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7/30)

3.

다음 날 오전, 요른은 학원 도서관으로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던 길에 고개를 갸웃했다. 병사 한 명이 사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다. 

‘뭐지.’

요른이 문을 열고 나오자 병사는 인사를 하더니 봉투 하나를 넘겨주면서 바로 뜯어보라고 했다. 편지를 읽고 마법사는 못 박힌 듯 굳어 버렸다.

모의전 날짜가 이틀 늦춰졌으며, 요른이 만약 기사 파트너로 발탁되더라도 프란첸이 아닌 다른 자의 파트너가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요른은 병사에게 사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오늘 저녁에도 막시밀리안을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거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불길한 예감이 사로잡힌 탓에 마법사는 병사가 발을 돌리기 직전 다소 엉뚱한 질문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프란첸 경은 잘 계신 거죠?”

보병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는 바람에 요른은 금방 움츠러들었다. 그런 마법사의 얼굴 위로 차가운 말이 쏟아졌다.

“그러게 왜 굳이 일러바쳤습니까?”

“뭘…….”

“모르는 척은.”

병사는 혀를 쯧 차더니 혼자 중얼거리듯이 했다.

“이런 시기에 꼭 그렇게 떼를 써야 하나. 저런 것도 매국이야, 사실.”

“무슨, 얘기신, 지요.”

요른이 날카롭게 외쳤다.

평소 같으면 그는 더 말을 보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덜덜 떨면서도 요른은 한 번 더 물었다. 막시밀리안이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그래서, 제제가, 뭘, 프란, 첸, 어떻게 됐, 는데요.”

“맞기만 했지, 강간도 결국 안 당했다면서요.”

병사가 쏘아붙였다.

“그걸 꼭 개처럼 제 주인한테 일러바쳐야겠습니까? 군에서 제일 중요한 두 인물 사이에 싸움을 붙여서 어쩌겠다고. 아무리 프란첸이라도 상사를, 그것도 폰 크라우스를 살해하려 들었으니 어떻게 될 건지 생각을 해 보시죠. 지금은 아직 구금소에만 앉아 계시니까.”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병사는 곧장 등을 돌려 오솔길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숲을 헤쳐 가는 내내 그는 속으로 투덜댔고, 몇 번쯤은 소리 내어 욕도 했다.

이기적인 새끼. 징그럽게 생긴 게 속으로도 징그럽게 제 생각밖에 못 해. 총사령관님이 사병 보내서 절 때렸어요 엉엉, 복수해 주세요 하고 얼마나 끔찍하게 울고불고 졸랐으면 그 프란첸 경이 그렇게 화가 나서 돌아 버렸나. 아니, 조른 걸로 그분이 그렇게까지 되실 리가 없어. 무슨 약이나 마법까지 쓴 거 아냐?

“미친 새끼.”

그러나 그 욕설을 마지막으로 해서 병사는 더는 자기 머릿속 생각 따위에는 집중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무시무시한 마물들의 형상이 앞을 막아선 데다가, 귀에도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병사는 놀라서 수풀 사이로 뛰었지만 거기에도 마물이 있었다. 상과 소리를 피하고 또 피하다 보니 어느새 그는 요른의 사택으로 되돌아가는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괴물이 거의 바로 등 뒤까지 따라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병사는 정신없이 사택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순간 의심이 들면서, 신병 교육 때 들었던 내용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이거 혹시 흑마법사들 환각 마법 아냐?

그는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지만 이미 늦었다. 누군가 손으로 붙잡아 밀어 넣듯이 병사의 의식은 순식간에 머릿속과 척수 깊은 곳으로 밀려나 버렸고, 대신 다른 자가 그의 뇌 일부와 함께 목과 얼굴 전면을 차지했다.

요른이 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병사가 문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얼른 곁으로 다가가 꿇어앉았다. 쓰러진 자는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눈만은 여전히 뜨고 있었고, 시선을 살짝, 아주 살짝 요른 쪽으로 돌리며 입을 열어 말까지 걸어 왔다.

“잘 있었니, 내 일등 피험체야.”

성황을 만나야 한다.

그게 전령이 떠난 후 처음으로 요른의 머릿속을 밝힌 생각이었다.

“일어나, 일어나.”

