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9/30)

2.

필립은 사실 종내 움베르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막시밀리안과 요른이 수도에 투항해 온 날부터 연락이 뚝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사정은 대충 짐작할 만했다. 막시밀리안은 도착한 날 바로 필립이 묻기도 전에 정보를 건네 왔다. 폰 사센의 신상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움베르토 폰 사센이 네 주요 정보원 중 하나 맞지?”

“응. 혹시 그 사람이 탈출을 도와줬어?”

“응.”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로도 전향자는 가만가만 이어 갔다.

“우리랑 연락한 흔적은 남기지 않게끔 알아서 조심했을 거야. 그래도 도와준 건 사실이니, 어떻게든 꼬리를 잡혀 의심을 받을 수도 있긴 해.”

“내통자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얘기군.”

“그럴 수도 있고, 또 다른 가능성도 있어. 돕는 과정에서 흑마법을 썼을 수도 있거든.”

막시밀리안은 눈썹을 더 깊이 찡그리며 마저 설명했다. 복잡한 감정이 섞인 얼굴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움베르토가 요른에게 연락하는 과정에서 어떤 흑마법을 썼는지, 아니면 애초에 쓰기나 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황을 듣고 나서 필립은 만약 움베르토가 흑마법을 썼다면 특히나 초심자로서는 말도 안 되게 무리가 가는 마법을 썼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만큼 부작용도 컸으리라.

‘막시밀리안이 정확히 알고 시킨 건 아니었겠지만, 사센 씨도 너무 몸을 안 사려. 아니, 사센 씨는 오히려 일부러 무리하는 감도 있지.’

흑마법의 부작용은 꼭 한 방향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없던 상처가 생기기도 하지만 있던 상처가 씻은 듯이 회복되어 버리기도 하니, 그 연구소장처럼 몸이 엉망진창인 사람은 오히려 유혹받을 만도 하다. 마법을 쓰다 보면 잘려 나간 다리마저 다시 자라나 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부러 좋아라 하고 기회로 삼았을 수도 있지.’

필립은 내심 고개를 저었지만, 일단 며칠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움베르토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필립은 마침내 린다에게 연락해서 소식을 물었고 그녀는 금방 답장을 보내왔다. 안심해라, 연구소장은 몸이 아파 사택에 누워 있는 것뿐이다.

움베르토는 지난주에 흑마법을 꽤 여러 번 써서, 그 부작용 때문에 병가를 내야겠다고 린다에게 미리 서신을 보내왔었다고 한다. 모습이 좋지 않으니 혹시라도 찾아오지는 말라는 부탁도 함께 담아서. 온전히 혼자만 있으려고 제 사택의 하인에게도 휴가를 주어 내보냈다고 한다.

린다는 잘 알겠다고 친절하게 답했지만, 공식적으로 병가를 내어 주지는 않았다. 이런 시기에 병가를 주면 주변 시선이 고울 리가 없으니 마법부 차장 선에서 시급한 단독 연구 과제를 내어 준 것으로 갈음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꽤 자랑스러운 듯 자기가 그동안 한 일들을 이것저것 더 나열한 다음 필립에게 안부를 물어 왔고,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단은 적당히 상냥한 답신을 써서 보냈다.

그러나 열흘쯤 뒤 필립은 또 다른 경로로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황군 총사령관 겸 황국 수도 성기사단장 베스퍼 폰 크라우스가 수도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군에서 워낙 쉬쉬해와서 그렇지, 사실 사라진 지는 적어도 사나흘은 지난 걸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틀 뒤 린다에게서도 급보가 왔다. 움베르토가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병석에 누워 있는 거 같아 걱정되어 사택에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었단다. 문도 물리적으로만 잠겨 있었을 뿐, 이상하게도 마법적 수단에 대항하는 결계 처리는 되어 있지가 않아서 걸쇠를 녹여 열고 들어가 볼 수가 있었는데, 들어가서 방마다 다 뒤져 보아도 집주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침실 곁탁자 위에 꽃병이 놓여 있고 꽃 한 다발이 꽂혀있었으며, 그 꽃이 물을 다 빨아먹고 거의 죽어 가고 있었던 걸로 보아 적어도 사나흘은 흐른 것 같다고 린다는 보고했다.

베스퍼가 사라졌다고 추정되는 날짜와 겹친다. 생각하고는 필립은 저녁에 막시밀리안을 불러 사택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종국에는 둘 다 의견을 같이했다. 필립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쪽으로 미리 연락을 해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도주부터 해 버린 거지?”

