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5권) (21/30)


4.

요른은 모든 게 다 짜증이 났다.

흑발의 여단장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꺼져 들어 버린 것도 짜증이 났고, 그 시선의 끝에 걸린 게 다름 아닌 자신인 것도, 자기 모습도 이름도 여전히 ‘요른’인 것도 순간 확 짜증이 났다.

어쩌다가 내가 저런 멍청이한테 선택받았지? 요른은 막시밀리안을 쏘아보면서 한편 등 뒤의 보좌관과 호위병들의 머리에 손을 댔고, 적당히 기억을 바꿔서 다른 공간으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상대를 놀려 줄 겸 형상을 살짝 바꿔보았다. 탁하고 희박한 은회색 눈, 꼬챙이 같이 말라비틀어진 몸에 푸릇푸릇 핏줄이 비치는 허연 피부, 얼굴을 반쯤 가린 성긴 백발과 흉터투성이의 몸.

청년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긴 했지만, 비칠비칠 뒷걸음질해서 벽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핏기를 잃은 채.

‘짜증 나.’

하지만 동시에 기분이 무척 좋았기에 마왕은 마치 가락이 맞는 콧노래를 흥얼대듯 생각했다. 짜증 나는 멍청이지만 멍청이라서 사랑스럽지.

‘바보, 똥개 새끼. 뭘 떨고 있어. 그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애초에 회귀를 시켜준 게 누군데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아니, 설마 그따위 걸 감추려고 내내 자기 마음을 읽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겠지? 생각하니 정말 짜증이 났고 저절로 어깨가 들뜰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청년은 왕 앞에 고통에 젖어 서 있었고, 사실 서 있는 게 고작인 것 같았다. 찬 벽에 등을 댄 채 벽보다도 더 식어 버린 몸으로 그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했으며 턱은 꽉 악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마왕은 그 짜증 나는 꼬락서니를 구석구석 살피며 즐겼다.

즙을 한 방울도 흘리기 싫은 열매를 핥듯이, 마왕은 제 눈에 비친 청년의 모습을 머리칼과 옷 주름 하나하나까지 핥았고 핥으면서 오히려 더욱 기갈이 나서 속으로 뇌까렸다. 안을 들여다보면 좋을 텐데.

모습도 즐겁지만, 지금 막시밀리안의 마음이야말로 아주 고통스럽게 잘 익어 있을 터였다. 뇌 속에 온통 절망과 회한의 불꽃이 뛰고 맥박은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 아득하리라. 생각하자 마왕은 입에 침이 가득 고이는 걸 느꼈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보기만 해도 이렇게 귀여운데, 저 안은 얼마나 맛있을까. 폴짝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생물은 아직 상대의 안으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과 ‘연습’을, 나중에는 ‘놀이’를 하면서 천천히 깨어 나온 마왕의 자아는 그런 인간적인 감상 따위는 벗어 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어쨌거나 막시밀리안이 하지 말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그의 소망이라면 부탁도 명령인 척 들어 주지 않으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마왕은 스스로 하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상대를 정해 놓고 그에게만은 일단 복종하지 않을 거라면 재미가 없다.

놀이에는 규칙이 대단히 중요하다. 현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기사도 따위 어기면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규칙을 정해 놓고 무조건 따르지 않으면 놀이는 애초에 성립하지조차 못한다. 막시밀리안, 나의 사슬, 나의 속박. 나의 감옥.

내 이름, 내 형상, 내 자아, 나 자신. 나의 막시밀리안. 

마지막 명령, 빨리 마지막 명령을 내려 달란 말이야. 속으로 투덜대면서 요른은 상대에게 머리로 생각을 전하는 대신 일부러 목소리를 내서 전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흑발의 청년은 그러나 답은커녕 고개조차 들지 않았고 요른은 실망했다. 어릴 때는 내가 입으로 말해 주면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그로쉔의 프란첸 본성에 살던, 도자기로 빚은 듯 곱디고운 소년은 늘 굳이 상대의 음성을 듣고 싶어 했다. 마왕이 머리에서 머리로 생각을 전할 수 있으며 그게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빠르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요른은 당시 말이 서툴러서 자주 들려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드문 기회라 더 목말라 있었던 건지, 생물이 더듬으면서나마 음성을 내어 줄 때마다 온몸의 피가 다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춤추듯 기뻐했다.

