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필립은 집무실에 앉아 흑마법사들의 보고서를 읽었다. 아무 이상도 없다고 쓰여 있었지만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들은 현 관료들을 적대하느라 제대로 된 보고를 올리지 않을 때도 많았던 탓이다.
그래서 일부러 린다를 마법부 장관으로 올려놓긴 했지만, 흑마법사들은 그녀의 말도 잘 듣지 않는다. 필립은 린다가 제 수족 같은 부하들만 부려서 따로 올린 별도 보고서를 열어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다.
‘왕의 권역이 조금 더 넓어졌어. 하지만 그게 다야. 어디…….’
수상은 대신에 농림부와 축산부 정책과장에게 부탁했던 보고서를 뽑아 들었고, 마침내 기대하고 있던 종류의 항목을 찾아냈다.
농림부 보고서에는 수종 개발업자가 나무들이 잘 섞여 들지 않는다는 불평을 여러 번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고작 일주일 정도 전부터의 일이라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전에는 접목이나 삽목만 해도 얼마든지 새로운 종을 길러내 볼 수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시들어 죽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시든다기보다는 서로 닿은 부분부터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면서.
마치 피처럼 썩은 물이 흐른다, 꼭 서로를 미워하는 형상이다. 작성자가 농부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놓은 탓에 필립은 등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마저 축산부 쪽 보고서를 들추어 보자 금방 마물들의 행태 변화에 관련된 항목이 나왔다.
관저에 앉은 채 수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2층 집무실 바깥으로는 나무 우듬지들이 미풍에 감미롭게 수런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안에는 그 세밀하게 뻗은 가지 사이사이의 허공도 하늘을 꽉 채운 공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도록 불길하게 비쳐 들었다.
그는 왕이 지금 황궁의 집무실에 재석해 계실 걸 알았다. 요즈음 왕은 일상의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 그러니까 침실에서 고용인들이 준비해 주는 대로 몸을 씻고, 갈아입혀 주는 대로 예복을 입고 호위병들의 안내를 따라 식당으로 가서 이른 오찬을 들고 가볍게 복도와 정원 산책을 한 후 집무실로 이동하는 순서에 전혀 따르지 않는다. 혼자 아무 좋을 때나 일어나서 제 몸을 이동시켜 버린다.
마왕 자신의 탓을 할 수는 없다. 고용인들이 왕에게 접근하기를 꺼리게 되었기 때문이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몸을 씻겨 줄 자도, 옷을 입히거나 밖으로 호위해 데려가 줄 자도 오지 않으면 혼자 멋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서류가 각 부처로 전송되어 오는 걸로 보아 아직 꼭 필요한 업무는 보아 주고 있으신 듯하니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수상 자신도 왕을 며칠째 차마 뵙지 못하고 서신으로만 연락하고 있었다. 미치도록 찾아뵙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갔다가 수상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왕을 미치게 찾아뵙고 싶어서 끌려온 자들과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필립은 쓰게 웃으며 농림부에서 올라온 보고서의 문장을 되새겼다. 서로를 미워하는 형상. 썩은 물처럼 피가 흐른다.
두 번째 문장 속 단어들의 순서를 스스로 살짝 바꾸어 버린 걸 필립은 눈치채지도 못한 채 한참이나 더 머릿속으로 뇌까리며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긴 하다. 필립은 찡그린 채로도 머리 한편으로 생각했다. 되도록 던지고 싶지 않은 수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을 수도 있으리라.
상황이 더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대륙에 타블로의 질서가 아직은 남아 있을 때 그녀가 돌아올 수 있게끔 서둘러야 한다. 수상은 조용히, 차라리 숨을 길게 멈추듯 한 한숨을 내쉬고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 *
요른은 왕관을 소파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길게 눕듯이 앉았다. 그리고 접시에 있던 잘 익은 멜론 조각을 제 입 속으로 옮겨와 녹이듯이 빨아먹었다. 시지 않고 살이 말캉한 과일을 먹고 싶다고 졸랐더니, 저쪽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읽고 있는 자가 황궁으로 오는 길에 사 와서는 직접 깎아 주고 한입 크기로도 잘라 주고 간 것이다.
―칼을 마물 말고 과일 썰 때도 잘 쓰네.
한 조각 더 집어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전했지만 상대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서류를 읽느라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뭘 저렇게까지 열심히 한담. 생각하며 요른은 멜론을 꿀꺽 삼켰다. 대귀족가 독자가 왜 과일을 깎을 줄 아는 건데?
궁금한 김에 알아서 상대의 기억을 뒤적대다가 왕은 그만 배시시 웃어 버렸다. 열네 살 때쯤의 막시밀리안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검을 등에 멘 채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소형 단검으로 사과를 자르다가, 살점에서 벌레가 꼬물대며 튀어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심조심 칼날에 받쳐 끄집어내서 수풀에 놓아 주었다.
요른이 명치께를 누른 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하자 막시가 잠시 눈을 들었다. 왕을 대신해서 서류를 확인하고 여기저기에 도장을 찍어 주고 있던 참이었다.
“왜 그래?”
―성기사단은 단검도 받는구나?
“응. 행군 도중에 육포나 과일을 즉석에서 먹어야 할 일도 있으니까. 부엌 경험은 없어도 소형 식칼 비슷하게 쓸 줄은 알아. 기억을 본 거야?”
“너 되게 귀엽다.”
말하면서 요른은 제 몸을 책상 위로 이동시켜 막시밀리안이 막 읽고 있던 서류를 무릎으로 꾹 누르며 올라앉았다.
막시가 딱히 난처한 기색도 없이 요른의 무릎을 가볍게 한 치 정도만 들어 올리고는 서류를 빼냈다. 요른은 그 손마디의 정갈하게 균형 잡힌 골격, 암적색 정복 재킷 소맷자락이 정확히 손목뼈가 튀어나온 곳에서 끊기는 모양을 훑으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아무리 힘이 봉인되고 기억도 잃었다지만, 십오 년이다. 봉인 후 십오 년 내내 자신은 막시밀리안과 함께 자랐고 수천 날 지척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저런 귀여운 걸 먹어 치울 생각을 하지 않은 걸까.
‘힘이 없어졌다고 욕구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어째서……. 아 참, 몽정 한번 하고 나서 금방 마법으로 성감을 없애 버렸지?’
그게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돌이키며 마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느끼지도 못할 몸으로 만들어 버렸던 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자신은 훨씬 일찍 풀려나왔으리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걸 유혹해서 찹찹 먹어 치우고는 그게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번쩍 들어 버렸을 테니까.
‘내가 몽정했던 게 열다섯 살이면 그게 벌써 칠 년 전이네.’
그때부터 서로 잤다면 지금까지 수천 번도 더 잤겠다. 자고 또 자고 매일 밤낮을 같이 보내느라 얽혀서 크는 나무들처럼 서로의 몸에 맞춰 자라나 성인이 되었으리라. 그 기회를 다 흘려 버린 거다. 마왕은 입이 툭 튀어나온 채 속으로 뇌까렸다.
―난 마법을 썼으니 그렇다 치고, 쟨 진짜 고자였나.
아까부터 요른은 딱히 마음을 닫고 있지도 않았다. 상대에게 다 열어 놓은 채로 중얼대던 차였다. 그러잖아도 귀가 점점 붉어져 가던 청년이 서류에 옥새로 인을 찍으려다가 손이 삐끗해 버린 바람에 탁자 위까지 깊이 잉크 자국이 남았다.
“요른…….”
―자위 정도는 좀 하지 그랬어.
마왕이 상대의 기억을 뒤지며 투덜대다 제풀에 웃어 버렸다.
―성기사 신체 통제 능력을 이딴 데다가 썼어? 와, 너, 남의 건 그렇다 치고 자기 거에도 손 한 번 안 대봤는지는 몰랐네. 진짜 고자였네? 동정도 아주 숫동정에.
“…….”
―왜 자위도 안 했어? 내 생각 안 했어? 진짜 너무하다.
막시밀리안은 얼굴이 턱까지 달아오른 채로도 입은 꾹 다물고 있었지만, 요른이 읽어 내고서 미친 듯이 웃어 댔다.
―나쁜 짓이라서 그랬어? 상상 속에서라도 동의 없이 남의 몸을 탐하면 안 되어서요? 미치겠다, 아, 넌, 막시, 진짜…….
요른은 구르다가 그만 책상에서 떨어져 버렸고, 막시는 뺨에서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꼴이 되었다. 왕은 카펫 위로 신나게 이리저리 구르며 숨이 막힐 때까지 웃다가 겨우 배를 움켜쥔 채 정신을 차린 듯, 누운 채로 전해 왔다.
―뒤져봤자 그쪽으론 볼 게 너무 없어서 재미가 없어. 안 되겠다, 지금 하자. 해서 얼른 기억 하나 더 만들자.
“……네가 서류 처리 대신해 달라고 부른 거잖아.”
막시밀리안이 항의하듯이 뱉어 냈다.