요른은 자기 자신을 재촉하듯 뇌까렸다. 병사가 등을 돌린 직후 잔디 위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떠오르자 정신이 들었고, 몸에 힘도 돌아왔다.

“어서, 집, 들어가. 옷, 찾아서 나가.”

성황께 알현 신청을 드리려면 보좌실을 방문해 허락을 얻어야 하는데, 보좌관과 약속을 잡으려면 마도 학원 학장급 이상의 추천서가 두 장 필요하며, 학장을 만나려면 어느 정도라도 제대로 된 복식을 갖춰야 한다. 요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택으로 들어갔고, 다시금 침대 옆에 문 대신 커튼으로만 가려져 있는 작은 옷방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상의와 하의, 재킷 한 벌씩을 골라내면서 마법사의 얼굴로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변명 같은 속삭임이 뇌리를 떠돌았다. 난 말하지 않았어.

막시가 아무리 물어도 난 답 안 해 줬단 말이야. 내 잘못이 아니야. 그러나 머리 한구석에서는 채찍질 같은 날카로운 질책이 쏟아졌다. 말 안 했으면 뭘 해. 막시가 다 알아차린 게 뻔했는데, 부정도 못 했으니 답한 거나 똑같잖아?

혼자 문답하다가 그는 기껏 골라 놓은 재킷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막시밀리안은 지난 일주일간 몇 번이나 요른에게 캐물었다. 신체 전송 마법으로 프란첸 별성의 침실을 찾아왔던 밤, 너는 왜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거냐, 누가 널 그렇게 때렸던 거냐고 말이다.

요른은 질문을 적당히 회피하려 애썼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보병 몇에게 당한 것뿐이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지 못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그러나 막시는 끈질기게 이것저것 묻더니 결국 그 보병들을 보내온 배후가 있지 않겠느냐고까지 꼬집어 냈다.

요른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어제 만찬 때는 아예 한 사람을 콕 집어서 떠보는 바람에 그만 몸이 굳어 버렸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경이야?”

마법사는 급히 시선을 내려 제 몫의 고기를 열심히 써는 척했지만, 막시밀리안은 마치 이미 답을 듣기라도 한 양 나긋하게 한 구절 더 물어 왔다.

“전에도 자주 그랬어?”

요른은 역시나 아무 답도 하지 않았고, 막시밀리안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고 제 앞의 유리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요른은 상대가 이미 정황을 다 읽어 낸 거 같다는 인상을 받긴 했었다.

‘그렇다고 크라우스 경을 죽이려고 했다니.’

만찬 때 불길한 감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전 같으면 막시밀리안은 누가 요른을 때렸다고 하면, 분명 요른이 뭔가 맞을 만한 못된 짓을 했으리라 짐작하고는 요른 쪽을 추궁하여 경우에 따라 추가로 벌도 주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막시밀리안은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요른이 누구한테 맞았다면 오히려 때린 사람이 잘못했다고 믿어 버리는 건 아닌지 두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요른도 끝까지 베스퍼의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아니야, 나는 알았어야 했어. 나만은. 내가 막시를 미쳐 버리게 만들었는데.’

그러나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 괴물이 속삭였다. 맑게 구르는 은빛 웃음 같은 소리. 그 바보, 드디어 좀 제대로 된 짓을 했네.

너 때문이래. 너 때문에 막시밀리안이 사람도 죽이려 들어. 기쁘지?

“닥쳐.”

마법사는 주먹을 쥐고 제 머리통을 갈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머리보다 주먹이 차라리 더 아파져서 제대로 때릴 수가 없었다. 빌어먹게 약해 빠진 몸뚱이. 요른은 이를 갈며 속멍이 든 손을 펴서 뺨에서 눈물을 닦아 냈다.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좋아 두드리는 거지 사실 부서져라 내리치는 데에 가까웠다. 겁먹은 채로도 요른은 급히 대문으로 뛰어갔다. 혹시라도 보병이 다른 소식을 갖고 돌아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은 다 오해였으며, 폰 크라우스를 죽이려고 든 건 다른 자였다거나.

