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0/30)

3.

베스퍼가 투항한 지 약 2주 후, 시민 대부분이 길가에 나와 맞아 주는 가운데 마왕군은 마치 자국군이 개선식을 하듯이 성황국 수도에 입성했다. 

황성에서 그들은 맞아들인 건 린다 투트 크라흐트였다. 마지막 며칠, 수도에서는 피의 시가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마왕 편으로 돌아선 시민과 마지막 남은 성황군 사이에서 말이다.

그런데 린다가 성황을 설득해서 방향을 돌렸다. 자국민끼리 피를 보면 민심을 수습할 수가 없게 될 테니 차라리 지금은 성황께서는 외국으로 피난하시어 나중을 모색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면서, 그녀는 바다 건너 대륙으로 망명해 천제에게 보호를 구할 것을 권했다.

린다는 우왕좌왕하던 귀족 대부분도 마왕파로 돌아서게끔 회유했다. 마왕군의 수장들은 투항자들에게는 자비로운 편이니, 목숨도 살려 주고 자리도 내어 줄 거라면서.

그러나 마왕군의 입성 후 황국 귀족들은 그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간 점령해 왔던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필립은 수도에 자리를 잡자마자 ‘청산’부터 시작했다. 즉 민중을 원고이자 증인, 방청객으로 삼아 그간 부당 이득을 누려온 귀족에 대한 공개 재판을 진행했는데, 형은 재산 몰수부터 구금, 추방, 태형과 갖가지 방법의 사형까지 다양했다.

단, 일찍부터 내통자로 일했던 자나 점령 이전에 투항했던 자들과 그 직계 가족은 재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린다나 움베르토, 막시밀리안, 베스퍼 등은 오히려 공로자로서 포상과 직위까지 받을 예정이었다.

도시 한쪽에서는 재판과 형 집행이, 다른 한쪽에서는 축하 연회와 공연이 매일같이 이어지는 가운데 임시 정부는 다음 일정을 발표했다. 사흘 뒤 마왕께서 즉위하시고, 그 바로 다음 날 바로 주요 관료들에 대한 임명식이 이어진다. 열흘 뒤에는 수상과 하원 의원 투표가 있다.

즉위식을 이틀 남겨 놓고 필립은 린다와 제 관저에서 단둘이 만났다. 필립이 초대했다기보다는, 사실 린다가 연회 자리에서 몇 번이고 필립과 단둘이만 얘기하고 싶은 속을 내비쳐 왔기에 응해 준 것이었다.

린다는 살롱으로 향하며 복도를 둘러보았다. 필립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곧 처형마저 당할 대귀족의 별장을 제 임시 수상 관저로 삼아 놓은 터였다. 안내받은 대로 자리에 앉아 그녀는 차를 직접 따라 주는 필립의 손가락을 흘끔대다가 물었다.

“흑마법사들은 이제 기분 좀 나아졌대?”

그녀는 조심스레 이어 갔다.

“‘청산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면서 연회에도 안 나왔잖아. 성황도 살아서 도망친 데다가 르핀 멸망 때 관여했던 측근도 일부는 여전히 중용될 거라면서. 나야 네가 시킨 대로 한 거지만, 그쪽은 기분이 영 틀어진 거 같던데.”

“성황을 죽이면 목적을 이룬 거니, 그 사람들 바로 은둔하거나 집단 자살이라도 해 버릴걸.”

필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안 돼. 우린 아직 흑마법사들이 필요하니 성황도 살려 두고 미끼로 삼는 게 나아. 고마워, 린다. 잘 빼돌려 줬어. 헤르타가 천제 쪽 대륙에 잘 도착했으면 좋겠군.”

“그쪽 나라들과도 연락하고 있어?”

“응. 아무리 성황이 몇십 년간 쇄국 정책을 폈다곤 해도 르핀 왕국 시절의 상업 연락망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거든.”

팔왕국 연합 공화국의 임시 수상이 빙긋 웃어 보였다.

“이 전쟁은 여기서 안 끝나.”

“그래?”

“응. 어차피 다른 대륙에도 번져갈 거야. 이건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니라 말하자면 아래와 위 사이의 전쟁이잖아. 결국 세계 전체가 변할 거야.”

린다가 갸웃하며 미간도 찡그린 채 쳐다보자 필립이 천천히 설명했다.

“성황은 네가 다른 대륙으로 피난하라니까 아무 의심 없이 갔지? 천제가 받아서 보호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야. 같은 ‘위’니까. 서로 적이던 황제들도 손을 잡고 서로를 보호해 주려고 애쓸 테고, 한편 민중도 국경이나 대륙과 상관없이 서로 손을 잡을 테지.”

“또 그 세계 시민 공화국 얘기야?”

“그래.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는 흑마법사들이 필요해. 천제의 술법은 여기서 통하지 않고 정령 마법은 저쪽에서 통하지 않지. 하지만 마왕의 힘은 달라. 앞으로 세계 단위로 전쟁을 하게 될 거라면 그 힘을 능숙하게 쓸 줄 아는 자들이 계속 필요해.”

“난 사실은 네 그 공화국이니 하는 구상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새 정부에서 곧 마법부 장관 자리를 맡게 될 자가 점점 더 깊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백했다. 원래는 흑마법에 훨씬 이해가 깊은 움베르토가 맡게 될 예정이었으나, 그가 죽어 가는 통에 린다가 대신하게 된 터였다.

“민중이고 뭐고……. 재판할 때 그 인간들 봤어? 짐승같이 날뛰더군. 법이고 뭐고 그냥 죽여라, 족쳐라만 외치잖아. 그들 말을 들었다가는 누구든 다 옷을 벗겨 팔다리를 자르고 죽을 때까지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어. 그런 돼지들이 주인 되는 세계라는 게 말이 돼?”

“주인 의식만 주겠다는 거야. 실제로 다스리는 자는 따로 있어야지.”

필립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마왕께 부탁드리면 돼. 시민의 눈 귀나 머리를 다 서로 연결해 주고 나면 그다음에는 우리 고위 관료들은 다 읽어 낼 수 있잖아. 그자들이 평소 무슨 소리를 하고 누굴 만나 뭘 보고 사는지 말이야. 그렇게 다 꿰뚫고 다스리면 편하겠지.”

“뭐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게 아니었나?”

“차등을 아예 안 둘 수는 없지. 누군가는 관리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지 않을 거면 애초에 뭐하러 정부를 수립하고 책임자를 세우겠어.”

“너도 참 언제나 기만적이야.”

“안 그러면 규모가 큰일을 벌이긴 어렵지.”

필립이 빙긋 웃으며 린다의 새파란 눈을 응시했다.

“세상엔 온갖 인간이 다 있는데, 그 사람들을 다 똑같이 정직하고 공평하게 대하라고? 난 그냥 한 사람이야, 린다. 알잖아. 마음을 열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뿐이야. 너도 개중 하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래.”

“마왕이야 평등밖에 모르시는 분이지.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 차별을 하는 방식의 문제지, 사람은 차별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어. 마왕께서도 이제는 이해해 주실 테니까 잘 부탁드리면 돼.”

크라흐트 가의 차녀는 평민 청년의 곱상한 얼굴과 무척이나 온유한 녹색 눈동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거기에 늘 감춰져 있던 고요한 야심은 이제 린다도 익히 아는 오만과 긍지가 영롱하게 뒤섞인 색을 띠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피로 타고나느냐,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숫자를 계산하며 머릿속에 기르느냐의 문제일 뿐, 귀족이든 저 대사업가들이든 결국 제 몸속에 어떤 종류의 오만을 품지 않고는 자라나 어른이 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자신은 종은 다르지만 결국 더 뛰어나고 강력한 동류 맹수에게 반하듯 그에게 반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린다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는, 운을 떼어 오래 미뤄왔던 질문 하나를 했다.

“그 마왕이라는 게 누구야?”

“응?”

“너희 시민군은 다 아는 거 같은데 우리한테는 정체가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잖아. 즉위식 날에 강림을 하신다는 거야? 아니면 너희가 이미 모셔두고 있는데, 그날 정식으로 옥좌에 오르신다는 거야.”

“그건…… 즉위식 날 네 눈으로 확인해 봐.”

필립이 반쯤 장난스럽게 건네 왔다.

“우리가 모시고는 있지만 아직은 힘을 많이 감추고 계셔. 즉위식을 올리고, 모두에게 왕으로 인정받으신 후에야 대륙 전체에 권능을 행사하시게 될 거야.”

“모두에게?”

“모두에게.”

다소 애매한 표현에 린다가 되물었지만, 임시 수상은 가볍게 끄덕이며 웃을 뿐이었다.

같은 시각 막시밀리안은 제 거처를 벗어나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립은 그더러 도로 프란첸 별성으로 돌아가서 살라고 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움베르토가 월세로 살던 시내 사택을 청소해서 쓰고 싶다고 했다. 움베르토 본인이야 어차피 이제는 베스퍼의 성에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사택에서부터 옛 황국 마도 협회 건물 앞을 지나는 데에는 말을 달려 오 분, 황궁 광장까지는 말을 달려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꽤 효율적인 위치에 있는 집이라고 새삼 생각하며 막시밀리안은 문지기로 서 있는 시민병에게 얼굴을 보이고 대문을 통과했다.

‘수상 본인이 직접 하면 될걸.’

다소 어스름한 가운데 주궁으로 향하면서 막시밀리안은 되뇌었다. 역시 크게 내키지는 않는다.

마왕의 즉위식 연습이든 임명식 연습이든, 사실은 필립이나 다른 관료 후보가 맡으면 될 일이다. 요른은 이제 마음을 푹 놓고 필립을 믿고 따르는 데다가 그의 정체를 아는 다른 사람들과도 무리 없이 지낸다고 들었다.

‘지금의 요른이라면 누구와도 잘 지내겠지.’

막시밀리안 자신만 빼면. 그는 속으로 한숨처럼 덧붙였다.

그런데 필립은 하필 그 막시밀리안에게 부탁해 왔다. 요른에게 일대일로 임명식 연습을 시켜달라고.

즉위식이나 임명식은 결국 구 성황국의 체계를 거의 그대로 따를 테니까, 프란첸가가 잘 아는 대로 연습시켜 주면 좋겠단다. 요른은 힘을 쓰는 데에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복잡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는 서투른 데다가 이런 대규모 행사는 이번이 완전히 처음이니까.

“너도 어차피 국방장관으로 임명될 거잖아. 네 스스로도 연습하는 걸로 치고 같이 해 드려.”

나흘 전 연회에서 필립은 상대를 살짝 휴게실로 데려가서 말했고 막시밀리안은 의뭉스럽게 맞받았다.

“어차피 협회원들끼리 단체 리허설은 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임명 건 말인데,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 둘이 서먹한 것도 좀 풀고.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왕님과 서로 내외하는 생물이 되면 좀 그렇잖아?”

갈색 머리의 청년은 웃으며 잘라 들었지만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반은 모르는 척, 반은 진심으로 알 수 없어서 되물었다.

“무슨 의미야?”

“너만 마왕님 힘 안 빌리잖아. 마왕님도 네 눈 귀에만은 손 안 대는 거 알아? 너 이대로라면 신민이라기도 힘들어.”

“그건 몰랐어.”

전향자는 털어놓으면서도 단번에 알아챘다. 이 임시 수상은 이미 마왕께 그를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고, 마왕이 거절했던 것이리라고. 필립이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 기회에 둘이 얘기 좀 해 봐. 수상의 명령으로 생각해 줘도 좋고.”

