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III부 새의 기사
-1장 자유
1.
황궁 1층의 회의실에서 성황은 가볍게 팔짱을 끼고 앉은 채 끈기 있게 기다렸다.
베스퍼나 다른 기사 간부들, 움베르토 등 마법사 협회원들도 침착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여단장이 삼십 분도 더 넘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결국 다들 눈빛이 불안해졌고, 베스퍼의 부관이 슬쩍 말을 흘렸다.
“프란첸 경이 회의에 늦으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없지요.”
결국 기사단장도 성황 쪽을 보며 받아 말했다.
“단 몇 분이라도 늦을 거라면 적어도 미리 병사를 보내 연락을 해 왔을 자입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 듯하니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 보지요. 소식을 기다리면서 프란첸 경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사안부터 논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성하.”
“그렇게 합시다.”
성황도 끄덕거렸다.
회의실 안 공기가 어쩔 수 없이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폰 프란첸 여단장은 언제나 약속 시각 딱 십 분쯤 일찍 도착해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말도 없이 이렇게까지 지각한다면, 어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에 휘말린 게 분명했다.
‘이 시국에 대체 또 무슨 일인지.’
부관이 연락책을 보내려고 밖으로 나간 사이 참석자들은 각자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외곽 프란첸 별성 안의 분위기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용인들은 성주가 어제도 분명 상처 하나 없이 마물을 퇴치하고 돌아오신 걸 맞아들여 식사를 준비하고 목욕물을 데워드렸으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실에 드시는 것까지도 확인하고 밤 인사를 드렸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까지 기침하질 않으시는 건가.
다들 안색이 어두워진 채 일을 손에 못 잡고 있는 걸 보다 못해 하녀장이 젊은 하녀 한 명을 불러, 조찬을 침실로 올려보내라고 시켰다.
“어제 갑자기 출진하셔서 무리하셨던 모양이야. 식사 올려다 드리면서 한번 살펴보거라.”
젊은 하녀는 끄덕거리면서 쟁반에 식사를 받쳐 2층 침실로 향했으나, 몇 번이나 문 앞에서 여쭈어도 답이 없었기에 하릴없이 도로 내려왔다. 의논 끝에 마침내 하인장이 대표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답이 없자 그는 주먹으로 문짝을 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프란첸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침실 안에서 성주는 반응이 없었고, 요른만 누운 채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떨었다.
성주의 넓은 침대를 혼자 차지하고, 비단을 씌운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묻고, 거위 깃털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누운 채 요른은 아까부터 밖에서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인장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숫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기색에 놀랐는지 막시밀리안이 문득 신음했다.
하얀 마법사는 얼른 숨을 멈췄다. 잠옷 차림의 성기사는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괴로운 숨을 내쉬다가 요른의 손을 거의 우그러뜨리듯이 꽉 쥐었다. 새벽부터 거의 한 번도 놓지 않았던 손을.
성기사의 손은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는 데다가 골조부터가 무지막지하게 견고했다. 분명 웬만한 돌조각쯤은 손바닥 안에서 비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리라. 요른은 아파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꾹 참고 제 후원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부르터 살갗이 다 까진 뺨과 벌겋게 부어오른 눈두덩, 피가 말라붙은 입술을.
‘불편해 보여.’
요른은 속으로 우울하게 뇌까렸다.
‘침대에서 자면 좋을 텐데.’
막시밀리안은 카펫 바닥에 무릎을 세워 꿇고 앉아 제 높다란 침대에 기댄 채, 머리만 요른의 어깨 바로 근처의 시트 위에 누이고서 잠들어 있었다. 오른손으로 요른의 왼손을 깍지 끼다시피 꽉 쥐고서. 어떻게 저런 자세로 잘 수가 있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제법 깊이 잠에 빠져 있었다. 반면 푹신한 베개와 이불에 온통 파묻혀 누워서도 요른은 잠은커녕 아까부터 어지럼증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머리가 핑글거렸고 손발이 다 차가웠다. 나침반이 사라져서 중력도 방향도 다 소진되고 현기증밖에 남지 않은 기분. 이런 혼란스러운 때야말로 막시가 지시를 내려 주어야 했다. 그러면 늘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 완전히 머리가 돌아 버린 채로 자신의 손만 붙잡고 있었고, 그래서 애초에 세계가 빙빙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역시 나야.’
요른은 중얼거렸다.
‘나일 수밖에 없잖아. 정말로 내가 이런 짓을…….”
돌이키다 보니 역시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요른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요른은 누워 있던 지난 몇 시간 내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수도 없이 되씹어 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게 돌이켜봐도 결론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론이란 게 너무 두렵고 끔찍하게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요른은 다시 한 번만 더 찬찬히 되짚어 보기로 했다.
일단 막시밀리안은 밤 내내 울었다. 그리고 날이 밝고 나서도 계속 울었다.
