어 놓은 냄새이리라. 그러니 지금은 다 사라져 버린 사물이나 날씨의 내음일 수도 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목덜미쯤에서 숨을 쉬다가 눈을 감았다. 요른은 그의 자아를 작은 배처럼 떠받친 깊은 바다까지도 자신의 체향을 삼켜 찰랑이는 걸 느꼈고 그 리듬에 맞춰 함께 눈을 감았다.
그대로 둘 다 까무룩 잠들 뻔했지만 막시가 눈을 떴다. 지나치게 좋은 꿈에서 일부러 벗어나오려는 듯이. 그리고 팔을 부드럽게 풀더니 요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길래 요른도 막시의 암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막시는 며칠 전부터는 마왕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요른은 지금 그에게 마음을 풀어놓는 대신 신중하게 겹겹이 걸어 닫은 채 되뇌었다. 바보.
열 살 때 막시는 병상에 누워 자해를 하면서까지 요른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때 마왕은 차마 그의 마음속을 읽어 내지 못했고, 최근에 막시가 다시 마음을 열어 준 후에야 뒤늦게 돌이켜 당시 그의 심경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이 멍청이가.
죽어 가며 어린 막시밀리안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요른처럼 무구하면서도 전능한 존재라면 세상 모두를 아무 차별 없이 다 행복하게 해 주려고 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인이든 범죄자든, 어떤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든 상관없이 마왕은 그들의 온갖 끔찍한 소원을 다 들어 주어 버릴 것이며, 그리하여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말 거라 확신했기에 그는 마왕을 봉인시키는 길을 택했다.
―바보.
마왕은 여전히 마음을 꽉 닫은 채 아주 작은, 차라리 통풍구같이 좁은 창문만 하나 열어 그 한마디만 따로 떼어 전했다.
막시밀리안은 그저 받아들였다. 마왕은 주먹을 들어 그 관자놀이도 제법 아프게 콕콕 쥐어박았는데, 막시는 그것도 받아들였다. 뭔진 몰라도 제가 맞을 짓을 하긴 했다고 믿나 보다. 요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역시나 혼자서만 생각했다. 그건 너잖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길 바라던 건 너였잖아. 딴 놈들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나는 오직 네 소원만을 들어 주었을 거야, 막시.
“넌 멍청해.”
마왕은 입을 열어 조곤조곤 전해 주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맨날 모두가 다 행복하기만 바라고 저 혼자 행복할 생각은 죽어도 못 해. 성황국 기사도에서 오직 보편타당한 것만 원하고 실천하랬지? 그치만 넌 기사도가 없어도 알아서 그러고 살걸. 그건 그냥 너인 거야.”
“아냐. 이젠 안 그럴 거야.”
막시가 질책으로 받아들였는지 제풀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난 너만 원해.”
너만 있으면 돼. 다시는 세상 같은 거 생각하지 않을게. 막시밀리안이 간절하게 전하며 요른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댔다. 요른은 그 마음을 읽었고 속으로 피식 웃어 버렸다. 멍청이.
‘네가 진짜로 그게 되는 인간이면…….’
그러면 왜 내가 굳이 이런 성대한 혼인식을 하려고 들겠어.
‘너는 내가 식을 치르고 싶어 하는 줄 알지?’
너는 아주아주 거대한 존재인 나를 네가 취해 버린 줄 안다. 모든 것 사이에서 모든 것이어야 할 자를 네 반려라는 작은 한 사람으로 좁혀 버렸으며, 그래서 만민이 질투로 미쳐 가는 거라고.
사실은 그 반대잖아.
오직 너만이 나를 사랑해도 좋았으리라. 요른은 새삼 곱씹었다. 그러면 나는 진실로 작고도 작은 너만의 요른으로 남고 다른 자들은 내게 무심했겠지. 하지만 너는 끝까지 나를 세상 모두가 다 바라야만 하는 것, 모두가 사랑하여 갖고 싶어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사랑한다.