“어제 일…… 때문에 피곤해서 못 하겠다면서. 나도 곧 기사 간부 회의가 있으니까, 빨리 처리하고 가야지.”
“읽을 필요 없잖아. 도장만 찍으면 되는데 뭐하러 다 읽어?”
“너 거부권은 행사할 수 있잖아. 아예 말도 안 되는 사안을 올릴 수도 있으니 꼼꼼하게 봐야지.”
“진심이야?”
왕은 누운 채 실눈을 떴다.
―너, 알지? 네가 뭘 선택한 건지.
“알아.”
―그런데 여전히 이런 게 신경 쓰여?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는 제대로 챙겨 주고 싶은 거다. 아무리 그 수명이 짧다고는 해도 여러 사람의 오랜 노력이 들어간 세계니까. 막시밀리안이 버릇대로 속에서 말을 고르는 동안 요른이 먼저 읽어 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의 마왕이라면 다른 사람들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자기만 봐 달라고 졸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저런 면이 자신에 대한 곧디곧은 애정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맞물려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저 한마디 툭 뱉었다.
―알았어. 빨리해.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그 재촉 밑에 도사린 기대까지 함께 전해 받은 바람에 고개를 들어 상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하자고 너 도장 찍게 시킨 건데?”
“그렇, 게 안 해도 다들 알잖아.”
“응. 그리고 이런 걸 한다고 사실 다들 더 잘 알아 줄 것도 아니지?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마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놀아 줄 거야?”
조잘대는 동안 요른의 안으로도 막시밀리안의 상념이 두서없이 흘러들어 왔다. 내 순진하기만 하던 요른이 어쩌다 저렇게 되어 버린 걸까, 필립이 제 왕에게도 이상한 책들을 마구 가져다줬던 건 아닐까. 여러 가지로 횡설수설하면서 저 혼자 괴로워하길래 달래줄 겸 요른은 어젯밤의 기억 중 제일 예쁜 조각들만 퍼 올려서 막시의 뇌리로 살살 흘려 넣었다.
그러자 잡념이 순식간에 고요해지면서 아래로 억눌린 충동만 남았다.
요른은 방긋 웃었다. 막시는 늘 이렇게 벼랑까지 몰렸을 때 가장 바늘 끝같이 냉철하고 섬세해진다. 광포한 마검을 들고 최악의 적을 맞아 전장 한가운데에 섰을 때처럼.
‘저럴 때 얼굴이 좋아.’
마왕은 어젯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저 칠흑의 광휘에 감싸인 청아한 얼굴이 붉게 얼룩진 채, 하지만 눈동자는 태풍 한가운데 들어온 배처럼 흔들림 없고, 입술도 물기 하나 없이 사교적인 미소만 거느린 채 고요해지는 순간이 좋다.
닿아 오는 손길은 사물을 만지듯이 여상스럽기만 하고 사지의 동작도 서두름이라고는 없이 정밀하다. 그런데도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그 부분만은 짐승조차도 아니라 무슨 종류를 모를 괴물처럼 불어나서 말도 안 되는 각도로 서 있다.
그 괴리가 너무 좋다.
어젯밤 막시밀리안이 요른을 곱게 안아 침대에 내려놓았을 때, 등을 대고 누운 채 올려다보자 그는 바로 그런 얼굴에 그런 몸을 하고 있었다. 짜릿한 나머지 생물의 척수에 어떤 하얀 불꽃 같은 게 튀면서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쏠렸다. 막시밀리안이 흘깃 보더니 회의장에서 동료 간부들에게 인사할 때 정도의 미소만 띤 채 나긋한 손길로 매만져 주었다.
굳은살투성이의 까슬한 손바닥이 밑동을 힘있게 쥐었다가 풀면서 쓸어올리고, 다시 귀두를 완전히 드러내듯이 표피를 벗기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기를 반복하자 성기 끝이 금세 축축해졌다. 왕은 손안에 완전히 내맡긴 채 움찔대면서도 불만스레 뱉어 냈다.
“이쪽 말고, 네가 뒤로 착하게 안아 준다고 했잖아.”
“응.”
막시밀리안이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것의 끄트머리 구멍을 엄지 끝으로 살짝 틀어막듯이 하며 답했다. 왕은 그가 속으로 혼자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들어갈 거야. 하지만 아프게 하면 안 돼. 아프면 나쁜 거야.
“그래, 그래.”
“그러니까 미리 잘 준비해 두고 들어가려고 그래.”
자상하게 말하며 청년은 남은 손으로 생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왕은 손이 닿은 피부밑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는 갸웃했다. 뭐지?
분명 즐겁고 좋은데, 바닥에서 어두운 게 스멀거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내려 상대의 입술에 키스했고, 성기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조그만 복숭앗빛 유두 한쪽을 입에 물었다.
헤픈 몸 같으니. 왕은 침대 위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꺾으며 생각했다. 아래위로 만져지고 깨물린 것만으로도 금방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륜 전체가 깨물리고, 다시 입 속에서 끄트머리가 혀끝으로 찔린 순간 배 속에 찌릿한 감각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요른은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신음했다.
눈물이 고인 시야로 그는 상대를 흐릿하게 올려다보았다. 하얀 왕의 입술에 키스하며 청년은 미소 지었고, 다시금 뺨에, 귀에도 키스해 주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삭여 전했다. 기다려.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눈을 통해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고, 그가 오른손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뻗는 걸 보았다. 왼손으로는 성기 뿌리 부분을 짚어 요도를 막아 둔 채였다.
막시밀리안은 한참이나 요른의 양 허벅지 안쪽을 쓸고 만지며 애무하다가 천천히 회음부로 올라갔다. 요른도 스스로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려, 상대의 손에 다리 사이 가장 살이 부드러운 부분을 열어 주었다.
막시밀리안이 엄지로 회음부 한중간을 지그시 눌렀다. 왕은 스스로 골반을 조절해 손길을 보다 깊이 느껴 보려 애썼다. 몸속에서 직접 만지고 찌르던 부분을 밖에서부터 둔중하게 짚어 내자 직설적이지는 못한, 그러나 은근한 쾌감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이 한참이나 밖에서만 안쪽의 지점을 노려 주무르다가 마침내 검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 응.”
내장의 이미 도톰하게 달아올라 있던 부분을 맨손으로 찌르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사정 직전에 막혀 버렸던 성기는 여전히 아무것도 흘려 내지 못했다.
뿌리 부분을 잡은 왼손은 무척 자상했기에 잡힌 것 자체의 압박감은 적었다. 다만 관이 막혀 괴로울 뿐이었다. 갈 거 같은데. 무심코 머리로 전했지만 부드러운 답만이 돌아왔다. 미안. 좀 있다가 같이 가자.
요른의 다리 한쪽이 들려 막시밀리안의 어깨 위로 올라갔고, 살집 사이가 열린 바람에 손가락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세 개까지 들어와서 한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 대는 동안 요른은 고개를 꼰 채 눈물만 흘렸다. 아직 기억을 찾지 못했던 시절, 혼자서 마법을 걸어 수십 번도 더 사정 직전에 멈추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더 나았다. 자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남이 통제하는 건 결이 달랐다. 게다가 사정만 참는 것과 뒤를 찔렀을 때 원래대로라면 끊임없이 줄줄 흘러나와야 할 묽은 액도 못 나오게 하는 건 또 달랐다.
그래도 굳이 가게 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도 스스로 뿌리쳐 버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막시가 생각하고 있는 바도 뻔했던 데다가, 그 스스로도 안타깝고 미안했던지 자꾸 뺨이며 입술에 키스하며 전해 왔기 때문이다. 미안해, 기다려 줘. 같이 가자.
몸 안에서는 자비 없이 정밀하게 손을 놀리면서도 막시밀리안은 위에서는 서투르리만치 어쩔 줄 모르며 다정하게 키스해 주었다. 그러나 요른이 참다못해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 지경이 되자 그는 오히려 고개를 내려 목을 자국이 남을 정도로 깨물고 빨아들였고 입술을 찾아 그대로 혀를 얽었다. 사정감을 더 부추기려는 듯이.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는데 막시밀리안은 쇄골과 가슴으로, 배로 내려가더니 숫제 성기를 제 입에 넣어 버렸다. 귀두를 리듬감 있게 빨며 요도구를 혀끝으로 찌르자 요른의 허리가 침대 위로 반은 떠오를 정도로 휘어졌고, 막시도 풀어 줄 듯 잠깐, 아주 잠깐 왼손을 늦추었다. 그러나 아찔한 순간 도로 막아 버렸다. 요른이 결국 부탁했다.
“나, 갈래.”
“같이 가자.”
막시밀리안이 성기를 입에 넣은 채 말하자 배 속이 징 울리는 바람에 요른은 울컥해서 쏘아붙였다.
“지금, 그냥, 너도 들어오면, 되잖아.”
젖은 음성이 아랫배가 움찔댈 때마다 흩어졌다.
“이제 갈, 래. 앗, 멍청아, 그만…….”