그 순간 막시의 안에 있노라면 마왕도 그 환희에 함께 물들곤 했다. 예뻐, 목소리 너무 예쁘다. 몇 번이고 속으로만 속삭이듯 되뇌면서 소년은 마왕을 꼭 안아 주었다. 그러면 마왕도 기분이 몽글몽글하게 좋아져서 상대를 열심히 어린애의 짧은 양팔로 마주 껴안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막시밀리안은 그저 죄책감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요른은 그가 이제 자신이 뭘 해 주든 저렇게 사무쳐 떨고 울고 괴로워하기만 하리라는 걸 알았다. 엄청나게 짜증이 난 채로, 그러나 설레어 입맛을 다시면서 마왕은 한 번 더 물었다.

“대체 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 해.”

“난 어디에든 있잖아. 시점과 시점 사이에도, 네 생과 또 다른 생애 사이에도. 힘을 잃었을 때면 모를까, 이제 다 되찾았는데 어떻게 몰라. 네가 왜 날 봉인했는지, 왜 용사가 될 생각을 했었는지…….”

요른이 갸웃하며 덧붙였다.

“그쪽 세계의 내가 어쩌다 성검이 되었다가 부서졌는지도 난 당연히 다 기억하는걸.”

“미안해.”

막시밀리안이 결국 벽에 등을 댄 채 무너져 내렸다.

“미안, 미안해, 요른. 나, 나는 그때는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어. 모르고, 아니, 어리석어서, 내가 너를, 미안…….”

청년은 더듬거렸고, 흐느꼈고, 손바닥이 파이도록 주먹을 쥐었고 그 주먹으로 빗장뼈를 으스러져라 꽉 누른 채 끊임없이 신음하며 빌었다. 요른은 짜증이 났고 기분이 미치도록 좋아 무심코 입술을 핥았다.

‘움베르토에게는 감사해야겠어.’

그 괴이한 사제 관계의 은사 같은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임종 직전에 마왕에게 기도를 올려 단서를 주지 않았더라면 요른도 이렇게까지 금방 힘을 되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왕은 이죽거리듯 전했다.

“야, 나 들어간다?”

그리고 답도 듣지 않고 바로 청년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청년이 뭔가를 막으려는 듯이 하릴없이 손을 움직였지만, 이미 상대가 자기 안에 들어온 걸 깨닫고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요른은 그 심장과 머릿속 혈관의 미세한 말단까지 파고들어 오가며 혼의 고통을, 복잡하게 뒤섞인 회오를, 후회를, 슬픔과 미쳐 버릴 것 같은 죄책감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황홀하리만치 맛있었다.

요른은 상대의 마음은 읽어 들이되 아직 자신의 마음은 상대에게 풀어놓지 않은 채였다. 막시밀리안의 이 맛있는 피에 자기 것이 조금이라도 섞여 들어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왕은 제 마음은 제 안에만 고이 잠가 둔 채, 상대에게 또다시 목소리로만 물었다.

“내가 싫어?”

“아니.”

청년이 체념한 듯 답했다.

“그것 봐, 바보.”

요른이 웃으며 다가와 상대의 입술을 쪼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정신없이 떨리는 팔로도 있는 힘껏 밀어내는 바람에 입을 삐죽거렸다.

“좋으면서. 나 지금 너 다 읽고 있단 말이야. 엄청 좋으면서 왜 그래?”

“안 돼.”

“왜!”

“사랑해, 요른.”

“알아!”

요른이 분통을 터뜨렸다.

“알아, 그거야 십육 년 전부터, 아니, 네 지난 생애부터도 다 안단 말이야. 다 아는데 왜 그러는 거야. 나도 너 사랑해. 너무 좋아. 네가 그놈의 세상 때문에 기다리라고 해서 얌전히 기다렸던 건데, 이제 넌 세상 따위 망해도 상관도 없다면서. 그럼 뭐가 문제야?”

사실 요른은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직접 말해 주길 원했다. 그래서 저 사랑스러운 혼으로부터 더, 더 맛있는 즙이 새어 나오기를. 흑발의 청년이 한참이나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떨고 있다가 흘려 냈다.

“난 널 죽, 였어.”

“응, 뭐…… 그렇다고 치자.”

“널 학대했, 어. 널, 나는 네게, 수도 없이…… 다, 다른 사람 손까지 빌려서 감시, 다치게 했어. 널 완전히 망가뜨렸어. 그래서 너, 넌 결국…….”

“응응, 그래.”

뭉그러진 소리를 토해낼 때마다 막시밀리안의 심장은 들썩거렸고, 피부는 식었고 사지가 경련하며 뇌 속에서는 차갑고 희뜩한 심연이 열려 뻐끔거렸다. 요른은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상대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상대가 미친 듯이 뿌리쳐 대는 바람에 마왕은 물러섰고, 일단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상대의 온갖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빨아들여 먹어 치웠다. 맛있었다. 아팠다.