너는 무언가가 네게만 아름답다는 것, 네게만 사랑스럽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견디지도 상상하지도 못한다. 모두에게 아름답고 옳은 것만을 욕망하거나 아니면 네가 욕망하는 것이 모두에게도 아름답고 옳아야만 한다. 막시밀리안.
‘처음부터 그랬지.’
마왕은 옛 그로쉔 왕국 수도의 골목을 떠올렸다. 그때 갓 인격을 얻었을 당시에야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 요른은 알 수 있었다. 처음 그 시체에 섞여 들었을 때의 자신이 사람의 눈으로 보아 멀쩡했을 리가 없다는 걸.
기괴하고 뒤틀린 모습이었으리라. 얼굴도 없이 빛과 어둠으로만 된 새가 다 썩어 가는 어린애 시체에 섞여 들어 반인반마의 형상으로 변했다. 우연히 들렀을 뿐 땅 위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관심을 품을 자아도 없었기에 금세 다시 날아오르려 했다. 하지만 어린 막시밀리안은 그것에 홀린 듯 끌렸고 기이하게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저 자신이 처음으로 독점욕을 느낀 대상을 세상 만물을 홀릴 만큼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생물이라 상상했고,
제가 갖고 싶었기에 그를 땅에 내려와야만 하는 위험한 자라 여겨 붙들었으며,
다시는 떠나기 싫게끔 유혹했다.
‘나야 네 상상을 그대로 입었던 거고. 지금도 그러고 있지.’
마왕이었다가 요른으로 취해진 것이 아닌, 요른으로 취해졌기에 지상의 마왕으로 남은 새가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이번 생애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해, 막시?
방향만 바뀌었지, 달라진 게 없잖아.
네 사랑을 죽여서만 보편타당한 것을 좇을 수 있든, 네 유일한 사랑이 보편타당해야만 하든. 악으로서든 절대자로서든.
‘너는 나를 항상 신으로 만들어서밖에는 사랑하지 못해.’
그래서 이렇게 수프 한술 못 넘길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마찬가지지. 마왕은 조용히 뇌까리며 막시의 안을 뒤졌다.
혼인식은 삼 주 뒤다. 그날 정말로 멸망이 도래하고 말리라는 공포,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려 하면서도 결국 심장이 썩어 버릴 정도의 죄책감. 그럼에도 너는 선포해야만 한다. 인간의 방식대로 예복을 갖추어 입은 채 의례의 형태로 공표해야만 한다. 네가 날 가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그걸로 족해. 마왕은 혼자 뇌까렸다. 난 너만의 것이면 돼, 막시. 십오 년 전에 이미 말했잖아. 다른 자들은 필요 없다고. 그러면 우리는 정말로 어느 버려진 성이나 오두막에 갇힌 채 영원히 단둘이서만 꿈을 꿀 수도 있을 거야. 가시덤불과 숲으로 성벽도 창문도 문도 칭칭 감아 막아 버린 채.
하지만 너는 아니지. 너는 전 세계에 대고 선포해야만 하는 거야. 이자는 내 것이고 그러므로 너희도 모두 나와 같이 이자를 원해야만 한다고.
‘멸망을 불러오는 건 너야.’
네 곧고도 곧은 맹목이다.
그러나 요른은 막시에게 그 점을 굳이 일깨워 주지는 않았다. 막시는 끝까지 마왕 자신이 굳이 혼인식을 치르고 싶어 한다고 착각하고 있으리라. 자신은 싫고 무서운 걸 꾹 참고 그에 따르는 것뿐이라고.
상관없다. 요른은 되뇌었다. 사실 다를 것도 없다. 요른은 어릴 때부터 언제나 막시의 감춰진 소원을 들어 주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뿐이니까.
“야.”
마왕은 모른 척 상대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응?”
“너도 잠옷 입어.”
“응. 입고 올게.”
“똑같은 걸로 한 벌 맞추자.”
요른이 말했다.
