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난 생애, 원정을 다니는 동안 막시밀리안은 모친의 행적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품지 못했다. 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던 탓이다. 요른이 살아 있는 이쪽 세계에 와서야 막시밀리안은 밤마다 두통을 달랠 겸 정원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상념을 모아들였다.
성검이 강림한 후 용사는 움베르토의 입을 통해서야 처음 알았다. 프란첸 공작 부인이 성검 강림 일 년쯤 전에 이미 성황국 마도 협회원들 중 소수를 골라 예언 최종 해석본을 전달했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늦어도 그때쯤 유디트는 미래에 대해 거의 확신했던 게 틀림없다.
그녀는 어쩌면 마왕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막시밀리안은 회귀한 후에야 돌이켜 생각했다. 물론 어릴 적 요른이 자기 자신을 봉인하면서 프란첸 공작 부인의 기억에도 손을 대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명민한 유디트라면 그 후에도 얼마든지 단서를 잡아냈을 수 있다.
유디트 폰 프란첸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정황을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에게, 내내 가장 유력한 용사 후보였던 당사자에게 그가 맞이할 미래에 대해 단 한마디도 암시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딱히 모친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초한 일에 남의 탓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녀 나름의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언은 절대적이다.
고대인의 예언은 성황 시기는 물론 그전부터도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정해진 하나의 미래가 아니라 가능한 두 갈래 미래로 해석된 건 이번 문서가 처음이었지만, 결국 그마저도 동전의 양면 같은 하나의 미래로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예언 해석에 대해 확신했던 만큼 유디트는 오히려 아들에게 알려 봤자 소용없으리라 생각했으리라. 과정에 있어 용사 후보를 고뇌에 빠뜨릴 수는 있지만 결과는 똑같거나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예언은 곧 미래다. 산책을 해 봤자 딱히 두통도 이명도 나아지지 않아서, 침실로 돌아와 낮에 시내 민간 상점에서 몰래 사들여 둔 진통제를 꺼내 마시며 성주는 새삼 되새겼다. 고대인들이 새겨 둔 문자는 예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치 그들이 미래를 미리 써 둔 듯한 권능을 지녔다.
‘그러니 이번 생애에서도 반복될 수도 있지.’
막시밀리안은 창가에 선 채 뇌까렸다. 예언이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실현될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지만, 지난 며칠을 돌이켜 보건대 자꾸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얀 마법사의 모습 위로 내내 성검의 잔영이 비쳐 보였던 탓이다.
‘복속의 의식조차도 필요 없었던 마검.’
성기사는 그 검을 처음 손에 잡았던 때의 감각을 기억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요른은 굴종밖에 모르는 생물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사슬을 풀어 주려고 노력해 봤자, 그 하얀 생물은 오히려 생명줄을 빼앗기는 양 두려워하면서 사슬을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다 쓸 뿐이었다.
‘나는 이런 짓을 해 놓고 잘도 그저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구나.’
비틀거리며 막시는 창가에서 물러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약효가 돌기도 전에 금속성을 띤 이명이 뇌를 갈가리 찢어 놓기 시작했던 탓이다.
‘한심해.’
성기사는 베개 위로 천천히 머리를 누이며 뇌까렸다. 요른을 풀어 주지는 못하면서 막시밀리안 자신만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가고 있다.
몸은 아직 괜찮지만 정신이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병영에서 베스퍼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그는 의식이 꺼멓게 침식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자기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지극히 이질적인 악에 잠식되는 감각.
이전 생애에서라면 막시밀리안은 그런 감정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억눌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가 없었다. 기사로서 평생 몸에 익혔던, 마음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모든 습관이 다 위선처럼 느껴지고 죄를 반복하는 것처럼 끔찍해서, 누르려 들면 몇 배로 더 화만 나곤 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요른을 풀어 주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미쳐 버릴 거라고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그러자 이번 생애에서 맞이할 미래가 문득 눈앞에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나.’
병영 자료실에서 필사해 온 지도를 떠올리며 막시밀리안은 침실 한쪽의 수납장에 시선을 주었다. 될 수 있으면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역시 그 길이 그나마 차악이리라.
“보내자.”
성기사는 누운 채 중얼거렸다.
“놓아 줘야 해. 그래도 놓아 주는 게 차라리 나아.”
결심했던 밤이 지나고 토요일 늦오후, 여단장은 병영에서 돌아오자마자 접견실에 들러 하얀 손님의 몸을 꼭 끌어안았고, 곧 손을 맞잡고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하녀들이 둘이 손을 잡은 걸 보고 눈이 동그래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식전주가 나왔을 때쯤 막시밀리안이 식탁 너머로 질문 하나를 던지자 손님도 어깨를 살짝 움츠리면서도 끄덕거렸다. 과연 며칠 전 기사 한 명이 성황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요른에게 직접 전달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래. 일단 모의전에 참가하라는 거지?”
“응, 사흘 후야. 하지만 막시, 내가 꼭…….”
“아니야.”
막시밀리안이 잘라 들었다.
“하지 마.”
“응?”
“알아서 실수를 해서 불합격하겠다는 거잖아. 하지 마.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제대로 치러낼 수 있으니까, 잘해서 합격해.”
요른이 식기를 다루던 손도 멈추고 얼어붙는 걸 보면서도 막시밀리안은 가차 없이 명했다.
“성황이 모의전 형식으로 네 임관 시험을 준비한 건 이해가 가. 학원의 연구 강사를 성기사 여단장 파트너로 승진시키겠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니, 기사 간부나 마법사들한테도 네 실력을 보여 줘야 납득하겠지. 전송 마법이랑 공격 마법 동시에 쓰는 거 있잖아, 그걸 사용해. 꼭 합격해서 내 파트너가 되도록 해.”
“막시밀리안, 너 그, 그거……. 아니야.”
요른이 더듬으면서도 항의했다.
“너, 그거, 지금, 네가 아니야. 나야. 그건 내 소망이야. 너는 그런 거 원하지 않아.”
“또 홀림 마법 어쩌고 하는 거야? 제정신이든 아니든 난 너의 막시밀리안이야.”
성기사가 마법사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데 내 말을 안 듣겠다고?”
“너는, 그거, 진짜 네가 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요른은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헤매면서도 답했고, 괜히 자기 어깨를 꽉 쥐었다.
“내, 내가 널 조종하는 거니까, 그걸 아니까, 네네 말이라도 아안 들을 수밖에 어없어. 나나 네 파트너 안 해. 부불합격할 거야.”
마법사는 정신없이 떨면서도 완강했다.
“내가 하한 짓이이니까, 내내가 되돌려 놓을 거야. 걱정하지 마, 막시.”
성기사는 상대가 지금 눈앞의 자신이 아닌, 자신 안에 갇혀 있을 소위 ‘진짜’ 막시밀리안에게 간절히 말을 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막시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는 가능한 한 냉랭한 음성을 불어 냈다.
“요른, 날 봐.”
요른은 식탁 위를 눈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더듬으며 안절부절못했다. 막시밀리안이 다시 한번 명했다.
“내 눈을 봐.”
성기사는 상대가 겨우 시선을 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어쨌거나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야. 이건 내 몸이고, 이 말들은 다 내 입에서 내 목소리로 나온 거고. 틀려?”
“그렇지만, 너 머릿속은,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막시밀리안이 반은 달래듯이, 반은 위협하듯이 말했다.
요른은 그만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는 자신이 이런 순간을 얼마나 바라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그더러 자기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청해 오는 순간을. 그건 요른이 평생 동안 꾸어 온 꿈이었다.
그런 만큼 이게 진짜일 리는 없었다. 오히려 요른이 막시밀리안을 얼마나 자기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현상에 불과했다. 고민하다가 마법사는 식탁 밑으로 주먹을 꽉 쥔 채 대답했다.
“응.”
“착하다.”
막시밀리안이 미소 지었다.
성주가 만족한 듯 다시 식기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요른도 따라서 접시 위에 있는 샐러드 채소를 뒤적거렸지만, 입이 억울하게 삐죽 튀어나온 채였다. 마법사는 속으로 고집스레 중얼거렸다.
‘실수는 실수지, 뭐.’
그러니까 그냥 저질러 버리면 된다.
요른 자신이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 건 사실이니까, 중요한 순간 좌표를 잘못 설정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모의전에서 적 모형 대신 자기 왼팔에 불 공격 마법을 쏴 버리는 불상사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실수니까, 방금 자신은 막시한테 거짓으로 답한 것도 아니다. 되새기며 요른은 제 머릿속 괴물에게도 전하려고 노력했다. 듣고 있어, 이 괴물 놈아? 네 맘대로는 안 될 거야.
하얀 청년은 스프를 한술 떠서 입에 넣으려다가 손이 너무 떨려서 포기했다. 반은 막시에게 거짓 대답을 해 버린 충격과 머릿속 괴물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탓이었고, 반은 머릿속 괴물이 깔깔 비웃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해 봐, 그런데 팔 하나 따위로 되겠어?
‘닥쳐.’