“움베르토가 협력해 줄 상태가 못 되었거나, 해 주지 않은 거겠지. 베스퍼가 권력을 쓰면 누군가 연락책을 맡아 주기야 했겠지만, 그자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억지로 반역죄 공범으로 만들어가면서까지 투항할 인물은 아니야.”

막시밀리안이 있는 대로 찡그린 채로도 뱉어 냈고 필립도 끄덕거렸다.

“그렇군. 어쨌거나 만약 네 생각이 맞다면 베스퍼가 이쪽에 합류할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러면 넌 잘 지낼 수 있겠어?”

“스스로 억제할 자신은 없지만, 서로 섞일 일이 없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막시밀리안이 담담히 답했다.

“마왕군 쪽에서는 딱히 총사령관을 처단할 생각은 없나 보군. 받아 주려고?”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그로쉔에서 이미 귀족을 너무 많이 죽였어.”

필립이 살짝 상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느라 아무래도 민심도 많이 불안해졌었지. 폰 크라우스의 영지는 성황국에 있지만 출신은 그로쉔이잖아. 게다가, 귀족 사회 내부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베스퍼는 민중 사이에서는 제법 존경받는 영주에 단장님인 걸로 아는데.”

“그건 맞아.”

“그래. 그러니까 투항까지 해 오는 걸 죽였다가는 겨우 다스려 놓은 여론이 다시 흔들릴 거야. 일단 맞아들여서 하는 양을 보다가 나중에 적재적소에 쓰려고 해.”

“알았어. 그러면 가능한 한 업무상으로든 생활 공간에서든 나랑은 동선 섞일 일 없게 배치해 주면 고맙겠어.”

“노력해 보지. 폰 크라우스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혹시 말해 줄 생각 있어?”

묻긴 했지만 필립은 상대가 답을 해 주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요른에게도 이미 물어봤지만, 그 하얀 마왕도 울상이 되어 시선만 내리깐 채 침묵했던 탓이다.

그 반응을 보고 필립은 둘 사이에 무언가 요른을 끼고 벌어진 사건이 있었으며, 그렇다면 막시밀리안은 결코 말을 내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 전직 성기사는 역시나 미간만 살짝 찌푸린 채 적당한 사교용 대화 주제를 골라 말을 돌렸고 필립도 적당히 응해 주다가 손님을 배웅해 돌려보냈다.

둘이 대화를 나눈 후 이틀이 지나, 그러니까 막시밀리안이 이사를 나간 지도 일주일은 더 흐른 후에야 그로쉔 수도 성벽 위의 보초병 중 한 명이 성문 앞에 거지꼴로 선 거구의 사내를 발견했다. 그는 아무 짐도 없이 말은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두 발로만 서 있었고 등에는 누군가를 업고 있었다.

“열어!”

다 쉰 목으로도 그는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원래 전송 마법으로 음성을 전해와야 할 거리를 생목으로 해결한 것이다.

“성문을 열어 주시오!”

보초병은 잠시 고민했다. 전 같으면 보초병이 순찰병에게, 순찰병이 조장에게, 조장이 분대장에게 보고하고 또 중간에서 논의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 필립에게 연락이 가기까지는 적어도 몇십 분은 걸렸으리라. 그러나 보초병은 정신을 집중해 바로 마왕께 빌었다.

필립의 사택 식당에 앉아 아침 식사로 흰 빵에 허브가 든 치즈를 발라 먹던 와중에 요른은 눈을 깜박거렸다.

필립이 시킨 대로 그는 열흘 전부터는 늘 의식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스스로 남의 생각을 읽지는 않지만, 남이 빌면 언제든 들어줄 수 있게끔 수동적인 통로만은 개방해 둔 채였다.

“시민군 병사들이 가끔 마왕님을 부르며 ‘기도’를 올릴 거야. 그러면 그걸 일단 내게 전해 주고, 내가 허가하면 기도를 들어줘.”

“응.”

“익숙해지면 네 스스로도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야. 당분간만 내 허가를 구해. 알았지, 마왕님?”

당시 참모는 장난스러운 투로, 그러나 진지하게 상대의 눈치를 보며 마지막 호칭을 덧붙였고 요른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게 끄덕거렸다.