그러나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 무슨 무거운 물체가 놓여서 길을 막아 버린 듯했다. 기를 쓰고 문짝에 어깨를 딱 붙이고 밀어서야 마법사는 비로소 제 몸이 나갈 틈새만큼은 벌려낼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법사는 병사가 대문 아래쪽에 머리를 처박은 채 나동그라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놀라서 얼른 그 머리 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병사는 쓰러진 채로도 눈만은 크게 홉뜨고 눈알도 괴상하게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으며, 곧 입을 열어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잘 있었니, 내 일등 피험체야.”

요른은 잠시 고민했다.

그를 이렇게 부를 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 연구소장은 절대로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왜 이 보병이 이런 표현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러나 병사는 입가로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계속 혀를 놀려 댔다.

“나 맞아. 오래 못 있어. 혼자 해 보는 건 처음이라, 된 게 기적…… 이 꼴인 건 뇌를 언어부밖에 못 써서 그래. 아무튼 너, 그거 하지 마.”

“사센 씨? 어떻게…….”

“흑마법. 설명은, 생략. 너 지금 당장 프란첸한테 가. 신체 전송해서 병영 구금소로 가. 내가 잠시 시간, 벌어 뒀으니까. 성황한테는 절대로 가지 말고.”

“예?”

“어어. 다 알지.”

요른은 계획을 들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병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 갔다.

“너 성황 찾아가서 제가 홀림 마법 썼습니다, 프란첸이 그런 게 아니라 다 제 잘못입니다 뭐 이딴 소리 할 거지? 설득하겠답시고 네 능력 줄줄 다 털어놓고 보여 주고. 아서라, 너 칼 된다.”

“어, 칼? 네?”

“성황이 네 정체 눈치챌 거야. 그리고 너를 성…… 아니, 마검으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이 반쪽짜리 마물아. 넌 멍청하니까 좋다고 할 거 아니냐. 막시밀리안을 위한 검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요른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어떻게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못 했을까? 돌이키며 마법사는 허탈하게 웃었다.

‘완벽하잖아.’

자신은 반쪽짜리 마물이다. 남들을 수도 없이 홀려 냈던 것도 다 머릿속 마물의 힘이었다고 치면 꽤 강한 마물일 수도 있다.

그러니 마검으로 만들어서 막시에게 들려 주면 된다. 막시는 그러잖아도 강력한 기사인데, 요른의 인간 부분이 검 안에 섞여 들어가 도와주기까지 한다면 그가 검을 복속시키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면 요른 안의 괴물까지도 이제 다 꼼짝없이 막시에게 복종하게 되는 셈이니 막시는 자동으로 홀림 마법에서도 풀려날 것이다.

‘모의전에서 다쳐서 마법사로서는 은퇴하려고 했어. 앞으로는 막시를 위한 마검 설계에만 집중하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마검이 될 수 있다니, 대체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 했지.’

요른은 기쁨에 몸을 떨었다. 다만 사람 몸이 섞인 걸 검으로 만드는 게 황국 차원에서 허가가 날까 하는 게 문제인데, 그것도 성황이 특명을 내려 주면 해결될 일이다.

‘성하께서 꼭 명을 내려 주시게끔 내 힘에 대해 잘 설명해 드려야지.’

아니, 아예 직접 경험시켜 드리는 게 좋겠다. 알현실에서 일부러 성황과 그 주변 사람들 머리를 잠시 파고들어 조종해 주면 어떨까. 당해 보고 나면 다들 요른이 얼마나 위험한 마물인지 깨닫고는 검으로 만드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리라.

눈앞의 새하얀 멍청이가 혼자 미소를 띤 채 생각에 잠긴 걸 보며 움베르토는 병사의 목을 통해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성황 앞에 가서 제힘에 대해 술술 다 불면 성황은 금방 요른의 정체를 알아채고 예언의 진상도 이해할 터였다. 그리고 그를 성검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프란첸은 정말로 미쳐서 마왕이 되어 버릴 테고.’

헤르타가 검을 막시밀리안에게 쥐여 줄지 아닐지는 움베르토도 잘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가 요른의 말을 믿고 프란첸이 이상해진 게 정말로 마법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판단한다면, 아마 하사할 것이다.

다른 이유를 의심한다면 그녀는 그 위험한 용사 후보를 차라리 처형해 버리고 검도 봉인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성검 자신이 저항해서 어떻게든 제 주인을 지키고 그 손에 들어갈 수도 있다.

‘과정이 어떻든 그 인간 손에 검이 들어가면 그냥 세계 멸망이지.’