마법사는 속으로 윽박질렀다. 하지만 괴물은 계속 속삭였다. 넌 며칠간 밤마다 그런 짓을 했고, 오늘 밤도 집에 돌아가자마자 할 거잖아. 요른은 접시 위의 당근을 포크로 찍으면서 머릿속 괴물의 속삭임도 꾹꾹 찍어 누르려고 애썼다. 닥쳐. 난 결국 아무 짓도 안 했어.
마법도 더 철저하게 걸어 두었는걸. 풀어 주긴커녕 더 꽉꽉 조여 뒀단 말이야. 요른이 변명하듯이 중얼대자 괴물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서 더 좋았잖아.
조이느라 실컷 즐겼잖아. 날 진짜로 물리치고 싶은 거라면 모의전 때 팔 말고 다른 것도 같이 태워 버려. 네가 밤 내내 만져 댔던 그거 말이야.
획이 뾰족뾰족한, 은빛으로 기이하게 반짝이는 문장들이 머릿속을 수놓자 요른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늘은 집에 가면 바로 잘 거야.’
뇌까리면서 요른은 스프 옆에 놓인 작은 접시 위의 채소만 자꾸 포크로 괴롭혀 댔다.
‘목욕도 안 해. 옷도 안 갈아입어. 수면 마법을 써서라도 집에 가자마자 바로 잠들어 버릴 거야.’
막시밀리안은 식탁 너머로 요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얀 손님은 뼈마디가 다 드러난 깡마른 손으로 식기만 계속 움직일 뿐, 거의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입에 잘 맞지가 않나 보다고 성주는 생각했다. 결국 요른이 자기 입맛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요리사더러 대충 소화하기 편한 것들을 골라 식단을 준비해 달라고 했었다.
그래도 모의전에 대해 요른의 답을 받은 게 한숨 놓였다. 노려서 이 시점으로 회귀한 건 아니었지만, 기사 파트너 발탁은 확실히 좋은 기회다. 만약 요른을 데리고 이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면 서로 얽힐 핑계가 있는 게 좋기 때문이다.
성기사 여단장이 신규 마법사 파트너에게 지리도 가르쳐 줄 겸 단둘이서만 근교를 정찰하겠다고 하면 별로 의심할 자가 없을 것이다. 주변에는 그렇게 말해 두고 요른을 데리고 나가서 그대로 그로쉔 수도, 그러니까 마왕군 주력 부대의 현 주둔지로 빠져나가면 된다.
요른이 신체 전송 마법을 써 준다면 이런 계획을 짤 이유도 없긴 했다. 하지만 요른의 요즘 행태로 보건대 막시밀리안이 안색 바꿔 명령한다고 해도 쉽사리 소위 금지 마법을 써 줄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막시밀리안은 굳이 말을 달려 백색 마왕을 필립이 있는 곳에 데려다줄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성기사는 식탁 반대쪽에 앉은 자의 손놀림을 바라보며 고심했다. 마물과 성황국군 양쪽을 다 피해갈 안전한 경로를 확보하고 필립에게도 미리 연락을 취해 두어야 하니까. 그런데 요른은 손이 참 예쁘구나.
성기사는 제 머릿속에 다른 맥락을 다 잘라먹고 불쑥 들어선 문장에 놀랐지만, 시선은 계속 붙잡힌 채였다. 지난 생애에서는 쳐다보지 않으려고만 노력했던 흰 살갗과 뼈마디, 위축되어 제자리에서 맴돌다시피 하는 동작에.
손가락이 너무 가늘다고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그야말로 뼈밖에 없는 꼴이라고. 하지만 한편 그 골격은 순하게 단정했고, 손끝에는 하얀 손톱에 그보다도 더 새하얀 반달무늬가 아주 살짝만 차올라와 무척 고왔다.
성기사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금방 꺼멓게 썩어 들듯이 가라앉아 버렸다. 제가 괴롭혀서 저렇게 엉망으로 쪼그라뜨려 놓고, 그 모습에 또 예쁘다고 반하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
‘변태 새끼.’
저건 진짜 요른이 아니야. 막시밀리안은 뇌리에 송곳으로 새기듯이 생각했다.
내가 망쳐 놓은 요른이야. 제 죄의 증거에 불과한 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포크로 제 손을, 아니, 아예 대가리를 푹 찍어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생산적인 계획을 짜 보려 애썼다.
‘필립에게 연락하려면 린다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지.’
회귀 후 처음 해 본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벌써 며칠째 린다에게 말을 걸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아직 평범한 인사 말고 진짜 용건을 입에 담아보지는 못했다. 성황 측 감시의 눈길을 의식한 탓이었다.
‘들키지 않고 떠볼 수 있어야 할 텐데.’
막시밀리안은 계속 감시받고 있었다. 프란첸 별성 안에서는 괜찮지만, 시내 쪽으로 나가기만 하면 전송 마법으로 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그나마 그는 스스로 마법을 조금이나마 쓸 줄 아니 공기의 흐름이 비정상적인 걸 눈치챘던 거지, 보통 기사라면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으리라.
경계해야 할 건 성황뿐만이 아니었다. 움베르토 폰 사센도 용사 후보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따로 뭔가 계획을 짜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마흔넷의 연구소장은 일주일 전 황궁 복도에서부터 여단장을 따라와 불러세웠고, 치료법이 어쩌니 하며 제집으로 초대를 예고하기까지 했으니까.
막시밀리안은 그자의 초대에 대해 두 가지 방향으로 짐작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될지는 실제로 초대받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는 얌전히 엎드려 지내야 해.’
그때까지만은 이전의 충실한 성기사와 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마음을 깨끗하게 억눌러 다스리며, 이 모든 증오를 최소한 성황국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더는 한치도 내보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숨을 고르며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의 얼굴, 개중에도 폰 크라우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찰나 또 지독한 이명이 여단장의 귀를 관통했고, 뇌 전체가 두근대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막시밀리안은 식기를 놓치다시피 내려놓고 식탁 위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요른이 스프를 깨작대다 말고 상대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막시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 제 손님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요른은 굳어 버렸다. 상대가 일주일 전부터 끈질기게 던져 오던 질문이었던 탓이다. 특히나 이번에는 막시밀리안은 아예 답을 정해 놓고 요른더러 그 답이 맞느냐 아니냐만 선택하게끔 몰아붙여 왔기에 더 겁이 났다.
마법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스프를 고루 휘젓는 척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그 침묵에서 이미 답을 읽어 낸 듯, 혼자 기이하게 미소 지었다.
* * *
같은 날 오전, 움베르토는 마차를 타고 린다 투트 크라흐트 차장의 별장 대문 앞에서 내렸다.
문지기가 군말 없이 들여보내 주었고, 하인도 주인이 집에 없는데도 상대를 선뜻 안으로 들였다. 린다가 폰 사센 소장이 방문하면 서재를 사용하게 안배해 달라고 미리 지시해 놓고 제 일터로 떠났기 때문이다.
2층 서재로 안내받아 들어가서 움베르토는 얼른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미리 전달받았던 열쇠로 수납장에서 둥그런 천구 모양의 기구를 찾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필립과의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오 분쯤이 남아 있었다.
시계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그는 문득 장갑 위로 손등을 긁었다. 막시밀리안의 동태를 살피느라 지난 일주일 내내 수시로 흑마법을 쓰다 보니 결국 물집 같은 게 잔뜩 잡히면서 피부가 변형되어 버렸던 탓이다.
신체 변형은 흑마법의 전형적인 부작용이다. 하지만 흑마법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특히나 마왕군 쪽과 긴밀하게 연락하려면 아무래도 흑마법도 원용하는 게 좋은데, 정령 마법으로는 도시를 벗어나는 원거리 전송은 어렵기 때문이다.
흑마법의 전송 범위는 엄청나다. 정령 마법은 공기라는 한정된 매개를 이용하다 보니 거리가 멀어지면 상과 소리도 금방 흐려지고, 잡음도 많이 섞여 든다. 반면 마왕의 힘을 이용하면 말을 달려 하루가 넘게 걸리는 도시에 앉아서도 서로 또렷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도 움베르토가 아직 초보라 그 정도에 그치는 것뿐, 흑마법사들은 날씨가 좋은 날에는 훨씬 더 멀리까지 서로 연락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한 주의 남단 끝에서 다른 주의 북단 끝까지도.
‘이러니까 필립 블랑쇼의 이상이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움베르토는 속으로 뇌까렸다. 통일 공화국이라.
전 대륙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 통일 공화국. 민중 모두가 선한 주인이 되는. 물리적 거리 따위 아무 상관 없이 서로 거침없이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그는 필립의 소위 신세계 구상에 여전히 반은 회의적이었지만, 반은 아무래도 함께 희망을 품게 되기도 했다. 마왕이 가진 힘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리리라.
‘아니, 어쩌면 사람의 본질을…….’
연구소장은 혼자 괜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 삐뚤어진 건지, 그쪽이 너무 야심이 넘쳐 나는 건지. 아무래도 나보다 거의 이십 년쯤 젊은 사람이니까.’