그냥 눈물만 흘린 게 아니었다. 물론 저러다 탈수가 오는 게 아닌가 싶게 쏟아 내기도 했지만, 소리가 나오려는 걸 참으려고 애쓰느라 자꾸 입술도 깨물어 대서 피가 맺혔다. 하지만 참은 보람도 없이 그는 결국 거의 비명을 지르며 통곡했다.
그렇게 울다가 막시는 밤중에 딱 한 번 퍼뜩 제정신을 차린 듯 뭐라고 사람다운 말을 하기는 했다. 요른은 귀가 번쩍 뜨여 있는 힘을 다해 음소들을 잡아내려 애썼다. 쉰 소리라 알아듣기는 힘들기는 했지만, 어조만은 지극히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같이 명료한 지시를 내려 주는 태도.
“요른, 회복 마법을 써. 정령 마법 말고, 다른 거.”
그러나 어조만 멀쩡했지 내용은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금지 마법을 쓰라고 막시는 여러 번 요른을 재촉했다. 다름 아닌 그 자신이 그렇게도 철저하게 금지했던 마법을. 제 절대적인 자의 명령에 저항할 수도 없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전에 내려 주었던 명령을 어기느라 혼란스러운 채로 요른은 주문 없이 마법을 써서 자기 몸을 회복시켰다.
그러고 나자 성기사는 다시 상대를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았다. 온몸에 떨림이 전해졌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이 귓가를 계속 할퀴었기 때문에 요른은 그가 또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마법사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러나 몸을 감싼 온기 때문에 머리를 더 굴릴 수가 없었다. 안겨 있는 것만 해도 혼곤한데 막시밀리안은 자꾸 등이나 머리를 쓰다듬었고, 숨이 목덜미를 스치거나 손가락이 허리께까지 더듬어 내려올 때면 요른은 이상한 심연 속으로 까마득히 떨어져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겨우겨우 어떤 마지막 끈 같은 걸 부여잡고 버티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동이 튼 후에야 막시밀리안은 조금 진정한 듯 상대의 몸을 풀어 주었다. 한쪽 손만 여전히 꽉 잡은 채 한참을 더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그는 해가 아예 중천에 떠올랐을 즘에야 갑자기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미, 미안.”
말하면서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손을 놓아 주려는 듯했지만, 손아귀가 빈 찰나 악몽에 쫓긴 듯 소스라치며 도로 매달려왔다. 그러면서 그는 더듬거렸다.
“너 하나도 못 잤지. 나 때문에. 미안해.”
내가 또 내 생각만…… 중얼거리다시피 하면서 그는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리고 이어 괴상한 질문마저 던져 오기 시작했다.
“요른, 이제 기억나?”
은근하게 물으며 성기사는 이마가 닿을 듯 바짝 다가와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은빛 눈동자 너머의 어딘가, 혼의 훨씬 더 깊은 곳을 응시하려는 듯이.
“기억 안 나, 요른? 이제 네 맘대로 해도 돼. 기다릴 필요 없어.”
요른은 질문을 알아들어 보려고 애썼다. 막시가 물어 주는 건데 당연히 답을 해 주고 싶었고, 딱 막시 마음에 들 답만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소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얼린 밀가루 반죽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요른은 눈물만 글썽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막시밀리안도 굳어 버렸다.
“미안해. 나는…….”
더듬대다가 성기사는 왼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더니 자기 머리통을 갈겼다.
제대로 된 주먹질이라 거의 두개골이 빠개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수 번은 후려치고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야 그는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고, 역시나 금방이라도 피가 터져 나올 듯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마법사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대를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고 싶은 듯한 태도였다.
“괜찮아. 내가 꼭 깨워 줄게. 제대로 돌려내 줄게.”
그 목소리에는 그러나 금방 물기가 섞여 들었다.
“미안해. 방법을, 나는, 그게 원래 네 모습이니까, 그냥 말로만 풀어 줘도, 네가 알아듣, 그러니까 네 안의 네가 알아듣고, 자연스럽게 돌아올, 깨어날 줄 알았…… 미안, 해. 내가 해 온 짓이 있는데 그렇게 간단히 될 리가……. 어리석었어. 또 어리석었……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른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마법사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자신의 의심을 반증하는 현상이 나타나 주기를, 막시가 어서 평소의 낭랑한 투로 명령을 내려 주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괴롭지만 오로지 막시가 건네 준 말이기에 따라야만 하는 그런 명령을 말이다. 그러나 그의 성기사는 더없이 포근하게 웃기만 했다.
“일단 자자, 요른. 너 내일, 아니 오늘…….”
막시는 행복에 들뜬 투로 다음 문장을 이었다.
“학원 출근하는 날이던가? 그렇지, 자료실 정리하러?”
“응.”
“출근…….”