보초병의 청을 듣고 마왕은 금방 필립에게 그 내용을 전했고, 허가를 받자 여러 병사들의 눈 귀를 서로 연결해 주는 동시에 필립과 다른 협회원들에게도 통로를 틔워 주었다. 아직 제 사택의 서재에 앉아 있던 필립은 고작 수 초 만에 병사들이 보고 들은 걸 자신도 전해 받고서 베스퍼 폰 크라우스를 수도에 들이라고 명을 내렸으며, 자신도 호위병 둘과 흑마법사 하나, 협회원 하나와 동행하여 몸소 성문 쪽으로 향했다.

필립 일행이 성벽 안쪽으로 다가오는 동시에 성문이 열리는 걸 내려다보며 보초병은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 전 협회에서는 공문을 내어 새로운 군사 소통 방법을 소개한 바 있다. 이제 날씨가 아주 많이 좋아진바, ‘기도’를 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구든 그분께 빌기만 하면 눈 귀를 서로 연결해 주실 것이니, 급한 상황에서는 평소의 공식 연락망 말고 이 방법을 이용하는 걸 권장한단다.

그때 병사들은 반신반의한 채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흑마법사들이 물론 점점 더 놀라운 전송 마법을 쓰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마법사다. 일반병도 그저 기도만 하면 마왕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니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얘기 아닌가.

‘그런데 이게 정말 되는구나.’

보초병은 자기 머리를 괜히 쓰다듬어 보며 생각했고, 깊은 감동을 닮은 신앙심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직 윗선에서는 마왕이 누구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병사 대부분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거리에서 모습을 뵈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눈 귀가 서로 연결될 때 신의 손이 매개하시는 듯한 경건한 느낌과, 눈앞에 그분의 자태가 드러나올 때의 느낌은 결코 착각할 수 없으리만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정식으로 강림하셔서 옥좌에 오르셨으면.’

“베스퍼 폰 크라우스 경?”

성문 안쪽 광장과 연결된 빠듯한 입구에서 필립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며 불렀다. 커다란 사내는 절룩거리면서도 형형하게 앞만 쳐다보며 필립의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호위병이 경계하다 못해 검을 뽑기 직전에 무릎을 꿇었다.

“도와주십시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등에 업었던 자를 천천히 앞으로 돌려 바닥에 눕혀 놓았다. 감싸고 있던 천을 벗기자 필립 주변을 지키던 호위병 둘이 눈을 찡그렸고, 협회원은 가볍게 신음했다. 흑마법사 소피아만 차라리 너털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필립이 소피아 쪽을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부작용에 된통 걸린 거죠, 뭐. 변형이 한번 생긴 다음 계속 증식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안에서 장기가 침식된 거라 처음에는 못 알아봤고, 천천히 번지면서 악화되었나 봅니다.”

“마왕의 힘을 빌면 이걸 낫게 할 수도 있다고 들었소.”

베스퍼가 제가 바닥에 내려놓은 자의 얼굴과 필립을 번갈아 쳐다보며 힘겹게 뱉어 냈다.

“이자는 수도에서 당신네 정보원으로 일하던 거 아닙니까. 그러느라 흑마법도 썼겠지. 써먹기만 하고 버릴 셈이오?”

“그건 아닙니다.”

필립이 가만히 답한 후 입술 새로 속삭여 왕을 불렀다.

하얀 마법사의 모습이 허공에 갑자기 솟아나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필립의 호위병들 중 한 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해도 저 신체 전송 마법이라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마왕께서 정식으로 즉위하시고 나면 범상한 자들도 누구나 마왕님께 빌어 신체 전송을 할 수 있게 될 거란다. 지금은 요른을 비롯해서 아주 뛰어난 흑마법사 두엇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다들 알지.’

호위병은 요른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협회에서는 아직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 줬지만, 이젠 말만 안 하지 다들 알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필립의 호위병은 그 요른이라는 자가 처음 그로쉔에 왔던 당시의 모습을 기억했다. 흑마법사들을 워낙 자주 대하다 보니 생리적인 거부감은 적었지만, 그래도 솔직히 사람치고 참 기이하게 생겼다고 느끼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건 본모습이 아니었던 거다.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분은 껍질을 벗듯 변하셨고, 지금도 변모하시는 와중에 있었다.

시야에 담기만 해도 숙연해질 정도로 순결한 형상 아니신가. 호위병은 마법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북녘 산꼭대기의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새하얀 의복,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랗고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한 뒷목.