어쨌거나 움베르토가 오랜 망설임 끝에 결국 필립의 야심에 설득되어 반역에 몸담기로 한 건 사실이었다. 마왕이 혼란과 멸망만이 아니라 훨씬 더 이상적인 신세계의 질서를 가져올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걸고.
반면 같은 내통자인 크라흐트 차장은 사실 필립의 구상에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움베르토가 보기에 린다는 그저 이기는 쪽 편을 들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흑마법에도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마왕군으로부터 자료를 전달받고 연구해서 전송 마법의 원리나마 익히게 된 건 움베르토 쪽이었다.
그는 제 상사를 이해하기는 했다. 움베르토 자신이야 어차피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지만, 린다처럼 멀쩡하게 생긴 마법사는 아무래도 신체 변형을 감수하기는 싫으리라.
그래도 이 흑마법 덕분에 그는 지난 일주일간 여단장의 거동을 낱낱이 살펴 최초의 가정을 거의 확신으로까지 굳혀갈 수 있었다. 기억들 몇을 돌이키며 킥킥 웃다가 그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곧 천구를 돌려 좌표를 맞추며 정신을 집중했다.
마왕의 힘을 비는 마법은 주문을 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잊고 마음 전체를 하나의 그림처럼 풀어 두는 게 중요하다. 움베르토는 곧 자신의 의식이 어떤 전혀 다른 장소에 있는 전혀 다른 몸 안을 떠돌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로쉔 수도의 어느 건물 안, 갈색과 황금빛이 섞인 카펫이 깔린 방, 필립 곁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흑마법사의 머릿속 일부를 말이다.
“블랑쇼 경.”
―경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움베르토는 흑마법사의 입을 통해 인사했고, 역시나 흑마법사의 눈과 귀를 통해 녹안의 청년이 웃는 양을 전달받았다.
마왕군 측의 설에 따르면, 마왕께서 온전히 각성하시고 나면 멀리 떨어진 두 장소를 서로 섞어 잠시 하나로 합칠 수도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 하나하나가 서로의 뇌를 빌리는 게 고작이다. 연구소장이 다시 운을 떼었다.
“실례합니다, 블랑쇼 씨. 이렇게 뵙는 건 오랜만이군요. 무탈하십니까?”
―예. 프란첸은 어떻습니까?
일주일 전에 움베르토가 급보로 보냈던, 아마 지금 필립이 앉아 있는 그로쉔 수도에는 닷새 전에야 도착했을 편지의 내용을 지목하며 필립이 물어 왔다. 움베르토가 픽 웃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합니다. 지난주 내내 살펴봤는데, 사람이 확 변했더군요.”
―카를 폰 린하우스 암살 때에도 의연했던 자가요?
“혹시라도 새어 나갈까 봐 급보에는 자세히 쓰지 못했습니다만, 그냥 기미가 이상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지금 저주받았습니다.”
움베르토가 말하자 유하게 풀어져 있던 필립의 입가가 살짝 잦아들었다. 연구소장이 마저 말을 이었다.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달라졌어요. 특히 그를 대하는 태도…….”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넘기고 연구소장은 계속 이어 갔다.
“그분을 대하는…… 태도가 말입니다. 마왕과 관련해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글쎄요.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흘리는 바람에 움베르토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 젊은 참모는 중요한 질문을 할 때 늘 이런 말투를 쓴다.
―그게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한 게 맞을까요. 사실 우리 쪽 측정에 따르자면, 지난 일주일간 ‘날씨’는 오히려 조금 주춤했습니다. 그쪽 측정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 그건…….”
―마왕의 힘이 새롭게 억압받고 있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저는 프란첸이 무슨 조처를 취했나 했습니다만.
아뇨, 그건 프란첸 본인의 의도는 아닐 겁니다. 움베르토는 속으로만 되뇌었다.
멍청한 놈이 의도와는 달리 일주일 내내 멍청한 짓만 하고 있어서 그렇지.
연구소장은 떠오른 말을 굳이 입 밖으로까지 내지는 않고 머리만 괜히 벅벅 긁었다. 흑마법사와는 뇌의 언어 입출력부만 공유하는지라 사지 움직임까지는 전해지지 않을 터였다. 필립이 타인의 의식이 빙의된 자의 눈을 묻는 듯이 응시했고, 움베르토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프란첸의 마왕에 대한 태도가 크게 변한 건 사실입니다. 성황을 향한 충심에도 변화가 있는지는 이제 곧 만나서 떠봐야 할 테지만요.”
―그렇게 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움베르토는 웃으며 눈짓만 해 보였고, 필립도 상대의 눈만 가만히 뚫어 보며 침묵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상대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거의 확신했다.
마왕군의 젊은 참모장은 그간 린다와 움베르토 둘 다에게 몇 번이나 언급한 바 있다. 용사 후보인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을 잘 살피고 있다가, 혹시라도 그가 전향할 기미를 보이면 늦지 않게 꼭 떠보고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말이다. 그의 행보가 승리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면서.
린다는 그 부탁을 프란첸이라면 내통자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정도의 의미로만 알아들었고 동시에 코웃음 쳤다. 그 돌덩이 같은 녀석이 전향한다면 차라리 성황까지도 전향해 버린 후일 거라고 말이다. 반면 움베르토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읽어 냈고 알겠다고 답했다.
필립도 린다보다는 움베르토를 더 노리고 전한 말이었을 것이다. 황국 마법사 중 그 연구소장만은 요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마왕군 참모장도 눈치챈 후였으니까. 움베르토도 마왕군 참모장의 부탁을 듣고는 그가 유디트의 예언 해석 최종본을 어떻게든 입수해서 살펴봤으리라 짐작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움베르토는 만약 필립이 그 해석본을 접했다면 분명 알고서 경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왕이 각성해 봤자 스스로 성검이 되는 길을 택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을.
하지만 용사가 전향해 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만약의 경우에라도 마왕군은 성검의 주인을 제 편에 두게 되며, 그러면 다시금 예언을 전복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여러모로 좀 위험하지.’
역시 요른이 처음부터 성검이 되지 않는 미래가 도래한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그러나 움베르토는 지금으로서는 그마저도 마왕 자신이 아니라 용사의 손에 달린 일이라고 믿었다. 필립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어 왔다.
―프란첸은 제 모친과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예, 일단 프란첸 공작 부인 본인이 공사는 확실히 구별하는 성격이니까요.”
모친 쪽에서 아들에게 예언과 관련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은 적다는 뜻이다.
그렇다 해도 막시밀리안이 제 쪽에서 어떤 다른 경로를 통해서든 최종 해석본을 접했을 수도 있다고 둘은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은 채, 연구소장은 참모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참모도 은은히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 언제 그를 초대해서 떠보실 생각입니까?
“일단, 꼭 제가 먼저 떠보지 않아도 속을 알아볼 기회가 올 거 같아서요.”
움베르토는 말하면서 황국군 총사령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거구의 성기사는 공사 구분을 잘하는 듯하면서도 단 한 사람 대상으로만은 못 하는 자라, 자기 옛 애인이자 친우를 너무 믿고 별 얘기를 다 해 준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경이 며칠 후에 프란첸을 불러 문책할 예정이라 합니다. 그가 병영 자료실에서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면서요. 면담 후 프란첸의 반응이 어땠는지 제게도 알려 주겠다고 했으니, 듣고 나서 진행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참모장은 끄덕거렸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전령을 통해 사후 소식을 보내 주십시오.
“예.”
움베르토가 선뜻 답하자 필립이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대화를 끝내자는 신호다.
크라흐트 차장의 별장 서재에 앉아 움베르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목이 아니라 제 목에서부터 숨이 흘러나오는 게 새삼 신선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가슴의 흉터 자리를 긁적거렸다.
“아이고.”
흑마법의 부작용은 무시할 수 없긴 하다. 아무리 이미 다 망가진 몸이라고는 해도, 너무 자주 썼다가는 돌아다니기도 힘든 몰골이 되어 버릴까 봐 조심하고 있었는데, 프란첸을 감시하느라 지난주 그는 너무 자주 마왕의 힘을 빌렸다. 게다가 오늘 필립과 대화까지 했으니 초심자 주제에 심히 무리를 한 셈이다.
움베르토는 슬쩍 튜닉 자락을 들치고 제 살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갸웃했고, 손까지 넣어서 만져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진짜 방향이 제멋대로네.”
흉터가 사라지고 오그라들었던 근육도 부드럽게 돌아온 걸 확인한 새치투성이의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차 웃어 버렸고, 의족과 지팡이로도 절룩대면서도 젊은이처럼 힘차게 땅을 짚어 방을 나섰다. 그러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미소가 흐려졌다.
신세계라. 그 덩치 큰 멍청이는 따라와 주지 않을 것이다.
떠올린 순간 등이 어둑하니 굽어졌지만 움베르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요른은 만찬을 마치고 프란첸 별성에서 돌아와서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손을 비누로 씻고 얼굴이며 목도 박박 문질러 씻어 놓고도 모자라 그는 괜히 목욕물까지 받기 시작했다.