막시밀리안은 끄덕거렸고, 임명식 이틀 전에 찾아뵙고 보충 연습을 시켜드리겠노라고 요른의 보좌관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역시 요른이 직접 쓴 건 아닌, 보좌관의 서체로 된 답장을 받아들고 오늘 저녁 황궁에 도착한 것이다.

병사는 막시밀리안을 정원 입구까지만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막시밀리안은 말에서 내려 일단 접객실 쪽으로 들어갔다가 곧 안내를 받아 소형 살롱으로 향했다.

“막시.”

하얀 생물이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자 막시밀리안도 예를 표해 보였다.

마왕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더니 도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차마 그 모양을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지막으로 필립의 사택 복도에서 마주쳤던 때와 똑같다. 이 청아하고 맑기만 한 자는 여전히 제 옛 후원자만 마주치면 흐려져 버린다.

“요른.”

막시밀리안은 저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바닥만 내려다보며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자에게 말했다.

“나 장관직 안 받을 거야. 대신 여행을 좀 다닐 생각이야.”

요른은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고,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몇 분은 흐른 후에야 그는 조그맣게 흘려 냈다.

“왜…….”

“이제야 널 돌보는 일에서 해방됐잖아.”

그는 간단하게 잘라냈다.

“알지, 내가 전부터 피곤해했던 거. 그래서 필립에게 대리를 맡기고 한동안 지켜본 거야. 이제 둘이 잘 지내는 거 같으니까 난 물러나서 쉬려고. 필립 말 잘 들을 거지?”

“……안…….”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더 말이 나오지는 않았고, 울음으로 잦아들기 전에 하얀 생물은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막시밀리안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내 국방장관 임명 건 취소시켜 줘. 오늘은 이 부탁 하러 왔어.”

“…….”

“요른?”

“……응.”

“그래. 착하다. 네 즉위식이랑 임명식 끝날 때까지는 지켜볼 테니까, 잘해.”

“그렇, 지만 오늘은.”

요른이 쥐어짜듯이 토해 냈다.

“오, 오늘은 나 임명식 연습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어?”

막시밀리안은 방을 나가려고 막 등을 돌렸다가 다시 고개를 틀었다. 어딘지 울분이 가득 찬 듯한 얼굴이 시선 끝에 있었다.

결국 이렇다. 그는 생각했다. 이 마왕은 막시밀리안만 만나면 마치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그렇게 성스럽기만 한 채로 사람들 사이에 임하는 걸 보았는데도, 그 권능으로 만물 사이를 흐르는 걸 분명 알고 있는데도.

놓아 주어야 한다. 신민조차 될 수 없는 한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대를 완전히 떠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막시밀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대륙 밖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필요하다면 어느 섬으로라도 가서 혼자 살 생각이었다. 선박을 다루는 기술도 아예 못 배운 건 아니니, 어떻게든 되리라.

그러나 이 마왕은 막시밀리안만 만나면 여전히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단 한 사람처럼.

전직 성기사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왕이 몸을 일으켰다. 바라보는 자의 혼 속에서 모든 감각을 씻어 낼 정도로 새하얀 백발이 찰랑거렸고, 청량한 푸른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두 걸음 앞까지 다가와 상대의 눈 속에 얼음물 같은 시선을 흘렸다.

숨이 막혀서 막시밀리안은 잠시 가볍게 이를 물었다. 요른이 꼿꼿이 선 채로 물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공식적으로는, 그 목적으로 온 거 아냐? 그, 러면.”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말투로도 우겨댔다.

“지금은, 거기 이, 있어 줘야 하는 거잖아.”

“나는…….”

막시밀리안은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요른 쪽에서 움츠러들면서 뒤로 물러섰다.

“미…….”

입술을 달싹이다가 요른은 눈물만 눈에 가득 고인 채 침묵했다.

막시밀리안은 손을 내리고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상대가 사과하려 든다는 데에 놀랐으며 자신도 울컥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수십 번도 더 사과했으며, 그런다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막시밀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아주 짧게 한번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동시에 눈을 뜨고 상대에게 다시금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랄 만큼 우아한 동작에 얼굴에 품은 미소도 정묘했다. 요른이 눈을 깜박여 눈물을 흘려 내면서도 상대의 손과 낯을 번갈아 살폈다. 손마디 하나하나까지 나긋하게 풀어서 내민 채로 막시밀리안이 전해 왔다.

“이건 놀이야.”

“응?”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야.”

전직 성기사는 한 음절 한 음절 조형하듯이 그려 냈다. 마치 둘러싸고 있는 관객들에게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전하려는 듯이.

“축하 연회 때 연극도 있었지? 전쟁 때 사건들을 재현하는 거랑, 그리고 또, 페랑에는 소설도 많잖아.”

“응.”

“이것도 그런 거야.”

그는 가면처럼 아름답게 웃었다.

“임명식 연극을 하는 무대에 오른다고 생각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야. 그 배역을 맡는 거야. 알겠어?”

요른이 여전히 망설이며 제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막시밀리안이 조심스레 그 앞으로 몇 발짝 더 다가갔다.

“나는 네 신하야, 요른. 너는 내 왕이고. 그렇게 나눠서 연습하자.”

하얀 생물은 한참을 더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비로소 끄덕거렸다. 둘은 잠시 배역의 특징에 대해, 진행 순서와 소품에 대해 상의했다.

연극이 시작되자 극 속의 왕은 검과 왕홀을 들어 제 신하를 축복한 후 관직의 증거를 내렸고, 극 속의 청년은 제 왕과 그의 세계에 충성을 맹세한 후 왕의 손등에 키스했다.

이 임명식은 연극이었기에, 그들은 현실에서보다도 훨씬 더 또렷하고 정밀한 어조로 둘은 서로에게 말을 전했고 섬세한 몸짓으로 허공을 파고들었다. 관객이 설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신하가 제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왕이 신하를 한없이 아낀다고 느끼게끔.

무대 위, 흑발의 청년과 백발의 왕 사이에 아무런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계에서의 일이었다.

* * *

신왕의 즉위일을 하루 앞두고 움베르토가 죽었다.

술사들의 예상보다도 더 이른 죽음이었다. 황국 수도에 돌아온 후 베스퍼는 다시 제 본성에 머물고 있었기에, 움베르토의 유해도 성 내의 가족묘지 한편에 안장하기로 했고, 자신이 죽으면 그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도 미리 남겼다.

움베르토가 한 달 남짓밖에 못 버티고 숨이 끊긴 지라 베스퍼의 휴가 기간은 꽤 남아 있었다. 그는 전쟁 동안 황폐해진 성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겠다고 서면으로 보고를 올렸지만, 전령은 옛 총사령관의 모습을 보고는 아마 그가 기력이 없어서 아직 움직여 다닐 수가 없는 것이리라고 짐작했다.

즉위식 날 아침 일찍 성의 고용인 몇이 왕의 침소로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옷을 갈아입혀 드리기 시작했다. 요른은 창 너머로 열린, 나무 우듬지로 가려진 새파란 풍경을 바라보며 돌이켰다. 움베르토가 누워 있는 동안 요른은 몇 번이나 그의 청을 듣고 또 베스퍼의 동의를 받아 둘의 머리를 연결해 주었다.

움베르토는 끝까지 말을 하거나 긴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정신만은 제법 또렷했다. 그리고 임종 직전에 이르러 그는 요른에게 자기 마음을 베스퍼에게 다 열어 보여 달라고 청했다. 말로 된 부분만 전하는 게 아니라, 전부를 다. 요른은 망설였지만 제 은사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비는 걸 거절 할 수 없어 결국 열어 주었다.

움베르토는 끝까지 베스퍼가 원했을 말은 해 주지 않았고 베스퍼는 자신이 원하는 말이 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비추어 낸 그림자들인지 말들을 비추어 낸 빛인지 모를 것들이 끊임없이 바닥과 벽에 일렁거렸고 그들은 그 환영과 같은 침묵을 들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움베르토는 뼈에도 병이 번져 조금씩 뭉그러져 가고 있었고, 혈관의 상태도 나빠져서 피부를 조금만 건드려도 멍이 들었다. 그러니 몸의 어디를 건드려도 지독하게 아프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도 베스퍼는 그 손을 잡았다.

그는 병자의 부어오른 손을 마디마다 깍지를 껴 틀어잡고 팔과 어깨를, 뺨과 눈썹을 쓰다듬었으며 입술에 키스했다. 움베르토도 최선을 다해 마주 응했다. 요른은 마치 터널이 제 안을 흘렀던 물의 온도와 성분을 기억하듯, 둘의 마음을 서로에게 전하며 그 모든 감각을 자신 안에 새겼다.

고용인들이 물러나자 요른은 호위병들 둘을 거느리고 복도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전신을 고운 백의로 감싸고, 허리에만 푸른 빛이 감도는 띠를 찬 채로 요른은 황궁의 기념관, 알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홀 같은 공간에 들어섰고, 차관급 이상의 관료 후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관이 놓인 탁자 앞으로 걸었다.

왕이 다가오자 수상과 장관 후보들이 무릎을 꿇고 왕관을 모두 함께 손으로 들어 높이 바치며 받아 주실 것을 청했다. 마왕은 청을 받아들여 한쪽 손을 그들에게 뻗은 채 원래 성황이 쓰던 딱딱한 관을 버드나무 가지처럼 풀어냈다.

금과 은, 여러 보석을 섞은 영롱한 실처럼 변한 관이 저절로 새 왕의 팔을 타고 기어올라 백발을 감싸 돌며 곧 관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머리 장식 모양으로 변했다. 장식은 어린 사슴의 뿔, 흰 공작새의 펼쳐진 꽁지깃이나 산제비나비의 무늬, 밀잠자리 날개의 섬세한 시맥마저도 떠올리게 하는 형상으로 움트며 끊임없이 반짝거렸다.

필립 등을 따라 수십 명의 다른 관료 후보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고, 요른은 왕홀과 구슬, 옥새와 검을 차례로 집어 들고 입 맞추어 축복한 후, 왕홀만 손에 든 채 나머지는 다시 쿠션 위에 내려놓고서 광장을 향해 열린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막시밀리안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장관직을 거절해 버린 다음 저주 때문에 몸이 아프다면서 집에 틀어박혔다. 모습으로 보아 처음 투항했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나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즉위식에는 임시 후보가 대신 나와서 관을 올려야 했다. 협회는 그래도 프란첸에게 직책을 내리는 걸 포기하지 않았으며, 참모장이나 정 뭐하면 예전에 맡았던 여단장 자리라도 다시 맡는 게 어떻겠냐고 회유할 예정이었다.

어쨌거나 다 식이 끝난 다음에나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른은 발코니의 난간 바로 앞에 서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몰려든 수도 시민을 눈으로 직접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의식을 개방했다.

그가 의식을 열자 대륙민 모두가 한 찰나에 그의 모습과 향을 전달받았으며 음성과 사고를 머릿속에서부터 들었다.

그들은 신음하듯이 입을 벌리고 머리를 싸쥔 채 제각각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치 저항할 수 없이 황홀한 계시에 답하듯 동의했다. 그를 영원히 자신의 왕으로 모시겠으며, 언제든 그가 자신의 눈과 귀에, 마음에 침입해 오실 때면 거절하지 않겠노라고.

언제든 저희에게 임해 주십시오. 그들은 빌었다.

저희 안팎과 사이로 임하시어 우리 갈라진 자들을 하나로 인도해 주십시오.

모두가 청한 순간 백색의 왕도 응하듯 자신의 힘을 풀어놓았다. 대륙민은 호수처럼 맑고도 깊은 권능이 저희들 사이로 찰랑이며 순식간에 하늘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으며, 이게 전쟁 때 고관들이 ‘날씨’라고 부르던 혼란한 안개 같은 것이 정제되고 또 정제되어 남은 정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그 깨끗한 물은 금방 그들의 심장과 뇌 속까지 가득 들어찼다.

