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장 무대) (18/30)

-2장 무대

1. 

막시밀리안은 성황국 수도의 제 방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손님을 맞이했다.

문을 열어 줄 고용인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일으켜 제 손으로 문을 열어 주었고, 도로 방으로 들어오면서 상대에게 쿠션 딸린 의자를 하나 권했다. 필립 블랑쇼, 며칠 전 투표를 통해 정식으로 대륙 통일 공화국의 수상 자리에 오른 자가 들어오며 방을 둘러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수도에 돌아온 이래 움베르토의 옛 사택을 빌려 쓰고 있었다. 프란첸 별성과 그 규모를 대면 고래와 쥐 꼴이고, 필립의 기준으로도 비좁을 정도로 작고 단출해 보이는 방이었다. 필립은 의자 등받이를 덮은 벨벳 한쪽에 좀이 슬기 시작한 걸 확인하고는 걸터앉으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밀리안.”

이름을 부르자 흑발 청년은 똑같이 생긴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맞은편에 앉은 후 필립과 시선을 맞추었고, 미소를 띤 채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를 던져 왔다.

“잘 지냈어?”

필립은 저주에서 거의 풀려나 청아한 빛을 되찾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처음 그로쉔 수도로 투항해 왔던 때를 새삼 돌이켰다.

그곳에서 저 전향자는 그냥 막시밀리안, 혹은 막시로만 불렸다. 마왕군에서 정식으로 직급은 받지 못한 채, 성기사 군복은 도착한 날 바로 벗어 버렸고, 제 성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바람에 프란첸으로 불릴 일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름이나 애칭으로 부르면서도 필립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를 딱히 친근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이름에서 성만 떼어 낸다고 대귀족 독자에 초일급 성기사였던 사람이 갑자기 평범해 보일 수는 없지.’

생도 시절의 기억도 함께 겹치는 바람에 수상은 픽 웃었다. 입학식 날, 열다섯 살의 기사 생도를 홀에서 처음 만나 말을 나눈 후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인정했었다. 이상적인 귀족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과 같은 인물이라고.

운 좋게 부모만 잘 만난 속인이 아니라, 신분제 사회를 그 존재만으로도 옹호할 수 있을 만큼 갈고닦인 자.

‘시민부대원 중에도 그를 보고 소작농이나 성 고용인, 종자로 지내던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자가 있었으니 말 다 했어.’

신시대로 완만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귀족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데에 페랑의 사업가 협회원들은 처음부터 모두 동의했었다.

사업가 협회는 새 시대를 원했지만, 구시대의 모든 것을 미워하지는 않았으며, 자신들이 신분제의 잔재를 완벽하게 몰아내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듯이 판을 짤 수 있으리라고도 믿지 않았다. 민중 대부분은 ‘훌륭한’ 귀족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존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급변을 강요했다가는 불안만 퍼질 게 뻔했던 탓이다.

그래서 마왕군은 각국 도시를 차례차례 손에 넣으면서도 가능한 한 직계 왕족만을 척결했고 귀족에 대해서는 그 행적에 따라 조처를 달리했다. 평판 나쁜 귀족은 혹독하게 처벌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는 자들은 남겨서 포섭하려 애썼다. 최소한 과도기에는 그들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고 느낀 탓이다.

단, 그로쉔 왕국에서는 귀족들이 회유의 손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끝까지 저항하려고만 들었기에 마왕군은 거의 학살극을 벌여야만 했다. 그 후폭풍을 다스리는 건 쉽지 않았고, 통일 공화국이 들어선 지금도 그로쉔 민중은 마왕군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랬기에 수상은 이 제 발로 투항해 온 데다가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그로쉔의 젊은 대귀족을 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황국에 입성한 후부터는 프란첸이라는 성도 다시 사용하게끔 강제했으며 거처도 돌려주려 했고, 몇 번이나 관직도 권했다. 그런데 다 거절하더니 이제는 아예……. 필립은 속이 살짝 울컥하려는 걸 누르며 인사에 답했다.

“그래. 나야 잘 지내지. 그런데 넌 아니었나 보네. 왜 떠나려고 했어?”

필립이 물으며 상대의 암회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성황국을 배신했으면서 공화국도 떠나면 어디로 가게. 다른 대륙에라도 건너가려고?”

“그건 네가 알 필요는 없잖아.”

“목적지도 없었지?”

묻다가 수상은 제풀에 피식 웃어 버렸다.

“넌 참……. 그래, 그럼 다시 묻지. 떠나려는 이유가 뭐야? 뭐가 맘에 안 들어서 그래.”

“맘에 안 든 건 아냐. 너희가 베풀어 준 친절에는 감사하고 있어. 다만 이제 됐다 싶어서.”

“뭐가.”

“말했지만, 난 요른이 잘 적응할지 걱정되어서 함께 투항했던 거야. 초반에는 아무래도 내가 필요할 거 같아서.”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네 덕분에 요른은 이제 완벽하게 적응했어. 석 달 만에 훌륭한 왕이 되었지.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여전히 나만 보면 태도가 달라지잖아. 그러니 요른을 위해서든 공화국의 안정을 위해서든 내가 떠나 주는 게 옳…….”

조곤조곤 이어 가다가 그는 필립이 갑자기 자기 결 고운 갈색 머리를 벅벅 긁어 다 흐트러뜨리는 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

“너 한 번만 더 옳으니 그르니 하면 팬다.”

필립이 씹어 뱉어 내듯이 하며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먼지떨이로 패버릴 거야. 멍청아, 너 질투하는 거잖아. 너 빼놓고 왕께서 나랑만 사이좋은 꼴은 도저히 더 못 보겠어서 도망가겠다는 거지?”

“그런 게 아니…….”

“아, 못 봐주겠어, 이러다가 필립 저 새끼 죽여 버릴 거 같아.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나가야겠다, 이거잖아. 뻔히 다 보이는데, 그런 주제에 뭘 그딴 얼굴로 진지하게 주워섬기고 있냐? 넌……. 진짜 생도 시절부터 왜 그러냐?”

“아니, 정말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그 이유도 있긴 하다는 거네. 그럼 네가 통틀어서 제대로 설명해 봐. 들어 주지.”

필립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이 에둘러서 사실 핵심은 빼놓고 얘기한 걸 상대가 차근히 풀어 주길 기다렸다. 왕이 그를 볼 때 ‘달라진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입술만 몇 번 달싹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고, 수상은 혀를 쯧 찼다.

“진짜 저거, 융통성 없는 그로쉔 놈들 중에서도 제일 그로쉔 놈 같은 새끼. 그 짓 좀 하지 말라고 소설책 잔뜩 던져 줬는데 읽고 나서도 똑같…….”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망할 소설책들이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귓가에 나직이 지적하는 음성이 닿아 왔다.

“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필립, 넌 그동안 욕이 지나치게 늘었어.”

“…….”

이 마당에 말투를 지적하고 싶은가. 하지만 돌아보니 막시밀리안이 진심으로 채근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통일 공화국의 수상이 아무리 사석에서라도 그렇게 욕을, 그것도 아무리 농담이라도 타 지역을 폄훼하는 듯한 욕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는 뜻이리라.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 깐깐한 놈을 국방장관직에 앉혀 놓으면 참 좋긴 했을 텐데. 갈색 머리의 청년은 눈을 잠시 내리감았다가 훅 불어 냈다.

“야, 막시밀리안.”

“응.”

“내가 너 붙잡은 거 아니야. 난 너 도망가려는 거 눈치도 못 챘어. 사방에 눈 귀가 있으신 분, 마왕님 명이셨다.”

“그랬군. 네가 좀 말려 드리지 그랬어.”

“내가 왜?”

막시밀리안은 답하지 않고 다만 필립의 녹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필립 쪽이었다.