작은 선박처럼 앞뒤로 길쭉한 모양의 목제 욕조에 찰랑찰랑하게 물을 채우고, 불의 정령께 청해 뜨겁게 덥힌 후 요른은 비스듬히 눕듯이 그 안에 들어가 앉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살 속 곳곳에 남아 있던 시큰거림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주문을 외워 몸속을 여기저기 조이고 있던 부분들을 풀어 주자 역시 금방 찌릿하는 느낌이 아랫배를 채웠으며, 겉으로도 변화가 생기는 걸 알 수 있었다.
“괴물 새끼.”
짓씹듯이 중얼거리며 요른은 일부러 정면의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놈을 내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새하얀 회벽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려 내듯이 오늘 만찬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그 상들이 그러잖아도 욕조 안에서 훈훈하게 달아올라 있던 살에 열을 더한 바람에 요른은 다리를 조금 움직여 자세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러나 한창 예민해져 있던 부분에 허벅지가 스쳐 오히려 신음을 뱉을 뻔했다.
그는 이제 괴물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지난 일주일 내내 요른에게 그렇게나 자주 닿아 준 덕분, 아니, 그 괴물 새끼가 막시밀리안으로 하여금 그렇게 자꾸 요른을 만지도록 조종해 댔던 탓이다.
열다섯 살 때부터 걸어 두었던 술법 덕분에 마법사의 몸에는 겉으로까지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놈은 막시와 접촉할 때마다 요른의 살 속이며 배 속에서 온통 난동을 부려 댔다.
그래서 요른은 그 괴물 놈의 꼬락서니를 직시하기 위해 나흘 전부터 밤에는 몸에 걸어 두었던 마법을 해제했다. 막시를 만날 때는 도로 묶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풀어놓고 변화를 관찰했다. 과연 그놈은 풀어 주자마자 꺼덕대며 제 본성을 과시하곤 했다.
욕조에 앉은 채 요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으로 마구 수면을 저어 파문을 일으켰다. 그놈을 쳐다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직시하려고 일부러 풀어놓기야 했지만, 실제로 확인하기는 늘 두려웠다.
데운 물의 훈김이 다 식어 버린 후에야 마침내 요른은, 여전히 시선은 내리지 못한 채, 그것을 한쪽 손끝으로만 건드려보고는 제풀에 허리를 살짝 튕겼으며, 동시에 징그러운 것에 닿은 양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역시 그 괴물 놈의 정체는 이거다. 마법사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게 몇 년을 가둬 놨더니 오히려 안에서 쌓이고 쌓여서 막시를 조종하고 있는 거다.
‘이대로면 결과는 뻔해.’
이놈을 내버려 두면 결국 막시는 요른을 안게 되고 말 것이다.
여전히 그것을 차마 직접 내려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손끝으로 아랫배와 허벅지 위쪽만 덧그리면서 요른은 지난 일주일을 돌이켰다.
일주일 전날 밤, 마법에 걸려 미쳐 버린 후부터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자꾸 만져 댔다. 오늘 만찬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전에도 그는 손님의 손을 꼭 잡고 접견실에서 식당으로 데려갔고, 식사가 끝난 후에도 다가와서 손부터 잡았다. 그런 채로 막시밀리안은 요른더러 혹시 서재에 들러 저녁 늦게까지 더 머무를 생각은 없느냐고까지 물었다.
요른이 거절하자 그는 영 아쉬운 듯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하인을 불러 이런저런 작은 물건들을 선물로 안겨 주었고, 이어서 상대와 나란히 함께 복도와 정원 중앙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손님을 본성 건물의 대문 앞, 마차를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잘 가. 내일 또 보…….”
요른이 마차에 오르기 전에 급히 덧붙이다가 그는 결국 또 상대를 팔 안에 콱 가두듯이 안아 버렸다.
매번 이런 식이다. 안긴 채 요른은 생각했었다. 만날 때는 마냥 부드럽게 품어 주지만, 작별할 때면 사슬처럼 죄어든다.
안길 때마다 요른은 새삼 막시밀리안은 몸이 참 크다고 느끼곤 했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눈으로만 봐서 알던 것과 실제로 그 품에 압도적으로 파묻혀 버리는 건 전혀 달랐다.
성기사의 몸은 크기만 한 게 아니라 그 결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정교했다. 전신이 아름다운 갑주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손마디나 팔꿈치의 율동 하나하나도 모두 우연 하나 없이, 빈틈없이 순수한 의지처럼만 상대의 몸을 조였다.
막시밀리안의 몸은 그의 혼이자 생애 그 자체였다. 요른은 그가 기사로서 평생 그런 식으로 자신을 갈고닦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자를 자신이 이렇게도 어이없이 홀려 버렸다는 게 더욱더 화가 났다. 하지만 제대로 분노하기도 전에 막시밀리안의 오른손이 목과 뒷머리를 파고들었고, 다른 쪽 팔은 깊이 굽어지며 허리를 조였다.
언제 그가 자신의 몸을 놓아 주었는지, 그래서 자신이 마침내 마차에 올라타서 출발할 수 있었는지 마법사는 잘 기억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막시밀리안이 여전히 자신이 탄 마차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일부러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마차가 성을 둘러싼 언덕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섰을 때쯤에야 기사에게 안겼던 감촉이 천천히 마법사의 살갗을 투과해 머릿속까지 모여들었다. 마치 지나치게 황홀한 술, 그래서 입에 부어진 순간에는 그저 정신을 잃고 취해 버리기만 했던 술의 향과 맛이 뒤늦게 섬세하게 떠오르듯이.
‘안겨 있었다’는 동사로만 뭉뚱그려져 있던 기억 속에서 천천히 한 조각 한 조각씩 육신의 상이 나타났다. 요른은 제 뺨을 스치던 머리카락의 흑색, 귀와 목덜미 근처에서 느껴지던 호흡의 결, 자신의 볼품없는 갈비뼈를 숨이 막히도록 짓누르던 외사근의 무게, 그리고 제 배에 닿았던 아랫배의 철광석으로 된 암벽처럼 단단한 침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깡말라 튀어나온 골반뼈쯤에 닿아 왔던 그의 허벅지가 얼마나 두꺼웠으며, 어떻게 살과 근육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깊은 저음과 같은 금속성의 파동을 띠고 울렸던지를 떠올렸다.
‘안 돼. 이건 엿보는 거야.’
마차 안에 앉은 채, 막시밀리안이 주었던 선물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가슴팍에 꽉 껴안은 채 요른은 생각했다. 막시는 별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 몸을 딱히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저 상대를 안아 주기 위해 그 모든 부위들을 내맡겼을 것이다. 그러니 요른 혼자서 이런 걸 마구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림처럼 감상하면 안 된다.
다짐하면서도 마법사는 끊임없이 또렷하게 떠올렸고, 감촉을 지나치게 예민하게 되새긴 나머지 서로를 맨살로 느꼈던 듯한 환상에까지 잠겨 들었다. 옷을 입은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던 게 아니라, 맨몸의 그가 천 몇 장만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안아 주었던 것처럼.
상이 지나치게 선명해지면서 죄책감도 함께 못 견디게 심해질 때쯤이 되자 다행히 마부가 마차를 멈춰 주었다. 숲의 오솔길 입구에서 내려서 요른은 램프를 들고 비척비척 걸어서 자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와서 그는 당장 손과 얼굴부터 박박 씻어 버렸고, 그래도 모자라서 물을 받아 목욕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욕조에 앉으면서 그는 제 머릿속 괴물, 아니, 머릿속에 있는 척하면서 사실은 내내 뿌리를 뱃속에다 내려놓고 있던 괴물을 저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막시한테 그런 짓을 시키다니.”
여전히 차마 수면 아래로 시선을 주지는 못한 채, 허벅지에 애매하게 손을 올려놓고서 그는 중얼거렸다.
“나 같은 걸 그렇게 온몸으로 마구 만지작거리게 시켰어. 막시가 제정신을 차리면 돌이키면서 얼마나 끔찍한 기분이 들겠어.”
이게 원하는 건 결국 뻔하다. 요른은 생각했다. 열다섯 살 때 몽정했던 후 이놈은 계속 같은 꿈만 꾸어 왔던 거다.
지금 막시가 요른을 이렇게 다정하게만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는 건 다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 이놈은 결국 그 성기사를 조종해서, 그가 제 손으로 마법사의 손을 꼭 잡고 침실로 데려가게끔 만들 것이다. 그러면 막시는 침대 위에서 상대의 옷을 벗기고, 그리고…….
요른의 상상은 거기서 멈췄다. 그는 사실 성행위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시는 요른더러 아무와도 교합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성행위란, 요른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놈이 바로 그 막시를 꾀어서 요른과 강제로 교합시키려고 한다.
“나쁜 자식.”
이를 악문 채 요른은 온탕의 습기에 젖고 열로 달아오른 얼굴로 마침내 자신의 성기에 시선을 주었고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징그러워.’