“우리 혼인식 전에 잠옷 똑같은 거 한 벌 맞추자. 재봉사들도 다 망해 버리면 못 맞추잖아.”
막시의 마음을 읽어 내며, 그의 시선이 무심코 향한 곳을 따라가며 요른은 머릿속으로 물었다. 검날은 갈아뒀어?
응. 막시도 눈을 벽의 단검, 그리고 옷방의 나무 상자들 쪽으로 향한 채 머릿속으로 답했다. 식을 올린 후 둘은 여행을 다니게 될 것이다. 검이 반드시 필요한 여행을. 마검도 보통 검도 다 챙겨 가야 한다. 세계는 마물만 물리치면 되던 시절보다 훨씬 더 거칠어질 테니까.
“막시.”
―막시.
부르자 막시는 다시 요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요른은 그 눈동자를 마주했고, 막시의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그 눈 속에서부터 자신을 보았다.
요른은 천천히 상대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부드럽게 자신의 모습을 어루만졌다. 일 년 전, 십 년 전, 십오 년 전, 마왕은 이제 그게 갓 스물 중반이 된 인간 청년에게 어느 정도의 세월인지 이해했다. 그 세월 내내 요른의 모습은 그의 안에서 변하지 않았다. 일그러졌을 때조차 박해당하는 신이었으며, 부서질 때는 순교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오롯하게 숨 쉬는 영원이었다.
이게 되고 싶었어. 요른은 멍하니 그의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저 요른이고만 싶어. 내 힘을 모두 포기해서라도, 단 한 치도 변할 수 없이.
막시밀리안은 언제까지나 그를 그렇게 지켜 줄 것이다. 빛과 같은 확신에 보호받으며 생물은 막시에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의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부터 다시 막시밀리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왠지 어지럼증을 느꼈다.
‘뭐지.’
막시 안에서야 늘 만져서 익숙했지만 요른 자신의 것으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요른이 속을 가누려 애쓰며 막시의 얼굴을 본 순간, 왼쪽 뺨에 새겨진 흉터와 며칠 새 선이 더 강팔라진 턱, 죽어 가는 짐승처럼 싸늘해진 암회색 눈동자가 시야에 새겨졌다.
그림이 아니다. 피할 수 없이 의미가 굳어진 문자처럼 그것들은 요른의 안에 들어왔고 왕은 울컥 뱉듯이 말을 내고 말았다.
“안 해도 돼.”
막시밀리안이 묻는 듯 마주 바라보았다.
“응?”
“나 강간 꼭 안 해 줘도 된다고. 네가 그게 좋으면, 착하게만 안든지 말든지.”
말하면서도 요른은 입이 툭 튀어나왔고 속으로 실컷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재미없어. 싫어. 다 할 거야. 눈치챘는지 막시도 얼른 답해 왔다.
“아냐, 배울게. 놀이로 하는 법 꼭 배우고 읽어서 제대로 할게.”
“응응, 그럼 그렇게 해.”
막시가 말을 혹시 물릴까 싶어 요른이 냅다 끄덕거렸다.
왜 그런 소릴 했지. 생각하며 요른은 막시한테 좀 더 바싹 다가가 가슴에 뺨을 묻었다. 부드러운 체향이 전해 오자 왠지 눈시울이 멋대로 붉어졌다. 아까 읽어 냈던, 막시의 거의 이십 년 어치의 세월이 뒤늦게 요른의 안에서 이슬이 녹듯이 젖어 스며들었다.
너도…….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를 문장 하나가 어쨌거나 저절로 조립되면서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너도 변하지 않았구나.
요른은 반사적으로 막시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직은 망설임처럼만 생각했다. 들어 주지 말까.
막시밀리안이 곧 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요른은 그가 잠든 걸 알고는 망설이다가 머리에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지나치게 자유롭고 넓은 꿈 말고, 막시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을 만한 꿈만. 이제 요른은 원한다면 그런 것만 선택할 줄도 알기는 알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후에도 왕은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둘은 막시밀리안의 사택에서 남은 나날 대부분을 보냈다.