고개를 돌리시면 살구 꽃잎 같은 두 뺨 위로 청명한, 설원의 그림자처럼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깜박인다.

호위병은 머리를 숙였다. 어느 왕이나 영주, 심지어 성황에게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 가슴 속을 눌러서 버티기가 어려웠다.

‘깨끗해.’

그는 속으로만 주워섬겼다.

‘맑아. 너무 맑다.’

우리 모두를 감싸는 가장 투명한 공기와도 같은 분. 병사는 거의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되새겼다.

필립이 요른에게 몇 마디 말을 전했다. 요른은 얘기를 듣고 곧 베스퍼 앞으로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가 데려온 병자를 살펴보았다. 새하얗고 성스러운 마물의 입술 사이에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사센 씨.”

병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요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베스퍼는 마법사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놀랐다.

그 반쪽짜리 마물인 게 분명하다고 베스퍼는 생각했다. 피부도, 체형도 눈동자 색깔도 조금씩 달랐고 머릿결은 비교도 할 수 없이 고왔으며 기묘한 백색의, 감미로운 공허를 닮은 체향마저 전해 왔지만 그래도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빈민가에 버려졌던 꼬질꼬질한 귀족 사생아를 데려다가 십 년쯤 엄격하게 가르치고 잘 입히고 씻기고 먹여 놓으면 비로소 꽃봉오리가 열리듯 본색이 드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변화랄까.

물론 마지막으로 본 지 한 달 정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며, 평생을 씻기고 전혀 다른 음식을 먹인대도 사람의 피부나 눈동자 색깔이 달라지는 법은 없으니 이건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변화이기는 했다. 그래도 눈앞의 마법사가 그 요른인 건 분명하다고 베스퍼는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마법사의 정체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스퍼는 상대의 무섭도록 깨끗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고 타인의 영혼만 비추어 돌려보내는 듯한 눈을.

“고칠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상대가 눈 녹은 물이 반짝이는 듯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다시금 움베르토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베스퍼나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었지만, 요른은 움베르토의 머릿속으로 조용히 전하고 있었다. 고쳐드릴게요, 사센 씨.

몸속도 눈도 목도 다리도 다 돌려드릴게요. 고마웠어요.

사센 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요른은 자신과 그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생각했다. 병자의 눈꺼풀이 문득 움직였다.

그러잖아도 끔찍하게 변한 몸으로 오래 수레에 실려, 수레가 망가진 후에는 말안장에 얹혀, 말이 죽은 후에는 한참을 업혀 오느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혼에서부터 그러나 또렷한 의지 한 줄기가 요른에게 전해져 왔다. 마왕의 잔잔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 * *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업가 협회원 한 명이 베스퍼의 임시 거처에 들러 인사를 건넸다.

폰 린하우스 가의 시내 별장 거실 소파에 앉아 베스퍼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크라우스가의 별장은 이미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베스퍼는 임시로 이곳에 묵기로 했던 터다.

베스퍼가 손을 들어 상대에게 자리를 권했다. 협회원은 건너편 의자에 앉아 황국군 전직 총사령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황국 수도에서 그로쉔 수도까지는 순수하게 거리로만 치자면 말을 달려 이틀 반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쉰 살의 기사단장은 닷새가 걸려서, 그것도 말도 잃고 넝마 꼴이 다 되어서야 마흔네 살의 연구소장을 데리고 도착했다.

‘마물들 때문이지.’

협회원은 생각했다.

‘그로쉔과 성황국 사이에는 특히 마물이 많지 않나. 마왕이 오셨으니 곧 그것들도 통솔이 가능하게 되겠지만…… 아무튼 이 자는 그런 지대를 병자까지 지키면서 건너왔으니까.’

대단한 성기사이긴 하다. 협회원은 조심스럽게 가져온 유리병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향긋한 냄새가 허공에 떠도는 걸 눈치채고서 베스퍼가 픽 웃었다. 협회원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폰 크라우스 별장 창고에 있던 물건입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고맙소.”

“외람되지만, 그럼 두 달 후에는…… 어찌하실 것인지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시키는 건 뭐든 할 테고 주는 대로 직책도 다 맡을 테니, 뭐든 시키시지.”

“예. 블랑쇼 씨가 한 번만 더 확인을 받아오라고 하셔서요.”

협회원은 독주를 탁자 위에 놓고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당신네가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베스퍼가 병을 노려보며 말했다.