괜찮아, 괜찮아. 달래면서 막시밀리안이 뒤쪽에서 손을 움직였다. 굵고 긴 손가락들이 내벽의 이제 둔덕처럼 퉁퉁 부어올라 있다시피 한 곳을 매만졌고 헤집듯이 긁어 댔다. 요른은 조그만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상태가 이상했다. 요른은 멋대로 물결치다 못해 근육이 아플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는 아랫배를 가누려고 애쓰며 생각했다. 단순한 사정감이라기보다 물을 실수로 엄청 많이 마셨을 때와 비슷한 요의 같은 게 느껴졌고 팽만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막시밀리안도 그 감각을 전달받았는지 천천히 손가락을 뺐다. 요른은 입구를 달싹이며 겨우 흐릿한 한숨을 내쉬었지만, 따뜻한 것이 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기름이다, 요른은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은 유리병에 든, 미리 데워 두었던 향유를 입구 주변에만 바른다기보다 아예 직장 안에 통째로 부어 넣다시피 하고 있었다. 병의 가느다란 주둥이가 입구를 헤집고, 비단처럼 매끄러운 액체가 안을 가득 채우는 것만 해도 자극이 되어 요른은 주둥이를 꼭 문 채 골반을 조금씩 흔들었다.
병이 빠져나가자 항문에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할 수 없는 사정을 뒤로나마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거대한 것의 끄트머리가 입구를 틀어막았고 순식간에 배 속 전체를 채우듯이 밀려 들어왔다.
동통 때문에 요른은 반사적으로 시트를 꽉 쥐었다. 그러나 고통을 더 느낄 새도 없이 그 살덩이는 순식간에 내벽의 가장 예민한 지점을 짓눌렀고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세로 깊숙이 비벼대기 시작했다.
시야가 터져 나가듯 점멸해서 요른은 더는 막시밀리안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다만 막시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양다리를 다 상대의 어깨에 올린 채 자신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비명을 질러댔고 여전히 묶여 있는 성기 대신 입가로 침을 질질 흘렸다. 거의 살이라고는 없는 가슴팍이 막시밀리안이 자신 안에 밀어 넣고, 다시 허리에 힘을 주어 조금 더 밀어 넣을 때마다 조금씩 경련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져 버렸기에 요른은 상대에게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전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상대의 감각만 일방적으로 머릿속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억울해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아래에서부터 뇌를 꿰뚫는 쾌감과 동통 때문에 미쳐 가고 있는데, 상대는 고요하기만 했던 탓이다.
막시밀리안의 안에는 지나친 쾌감도 욕정도 없었다. 배려심과 봉사욕뿐이었다.
순간 행위 시작 직전에 느꼈던 이상한 어둠이 요른의 안에서 다시 스멀거렸다. 그러나 그는 금방 정신을 놓아 버렸다. 마침내 뿌리까지 푹 들어온 것이 처음에는 뭉근하게, 곧 부딪친 곳에서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른은 그저 허공 가득 자기 자신의 비명이 울리는 것만 들었다.
엄청 시끄럽네. 남아 있는 뇌 한쪽에서 생각하기는 했다. 게다가 상대의 눈으로 내려다보자 자신은 꼴사나울 만큼 온몸의 피부가 울긋불긋하게 물든 채 양손으로는 손가락이 부러질 듯 시트를 꽉 쥐고, 허리를 띄운 채 사지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나마의 의식도 곧 놓아 버렸다.
눈을 뜨자 쌔근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숨소리였다. 심장은 아직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커다란 손이 달래주듯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쓰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다가 요른은 시트가 푹 젖어 있는 걸 눈치챘다. 배 속에 가득 찼던 요의와도 같은 팽만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쾌감이라고만 칭하기에도 부족한 무시무시한 게 지나간 흔적만 척수에 남아 있었다.
생물은 몸을 일으키려고 애써 보았지만, 가볍게 신음하는 데에 그쳤다. 지독한 여운이다. 척추도 배 속도 한번 녹았다가 다시 붙은 듯 느낌이 이상했고 자기 몸 같지도 않았다. 요른은 모로 쓰러져 누운 채 시트와 막시밀리안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뭐야?”
―괜찮았어?
막시가 눈치를 보며 속으로 물음을 떠올리는 게 전해 왔다. 다 읽어 놓고도 또 저런다. 요른은 찡그린 채 일단 답해 주었다.
―그래. 좋았어.
“어떻게 된 건데?”
“같이 갔어.”
막시밀리안이 안심한 듯 뺨에 쪽 키스하며 말했다. 요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난 그냥 간 게 아닌 거 같은데.”
쉰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데다가 팔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그는 시트 쪽으로 가볍게 눈길만 주며 되물었다.
“너무 젖었잖아. 색도 이상해.”
“응.”
청년이 어딘지 자부심을 품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나 그 소설은 안 봤지만, 어제 다른 건 몇 개 찾아 읽었거든. 그대로 해 봤어.
머리로 무슨 비밀처럼 전해 오는 바람에 요른은 상대를 실눈으로 쏘아보았다. 알아, 멍청아.
네 머릿속 따위 아무리 숨겨봤자 뻔하게 읽힌단 말이야.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막고 못 가게 해도 이해했던 거고. 하지만 생물은 모르는 척 노려보기만 했고 막시는 얼른 변명하듯 주워섬겼다.
“처음에 못 가게 해야 나중에 그 정도로…… 갈 수 있다고 해서 그랬어. 앞뒤로 바로 직전까지 부추겨 놓아야 넣었을 때도 덜 아프고, 잘하면 바로 느낄 수도 있대.”
“……내가 뭘 싼 건데?”
“오줌 아니야. 괜찮아.”
“너는?”
“난 그냥…… 갔어.”
“불공평해. 다시 해.”
“나도 어차피 네가 느끼는 거 다 전해 받았으니까 괜찮아.”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말하며 다시 요른의 다른 쪽 뺨에 키스했다.
청년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미소를 품은 채 상대의 땀 젖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뺨과 목, 입술에 쪽쪽 키스하고, 또다시 물러서 응시하기를 반복했다. 뿌듯해서 죽지. 요른은 상대의 속을 읽어 내며 생각했고 힘없는 팔로나마 주먹을 쥐어 그 새카만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아 주었다.
그래도 청년은 좋다고 웃기만 했고, 생물의 작은 주먹을 제 손안에 꼭 쥐더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연약한 보석을 바라보듯 가만히 응시하다가 곧 그 손등에 키스했다. 요른은 입을 삐죽대며 물었다.
“너 안에 했어?”
막시밀리안이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고개를 휙휙 저었다. 요른은 그 머릿속을 읽어 내고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가긴 갔어?”
막시가 끄덕거렸다. 요른은 그 머리통을 한 대 더 쥐어박으며 물었다.
“어디다 처리했는데.”
“알아서 했어.”
“너, 나는 이렇게 다 튀기게 만들어 놓고 넌 어디 수건에라도 싸서 버렸어?”
“너한테…….”
요른은 청년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우물대는 걸 보고는 귀찮아서 머릿속을 읽어 버렸다. 문장들은 쑥스럽고도 죄스러운 듯 무척 희미하게만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네 안에다가 해. 널 그런 식으로 더럽히는 건 싫어. 무서워. 청년이 문득 입으로도 내어 말했다.
“대신 내가 잘 닦아 줄게.”
마음을 읽고 있었던 덕에 요른은 그 애매한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또다시 한숨을 폭 내쉬며 전했다.
“피도 안 났잖아.”
“조금 부었고 기름도 묻어 있어. 내가…….”
“기름 그거 먹을 수 있는 거긴 해?”
“당연하지. 식용 중에서도 아주 순한 게 아니면 내장에 넣으면 안 된대.”
상대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며 요른은 픽 웃어 버렸다.
“너 내가 그렇게 좋아?”
“응.”
바로 답해 놓고는 제 답에 제가 먹힌 듯 청년의 표정이 변해 갔다. 요른은 웃음을 참았다.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그 무게에 기울듯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떨구었지만, 흘러나오기 전에 얼른 상대의 벗은 몸을 제품으로 끌어올려 꽉 조였다. 생물은 그 팔을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팔까지도 오라에 묶이듯이 안겨 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굳이 마음을 읽지 않아도 몸이 닿은 곳곳마다 체온 이상의 무언가가 전해져 왔다. 그 향을 맡으며 눈을 감자 머릿속에서도 봄과 같은 기운이 짙어졌고, 오래전의 꽃향기가 싱싱한 안개로 화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안개는 순간 이미 잃어버린 것의 그림자처럼 흐드러졌고 막시밀리안의 몸도 뻣뻣하게 식어 버렸다.
찬 손끝이 요른의 등을 파고들었다. 여전히 팔을 움직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왕은 그저 맞닿은 뺨만 제 뺨으로 꾹 눌러 주었다. 바보 새끼.
그래도 나흘째쯤 되니까 저 표정이 도로 나오네. 요른은 생각했다. 어릴 때 마냥 순하고 보들보들해서 쿡 찔러 주면 그대로 살이 폭 들어가 버리던, 발버둥 쳐서 가면을 써야 할 만큼 상처 입기 쉽던 그 내면이 이제야 겨우 다 커버린 막시의 얼굴이며 전신의 태도, 심경에도 다시 드러나 오고 있었다. 그 부분은 감추다 못해 영영 잃어버린 거 아닐까 했는데.