“아무튼, 왕께서 곧 직접 이쪽으로 오신다는데, 어디 잘해 봐라. 엄청…….”

말하며 필립은 훤칠한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픽 웃어 버렸다.

“엄청 화가 나셨어.”

웃음에 씁쓸함이 묻어나기 전에 그는 얼른 등을 돌려 방을 나섰고, 문 앞을 지키고 선 병사들더러 막시밀리안이 도망치지 못하게 잘 지켜보라고 다시 한번 일렀다. 호위병을 거느리고 건물 밖으로 내려가는 수상의 걸음은 다소 무거웠다. 흑발의 여단장이 영영 사라져 버리길 바라는 마음도 그의 안에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신왕이 어제저녁 희뜩하게 광휘를 발할 정도로 분노해서 막시밀리안을 당장 잡아 오라고 명했을 때도, 사실 필립은 말리고 싶었다. 가게 내버려 두시라고 간언하고 싶은 지극히 사적인 충동이 혈관 속을 타고 돌았다.

막시밀리안의 질투가 그 자체로 방향이 틀린 건 아니다. 고삐를 받아들며 필립은 생각했다. 그는 감정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저 프란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민하고 유연한 자였고, 자기 안의 변화를 받아들여 존중하게 된 지 오래였다.

‘제 감정은 도무지 감당을 못해서 헤매는 놈이 남의 건 빨리도 알아차리네.’

짐짓 가볍게 투덜대며 말에 올랐지만 속은 진지하게 어두워진 채였다. 그 고귀한 생물이 손에 들어온 지 석 달, 대륙 통일에 성공한 지 한 달 남짓. 공화국의 수상은 그를 만민의 왕으로 섬기겠다는 의지를 점차 잃어 가고 있었다.

차라리 독방에 숨겨 두고 혼자 안고 싶었다.

* * *

한 달 전, 그로쉔 왕국 수도. 시민군 치안 부대 병사의 보고를 듣자마자 필립은 금방 말에 올랐다. 성황국의 용사 후보가 어떤 희멀겋고 꼬챙이 같이 마른 마법사를 데리고 수도 외곽에 나타났다, 그래서 일단 둘 다 체포해서 유치장에 넣어 두었다는 내용이었다.

필립 블랑쇼가 사택으로 쓰던 그로쉔 수도 외곽의 별장에서 전(前) 왕국경찰서 본부, 현재는 시민군이 치안 업무를 볼 때 활용하는 건물까지는 말을 타면 천천히 달려도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층 유치장 안의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전향자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필립은 걸음을 재촉했지만, 철창 곁에 다가가서는 충격에 굳어서 멍하니 멈춰 섰다.

요른 때문은 아니었다. 필립은 요른이 그 모양 그 꼴로 곰팡이 핀 음지 식물처럼 컸으리라고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며, 수도의 내통자들을 통해 최근 스케치도 몇 점 받아보았기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 막시밀리안이 이런 몰골이 되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저주라는 게 무섭기는 하군.’

살짝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참모는 철창에 바짝 붙듯이 다가가서는 먼저 요른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요른.”

요른은 답하지 않은 채 살짝 움츠리며 프란첸 쪽으로 몸을 붙였고, 막시밀리안도 그에 응하듯 마법사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팔 안에 싸안았다.

필립은 헛웃음을 쳤다. 막시밀리안이 팔은 미동도 안은 채 고개만 들어 철창 밖의 상대를 쳐다보았고, 필립도 그 시커멓게 증오에 타버리다시피 한 암회색 눈동자를 마주 응시했다.

젊은 참모장은 그로쉔 학원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막시밀리안은 필립에게 대놓고 살의를 보내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 살의는 무서우리만치 차가워 아무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던 반면, 지금 느껴지는 건 광인이 무차별적으로 쏘아 대는 증오에 불과했다.

반사적으로 등에 땀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으나, 머릿속으로는 필립은 이런 건 별로 겁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미치기 직전의 맹수 같은 것에도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오랜만이야, 막시밀리안.”

말하며 참모는 철창 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막시밀리안은 그 손을 흘끔 보았다가 다시 요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몰락한 성기사의 표정이 조금씩 잦아 들어갔다. 그는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이, 아니, 이미 수십 번을 더 결심한 데에 한 번 더 마침표를 찍듯이 눈을 깊게 내리감았다가 떴고,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마주 손을 내밀어 왔다.

“오랜만이야, 필립 블랑쇼.”

“뻔뻔하네?”

닿을 듯 말 듯 한 찰나 필립이 손을 도로 쑥 빼내며 뱉어 냈다.

“그때 사람을 그렇게 내쫓아 놓고 뭘 오랜만이야. 나야 너한테 그렇게 인사할 수 있지만, 넌 안 돼. 양심이 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

“와, 무섭다. 부수고 나와서 나 죽이겠다?”

참모는 그러나 킥킥 웃으면서 간수에게 손짓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해서는 금방 유치장 안으로 들어왔고, 흑발 청년을 덥석 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생 많았어.”

필립은 몸의 선은 가늘고 영 길쭉하게만 호리호리했지만 키는 막시밀리안보다도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더 컸다. 아직 성기사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로 멍하니 서 있는 자의 귓가에 참모장은 다시 한번 또렷하게 전했다.

“알아. 너도 고생 많았잖아. 잘 왔어. 와 줘서 고마워. 이젠 괜찮아. 내게…….”

필립은 팔을 풀고 두 전향자를 번갈아 보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내게 맡겨줘.”

마왕군 진영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막시밀리안은 깨어나 눈을 뜨고 침대 옆자리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요른과 함께 손을 잡고 누워 있었던 건 꿈일 뿐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욕실에서 간단히 몸을 씻고는 어제 필립이 계약직 고용인을 시켜서 건네주고 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떻게 안 건지 성황국에서 그가 즐겨 입던 어두운 색조의 상하의에 잔잔한 문양이 들어간 조끼, 흑색 재킷, 보기에 단정하면서도 편안하고 튼튼한 구두의 조합을 그대로 지켜 주었다.

어제 필립은 사실 그더러 요른과 한방에서 자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 왔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그게 떠보는 말이라는 걸 알았고, 바로 거절했다.

“안 돼.”

“왜?”

막시밀리안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필립은 만족한 듯 웃으면서 요른과 그에게 제 사택의 손님방 하나씩의 열쇠를 각각 내어 주었다.

사택이라 해도 물론 원래 필립 자신의 건물은 아니다. 그로쉔 수도에는 귀족이 피난을 가면서 버리고 간 별장도 성도 많기에 필립은 개중 하나를 쓰고 있었다. 막시밀리안도 아는 가문으로, 영지의 수입에 비해서도 쓸데없이 큰 별장을 지어 놓고 계속 확장 공사까지 하고 있었던지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았던 터다.

‘남 좋은 일만 해 놓고 도망갔군.’

생각하며 막시밀리안은 방 밖으로 나와 요른이 있는 쪽 손님방으로 바로 걸음을 돌렸지만, 병사 겸 자택 고용인이 막아섰다.

“지금 마법사분께서는 블랑쇼 경과 얘기 중이십니다.”

“경이요?”

“아니, 블랑쇼 씨랑요.”

병사가 얼굴이 붉어져서는 얼른 말을 고치는 걸 보며 막시밀리안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자택만 해도 그렇지. 네 페랑 저택은 더 컸을 거 아닌가, 필립.’

페랑 사업가들의 사치는 오래전부터 전 대륙에 그 악명이 자자했다. 성공한 자들은 웬만한 소귀족의 성보다 더 큰 저택을 지어 화려한 물건들을 안에 들여 놓곤 했다. 그로쉔은 평민 소유의 저택과 정원 규모에 엄격하게 제한을 두었지만 페랑은 그런 법마저도 없었던 탓이다.