즉위식이 끝났다. 저녁까지 연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요른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몰랐던 관료 후보들, 혹은 아예 얼굴조차 서로 본 적이 없던 자들과는 하나하나 새로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개중에는 린다 투트 크라흐트도 있었다.

그 금발의 장관 후보는 즉위식 내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요른이 눈을 들여다보며 수정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아예 쓰러져 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왕은 그녀의 머릿속에 스며들어 가시처럼 털이 일어선 동물을 쓰다듬듯이 가만가만 달래주었다.

왕이 지나간 후 린다는 따뜻한 물에 푹 젖은 듯 노곤하게 평온해져 버린 마음으로 비틀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차라리 끔찍하게 불행하고 싶었고 공포에 질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연회가 끝나고 후보들이 각자 관저나 사택으로 돌아간 후 요른도 제 침실로 옮겨 갔다. 왕홀을 내려놓고, 관을 벗고 고용인들이 갈아입혀 주는 대로 평복으로 갈아입은 후 왕은 침대에 앉아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제 사택 책상 앞에 앉아 책이나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일 임명식까지 끝나면 바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준비는 다 해 둔 지라 여유가 있었다.

그는 오늘 오후에는 요른을 보러 황국 앞 광장으로 직접 나갔었다. 요른이 막시밀리안 자신에게만은 권능을 행사하지 않아, 머릿속으로 아무것도 전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 왕은 흑발의 전직 여단장만은 신민으로 삼아 주지 않았으며, 찰랑이며 차오르던 권능도 그의 주변만은 마치 마른 언덕처럼 비켜 갔다.

후드를 덮어쓴 채 막시밀리안은 발코니에 오른 생물의 모습을 그저 맨눈으로만 확인하고는 웃었고, 주변 시민이 모두 순식간에 홀린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태세를 취하는 걸 보고 새 왕이 즉위했다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발코니에서 본 게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다.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면서도 그는 계속 생각했다.

평생 마지막으로 본 요른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는 반복해서 중얼거리듯이 생각했으며 훌륭한 모습이었으니 괜찮지 않냐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랬기에 그는 하얀 생물이 갑자기 제 등 뒤에 나타나서 이름을 불러왔을 때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놀라 버렸다.

“요른?”

막시밀리안은 습관대로 책상 바로 앞 벽에 걸어 두었던 단검까지 빼 들고 자세를 취한 채로 물었다.

“막시.”

요른이 총총 다가왔다. 막시밀리안은 단검을 도로 벽의 검집에 넣고는 채근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 그…….”

하얀 생물은 두 걸음 앞에 멈춰 제 손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애써 토해 냈다. 그 눈동자에 기묘한 푸른빛이 달빛 조각처럼 스며 있는 게 전직 성기사의 눈에 들어왔다.

“연습시켜 줘.”

“무슨 연습.”

“임명식 연습.”

“어제 다 했잖아.”

“하지만 바로 내일이잖아. 한 번 더 시켜 줘.”

“요른, 돌아가. 네가 이렇게 허락도 없이 들른 것만 해도 나 지금 기분이 많이 나빠.”

말하고 막시밀리안은 바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생물은 마지막 힘을 짜내듯 손을 내밀어 왔다. 결국 청년도 오늘 갓 즉위한 신왕의 얼굴께에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건 왕이 아니었다. 오늘 발코니에 섰던 성스러운 존재도, 얻어맞고 짓밟히며 자란 반쪽짜리 마물도 아니었으며,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천진한 생물조차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을 듯이, 연기자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침묵처럼 그것은 몸은 있되 형상은 없는 채로 서 있었다. 손만은 도저히 착각할 수 없이 선명하게 뻗은 채로.

보드라운 넝쿨 같은 손가락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말했지. 이렇게 멋대로 들른 것만 해도 넌 이미…….”

“알아.”

요른이 답했다.

“나쁜 짓 한 거야. 맞아. 나 나쁜 짓 많이 했어. 어릴 때부터도 네게 이미 잔뜩 해 버렸고. 미…….”

그러나 생물은 사과 대신 이를 꽉 악물었다가 토해 냈다.

“그러니까 연습시켜 줘, 막시밀리안.”

“돌아가.”

“그럼 나 내일 실수해 버릴 거야.”

“어제 잘했잖아. 내일도 잘할 수 있어. 돌아가.”

“너, 내가 얼마나 실수 잘하는지 아직 모르지. 모의전 때 난 내 팔 한쪽도 실수로 날려 버리려고 했는걸. 임명식은 얼마나 망칠 수 있을까?”

전직 성기사는 놀라서 하얀 생물을 쳐다보았다. 오늘 제 신민 앞에서 그토록 신성하기만 하던 생물의 눈이 젖어 붉어진 걸 보고 그는 심장이 찢어지듯이 아팠지만, 한편 그 상처에서 따스한 물이 흘러나온 듯 뭉클해졌다. 요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도 한 발 가까이 다가와 더 깊이 손을 뻗었다.

“막시.”

흑발 청년은 눈을 내리감았다. 아직은 괜찮다. 그는 생각했다.

무대가 연습을 위한 공간인 한은.

그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은 다 교육용 도서였다. 쓸데없이 유려한 문장으로 유혹해서는, 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환상을 머릿속에 온통 부추기긴 했지만, 결국 다 실용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랬기에 막시밀리안은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것의 존재 가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책 속에서 한 인물이 노인의 짐을 들어 주어서 칭찬을 받는 장면을 읽고 나면 책을 덮고 나서 독자 자신도 그러고 싶을 만하다. 훌륭한 기사단이 ‘용’이라는 이상한 괴물을 물리치는 이야기를 읽는다면, 책을 읽은 생도 자신도 현실 속에서 검을 더욱 단련하여 용감하게 마물을 물리치려 들 법하다.

그러니까 괜찮다. 아무리 유혹적인 환상이라도 결국 도덕의 도구로 이용되는 한, 임명식 놀이가 진짜 엄숙한 임명식의 연습에 머무르는 한은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시밀리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뭔가 함정에 걸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집중해서 생각할 수가 없어졌다. 상대가 주저하고만 있자 요른이 당황한 탓인지 오히려 아무 말이나 마구 쏘아 대기 시작한 탓이었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엉망이 될 거다, 그러면 너는 결국 떠날 수도 없으리라면서 점점 더 알아듣기도 힘들게 더듬대는 통에 흑발 청년은 일단 어지러운 마음을 접어 두고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그럼 한 번만 더 연습하자. 하지만 여기는 소품도 없…….”

“이거랑, 저거랑, 저거.”

요른이 얼른 손가락질했다.

둘은 난로의 부지깽이를 왕홀 대신으로, 먼지떨이는 왕의 검으로 쓰기로 했다. 요른이 두 물건을 양손에 받아들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 표정이 막시밀리안의 머릿속에서 그가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미소와 겹치면서, 그는 순간 요른이 그것들을 실제로 왕홀과 검으로 변신시키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른은 엄숙하게 부지깽이를 치켜들고 막시밀리안더러 얼른 무릎을 꿇으라고 명했다. 막시밀리안은 장면 진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왜 앞의 절차는 다 건너뛰고 바로 그 서약 부분부터 가는 거냐고.

하지만 요른도 완강했다. 그 부분이 자기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란다. 청년은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고 마왕은 먼지떨이 솔로 상대의 흑발을 마구 헤집었다.

신하 배역을 맡은 자가 어이가 없어서 올려다보았지만, 마왕이 하도 투명한 빛 가루 같은 광채를 사방에 뿌려가며 웃고 있어서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히, 하, 장관 후보님, 머리 꼴이…….”

생물은 막시밀리안이 밤에 가끔 머릿속에서 몰래 꺼내 보곤 하던, 어린 시절에서 잘라 온 어느 추억의 조각보다도 더 선명하게 웃어 대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추스르고는 청년의 정수리를 부지깽이로 톡톡 두드렸다.

“다시, 다시 해. 어, 일어나지 마.”

요른이 턱을 살짝 치든 채로 을러댔다.

“그대로 꿇고 있어. 내 신하 주제에.”

“……요른…….”

“신하 맞잖아. 아니야? 제대로 해.”

“너도 제대로 해야지, 요른.”

“난 왕 역할이니까 멋대로 해도 돼.”

“아니거든. 왕이면 더욱 왕답게 품위 있게 굴어야지. 이러면 연습의 의미가 없잖아. 너 내일 관료들 앞에서도 이럴 거야?”

“그래? 그럼 빨리 품위 있어 보이게 연습시켜 줘.”

“…….”

“왕명이야. 들어.”

막시밀리안은 한숨을 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요른에게 절차를 진행할 때의 자세나 태도, 어조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느라 몸 곁에 바짝 달라붙어서 낮게 속삭여 댔고, 손목과 팔목을 잡아 올리고, 등을 밀어 자세를 잡아 주고 턱도 가볍게 올리거나 내려 고개의 각도를 정해 주었다.

어젯밤에는 말로만 해도 잘 따라 줬으면서 오늘 요른은 하나하나 만져서 모양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도무지 협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마왕은 막시가 정해 주는 대로 따라 하긴 하면서도 내내 킥킥 웃어 댔고, 대강 가르침이 끝나고 나자 다시금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졸라댔다.

“알았어. 이제 그대로 할 테니까 얼른 하자. 그거, 서약하는 거.”

막시밀리안은 얌전히 다시 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은 부지깽이를 왼손에 세로로 길게 든 채 오른손의 먼지떨이로 막시밀리안의 양어깨를 한 번씩 건드리며 축복의 말을 내렸고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깊이 숙여 받아들였다. 그리고 왕이 먼지떨이를 옆의 신하가 들고 있는 쿠션, 그러니까 작은 의자 위에 올려놓고 나자 그대로 왕의 빈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의식의 규칙대로 청년은 꽤 오랫동안 왕의 손등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정신이 혼곤해질 정도로 오래. 가까스로 고개를 들자 요른이 눈을 깜박이며 굽어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빨려들 것 같아서 막시밀리안은 바닥에 무릎을 꽉 붙이고 앉았고, 새삼 다시 한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니잖아. 여기서부터는 성황의 의식과 달라. 네가 눈은 감은 채로 내 머릿속에 직접 들어와서 응답해 줘야…….”

말하다가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요른도 손을 거두었다. 극이 끝났다, 막시밀리안은 신호를 알아듣고 일어서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왕은 말없이 벽 쪽으로 물러나 한참이나 손만 모아쥐고 있다가, 핏속에 남은 용기를 다 쥐어짜 내듯이 상대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잔영이 채 옅어지기도 전에 전송 마법으로 사라져 버렸다.

왕이 떠난 다음 막시밀리안은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다가 다짐했다. 역시 빨리 떠나야 해.

그러나 바로 그렇게 다짐한 순간 뇌리에서 웃음소리가 반짝거렸다. 꿈같은,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청량한 웃음소리, 장밋빛 뺨과 겨울 하늘을 그대로 얼려 놓은 듯한 눈동자, 보드랍게 윤기가 돌던 손등. 청년은 무심코 제 입술에 손을 대려다가 타인이 남긴 감각을 오염시켜 버릴까 봐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순간 그리운 속삭임이 그의 심장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놀자.

어린 마왕이 속닥이며 품을 파고들었다.

―나랑 놀자. 평생 나랑만 놀아.

막시밀리안은 혼란스러워졌다.

흐릿하게만 허공에 머무르던 무언가가 사방에서 또렷해지면서 갑자기 초점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등에 차가운 물이 흐르듯 소름이 지나갔다.