“멍청한 놈이 제가 살고 싶지가 않다는데.”

협회원은 거대한 사내의 조금씩 새치가 섞이기 시작한 정수리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단 한 사람 때문에 그렇게 애써서 투항해 왔는데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다. 병자가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협회에서는 베스퍼가 투항할 가능성은 그간 거의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적인 면에서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영주로서든 기사로서든 맡은 일에는 충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대단한 충성심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책무를 일상처럼 누리고 사는 자였다. 그래서 그라면 끝까지 성황국 편에 붙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폰 크라우스도 결국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투항해 오고 말았다.

병자 본인도 이런 사태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던 듯했다. 그 자신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해도, 크라우스에게 린다가 내통자라는 걸 알려 주고 마왕군 측에 연락을 취해 마중을 나와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완벽하게 함구했다. 그리고 길 위에서도 상대더러 계속 돌아가라고만 우겼다고 한다.

‘아무튼 성황국은 끝났어.’

용사 후보에 이어 총사령관까지 사라졌으니 황국 수도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곱씹으며 별장 정문 앞에서 말에 오르려던 찰나 그는 등이 곧고 윤곽이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청년이 천천히 대로 한쪽을 따라 걸어오는 걸 보았다. 분명 기사의 형상으로 첨예하게 다듬어진 몸이었지만, 허리에는 검도 차고 있지 않았다.

‘동선도 겹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들었는데, 왜 제 발로 찾아오는 거지.’

협회원은 덜컥 근심이 들어 청년을 쳐다보았으나 상대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말 곁을 지나 베스퍼의 별장 문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협회원이 떠난 후 베스퍼는 침실로 들어가 병자를 내려다보았다.

진통제를 주사하고, 정령계 회복 마법사들이 어느 정도 조처는 취해 준 터라 막 도착했을 때보다 모습은 나아진 터였다. 얼굴은 무섭도록 파리했지만 숨은 제법 편하게 쉬고 있었다. 베스퍼는 침상 옆에 앉아 병자의 왼손을 잡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손가락이 부어 있어서 잡으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달이다. 베스퍼는 속으로 되새겼다. 술사들이 말하길, 병자의 수명은 길어도 두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베스퍼는 그때까지는 병자의 곁에만 붙어 있겠으며, 그다음부터는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 약속했다. 그는 마왕군의 이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충성심과 별개로 명령을 그저 따르고, 매일매일 책무를 수행하는 건 아주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건 그저 시간을 시계처럼 흘러가게 만드는 방식에 불과했기에.

베스퍼는 생애 처음으로 긴 휴가를 얻었다. 두 달간 그는 이 별장 안에만 머무르며, 임시 고용인으로 주어진 시민군 병사 두 명과 함께 옛 애인을 보필할 것이다. 그가 가능한 한 편안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게끔. 가만히 움베르토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이마에서 관자놀이 쪽으로 쓸어 넘겨주고 있으려니 병사 한 명이 와서 전했다. 손님이 한 분 오셨노라고.

“누가?”

“막시밀리안이라고요, 몇 주 전에 전향한 성기사 분입니다.”

병사가 눈을 찡그린 채 답했다. 그는 하인이 아니라 계약상의 임시 피고용인이었으며, 따라서 이 작자가 자꾸 반말을 찍찍 써 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스퍼도 금방 눈치채고 사과했다. 몸에 습관이 밴 것뿐 굳이 이곳 규칙을 따르지 않고 상대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고. 베스퍼는 움베르토의 귓가로 고개를 내려 금방 오겠다고 속삭이고는 병사더러 잠시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방 밖으로 나가 복도에서 손님을 맞았다.

“무슨 일이신지.”

“당신을 만나러 온 건 아닙니다.”

막시밀리안은 일부러 다섯 걸음쯤 떨어져 선 채, 검이 없다는 걸 강조하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베스퍼는 웃어 버렸다.

“맨손으로 검치호도 이길 수 있을 자가 검이 없어 봤자지. 뭐, 노력한 건 알아 주겠소. 날 죽이러 온 게 아니면 무슨 일이신지?”

“폰 사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자고 있소만.”

베스퍼가 답했지만, 곧 병사가 와서 일렀다. 사센 씨가 방금 깨어나셨다고.

“막시밀리안이 들른 걸 알더군요. 침실로 모셔오라 했습니다.”

“자네가, 아니 당신이 전해 주신 겁니까?”