칠 년 전 첫 몽정도 어둠 속에서 했으며 그 후 계속 성감 자체를 틀어막아 두었으니 그는 자신의 성기가 발기한 모습을 접한 적이 평생 한 번도 없었다. 사흘 전부터야 매일 밤 한 번씩은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볼 때마다 기분이 지지리 나빠지곤 했다.
‘괴물 새끼.’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욕망을 말 그대로 세워 쳐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요른은 뇌까렸다. 머릿속 괴물이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잘 형태가 잡히지 않았지만 바로 눈앞에서 기세등등하게 굴어 대니 그것이 원하는 게 뭔지 또렷하게 와닿았고, 동시에 정말로 구체적으로 혐오스럽고 미웠다.
“마법으로만 막아 두지 말고, 실험 계약 끝났을 때 잘라 버릴 걸 그랬나 봐. 지금이라도 그럴 수도 있어.”
위협하듯이 뱉어 내면서 그는 마치 그 말을 당장 실현하려는 듯 성기를 한쪽 손으로 꽉 쥐었다.
그것이 손바닥 안에서 저항하듯 꿈틀거렸다. 그러자 회화 작품 같은 상 하나가 왠지 순식간에 요른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만찬 때 막시밀리안은 무척 아름다웠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귀밑으로 흘러내려 갸름한 턱께까지 드리웠고, 그 어두운 휘장 사이로 꽃잎같이 곱상한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단아한 이목구비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작은 램프의 조명 때문에 더 가련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고결한 사람을 꾀어서 이런 짓을 시키려는 거지, 요른은 손으로 제 것을 위아래로 훑으며 이죽댔다.
“다 알아, 괴물 놈아. 결국 그가 널 건드려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이렇게.”
뻔하다. 이 괴물은 오늘은 아직 요른의 허리께까지만 머물렀던 그 견고한 손가락들을 몇 주, 어쩌면 며칠 후에는 더, 더 아래까지 유혹할 것이다. 그 손이 결국 여기를 쥐고 이렇게 해 줄 때까지 말이다.
‘손이라.’
마법사의 뇌리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 자신은 성행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막시밀리안은 다를 수도 있다. 그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니까 책을 읽어서든 어딘가에 견학을 다녀와서든 다 알고 있으리라.
마법을 쓰는 건 요른이라 해도 조종당하는 건 막시밀리안의 머리다. 행위를 할 때도 결국 막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활용하게 되는 거니까, 만약 교합하게 된다면 그는 요른이 모르는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다. 손 말고도 몸의 여러 부분을 다 써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디를 어떻게 쓰는 걸까.’
요른은 요 며칠간 실컷 안고 닿으면서 느꼈던 막시밀리안의 몸 각 부위를 차례차례로 떠올리며, 교합이란 개중에 어디를 어떻게 활용해서 서로를 건드리게 되는 건지 상상해 보려 애썼다. 그러다가 그는 상대의 허벅지와 배는 물론 그만 그 사이에 불거진 부분까지도 머릿속에 그려 내고 말았다.
그렇지. 마법사는 문득 깨달았다. 성행위라는 게 한 사람만 가고 끝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성기가 관련된 일이니까 아마도 둘 다 절정에 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요른의 머릿속에서 막시밀리안의 성기, 그저 희미하고 불특정한 살덩이처럼만 그려져 있던 것이 문득 붉게 움직였다.
요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몸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로, 어떻게, 그건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원했다.
오늘 그가 자신을 배웅하며 안아 주었을 때 막시의 성기도 자기 몸 어딘가에 스치거나 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허리가 튀었고 배 속이 진동했다. 눈앞이 어지러워진 바람에 요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턱을 높이 치켜올렸다.
“아, 안…….”
절정에 달하기 직전에 요른은 간신히 마법을 썼다.
경련하며 그는 몇 차례 짧은 비명을 뱉어 냈다. 관이 순식간에 틀어막혀 아무것도 내놓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린 탓이다. 그런 채로도 그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젯밤도, 그저께 밤에도 그는 그 괴물 놈을 이렇게 대접해 주었다.
벌을 받아야지. 요른은 비웃듯이 뇌까렸다.
이런 걸 원했으면, 딱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할 거 아냐.
욕조에 앉은 채 요른은 내내 막시밀리안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이 줄줄 흐를 때까지 제 성기를 위아래로 매만져 댔다. 그 성기사의 손길을 흉내 내듯이 만져 주면 괴물 놈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지만, 단 한 방울도 밖으로 뱉어 내지는 못했다. 가장 예민한 부위의 내부를 송곳으로 콱 찔러 틀어막아 둔 듯한 고통만 요른의 배 속을 후벼 팠다.
더 했다가는 일어서지도 못하겠다 싶을 때쯤에야 마법사는 덜덜 떨며 아래에서 손을 떼고 다리를 펴 일어났다. 거의 기어 나오듯이 욕조를 벗어나면서 그는 받아 놓았던 물을 개수구에 부어 버리며 내뱉었다.
“나쁜 자식.”
요른은 수건으로 몸을 속속들이 닦았지만, 옷은 입지 않았다. 깨끗한 맨몸으로 침대에 누워 이불로만 몸을 감싼 채 재차 뇌까렸을 뿐이다.
“나쁜 자식, 괴물 새끼.”
욕하면서 그는 여전히 부어 있는 것의 첨단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구멍 주변도 찌르듯이 자극했다. 그러나 성기는 금방 다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더 혼을 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법사는 이불 속에서 그놈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흘렀다. 누운 채 하얀 청년은 끊임없이 자신이 홀려서 미치게 해 버린 자의 손길을 흉내 내어 제 아래를 몰아붙였으며, 동시에 원래의 프란첸, 이런 짓은 혐오할 게 분명한 고결한 기사를 흉내 내어 그것의 목구멍을 틀어막고 벌을 주었다.
더는 만져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손목이 아프고, 아래가 망가져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얼한 꼴이 되어서야 그는 성기를 놓고 신음하며 옆으로 웅크렸다. 땀이 식으면서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자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 눈꼬리를 적셨다. 사실은 그는 알고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알고 있었다. 만져지면서 느끼는 건지, 벌을 받느라 더 느끼는 건지 실은 분간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어느 쪽이든 요른의 상상 속에서는 둘 다 막시밀리안의 손길이었다. 그러니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칠 때까지 황홀하게 반복하게 될 뿐이었다. 내일 또 막시를 만난다면 그는 결국 집에 돌아오면 못 견디고 똑같은 짓을 하고야 말 것이다. 매일 밤이 이렇게 흘러가리라.
둘 다 원한다.
양쪽의 막시밀리안을 전부 다 갖고 싶다. 뇌리에 선명한 문장이 새겨진 순간 눈에도 이채가 돌았지만, 마법사는 얼른 고개를 저어 흐트러트렸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안 했는걸.’
그리고 변명하듯 그는 머릿속으로 주워섬겼다.
‘막시는 나보고 교합하지 말랬잖아. 난 오늘도 결국 안 했어. 막아 놓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으니까, 이건, 안 한 거야. 게다가 하나도 안 좋고 괴롭기만 했으니까.’
그러니까 잘못한 건 없다.
못된 욕망에 대해서 벌을 준 것뿐이다. 벌을 주느라고 일부러 욕망을 불러세운 것, 딱 그것뿐이다. 피곤에 지친 채로도 요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욕실로 가서 손을 씻고, 마침내 속옷과 잠옷도 챙겨입고 돌아와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구부리고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녘, 막시밀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낸 소리가 시종이 자는 옆방까지 들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탓이다. 다행히 기다려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는 안심하고 일어나 서랍장 쪽으로 다가가서 두통약을 찾았다.
그러나 두통약을 찾으려 움직이는 도중에 현기증에 빨려들었다. 서랍장 한 모서리를 꽉 쥐고 발밑의 단단한 바닥을 느끼며 막시밀리안은 현실감을 회복하려 애썼다. 이쪽이 현실이다. 방금 눈앞에 펼쳐졌던 건 꿈이고, 이쪽이 현실이다. 그러나 결국 충동이 치받쳤다.
‘요른한테 가고 싶어.’
입술이 질리도록 턱을 악물어 보았지만 그는 곧 참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무덤에 갇힌 듯 공기가 모자랐다. 그에게 닿아서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 말을 달리고 싶다. 숲속의 사택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그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백발을 만져 보고 목덜미의 향을 맡고 등과 어깨를 안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냉소하며 충동을 짓밟았다.
―셋째로, 너는…… 평범한 교합도 안 돼. 알았지? 그런 욕정 자체를 버려.
당시 그는 요른이 강제와 합의를 분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지시했었다.
그런 만큼 그건 누구보다도 바로 막시밀리안 자신을 상대로 반드시 지켜져야만 할 수칙이었다. 성기사는 침실의 어둠 속에 선 채로 눈을 감았다.