페랑 수도 서편에 자리한 블랑쇼 가의 대저택은 개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라 외국에까지 각종 소문과 함께 스케치까지 흘러들어 오곤 했다. 저택 자체도 아름답지만 수집품도 대단하며, 계약직 고용인 수도 지방 영주의 하인 머릿수쯤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원 딸린 대저택을 짓고 관리는 고용인에게 맡기는 것도, 카펫이나 도자기, 예술 작품, 장서 따위로 그 안을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야. 오랜 귀족 문화를 돈으로 흉내 낸 셈이지.’

막시밀리안은 걸음을 돌려 자택을 빠져나가며 되뇌었다.

‘사업가들은 독창적인 문화는 없어. 늘 자기 자신이 귀족이 될 수는 없는 걸 한스럽게 여겨 왔을 뿐. 네 머릿속은 다를까, 필립. 네 신세계라는 게 과연 구세계의 귀족과 왕족을 그저 사업가들로 바꿔놓은 꼴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오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리라. 필립과 자택 살롱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던 약속을 돌이키다가 막시밀리안은 문득 자기 방에 쌓여 있던 책들에 생각이 미쳤다.

필립이 어제저녁에 직접 들러서 주고 간 것들이다. 제목으로 보아 자료집이나 논문은 아닌 듯했다. 페랑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소설이라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긴 했지만, 그는 아직 굳이 손을 대어 책장을 열어 보지는 않았다.

성을 나서 몇 걸음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막시밀리안은 바로 느꼈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마왕군이 이곳을 점령해 임시 정부를 세운 건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배치며 거점이 달라진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시청 앞 광장의 기둥에 붙어 있는 벽보 앞에 멈춰 섰다.

기둥 끝에는 새의 조각상이 올라앉아 있었고, 그 아래 벽보에는 문장 몇 줄, 그리고 그 밑으로 더 긴 이야기가 보다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막시밀리안 자신도 익히 아는 발탄더스 전설이었지만 해석이 살짝 달랐다.

막시밀리안은 원래 자신이 알던 문장을 되새겼다. 땅이 하늘이 아니며 하늘도 땅이 아닌 곳, 그 틈새에 무색의 날개를 펼친 악마가 산다. 그의 안에서는 땅과 하늘도 서로 공평하게 섞이며 한편 그를 문처럼 통과하면 땅도 하늘로, 하늘도 땅으로 변신한다.

풍뎅이도 국왕으로, 국왕도 지렁이로 변한다.

법관도 사형수로, 사형수도 경찰로.

사랑도 혐오로, 혐오는 무관심으로.

질서가 가장 엄격하게 갈라 놓은 틈마다 도사린 어둠.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것들마저도 서로 섞어 버리고, 하나를 전혀 다른 하나로 변신시키는 혼돈. 그러나 이 벽보의 해석은 달랐다. 여기서 발탄더스는 악마가 아니라 신이었다.

아무리 이질적인 것들 속에서라도 서로 같은 것을 발견해 내는 신.

“성황이나 천제 따위보다 훨씬 더 상위의 신이라고 하덥니다.”

누군가 어깨 곁에서 말을 걸어오길래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돌렸고, 그 흑마법사를 알아보았다. 지난 생애에서 베스퍼에게 잡혀 들어와 고문받던 자였다.

이름은 소피아던가.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설명했다.

“성황은 모든 걸 서로 엄격하게 갈라 놓음으로써 질서를 창조했지요. 하지만 그것들이 정말로 서로 다르기만 하다면, 어떻게 한세상에 함께 있어 영향을 주고받겠습니까. 모든 건 사실은 어떻게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거죠. 당신과 필립이 아무리 서로 다른 개체라 해도 같은 ‘인간’이듯이.”

소피아는 뭉그러진 손바닥 위로 불꽃을 하나 밝혀 보였다.

“표범과 거미, 돌과 꽃, 불과 물, 심지어 죽음과 생명도 깊은 곳에서는 결국 하나라는 겁니다. 다만 우리 같은 범상한 인간은 그 둘이 어떻게 하나로 흐르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왕만이 알고 계시죠. 그래서 그분께서는 불도 물로, 물도 불로 변신시키고 서로 섞어 내실 수도 있는 겁니다.”

“절대적인 보편자라는 뜻이군요.”

막시밀리안이 맞받았다.

“그를 통하면 땅마저 하늘로 변신한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의 안에서는 땅이든 하늘이든 하나로 통한다는 얘기죠. 그러나 그건 당신 해석은 아닐 거 같은데요. 필립이나 사업가 협회의 입장입니까.”

“잘 아시는군요.”

“사업가들이 할 만한 생각이니까요.”

청년이 담담히 말하자 흑마법사도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막시밀리안이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생각도 읽어 낸 모양이다.

사업가들은 마왕의 힘이 아니더라도 오래전부터 절대 보편의 존재를 알아 왔다. 금전 말이다.

사업가들이란, 특히 대사업가들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게 돈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들에게야말로 땅도 하늘도, 불도 물도, 거미도 나비도 표범도, 광석도 꽃도 그저 모두 돈일 따름이리라. 돈으로 계산하면 생명과 죽음도 상호 교환이 가능하고, 이것을 팔고 대신 저것을 사서 물소를 카펫으로 변신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 마왕의 힘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파악하려 들 수밖에. 막시밀리안은 벽보를 다시 살피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은 동의하기 힘들 구상이다. 토지를 기반으로 한 계급이니만큼, 성에 폰이나 투트가 붙은 자들은 영지와 국토 단위로 엄중하게 갈라진 질서를 신봉한다. 돈과 어음의 혼란스러운 물결을 타고 넘으며 살아온 사업가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결국 똑같아.’

왕족과 귀족도 제 구세계에 갇혀 꽉 막혀 있긴 하지만, 사업가들의 소위 신세계도 제 머릿속에만 갇혀 나온 구상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는 아무래도 필립이 요른을 이런 틀에 밀어 넣어 맞춰내겠다는 데에는 찬성할 수는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게 가능하리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청년은 흑마법사 쪽으로 눈을 돌려 물었다.

“당신도 이런 구상에 찬성하십니까?”

“관심 없어요. 우리는 성황국만 멸망시킬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소피아가 답하고는 곧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실용적으로 보아 쓸모가 없는 생각은 아니지요. 프란첸 경, 마물들을 보러 가시겠습니까?”

“이제는 경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흑마법사는 비웃듯이 한참을 킥킥거리기만 하다가 턱짓했다.

“따라오십시오, 프란첸 경. 우리가 마물들을 어떻게 군대로 모아들인 건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끄덕거렸다. 비법이 뭔지 성황군 내에서도 논의가 있어 왔던 탓이다.

검은 숲과 그 부근에만 은둔해 살던 시절, 흑마법사들은 마물의 제작에만 집중했을 뿐 통솔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륙민 누가 죽든 많이 죽기만 한다면 상관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들은 마물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아무 데나 풀어놓기만 했다.

페랑의 사업가들과 협력해서 정식으로 성황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자기 편과 남의 편을 나눠야 할 필요가 생긴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마물을 통솔하는 법을 익혀 군으로 끌어들였다. 그 방법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흑마법사라고 해도 원래 풀어 두었던 마물을 전부 다 포섭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아가 강해 통제하기 어려운 마물은 손아귀에 넣지 못했으며, 가끔 군에서 도망치는 마물도 생겨 성 밖의 대지를 멋대로 쏘다녔다.

‘덕분에 도시 경계 지역…… 특히 국경 지대는 황무지가 되어 버렸지.’

성기사 군단이나 흑마법사의 비호가 없으면 도시 사이를 오가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고, 덕분에 황국의 교통망과 정보망도 망가져 버렸다. 막시밀리안이 돌이키는 동안 소피아가 앞서 걸으며 덧붙였다.