시내 외곽, 숲 근처의 골목에 숨어 앉은 채, 움베르토는 제 원래 몸의 손을 올려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동전의 양면 같은 예언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강림한 마왕이 스스로 성검이 되어 버리는 미래가 올 수 있는 만큼, 성검을 마검으로 삼아 용사가 마왕으로 각성하는 전복도 가능하다.

움베르토는 이 두 번째 미래는 도저히 반길 수가 없었다. 요른의 힘을 어떻게든 새로운 질서로 갈무리할 계획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마왕군과 달리 미쳐 버린 프란첸은 아무도 용서치 않으리라. 저주와 파괴의 명령만을 내리며 대륙을 죽음의 바다로 녹여 버릴 것이다.

‘또라이 새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움베르토는 어젯밤 구금소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독방에 앉은 막시밀리안과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용사 후보는 확실히 예언의 최종 해석본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절망한 나머지 돌아 버린 것 같았다.

수감자는 자신이 해석본을 접하게 된 경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지만, 아무튼 어떤 미래가 도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움베르토가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도 더 예리하게 짚어 냈으며, 자신이 구금소에 갇혀 버린 상황에서 요른이 어떤 선택을 하려 들 건지도 정확히 예측해냈다. 설명을 마친 후 그는 상대에게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지시했다.

[재판은 내일 정오라더군요. 요른에게 연락해서 그전까지 여기로 오라고 해 주십시오.]

[여기로요? 이 구금소 독방 안으로 말입니까?]

[예. 신체 전송 마법으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지금 제게 부탁하시는 거 맞죠? 어째 맡겨 놓은 거 받아 내시는 어조이십니다.]

[그쪽도 마왕이 그로쉔 수도로 가 주는 게 좋지 않습니까? 서로 이득 볼 일인데, 부탁이니 뭐니 일방적인 척하지 마시죠.]

[그래요, 저희야 마왕군에 실제 마왕께서 합류해 주신다면 그보다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경은 대체 무슨 이득을 보시는 겁니까?]

움베르토는 씩 웃었다.

[그와 함께 투항하시면 프란첸 경께서는 직위도 영지도, 지금까지 지켜 온 가치도 다 잃으실 텐데요. 대체 객관적으로 무슨 이득을 보시는 겁니까? 어디 한 번 경께서 직접 말로 해 보시죠.]

[닥치고, 요른더러 내일 오전까지 여기로 오라고 해요.]

막시밀리안이 찡그린 채 잘라 냈다.

[내가 탈출하는 걸 도와주러 오라고 해요. 안 오면 자살할 거라고 하십시오. 어차피 인생 망했으니 알아서 자살하겠다고요. 단, 연락할 때 밤은 피하십시오. 요즘 요른은 잠들어 있을 때는 힘이 상당히 풀려나오는지라 그때 근처에 갔다가는 그의 꿈에 휘말려 의지를 잃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사택으로 찾아갔다가는…….]

[예. 우리가 도망치기 직전에 연락했던 당신부터 내통자로 의심받겠죠. 직접 방문하거나 당신 명의로 편지를 보내지는 말고, 보다 간접적인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니까 어떻게든 내일 오전 중에, 그것도 다른 사람들한테 안 들키게 요른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그를 또 바로 딱 그 오전 중에 이 독방에 도착하게끔 설득하라고요?]

[못 하십니까?]

[평소에 부하들 이런 식으로 굴리십니까? 아니잖아요. 좋은 상사로 칭송받으시던 분 아닙니까.]

[못 하냐고요.]

막시밀리안의 눈에 핏발이 섰다.

상대가 한 번만 더 저어하면 창살을 우그러뜨리고 나와서 목을 부러뜨릴 기세였다. 안 그래도 꾹꾹 참고 있는 게 뻔한데 더 자극하기도 싫어서, 움베르토는 한숨을 쉬고는 알겠다고 답했다.

나가는 길에 연구소장은 베스퍼의 부관을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프란첸이 저렇게 되었으니 이틀 뒤 모의전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는 힘들겠고, 그러니 관계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관련 변경 사항을 전달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게 요지였다.