“아뇨. 방금 깨어나셔서는 마왕님께 빌었나 봅니다. 마왕님이 사센 씨 눈을 저쪽 근위병 눈이랑 연결해 주셨든가 했겠죠.”

병사가 당연한 듯 답하자 베스퍼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 마왕이라는 자는 그렇게 남몰래 머리를 서로 연결해 줘 버리나?”

“생각을 나누는 건 아니고요…… 다만 눈 귀 정도는 서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빌리기로 정해져 있습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만 공유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병사는 반은 위로하듯, 반은 채근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빨리 새 질서에 적응하라는 식이다. 베스퍼는 한숨을 내쉬고는 막시밀리안에게 손짓하는 동시에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서로 곁에 안 가는 게 좋겠지. 부탁합니다.”

병사가 끄덕이며 막시밀리안을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이끌었다. 베스퍼는 망설이다가 그 등 뒤에 대고 덧붙였다.

“말은 거의 못 해. 너무 무리시키진 마시오.”

막시밀리안은 잠시 돌아보고 끄덕여 보이고는 계속 걸었다. 베스퍼는 그 등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저 젊디젊은 청년은 모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삼십여 년 전, 성황국 학원에서 움베르토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아직 열 살이었고 자신은 열여섯 살이었다. 마법 특기생으로 들어온 그 보드라운 금발의 어린애는 늘 혼자 숨어서 밥을 먹었고 가끔 상급생과 일없이 싸움이 붙어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알고 보니 학원을 같이 다니던 사센 가의 정식 자제들이 그 사생아를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움베르토는 워낙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기에 필기를 빌리거나 실기에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학원생들도 꽤 있었지만, 그러다가 자기도 눈총을 받을까 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오히려 마법과는 아무 상관 없는 베스퍼만 아이한테 접근해서 인사를 했다.

인사 말고도 아이에게 더 뭔가 해 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서, 그는 그냥 집에서 고급 과자를 가져와서 나눠 주고, 케이크를 사다 주고, 가끔 제 커다란 백마에 태워서 풍경이 좋은 곳을 골라 멀리까지 함께 달렸다.

학원을 졸업하고도 둘은 가끔 편지를 나누었고, 나중에는 둘 다 그로쉔 왕국령에 배치받아 왕국 마법사와 수도의 기사단장으로서 협력하게 되었다.

베스퍼는 작은 표범 같은 황색 눈동자, 햇살이 찰방이는 실개천처럼 반짝이는 백금발, 잔주름이 잡히도록 웃으며 어이없는 모욕도 장난스레 넘겨 버리는 눈매에 정신없이 홀려 버린 건 자기 쪽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움베르토는 학원 시절부터 베스퍼에게 반했으며 그를 좇아 그로쉔으로 온 거라고 했다.

결혼도 대를 잇는 것도 포기하고 크라우스가의 장자는 일찍부터 제 동생에게 후작 후계 자리를 넘겨주었다. 가풍으로 보아서든 그의 영지가 자리한 성황국 본토의 정서로 보아서든 동성과의 동거는 꿈꿀 수 없는 일이었던지라, 그는 제 성과 움베르토의 사택을 오가며 밤을 지냈으며,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반지를 사서 나누어 끼고 다녔다.

안타까우면서도 꿈같이 달콤한 팔 년이 흐르고, 여전히 거칠 것 없는 물처럼 흘러가고 있던 와중에, 둘은 검은 숲으로 견학을 가는 그로쉔 학원생들을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베스퍼는 주먹을 쥔 채 되새겼다.

내가 스물다섯 살이고 그가 열아홉 살이던, 그가 찬란한 스물다섯에 내가 막 서른을 넘겼던 시절도 있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서로를 껴안으면 엇갈림 없이 그 몸이 팔 안에 들어왔다. 사람이 그런 시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저 청년은 아직 모른다고 베스퍼는 믿고 싶었고, 깔보며 훈계마저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전직 기사단장은 금방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까 요른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반쪽짜리 마물은 마왕군에 와서야 제대로 숨 쉬며 살 수 있던 생물이었고, 막시밀리안은 오직 그를 위해 투항했다는 걸.

그 청년은 마치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바로 지금,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다가올 미래로부터 지켜 내야 한다고.

패배감에 지쳐서 베스퍼는 하릴없이 웃음만 흘리며 거실로 향했고, 손님이 나올 때까지 거기서 아까 협회원이 가져온 술이나 홀짝대며 기다리기로 했다.