앞으로 괴롭히기 되게 좋겠다. 곱씹는 가운데 막시밀리안이 품에 안긴 자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고, 목덜미의 체향을 맡고 귀밑에 보송한 솜털이 난 자리에 키스해 오는 바람에 요른은 웃고 말았다.
너 이러고 싶어서 십몇 년간 어떻게 참았어? 생물은 생각했지만 굳이 전하지는 않았고, 대신 상대가 조금 가엾어진 나머지 선심 쓰듯 말했다.
“알았어. 그럼 잘 닦아 줘.”
“응.”
막시밀리안이 귓가에서 웃는 게 전해져 왔다. 청년은 곧 상대의 몸을 눕히고, 엉덩이 밑에 쿠션을 받쳐서 올린 다음 살집을 조심스레 벌려 잡고는 열심히 그 사이에 남은 흔적을 핥아 주었다.
요른의 입구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나 성기까지 서지는 않았다. 하기는 저만큼 쏟아 놓고 그 직후에 다시 선다면 흉내로라도 사람 몸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리라. 생물은 그저 나른하게 눈을 감은 채 후희를 즐겼다.
혀를 밀어 넣어 안쪽까지 깨끗이 훑은 다음 청년은 여전히 발갛게 부어 있는, 동그랗게 맞물린 주름에 키스하고서 다리를 도로 닫아 주었다. 그리고 요른의 몸을 침대에서 살며시 안아 올려 욕실 쪽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요른도 그쪽을 흘긋 보고는 괜히 딴청을 부렸다. 아까 자신이 목욕통을 부수어 버린 탓이다.
청년은 물론 요른이 마음만 먹으면 부서진 욕조도 금방 고쳐낼 수 있고, 몸도 순식간에 회복시킬 수 있으며 젖은 시트도 얼마든지 새것으로 바꾸어 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요른이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생물은 천연덕스럽게 묻기만 했다.
“나 씻겨 주려고?”
“응.”
“황궁 욕실로 갈래?”
“그래.”
청년이 내려다보며 맑게 웃었다.
요른은 둘의 몸을 벗은 그대로 황궁으로 이동시키면서 동시에 청년의 머릿속을 읽었다. 그는 걱정하고 있었다. 요른은 이제 전처럼 천진하게 아무거나 다른 아무것으로 변화시키며 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막시밀리안과 자신 사이에서 한번 일어났던 일은 그게 무엇이든 그대로 내버려 둘 테고, 변하지 않게 두려고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하리라. 그는 행위 중에 제 몸에 상처가 나면 자연스레 나을 때까지 그대로 둘 테고, 흉터로 남아 버린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생물은 흑발의 청년과 함께 본 풍경이라면 그것이 스스로 저물어 들 때까지 단 한 톨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 풍경을 오직 청년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며 그 걸음마다 생애를 소모하기 위해, 다시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그저 뛰어넘어 버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느라 이 아름다운 마왕은 점점 인간처럼 작아져 버리지 않을까.
그러면 뭐 어때서? 황궁의 널찍한 전용 욕실 안에 도착해서 요른은 속으로 샐쭉하니 되뇌었지만 역시 상대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대신 목에 매달린 채 눈을 한번 깜박여 사기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웠을 뿐이다.
언젠가는 이 물도 손으로 수도를 틀어 채우게 될 거라고 짐작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무척 기뻐서 왕은 저를 받쳐 들고 욕조로 걸어 들어가는 자의 가슴에 기댄 채 혼자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둘이 꼭 안고 목욕했었지. 황궁 집무실, 막시밀리안이 왕의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피는 가운데, 요른은 지난밤을 돌이키며 금갈색과 녹색이 섞인 카펫 위를 데굴거렸다. 그러다가 어딘지 스산한 장면까지 이어 떠오른 바람에 멈추고 팔짱을 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을 안고 커다란 나룻배 모양의 사기 욕조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러잖아도 피곤하던 차에 훈김에 달자 요른의 몸도 정신도 금방 물속에 가라앉듯 녹아들었다. 게다가 자기 몸보다도 더 따뜻하고 엄청 단단한 팔에 안겨 있다 보니 순식간에 잠이 왔지만, 잠들어 버리긴 아까워서 그 팔을 괜히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해서 심기만 사나워졌다. 대신에 그 팔목 살갗을 손톱으로 후벼파서 조금씩 벗겨 내면서 놀았더니 막시가 고민하다가 곧 손가락을 내어 주었다. 한동안 그 검지 끝을 입에 넣고 짓물러 피가 날 정도로 잘근대긴 했지만, 요른은 어느 순간 결국 고개를 푹 꺾고 상대의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 버렸다.
정신을 차리자 어스름한 궁궐 침실의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머리 바로 옆 탁자 위의 램프에만 빛이 달빛처럼 약하게 밝혀진 채였다. 막시가 마법으로 밝힌 것이었으리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자 몸에 속옷도 잠옷도 어느새 입혀져 있었다. 거위 털을 가득 넣은 린넨 이불도 바로 어깨 위까지 곱게 덮혀 있고,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 아래에는 베개 위로 수건이 깔려 있었는데, 잠든 새 막시가 머리를 감겨 줬던 모양인지 머리카락에서도 수건에서도 희미하게 허브 향이 났다.
요른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찾았다. 역시 막시밀리안은 침대에는 올라오지 않고 그 곁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상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은 쏘아붙였다.
“넌 왜 또 거기서 그러고 있어?”
예뻐서 보는 거야. 막시가 겉으로는 웃기만 하는 사이 머릿속으로 문장이 전해져 왔다. 왕은 얼굴을 대놓고 찡그렸다.
“나 이 샴푸 싫어.”
그리고 투덜거렸다.
“나야 굳이 사람들 쓰는 걸로 몸 씻을 필요도 없고. 네가 감겨 준 거니까 좋아서 내버려 두는 거야. 너무 좋아서.”
“미안.”
“그게 아니잖아. 너, 알아?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금방이라도 다시 눈이 감길 듯 피곤한 중에도 생물은 온 힘을 다해 채근했다.
“마음 다 전해 주는데도 왜 모르는 척을 해? 자꾸 너만 나 좋아하는 척을 하는데, 왜 그래.”
“…….”
“지금도 피곤해서 목소리 내는 거 힘든데 네가 좋다니까 해 주는 거잖아.”
“미안.”
“올라와.”
요른이 짜증스럽게 뱉어 냈다.
막시밀리안은 바로 복종했다. 그는 가운만 하나 걸친 맨몸으로 침대로 기어 올라왔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이불을 들치고 들어와 요른과 마주 보고 누웠다. 그리고 왕이 다시금 제 쪽에서 청한 다음에야 더 가까이 다가와 그를 안아 주었다.
둘은 긴 숟가락처럼 겹쳐서 옆으로 누웠고, 평온하게 숨을 쉬었지만, 요른은 막시밀리안이 눈을 감고 있지 않으며 잘 생각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왕도 눈을 뜬 채 있는 대로 미간만 찌푸리고서 생각했다. 저건 진짜 제가 무슨 내 시종인 줄 아나.
맨 첫날도, 그제도 어제도 그랬다. 막시밀리안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왕이 침소에 드신 걸 조용히 곁에서 지켜드리려 들 뿐이었다. 매번 들어오라고 직접 말을 해야만 옆에 와 눕고, 이렇게 저렇게 안아 달라고 얘기를 해야 안아 준다. 그나마 왕을 혹시라도 깨울까 두려운 듯 누워 꼼짝도 하지 않으며, 요른이 언제든 자세를 불편해하면 금방 다시 바꿔 주기 위해 계속 깨어 있다.
몸을 섞는 것도 제가 즐긴다기보다는 차라리 봉사해 준다고 여기는 거 같다. 실제로 행위 중에 마음을 읽어봤자 거기 있는 건 쾌감이나 욕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걸 상대를 위해 한없이 정밀하게 조정하고 억누르는 배려와 신중함에 가깝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른은 당장 돌아누워서 상대의 머리통을 쥐어박아 주고 싶어졌지만 졸려서 사지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만 실컷 전하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바보. 머저리.
똥멍청이 자식.
그리고 오늘, 집무실 카펫 바닥에 모로 누운 채 요른은 어젯밤에 했던 욕에 마저 더해서 입 속으로 씹어 대며 막시밀리안이 있는 책상 쪽을 노려보았다.
어젯밤 행위를 돌이키던 동안은 기분이 좋았는데, 그 후에 저 멍청이가 키우는 개처럼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던 장면까지 떠오르자 울컥 화가 났다. 막시도 뇌리로 전해 받고는 찔렸는지 요른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의 서류에나 집중하려 들었다.
―어딜 피해.