부관은 끄덕이며 주요 관계자들에게 익일 오전에 급보를 보내겠다고 했다. 움베르토는 다음 날 병영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마치 우연인 듯 요른의 사택이 자리한 북부 구역 전령 역할을 맡은 병사를 만나 몰래 그 옷자락에 추적 마법을 걸었다.

덕분에 움베르토는 오늘 전령이 숲속에 있는 내내 그 위치를 추적하며 환각 마법도 쓸 수 있었고, 의식을 잠식해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침이 다 새는 어눌한 발음으로나마 지금처럼 이렇게 말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체 전송 마법, 얼른, 지금 구금소로 가.”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마법이 어디 있…….”

“다 알아. 프란첸이 네 힘, 말해 줬어. 안 가면 프란첸 죽어.”

“네?”

“그 사람 자살할 거야. 네가 오전 내로, 늦어도 정오 전까지 오지 않으면…….”

병사는 바닥에서 고개를 확 들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서는 입가는 물론 뺨까지 다 적신 침을 주먹으로 닦아 냈다. 마물, 아니 환각 마법에 쫓겼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머릿속에는 공동만 남아 있었다. 자신 대신 다른 자가 들어앉았다가 휙 나가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병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흉물스러운 연구 강사의 자택 앞이었고, 자신은 그 반쯤 열린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의 모습은 집 밖의 뜰에서도 집 안의 거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독방에 앉아 눈을 감고 기다렸다.

들어오기 전에 물품을 압수당했기에 그는 회중시계도 갖고 있지 않았고, 지하라 방에 창문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오랜 습관 덕에 자신의 몸을 느껴 어느 정도 시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오전이야.’

생각한 순간 익숙한 인영이 시야 구석을 채웠다.

“요른.”

부드럽게 불렀지만, 마법사는 답도 없이 금방 벽에 제 등을 밀어 넣을 듯이 바짝 붙이며 철창 밖을 살폈다. 수감자가 달래듯 전했다.

“정오까지는 아무도 안 올 거야. 사센 경이 처리해 주고 가서 괜찮아.”

움베르토는 어젯밤 구금소 관리실에 들러서 여단장의 상태에 대한 소견을 전해 주고 떠났다. 저주가 상당히 진행된 탓에 수감자는 지금 몹시 공격적인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러니 단단히 구속해 두고 재판 전까지는 아예 곁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다.

겁먹은 간수들은 기사까지 두 명 동행하고 들어와서 프란첸의 사지를 사슬로 칭칭 감다시피 묶고, 그 끝을 벽과 바닥의 고리에 고정한 후 도망치듯 독방을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요른은 주춤주춤 발을 떼다가 허공에 아주 작은 불빛을 하나 밝혀 막시밀리안의 머리 근처로 흘려보냈다. 독방 안이 워낙 어두웠던 탓이다.

그제야 비로소 서로가 드러나 보였는데, 상대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막시밀리안은 자기 꼴이 어떤지 대강 짐작이 갔다.

요른은 어쩔 줄 모르고 있더니 금방 울상마저 되어 버렸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굵은 사슬이 상대의 팔다리를 저미듯이 파고들어 있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수감자가 부탁했다.

“풀어 줄래?”

마법사는 망설였다. 공범자가 되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전의 막시밀리안이라면 이런 부탁을 해 오지 않았을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오해로 잡혀 들어왔든 그 성기사라면 의연하게 기다려 재판을 받을 터였다.

막시밀리안이 한숨을 내쉬고는 오른팔에 힘을 주자 사슬이 고리 째 벽에서 뜯겨 나올 듯 삐걱거렸다. 요른이 눈이 동그래져서 자기 입을 막자 기사가 바로 전했다.

“못 해서 그러는 건 아냐. 이렇게 하면 시끄러우니까 간수가 올 수 있어서 그래. 네가 좀 도와줘.”

요른이 얼른 백색 불꽃을 일으켜 사슬을 중간중간 녹여서 끊어 냈다. 몸에 여전히 감겨 있는 부분을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걷어 내며 막시밀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속삭였다.

“가자.”

“어, 디로?”

“그로쉔 수도로 가자. 너라면 나까지 같이 신체 전송시킬 수 있지?”

“어?”

“마왕군에 합류해야지, 어쩌겠어.”

수감자가 나긋하게 이어 가며 몸을 일으켰다.