‘내가 네게 뭘 하든 폭력일 뿐이야.’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하게 손을 잡는다고 해도 강제일 수밖에 없다. 요른이 무조건 순종할 걸 알고 있고, 알면서도 건드리는 한은 그렇다. 위력을 통한 강압. 그러니 사실 회귀한 후 일상에서도 그는 상대에게 내내 폭력만 써 왔던 셈이다.
그가 이제 와서 요른과 다른 식으로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
돌이킬 수 없어. 환청 같은 속삭임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거의 짓눌리듯이 창가에 주저앉았고, 찬 벽에 등을 댄 채 속으로만 뇌까렸다.
‘어차피 이 시간에 찾아가면 안 돼. 자고 있을 텐데 깨우면 안 되잖아. 게다가 분명 이맘때부터였으니까.’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이때쯤부터 각성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밤마다 마왕의 의식이 통 속의 연기가 마개 틈새로 슬슬 새어 나오듯이 새어 나와 주변으로 날아다니곤 했다는 걸.
그럴 때 근처로 갔다가는 자칫 프란첸 자신의 머릿속도 읽힐 수 있다. 그는 지난 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최소한 아직은 요른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면 되는 거지, 뭐 하러 알려.’
막시밀리안은 침대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마왕군에 투항할 준비는 차곡차곡 되어 가고 있었다. 도주로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고, 핑계를 만들어 린다도 마침내 주말에 프란첸 별성의 살롱으로 오게끔 초대했으니 필립과 연락할 방도에 대해 논의해볼 수 있으리라. 이제 요른이 모의전에서 활약해서 그의 기사 파트너가 되어 주기만 하면 된다.
‘필립이라면 괜찮을 거야.’
그는 누운 채 되뇌었다. 그로쉔 학원 생도 시절 이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마왕군 점령지 현황에 대한 보고는 워낙 많이 받아보았으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유학생은 그때 인상 그대로 명민하고 올곧은 청년으로 자라준 듯하다고.
막시밀리안은 십 년 전 그로쉔 기숙사 식당 뒤쪽 관목 숲에서 봤던 장면을 되새겼다. 열한 살짜리 깡마른 아이가 저보다 다섯 살이 더 많은, 길쭉하게 키 큰 학원생의 손에 꼭 붙들려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에 새겨진 불안은 막시밀리안의 지시를 어겼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지 필립 때문이 아니었다. 요른은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제 쪽에서도 가느다란 손가락들로 갈색 머리 소년의 손을 매달리다시피 꼭 붙잡은 채였고, 양 뺨은 드물게도 창백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입술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떨렸지만 그 역시 결코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필립은 며칠 후 요른의 기숙사 방에서 막시밀리안에게 당당하게 밝혀왔었다. 그 애를 제 나라로 데려가고 싶다고.
‘그때 데려가게 놓아 둘 수도 있었을 텐데.’
성기사는 자조하듯이 돌이켰다.
‘그가 나보다는 훨씬 더…….’
막시밀리안은 당시 필립이 요른을 이용하려 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진한 생물의 힘을 제 야심을 이루는 데에만 써먹으려 할 불평분자이며, 바로 이런 자들이 추대하여 요른이 예언에 점지된 자리, 즉 마왕의 옥좌에 오르고 마는 거라고.
회귀 후 막시밀리안의 확신은 반은 무너졌고, 반은 더 견고해졌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필립과 같은 자들 때문에 마왕이 강림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구세계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려, 황국의 소멸이나 타블로의 와해를 세계의 멸망과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 탓이었다. 마왕이란 게 단순히 황국의 멸망만을 가져오는 존재일 리가 없었다.
신세계의 왕이란 새로운 성황에 불과하다. 그건 권력의 교체지, 멸망이 아니다. 예언이 가리킨 멸망도 고작 이런 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니 필립이 요른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구세계와 마찬가지로 소위 신세계도 요른에게는 일종의 감옥일 뿐이다. 그가 신세계의 왕 자리에 갇혀 버린다면 오히려 진짜 강림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너는…… 어쩌면 평생 거기 갇힌 채 살아갈 수도 있겠지.’
그리고 성황과 똑같이 언젠가 몰락을 맞을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그편이 낫다.
둘 중 하나에 갇히는 수밖에 없다면, 노예보다는 왕의 자리가 낫다.
필립은 요른을 제가 멋대로 구상을 다 마쳐 둔 신세계의 주인이자 왕으로만 모시고 그렇게만 길들이려 할 터였다. 상대가 그 이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온갖 사탕발림으로 다 달랠 테고.
‘하지만 사탕발림이잖아.’
막시밀리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폭력이 아니라 절절한 사탕발림이 될 터였다. 그는 어쨌거나 요른을 왕으로 모시려 드는 자이며, 처음부터 요른을 위해 전 세계를 구상해 두고 기다렸다. 마왕이 옳은 자, 차라리 오히려 절대적으로 선한 자가 될 수 있는 세계를.
반면 자신은 구세계를 지키느라 그를 바닥 중에서도 바닥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성기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야심 때문이든 뭐든 필립은 요른을 다정하게 대해 줄 인물이며 대륙민 모두에게도 존중을 강요할 자다. 그들더러 그 하얀 생물을 말 그대로 섬기게끔 할 테니까.
‘그걸로 됐어.’
그것만이라 해도 막시밀리안 자신이 줄 수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나았다.
마음을 정하고서 막시밀리안은 마침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들지는 못했다. 등의 한기, 꿈속에서 성검이 얹혀 있던 부분의 한기만 점점 더 심해지면서 뼛속까지 아팠을 뿐이다.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웅크려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어쨌거나 금방 잠에 빠져들었을 테고 악몽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일도 없었을 거라고. 그는 기사로서 언제든 필요한 순간에는 제 몸을 잠재울 수 있었으며, 기분 나쁜 꿈을 꾸더라도 깨어나는 찰나 숨 하나 허투루 새어 나오지 않게끔 다스려낼 수 있었다.
성기사는 지금도 제 안에서 그런 능력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라고 느꼈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하면 감정도 충동도 억누를 수 있으리라고. 다만 도저히 원할 수가 없을 뿐이다.
‘달리 저주라고 하는 게 아니겠지.’
누운 채 도로 눈을 뜨고,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로 막시밀리안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다. 당장 몇 시간 후 오전에 병영에서 기사 간부 회의가 있는데, 거기서 자신이 제대로 안면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몇 달 전부터 전황이 악화되고 거의 매일같이 급보가 날아들면서 회의도 잦아졌다. 성황과 마도 협회원들까지 모두 자리한 황궁 회의는 열흘에 한 번꼴로 열렸지만, 병영에서 기사 간부들끼리만 업무를 논의하는 자리는 아침마다 있었다. 덕분에 프란첸 여단장은 베스퍼 폰 크라우스 총사령관의 얼굴을 매일매일 지척에서 마주 보아야만 했다.
막시밀리안은 픽 웃어 버렸다. 사실 안면을 유지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내일도 그자를 안 죽이고 넘어갈 수 있을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참아야 해.’
내일 회의에서 분명 요른의 승진 시험을 겸한 모의전 설계 논의가 나올 것이다. 중요한 사안이니 차질없이 넘겨야 한다.
어차피 며칠 후면 그는 요른과 함께 그로쉔 수도로 도주할 터였다. 그러면 당분간 베스퍼와는 마주칠 일도 없으리라. 나중에 마왕군에 섞여 성황국 수도를 치러 돌아올 때 그자의 목도 같이 치든가 전신을 저며주든가 하면 된다. 필립도 적국 군인을 베는 건, 특히나 총사령관을 처단하는 건 딱히 말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베스퍼의 목을 벨 미래를 떠올리자 눈이 밝아지면서 사지에서 문득 파드득 불꽃이 튀듯 경련이 일었다. 막시밀리안은 결국 한잠도 이루지 못했고, 날이 밝자 그대로 몸을 일으켜 병영으로 출발해야만 했다.
“그러면 본 강사의 기사 파트너 발탁 시험을 겸한 모의전 날짜는 이틀 후 오후 한 시로 정합니다.”
병영 회의장에서 베스퍼의 부관이 말했고, 서기가 받아적었다.
막시밀리안은 모든 과정을 침착하게 잘 넘기고 발을 다소 재게 놀려 복도로 걸어 나왔다. 빨리 베스퍼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폰 크라우스 기사단장도 왠지 막시밀리안을 바로 뒤따라 나왔고, 성큼성큼 따라잡아 장갑을 낀 손으로 상대의 어깨마저 뒤에서 가볍게 두드렸다.
“프란첸 경, 잠깐 사령관실에서 저 좀 보십시다.”
빌어먹을.
막시밀리안은 당장 그자의 손이 닿은 곳의 옷과 살갗을 벅벅 긁어내고 싶은 걸 견디느라 주먹을 꽉 쥐었다.
베스퍼가 자신을 불러세운 용건은 알 만했다. 그러니 태도라도 공손하게 유지해야 의심을 사지 않으리라. 그러나 생각뿐, 몸을 돌려 제 상사를 마주하면서 여단장은 벌써 얼굴이 썩어들어갔고 하극상이라도 벌일 듯한 눈초리가 되어 버렸다.