하지만 왕이 속으로 으르렁거리자 얼른 도로 상대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왕은 그 꼴을 보고 더 심기가 좀 더 불편해졌다. 그리고 스스로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막시가 저렇게 죄책감에 절어서 알아서 발닦개처럼 구는 건 짜증이 나긴 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루 이틀이지, 나흘째 매분 매초 저러고만 있으니 물린다.
하지만 짜증만 나는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위험할 정도로 시커먼 가시처럼 화가 삐죽삐죽 돋는 이유는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분노를 타고 요른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장면이 설핏 다른 색을 드러냈다. 자신이 목욕통 속에서 막시의 팔을 깨물어 대고 있는 장면.
그때는 졸려서 아무렇게나 굴었지만, 돌이켜 보니 자신은 손톱으로 막시의 팔목 피부를 마구 할퀴어 벗겨냈고, 검지를 입에 물려 주자 역시나 짓물러 피가 날 정도로 깨물어 버렸다.
‘미웠나?’
요른은 카펫에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막시를 미워하기도 하나?
‘재밌네.’
뇌까리며 왕은 자기 안을 떠도는 것들을 조물조물 만져 보았지만, 그 꽉 닫힌 돌 같은 것들은 손을 대자 더 진하게 아픔을 발할지언정 병의 이름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요른은 자신 안에도 분명 스스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어둠이 있으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오히려 타인만이 들어 줄 수 있을 어둠이.
―그만둘까.
생물은 마음을 활짝 열어 둔 채 중얼거렸다. 사실 저 서류 위에서 하자고 조르려고 했었다.
보좌관이 결재를 부탁하는 쪽지와 함께 서류가 가득 든 손수레를 아침 일찍 탁자 곁에 밀어 놓고 떠난 걸 보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막시를 불러서 그 위에서 실컷 한 다음에 각 부처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막시랑 뒹굴었던 흔적이 남은 서류를 온갖 관료 놈들이 강제로 갖게 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막시가 이런 짓은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자신이 부탁하면 결국 해 줄 걸 알고 있다 보니 더 신이 났었다.
그래서 아까부터 막시한테 어젯밤 기억을 살살 전해 보내며 꾀었던 거다. 하지만 더는 안 보낼 거다.
흥이 깨진 채 요른은 상대 쪽으로 뻗어 두었던 감각의 줄기를 거두어서 제 뇌 속에 주머니에 넣듯 쑥 깊이 처박아 버렸다. 기억을 보낸 게 효과가 있어서 막시 안에서 반응이 일긴 했지만, 어차피 막시야 욕정 따위, 아무리 이쪽에서 불러일으켜봤자 제가 억누르려면 얼마든지 누를 수 있을 테니 의미도 없다. 게다가…….
―맨날 나만 부탁하지.
부탁해야만 움직여 주잖아.
내가 유혹해야만 반응하고.
생각하니 혀 밑으로 쓴맛이 퍼졌다. 요른은 자기 심경을 잘 알 수가 없었다. 막시가 스스로를 억누르는 게 싫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그가 주저하는 걸 억지로 시키면서 괴롭히는 게 즐거웠고 앞으로도 실컷 그러고 놀 거라고 생각하면 설렜다.
하지만 카펫에 누운 채 지난 밤들의 기억, 매번 침대로 올라오라고 자기 입으로 명해야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착 가라앉으면서 우울해졌다. 서류 위에서든 어디서든 전혀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 밤도 싫다.
나흘 밤을 놀았으니 하루쯤 안 놀아도 된다. 또 자신이 그렇게 대놓고 넣어 달라고 졸라야 할 거면, 침대 위로 올라와서 안아 달라고 하나하나 보채야 할 거면 안 하는 게 낫다. 눈물까지 고이는 바람에 요른은 카펫에 엎드려 있다가 얼른 등을 대고 누워 버렸다.
정말이지 마음이라는 건 자기 마음일 때 제일 알 수가 없다니까. 그때 막시가 불렀다.
“요른.”
뭐, 멍청아. 요른은 일부러 아무 답도 주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다시 또렷하게 전해 왔다.
“이리 와서 앉아.”
손짓까지 하는 거로 보아 책상 위로 와서 앉으라는 거였지만 요른은 드러누운 채 미간만 찌푸렸다.
“싫어.”
“말 들어.”
막시가 다시금 차근히 말했다.
요른은 찌푸린 채 누워서 버텼다. 시야가 어둠이 끼면서 속이 메스꺼웠다. 어떤 서늘하고 음습한 기운이 막시의 음성을 타고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 탓이다.
‘이건 막시의 감정이 아니야.’
생물은 곱씹었다.
‘차라리 내 감정이 막시 안에 반사되어서 되돌아오는 거지.’
막시한테는 자신의 심경이 어떻게 전해졌을지 모르겠다고, 요른은 뚱하니 생각했다. 저 진지하고 융통성 없는 바보의 뇌 속에 들어가면 요른 자신의 감정이라 해도 멋대로 다르게 해석되어 버릴 테고 또 다른 답을 향해 흘러 버릴 테니까.
누구든 자기 모습 중에서도 제일 풍부한 부분, 그러니까 얼굴 같은 건 제 눈으로는 못 보고 거울로만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자기 생김새도 상대라는 거울의 재질에 맡겨 둘 수밖에 없는데, 저 새카만 전기석 거울 같은 멍청이는 내가 지금 뭘 어떻게 느끼고 있다고 느꼈길래 갑자기 저러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요른이 바닥에 누워 버티자 막시밀리안이 깃펜과 옥새를 책상 위에 내려 두고 다가오더니 상대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싫어.”
왕이 항의했지만 청년은 그를 데려와 책상 위에 앉혀 놓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정복의 재킷 단추가 잘 풀어지지 않자 그냥 뜯어 버렸고, 조끼와 셔츠는 찢어 내다시피 했다. 허리띠마저 양손으로 잡아당겨 실오라기처럼 끊어 버리자 요른이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싫다고!”
―너 뭐 하는 거야, 개똥아.
욕을 좀 더 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더 익혀 둬야겠다고 새기면서 요른은 막시의 손을 쳐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막시는 곧 요른의 양 손목을 제 한쪽 손아귀에 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움켜잡고는 몸을 거꾸러뜨렸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등을 탁자 위에 세게 부딪치면서, 생물은 자기 바지조차도 질 나쁜 종이처럼 찢겨 나가고 속옷도 벗겨질 것도 없이 솔기가 다 터져 나가는 걸 보았다.
얘가 돌았나.
갑자기 나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져 버린 건가? 내 안을 떠돌던 뭔가가 쟤한테서 죄책감을 싹 씻어 줘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렇더라도 이건 막시답지 않아. 요른은 상대의 마음속을 더듬어 보고는 웃어 버렸다. 그 안은 갈라진 지옥처럼 들끓었다.
익숙한 감각이다. 청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요른을 향한 죄책감에 꽉 차서는 그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머리가 까마득해진 건 물론 손발도 아무 외부를 향한 목적도 없이, 다만 스스로 상처 입기 위해서만 움직여 갔다.
그러니까 막시는 지금 요른한테 너무 미안해서 덜덜 떨면서 그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벗기고, 손목에 멍이 들도록 움켜잡아 강제로 황궁 집무실 책상 위에 눕혀 놓고 범하려 드는 셈이었다.
‘어…… 얘가 진짜 돌았나.’
대체 난 뭘 전해 버린 걸까. 요른은 마음을 닫고서 혼자 생각했고, 아까 고민하면서 마음을 활짝 열어 뒀던 걸 조금 후회했다. 일단 혼자서 고민한 다음 막시한테는 정리해서 전해 줄 걸 그랬나 보다.
하지만 그렇게 후회하는 척하면서 요른은 동시에 막시밀리안의 안에서부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백발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서류 위로 엉겼고, 뺨은 발긋하게 얼룩진 채 눈동자는 벽과 바닥을 헤맸다. 찢겨 나간 셔츠 틈새로 어젯밤의 흔적이 엿보였으며 저항한답시고 되지도 않게 허리며 허벅지를 팔딱대는 것도 우스웠다.
괜찮은데. 막시의 뇌 속에서 요른은 무심코 되뇌었다. 칼을 푹 꽂아서 돌리면 속살이 졸깃하게 열릴 살구처럼 생겼다. 저기다가, 푹 꽂아 주면. 그 꼴을 내려다보면서 요른은 한편 탁자 위에서는 제 입술로 운을 떼었다.
“싫어.”
말하며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눈으로 자신의 입술을 내려다보고 귀로 음성을 들었다. 정말로 단호하게 싫다는 것처럼 들렸다. 뻔히 들었으면서도 막시밀리안은 그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싫다니까.”
오해의 여지라고는 없이 또렷하게 뱉으며 생물은 그 말을 발하는 자신의 입술의 움직임이, 숨결이, 아랫배로 피를 불어 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입 속에서 혀가 더 축축해지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막시의 손이 성기를 끄트머리부터 확 쓸어내린 순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도 콧등으로 교성을 흘리고 말았다.