“필립이 당신에게 오늘 중으로 우리 마물 병사들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른 따라붙은 거죠.”

둘은 대여소에서 말을 빌려 탄 후 도시 서쪽 외곽의 대형 농장 같은 곳으로 이동했다. 농장은 서쪽에 둘, 동쪽에 셋, 남쪽에 하나가 더 있다고 한다.

거대한 신축 축사에 들러 막시밀리안은 습관적으로 이제는 등에 메고 있지도 않은 마검을 찾았다. 마물들 수백 마리가 축사 안팎에 온통 얽히고설켜 몸을 틀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소피아가 손을 저어 보였다. 다들 온순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통솔하는 건 어려웠어요. 날씨가 많이 좋아진 덕에 일이 쉬워졌습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

“서로 머리를 연결해 주었습니다.”

소피아가 답했다.

“당신들이 전쟁 때 보는 건 연결이 끊어진 상태의 모습입니다. 개체로만 남으면 마물은 흉포해져요. 그 꼴이야 당신네 성기사가 우리보다도 오히려 더 익숙하겠죠. 하지만 서로 머리를 연결해 주면 다릅니다.”

말하면서 그녀는 그 기이한 생물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질해 보였다.

“봐요. 이들은 하나하나가 다르죠.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소나 개 같은 보통 동물은 부모며 동족이 있지만, 이놈들은 없단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유일한 하나의 종이에요.”

“그렇군요.”

“그러니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흉포해지는 것도 당연하죠. 자꾸 남을 잠식하려 드는 것도 그렇고.”

“거기까지 생각해서 만드신 겁니까?”

“아뇨. 하지만 만들어 놓고 행태를 관찰하다 보니, 참 잘됐다 싶었습니다.”

소피아가 문드러진 입가로 킥킥 웃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머리를 연결해 주면 다릅니다. 수십, 수백에서 수천 마리씩…… 더 많이 연결해 줄수록 그들은 안정을 찾고 성격도 온순해지죠. 착해진단 말입니다. 당신네 기사도인가 뭔가에도 쓰여 있지 않습니까? 오직 보편타당한 격률만을 따르라고요.”

“그렇죠.”

“선이란 곧 보편타당이란 얘기 아닙니까? 그리고 보편타당이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타당한 거고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입술에 살점이 뜯겨 나간 틈새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물들조차 이렇듯 강제로 ‘모두’로 만들어 버리면 선해지지 않습니까.”

“필립은 앞으로 사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하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소피아가 끄덕거렸다.

“다 서로 머리를 연결해 버리자는 거죠. 혼자서는 생각이란 걸 아예 할 수가 없게끔, 누구든 늘 모두를 위해서만, 모두로서만 사고하게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 시민 공화국을 만든다든가 뭐라든가 하덥니다.”

“그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처음에는 꺼리겠죠. 그래서 눈 귀만 연결하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더군요. 그건 기본적으로는 정령계 전송 마법과 큰 차이도 없고, 실용적인 이점도 워낙 많으니 받아들이는 자도 많을 거라고요.”

“아시겠지만, 마왕의 힘은 그런 틀에만 갇힐 만한 게 아닙니다.”

막시밀리안은 지난 생애 마왕이 각성했을 때 성황국 수도 시내의 모습을, 그리고 어릴 때 성안에서 놀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 힘을 그런 식으로 길들이겠다고요?”

“힘을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마왕 본인을 길들이면 될 텐데. 그건 프란첸 경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피아가 말하자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필립은 개인적으로 마왕을 꽤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더군요. 왕께서 인간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계실 때 처음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사람에 대해서처럼 안타까워하는 면도 있어요.”

그녀는 웃으며 이어 갔다.

“필립은 그가 혼란과 파괴만 가져오는 운명을 맞는 건 싫은가 봅니다. 자기가 곁에 두고 잘 모셔서 군왕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그가 절대선으로 군림할 수 있는 세계를 주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살짝 후회하듯 내비친 적도 있습니다. 십 년 전에 그렇게 말했더라면 프란첸, 당신도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말하며 흑마법사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요른의 정체는 마왕군에서도 아직 우리 흑마법사들과 필립밖에 몰라요. 한편 당신은 성황국에서 내내 그의 정체를 감추고 지켜왔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곁에서 말이죠.”

청년은 답하지 않았다. 소피아가 물었다.

“이 결말에 만족하실 수 있겠습니까?”

“뭐가요.”

“마왕이 신세계의 선한 왕이 되는 결말에 말입니다.”

“글쎄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소피아가 웃다가 기침을 했다. 시신 냄새가 더 진하게 번져 오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은 문득 고개를 돌려 흑마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녀의 목구멍의 살점을 비벼 내는 것 같은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구세계에 멸망만 가져다 준다면 마왕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는 저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성황과 그 측근이 처참하게 죽는 꼴만 보고 나면 저희 흑마법사들은 마물들과 함께 다시 검은 숲으로 떠나 은둔하거나 자살할 겁니다. 필립도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와 저희는 서로를 이용할 뿐입니다.”

소피아도 고개를 돌려 막시밀리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거야 저희는 이미 다 잃었기 때문이죠. 당신은 남은 게 있잖습니까.”

아니오, 만족하지 못합니다.

저는 요른이 그런 틀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거라고도, 진정으로 행복할 거라고도 믿지 않습니다. 내 요른은……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말을 삼켰고, 대신 다른 질문으로 바꿔서 내놓았다.

“당신 생각에는 필립의 구상이 성공할 것 같습니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그녀는 말에 올라타면서 답했다. 막시밀리안은 굳이 올라타지 않고 기다렸다. 소피아가 먼저 떠나길 기다렸다가 마물들을 좀 더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 귓가에 한 줄기 음성이 전해져 왔다.

―당신 선택에 딸린 일 아닙니까?

청년이 놀라서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웃음소리만 남기고는 말머리를 돌려서 사라져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곧 축사에서 꿈틀대며 서로 얽혀 잠들어 있는, 혹은 얌전히 서로를 핥아 대고 있는 마물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더는 병사로서 쓸 일도 없는 이 생물들은 처분될 가능성이 높다.

아까 소피아는 검은 숲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많이 만들어 둔 걸 다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요른이 온전히 각성하고 나면 소위 정화도 가능해질 테니, 아마 해체해서 원래의 동물들로 되돌려 버리리라.

막시밀리안은 개중에서도 특이하고 어찌 보면 아름답달 수도 있는 몇 마리를 눈으로 추려 보았다. 기념품 비슷하게 몇몇쯤은 남겨서 부유한 자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자에게 팔거나 나누어 줄 법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 수도 있으리라. 청년은 되뇌었다.

네가 더는 내 요른이 아닌, 나도 네 막시밀리안이 아닌 세계에서.

네가 만민의 왕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나도 그저 그 신민 중 하나로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네 힘이 남긴 옛 추억을 기념하듯, 조그맣고 무해한 마물이나 한 마리 들여 살 수도 있다. 결코 해하지도 함부로 길들이지도 않고 가끔씩 곁만 내어 주며 살다가 언젠가 둘 다 늙어 숨이 끊길 수도 있으리라.

그런다 해도 나는 네 세계에 안겨 있다가 가는 셈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곱씹다가 막시밀리안은 마침내 말에 올라 시내로 돌아왔다.

“책은 좀 읽어 봤어?”

오후 네 시가 되자 필립 블랑쇼가 돌아와 막시밀리안을 사택의 살롱으로 초대했다. 그는 한쪽 소파에 손님을 앉히고, 고용인을 불러 차를 부탁한 후 저도 제법 반대편 긴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상대는 답이 없었다. 필립이 다시 이름을 불렀다.