혼인식 날이 다가왔다.
* * *
완연한 봄, 4월 말, 혼인식 일정은 오전 11시로 잡혀 있었다. 수상은 여섯 시에 침대에서 일어나 무심코 창밖으로 눈길을 향했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침 햇살에 활짝 열려 나온 풍경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정원의 사물들은 밤 내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고 해가 뜨자 금세 창 안으로도 시선을 향해 필립을 노려보았다. 새, 나무, 구름 그림자와 꽃과 날벌레 모두가, 그리고 서서히 창틀과 창유리마저도.
필립은 눈을 피했지만, 집 안의 사물 하나하나도 증오스럽기는 다름없었다.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 옷방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자꾸 손을 들어 공기를 만지고 제품에 끌어들이려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물론 공기는 그 모든 노력에 무심했고 전혀 잡혀 주지 않았다.
“요른.”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제 발음에 또다시 칼에 벤 듯 상처 입은 바람에 너무 아파서 그는 그만 멈추어 섰다. 벽에 기대고 싶었지만, 벽도 미웠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필립은 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두어 시간 후 황궁의 대관식 홀로 가서 혼례의 주관자로서 대기해야 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둘 각각에 미리 주문해 둔 반지를 나눠 주고 키스할 것을 지시하며,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선포한 후 국민을 대표해 축복의 말을 건네는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는 걸.
그는 단 한 걸음도 더 움직이기 싫었고 엎드려 정신을 놓고 죽을 때까지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왕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름답고 절대적인 자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떤 생물도 무생물도 그런 불경은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선은, 보편타당은 언제나 목숨과 감정에 우선한다.
네 몸이 오직……. 머릿속에 계시가 어느 심연에서 피어오르듯 밝혀졌다.
이 계시는 요 며칠간 밤마다 필립에게, 그리고 대륙민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어느 충실한 기사가 스스로는 꾸고 나서 잊어버리는 꿈이 남들에게는 똑똑히 각인되듯이. 그러나 그것은 한편 남이 전달해 온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원래 파묻혀 있던 것이 억지로 끌어올려지듯이 각자의 머릿속을 울렸다.
외로운 자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 공유된, 인간으로서의, 그저 존재로서의 필립 안에서 그 말들은 거절할 수 없이 스스로 맥박쳤다. 네 몸이 오직 보편타당한 격률만을 실천하게끔 하라. 네 영혼이 오직 보편타당한 의지에만 바쳐지게끔 하라. 네 심장이 오직 보편타당한 것만을 욕망하게끔 하라. 즉, 왕의 기사로서만 살아가라.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필립은 한편 입술 끝으로는 속삭였다. 그러나 다시는 내 몸은 보편타당의 격률에 현혹되지 않으며,
내 혼의 의지는 타인의 선에 눈멀지 않고,
내 심장은 이름 모를 옳음을 욕망하지 않으리라.
즉, 나의 당신의 반려로만 살아가리라.
필립의 눈앞에 생생하게 단 몇 시간 후의 미래의 장면이 떠올랐다. 왕의 백발 위에서 관이 예식에 맞추어 가지를 치듯 더 자라나며 웃는다. 원래는 주관자들이 장식을 더한 혼례용 왕관을 준비해 뒀어야 하지만 요른이라면 제가 알아서 예식 도중에 변화시키리라. 역시나 원래대로라면 식의 주관자 중 하나가 반려의 머리에 따로 관을 씌워 주는 게 관례지만, 저 왕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제 관을 나누어 그 흑발 위로도 옮겨다 줄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제가 이름을 주어 땅에 불러 내린 자를 보며 그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켜 주리라 맹세할 것이다. 만물에 사랑받고 또 사랑받아야만 하는 유일신의 형상 그대로. 그리하여 그 청년의 입술 끝에서만은 두 가지 계시는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불협화음도 협화음도 없는 세계에서의 공명처럼 어우러지리라.