신음을 참느라 요른은 더는 싫다는 소리도 하지 못했다. 까끌한 손바닥과 손마디 안쪽의 성마른 살갗이 여린 성기를 오직 사정을 향해서만 몰아붙였고 표피가 까져 예민한 부분을 가차 없이 비벼댔다. 요른은 배 위로 쏟아 내고서야 숨을 토해 냈다.
한쪽 다리가 들려 금방 상대의 어깨 위에 얹혔고, 방금 자신이 토해 낸 무른 액체가 항문 안팎에 덧발렸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긴장해서 조여 든 입구에 불거진 마디마디가 지나치게 잘 느껴졌고, 억지로 뚫으려고 삽출을 반복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꽉 물어 버리게 되곤 했다. 그래서 세 개까지 들어와서 휘저어 대는 동안에도 통로는 풀리기는커녕 무섭도록 수축해서 굳어 버린 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금방 살덩이의 머리가 뚫린 곳에 와 닿았기 때문에, 요른은 책상 위에서 집어 던질 물건을 찾아 더듬으며 항의했다.
“싫다고 했잖……!”
그러나 허벅지가 커다란 손아귀에 낭창한 꽃대 마냥 하나씩 잡힌 채 골반이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넓게 벌어졌고, 틀어 잡힌 곳에 멍이 드는 듯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아래가 꿰뚫렸다.
어젯밤 손가락으로 지겨울 정도로 한참이나 풀어 주고 안에 따뜻한 기름을 가득 부은 다음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요른은 입구가 으직 부서지는 듯한 느낌에 신음했고, 위장까지 순식간에 치받고 들어오는 무게 때문에 욱욱대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래가 너무 아팠다. 요른은 끊임없이 신음하며 발버둥 쳤고 울었다. 항문은 열릴 수 있는 한계보다도 더 넓게 열리느라 망가지기 직전이었고, 아랫배는 꽉 차다 못해 아예 배꼽께가 불룩하게 밖으로 튀어나와 버려서 징그러웠다. 어제는 어떻게 이런 걸 쾌감만 느끼면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막시밀리안은 반쯤만 삽입한 채로 상체를 구부려 한동안 요른을 안고 있었다. 입술에 키스하자 요른은 상대의 입술을 깨물었지만, 피를 흘리면서도 막시는 혀를 얽어 왔고 아래에서도 단번에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요른은 비명을 질렀다.
“싫어!”
배 속에서 내장의 원래 구부러져 있어야 할 부분이 펴져 버린 듯한 감각이 퍼지자 고통을 넘어서서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허벅지에 보랏빛으로 피멍이 들도록 살점이 쥐어 잡혀 다리를 벌린 채로 요른은 겨우겨우 소리를 냈다.
“싫어, 막시. 하지 마.”
울먹이는 음성에 맞추어 아래 입구가 옴쭉대면서 막시밀리안의 것을 씹어 댔고, 골반도 조금씩 흔들리며 이미 더 가릴 데도 없이 넓게 벌어진 곳을 더 벌려 상대를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건 요른이 자기 자신의 몸을 통해 느낀 풍경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의 몸을 통해 내려다보자 비로소 그런 꼴들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놀라서 요른은 얼른 더 다급하게 덧붙였다.
“빼 줘. 앗, 하지 마, 진짜 싫어.”
입술로 또렷하게 모양을 만드는 동안 유두가 반응했고, 요른이 허리를 뒤틀며 가슴을 내밀자 막시밀리안이 바로 깨물어 왔다.
어금니 사이에서 팅팅 부어오를 정도로 깨물리는 사이 아래에서는 푹 꽂혀만 있던 것이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장을 꽉 채운 그 금속제 곤봉 같은 것은 성감대를 차라리 할퀴고 지지듯이 비벼댔고 요른은 책상 위에서 파드득 튀어 오르듯 등을 휘었다. 성기가 우습도록 똑바로 곧추서서 액을 흘렸다.
요른은 그러나 곧 지쳐 버렸다. 느끼면서도 늘어져서 숨만 쌕쌕 몰아쉬면서 기절할 지경이 되자, 막시밀리안이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대신 상대의 배를 눌렀다. 양손으로 허리를 잡고 엄지로 아랫배를 더듬어서, 삽입된 성기가 내벽의 한 지점에 완전히 눌어붙게끔 고정해 놓고 치대자 요른이 다시 허리를 있는 대로 뒤틀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힉……!”
쾌감이 너무 고통스럽게 강했다. 난폭하게 오직 성감만을 몰아붙여서, 질펀하게 느끼면서도 전혀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성감만 느끼다가 부서지게끔 제작된 인형이 된 느낌에 가까웠고 무섭기만 했다.
막시밀리안은 생물의 배를 꽉 붙잡은 채 삽출을 반복했고, 처음에는 완만하고 뭉근하게, 나중에는 끝에서 끝까지 드나들 정도로 푹푹 찔러 댔다. 아랫배가 굵은 뱀이 지나다니는 듯 부풀었다가 꺼지곤 하는 동안 생물은 입으로 침을 흘리고 물고기처럼 퍼덕대기만 했다. 가끔 정신이 들 때면 싫다고 빌기는 했지만, 자비 없이 이어지는 쾌감에 다시 눈을 뒤집고 말 대신 식은땀과 체액만 줄줄 흘렸다.
성기로 묽은 액을 울컥울컥 토해 내고 입으로 교성을 흘리면서 요른은 울고 또 울었지만, 자기 몸속에서 울면서 한편 막시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꼬리로 투명한 눈물이 넘쳐흐르는 각도를 재며 턱을 조금 더 치켜들었고, 이어 사지와 허리의 보드라운 살점에 얼룩덜룩 잘 익은 복숭아처럼 멍이 들어가는 모양을 살펴 그 분포와 색감에 제법 만족했다.
요른은 누운 채 고개를 꺾어 제 팔목을 보고는 아까 움켜잡혀 안쪽에 든 멍이 거무죽죽하게 변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책상 모서리를 쥐고 버티느라 막시의 시각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상대의 머리를 밀어내려는 듯 요른은 일부러 손을 들어 올려 팔목의 멍을 그의 시야 한가운데에 비추어 냈고, 막시는 정확히 그 멍이 든 부분을 움켜잡아 팔을 다시 상판 위로 던져놓고 짓눌렀다. 요른은 찡그리며 어린애처럼 울었다.
생물은 자신의 분홍빛으로 충혈된 성기가 이리저리 꺼덕이며 사방에 액체를 튀겨대는 꼴을 품평하듯 위에서부터 찬찬히 훑어보았고, 어딘가 연출이 모자란다 싶자 허벅지 안쪽의 근육을 부르르 떨며 골반을 침대 위로 붕 뜰 정도로 높이 들어 올렸다. 막시밀리안이 한쪽 손을 내려 성기를 서너 번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지만, 가기 직전이 되자 오히려 터뜨릴 듯이 틀어쥐더니 내팽개쳤다.
고통에 울면서도 요른은 자신의 입구가 더욱더 움찔거리고, 유두는 팽팽하게 부어오르고 입술은 키스를 갈구하면서 달싹거리는 걸 막시밀리안의 안에서부터 보고 느꼈다. 그러나 그 입술이 바라는 대로 상대가 키스해 오자 요른은 송곳니로 구멍이 날 정도로 깨물며 거부했다. 막시는 이가 부딪칠 정도로 난폭하게 안을 열어 강제로 혀를 얽으며 아래에서 몰아붙였다.
생물은 마침내 처연하게까지 들리는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가 버렸다. 그가 배 속을 모든 현이 한꺼번에 튕겨진 악기처럼 진동하며 앞으로는 백탁액을 쏟아 내는 동안 막시밀리안은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그러나 절정이 지나갔다 싶자 청년은 넣은 그대로 요른의 몸을 돌려 이번에는 책상 위에 상체를 깔고 엎드리게끔 했다.
“막시, 그만…….”
집무실의 업무용 책상은 꽤 높았다.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자 요른은 겨우 빠듯하게 높이에 맞춰서 발바닥을 바닥에 대고 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오른쪽 다리를 책상 위로 구부려 올리자 이제 왼쪽은 발끝만 바닥에 닿았다.
뒤에 들어찬 것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른은 눈 아래에 흩어져 쌓인 서류 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말라붙은 입구가 찢어질 듯 부어올랐다. 막시밀리안이 잠시 성기를 빼내었다가, 요른이 책상 위며 제 몸 여기저기 흘린 체액을 모아다가 고루 입구에 발라 주고는 도로 푹 밀어 넣었다. 이물이 잠시라도 빠져나가 오므라들었던 입구가 아무 소용 없이 열리면서 요른은 서류 몇 장을 구겨 쥐었다.
생물의 등에 땀이 바짝 돋다 못해 척추가 오목하게 팬 곳을 따라 고였다. 요른은 그 등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리고 그 흐느낌 때문에 막시의 마음이 얼마나 짓찢기는지, 더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혼미하게 부서져 가는지 생생하게 느꼈다. 사실 그가 아까부터 자신보다도 더 싸늘한 땀에 젖어 겨울비에 갇힌 양 죽어 가고 있다는 걸.