내 막시밀리안이 아프다.

나 때문에 저렇게 아프다. 혼이 다 찢어질 듯 가엾고 안타까웠기에 요른은 자기 자신의 고통마저도 달큰하게 삼켰고, 아프고도 아픈 환희에 들떠 절정의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 채로 요른은 입술 사이로 휘파람을 불 듯이 부드럽게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안은 벽에 등을 처박고 주저앉아 있었고, 눈을 감고 양손으로 제 머리를 감싼 채 답이 없었다. 그러나 요른은 그 귓가로 바싹 다가가 속삭였다.

“나쁜 짓도 나쁘지 않아.”

생물은 흑발을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곧 천천히 머리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 새카만 머리칼과 뺨을, 등과 어깨를 쓰다듬어 주어도 청년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오열하고 있었다.

요른은 인간으로서 살던 습관대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바보는 늘 이런 식이다.

전에는 세상을 지키는 게 옳은 일이기에 그쪽을 선택하느라 사랑을 못 지켜 괴로워하더니, 이제는 세상 따위 멸망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주제에 사랑만은 올바르게 하고 싶어서 괴로워한다.

‘결국 또 옳지가 못하다는 거지.’

청년은 이전 생애에서 그렇게도 옳다고 믿던 것들을 사랑 때문에 완전히 다 버리고 회귀했다. 그런데 그래 놓고는, 아니, 그런 만큼, 이번 생에는 절대로 죽어도 사랑만큼은 옳게 해야만 한다는 거다.

상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못된 짓들을 해 놓고 뒤늦게 사랑이라는 허울로 덮어씌우려 들다니 도무지 말도 안 된다. 그건 잘못되었다, 그러니까 할 수가 없다.

이것만이 너를 온전히 각성시켜 주는 길이라 해도, 사실은 처음부터 이 길밖에 없었다고 해도 나는 못 하겠다. 그래서 네게 미안해 죽겠고 말 그대로 죽고 싶기만 한데 그래도 못 하겠다. 이런 관계는 옳지 못하니까, 틀렸으니까, 잘못되어 있으니까, 나쁘니까, 난 못 한다. 안 된다.

‘얘는 진짜 어디까지 바보지?’

요른은 새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기야 지난 생애에서도 막시는 행복을 꿈꾸지조차 못했다. 용사가 되어 일을 다 끝낸 다음에는 마왕이 만들어 준 지옥에서 벌을 받으면 좋겠느니 어쩌니 제멋대로 소망했을 뿐이다.

인간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요른은 수억의 생물 안을 들락거렸기에 이렇게까지 결벽하게 곧으려고만 애쓰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쩐담. 그냥 용서한다고 한 오백 번쯤 말해 주면 되나?’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 싫었다. 그렇게 말해 준다고 해서 저 융통성 없는, 필립 표현에 따르자면 그로쉔 놈들 중에서도 제일 그로쉔 놈 같은 멍청이가 그, 뭐랬지, 저 자신을 용서할 거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왕은 무엇보다 애초에 용서고 뭐고 하는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른은 인간의 어떤 면에는 역시나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맛있는 고기를 제 손으로 버리는 거 말이다. 인간들은 어떤 부위의 고기는 죄니 어쩌니 부르면서 먹기는커녕 만지기도 꺼리는 거 같았는데, 고기는 고기 아닌가. 맛있으면 끝이다.

이렇게 맛있는 걸 굳이 왜 버려야 하지, 너는 왜 버리려고 드는 거지. 나만 맛있는 거야? 너는 맛이 없었어?

하얀 생물은 무릎을 꿇고는 막시밀리안의 눈물에 푹 젖은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뺨을 살짝 핥았다. 소금기 어린 물이 혀끝을 적셨고 역시 무척 달콤했다. 난 네 고통이 이렇게 맛있는데.

기쁨이든 고통이든 네 거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면 난 다 너무너무 맛있는데. 넌 내 거 하나도 맛없었어? 그렇게 괴롭혀 놓고는 내내 먹지도 않고 버린 거야? 너무하네. 요른은 푹 한숨을 쉬고는 재차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막시밀리안.”

마왕이 이어 부드럽게 신호를 주었다.

“나 풀어놓을게.”

그리고 그는 바로 막시밀리안의 안에서 자기 마음을 풀어놓았다.