필립은 결국 침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는 이 혼인식 자리에서 자신이 반평생을 계획했던 나라가 무너져 버릴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도 그저 요른이 막시밀리안의 품에 안긴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게 슬퍼서 울었다.
‘왜 몰랐지.’
그러면서도 그는 마지막 의식을 모아 생각했고, 회한에 더욱 흐느꼈다.
‘왜 깨닫지 못했지. 당연하잖아. 모든 서로 다른 것들의 사이에 있는 자는…….’
모든 것들을 서로 갈라 놓는 자이기도 하다. 성황의 조화로운 질서 따위로가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으로.
“내가 지옥문을 열었군.”
중얼댄 순간 그는 성황을 진심으로 이해했고 스스로를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를 다시 불러들인 건 이래저래 완전히 실수는 아니었던 셈이다. 부디 제때 도착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필립 자신은 찢겨 죽겠지만, 그 후에라도 조금이라도 이 땅이 피에 덜 젖을 수 있기를.
혼인식 두 시간 전, 수도 시민과 여행객이 궁성 앞 광장에 뒤섞여 몰려들었다.
그로쉔의 전통에 따르자면 국왕의 혼인 때 궁성 광장에는 도시민 사백 명까지만 자리할 수 있다. 지난 3년간 일정 금액 이상을 납세한 수도민 중 추첨으로 뽑는 것이다. 그러나 광장에는 천 명이 넘는 시민이 북적댔고, 다른 도시에서 온 여행객도 일부 섞여 있었다.
군경들도 넋이 빠져 막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과 달리 손에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게 오히려 패인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칠게 대하기 시작했다가는 찔러 죽여 버릴 게 뻔했기에, 길을 비켜 주고 멋대로 들어오게끔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광장에 좁게 붙어선 채 서로 몸을 부딪칠 때마다 덜덜 떨었다. 입술은 파랗고 얼굴은 목까지도 얼룩덜룩하게 붉었다. 시선은 엉망으로 헤매며 동공이 풀렸다 좁아지기를 반복해 서로를 피하려는 건지, 무섭게 노려보려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행객들은 대로의 아무 카페나 들어가 앉거나 섰고, 자리가 없으면 상점의 처마 밑 그늘에라도 좁게 늘어선 채 일부러 눈을 흐리게 뜨고 무엇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꼴이 될 줄 대충 짐작했으면서도 그들은 수도로 와야만 했다. 왕이 머릿속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어제 오전 왕은 대륙의 각 도시민 모두에게 전했다. 오늘 공화국 수도로 와서 자신을 봐 달라,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봐 달라고. 길이 멀어 걸음 하기 어려운 자들에게는 눈 귀와 머리로 전해 주겠으나 가까이 사는 자들은 직접 와서 보아 주면 더 고맙겠다.
그렇게 전하면서도 왕은 대체 무슨 일인지, 어떤 의식이 있는 건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왕이 불렀으니 시민들은 바로 행장을 차리고 걸음을 떼었다.
수도로 향하는 길목마다 여행객들이 줄을 이었다. 근교 도시민들이 전날 밤쯤 먼저 도착했고, 더 먼 도시들로부터도 당일까지 꾸역꾸역 객들의 걸음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사실 왕은 옛 용사 후보였던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과 혼인식을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요 몇 주간 도시 간 정보통은 마비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왕 본인이 직접 머릿속으로 전해 준 말밖에 듣지 못했으며, 그래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는 혼란과 고통 속에 일단 햇빛을 피해 아무 곳으로나 들어가 앉았던 차였다. 그러나 어스름한 실내에 들어와 봤자 다들 똑같은 꼴로 우두커니 서로 얼굴이나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객들의 성분은 다양했다. 호신용으로 고급 단검을 차고 온 상인도 있었고, 귀족 출신이라 정령 마법을 조금이나마 쓸 수 있는 자도 있었다. 빽빽이 붙어 앉은 자들은 팔짱을 낀 채 일부러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 애썼다.