“총사령관을 죽이려 들었으니 이제 성황국에서는 활동하기 어려워. 여단장은커녕 성기사 직급도 유지할 수 없을걸. 마왕군 쪽으로 가는 게 나아. 투항하게 도와줘, 요른.”

“무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른이 외치다가 제 목소리에 놀라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손가락 사이로 더듬더듬 흘려 냈다.

“너, 용사가 된다고, 했잖아.”

“안 할래.”

“미쳤, 아니, 정신 차려, 막시.”

“하기 싫어. 어서 가자, 요른.”

“막시밀리안.”

요른이 빌듯이 손을 모으며 독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건 진짜 네가 아니야. 내가 널 홀려서 네가 지금 이러는 거야. 너, 넌 못 가. 절대로 아무 데도 못 가. 나도 새생각이 있어. 성황 폐하께 가서 다다 말씀드릴 거야. 조금만 기다려.”

마법사의 목소리에는 금방 울음이 섞여 들었다.

“미미안해, 미안, 막시.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널 이렇게 만들었어. 하지만 되돌려 놓을 방법이 이 있어. 조금만 기다려 주면 내가…….”

“요른.”

수감자가 가만히 물었다.

“이런 나는 싫어?”

“어?”

“이런 나는 네 막시밀리안이 아니야? 어떻게든…….”

성기사는 숨을 멈췄다가 끊어 냈다.

“……어떻게든 되돌려 놓고만 싶을 정도로?”

“하지만, 하지만 막시, 이, 이건.”

요른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만 들고는 말했다.

“이건 워원래의 네가 아니잖아. 아니라는 걸 잘 안단 말야. 내가 망쳐 놓은 거거니까, 내가 제일 자잘 알 수밖에 어없어. 내내가, 꼭.”

“이것도 나야.”

막시밀리안이 잘라 내며 마법사 앞에 마주 앉았다.

“핑계 대지 마. 그냥 네가 이쪽의 나는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이건 절대로 진짜 내가 아니고, 오직 네가 홀림 마법을 써서만 이렇게 되어 버린 거다, 다 네가 못된 짓을 한 죄과에 불과하다고 믿어 버릴 정도로. 넌 지금의 나는 완전히 무시하고만 싶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막시.”

“넌 성기사 여단장에 용사 후보인 나만 좋았고, 그런 나만 따르고 싶었던 거야?”

“아니, 아니야. 너이기만 하면 돼. 당연하잖아. 그런데, 바로 그러니까 나는 진짜 너를 도, 돌려주려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랬잖아.”

막시밀리안이 낭랑하게 명했다.

“넌 내 말만 들으면 돼. 그건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자, 날 봐.”

그러나 요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오히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막시밀리안이 재촉했다.

“날 봐.”

마법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그 턱을 억지로 잡아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요른은 곧 이를 덜덜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성기사의 완전히 변해 버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늘 고요하던 암회색 눈동자는 동공에 완전히 먹혀 시커멓게 변했고, 곱던 안색은 흙빛으로 저문 채, 관자놀이에도 목에도 핏대가 선 듯 푸른 정맥이 잔뜩 번져 있었다. 눈 밑도 푹 패이고 입술도 보랏빛으로 기이하게 얼어붙은 채였다.

나 때문이야. 요른은 심장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를 저런 꼴로 이런 곳에 묶여 갇히게 만들었다. 그토록 고결하고 신실했던 사람을. 그러나 몰락한 자가 요른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받아들여.”

“마, 막시, 미미안, 내가, 내가 너를 이렇게.”

“미안해하지 마.”

그는 또렷하게 쏘아냈다.

“멋대로 죄책감 느끼지 마. 핑계 대지 마. 대신에 네 눈으로 제대로 봐. 좋든 싫든 이것도 네 막시밀리안이야. 받아들여.”

요른이 계속 울기만 하자 막시밀리안은 턱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도로 내렸고, 잠시 쉬듯이 망설이다가 대신에 상대의 오른쪽 손목을 쥐었다.

한 손 안에 다 들어오는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막시밀리안은 한쪽 손으로 그의 손목을 쥔 채, 다른 쪽 손으로는 경직되어 안으로 감겨 있던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폈다. 그리고 마법사로 하여금 그 손으로 자신의 뺨을 건드리게끔 했다.