성기사가 바보같이 헤헤 웃는 바람에 요른은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출근하고, 퇴근, 네 숲속 집, 하루, 또 다음 날, 그렇지, 요른. 내일, 내일이 있고.”
“응, 그런데 막시…….”
“집에 데려다줄게. 아니, 너무 늦었다. 여기서 조금만 자. 그럼 그다음에 바로 학원으로 데려다줄게. 목욕도 여기서 하면 되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막시밀리안, 너 상태가 이상해.”
“한 시간만 자.”
요른이 웅얼대는 걸 싹 무시하고 명했다가 막시는 문득 제풀에 흠칫하더니 고쳐 뱉었다.
“아니, 잘못 말했다. 출근 같은 거 하지 마. 그런 거 그냥 빼먹어. 아니, 네가 가고 싶으면 가고…… 내 말은, 네 좋을 대로 해.”
“어?”
“이제부터는 다 네 마음대로 하는 거야.”
음성이 서릿발같이 허공을 갈랐다.
“알았지? 앞으로는 꼭, 뭐든지 다 네가 좋을 대로만 해야만 해. 이건 명…….”
어제저녁 이후 처음 들어 보는, 평소의 막시밀리안과 완전히 똑같은 어조였다. 이해를 못 하면서도 요른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성기사는 제 말투에 제가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이건…….”
요른은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성기사는 한참 후에야 다시 운을 떼었지만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숙였고, 두어 차례 눈물을 떨구고서야 속삭였다.
“이건 명령이 아니야. 부탁이야. 나는, 내 말은…… 사랑해.”
새하얀 오른손을 잡고 있던 제 오른손에 다급하게 더 힘을 주며 그는 한 음절 한 음절 조심스레 내놓았다.
“나는,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요른. 그러니까 네가 뭘 하든 네가 하는 일이라면 나는 행복할 거야. 뭐든지.”
요른은 눈앞의 성기사를 내려다보았다.
프란첸의 독자는 제 집안의 피후원자보다 키가 세 치는 더 컸기에 요른은 평소에 늘 그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이제는 그 새카만 뒤통수며 등허리를 굽어볼 수밖에 없었다. 막시가 몸을 확 낮춰 바닥에 엎드려 버린 탓이었다.
요른의 손을 여전히 꽉 잡은 채, 강철 같은 몸을 일부러 구기듯이 웅크린 채로 성기사는 더듬더듬 마치 상대에게 바치듯이 말을 이어 갔다. 목소리가 엉망진창인 걸 감안하더라도 그를 아는 누구라도 생경해할 만한 어조였고 태도였다. 그 꼴을 본다면 부모라 해도 외모만 비슷한 다른 자라 여길 지경이었다.
요른은 그가 지금 빌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생 비는 법 따위 배워 본 적이 없는 자라 영 서툴렀지만, 그 대귀족가 청년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연약한 음성이 요른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 그러니까 요른, 이제는 내 말 같은 건 듣지 마. 남의 말도 듣지 마. 금지된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부디 네가 원하는 대로만 자유롭게 살아 줘. 네 자신이기만 하면 돼. 아니, 그래야만 해. 부탁할게. 제발.”
‘안 돼.’
“사랑해.”
‘안…….’
말끝에 성기사의 목소리가 잠겨 들며 끊겨 버렸고 요른은 절망에 빠졌다. 이제는 더 물러날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그 고백이 명백한 증거였다.
미칠 듯이 행복한 가운데 하얀 마법사는 눈물을 참느라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멈추었고, 자신의 행복에 들뜬 피를 저주했다. 그는 왼손을 허공으로 살짝 들어 올린 채 주문을 욀 준비를 했다. 백색 불꽃의 주문.
지금 당장 자살해야 한다. 그러면 막시밀리안은 홀림 마법에서 풀려나오리라.
‘미안, 미안해, 막시, 결국 너까지…… 미안해.’
이를 꽉 악문 채, 요른은 상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자기 몸을 태워 버릴 준비를 했다. 죄책감에 전신이 바늘로 찔리듯이 아팠다. 막시밀리안은 무척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린다나 카를의 말대로, 자신은 그를 십여 년의 세월에 걸쳐 천천히 잠식해 온 게 틀림없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완성을 본 것이다.
그 둘의 말이 맞았다. 막시밀리안은 위해서라면 자신은 진작에 죽어 줬어야 했다. 뒤늦은 과제를 해치우기 위해 요른은 주문의 첫음절을 혀끝에 맺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의심 한 줄기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마법사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술사가 죽는다고 해서 꼭 마법이 풀려 준다는 보장이 있을까.
‘혹시 이게 내가 막시밀리안의 갈비뼈에 새겨 둔 진과 얽혀 있는 건 아닐까.’