흑발 청년이 숨을 헉 들이마셨다. 요른은 그의 맥박이 더 불규칙하게 빨라지는 걸 느꼈다. 진정해, 괜찮아. 하얀 생물은 안에서부터 청년을 다독이며 전했다.

―괜찮아, 바보야. 네가 하도 안 들으려고 하니까 내가 굳이 들어와서 전하는 거잖아.

청년은 답하지 않았고, 대신 온몸으로 답하듯이 떨었다. 마왕이 그의 뇌리에서 기억 하나를 불러일으켰다.

―움베르토가 네게도 전하지 않았어?

아우구스틴. 부어오른 왼손가락이 시트 위에 썼던 이름 하나가 둘의 의식 안에 동시에 밝혀졌다.

전쟁통에 팔다리도 하나씩 잃고 가족도 잃은 그 중세의 문사는 <고백록>에 썼다. 나는 많은 부정한 일들을 겪고 수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부정한 것이 정말로 그저 부정하기만 한다면, 어째서 그것들은 ‘있는가’?

내가 팔을 그저 잃기만 했다면, 그 고통은 왜 그렇게도 엄중하고도 화려했던가?

내가 가족을 그저 잃기만 했다면, 그 슬픔은 왜 여전히 이렇게도 숭고하고 맑은가?

부정한 것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악마는 예쁘고, 아름답고, 너무너무 예쁘지, 그치?

요른이 탁한 회색 눈으로 막시밀리안의 이마께를 내려다보았고, 가죽과 뼈밖에 없다시피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엇이든 어떻게 생겼든 아름답기만 하잖아. 그러니까 난 다 상관없어, 막시. 넌 내가 그 뭐지, 굴종만 배워서 성검이 됐다고 생각해? 난 그냥 내 맘대로 한 건데. 넌 뭔가 선악으로 나눠서 해석을 안 하면 못 견뎌?

막시밀리안의 마음이 문득 가늘게 물결쳤다. 요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삭였다.

―게다가 굴종이면 안 돼? 사람 기준으로만 생각하지 좀 말아. 나는 다 즐겨. 굴종도 학대도, 고문도 폭력도 아픔도 슬픔도 죄도. 알잖아? 난 어차피 차별 같은 거 할 줄 몰라. 존재하기만 하면, 느껴지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야.

어리석게도 너는 날 정말로 굴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구나. 생물이 청년의 안에서 남실대며 킥킥거렸다.

그건 불가능해.

너희들이 내 사지를 꿰고 부수고 오물에 적셔 공중에 걸어 놓고 손가락질하더라도 나는 그대로 자유로울 것이다. 존재하는 한, 핏자국으로든, 으깨진 뼈나 살점으로든 존재하기만 하는 한 나는 온전히 내 자신일 것이며 무한히 자유로우리라. 나는 너희처럼 차별하여서만 자유로운 자가 아니다.

―뭐든 다 좋아.

요른이 청년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전했다.

―너이기만 하면 돼. 난 너한테 맞고 혼나면서 노는 것도 재밌었고, 성검이 된 것도 정말로 행복했단 말이야, 바보 막시.

청년의 마음이 미풍처럼 흔들리며 온기를 찾아갔다. 요른은 즐거웠다. 설득되어 준 걸까?

이제 알아 주는 걸까? 내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마왕은 상대의 안에서 이리저리 뛰듯이 총총대며 기분 좋게 생각했다. 따뜻한 바다처럼 막시밀리안의 마음이 마왕의 마음을 감싸 돌았고 요른은 신이 나서 그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며 놀았다. 청년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눈물을 떨구었다.

마왕은 모를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확신했다. 아무리 늘 빛과 어둠 사이에서 날개를 펼치는 자라고 해도 자기 자신의 어둠에만은 눈이 먼다.

그러니 요른은 지금 자신이 진실로 스스로 말하는 대로만 생각하며 느끼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들었다. 그리고 마왕이 어린 시절 자신의 비틀린 소원을 어떤 식으로 엿들었을지 이해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년이 동생의 무사한 출산을 진심으로 기원하던 가장 명료한 기도의 선율을 타고 마왕의 귓가에는 마치 어두운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으리라.

언어를 익힌 자는 결코 언어로만 생각하지 못한다. 부조처럼 또렷하게 깎아 올린 문장의 배경에는 늘 물컹하고 축축한 감정과 감각의 잔여물이 어쩌면 문장 자체보다도 더 강렬하게 넘실대곤 한다. 말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한,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버려진, 부서진, 망각된, 자아의 바닥의 바닥에 억눌리고 묶여서 갇힌 것들.