요른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 닿아 온 감촉에 굴복하듯이 힘을 풀었고, 곧 상대가 이끄는 대로 뺨의 결을 따라 귀, 관자놀이, 머리카락, 다시 올라가 눈두덩, 속눈썹과 눈썹, 그리고 내려와 매끄러운 콧날과 입술까지도 매만졌다.

입술에 손끝이 닿자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눈을 감고 그 손가락 끝의 둥근 부분에 가볍게 키스했다.

수감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법사는 석고처럼 질린 채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려워 얼어붙은 건지, 홀려 사로잡힌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막시밀리안도 요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요른은 그가 지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안에 있는 괴물이 아니라, 그저 요른 자신을.

그러자 머릿속 괴물이 문득 어린애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는 은백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막시밀리안은 되뇌었다. 이건 연기다.

요른이 말을 듣게 하기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 얼른 전송 마법을 써서 둘이 같이 그로쉔 수도로 가야 한다. 당분간 그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지켜보다가 요른이 잘 적응하는 것 같으면, 그가 필립과 함께 행복하게 살리라는 확신이 들면 자신은 떠나가리라. 그러나 지금은 일단 요른이 힘을 써 주어야 도주가 가능하다.

이건 다 연기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 모친이 요른을 입양하려 했을 때 그랬듯이 완전히 거짓만은 아닌, 어두운 진심을 끌어다 쓰는 연기.

수감자는 전날 오전을 돌이켰다. 손안에서 베스퍼의 두꺼운 목을 고무처럼 우그러뜨리는 쾌감에 중독된 채로도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 행동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히 내…….

내 요른에게…….

낯선 음성이었다. 평생 입 밖에 내 본 적은 없는 감정이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음성이 가슴 속에서 지글대는 감각은 알고 있었다. 그로쉔 학원, 열여섯 살의 필립 블랑쇼와 어린 생물이 손을 맞잡고 앉아 있는 걸 보았을 때의 아픔,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그 흰 몸의 맨살이 드러날 때마다 끓어올랐던 충동.

‘나는 널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지난 생애부터 그랬다. 막시밀리안이 원정 내내 시달렸던 분노와 증오는 요른이, 그 순수한 생물이 억눌려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막시밀리안 자신의 손에서 영원히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막시 자신이 더는 그 생물을 볼 수도, 만질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베스퍼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것도 요른이 받았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자가 다름 아닌 막시밀리안의 요른을 건드렸던 탓이다.

필립에게 보내길 한참 망설였던 것도 결국 마찬가지다. 필립이 요른을 온전히 풀어 주지는 못할 거라고 근심한 건 핑계일 뿐이다. 그저 다른 자의 손에 넘기기가 괴로웠을 뿐이다.

타인을 해하려다가 터져 나온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야 막시밀리안은 깨달았다. 자신은 요른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고 싶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올바른 일만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는 다만 요른을 원했다. 찬란했던 그 생물의 모습과 권능만큼이나 저 억눌리고 학대당한 희끄무레함도 원했다. 어린 시절 누구든 홀릴 만큼 절대적으로 아름다웠던 그 형상만큼이나 지금의 짓밟힌 형상도 사랑하고 원했으며, 받들어 섬기고 싶은 만큼 겁먹어 떠는 눈동자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는 상대의 모든 가능한 조각을 남김없이 다 갖고 싶었다.

‘날 움직여 온 건 양심이 아니야. 소유욕이었어.’

회귀하기 전 그는 물론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면 요른을 반드시 본질대로 자유롭게 살게 해 주겠다고, 오직 그러기 위해서만 생을 바치겠다고 수천 번도 더 다짐했다. 하지만 그 명징한 공리와 같은 소망 아래 도사린 것은 훨씬 더 원초적인 충동이었다.

그저 요른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어떤 모습인지따위는 아무 상관 없이.

가장 움츠러들고 억눌리고 흉측한 모습이라도 이 눈에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담을 수 있다면, 이 팔 안에 느낄 수 있다면. 사실은 그래서 회귀했다. 그랬기에 처음으로 돌아왔던 날 밤 그 침침한 음성에 닿자마자 황홀하게 울음을 터뜨렸고, 병적으로 왜소한 몸을 안고 무너져 내렸으며 푸르죽죽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당장 갖고 싶어서 열락에 떨었다.