“막시밀리안?”

“어.”

평복을 입은 청년이 눈을 들며 답했다.

“미안해.”

“응?”

“십 년 전 그로쉔 학원에서 널 쫓아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엥? 야, 나 유치장에서는 농담한 거야.”

필립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그때 너한테서 요른을 빼앗아 가려고 했잖아. 당연히 엄청 화가 났겠지.”

“빼앗아 가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내 것도 아닌데.”

“진심이야?”

고용인이 조용히 차를 양쪽 자리에 나눠놓고 나갔고, 필립이 자연스레 잔을 들어 올린 채로 상대를 넘겨다 보았다.

막시밀리안이 끄덕거렸다. 필립이 살짝 안심한 듯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더라도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넌 그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너한테 졌던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 어, 야?”

흑발 청년의 상체가 앞으로 크게 기울어지는 걸 보고 참모도 당황해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저주 때문이지? 가서 좀 쉬어. 얘기야 며칠 미뤄도 돼.”

“아니, 빠른 게 나아. 쉰다고 나아질 건 없어.”

“나아질 게 없긴 왜 없어. 치료를 받아.”

필립이 진지하게 말했다.

“요른을 데려와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너도 잃기 싫다.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용사 후보, 아니, 너희들 쪽에서 보면 마왕 후보라서 말이야?”

“응?”

“그렇게 보면 내가 치료를 안 받는 게 나을 텐데.”

막시밀리안이 다시 고개를 들고 상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라면 내 모친의 예언 해석 최종본을 어떻게든 입수해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만약 요른이 어떤 경위로든 성검이 되어 버리는 미래가 오면, 대신에 내가 마왕이 되어 줄 수도 있으니 인재라는 거 아닌가?”

참모장의 인상이 벌써 구겨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상관없이 이어 갔다.

“너희가 원하는 건 결국 마왕의 강림이니까 누가 되든 그건 상관없겠지. 그런 의미로 움베르토에게도 나를 살펴 두라고 일렀던 거 아냐?”

“어, 아니거든. 그리고 싫어.”

오만상을 다 찌푸린 채로 필립이 딱 잘라냈다.

“너 같은 마왕을 뭐에 쓰냐? 지금 네 꼴을 봐. 예언 해석을 안 것만으로도 세상이 다 밉고 싫은가 본데, 요른이 진짜로 성검이 되어 버리면 무슨 꼴이 되겠어. 상상도 하기 싫다.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세계지, 저주와 파괴가 아니야.”

참모장은 못 박듯이 말했다.

“요른은 완전히 다른 질서를 가져다줄 수도 있는 존재야. 반면 너는…… 그냥 미쳐서 앞뒤 없이 다 부수고나 다니겠지. 요른한테 들었어. 너 그쪽에서도 하극상부터 벌였다면서?”

“…….”

“네가 마왕이 되는 건 이쪽에서 정말 진심으로 사절이야. 헛소리 말고 얌전히 치료나 받아.”

“그래.”

막시밀리안은 픽 웃었다. 소피아한테서 들은 이야기 덕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필립이 아무나 마왕이 되어 주기만 하면 만족하는 게 아니라 다름 아닌 요른을 소중히 여겨 줄 사람이라는 걸.

막시밀리안은 오늘 아직도 요른을 만나보지 못했다. 필립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지금 시민병의 안내를 받아 시내를 둘러보는 중이라고 한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데도 안심이 된다. 전직 성기사는 새삼 느꼈다.

이곳 마왕군 주둔지에서도 아직 요른의 정체를 아는 자는 적다지만, 필립이 워낙 공고하게 명을 내려 둔 터라 누구든 그 괴이쩍게 생긴 생물에게도 다정하게 대해 줄 터였다. 게다가 정체를 들킨다 해도 위협은커녕 다들 오히려 받들어 모셔주리라.

성황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은 들었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편해진 채로 막시밀리안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신세계에 대해서는 소피아한테서 대충 얘기를 들었어. 하지만 난 요른을 알아. 그 힘은 그렇게, 뭐랄까, 얌전한 게 아닌데.”

“응. 길들여야지.”

필립이 서슴없이 답했다.

“나도 요른의 힘이 자칫 혼란만 야기할 수 있다는 건 알아. 네가 어릴 때 겪은 것도 그런 종류였겠지. 하지만 지금 그는 인간으로서 오래 살아왔잖아? 그러니까 우리를 이해해 줄 거야. 일단…… 요른은 인간만의 왕이 되어야 해.”

막시밀리안이 벌써 살짝 찌푸린 채 올려다보았지만, 필립은 그대로 이어 갔다.

“마물이나 다른 동식물은 끼어들어서는 안 돼. 요른한테는 사람들만 서로 연결해 달라고 할 거야. 그리고, 사람들 머리를 연결할 때도 절대로 마음 전부를 다 전해 달라고는 안 할 거야.”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하고서 흑발 청년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필립은 마주 보며 빙긋 웃을 뿐이었다.

“언어로 완성된 사고만 서로 전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그게 가능하긴 해?”

“응. 흑마법사들이 이미 걸러내는 방법을 연구해 왔으니까 그대로 쓰면 돼.”

필립이 상대의 안색을 살피며 자기 머리 한쪽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여기 어디 문장 단위의 입력부가 있고 이쪽엔 출력부가 있대. 뇌의 이 두 부분만 이용하면 된다는군. 말이 아닌 것까지 하면 온갖 억눌린 게 다 튀어나오고 정신없잖아. 그건 눌러놔야지.”

“……그래.”

“다들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욕망까지 서로에게 전해 버릴 테니 엉망진창이 될 거야. 솔직히 우리도 거기까지는 감당이 안 될 테고.”

막시밀리안은 상대가 일부러 마지막 말을 흘린 건지, 무심코 흘려 버린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필립, 혹은 협회원들은 자기들 머리까지 열어 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러나 참모가 곧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요른 자신의 혼도 그런 광기에 오염되어 버릴 수도 있지. 매개란 그 자체로는 워낙 순수해서 제가 전달하는 바에 물들기 마련이니까. 난 네가 걱정했던 것도 이런 게 아닌가 싶은데. 혹시 어릴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냐?”

청년의 안색이 순간 변했지만 필립은 모르는 척 이어 갔다.

“네 자신도 전혀 몰랐던 소원을 요른이 몰래 들어줘 버렸다거나. 진짜 악마처럼 말이야.”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탁자 위로 내린 채 답하지 않았다. 참모는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더니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래. 뭐, 하지만 사람이 어떤 어두운 소망을 품는 거 자체는 어쩔 수 없잖아. 마왕이 거기에 접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 반면 명료하게 언어로 된 사고만 전하다 보면 매개 자신도 정화될 거야.”

“마왕을 그런 식으로 길들이겠다는 거군.”

“막시, 미안하지만, 솔직히 네가 길들인 방식보다는 낫지 않나?”

필립이 웃었고 전향자는 기껏 쳐들었던 시선을 금방 도로 내리깔아 버렸다. 참모는 상대가 하릴없이 제 허벅지 옆에서 주먹을 쥐고 있는 걸 보았고 측은한 감마저 들었다.

‘여전히 흑백 논리인 녀석 같으니.’

그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왕 성황국을 배신까지 해 버린 마당에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온전히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으리라. 가진 힘을 다 쓰며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필립도 요른의 본질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인간만의 왕이 되고 싶어 할 리도, 개중에서도 말로 대화하는 자들만의 왕이 되고 싶어 할 리도 없었다. 한마디도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하는 광인이나 불구자는 물론이고, 사고랄 만한 게 마디의 팽창과 수축일 뿐일 지렁이도 인간 학자와 차별하지 않는 게 요른의 본질이다.