‘아니야.’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되뇌었다.

‘그럴 리가.’

마왕은 무한하고 거대한 존재다. 그렇기에 마왕이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책상 쪽으로 다가갔고, 책상 위 책꽂이 한편에 쌓아 두었던 소설책들을 모서리를 탁탁 맞추어 수납장 맨 밑 서랍에 집어넣고 잠가 버렸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수십 번도 더 다짐했다. 내일 임명식만 끝나면 밤에 바로 떠나리라.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하루 더 자택에 머물렀다.

그로쉔으로 도주했을 때 그는 애용하던 흑마를 병영 마구간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갔다. 마왕군과 함께 입성한 후 되찾기는 했지만, 긴 여행을 떠나려다 보니 문득 말이 이제 아주 전성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훌륭한 군마이긴 하지만 여행용으로 주로 쓰는 승용마와는 종이 다른 것이다.

이 생각이 왜 하필 여행을 떠나려던 당일 밤에야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무튼 막시밀리안은 말을 구하기 위해 수도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기로 했다. 마시장이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 창밖으로 거리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여행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고 있으려니 등 뒤가 밝아졌다.

“막시.”

막시밀리안은 곧바로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상대가 주춤대며 다시 운을 떼지 않는 바람에 그는 결국 몸을 돌리고 먼저 입을 열어 타일렀다.

“이렇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 연습…….”

“오늘 임명식도 끝나지 않았어?”

“응, 하지만 막시, 나……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생물이 우물쭈물 뱉는 걸 들으며 막시밀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통치권은 없잖아. 군림만 하는 거지.”

“그래도 많은걸.”

요른이 문득 고개를 확 들더니 허공에 빛으로 깎은 문자를 수놓듯 또박또박 말했다.

“필립이 그러는데, 모레 오찬회가 있대. 오늘 나한테 직접 임명받지 못한 지방 관료들을 초대해서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뭔가가 투표로 결정됐는데, 나보고 몇몇 건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해 달래. 왕은 결정권은 없지만 거부권은 행사할 수 있다나? 사흘 후에도 중요한 행사가 있어. 전쟁 때 공을 세웠던 사람들한테 공식적으로 훈장을 수여하고, 사냥회를 치르고 만찬을 해야 한대. 그러니까…….”

막시밀리안은 하얀 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품었다. 말은 정말 잘하게 되었군. 마왕은 시선은 눈치챘지만 그 의미는 몰라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어 갔다.

“연습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도와줘, 막시밀리안.”

“다른 사람이랑 해. 네가 부탁하면 누구든 들어줄 거야.”

“다들 바쁜걸. 넌 장관직 거절한 후로는 여유가 좀 있을 거 같아서.”

요른이 미리 정해 둔 듯 답했다.

“내가 훌륭한 왕이 되어야 너도 안심하고 떠나잖아. 도와줘. 다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이대로는 무리야.”

막시밀리안은 혀를 쯧 차면서도 알았다고 했고, 뭘 연습하고 싶냐고 물었다. 요른이 바로 답했다.

“훈장 수여식.”

“당장 내일이 오찬회라면서. 사교 절차가 꽤 복잡할 텐데, 그거부터 해야 하지 않아?”

요른은 괜히 방구석을 쳐다보며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전직 성기사는 다시금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난 내일 떠날 거니까 지금 당장 하자.”

“오늘 안 가?”

“사정이 생겼어.”

막시밀리안이 재빨리 답하자 요른도 활짝 웃었다.

그날 밤 둘은 훈장 수여식 연습을 했다. 막시밀리안은 흑마법사나 행정관, 시민병 역할을 하느라 수십 번도 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왕도 수십 개도 더 되는 훈장을 어디선가 주렁주렁 꺼내와서는 상대에게 상자째로 수여하거나, 꺼내서 가슴에 달아 주거나 가끔은 메달식으로 목에도 걸어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처음 몇 번은 별생각 없이 받아들었지만, 언뜻 공화국 훈장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져서 고개를 내려 붉은 끈이 달린 메달을 보았고 입술이 납빛으로 파리해졌다. 하얀 새 모양의 마물을 물리치는 기사를 본뜬 부조.

통일 공화국에서 제작한 신규 훈장이 아니다. 성황국 시절 막시밀리안이 주었던 걸 요른이 계속 어딘가에 빠짐없이 보관해 왔다가, 지금 소품으로 쓰려고 전송 마법으로 제 몸과 함께 옮겨 온 것이다.

전직 성황국 여단장이 무릎을 꿇은 채 점점 몸이 차가워져 가는 가운데 신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진실을 가리기 힘든 시기에도.

변함없이 믿음을 지키며 자신의 왕을 기다려 준 자를, 그 용기와 신실함을 이와 같이 기념하는 바입니다.

그건 수여식에서 신왕이 말해야 할 정식 대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신왕의 배역을 맡은 하얀 생물은 일종의 즉흥 연기를 하듯 읊조렸고 상대의 목에 걸어 주기 직전에 메달을 제 손안에서 한번 쓰다듬었다. 먼지떨이를 왕홀로 변신시키듯, 어릴 때 도마뱀을 한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 나비로 변화시켰듯, 부조를 전혀 다른 부조로 그려 내는 듯한 몸짓으로.

요른은 새벽녘에야 돌아갔다. 막시밀리안은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지만, 뒤척거리다가 일어나서 남빛이 감돌기 시작한 동녘을 바라보았고, 정령 마법 주문을 외워 탁상 램프를 켜고는 수납장 맨 아래 칸을 열어 소설 한 권을 꺼냈다.

‘정령 마법은 천천히 사라질 거라고 했지.’

막시밀리안은 램프의 밝기를 조정하며 필립과 소피아가 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왕의 권능이 퍼진 가운데 대륙에서 타블로의 질서는 쇠락해 갈 것이다. 끊임없이 이종의 동식물이 탄생하며 국경은 재편되고, 지층은 때때로 융기하고, 기후는 한파와 가뭄을 반복하며 요동칠 테니까. 다섯 정령 역시 마구 뒤섞여 종국에는 얼마든지 새로 모양을 잡을 수 있는 반죽 같은 게 되어 버리리라.

필립은 마왕의 힘을 잘 이용하면 앞으로는 기존의 마소보다 생산력이 훨씬 더 높은 신종 가축을 합성해낼 수 있고, 새로운 원자재나 보석 등도 얼마든지 인공적으로 섞어 낼 수 있으리라고 했다. 세계는 그저 머리와 머리로 하나가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물적으로도 훨씬 더 부유해지리라. 서로의 것을 욕심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러니 통일된 세계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다시 전쟁도, 갈등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곱씹으며 막시밀리안은 책장을 폈다. 그러나 첫 장부터 그는 고개를 살짝 꺾었는데, 짧은 글줄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덧 줄 읽어 내리고 나서야 그는 이게 소설이 아니라 말로만 듣던 시라는 걸 깨달았다.

책을 읽느라 막시밀리안은 동틀 무렵에야 책상에 엎드린 채 눈을 감은 채 잠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깨어나자 정오였다. 이렇게 멋대로 잠들어서 게으른 시간에 일어나는 건 그의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기사로는 못 써먹을 인간이 되어 버렸군.’

뇌까리며 그는 얼굴만 대충 닦은 후 평복 위에 얼른 재킷만 걸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시민군 병사 하나가 문 앞에 서서 인사부터 건네 왔다.

“안녕하신지요, 프란첸 경. 수상께서 서신에 답을 받고 싶다고 하셔서요. 오늘 저녁에 바로 관저에 들러 주실 수 있으신지…….”

“여단장 임명 건은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막시밀리안이 잘라냈다. 장관을 하기 싫으면 여단장 자리라도 다시 맡으라는, 거의 협박하는 듯한 내용의 서신이 그저께 도착했지만 무시했던 터였다.

“수상께 그렇게 다시 말씀드려 주십시오.”

“예, 수상께서도 프란첸 경이 그렇게 말씀하실 걸 예상하시고는, 직접 만나서 협상해 보고 싶으니 부디 관저에 저녁 일곱 시쯤 들러 달라 하셨습니다. 마왕님과 관련해서도 상담할 게 있다고 하셨고요.”

“왜 제게 자꾸 경칭을 쓰십니까. 적절치 못하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요.”

“그냥 놀리는 건데요.”

병사가 말하더니 제풀에 웃어 버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얼굴이 ‘경’처럼 생기셨는걸요. 저주에 아주 된통 걸리셨을 때조차 그러셨는데, 이제 좀 나아지시니까 진짜 신수가 훤하셔서 말이죠.”

“…….”

“아니, 솔직히 매번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하시니까 재밌기도 하…….”

시민병은 말을 다 못 잇고 주먹으로 입을 막아 웃음을 참았고, 막시밀리안은 한숨을 삼켰다. 페랑 출신들은 이래서 대하기가 어렵다.

‘병사는 그렇다 치고 어째 요즘은 협회원들마저 다 경이라고 부르더니, 놀리는 거였군.’

“일곱 시에 들르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말하자 전령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돌아갔다. 속 편한 자다,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왜 마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렇게 굳이 전령을 오가게 하느냐고 물을 만도 한데, 아무 궁금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사라졌다.

하지만 저녁에 수상 관저 살롱에 들르자 필립은 당장 지적했다. 전령이 의아해하는 걸 달래느라 힘들었다는 것이다.

“제발 마왕님 힘 좀 써라. 매번 편지 쓰고, 전령 보내고 이게 무슨 짓이야.”

“어차피 공문을 보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일들도 많지 않나?”

“오늘 이건 꼭 그럴 필요 없었잖아. 딴 사람은 머릿속으로 부르면 되는데 너한테 연락할 때만 편지 쓰려니 바보 같아. 그리고 제발 아무 직책이나 좀 받아들여. 여단장은 그냥 전에 하던 거 계속하라는 건데, 그것도 싫어? 다 거절하면 앞으로 뭐 하고 살게.”

“글쎄. 꼭 관직을 맡을 필요는 없잖아. 용병 길드에 들어가거나 개인 의뢰를 받을 수도 있지.”

“용병 길드들에는 해체 명령을 내린 지 오래야. 그런 게 신세계에 왜 필요해.”

필립이 다소 무겁게 되물었지만 막시밀리안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수상은 결국 눈썹을 찡그렸다.

“진짜로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몰래 떠나 버릴 거라든가.”

“나야말로 네가 왜 자꾸 내게 수도 관직을 밀어 주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너야 태어날 때부터 다 제공받고 살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난 능력 있는 인간이 적재적소에 못 들어가는 게 짜증 나고 지겹거든.”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넌 내가 좀 겁이 나는 거 아냐?”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꺼내 놓았다.

“네 정보통으로 둘러싸 놓을 수 있는 자리에 꽂아 놓고 충성을 시험하고 싶겠지. 그리고 나보고 자꾸 빨리 마왕과 머리를 트라고 하는데.”

상대가 별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의자에 등만 푹 기댄 가운데 전직 성기사도 여상스레 이어나갔다.

“마왕 쪽에도 여러 번 부탁했겠지? 어서 내 머리나 눈 귀에도 접속해서 다 들여다보라고. 너나 협회원들은 소위 통치를 위해 시민이나 소관료들 머리도 늘 들여다보고 감시하려는 거잖아. 요른한테 잘만 부탁하면 될 테니까. 그런데 너희가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게다가 그 사람이 눈으로도 감시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아무래도 불안하겠지.”

“잘 아네.”

수상은 양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뭐, 이해는 하지? 우린 성황과 달라. 통치에 직접 무력은 쓰기 싫어. 대신 민심을 샅샅이 살펴 평화롭게 다스리려는 거니 다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너도 마찬가지고.”