그래도 막시밀리안은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워진 고개를 내려 요른의 드러난 목덜미에 키스했고, 아래에서 서로 연결된 곳을 더 깊게 부추겼다.
꿰뚫린 곳에서 불어나는 열기를 받아들이며 요른은 성감대를 불로 지져 자극하는 듯한 고통만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었을 뿐, 불만을 표하거나 저항하지는 않았다. 제 몸이 아픈 만큼 그 몸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자의 고통도 점점 더 감미롭게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 높은 곳에 있는 자가 신앙을 고백하듯 비는 감촉이 요른 안에 전해졌다. 원해.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해. 내가 너를 원하고, 가져야만 해.
내가 너를.
막시의 안에서는 말이라기보다는 복잡한 회한과 슬픔이 다 부서져 내린 흔적처럼 남아 있던 것들이, 요른의 피부와 내장 속에 옮겨와서야 금속 문자처럼 또렷해지며 배 속에 낙인을 새겼다. 생물은 저도 모르게 골반을 더 높이 치들었고 발끝으로만 서 있던 한쪽 다리를 상대의 다리에 바싹 감았다.
삽출이 반복되면서 쾌감은 차라리 칼자국이나 타박상처럼 정신을 훼손시켰기에 요른은 점차 생각하거나 뭔가를 느낄 능력마저도 잃어갔다. 성기만 머리와 상관없이 혼자 살아서 아랫배와 서류 사이에 짓눌린 채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액을 흘릴 뿐이었다. 막시밀리안이 손을 뻗어 빠끔대는 구멍 주변을 매만져 주자 그것은 금방 하얗고 끈적한 것을 토해 냈다.
“막시, 이제 아, 아파.”
사정을 마치고 요른이 완전히 쉬어 버린 소리로 전했다.
“지, 진짜, 그만. 너무 아, 파.”
사지는 근육통에 절어 있었고, 골반과 허리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절정에 시달려 수도 없이 물결친 아랫배도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이 아팠다. 유두는 부었고 성기도 따갑고 내내 비명을 질러서 목도 아팠다. 내장은 완전히 남의 것이 되어 버린 듯했고 입구에는 아무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그만. 쉬고, 싶어.”
진심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막시의 눈에 비친 생물은 남은 힘을 다해 허리를 낮추며 박혀 있는 것을 꽉 물고 조르려고 애썼다. 그 꼴에 질색해서 요른은 앞으로 기어나가려 버둥대며 빌었다.
“하지, 마. 그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간청이 막시밀리안의 심연에서부터 어떤 필연적인 불협화음 같은, 어긋나면서야 겹쳐지는 선율을 불러내는 걸 들었다. 안 돼. 더 해.
“아, 아니야. 싫어. 제발, 막시. 그만…….”
요른의 몸 안에서 막시의 것이 빠져나갔다. 벌어진 입구에서부터 회음부로 걸쭉하게 젖어 드는 감각을 통해서야 비로소 요른은 막시가 자신 안에 한 번 사정했다는 걸 알았다.
생물은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겨우 가누어 탁자에서 상체를 받치고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그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고, 탁자에 걸터앉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요른을 제 사타구니 위로 마주 보고 푹 앉혔다.
요른 자신의 몸무게 때문에 상대의 것이 순식간에 끝까지 파고들었다. 요른은 발끝으로 책상을 긁으며 숨을 삭였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상대가 탁자에서 떨어지지 않게끔 한쪽 팔로는 그의 등과 어깨를 안고 한쪽으로는 엉덩이를 꽉 잡아 받쳐 주었다.
몸이 위아래로 들썩이자 생물의 목이 힘없이 자꾸 이리저리 꺾였다. 막시는 그의 뒤통수를 받쳐 제 어깨에 꼭 붙여 안고는 허리만 움직였다. 박히는 대로 희미한 신음만 흘리던 생물은 문득 상대의 눈으로부터 자기 모습을 훑어보고는 놀랐고, 동시에 무심코 제 왼손의 형태를 바꾸었거나, 혹은 제 손의 형태가 바뀌는 걸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성긴 백발을 늘어뜨린, 봉인되어 있을 때의 모습으로 변한 요른이 상대의 옆구리 뒤쪽에 손톱을 깊이 박아넣었다. 그 순간 막시밀리안의 뇌리에도 문장 하나가 밝혀졌다.
읽어 내면서 생물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건 막시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강제로 계시받은 명령이었다. 도망치지 마.
계속해.
그러다가 미쳐서 죽어 버려.
자신의 왼손 끝이 금방 피로 물드는 걸 느끼며 요른은 멍한 와중에도 다른 쪽 손도 마저 손톱을 세워 막시의 등허리에 박아넣었다.
막시는 바지와 속옷만 반쯤 내렸을 뿐 웃옷은 재킷까지 다 갖춰 입고 있었다. 그러나 강옥 송곳처럼 변한 손끝과 손톱은 그런 천쯤은 금방 통과해서 살과 근육을 후벼파고 갈비뼈까지 가 닿았다. 생물은 손톱 끝으로 뼈 바로 위의 살점을 빠득빠득 파헤쳐댔다.
요른은 자신이 언제 봉인되었던 때의 모습으로 변한 건지, 왜 그렇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고, 지금 자신이 막시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무언가가 거기 없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굳이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감각의 결 그 자체만을 예민하게 느껴 보려 애썼다. 자기 안에는 아무리 귀 기울여 보아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지만, 막시밀리안의 안에서 숨을 멈추듯 정신을 집중하자 비로소 마치 반사광처럼 예리한 목소리가 울려 되돌아왔다.
더 해.
양쪽 손의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상대의 갈비뼈를 얽은 채 요른은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음성이 다시금 막시의 뇌리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걸 들었다.
내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해. 날 더 원해.
요른은 막시밀리안이 한쪽 손으로는 조심스레 자신의 뒤통수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껴안은 채 얼굴이 다 젖도록 울고 있는 걸 알았다. 사지도, 맞닿은 가슴도 뺨도 이미 시체가 된 양 싸늘해진 채였다.
막시밀리안아 다시 허리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쪽 요른, 봉인된 요른은 싫다고 항의조차 해 주지 않았다. 막시가 그렇게 길들였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게끔, 특히 막시밀리안 자신은 신처럼 따르게끔.
투미한 회백색으로 침잠된 생물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이를 악문 채 행위를 받아들였으며 울음조차 삼키고 목으로만 끅끅거렸다. 다만 유령처럼 새하얗게 변형된 양손만이 청년의 등 뒤에서 넝쿨처럼 갈비뼈를 얽어 잡고 명했다.
더 해.
요른이 부어터진 목으로 울음을 삼킬 때마다, 비부에서 찌걱대는 소리가 짙어질 때마다 막시의 뇌수를 울리는 목소리도 청아하게 달아올랐고 발음도 무섭도록 모서리가 명징해졌다. 더 해.
날 학대해. 짓밟아. 묶어. 때려. 강간해. 녹이고 조각내. 단 이젠 절대로, 절대로 날 거부하느라 그러지는 마.
오직 날 원해서만 그렇게 해.
끝까지 해. 도망치지 마. 네가 저질렀던 일들을 더 끔찍하게 반복해. 다만 이제 다시는 다른 핑계는 대지 마. 날 원해.
나만을 원해. 나를 원해서만 날 찢고 부러뜨리고 망가뜨려. 끊임없이 악을 저지르고, 괴물이 되고, 괴로워해.
그러다가 미쳐서 죽어 버려.
막시밀리안.
청년의 등에서 갈비뼈 하나를 끊어 내며 생물도 척추가 들썩거렸고, 상대와 자신의 아랫배 사이에서 체액을 내놓고는 축 늘어져 버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안을 떠도는 목소리는 여전했기에 청년은 기절한 창백한 몸을 난폭하게 들쑤셔 깨워냈고 입술에 키스했으며, 손으로 아래쪽 살집을 벌려 더 깊이, 주름에 고환이 들러붙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요른이 더 내놓을 것도 없어서 두 번째 마른 사정에 이르렀을 때쯤 마침내 비부가 길게 찢어졌다. 피로 질척대는 안에 막시밀리안도 한 번 더 사정하고 나자 요른은 여전히 한쪽 손톱으로는 막시의 등을 파고든 채 다른 손으로 그 뒷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만하자.
생물이 문장을 세심하게 조형해서 전했다. 이 글자들로 자신의 다른 쪽 목소리를 억누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러다가 너 완전히 망가지겠어. 그만하자.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안을 깊이 찌른 채 그 등을 꼭 안고 아무 답도 없었다. 읽어 봐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아무것도 전해 오지 않았고, 몸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박제 인형처럼 차가웠다. 요른은 다시금 몇 번이나 찬찬히 막시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요른은 정신을 집중해서 전하려고 노력했다. 수십 번이나 입으로도, 마음으로도 말을 만들어서 전했다.
시간이 아찔하도록 흐른 후에야 막시밀리안이 겨우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헉 몰아쉬었고,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잃은 듯 자기 몸과 요른의 몸을 그저 끊임없이 번갈아 훑기만 했다.