오전 열 시, 주요 관료들이 마차나 말을 타고 궁성 앞에 도착했다. 필립도 마차에서 내려 창백한 채 본궁 입구로 들어섰다.
석 달 전 왕의 즉위식이 치러졌던 홀 안에 관료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삼십 분쯤 뒤 예비부부가 도착했다.
막시밀리안과 요른은 같은 마차를 타고 와서 궁의 정문 입구에서 내렸다. 마부도 없고 말도 없는 마차였지만 이상하게 여기는 관료는 없었다. 왕이라면 마차가 스스로 움직이게끔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원래대로라면 어린애들이 둘의 뒤를 따르며 꽃을 뿌리고, 좌우로는 정복 차림에 깃발을 든 근위병이 둘러싸 모셔야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단둘이서만 팔짱을 낀 채 걸어 들어와 홀에 도착했다.
―필립.
요른은 마치 일부러 그러듯 무척이나 다정하게 수상의 이름을 부르며 방긋 웃었고, 다른 각료들의 머릿속에도 동시에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전했다.
―잘 부탁해요.
투트 크라흐트 별장, 린다의 몸은 침대 위에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커튼으로 온통 둘러친 침실 안에서도 다시 침대의 가림막 네 개를 몽땅 다 내려놓고 일주일 내내 누워만 있다가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약을 마셨다. 그렇게 해서 린다는 증오하고 경멸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사랑하던 것을 증오하게 되어 버린 고통에서 겨우 벗어났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는 며칠 전부터 눈을 감은 채 성의 뒤뜰 가족 묘지의 비석 하나만 꽉 붙든 채 앉아 있었다. 고용인들도 성주에게는 물론 저희끼리도 접근하지 않게 된 지 오래라 그를 찾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햇빛과 달빛만 번갈아 등과 목에 떨어졌지만 베스퍼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정신이 들면 팔을 조여 비석을 더욱 꽉 붙들곤 했다. 거기 새겨진 이름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틈도 남지 않게끔, 공기 한 숨도 스며들어오지 못하게끔.
오전 열한 시 십오 분, 궁성 예식홀에서 막시밀리안은 수상의 지시에 따라 요른의 양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했다. 암회색 눈동자와 만나자 왕은 방긋 웃었고, 백발을 감싸고 있던 관이 물결치듯 등과 어깻죽지로 흘러내려 어느새 찬란한 날개로 변해 활짝 펼쳐졌다.
이제 왕이 반려에게 관을 옮겨 씌워 주어야 할 차례였다. 그러나 대신 요른은 날개를 몸 앞으로 둥글게 접어 상대의 몸을 통째로 감쌌다.
―보지 마.
속삭이듯 전하며 왕은 제 날개로 지은 성곽 속에서 상대에게 키스했다.
필립은 뒤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막시밀리안에게는 주변을 보지 말라고 전하고 눈도 가려 주었으면서, 왕은 다른 자들에게는 날개 속에 가린 장면을 머릿속으로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전달했다. 둘러싼 관료들은 물론 도시민 모두에게도.
그 꼴을 눈에 담고도 심장이 바로 으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필립은 주례를 보던 자리에서 기듯이 뒤로 물러나 바닥에 웅크린 채 신음할 뿐이었다.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싸우는 기색은 느껴졌고 피 냄새도 났다.
필립은 그래도 혼자 떨어져서 홀의 맨 앞에 나와 있었기에 아직은 무사했지만, 열을 지어 서로 지척에 앉아 있던 관료들은 견디지 못하고 서로의 목을 조르거나 눈을 후벼파는 중이었다.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은 일부러 집에 놓고 나왔기에 그들은 맨손으로만 싸웠다.