제 가장 유능한 부하이자, 자신보다 적어도 두 수는 더 뛰어난 마검사를 마주하며 베스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쯤 전부터 이 친구는 왜 이 꼴이 되어 버린 건가.
어쨌거나 베스퍼가 손짓하며 사령실 쪽으로 발을 돌리자 여단장은 얌전히 따라오기는 했다. 걸으면서 기사단장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베스퍼 자신에게 적의가 꽂혀 든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저 프란첸이 저렇게 어둠이 끈적하게 덩어리 져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불길한 것이다.
‘단 며칠 만에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야.’
기사단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게 만약 진짜로 머리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겨서 저러는 거면,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성기사로서 저만한 인재는 대륙을 통틀어도 없다. 이런 시국에 명명백백한 용사 후보를 정체도 모를 병으로 잃게 되는 건가 생각하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동시에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긴 반역으로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으려나.’
자신의 목 뒤로 달라붙은 시커먼 시선을 느끼면서도 베스퍼는 가만히 사령관실 문을 열고 프란첸을 먼저 들여보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복도의 근위병 둘을 불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간단한 지시를 내린 후에야 방으로 들어섰다.
업무용 탁자 앞에 있는 무거운 가죽 의자에 앉으면서 기사단장은 상대에게도 쿠션 딸린 의자 하나를 권했다.
“앉으시지.”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제 상사로부터는 등을 돌린 채 우두커니 서서 아주 딴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베스퍼는 그 시선의 끝을 좇았다. 프란첸가 독자의 눈길은 사령관실 벽 한쪽에 기대다시피 놓여 있는 휴식용 의자에 고정된 채였다. 등판이 비스듬하고 좌판이 매우 넓어 차라리 좁은 침상처럼 생긴 의자였다.
기사단장은 뭔가가 삐걱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게 제 부하가 이를 가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빨 부서지겠군. 베스퍼는 차라리 감탄하듯이 한숨을 내쉬며 막시밀리안의 등을 응시했다.
저 의자가 맘에 든 나머지 다른 데에 앉으라니까 지지리 억울하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야 자리를 못 내어 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베스퍼가 묻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몸을 돌려 탁자 맞은편 자리로 다가왔다.
여단장의 얼굴은 그새 더 사납게 변해 있었다. 사령관이 권했던 자리에 앉은 후에도 성기사는 잠시 제 상사를 아예 눈빛으로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제가 생각해도 예의가 아니긴 아니었던지 곧 시선을 내리깔았다. 베스퍼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일단 물어야 할 말부터 묻기로 했다.
“병영의 지리 자료실을 관리하는 병사한테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최근 지도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찾아보신 거요?”
“당연히 저도 군사 지리는 꿰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막시밀리안이 찡그린 채로 답했다.
“전에도 지도는 자주 빌려 갔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요 몇 달 우리는 계속 성황국 수도권을 방어하는 중 아닙니까. 타 도시 탈환이 아니라. 그로쉔 왕국 수도로 향하는 경로 상황은 왜 자꾸 열람하신 거냔 말이오.”
“그로쉔으로 ‘향한다’니요. 그 반대입니다.”
거의 면박을 주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그로쉔 수도로부터 이곳 수도까지의 접근 경로들을 미리 파악해 두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지금 사업가 협회가 마물과 흑마법사, 시민군 주력 부대를 끌고 거기 주둔하고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분명 직접 여기까지 들이칠 텐데요.”
“마왕군 주력 부대에 대한 방어책을 마련하려고, 가능한 침입 경로들을 미리 살펴 두려 하셨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 방향이 맞단 말이지요. 경께서 곧 그로쉔으로 도망쳐 마왕군에 항복하려고 알아 두신 게 아니고?”
막시밀리안이 기묘하게 픽 웃었다.
“제가 성기사로서 지금까지 해 온 짓들이 있는데, 그 정도도 못 믿어 주십니까?”
“짓들?”
“단어는…… 넘어가시죠.”
“솔직히 경의 상태가 요즘 워낙 이상해서 그럽니다. 반…….”
반항기 맞은 꼬마도 아니고, 하고 뱉으려다가 베스퍼는 슬쩍 말을 바꾸었다.
“……몸도 영 안 좋아 보이시고요. 성황 폐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예, 늘 여러모로 걱정이 많으신 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죽대듯이 말하는 걸 들으며 베스퍼는 성황이 프란첸에게 이미 감시를 붙여 두었으며, 프란첸 역시 진작에 그 점을 알아챈 것 같다고 짐작했다.
기사단장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떠보기로 했다. 사령관은 만약 자기 부하가 역심을 품은 게 사실로 드러난다 해도 그 계기가 된 게 자신의 행실은 아니길 바랐다. 그래야 향후 무슨 일이 있든 베스퍼 자신은 부채감이 덜할 터였다.
“혹시 근간 제가 뭔가 경의 심기를 건드린 게 있습니까?”
“예?”
“그래서 제게 화가 나서 그 꼴이 되어 버리신 거요? 일주일쯤 전인가, 경이 황궁 회의에 지각하셨을 때가 있지요. 그때부터 계속 절 죽이고 싶다는 얼굴이십니다.”
그럴 리가요, 하고 막시밀리안은 대답하려고 했다.
참아야 한다고 명백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뇌 속에 온통 검은 피가 두근대며 속삭였다. 왜?
나를 또 가둬 두려고? 또? 막시밀리안은 혀 밑에 묶어 두고 있던 이름을 결국 불쑥 뱉어 내고 말았다.
“요른한테 사병 보내셨습니까?”
“음?”
“요른, 한테.”
그 짧은 이름에 잠식되기라도 한 듯이, 발음하는 동안 성기사의 안색이 기묘하게 물들었고 음색도 금방 변했다.
상대가 관자놀이와 목까지 순식간에 정맥이 돋아올라 서슬이 파래진 걸 보며 기사단장도 거의 반사적으로 다리를 긴장시켰다. 언제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피할 수 있게끔.
“프란첸 경?”
“처음이 아니었겠지.”
여단장은 입술이 질리다 못해 차라리 거뭇해진 채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소위 ‘거래’가 처음이 아니었겠지. 몇 번이나 시도하셨습니까? 그 빌어먹을 세 가지 예외를…….”
막시밀리안이 웃었다.
“그나마, 그래도, 말해 두지 않았더라면, 진작부터 그 애를.”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일주일 전 호르스트가 죽은 날 말입니다. 그날 저녁에 요른에게 수하 보병을 보냈죠? 그 자들에게 뭘 하라고 시켰습니까?”
“안타깝지만 성황께서는 내 조카의 죽음에 보상은커녕, 원인이 된 자를 문책할 절차조차 준비해 주려 들지 않으셨소.”
베스퍼가 맥락을 눈치채고는 침착하게 답했다.
“그러니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알아서 챙겨 줄 수밖에…….”
그러나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프란첸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단번에 탁자를, 그러니까 그 무거운 업무용 마호가니 탁자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휙 뒤집어 창 쪽으로 던져 버리고, 그 너머 가죽 의자에 앉아 있던 베스퍼 폰 크라우스의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베스퍼도 낌새를 눈치채고 일어나 피하려고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무릎을 반나마 펴기도 전에 젊은 여단장이 군화 신은 발뒤꿈치로 허벅지를 쾅 내려쳐 도로 눌러 앉혔고, 상대의 두꺼운 목을 오른손으로 갈퀴처럼 틀어잡은 채 의자째 밀어 뒷벽에 처박았다.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 버리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몸 전체가 덜거덕거리도록 충격을 받은 채 베스퍼의 얼굴이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변했다.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그는 양손으로 젊은 여단장의 손목을 쥐어 제 목에서 떼어 놓으려 애썼지만, 효과는 없다시피 했다.
안 되는군. 그 와중에도 베스퍼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검으로 대면 몰라도 완력으로만 겨룬다면 분명 프란첸을 이길 수도 있을 거라고 그는 평소 확신해 왔다. 그러나 스물 중반의 육신에 광기까지 더해지자 이기기는커녕 버티기도 무리였다. 고작 한 손으로 목을 졸리고 있을 뿐인데, 양손을 다 동원해도 그 손아귀를 물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러모로 절망한 채로 사령관은 무슨 말이든 입 모양으로나마 내어 보려 애썼다. 프란……첸, 경, 후회…….
그러나 눈이 뒤집히면서 베스퍼는 곧 아무것도 말할 수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상대의 악마처럼 시커멓게 번득이는 낯, 동공에 삼켜질 듯 황폐해진 눈동자, 평소 단아한 얼굴의 후광처럼 드리웠던 흑발이 이제는 저주로 자라난 덩굴처럼 관자놀이며 입술께에 엉겨 붙은 모습도 그는 보지 못했다.
거의 증오로만 뭉쳐 낸 살덩이 같은 표정으로 여단장은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베스퍼의 귓가에는 그 몇몇 조각만 와 닿았다. 내…….