요른은 막시의 이마에 키스했고, 오른쪽 손도 마저 등에서 뽑아내어 피에 젖은 손가락으로 어깨와 목, 뺨도 쓸어 주었다. 봉인이 완전히 풀린 후의 반짝이는 모습으로 돌아온 채였다. 그러면서 상대를 타박했다.
“바보야. 그러니까 얼른 놀이로 배워 두랬지.”
놀이로 할 줄을 모르면 진짜로 이렇게 끝까지 가 버리잖아. 생물은 상대의 완전히 넋이 빠져 초점을 놓아 버린 암회색 눈동자를 보며 혀를 찼고, 눈을 감겨 젖은 눈두덩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초보니까 오늘만 봐줄게. 내가 알아서 내 몸 회복시킨다?”
―다음엔 턱도 없어. 네가 남긴 상처 다 달고 그대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앓아누워 있을 테니까, 네가 제대로 해. 야, 야…….
요른은 피식 웃어 버렸다. 막시밀리안이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요른은 어린애를 달래듯이 청년의 뺨을 쓰다듬으며 전했다.
―괜찮아, 봐봐. 나 벌써 회복했다. 멍 없어졌지? 정신도 다 깼잖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손이 많이 가는 애 같으니라고. 요른이 계속 쓰다듬어 주자 막시밀리안이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른이 아직 덜 식은 것을 제 밑에서 빼내면서 몸을 추슬러, 멍도 핏자국도 체액이 얼룩졌던 흔적도 다 사라진 보송보송한 맨몸으로 탁자 위 막시 바로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서류도 너무 망가졌으니까, 내가 적당히 복구시킬게.”
막시가 끄덕거렸다.
“네 상처도 고쳐 줄까?”
요른이 청년의 피에 젖은 암적색 재킷을 턱짓하며 물었다. 그러나 막시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요른은 손을 들어 그의 왼쪽 뺨을 건드렸다. 이건?
뺨에는 성검의 날이 파고들었던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까지 상처 입혔기에 몸을 옮기면서도 따라온 자국. 요른은 검지로 그 결을 따라 누르며 물었다. 이제 없애도 되지 않아?
그러나 막시가 순간 진저리를 치며 요른의 손을 쳐냈다. 그러고 나서 제풀에 놀란 듯 어정쩡하게 상대를 쳐다보긴 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고 끝까지 고개만 저었다. 요른이 끄덕거렸다.
“알았어.”
요른은 상대의 갈비뼈를 대충 접붙이고 지혈만 해 주었다. 막시가 곧 책상에서 내려와 손수건으로 앞을 닦은 후 속옷을 올리고, 바지도 마저 끌어 올려 버클을 조였다. 재킷의 매무새도 가다듬고 나니 옷차림은 제법 단정해졌지만 요른은 그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걸 알았다. 오늘 종일 그는 서류 정리고 회의 참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재밌네. 배시시 웃으며 생물은 저도 얼른 찢어진 옷조각을 허공에 그러모아 대충 새것으로 만들어서 도로 걸쳤다.
왕은 자기 안에 숨은 미움과 어둠이 무척이나 뿌듯했다. 자기 자신은 그것들에 지금까지 완전히 눈멀어 있었으며 앞으로도 스스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면서도 그랬다. 막시밀리안이 있으니까 괜찮다. 그가 다 타인의 입장에서 직시하며 들어 줄 테고 최선을 다해 답해 줄 테니까.
가끔씩 마왕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위험한 놀이판이 벌어지리라.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즐기며 놀이로 되돌려 놓는 것도 재미다.
놀이가 열리지 않을 리는 없다. 막시밀리안은 충직한 반려다. 그는 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연부터 표면까지 온전히 다 가져 줄 것이다. 견디지 못해 조금씩 망가져 가는 한이 있다고 해도 이제 그는 요른에게 속한 것이라면 거부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한다.
‘진짜 좋았어.’
왕은 질펀하게 삼켰던 특식을 돌이키며 책상 위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지만, 한편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역시 몸을 회복시켰더니 기억도 한 꺼풀 씻겨 나가 버렸다. 다음에는 꼭 다친 그대로 내버려 둬야겠다.
하지만 왕은 흑발 청년이 비척비척 방 한구석으로 걸어가더니 의자에도 손을 대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모습을 놓치지는 않았다. 잘 정돈된 표정에 단정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안색만은 출혈 때문에든 충격 때문에든 여전히 푸르죽죽한 채였다.
‘저 바보는 하여간 뭘 해도 열심이야.’
뭘 시켜도 올곧게 파고들기만 한다. 그래서 귀엽다. 그러나 마왕은 뭔가 이상한 감이 들었고 오래전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도와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물의 꼬락서니를 보며 마왕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건 자기 자신의 소원을 버틸 수 있는 혼이 아니다.
게다가 앞으로 적어도 며칠은 저건 왕의 몸에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 청년의 속을 몰래 찬찬히 더듬어 살펴보며 요른은 확신했다. 당분간은 밤에 만나도 그냥 잠이나 잘 재우고 맛있는 거나 먹여 줘야겠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니까. 투덜대듯 생각하면서도 마왕은 인간인, 인간일 수밖에 없는 제 반려에게 눈길을 향한 채 슬며시 웃었다.
* * *
이틀 뒤 늦오후 흑마법사 소피아, 르핀 멸망 때 큰 부상을 입고 탈출해서, 썩어 가는 몸을 끌고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버텨 온 자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실은 초점을 흐려 일부러 하늘과 자신 사이의 공기를 응시하려 애썼다.
공기가 맑군. 그녀는 생각했다.
‘공기가 정말 맑아.’
이제 거의 사람이라고도 하기 힘들 정도로 변형된 얼굴 가죽이 마치 웃음처럼 흔들렸다.
옛 황국령 그로쉔 왕국, 현 통일 공화국 그로쉔 자치주에 위치한 프란첸 별성의 성벽 위에서 유디트 폰 프란첸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의 목전, 하늘은 풋풋하게 푸르렀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그 청빛이 저 유리처럼 맑은 대기가 전해 주는 환상인 걸 알았다.
그녀는 반년 전 갑자기 하극상을 일으키더니 투항해 버린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 프란첸 공작은 대노했지만 유디트는 그의 결정을 이해했고, 성황국이 무너지고 마왕군이 수도에 입성한 후에는 편지를 보내 연락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서로를 위해 인연을 끊기를 바란다는 짤막하고 공손한 답을 해 왔을 뿐이다.
유디트는 굳이 아들을 만나려 들지는 않았다. 만나서 손이라도 잡는다고 해서 흔들려 줄 상대도 아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남편과 달리 그녀는 아들이 무엇을 선택했을지, 혹은 종국에는 선택하고 말는지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가 충분히 각오가 되어 있으리라는 점도.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어린 아들이 하얀 시동과 뛰놀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했다. 아마 요른이 바꿔놓은 기억일 테니 머릿속에 밝혀지는 것은 당시 그들의 진짜 모습도 아닐 테지만, 그래도 어떤 행복의 향취만은 그 색채의 면면마다 남아서 돌이키는 자의 마음을 상처 입히곤 했다.
‘어디서 어떻게 서로 처음 만났을까.’
너는 그 생물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했니. 유디트는 새삼 곱씹었다. 아들은 언제나 옳은 것만을 바랐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오직 모두를 위해서 옳은 것만을 좇고자 했다. 어렸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맹목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아직도 어떤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은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마왕이라는 것이, 그렇게 거대한 존재가, 자신이 그를 선택하기 전이 아니라 그 후의 운명으로만 세계에 찾아든다는 걸.
크고 영원한 것은 가장 작고 유일할 때에야 비로소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걸.
‘강림을 하든 성검이 되든, 그는 언제나 네 거였어, 막시밀리안. 내 작던 아들아.’
그녀는 평생 한 번도 사랑해 주지 못한 아들을 뇌리에서만은 마치 소설 속 대사를 따라 하듯 사랑스럽게 불러 보았다. 사람의 방식으로나마 둘을 억지로 떼어 놓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역시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주인이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두 개의 예언은 그 복속의 두 가지 다른 형태일 뿐이다.
‘그리고 네가 선택한 미래는…….’
“유디트.”
공작 부인은 망루 쪽을 바라보았다. 올리버 프란첸이 서 있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남편을 보지 않았다. 그 사이의, 그와 자신을 연결해 주는, 둘을 서로 보이고 들리게끔 매개해 주는 맑은 공기를 보았으며 자신이 그것밖에 볼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남편도 자신 쪽으로 오직 그렇게만 몸을 향하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유디트.”
남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저하는 기색이 남아 있긴 했지만 아까와는 결이 다른 음성이었다.
순간 그들은 서로 적이 되어 버렸음을 알았다.
‘너무 맑아.’
정신을 가누려 애쓰며 프란첸 공작 부인은 되뇌었다. 공기가 너무도 맑고 투명하며 사랑스러웠다. 대륙의 허공을 호수처럼 메운 왕의 권능이.
타인과 공유하기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