다만 반반의 틈새에 사는 새만은 어린 시절 언제나 사람들 마음 양면 모두를 아무 차별 없이 읽어 내어 막시밀리안에게 전해 주었고, 지금 제 혼도 그렇게만 전해 오고 있었다.

하얀 생물은 이제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말을 잘하게 되었기에, 그 명징한 문자들의 그림자에 숨어 사는 유령의 수도 무시무시하게 불어나 있었다. 그것들은 마왕이 맑게 속닥일 때마다 울컥울컥 새어 나와 청년의 뇌 속, 막시밀리안 자신 외에는 악마라도 범접할 수 없으리만치 어둡고 깊숙한 장소에 피신했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얻었다. 미워.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너이기만 하면 되고, 네가 주는 거라면 다 좋았고 지금도 좋아. 하지만 너는 아니었잖아.

나는 너를 알아. 네가 사람을 때리고 싶어 할 리가, 아프게 하고 싶어 할 리가 없어. 그런데도 너는 나만은 그렇게나 짓밟았어. 네겐 그건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그걸 평생 감수하면서까지 넌 나를 거부했어.

―그러니까 막시, 용서를 빌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

수면에서 반짝이는 말들이 심연에서는 짓밟힌 뱀처럼 꿈틀거렸다. 성검이 되는 수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받아 주질 않잖아. 옳고 깨끗한 것이 되지 않으면, 네 이상에 맞춰 주지 않으면 넌 나를 한 톨도 가져 주지 않는걸.

알아, 막시. 너는 나를 사랑했지. 너무도 사랑해 주었어. 하지만 그래서, 바로 그래서, 너는 늘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이길 바랐어.

막시밀리안.

넌 나를 사랑했지만, 단 한 번도,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야.

나를 원해 주지는 않았어.

연약한, 미어지는 듯한 슬픔에 가까운 원망이 가시덤불처럼 피어올라 청년의 혼을 지옥으로 감아 넣었다. 보드라운 말들이 위로하는 한가운데에서. 막시밀리안은 또렷하게 뱉어 냈다.

“미안해.”

―응?

요른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청년의 안에서 통통 튀었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여서 눈물을 흘려 냈고, 맑은 시야로 생물의 어느새 청은색으로 돌아온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온 힘을 다해 전했다.

“사랑해.”

―응.

마왕이 눈이 다 감기도록 웃었다.

청년은 팔을 벌려 천천히 하얀 마물의 몸을 끌어당겼다. 생물이 곧바로 품에 답삭 안겨 왔다.

가슴에 맞닿은 생물의 가슴이 새처럼 두근거렸고, 백발이 뺨에 닿아 시야 한쪽에서 온통 눈처럼 사락거렸다. 청년이 새하얗던 검신을 쓰다듬듯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따뜻한 두 손이 마치 응답하듯 등허리에 감겨들어 검집이 얹혀 있던 옛 자리를 더듬거렸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가장 사랑받는 순간에도 미움받을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요른과 더없이 행복하리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단둘이 행복한 순간 발밑에는 둘만의 지옥이 입을 벌릴 것이며, 그 지옥에 빠져들면 다시금 거짓말처럼 꽃봉오리 속에 갇힌 듯 다정하고 풍요로울 것이다.

아름다운 생물은 웃으며 아침마다 제 반려를 악몽에서 깨워 주겠지만, 그 웃음은 밤마다 둘이 함께 꾸는, 청년은 기억하고 마왕은 잊어버릴 악몽 속에서 차가운 성검의 형상으로 변해 산산이 깨어져 나가고, 그 파편마다 다시금 희멀겋고 음울한 백발 청년의 잔영이 비쳐 나와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리라.

그렇게 막시밀리안은 평생 요른의 모든 조각을 가질 것이다.

“놀 거야?”

생물이 푹 안긴 채 기대에 차서 속삭였다가 얼른 답이 돌아오지 않자 상대의 귀를 깨물어 대기 시작했다. 몰락한 용사는 웃으며 팔을 풀었고 생물을 조심스레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요른.”

그는 자신이 십육 년 전 골목에서 시작했던 놀이의 무대에 이제야 다시 올랐고, 맡았던 역할과 대사를 이어 상대를 올려다보며 명령했다.

“영원히 나만의 것이 되도록 해.”

서약의 오른손을 내민 채였다. 생물이 휘황하게 웃으며 그 손등에 키스했고, 마치 미물에게 특권을 내리듯 받들어 답해 둘을 놀이 속에 영원히 걸어 잠갔다.

“분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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