막시밀리안이 침실로 들어가자 움베르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선을 문 쪽으로 향하며 미소 지었다. 병사가 쿠션 여러 개를 대어 등을 돋워 준 덕에 살짝 기대앉은 듯 상체를 일으킨 채로. 막시밀리안은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원래 베스퍼가 앉아 있었음 직한 의자를 흘깃 보고는 멀찍이 치워 버리고 다른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실례합니다. 나갈 때는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몸은 어떠신지요.”

그러나 움베르토는 답하는 대신 부어오른 왼손으로 시트만 툭툭 치며 웃었다. 청년은 그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목의 오랜 흉터가 새로 덧나 악화된 모양이었다.

“왜 치료를 거부하신 겁니까. 요른의 힘이면 다 고칠 수 있는데요.”

막시밀리안은 어떻게 대화를 끌어갈지 고민하면서도 일단 물었다. 저런 손으로는 펜을 주어봤자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마왕께 빌어 머리를 연결해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수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이제 그저 마왕의 수많은 백성들 중 한 명일 뿐이니, 빌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 신민의 머리를 연결해 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빌고 싶지 않았다. 청년은 대신 움베르토의 손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몸을 고치고 싶어서 전향한 줄 알았는데.

한 달 반쯤 전, 성황국에서 자택 초대를 받고 움베르토가 내통자일 수도 있겠다고 처음으로 짐작했을 때, 막시밀리안은 순식간에 이해했다. 사생아인 데다가 저런 몸이면 마왕의 힘에 희망을 걸어 볼 만도 하겠다고.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그 희망을 내쳐 버린 건가. 그때 움베르토의 손이 움직였다.

아우구스틴. 왼손 검지가 힘겹게 시트 위를 움직이며 이름 하나를 썼다. 성황이 강림하기 오십여 년 전,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자신도 불구가 되었던 페랑의 중세 문인. 당시 경험을 자전적으로 기록한 <고백록>으로 유명하다.1) 그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성황의 시대에 그의 저작의 유통이 일반에 금지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구절이 있다.

막시밀리안은 동감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는 했고, 불쑥 고백하듯이 말을 꺼냈다.

“요즘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움베르토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웃고 싶었던 것 같다. 병자가 결국 어두운 피를 토해 내기 시작하자 막시밀리안이 일어나서 병사를 불렀고, 언제부터인지 문 옆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베스퍼도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금방 곁으로 다가왔다.

막시밀리안은 사실 이제 별로 베스퍼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 생애 유일하던 자를 잃을 테니 겪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움베르토에 대한 증오는 그가 실려 왔던 날 그 몰골을 보았을 때 이미 대부분 삭아들었다. 남이 보기에 그 죄인, 성황국에서 거의 십 년간 인체 강화 실험을 도맡아 반복했던 연구소장은 자기 자신에게 꽤나 적절한 벌을 내리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벌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복도를 빠져나와 별장 밖으로 나오면서 막시밀리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푸른 환각이 아니라, 하늘과 자신의 눈 사이의 공기를 어떻게든 직시하려는 듯이. 성황국은 끝이다, 그는 생각했다. 총사령관이 투항한 데다가 강화병을 만들어 주어야 할 연구소장까지 사라졌다.

황국 수도에서는 시민 봉기가 성공할 것이고 그들은 마왕군에게 안에서부터 문을 활짝 열어 줄 것이다. 성황은 제 한 몸과 측근 몇을 챙겨 어디론가 망명할 수는 있겠지만, 성황국 체제는 몰락하리라.

그리고 저 공기처럼 투명한 왕이 대신 그 옥좌에 오를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그렇게 온 대륙에 퍼진, 모두가 평등하게 숨 쉬는 가장 맑은 공기를 계속 숨 쉬며 살아갈 수도 있으리라. 그건 무척 순결하고 올바른 일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몹시도 유려하게 가다듬어진 문장 몇 개가 그의 뇌리를 마치 금지 마법의 주문처럼 스쳤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읽었던 책 속의 한 장(章), <허공의 성>에 나오는 문장들. 그는 이제 필립이 주었던 아동용 소설은 다 읽고 학생 교육용 소설 중 모험물 하나를 골라 읽는 중이었다.

공기 속에서 아무도 못 보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미소를 품었다가, 전직 여단장은 곧 고개를 내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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