―이해하시겠죠.

막시밀리안의 안에서 문득 헤르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생애, 완전히 망가진 몸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황궁의 알현실을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들.

―제 입장도 이해하시겠지요. 늘 이해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해해.”

“고마워.”

필립이 빙긋 웃으며 그제야 찻잔에 다시 손을 댔다.

“그러면 얌전히 여단장 자리 정도는 맡아 줘. 곧 공문을 보낼 테니 서명해서 회신해.”

“그러지.”

차라리 회신해서 안심시켜 놓고 도망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막시밀리안은 툭 답해 버렸다. 그러나 필립은 생각보다 답이 쉽게 떨어져서 놀란 듯했고,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운을 떼었다.

“야.”

“응?”

“아니, 됐다.”

수상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희미하게나마 짐작했다. 아마 필립은 자신의 다른 쪽 마음도 가짜는 아니라도 주장하고 싶었을 거다. 자기는 제 부모와 일방적으로 의절한 프란첸가의 청년을 분명 친구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수도에서 능력을 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것도 진심이라고.

하지만 필립은 그만두어 버렸다. 어떤 말을 하고 나면, 다른 말은 진심이든 아니든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져 버릴 때가 있기 마련이다. 예의상 사교적인 잡담을 좀 더 나눈 후 막시밀리안은 곧 수상 관저를 떠나 제 사택으로 향했다.

또다시 밤이다. 흑마를 건물의 공동 마구간에 맡겨 두고 2층으로 올라와 그는 조용히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서 마시장에 가지 못했는데, 다음번 중앙 마시장은 일주일 후에나 열린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일주일은 꼼짝없이 수도에 머물러야 할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을 후회했고 필립에게 순순히 여단장직을 맡겠다고 승낙해 버린 것도 후회했다.

필립은 손이 빠른 인물이다. 한번 답을 주면 안심해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 기세를 몰아 일을 끝까지 진행해 버릴 가능성이 더 높다. 막시밀리안이 좋다고 한 이상 오늘 밤에라도 공문을 작성해서 급보로 보내 올 수도 있고, 거기다 서명을 해서 돌려보내면 다음 날 오전 중에 다시 전령이 찾아와 지금 당장 임시 임명식을 하러 오시랄 수도 있다.

그렇게 임명이 되고 나면 아무래도 황궁에도 출입해야 할 테고, 늦게까지 병영에서 지내야 할 일도 생기리라. 그러면 몰래 떠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생각이 짧았어. 왜 그렇게 선뜻 답을 해 버렸지.’

그는 열심히 후회하려고 노력하면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램프를 약하게 켜둔 채 서 있노라면 바깥 풍경에 겹쳐 등 뒤의 집 안 가구들 윤곽도 제법 진하게 창유리에 비쳐 드러나곤 했다. 그리고 곧 그 가구들 사이로 새하얀 형상이 찾아들었다.

막시밀리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계속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거나, 혹은 몰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백색 생물이 곧 그의 등을 향해 불렀다.

“막시.”

청년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자 왕이 수줍은 건지 기대에 찬 건지 알 수 없는 투로 졸랐다.

“나 연습시켜 줘.”

“아직 말을 못 구했어.”

“응?”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막시밀리안이 얼른 덧붙였다.

“내 흑마가 나이가 들어서, 새 말을 구해 가려고 하는데, 마시장이…….”

더듬거리다가 전직 성기사는 제풀에 고개를 젓고는 괜히 미간을 좁힌 채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 끝이 붉게 물든 채였다. 요른이 그 양을 살피며 분홍빛 혀로 아랫입술 안쪽을 살짝 핥았고, 새가 날개가 있는데도 굳이 걷듯이 총총 다가와서는 청년의 소매 한쪽을 잡아당겼다.

“다음 주에는 무도회가 있대. 중앙 관료들과 그 가족은 물론이고, 특별 훈장을 받았거나 참가비를 지불한 일반 시민도 다 참가하는 큰 행사라고 재무장관이 그랬어.”

“참가비가 얼만데.”

답을 듣고 청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요른이 재차 그의 소매를 끌자 답했다.

“무도회는 페랑 전통의 사교 의식이야. 그로쉔에서는 독서회나 주류 시음회로 대체해 왔어. 알잖아.”

“하지만 막시, 너는 페랑 왕궁에도 초대받아서 갔으니까 해 봤을 거 아냐. 출 줄 알지?”

“알기는 해.”

“그럼 연습시켜 줘.”

막시밀리안은 마왕의 파랗게 달뜬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선을 넘어 버리게 된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입 안에 맑고 단침이 고였다. 삼키자 심장이 뜨거웠다.

이런 감각은 내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막시밀리안은 새삼 돌이켰다. 요른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아름다운 존재고 그건 막시 자신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마왕 자신의 본질이다. 지금도 요른은 잃어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별처럼 눈앞에서 빛나고 있는데, 그건 막시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원래 그런 생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랬던가?

사흘 전부터 계속 떠올랐던 질문이 상대의 시선을 도화선처럼 타고 뇌리에서 다시 점멸했다. 그리고 답처럼 언제나 같은 말만이 울컥 흘러나왔다. 요른.

내 요른.

“……그래.”

막시밀리안이 허락하자 마왕이 방긋 웃었다.

“그럼 거울홀로 가자.”

“황궁 거울홀? 이 시간에?”

“이 시간이니까 아무도 없어.”

마왕은 소맷자락에서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나는 대신 초승달이 눈짓하는 듯한 몸놀림으로 인사하고는 팔을 내밀어 보였다. 막시밀리안이 멀거니 보고만 있자 요른은 투덜대듯이 말했다.

“입장부터 제대로 해야 하잖아?”

막시밀리안의 안에서 수많은 장면이 떠올렸고, 수면에 비친 빛에 심연에서부터 층층이 깨어나듯이 광택을 냈다. 골목에서, 성안에서, 정원에서 그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가, 그럴 때마다 생물은 둘이서 사실은 어디로 가기를 바랐던 건가.

―평생 나랑만 놀자.

상대가 홀린 듯 마왕의 팔에 손을 올렸고, 왕은 우아하게 팔짱을 끼고는 몸을 찰싹 붙여 오더니 털이 보드라운 흰여우처럼 킥킥 숨죽여 웃었다.

갈비뼈의 떨림이 막시밀리안의 팔목으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왕은 곧 둘의 몸을 이동시켰다.

며칠 후 결국 요른이 청하는 표현마저 바꿔 버렸을 때, 막시밀리안은 놀라지도 않았다.

“놀자.”

막시밀리안은 책상 위에서 통일 대륙의 지도를 집중해서 읽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고, 예상치 못한 손님 때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필립은 여단장이라면 원래 하던 직책을 다시 맡는 것뿐이니 부담이 없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공화국에서는 대륙 전체의 행정 구역을 재편했고 거기 맞추어서 군제도, 교통로도 요새 위치도 바꿔놓았다. 여기 적응하려면 아무리 막시밀리안이라도 공부가 필요했다. 그러니 밤에 쓸데없는 짓을 하며 힘을 뺄 짬 따위는 없었다.

한편 낮에는 온통 순결하게 새하얗기만 하던 생물은 밤에 여단장의 거실 한가운데에서는 제멋대로 마구 반짝이고 있었다. 봄의 꽃밭 한가운데에 놓여난 투명한 보석처럼, 그 자신은 여전히 무구한 채로, 그러나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를 색채를 반사해서 찬란하게.

“놀자, 막시.”

“이렇게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이미 ‘연습’이라는 핑계도 사라져 버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척, 막시밀리안은 그저 늘 면박을 주던 그대로만 뱉어 냈다.

“그래서…….”

요른은 오늘은 좀 더 대담해져 보기로 한 것 같았다.

“……나 잘못했어?”

상대가 답을 망설이자 생물은 아직 의자에 앉아 있는 자의 등 뒤로 다가와, 마치 부추기듯이 소매를 잡아끌며 물었다.

“그럼, 나 벌 줄 거야?”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답이 없자 생물은 재빨리 한발 물러섰고, 대신 허공에 날듯이 떠오른 채로 놀려 대기 시작했다.

“알았어, 바보야. 그럼 다른 거 하고 놀자.”

“뭐.”

“저거 해.”

요른이 어느새 책상 위로 폴짝 올라앉아, 구석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끌어다 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흘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젓자 입을 삐죽거렸다.

“그럼 뭐.”

청년은 책들 쪽을 바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찡그리고 탁자 위로 시선을 내린 채로도 손가락으로는 한 권을 가리켜 보였다. 요른은 또 저런 걸 골랐냐면서 투덜거렸지만, 얌전히 붉은 피막 같은 날개 한쪽을 살짝 펼쳐 상대 앞에 내보였다.

막시밀리안은 새삼 거의 충격을 받듯이 놀랐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적룡의 날개를 그대로, 하지만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빚어 놓은 듯한 형상. 골목에서 생물이 순식간에 머릿속 ‘요른’이 되어 다가왔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청년의 손이 움직였지만, 적룡은 피해서 뒤로 날아오르며 불평했다. 방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빨리, 날 잡아 죽여!”

요른이 속삭이면서 반도 채 펼치지 못한 날개를 조그맣게 달싹거렸다. 적룡이 그렇게 호기를 부리는 사이, ‘기사’도 벽에 걸린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요른은 금세 붉게 번뜩이는 비늘막을 몸통에까지 드리운 채 창 쪽으로 날았고 기사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둘은 사택의 닫혀 있던 창유리를 통과해 황궁의 홀로 들어섰고, 곧 프란첸 별성의 복도로, 그로쉔에 위치한 본성의 서재로, 옛 살롱으로, 원래 막시밀리안이 미래에 요른과 함께 살려고 구매해 두었던 남부의 버려진 성의 정원으로, 둘이 처음 만났던 골목으로, 다시 성황국 마도 학원의 강의동과 교정을 떠돌다가 어느 숲의 허공 한가운데에 놓여났다. 기사의 몸이 떨어지기 직전에 적룡은 날개만 펼친 채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그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기사도 적룡을 마주 안고 품에 가두었다. 떨어지는 도중에 여러 차례 다른 방들을 거쳐 둘은 옛 성황국 수도, 지금은 공화국의 수도 외곽의 작은 숲, 요른의 사택이 있던 곳 근처의 호숫가에 다다랐다.

둘은 누운 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요른이 막시밀리안과 서로 마주 본 게 아니라 페랑의 기사 소설 속 적룡과 기사가 그랬다. 그 소설 속에서 기사가 물리친 적룡은 원래 인간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아주 심한 저주를 받아 모습이 변해 버린 것이다.

본문은 기사가 어쩔 수 없이 기병을 이끌고 용을 물리쳤다는 데에서 끝난다. 하지만 기사가 은퇴하여 붉은 머리칼의 청년과 호숫가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후일담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용을 죽이자 오히려 그것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호숫가에서 용은 부드럽게 웃으며 기사의 뺨을 쓰다듬었고, 기사는 그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상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기사는 상대의 심장에 창을 찔러 넣었던 걸 사과했다.

말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사과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소설 속에서는 어쨌거나 둘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용이 기사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준 게 분명했다. 그러니 기사도 어떻게든 설득력 있게 사과했던 것이리라.

“미안해.”

막시밀리안은 최선을 다해 그 기사를 연기하려고 애썼다. 적룡은 작은 동백이 피듯이 웃더니 누운 채 곁으로 바짝 더 다가와 기사의 뺨에 키스했다.