구금소 독방 안에서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칙칙한, 물기 젖은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쓰게 돌이켰다. 나는 대체 어디까지 삐뚤어진 거지.

잘 생각했어. 역시 필립에게 맡기는 게 좋아. 나는 요른을 그 누구보다도 바로 내 손에서 놓아 주어야 해. 그러나 움베르토가 쏘아붙이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가 뭐 엄청 달라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여전히…… 자신은 옳은 짓만 해야 하지?]

그리고 어릴 적 자신이 내걸었던 약속이 마치 하나의 선율처럼 겹쳐졌다.

[그 성안에서는 우리 얼마든지 나쁜 짓도 다 하자.]

작은 마왕이 주저하며 물어 왔다. 너 나빠져도 돼? 그때 열 살의 막시밀리안은 지체 없이 답했다. 그럼.

[나 아주 나빠져도 돼.]

수감자는 혼란스러웠고,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는 못했다. 요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심연에서부터 수면에 던져올리는 듯한 미소.

“요른?”

“그래.”

생물이 눈을 감듯이 웃었다. 뺨으로 식은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음성은 예리했다.

“명령해, 나의 막시밀리안.”

그것은 설원의 그림자처럼 새파랗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내게 명령해.”

장난기 어린 목소리다. 막시밀리안은 그렇게만 느꼈지만, 페랑 출신이었다면 다른 표현을 썼으리라.

수감자는 무릎을 꿇은 채 그 꼿꼿한 몸을 올려다보았다. 은백색의 눈동자는 무척 그립고도 투명한 청색을 품고 있었으며, 수정의 실 같은 머리카락이 보드라운 귓바퀴를 감싸고 맑은 소리를 낼 듯이 찰랑거렸다. 그러나 눈을 깜박이자 마치 환영이었던 양 다시금 겁에 질리고 불안한 얼굴만이 입술을 떨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떨면서도 요른은 이제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저도 따라 몸을 일으켰고, 그 눈동자를 마주 들여다보며 전했다.

“필립 블랑쇼가 어디 있는지 알아? 머리를 연결해서 찾아 봐. 할 수 있겠어?”

“어…….”

“잘 모르겠으면 우선 그냥 그로쉔 수도로 가자. 우리 두 사람 신체 전송 가능해?”

“응, 응. 수도 아무 데나 괜찮으면…….”

“가자.”

요른은 망설였는데, 이번에는 전송 마법을 쓰기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눈치채고서 수감자가 손을 내밀어 상대의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좌표 설정을 하려면 가능한 한 서로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게 편할 터였다.

요른이 가늘게 경련하면서도 공간을 섞어 냈고, 둘의 몸은 독방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 *

그로쉔 왕국 수도에는 텅 빈 별장이 많았다. 원래 주인이던 귀족들이 처형당하거나 성황국으로 피신해 버린 탓이다.

필립은 개중 하나를 제 사택으로 삼아 숙식하고 있었으며, 마침 조찬을 겸해 방문해 온 모친과 함께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차였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시민군 병사 한 명이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걸어 들어왔다.

병사의 보고를 듣고 필립은 간신히 전율을 억누르며 물었다.

“어딥니까?”

“소피아가 둘 다 일단 결박해서 유치장으로 데려가라 하셨어요. 저항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 지금쯤이면 거기 앉아 있을 거 같습니다.”

“결박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필립이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정말로 그 둘이 맞다면, 둘 다 내 오랜 친구입니다. 하지만 그래요, 이 눈으로 확인해 봐야 진짜 본인들이 맞는지 알겠지. 곧 그쪽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필립?”

모친이 묻는 듯이 불렀지만 필립은 흥분에 잠겨 잠시 말을 잊었다. 페랑에서 막 일어서던 시기에 시민을 직접 설득하고 다니느라 외워 버렸던 문장들이 뇌리로부터 심장으로 왈칵 쏟아져 나와 반짝거렸다. 무색의 왕이 온다.

스스로는 무엇도 아무도 아닌, 오직 만민을 위해, 만민의 사이에서 날갯짓하는 무색 투명한 새가.

군림할 줄 모르는 왕께서 마침내 우리를 선택하셨다.

필립은 얼른 재킷을 걸치고 복도를 뛰듯이 걸어 별장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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