수도 광장이며 대로, 골목도 피 냄새로 자욱했다. 병사들은 칼과 창으로 학살했고 시민은 보도나 허술한 벽에서 벽돌을 빼 들어 응수했으며 남을 할퀴다가 제 눈이 파이거나 혀가 잘리기도 했다. 말을 탄 자들은 발굽으로 상대를 짓밟고 다니다가 낙마해서 저도 깔려 죽거나 아니면 말과도 서로 싸웠다.
대륙민 모두는 왕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았고 절망한 상태였다. 그는 단 한 사람의 것이었다.
요른이란 처음부터 막시밀리안의 요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울면서 아무 희망도 없이, 다만 증오만 남은 손으로 가질 수 없는 자들끼리 서로를 죽여 나갔다. 그래도 왕을 사랑하는 걸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그 막시밀리안이 요른을 소유한 방식과 똑같이, 그를 오직 자신만의 것으로서 원하고 사랑하기를.
아직 여행 중이던 자들도 길 위에서 머릿속에 혼인식 장면을 전달받으며 점차 이성을 잃고 서로를 죽여갔다. 길은 피로 물들었고 바람마저 비릿하고 붉다 못해 축축한 무게에 젖어 멈춰 버렸다. 벽도 바닥도 핏자국이 가득한, 마지막 생존자들의 비명도 잦아들어 가는 궁성 홀에서 요른이 막시밀리안의 몸을 날개로 푹 감싼 채 재차 속삭였다.
“보지 마.”
지시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키스가 끝난 후에도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너는 변하지 않았구나. 요른은 그의 얼굴을 보며 되새겼다.
네 안의 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지키느라 너도 변하지 못했어. 두 문장이 단조와 장조처럼 생물의 안을 갈라 놓았다. 이렇게 이지러지고 상처 입고 말라빠졌는데도 너는 변한 건 아니다.
‘어릴 때라면 분간하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나도 알 거 같아, 막시.’
굽어지지 못하는 나무처럼, 너는 변한 게 아니라 단순히 부서져 가고 있는 거야.
혼인식을 마치고 나면 그는 제 동족의 피 냄새를 짊어지고 망가져 폐인처럼 되리라. 그런 채 둘은 전 세계를 여행할 것이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만 숨어 사는 생물과 사물들의 붉은 세계를.
대륙에서 생명의 빛이 꺼지고 초원과 숲이 사막이 되며 광물마저 모래와 재로 삭아지고 나면 그들은 바다를 건너리라. 검푸른 물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건너가 다른 대륙, 반도와 섬에 도달해, 그 대지를 차례차례 가로질러, 모두가 증오에 전염되어 살해당해 단둘만 남을 때까지 걷고 또 걸으리라. 전 세계가 둘만의 성으로만 남아 문도 창도 꽉 닫혀 버릴 때까지.
그러는 동안 막시밀리안이 망가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완전히 미쳐 버리리라. 물론 요른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막시밀리안도 그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으며 즐겁게 데리고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은 다른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부서진다 해도 절대로 제 반려와의 놀이만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막시이기만 하면 된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태든 그는 영원히 막시밀리안을 사랑할 테고, 막시도 그의 요른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또 사랑해 줄 테니까. 그러나 왕은 가만히 상대의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막시.”
막시밀리안이 눈을 떴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날개로 시야를 가렸대도 주변의 비명을 듣고 피 냄새를 맡고 있었으니까.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청년은 상대의 청은색 눈동자 속에만 깊숙이 초점을 맞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생물도 그 어두운 눈동자 한가운데를 파고든 채 생각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까.
십오 년 전 나는 네가 죽는 게 싫었다. 얼마든지 되살려낼 권능이 있었음에도 나는 네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게 두려웠고, 네가 택한 거라면 돌이킬 수 없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존중해 주어야만 한다고.
지금도 나는 네가 미치는 게 가엾고 두렵고 싫다. 실은 너는 그저 변화하는 것뿐인데도. 실뱀이 나비로, 거미가 표범으로, 풀이 뼈로 머리카락이 불로 변하듯이. 그런데도 이상한 공포에 가까운 감정마저 든다. 네 안에서 보고 또 보았던 소위 죄악감에 가까운 감각.