하지만 누구든 어느 정도는 길들어져야 한다. 필립은 생각했다.

사람도 태어나서 학교에 다니고 교육을 받아야 쓸모 있는 자가 되지 않는가. 마왕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순수한 혼돈으로서 태어났다 해도, 왕이 되려면 결국 신민에 군림하는 만큼이나 자기 자신에게도 군림하며 그 힘을 통제해야 한다.

‘나는 요른을 군왕의 길로 이끌어 줄 자신이 있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면 멸망뿐이잖아.’

필립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철저하게 억압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풀어 주는 것밖에 생각을 못 하나. 타협을 좀 배워라, 멍청아.’

“막시밀리안,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요른을 완전히 자유롭게만 풀어 주면 이 세상에 찾아올 건 혼돈 그 자체뿐이야. 넌 정말 그걸 원해? 아니, 잘못 말했나. 너는 정말로…….”

필립은 세상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찌푸리고 있는 청년에게 말을 바꿔 물었다.

“요른이 그런 운명을 짊어지길 원해?”

“나는…….”

막시밀리안은 말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앞으로는 네게 맡길게.”

“정말로?”

“그래.”

그는 스러질 듯한 숨을 간신히 불려 뱉어 냈다.

“이제 요른은 네 왕이야, 필립.”

“고마워.”

필립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막시밀리안, 좀 도와줘.”

청년이 묻는 듯이 올려다보자 필립이 문 쪽을 손짓했다. 둘은 복도를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요른이 곧 돌아올 거야. 아침에 얘기를 좀 나눠 보려고 했는데, 그게……. 내 말은 아예 들으려고도 안 하더라고. 그로쉔 학원 시절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거 같던데.”

“홀림 마법 탓을 해?”

“응. 차도 주고 과자도 줬더니 자기가 나한테 마법을 걸어서 꼬여 낸 줄 알더라고. 십 년 전이랑 똑같이 또 제 머리를 감싸고, 자기 안의 못된 괴물이 어쩌고저쩌고 중얼중얼하던데. 그래도 내가 안 물러가니까 이번에는 갑자기 눈을 새파랗게 뜨고 욕을 하면서 패악을 부리더라고. 네가 그러라고 가르쳐 줬던 거야?”

“……응.”

“그렇군. 덕분에 마왕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하고 방을 나왔어.”

“네가 마왕이다, 하고 바로 알려 주려고?”

“그건 아니야. 암시만 좀 주면서 일단 슬슬 친해져 보려고 했지. 그런데 잘해 주려고 할수록 겁에 질려서 닫아거는데 어떻게 해. 선물도 결국 하나도 안 받아 줬어.”

막시밀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끄덕거렸다.

“내가 해결해 둘게. 내일 다시 얘기해 봐.”

“고마워.”

필립이 감사를 표하고는 문득 발을 멈춰 상대의 얼굴을 돌아보았고, 그 암회색 눈동자를 제 올리브색 눈으로 밝게 들여다보며 진심을 담아 전했다.

“요른만이 아니라 너도 다시 만나서 정말로 기뻐, 막시밀리안.”

흑발 청년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필립이 손짓해 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최소한 당분간은 요른을 움직이려면 네가 계속 필요할 거야. 몸조리 잘해 둬. 내가 네 방에 가져다 놓은 책들 있잖아, 꼭 좀 읽어 보고.”

“그냥 소설 아냐?”

“너 평생 소설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적은 있어?”

“아니.”

답하면서 그는 굳이 성황이나 그로쉔 국왕의 정책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소설을 읽을 일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뭐하러 진짜도 아닌 이야기들을 눈에 담는 데에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순간 막시밀리안의 뇌리에 장면 하나가 스쳤다. 요른을 처음 만나기 직전에 시내 광장에서 샀던 서책 한 권을 샀던 기억.

그 너덜너덜한 책이 말하자면 소설이었으리라. 잠들기 전 어린애 머리맡에서 읽어 주는 용도의 동화 모음집.

중고 상점이다 보니 드물게 검열을 피해 나오는 책도 있었나 보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러고 보니 그 책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러나 전향자가 바꿔 답하기도 전에 필립이 먼저 말하며 계단 쪽으로 발을 돌렸다.

“난 회의가 있어서 나가봐야 해. 내일 아침에 보자. 요른 좀 부탁할게.”

“응.”

얌전히 대답하고는 막시밀리안도 제 방 쪽으로 발을 돌렸다.

요른은 저녁 식사 때가 다 되어서나 시민병의 호위를 받아 가며 다시 필립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새 옷에 새 신발을 신고 머리도 새로 다듬은 채였다.

막시밀리안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귀가 소식을 전해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요른은 영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머리 기장도 쳐내고 단정하게 정리한 탓에 얼굴이 훤히 다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푹 떨구고 복도를 걷다가 막시밀리안이 다가오는 걸 눈치채자 아예 소매로 낯을 가려 버렸다.

“요른.”

연한 청색조의 비단과 모직이 섞인 옷도, 새로 다듬은 머리도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고 막시밀리안은 다만 엄중하게 요른의 이름만 불렀다.

마법사는 얼굴을 가린 채로도 자석에 끌린 듯 주춤주춤 다가와 딱 두 걸음 앞에 멈추었다. 막시밀리안이 그 손을 끌어다가 제 방으로 데려갔다.

몇 번이나 타이르듯이 얘기한 후에야 요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들였다. 학원에서 카를과 린다가 그랬듯이, 이 그로쉔 수도에서는 필립이 막시 대신 지시를 내려 주는 대리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네가 홀림 마법을 쓴 게 아냐. 내가 필립한테 부탁해 둬서 그래.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줬던 거절하는 방법도 쓸 필요 없고, 여기서는 이제부터 나 대신 필립 말만 잘 들으면 돼.”

“하지만…….”

“요른.”

막시밀리안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새로 적응하느라 바빠. 네 뒤치다꺼리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네가 뭘 알아서 해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애써서 대리인을 찾아줬으면 얌전히 그쪽에 따라붙어 주기는 해야지.”

“아, 알아. 미안해.”

“내가 아무한테나 널 맡길 리가 없잖아. 날 못 믿는 거야?”

“아냐, 그런 건 아냐. 미안해. 그냥 갑작스러워서…….”

“내가 어딜 가는 건 아냐.”

요른이 거의 울 것 같이 더듬대자 막시밀리안이 다시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네가 필립 말 잘 듣는지, 시키는 건 잘하는지 못 하는지 늘 지켜보고 있을 거야. 필립도 내게 매일 보고를 해 줄 테고. 그러니까 잘해, 요른.”

하얀 생물이 결국 훌쩍대며 방을 나간 후 청년은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두워진 후에야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침대 한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웅크려 앉았고, 머릿속에서 속삭임 같은 생각이 계속 점멸하게 놓아 두었다. 네가 만민의 왕이 된 세계에서.

그저 신민 중 하나로, 네 세계 속 이름 없는 미물로 살다가 언젠가 생명이 다하리라. 그래도 네 세계에 안겨 떠나는 것이니 그걸로 됐다.

밤이 깊어서야 막시밀리안은 램프에 불을 켜고 몸을 누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침대 곁탁자에 놓여 있는 책 한 권에 시선을 주었다.

필립이 가져다 놓은 책 중 하나다. 표지에 금서 표식이 낙인처럼 깊이 찍혀 제목을 아예 지워 버린 터라 오히려 눈에 띄었다.

‘페랑은 소설 유통을 아예 금지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건 페랑에서조차 금지될 정도의 책이었나.’

집어 들면서 그는 생각했다.

‘필립은 성황을 척결하고 나면 소설이나 유희 문화도 완전히 되살릴 생각인가 보군.’