입술이 닿은 찰나 둘은 페랑의 왕국 학원으로 이동했고, 각각 백작가의 장남과 뒤늦게 입양된 사생아가 되었다. 사생아는 집에서도 미움받고 학원에서도 심하게 따돌림을 받으며 마음의 병을 얻어 갔다. 그가 자살하려고 기숙사 방에서 목을 매었다가 발견된 후에도 형은 손을 내밀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천천히 일어나서 오히려 나중에 제 쪽에서 형에게 손을 내민 건 동생 쪽이었다.

페랑다운 소설이다, 막시밀리안은 읽으며 생각했었다. 순혈 귀족으로서의 자존심만 강했던 형은 끝까지 동생과 화해하지 않으며, 동생은 백작가를 떠나 상인으로 성공하는 게 결말이었다. 그러나 후일담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막시는 생각했다. 형은 언젠가 후회하며 동생을 찾아 나서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빌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실은 너를 아주 좋아했다고.

어린 너는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무서웠다, 미워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해 버리면 나 자신이 변해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더욱더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고 미안하다고 그는 밝혔다.

“미안해.”

형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하며 동생의 판결을 기다렸다. 한참이나 기다리자 어렸던 동생이 이제는 눈가에 잔주름도 생기고 키도 쑥 커버린 채로 코앞까지 다가와 곧 양팔로 상대의 어깨를 감싸 안아왔고, 형도 그 등을 마주 안았다.

그때 동생은 팔을 풀고는 뺨에 가볍게 키스마저 해 주었다. 저보다 세 살이 더 많은 형을 어리석은 아이처럼 달래듯이. 이런 장면에서는 형이 우는 게 더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에, 배역을 맡은 자는 조용히 눈물을 흘려 냈다.

동생의 얼굴이 멀어지면서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이, 그러나 이 세계에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과거를 향해 되돌리듯이 어려졌다. 고아원에서 만나 서로의 반쪽처럼 지내던 두 아이는 십여 년이 흐른 후에 삯일꾼과 행상인으로 만나는데, 행상인은 일꾼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독히도 학대하다가 상대가 짐마차에 깔려 죽기 직전이 된 다음에야 후회한다.

그래도 이 이야기의 끝은 좋은 편이다. 일꾼도 살아나고, 행상인도 뉘우치며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미안해.”

상인은 일꾼이 누운 병상 곁에서 수도 없이 빌었고, 그가 살아나자 겨우 신께 용서받았다.

소설 속에서 상인은 친구로서 용서받았을 뿐, 훗날 마음이 자라나도 연인으로 다가가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 속에서 요른이 분한 일꾼은 제 쪽에서 상인을 유혹하듯 팔을 내밀었고,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으며 목 뒤에도 갈라 터진 손가락들을 댔다. 상인은 겨우 그 팔을 빠져나와 이야기 속 본분을 지키고 교훈도 지켰다.

요른은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도 연기하고 싶어 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제가 미리 골라 놓은 대로만 우겼다. 매번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죄를 짓고 후회하는 이야기.

둘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돌며 끊임없이 한 장소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했고, 요른은 그때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차례대로 전혀 다른 생물과 사물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 시 속에서야 원래부터 어린 소년은 마치 금빛 새처럼 머리를 까닥이고 새는 밤 언덕의 능선처럼 고요하게 날고 언덕은 맹수처럼 웅크린 가운데 달빛 아래 갓난아이처럼 숨쉬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문장들에서 ‘처럼’이나 ‘마치’를 생략하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모든 것은 무섭도록 성스럽게만 아름다웠다. 놀이를 끝내기가 싫을 만큼. 그러나 동녘이 밝아왔고, 요른은 막시밀리안을 제 방에 데려다 놓은 후 백색 왕의 모습으로 돌아와 한발 물러났다.

“또 놀자.”

“응.”

청년은 바로 답했고 왕은 사라졌다. 막시밀리안은 자리에 누웠지만 한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그래도 전신에 힘이 넘쳤고, 웃고 있지 않은데도 얼굴에 미소가 감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른이 그새 몸을 회복시켜 주고 간 모양이었다.

막시는 오전에는 신규 여단장으로서 병영에 들러 간부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대륙의 통일 공화국이 어떤, 바다 건너 나라들까지 끌어들이는 세계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해 가고 있는지 깨달아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길을 끝까지 걷는다면,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해 봤자 전쟁은 어차피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훨씬 더 야생적인 방식으로 발발하게 될 것이고, 필립의 구상은 그 절정에서 몰락하리라.

그는 자신이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빠져나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그 사실에 기쁜 건지 오직 끔찍하게 고통스럽기만 한 건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시도는 해 봐야지.’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빠져나갈 시도는…… 해 봐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요른에게 잘못하는 거다. 그는 생각했다.

세상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자신이 요른에게 또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니까 안 된다. 옳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길만이 마왕을 마침내 온전히……. 그는 고민하다가 혼란에 갇혀 무력하게 눈을 감아 버리곤 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일들이 결정되는 건 놀이 속이었다. 그러니 여단장은 현실의 업무를 습관대로 정교하게 수행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매 순간 의미 없다고 느꼈다. 그는 집에 오면 소설부터 붙잡고 뒤적거리다가 요른이 올 만한 시간 직전에만 얼른 책상에 앉아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막시.”

그래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닿아올 때, 냉랭하게 찌푸린 얼굴로 돌아보며 실랑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 또 왔어. 지긋지긋하다.”

“놀자.”

“바쁜 거 안 보여? 그만해, 요른.”

“놀자, 놀자.”

이미 놀고 있잖아.

목까지 치받친 말을 지우고, 웃어 버릴 뻔한 것도 겨우 참고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혼의 가장 안쪽에서부터 불빛이 켜진 것처럼, 생물의 마냥 하얗기만 하던 백발이 무색의 보석으로 자아낸 실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고, 뺨은 눈 속에 서 있다가 난로 앞에 앉은 어린애처럼 발갛게 되었다. 그런 채로 생물은 어린 은여우처럼 눈이 다 감기도록 웃으며 상대의 손을 끌어당겼다.

생물이 공간을 뒤섞었고 둘은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거기서 다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차례로 사라졌다.

이상 징후를 제일 먼저 감지해 낸 건 필립이었다. 황궁에서 수상, 왕과 보좌관이 여단장 등 기사 간부들과 새 마법부 직원들이 모여 오찬을 들 일이 있었는데, 린다가 왕 앞에서 죽을상을 한 채 스프도 제대로 못 뜨고 있는 거야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막시밀리안의 태도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는 물론 왕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주변 사람들과만 대화를 나누었다. 요른도 일부러 막시밀리안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인 듯 서너 번 시선이 마주치는 것 정도는 둘도 어쩔 수 없는 듯했는데, 필립은 그때마다 요른의 모습이 달라지는 걸 눈치챘다.

처음에는 필립도 착각이라 여겼고,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자기 안에서 비틀려 버린 부분도 착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주, 역시 기사 고위 간부들이 참여한 오후 회의 자리에서도 수상은 왕의 모습이 변하는 걸 보았다. 표정이나 분위기 따위만이 아니라, 분명 모습 자체가 변했다.

이건 연기다. 필립은 순간 깨달았다.

둘은 지금 죄책감에 서로를 피하는 게 아니라 피하는 척만 하고 있다. 저 서먹함은 둘이서 보다 더 은밀하게 눈빛을 주고받고, 금지된 것처럼 안타깝게 서로를 훔쳐보며 즐기기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 물밑에서는 둘은 오래전부터 몰래 만나서 정을 나누어 왔으리라. 언제부터?

‘이게 무슨 망상이야.’

수상은 곧 고개를 저으며 제풀에 웃어 버렸지만, 그날 그는 회의 내내 내용은 귓등으로 흘리고 왕과 여단장의 얼굴만 끊임없이 번갈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허공에 어떤 틈새가 열려 버린 걸 알았다. 상황을 한 겹으로만이 아니라 두 겹으로 주시하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틈새.

그리고 거기서부터 울컥 어떤 계시처럼 충동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그는 자기 안의 변화를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가져야만 해.’

그는 머릿속으로라기보다 온몸의 살과 피로 생각했다. 저 생물을 가져야만 한다.

그 충동은 매번 무시무시한 질투와 함께 찾아왔다. 수상은 왕의 곁에 있으면서도 생각했고, 밤에 혼자 침소에서도, 낮에 업무를 볼 때도 꿈꾸었으며 꿈속에서마저 소망했다.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려 제 손에 넣어야만 한다고.

‘아무도 볼 수 없게 해야 돼.’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지 악마의 속삭임인지 모를 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안에서 맥박쳤다.

‘저 막시밀리안은 물론이고, 아무도. 만민의 왕이라니 말도 안 돼. 누구에게도 나눠 줄 수 없어.’

그러나 필립의 마음은 아직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았다. 충동을 이기고 왕의 충실한 신하이자 공화국의 수상으로 남고 싶은 의지가 훨씬 더 강했다.

필립은 문득 자신이 기사 수업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이 미칠 듯한 마음을 잘 다스려 억눌러 둘 수 있었으리라. 끊임없이 심장과 관자놀이에서 고동치는 검붉은 것을, 황궁의 복도를 걸을 때 걸음걸이마저 삼가고 억누르면서, 그는 막시밀리안이 처음 투항해 왔을 때를 돌이켰다.

‘그는 내 구상에 찬성하지 않았지. 단순히 내가 요른을 길들이겠다는 게 싫었던 걸까, 아니면.’

수상은 마왕과 그 검은 머리 성기사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마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이라기보다 심장 어딘가에서 어떤 실들이 서로 짜 맞추어지는 듯한 느낌에 놀랐고 차라리 덴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왕은 아무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사실상 모든 것이지. 그런데도 이름이 있고 형상이 있어. 그 이름도 형상도 십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바꾸지 않고 있고. 아니, 애초에 대체 어떤 식으로 자의식이 생긴 거지?’

왜 이 땅에 머무르지?

어째서 단 하나의 인격이 된 건가.

생각하자 문득 등이 오싹했다.

거기서부터 틀렸었던지도 모른다. 필립은 생각했다. 마왕의 본질이란 무한히 자유로운 것이기에 화를 피하려면 그 자유로움을 억누르거나 길들여야 한다고 여겼던 데에서 필립 자신도, 성황도, 막시밀리안도 틀렸었다. 결론이 아니라 전제부터가 틀렸다.

‘막시밀리안은 지금은 알고 있는 건가?’

희미한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를 떠올리자 필립은 질투로 혼미해져서 제대로 고심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일단 생각을 미뤄두기로 했다.

마왕의 본질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자 필립의 안에서 신세계에 대한 예지도 바뀌었다. 만약 정말로 마왕이 그런 자라면, 그의 구상대로 세계가 하나 되는 날은 올 수가 없다. 심지어 대륙의 통일조차도 다시 위험해지리라. 아니, 대륙이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가족 간에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어떻게 보면 필립 자신이 그런 멸망을 부추겨 놓은 꼴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수상은 손에 식은땀이 돋았다.

‘아냐. 너무 지나친 생각이지.’

그러나 필립은 한편 고개를 젓곤 했다. 자기 자신이 마왕에 대해 광기에 가까운 격동을 느낀다고 해서, 그걸 마왕 본인의 문제로 여기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저 필립 자신이 어딘가 이상하게 미쳐 버린 것뿐이다. 열여덟 살이다. 요른의 정체를 깨닫고 신세계를 구상하기 시작했던 게 그 나이 때였다. 그 후 거의 십 년간 계속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나름대로 고민도 많았고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으니, 그 결과로 뒤늦게 속이 비틀려 버린 거다.

‘이번 정기 회의가 끝나고 나면 짬을 내서 휴가를 가야지. 내가 혼자 푹 쉬다 오면 해결될 일인데 이걸 세계의 운명이 걸린 사건으로 여기고 불안에 떨다니, 이런 오만이 어디 있어.’