내 요른에게…….
기사단장은 목이 갑자기 다소나마 편해진 걸 느꼈다.
헉 소리가 나도록 숨을 들이마시며 베스퍼는 보랏빛으로 녹아 가던 얼굴을 뒤로 휙 꺾었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산소를 구했다. 귓가에 소란이 와 닿았지만 그는 아직 그 모든 잡음이 무슨 의미인지는 해석해 낼 수가 없었다. 뇌가 다시금 혈액과 공기를 들이마시고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헐떡대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부터 머리에 빠른 속도로 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베스퍼는 누군가 자기 곁에서 마법을 써 주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병영에 상주하는 치료술사들 중 하나였다.
고통이 잦아들고 시야도 어느 정도 맑아지자 베스퍼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이 기사 둘에게 팔이 붙들려 서 있었고, 그 주변에 아까 베스퍼 자신이 지시를 내려 두었던 근위병 둘이 서 있었다. 시킨 대로 문 앞에 서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사태를 제때 파악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저희 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거 같자 기사들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사실 기사들이라도 마찬가지다. 저런 평범한 기사가 둘이든 넷이든 프란첸을 멈출 수 있었을 리가 없다고 베스퍼는 평소 전장에서의 그를, 그리고 아까 그의 무식한 완력을 상기하며 되뇌었다. 어떤 이유로든 막시밀리안 자신이 먼저 행동을 멈췄던 것이리라.
“죄송합니다.”
근위병 중 한 명이 말했다.
“엿보긴 했는데, 설마 해서, 그, 그리고 어차피 저희로서는…… 기사님들께 청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어.”
긁힌 소리로 말하며 베스퍼는 방을 둘러보았다. 탁자는 창을 깨고 창틀까지 우그러뜨린 다음 뜰로 떨어져 버렸고, 의자는 질질 끌리면서 카펫 바닥을 다 긁어 놓았으며,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처박혔던 벽에도 금이 가 있어서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여단장이 총사령관을 죽이려 든 현장을 목도한 병사들의 얼굴은 창백했고, 치료술사도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기사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병은 그렇다 쳐도 이 치료술사는 협회에서도 직급이 높고 출신 가문도 잘난 편이다. 마도 협회도 아닌 기사단 쪽 상관이 침묵을 강요한다고 호락호락 들어줄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기사를 불러올 정도였다면 병영 내에도 이미 이 소동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으리라.
이래저래 사태를 조용히 처리하기에는 늦어 버린 셈이다. 베스퍼는 기사에게 명했다.
“일단 구금소로 데려가.”
목의 통증이 아직 상당했기에 그는 숨을 한 번 멈춘 후에야 마저 덧붙였다.
“오늘 밤은 거기 두고, 내일 약식 재판을 해서 절차를 결정하지.”
기사 둘이 짧게 답하고는 막시밀리안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두려움이 섞인 동작이었으나 여단장은 얌전히 따랐다.
곧 막시밀리안은 수갑을 찬 채로 병영 내 지하의 임시 구금소에 갇혔다. 그날은 다른 수감자는 없었던지라 구금소 전체에 그 혼자였고, 개중에서도 독방에 배정되어 사위는 더욱 고요했다.
밤이 늦어서야 방문자 한 명이 찾아왔다.
병영 홀에서부터 지하로 들어오는 석조 복도 위로 목제 의족이 짚어오는 소리가 제법 청명하게 울려 퍼졌던 탓에 막시밀리안은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간수가 동행하려는 듯 말을 건네는 소리도 들렸지만, 금발의 연구소장은 웃으며 거절하고서는 결국 혼자서 그 위험한 괴물이 갇힌 방으로 걸음 하여 철창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프란첸 경.”
막시밀리안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이라 연구소장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지만, 청년은 다행히 곧 스스로 시선을 내리깔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움베르토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실 오늘 오전 면담 결과를 꽤 기대를 품고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오후에 병영에 들러서 베스퍼한테 프란첸과의 면담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물어보고, 용사 후보가 정말로 역심을 품고 있다는 심증이 들면 내일쯤 행동에 나서려고 했다. 상대를 자택에 초대해서 움베르토 자신도 내통자라는 걸 밝히고, 필립에게 연락도 해 주고, 흑마법사들에게 경호도 부탁해서 그로쉔으로 쉽게 도주할 수 있게끔 도와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움베르토가 소장실을 나서기 직전에 병사 한 명이 편지를 가져왔다. 괴상한 초청장을 읽어 보며 연구소장은 깨달았다. 멍청한 젊은 놈이 일을 망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작살을 내 버렸다는 걸 말이다.
‘이 인간, 성격만 망가진 게 아니라 지능까지 낮아진 건 아니겠지.’
살짝 근심을 품은 채 움베르토는 철창 사이로 저주받은 용사 후보의 안색을 살폈다. 이제 곧 여단장 직급을 박탈당할, 아마도 더는 성기사도 아니게 될 청년은 한참을 더 숨을 다스린 후에야 입을 열어 상대에게 전했다.
“어느 쪽이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젠가 저를 자택으로 초대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막시밀리안이 찡그린 채 내뱉었다.
“그건 이제 성사되기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경께서는 이 독방으로 초대받으신 꼴이니, 여기서 말씀해 주시지요. 초대하셔서 저를 어느 쪽으로 이끌어 주려 하셨던 건지요.”
다소 애매한 질문을 듣고도 움베르토는 금방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제가 올 걸 알고 계셨습니까?”
“일주일 전 제 모습을 보시고는,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 하셨죠.”
프란첸이 가만가만 설명했다.
“폰 사센 경께서는 십삼 년 전 갑자기 불구가 되셨고, 그 직후 불가촉 명령도 받으셨다고 압니다. 세상을 증오하며 저주에 걸리셨을 법도 하지요. 그런데 지금은 몸은 여전하셔도 정신은 멀쩡해 보이시니 나으셨다고 봐야죠. 그렇게 스스로 걸렸다가 나으셨으니 치료법도 안다고 자신하실 수 있었던 거겠고요.”
“……잘 맞추셨습니다.”
“거기다가 뛰어난 마도 이론가이시기도 하니, 여러모로 저주에 대해 전문가라 하실 수 있죠. 그러니 오늘 특별히 초청받으신 거 아닙니까? 제가 혹시 저주에 걸린 건 아닌지, 치료법은 없을지 살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죠.”
끄덕이며 움베르토는 조금 안도했다. 지능은 멀쩡한가 보군.
막시밀리안의 태도는 마치 상대의 도움 따위는 전혀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음울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연구소장은 그가 지금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구금소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종일 얌전히 앉아 있었던 것도 움베르토가 찾아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그럼 지력은 멀쩡한데 그냥 성질을 못 이겨서 이 사달을 냈다 이거지.’
생각하며 움베르토는 다시금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 지금 꽤 화가 나 있었다. 베스퍼가 여전히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데다가 목에 깊이 손자국이 남은 걸 확인하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움베르토는 가볍게 한번 웃고는 털어 버렸고, 마법으로 허공에 아주 작은 불빛을 하나 띄운 후 왼손 장갑을 벗었다. 여단장이 흑마법에 대한 기초 지식은 있을 거라 짐작했기에 던져 본 수였다.
철창 사이로 흑마법의 전형적인 부작용 사례를 알아보고는 막시밀리안은 안도했고, 상대가 픽 웃으며 도로 장갑을 끼자마자 제안했다.
“다리 때문에 불편하시겠지만, 자택에서 나눴을 얘기를 지금 여기서 해 보지요.”
“그러죠.”
끄덕인 직후 움베르토는 장갑 낀 왼손을 다시 살짝 뒤틀며 주문을 외웠다. 말소리가 그와 자신 사이에만 오가게끔 공기의 통로를 좁혀 두는 것이다. 막시밀리안도 그 동작을 알아보고는 마법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지만, 청년이 뭐라고 말을 내기도 전에 움베르토가 먼저 쏘아붙였다.
“왜 그렇게 멍청하십니까?”
“…….”
“이거 아니면 저거밖에 못 하십니까? 혹시 자기가 지금 뭐 전이랑 엄청 많이 달라졌다고 착각하고 계시는 거 아니죠? 완전 결벽증인 건 똑같거든요. 꽉꽉 다 억누르는 거 아니면 분별없이 터뜨리는 거, 둘 중 하나밖에 못 합니까? 여전히 어느 한쪽은 완벽하게 옳아야만 하고 자기는 옳은 짓만 해야 하지?”
막시밀리안은 항의하려는 듯 턱을 쳐들었으나 결국 철장 너머로 멍하니 벽만 쳐다보며 침묵했다. 움베르토는 반면 속이 좀 시원해진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좀 낫네. 그래, 얘기해 보죠. 일단, 망했어요. 당신 지금 완전히 망했으니까 이젠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로쉔으로 가시려면 훨씬 더 잘난 분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안 남았어요.”
“그분 말인데요.”
막시밀리안이 눈치채고서 미리 청했다.
“부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