막시밀리안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목차를 넘겼고, 본문이 시작되는 곳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리고 고작 몇 분 뒤 얼굴이 벌게진 채로 도로 탁자 위로 밀어 놓았고, 멍하니 그 표지를 쳐다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손끝으로만 책을 들어 올려서는 멀찍이 떨어진 수납장의 맨 아래 서랍에 집어넣고 마치 악마를 봉인하듯이 열쇠로 잠가 버렸다.

* * *

두 명의 전향자가 그로쉔 수도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났다.

시민군은 아직 요른의 정체를 몰랐다. 프란첸과 함께 외모는 좀 기이하지만 뛰어난 마법사 한 명도 투항했다고만 공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차였고, 필립은 곧 사업가 협회원들에게도 정식으로 정보를 공개했다. 그들은 곧 회의를 열어 황국 도시들에 대한 공략의 방법도 바꾸기로 결정했는데, 마왕이 수중에 들어온 이상 굳이 처음부터 마물 군대로 밀고 들어갈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평화적인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단, 요른 본인만은 아직 자신이 마왕인 걸 모르고 있었다.

필립도 때가 이르다고 판단했고 막시밀리안도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알려 줘 봤자 믿을 거 같지도 않았고, 믿는다고 해 봤자 또 내가 그런 엄청난 괴물이며 이 모든 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면 차라리 자살해 버리겠다고 난리를 칠 거 같았다. 막시밀리안은 다만 요른더러 마법사로서 필립의 일을 도와주라고 했다.

“네가 쓸 줄 아는 특별한 마법들 있잖아. 그걸로 필립이 시키는 일을 해 주면 돼.”

“하지만, 금지 마법…….”

“상황이 달라졌다고 했잖아.”

막시밀리안이 혀를 찼다.

“우리 지금 마왕군 진지에 있는 거 몰라? 더는 정령 마법사인 척할 필요 없어. 너도 눈치채고 있었지, 네가 쓰는 게 흑마법인 거.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는 못 쓰게 한 거야.”

“…….”

“진영이 달라지면 규칙도 달라져. 적응 못 하고 언제까지 그럴 거야. 말 좀 들어.”

요른은 우울하게 알았다고 답하고는 둘이 얘기하는 동안 옆에서 웃고만 있던 갈색 머리의 참모장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막시밀리안도 필립과 시선을 나누었다. 힘을 쓰다 보면 어차피 자연스럽게 기억도 돌아올 거라는 의미였다.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가 문제겠지만. 전향자는 체념한 채 참모에게 눈짓했고, 필립도 조용히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깡마른 마법사의 손을 끌어다 잡고 병영의 다른 방으로 데려가서 부탁했다.

“우리가 전도에 힘쓰는 거 알지? 흑마법사들이 전송 마법 써서 우리 교리 퍼뜨리는 거 있잖아. 전에는 정령계 마법을 썼지만, 이제는 날씨가 많이 좋아져서 주로 마왕의 힘을 빌리거든.”

그래서 전송 거리가 꽤 늘기는 했다고 필립은 설명했다. 정령계 마법을 쓸 때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나 설파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한 도시 전체에 쟁쟁하게 울리게 만들 수 있으며, 성벽 경계까지 접근하면 조금이나마 다른 도시 안으로도 소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네 힘이라면 훨씬 더 멀리까지 소리를 보낼 수 있지?”

“응, 그렇지만…….”

“막시밀리안이 여기서는 내가 자기 대리인이랬지?”

“……응.”

“그래. 그럼 겁내지 말고 좀 도와줘. 황국령에 전도하려면 지금까지는 흑마법사들을 도시 경계까지 바짝 붙여 보내거나 종이 전단을 밀수시켜야 했거든. 하지만 너라면 여기 앉아서도 얼마든지 목소리를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부작용도 안 일어나지?”

필립은 자기 손이나 얼굴께를 건드리려는 듯한 동작을 취해 보이며 물었다.

“흑마법사들은 마왕의 힘을 빌리고 나면 몸이 변해. 그래서 마법을 쓰는 횟수도 강도도 한계가 있거든. 하지만 넌 그런 거 없지?”

“어…….”

요른은 자신이 평생 몇 번이나 홀림 마법을 써 왔던가 돌이켰다. 사람들 머리를 그렇게까지 멋대로 휘저어 놓고도 몸에 아무 이상도 없었던 거 보면, 그 부작용이라는 것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거 같긴 했다.

‘내가 반은 마물이라서 그런 걸까.’

“응.”

씁쓸하게 생각하면서도 요른은 대답했다. 필립이 그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그래. 그러면 좀 부탁할게. 매일 저녁 일곱 시에 내 집무실로 와. 내가 전해 주는 문서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성황국 사람들 귓가에 전해 주면 돼.”

“응.”

말로 달려 삼 주는 걸릴 범위에 퍼뜨려 달라는 거였지만 마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고, 참모장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부탁이 있어.”

“응, 응.”

“막시밀리안이 지금까지 너를 쭉 감시해 왔잖아? 네가 스스로는 올바른 행동을 못 하니까, 누군가 계속 지켜보고 교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잖아.”

필립이 말하며 요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너라면 잘 알 거야, 요른. 사실 스스로 바르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조금 특별한 사람들이 그들을 이끌어 주는 게 좋지. 막시밀리안 같은 사람들이 말이야.”

“응…….”

“특히 우리는 새 질서를 세우는 중이라, 사람들이 적응할 때까지는 우리가 도와줄 수밖에 없어.”

마법사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 다정하게 웃는 걸 보며 그가 막시밀리안과 어딘가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게 부탁할게. 넌 사람들 눈 귀에 다 접할 수 있잖아. 우리 마왕군 점령지, 특히 그로쉔 왕국 도시민들이 평소 뭘 하고 사는지 살펴보고 나랑 협회원들한테 매일 보고해 줘. 몽땅 다 감시할 필요는 없고, 여기 해당되는 내용만 걸러내서 보고하면 돼. 이게 ‘못된’ 행동들이거든.”

참모장은 새로 들어온 마법사에게 문서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요른이 펼쳐서 빠르게 훑는 걸 보고 필립은 조심스레 물었다.

“할 수 있겠니?”

“도시민이라는 게…… 누구야?”

“우리 협회원과 간부 몇몇 빼고 다른 사람들 전부 다. 거기 간부 목록이 있어. 목록에 있는 인물들 눈 귀에는 접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만 감시해 줘.”

“응…….”

“그래.”

필립이 요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래, 요른. 이제 너도 마왕군에 온 이상 감시하고 이끌어 주는 쪽에 서는 거야. 감시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쪽에서라면 넌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

참모장은 상대의 은빛 눈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쁜 듯한 이채가 도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어깨를 꼭 안아 주었다.

그날 후로 요른은 매일 황혼이 지는 시간에 맞추어 전도 활동을 했고, 오전에는 임시 정부 청사에 들러 필립과 다른 협회원들에게 점령지 시민 행태를 보고했다. 필립은 일이 다 끝난 후에는 마법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살며시 안아 주고서야 돌려보냈고, 가끔씩 작은 선물도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른은 가만히 되씹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막시는 이번에는 내가 필립을 홀린 게 아니라고 했어. 자기가 필립한테 시켜서 날 돌봐주라고 한 거라고.’

그리고 필립은 원체 다정한 사람이니까 남에게 도움을 받고 나면 상대가 누구든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거다. 아마 그는 반쪽짜리 마물이 아니라 진짜 마물이라도 이렇게 안아 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저런 다 썩어 가는 흑마법사들과 함께 지내며 마물 부대를 이끌지도 않으리라. 필립은 다름 아닌 마왕군의 수장 아닌가.

요른은 자신이 어릴 적 무척이나 검은 숲에 가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났고, 마침내 그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라면 자신도 그렇게까지 괴상한 생물은 아니다.