그러나 이유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필립은 마음 자체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왕을 원했다.

그 생물을 제 아래에 안아야만 했다.

필립이 관저의 침소에서 생각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 막시밀리안은 또다시 제 거실 창가에 서 있다가 뒤를 돌아보고 인상을 썼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른은 상대가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허공에 반쯤 뜬 채 순식간에 바싹 다가왔고, 백발을 찰랑이며 상대의 귓가를 핥듯이 속삭였다.

“놀자.”

“왜 또.”

“저거 하고 놀아.”

요른이 또 책 한 권을 가리키길래 막시밀리안도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건 교육용 소설은 아니었다. 성인이 읽는 대중 문학 중 하나인데, 막시밀리안은 며칠 전 반쯤만 읽다가 어떤 장면에서 그만 책을 덮어 버렸었다. 하지만 상대가 고개를 젓든 말든 요른은 떼를 썼다.

“난 저거 하고 놀고 싶어.”

“난 싫어.”

“맨날 자기가 고르는 것만 하고.”

요른이 일부러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싫어, 바보 막시. 저거 해.”

막시밀리안은 이마를 짚었고, 다른 변명을 꺼내 보았다.

“내가 아직 다 안 읽어서 잘 몰라.”

“난 읽었어. 내가 가르쳐 줄게.”

“언제 읽었어?”

“직접 읽진 않았어.”

요른이 눈을 깜박이며 답했다.

“읽은 사람 머릿속을 읽어 내면 되지. 페랑에선 인기 많았던 소설이라 읽은 사람도 많아.”

“너 요즘은 힘을 그런 식으로 쓰…….”

“놀자니까.”

요른이 허공으로 날았다가 창가에 살짝 기대어 앉았다.

“안 놀아 줄 거야?”

“그게 아니라, 다른 책을 하자는 거야.”

“놀아 주기로 해 놓고.”

겨울 하늘에 은을 섞어 보석으로 연마해 낸 것 같은 눈동자가 살포시 웃었다.

“평생 놀아 주기로 했잖아, 막시밀리안. 단둘이서만.”

청년은 순간 말을 잃은 채 상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요른이 둘의 몸을 이동시켰다. 둘은 페랑 수도의 어느 유명 제과점 매장에 들어와 있었는데, 밤이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타르트 종류 중에서도 아주 달아서 거의 상하지 않을 것들만 진열대에 몇 개 남아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책장을 덮어 버린 게 바로 이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밤의 제과점은 아니고, 디저트를 바구니에 싸 들고 소풍을 나간 자리에서였지만. 그러나 요른이 진열장 쪽을 턱짓해 보였다.

“요른, 안 돼.”

“싫어?”

“싫어.”

“그렇구나.”

생물의 눈동자가 회색으로 탁해졌고, 어깨가 움츠러들고 팔목도 가슴도 비참할 정도로 삐쩍 마른 채 머리도 엉성하게 흐트러졌다.

마왕군에 처음 투항했을 때쯤의 모습으로 변한 채 ‘요른’이 눈을 깜박거렸고, 상대의 시선이 닿자 제풀에 깜짝 놀란 듯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얼른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는 제 손만 꽉 모아쥐고 섰다.

막시밀리안은 입술이 파리해졌다. 그는 생물이 자신을 놀리려고 저 ‘요른’으로 변신한 건지, 어떤 연유로 정말로 다시 저 상태로 돌아가 버린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움츠러든 생물이 문득 눈을 들어 진열장 쪽을 흘끔거렸고, 여단장과 시선이 닿자 금방 머리를 푹 떨구고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다행이다.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역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 건 아니고, 작전이었다. 막시를 꾀려고 일부러 저 모습으로 변신한 거다. 안도하면서도 청년은 한편 자신이 안도하고 있음에 마음이 아팠다. 저 탁한 요른보다 지금의 반짝이는 요른이 더 낫다고 차별해 버린 것에 대해.

어쨌거나 막시밀리안은 진열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요른에게는 싫다고 할 수가 없다. 그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원할 줄도, 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갖거나 남에게 요청할 줄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조금이라도 눈치를 챌 만한 단서가 주어지면, 눈길이나 손짓 하나라도 암시하는 바가 있다면 타인이 무조건 알아차려 받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막시밀리안은 거침없이 자물쇠를 부수어 열고 크림이 가득 든 동그란 소형 타르트 하나를 꺼냈다.

긴 백발에 가린 회색빛 눈동자에 문득 흐릿하게나마 이채가 돌면서 시선이 타르트 쪽을 향했다.

여단장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대로라면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르트 한중간을 부수어서 크림이 가득 찬 안쪽 부분을 조금 떼어 냈다. 설탕에 절인 손톱만 한 나무딸기가 곳곳에 섞여 있었다.

“요른.”

나지막이 불러 자신을 마주 보게끔 한 후, 그는 크림 범벅이 된 나무딸기를 검지와 엄지 사이로 쥐어 상대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

요른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불안스레 자색 열매와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쪽 요른은 제가 극을 이끌기는커녕 맞춰 주는 법조차 모른다. 제과점 안은 다행히 어두웠고, 그래서 여단장은 얼굴이 있는 대로 붉어진 걸 들키지 않고도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먹어.”

말끝에 언뜻 소설 속 장면에 똑같이 맞추려면 몇 마디 덧붙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핥아서 먹어. 내 손이 깨끗해질 때까지 핥아.”

요른이 끄덕이면서 입을 벌렸다. 그 꼴을 보며 막시밀리안은 이런 글을 쓰는 변태 같은 자들이 정말 미웠다.

페랑인들은 대체 제정신인가. 이건 성황 시기에도 금서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자들은 몇백 년 내내 평소 밤에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낮에는 멀쩡한 일상생활을 이어 왔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막시밀리안은 알 수가 없었다. 저 필립이나 그의 모친, 부친, 사업가 협회원들도 다 뒤로는 이런 걸 읽으며 살아왔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메스꺼움까지 치밀었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들어맞는 서술도 아니고.’

소설 속 인물은 크림을 먹는답시고 몇 분이나 상대의 손가락을 핥고 빨아댔다. 하지만 이렇게 조막만큼 덜어 내서 검지와 엄지에만 묻힌 걸 먹느라 손 전체를 핥아 댈 이유는 없다. 새끼고양이라도 너덧 번쯤만 할짝거리면 충분히 다 먹어 치울 분량이었다.

막시밀리안은 그저 이 장면이 어서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요른은 십 분도 넘게 그의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보드라운 혀끝이 조심스럽게 손끝, 손톱 밑의 가느다란 틈, 손마디의 튀어나온 부분을 거쳐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스며드는 걸 느끼며 막시밀리안은 당황했다. 곧 요른이 아예 검지 끝부분을 통째로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고, 눈치를 보다가 상대가 밀어내지 않자 가운뎃마디까지도 깊숙이 머금었다.

막시밀리안은 무언가를 순식간에 이해했고 머리 한구석에 온기가 번지는 걸 느꼈다.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한 끝에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깨달았다.

핑계구나.

크림이고 딸기고 핑계다. 소설 속에서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닿고 싶어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치듯 아무 핑계나 만들어 확인받은 것뿐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왜 뭉클하게 느꼈는지는 알았지만, 손가락이 젖자 아래에까지 피가 몰리는 원리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요른이 검지를 입에서 빼냈다. 그러나 막시가 손을 거두지 않자 용기를 낸 듯 중지 끝을 톡톡 쏘듯이 핥더니 곧 아주 천천히 입 속으로 빨아들였다. 막시밀리안은 책을 다 읽지 않은 걸 후회했다. 이다음 장면이 어떻게 될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조용히 억누르듯이 말했다.

“그만하자.”

요른이 답을 하는 대신 마디 안쪽에서 혀를 굴렸다. 막시밀리안은 급히 외쳤다.

“그만해, 요른.”

그러나 상대의 이름이 입술을 물들인 순간 오히려 얼굴이 더 달아올랐고 관자놀이가 거의 심장처럼 맥박쳤다. 청년은 자신이 지금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졌고 다만 어서 도망쳐야겠다고만 느꼈다. 상대의 이나 점막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느라 아찔하긴 했지만 막시밀리안은 가까스로 손을 빼내었고, 멀뚱히 쳐다보는 백색 생물에게 전했다.

“그만하자.”

“왜.”

요른이 뚱하니 되물었다.

“내가 또 잘못된 소원을 들어 줬어?”

여단장은 바지에 손을 닦다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생물은 여전히 봉인되었던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채였다. 은회색의 탁한 눈에 부슬거리는 백발, 정맥이 거미줄처럼 비쳐 보이는 피부, 살이라고는 없어 눈썹뼈와 턱관절만 무섭게 도드라진 얼굴이 밤의 어스름 속에서 유령처럼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막시밀리안은 답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경계에 도달했다는 걸 알았다.

“다음에 더 놀자.”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곧 해가 날 거야.”

요른은 창 쪽으로는 고개를 틀지도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막시밀리안만 쏘아보았고, 그 시선을 피해 여단장은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해가 벌써 뜰 리가 없었다. 하얀 생물의 음성이 귓가에 걸렸다.

“멍청이.”

정신을 차려보자 막시밀리안은 혼자 제 방에 있었고, 생물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방 안을 서성이며 새벽을 지새운 뒤 그는 동이 트자 병영으로 출근해서 오전 회의를 마쳤고, 오후에는 장관과 만나 필립의 소위 세계 대전인지 혁명인지에 대한 계획을 공식적으로 귀에 담았다. 그러나 말들은 내내 머릿속까지 들어오는 대신 의식의 창유리쯤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나갔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야 그는 다시 자기 자신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기분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절망적이고 지긋지긋했을 뿐이다. 밤이 되자 어김없이 생물이 찾아왔다.

“놀자.”

막시밀리안은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요른은 더 말이 없었고, 손을 잡아끌지도 않았다.

평소대로라면 요른은 책을 하나 골라 놓고 소매를 잡아끌면서 놀자고 졸라 댈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하얀 왕은 책상에 앉은 여단장 곁으로 바싹 다가와 손은 뒷짐만 지고, 대신 고개를 여단장의 머리 쪽으로 깊이 기울인 채 서 있었다.

백발이 늘어져 청년의 뺨과 어깨 부근을 건드렸다. 막시밀리안이 몸을 기울여 피하며 책장 쪽을 턱짓해 보였다.

“그래. 어느 게 좋아?”

“놀자.”

“그러니까 뭘 하고 놀자는 거야, 요른.”

생물이 방긋 웃더니 입술을 겹쳐 왔다.

* * *

주말이 지난 후의 오찬회, 왕은 수상과 보좌관 사이에 앉아 있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먹어 섭취할 필요는 없지만 그림으로 흉내만 내듯 왕은 고운 동작으로 은식기를 움직였고, 가끔 색깔 좋은 것을 그 끝에 꿰기는 했으나 거의 입에 넣지는 않았다.

‘소꿉놀이 같아.’

필립이 생각한 찰나 왕은 문득 청년처럼 곧게 쭉 뻗은, 그러나 어린 버들가지처럼 낭창한 목을 치들었고, 고개를 돌려 제 오른쪽에 앉은 수상의 얼굴을 보고는 살포시 웃었다.