나는 언젠가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끼게 될 수도 있을까. 왕은 막시밀리안의 눈 속에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되뇌었다. 느끼고 또 너처럼 선택하게 될 수도 있을까. 어떤 변화는…….
[바보야. 사람이 옳은 일을 해야 행복해지지.]
……나쁜 것이기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추억 속에서 여덟 살짜리 소년의 의젓한 목소리가 떠올랐다가 잦아들었다. 왕은 미소 지었고, 한순간 주저했지만 결국 제 앞의 상대에게 또렷하게 전했다.
“용서해 줄게.”
막시밀리안은 알아듣지 못한 듯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요른은 양 날개로 지은 성안에서 그를 깊이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는 날지 않는다. 왕은 생각했다.
이 날개는 날지 않을 자유이다. 한쪽 팔로는 막시밀리안의 등을 안은 채, 다른 쪽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감기며 요른은 스스로는 눈을 크게 뜨듯이 날개를 폈고 의식 속에서도 눈을 떠 모두를 보았다.
그는 대륙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의 내부와 외부에 자신이 남긴 흔적을 찾아내 그것들을 지웠으며, 동시에 막시밀리안의 왼뺨에 남아 있던 흉터도 지워 버렸다. 막시가 알아채고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왕은 그를 어린아이처럼 잠재워 쓰러뜨렸고 식이 치러지던 제단의 한구석에 앉으면서 제 무릎 위로 끌어안았다.
수도의 먼 외곽, 마물 축사 근처에서 흑마법사 소피아의 몸이 흩어졌다.
한참 전부터 썩어 있던 자들은 재로 돌아갔고, 몇 분 전 서로의 손에 죽었던 자들은 몸이 채 식기 전에 생명을 돌려받아 숨을 쉬었으며, 다쳤던 자들은 회복해 깨어났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희미한 증오를 품기는 했으나 그 이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뭐였지?’
농림부 장관은 궁의 예식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주변 여기저기 부서져 널린 의자들을 보고는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우린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건가?
문득 그의 바로 옆에서 마법부 행정관이 다리를 꿈틀댔다. 그 꼴이 시야에 들어오자 장관의 마음속에 미움이 치받쳤다.
‘왜지?’
장관은 자기 자신을 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남을 아무렇게나 미워할 만한 비합리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정치적 이유나, 도덕적 이유 등등. 행정관도 부스스 일어나 장관을 노려보았고 둘은 서로를 찡그린 채 마주 보며 각자 자기 안에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눈을 떴다.
땅은 축축했고 이끼 섞인 흙 향기가 짙었다. 둘러싼 나무들의 수종을 보고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대륙의 거의 최남단에 와 있다는 걸 알았다. 하늘이 잎들 사이로 반짝여 한낮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바닥은 그림자로 뒤덮여 저녁처럼 검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오래 묵은 숲이다.
어떤 생각이 들어 그는 다시 한번 찬찬히 주변을 살폈지만, 식물들은 모두 타블로상 알려진 수종에 속했고, 가끔 덩굴이 큰 나무에 엉기거나 버섯이 띄엄띄엄 근주에 자라는 것 외로는 한 그루씩 수직으로만 웃자라고 있었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몸을 일으키자 선이 가는 청년 한 명이 감탕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름을 부르자 그는 막시밀리안 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척 아름다운 자였지만 어딘가 달랐다. 몸과 머리칼을 감싸들던 기이한 광휘도 눈동자 속에 늘 감돌던 이채도 사라지고 없었다. 요른은, 스물이나 갓 넘긴 듯 보이는 백발의 청년은 그저 어린애처럼 풋풋하게 미소 지었고 막시밀리안의 안에는 문득 표현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인간처럼 아름답다.
막시밀리안은 급히 다가가 상대를 품에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