열흘쯤이 지나자 요른은 남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필립의 말과 행동을 통해 천천히 적응해 가고 있었다. 한편 매일같이 힘을 쓰면서 요른의 안에는 다른 변화도 일었다. 기억이 조금씩이나마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회상은 제한되어 있었다. 마왕은 과거도 현재 힘을 쓰는 방식에 따라서만 돌이켰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전달하는 교리에 따라, 또 자신이 시민을 검열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의 기억도 검열하여 반성했으며 잘잘못을 가렸다.

‘잘못했었구나.’

기억이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요른은 점점 더 겁에 질려가며 곱씹었다.

‘난 막시한테 많이, 아주 많이 잘못했었어.’

전에도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막시밀리안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마법사 후계자를 원했던 유디트가 자신을 입양까지 하려 했던 게 희미하게나마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옛일들이 또렷하게 윤곽을 갖추면서 요른은 자신이 막시밀리안에게 그 외로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막시밀리안은 늘 어린 마물에게 옳은 길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지만, 요른은 늘 비웃듯이 제멋대로 굴었다. 그래서 막시는 늘 힘들어했고 고통받았다.

어느 밤 마왕은 가장 끔찍한 부분에 다다랐다. 자신이 막시밀리안의 동생이 될 수 있었던 태아를 살덩이로 만들어 버렸던 장면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밝혀진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고, 차마 울지도 못한 채 안색만 새파랗게 식어 버렸다.

이후 하얀 마법사는 막시밀리안을 일부러 피하게 되었다. 같은 자택에 살면서도 그는 상대가 공동 공간에 없을 시간만 골라서 몰래 나다녔으며,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조차 못했다. 막시밀리안도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밤이나 새벽녘에 깨어 마왕은 열 살짜리 소년의 숨은 소원을 멋대로 읽어 내어 이루어 주어 버렸던 때를 수도 없이 돌이키며 다짐했다. 다시는 막시밀리안의 마음을 읽지 않을 것이다.

혹여 앞으로 필립이나 협회원들이 시킨다 해도 절대로 그만은 감시하지 않으리라. 평생 다시는 그의 눈 귀에도 마음에도 접하지 않고, 곁에도 가지 않은 채, 그가 오롯이 살게끔 내버려 둘 것이다.

반면 요른과 필립의 사이는 보다 돈독해졌다. 막시에게 직접 지시를 받던 부분을 보충하느라 요른이 점점 더 대리자에게 매달렸고, 필립도 기꺼이 다정하게 응해 주었던 덕이다.

삼 주가 지나자 막시밀리안은 다른 거처를 구해서 나갔다. 성황 기념관 건물의 관리인이 살던 작은 이 층짜리 목조 주택에 가서 지내겠다는 것이다.

요른은 이제 저택 안에서든 시내에서든 필립과만 손을 잡고 걸었다.

시간이 지나자 막시밀리안도 마왕군에서 제법 여러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치안 부대에 합류해서 업무를 분배하고 교육에 관여하고, 조직과 군량 관리 등을 재편했으며 군의 간부 회의에도 참가해 의견을 냈다. 사실상 행정관에 외부 조언자 역할을 맡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공식적으로 직함을 받는 건 거절했다.

낮에는 그렇게 바빴지만, 밤에는 그는 제 새 사택 한구석에서 램프를 켜 놓고 책을 읽었다. 소설책이라는 걸 조금씩은 계속 읽어 보기로 한 탓이다. 단, 필립이 정해 준 순서에 따라서만.

열흘 전, 필립 자택의 손님방에서 별생각 없이 금서 하나를 집어 들고 열어 보았던 밤, 막시밀리안은 다시는 소설이라고 불리는 그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물건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으려 결심했었다. 그는 성황 헤르타를 증오했지만, 그녀가 여덟 왕국 전부에 소설의 유통과 판매 금지를 권하는 칙령을 내렸던 것만은 직접 읽어 보니 더할 수 없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필립에게 얘기하면서 정중히 책들을 모두 반납하려 했더니 그 키 큰 참모장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필이면 처음부터 그런 걸 골라잡았냐는 것이다.

“미안. 내 잘못이다. 뭐부터 읽어야 할지 정해, 줄, 걸. 아, 미안. 맙소사.”

한참을 더 신나게 웃더니 필립은 책을 거둬가는 대신 오히려 몇 질 더 가져오더니 종류를 나누어서 순서를 정해 주었다. 일단 어린이 동화책과 학생 교육용 소설부터 보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이쪽 것들을 봐. 그리고…….”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막시밀리안이 결국 항의했다.

“타국의 문화를 폄훼할 생각은 없어. 나도 이쪽에 왔으니 접해 보기는 해야겠지. 하지만 간접적으로, 페랑의 문학 기조 전반에 대해 평한 논문 같은 걸 읽을 수도 있잖아. 꼭 내가 소설이라는 걸 한 권씩 직접 읽어 볼 필요가 있을까.”

“너 겁나서 그러지?”

필립이 답하다가 그만 또 웃음을 흘렸다.

“아, 진짜. 직접 읽어 봐, 막시. 직접 안 읽으면 모르는 것도 있어. 이거 네 치료에도 도움이 될 거고 말이야.”

막시밀리안이 묻는 듯이 바라보자 필립이 안색을 바꿔 진지하게 설명했다.

“저주 치료 말이야. 넌 이런 게 좀 필요해.”

필립이 그렇게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고 떠난 후, 막시밀리안은 결국 매일 밤 조금씩이나마 짬을 내어 소설을 읽었다. 처음에는 미간을 찡그린 채 몇 페이지나 겨우 훑던 게 양이 늘어갔고, 며칠 후 그는 필립이 주었던 동화책 더미를 동내 버렸다.

이후 거주지를 옮기면서도 막시밀리안은 책들 대부분을 가져왔다. 옛 관리인 사택의 작은 방, 침대 바로 곁에 놓인 네모난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서 그는 램프를 켜고 학생 교육용 소설책 한 권을 상판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페랑에서는 이런 교육용 소설이 주로 가정 교사들 추천에 따라 귀족가나 부유한 시민 계층에 고루 배포된다고 한다. 반면 그로쉔의 가정 교사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소설이나 서사시 따위의 금서를 호기심에 몰래 구해 읽는 건 아닌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금서가 발견되면 가문 전체가 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 실제로 천진하게만 저지르기에는 심각한 범죄이기도 했다.

전직 성기사는 밤이 깊을 때까지 책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시계를 보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침대에 눕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전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요른이 전도를 시작한 후 전황은 급속도로 바뀌어 갔다.

전도의 내용이 그 방법과 무섭도록 잘 맞물렸던 덕이다. 세계 시민 공화국, 출신지나 혈통 따위를 넘어서서 머리에서 머리로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 되는 세상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이상은 요른의 마법을 통해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지녔다. 몇 개 주에 걸쳐 사는 수십만 명의 귓속을 실제로 한꺼번에 관통해 버리는 권능을 통해서.

“대륙은 지금 왕과 귀족의 권역대로 수십수백 조각으로 갈라져 있어요.”

요른은 처음에는 영 주춤거렸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은 제법 낭랑하게 필립이 준 문서를 읽어 내렸다. 그 목소리가 황국민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 땅을 태초의 모습대로 회복합시다. 단 하나의 대륙이자 민중이라는 평등한 공동체로요. 마왕의 힘이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성황이 자리한 황국 수도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마왕군이 마물 군사를 물리고 평화롭게 전도만 반복하자, 오히려 내부에서 시민 스스로가 반란의 기미를 보인 것이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공기는 점차 들끓어 갔다.

황국의 내분에 결정타를 더한 건 총사령관 베스퍼 폰 크라우스의 탈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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