수상은 순간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대식당홀 전체에 침묵이 훅 끼쳤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야. 필립은 침묵을 눈치채고는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왕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그 미(美)의 방향도 달라졌다. 왕은 물론 여전히 마냥 성스럽고 순결한 모습으로만 모두 앞에 섰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수상의 곁에는 오히려 평생 수련하며 무죄하게 살아온 자조차도 나락으로 빠뜨려 버릴 수 있을 듯한 어떤 것이 앉아 있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둘러앉은 자들의 시선이 가시처럼 필립의 살을 찔렀다. 질투다. 깨달았으나 수상의 가슴을 꽉 채운 건 불안이 아니라 환희였다. 왕이 그의 환희와 타인의 질투를 더 부추기려는 듯 손을 뻗어 필립의 팔에 살그머니 닿아 왔다.

닿은 곳이 데인 듯이 뜨거웠고 열기는 순식간에 몸 전체에 번져 어느 중심에 고였다. 필립은 허벅지 안쪽이 쿡쿡 쑤시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다른 데로 생각을 돌려볼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에 온 정신을 다해 집중했을 뿐이다.

생물이 그의 팔을 가볍게 쓰다듬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필립은 아쉬움에 고통스러웠고 또 다른 사실을 알아채고서는 심장이 깨질 듯이 절망했다. 왕이 바라보는 곳에는 흑발의 여단장이 앉아 있었다.

왕의 시선은 여단장의 주변에 찰랑이며 고일 정도로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여단장은 모른 척하며 꼿꼿이 앉아 무심한 얼굴로 식기만 놀리고 있었다.

‘나쁜 자식.’

필립은 눈앞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어두워질 정도의 분노가 차오르는 걸 느끼고는 놀라 반성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반성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이 남아 주질 않았다. 몸과 혼이 질투와 슬픔, 분노로 한 덩어리가 되어 끓어올라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생물이 다시금 그의 팔을 매만졌다.

“괜찮으세요?”

왕은 다시 순결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새하얀 손길과 눈빛으로 필립의 마음에서든 둘러앉은 다른 기사 간부들, 의원들이나 장관들의 마음에서든 삿된 기운을 순식간에 다 씻어 내 주었다. 덕분에 필립은 자신의 방금 전 상태를 돌이킬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그건 이런 깨끗한 마음에는 깃들 수조차 없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추하려 애써 봐야 어렴풋하고 불길한 그림자 같은 것밖에는 드리우지 않았다.

‘뭐였지.’

곱씹다가 수상은 자기 성기가 허벅지를 따라 길게 늘어나 있는 걸 알아채고는 당황했고, 물을 마시는 척하며 탁자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순간 여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깊은 암회색 눈동자에 반사된 양 아까 자신의 상태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필립은 떨리는 손으로 유리잔을 내려놓고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랬다. 아까 왕은 막시밀리안에게 보여 주려고 필립을 이용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자에게 질투를 유발하려 했던 거다.

그리고 저 백합 같은 얼굴에 강철의 몸을 지닌 청년은 아까는 잘도 무심한 척했지만, 일이 다 끝난 지금에야 필립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시커먼 시선을 던져 두고 있었다.

‘죽겠군.’

되뇌며 필립은 웃어 버렸다. 막시밀리안이라면 실제로 충분히 수상을 암살할 수도 있다. 호위병이야 딸려 있고 관저에도 사병은 있지만, 그 비실비실한 시민병들 따위 저 기사는 맨손으로도 소리 없이 서넛씩은 부수어 죽일 테니까.

‘왕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아까 다들 홀렸을 때는 멀쩡하더니, 이제 씻겨서 다 정화되고 나자 뒤늦게 혼자 저렇게 어두워져 있다. 왕께서는 여전히 저자에게만은 권능을 행사하지 않으시나 보다. 깨닫고서 필립은 어딘지 울컥해서는 속으로 뇌까렸다.

‘도와드릴까.’

“전하, 인사를 돌릴까요.”

말하며 필립은 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규모가 큰 오찬회가 열리면, 식사 중간쯤 왕은 몸을 일으켜 보좌관과 함께 홀 전체를 돌아다니며 참가자 한 명 한 명에 말을 걸고 안부를 묻고, 상대도 왕께 직접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게끔 안배하곤 한다.

이건 사실 성황기 이전의 전통이다. 성황은 제자리에 앉아서도 전송 마법으로 모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이 의식은 실용적 의미는 없게 되었다. 그래도 형식상 성황은 관료들 사이로 물리적으로 직접 걸음 하는 의식을 지켜왔고, 신왕도 그를 따르기로 했다.

보좌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필립이 눈짓으로 도로 앉혔다. 오늘은 수상인 자신이 왕의 곁을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필립은 장난스레 왕께 팔을 권했고 왕도 웃으며 그 팔에 손을 얹었다.

공화국의 두 수장이 팔짱을 끼고 관료들 사이로 지나는 동안 막시밀리안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요른이 저러는 이유야 알겠는데, 왜 필립까지 같이 놀아 주는지 모르겠다.

‘페랑인이라 그런가.’

페랑인은 별 마음 없이도 그로쉔에서라면 진지한 구애에 해당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서로 가벼운 검격이라도 나누듯 주고받으며 노는 듯했다. 막시밀리안 자신도 지난 생에든 이번 생애에든 페랑인들로부터 수도 없이 장난스러운 구애를 받아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한없이 경박한 짓이라고 느껴 평소에는 영 기꺼워할 수 없었지만, 지금 막시밀리안은 차라리 필립이 제 쪽에서 그런 정도의 태도로 제 왕을 대하고 있는 거길 바랐다. 왕이 힘을 쓴 게 아니라.

‘요른의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으니까. 제일 가까운 사람부터 끌어들일 만도 하지.’

왕이 마침 여단장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고 둘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만은 말을 걸지 않고 스쳐 가 버렸다.

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지만, 왕이 여단장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부관에게 말을 걸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마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실소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길을 끝까지 갈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어젯밤 요른의 몸을 멀찍이 밀어 버렸던 걸 기억했다. 입술을 겹치고 혀까지 열어 오는 걸 그는 십칠 년 전과 거의 똑같은 동작으로 있는 힘을 다해 뿌리쳤고, 오지 말라고 명령하듯 소리쳤다. 그리고 생물이 새처럼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어 오는 말에도 결국 그때와 똑같은 표현으로 답했다.

“그래. 너 싫어.”

어릴 때와 달리 요른은 막시의 말을 무시하고 무조건 다가오려고 들지는 않았다. 여전히 상대의 마음을 읽지는 않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읽었더라면 바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다만 생물은 몹시도 화가 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멍청한 새끼가.”

귀 주변의 공기가 천둥처럼 울렸지만 막시밀리안은 굳이 찡그리지도, 귀를 막지도 않았다. 어깨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은 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려니 방 전체가 아예 골을 부숴버릴 듯 우르릉거렸다.

“나도 너 필요 없어, 개똥아.”

생물이 사라져 버린 후 여단장은 한숨을 내쉬었고, 뒤늦게 머리를 감싼 와중에도 웃어 버렸다. 새끼에다가 개똥이라니.

매일같이 소위 민중의 기도를 제 머릿속에 접수하다 보니 어휘가 옮았나 보다. 막시밀리안은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 오늘 오찬회에 나왔다. 요른이 몸을 회복시켜 주지 않아서인지, 밤 내내 놀았던 다음 날보다 훨씬 더 피곤했다.

그래도 앉아서 버티려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는데, 생물은 눈앞에서 알짱대며 필립의 팔이나 쓰다듬어 댔고, 나중에는 팔짱을 껴 버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지금 요른이 열어 보여 주는 그 길을 끝까지 가면 세계는 지옥이 되리라는 걸 그는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로소 마왕의 진짜 강림이 이루어지리란 걸. 하지만 그래서가 아니다. 세계 같은 건 지난 생애에 이미 버려 두고 온 터였다. 다만 그 자신이 도저히 요른과 연인이 될 수가 없었다.

지난 생애 그는 요른에게 끊임없이 못 할 짓을 저질렀고 끔찍한 끝을 맞았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놀 수는 있지만, 진짜 막시밀리안과 요른으로서는 안 된다.

이 관계는 틀렸다. 여단장은 몇 번이나 탈출구를 찾았지만 결국 같은 닫힌 문 앞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붙잡았더라면 달랐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일어난 일은 결국 돌이킬 수 없다.

‘그거야 회귀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놓아 주고 싶었던 건데.’

생물을 자신이 층층으로 감아 두었던 사슬에서 풀어 주려 했었다. 골목길에서 만났던 최초의 시점, 어렸던 프란첸이 아직 복속시키기 이전의 형상이 그의 본래 모습이자 마왕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태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는 도저히 풀어 줄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했다.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다시 그 무한히 자유로운 새로 돌이켜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군주의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을 사람에게.

그런데 열쇠는 어떻게 보면 완전히 반대쪽에 있었다.

이제 그 문을 열기만, 아니, 차라리 걸어 잠그기만 하면 되는데 차마 할 수가 없다.

‘모순이지.’

그는 속으로 뇌까리면서도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다.

‘짝을 바꿔 주는 건…… 불가능하려나.’

마왕이 막시밀리안 자신을 버리고 필립을 택해 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세상이야 똑같이 망가지겠지만, 필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른에게 나름대로 잘 대해 주려고 애썼다. 그 둘의 관계는 비틀려 있지 않다. 그 둘이라면 아무것도 돌이킬 필요도 없이 그저 서로 사랑하면 된다.

시도는 해 보는 게 좋겠다. 마침내 왕이 몸을 일으켜 정교하게 세공된 유리잔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며 막시밀리안은 속으로 곱씹었다. 왕은 오늘 아침 진상된 포도주가 담긴 잔의 목을 쥔 채 폐회사를 모두의 머릿속에 전했고, 술을 입에 흘려 넣는 흉내만 낸 후 도로 자리에 앉아서 인사를 기다렸다.

관료들이 하나하나 왕께 인사를 올리고 줄을 서서 퇴실하는 가운데 막시밀리안은 왕이 앉은 곳을 거치지 않고 슬쩍 방을 나가 버렸다. 몇몇이 눈치채고 굳어 버렸지만 여단장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밤과 다음 날 새벽 사이, 그는 검 서너 자루와 옷 두어 벌만 챙겨 바로 흑마를 끌고 수도 외곽으로 향했다. 스스로에게 지난번처럼 괜한 짬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도시 경계부의 숲에 채 달하기도 전에 부관이 급하게 직접 끌고 나온 병사들에게 잡혀 자택에 연금되었다.

다음 날 오전, 수상이 연금 상태에 있는 여단장을 찾아왔다. 짤막한 대화를 나눈 후 그는 왕이 곧 직접 찾아오실 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막시밀리안은 기다렸다.

책을 뒤적이고 괜스레 방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기다렸지만 한나절이 지나도 방문해 오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라도 또 요른 혼자서 밤에 찾아올 생각인가 했지만, 저녁쯤이 되자 마침내 병사가 문을 두드리며 여단장의 이름을 불렀다. 문을 열자 왕이 호위병 둘과 보좌관을 거느린 채 좁은 복도에 서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공손히 몇 걸음 물러서자 무색의 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예복에 청색 허리띠는 물론 관까지 올려 쓴 채였다. 여단장은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삼가 존안을 뵙습니다.”

“이건 맘에 들어?”

왕이 주변을 정화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를 보내왔다.

막시밀리안은 호위병과 보좌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왕의 등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자리한 채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요른은 여전히 무결한 모습으로 빛이 남실대듯 입술을 달싹이며 허공을 거쳐 정확히 흑발 청년의 귓속에만 음성을 불어넣었다.

“넌 이런 걸 좋아하지? 깨끗한 거, 옳은 거.”

생물은 하얗고 숱 많은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어린 토끼의 솜털처럼 웃었지만, 한편 삐친 어린애처럼 속닥였다.

“내가 성검이었을 때는 그렇게 매일 밤 꼭 안아 줘 놓고.”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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