요른이 그 진을 막시의 몸에 새긴 건 딱 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요른의 머리와 막시의 심장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자라 온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그 경로를 타고 홀림 마법이 계속 흘러 들어갔던 거라면, 막시의 몸 자체가 이미 마법에 잠식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요른이 죽어 봤자 막시는 계속 홀린 채로 남는다. 죽은 자에게 홀린 꼴이 될 뿐이다.
‘그러면 오히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날 따라서 자살을 한다거나.’
주워섬기면서도 요른은 이런 가정이 실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술사가 죽어도 마법이 남는 경우는 드물지만 간혹 있긴 했다. 하지만 요른은 그런 의심도 다 머릿속 괴물의 꼬드김이 아닌가 반문했다. 괴물이 막시밀리안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요른까지 홀리려 들고 있는 것이다.
요른은 자신이 이미 꿈속에 갇혀 버렸다고 느꼈다. 원하던 일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이루어져 버려서, 아무리 가짜라도 차마 깰 수가 없는, 책장을 덮기가 싫은 소설 같은 꿈.
그 표현이 상대의 목소리에 실려 나왔던 순간 이미 걸려든 터였다. 그가 그런 말을 해 주었던 세계 속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변명 하나만 주어져도 거기 마치 생명줄인 양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핑계가 떠오르기 전에 얼른 자살하려고 했지만 늦어 버렸다.
―사랑해.
“요른?”
막시밀리안이 그새 고개를 들어 요른을 보더니 바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왜, 왜 울어. 괜찮아?”
그는 이미 제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상대의 왼손을 들어 올려 제 가슴에 댔고, 다른 쪽 손으로는 어깨마저 쓸어내렸다. 그러나 마법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점점 더 파리해지기만 하자 그는 문득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어 주춤했다.
“미안해.”
막시가 또 사과했다.
“미안. 아까부터 너무, 네 허락도 없이 막 건드렸지. 우리 이제 애들도 아닌데.”
그는 손을 떼고 무릎을 꿇은 채 두 걸음쯤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다시금 몸을 낮추며 사과를 반복했다.
요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닿아 있노라면 이 가짜 꿈이 너무 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여기서 깨어날, 아니, 막시밀리안을 깨워 줄 방법을 찾아봐야 할 때였다.
그러나 요른은 곧 상대가 엎드린 채 벌벌 떨기 시작한 걸 눈치챘다. 한겨울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사람처럼 떨었고 호흡마저 불안해졌기 때문에, 요른은 걱정이 되어 그를 내려다보았고, 그 순간 막시도 고개를 살짝 드는 바람에 둘은 눈이 마주쳤다. 막시밀리안은 턱을 꽉 악문 채 올려다보다가 결국 빌었다.
“손만 잡고 있으면 안 될…….”
말끝이 무너지면서 그가 결국 또 울컥 눈물을 흘려 냈다.
“무, 무서워서 그래. 미안해. 한쪽 손만, 부탁…… 미안해.”
거절해야 한다. 하얀 마법사는 생각했다. 제정신인 막시밀리안이라면 이걸 원했을 리가 없다. 요른의 머릿속에 열일곱 살 때의 장면이 지나갔다. 요른은 그때 손을 내밀었고, 막시밀리안은 뿌리치고 말채찍으로 얼굴을 갈겼다.
채찍이 기억 속에서부터 튀어나와 바로 눈두덩 옆을 갈기는 듯한 느낌에 요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막시밀리안이 지었던 끔찍하게 경멸하는 듯한 표정도 눈꺼풀 밑으로 함께 떠올랐다.
‘그게 진짜 막시밀리안이야.’
요른은 되뇌었다. 맞은 상처는 나았지만, 그 표정과 음성이 뇌리에 새겨 놓은 낙인은 바로 어제 것처럼 생생했다.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이 홀려 버린 가짜고 그때의 그가 진짜다. 그러니까 그걸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나 눈을 뜨자 단 두 걸음 앞에서 스물다섯 살의 막시밀리안이 엎드려 숨도 못 쉴 정도로 떨고 있었다.
“막시.”
요른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쨌거나 저건 막시밀리안의 몸이다. 그 머리고, 눈이며 심장이다. 홀렸든 아니든 바로 그의 몸과 혼이 지금 저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주저하면서도 요른은 주먹을 쥔 채 바닥을 짚고 있던 막시밀리안의 오른손에 제 왼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얼굴로 채찍이 날아올 것 같아서 마법사는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요른은 하마터면 신음할 뻔했다. 손가락들이 파고든 곳이 멍이 들다 못해 관절이 뒤틀릴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그 고통이 채찍의 낙인을 씻어 주는 듯이 느꼈고, 영원히 이렇게 아팠으면 하고 소망했다.
요른이 순순히 응하자 막시밀리안은 곧 손가락을 얽어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잡고 있은 다음에야 조금 진정된 듯 그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고, 천천히 말을 내놓았다.
“일단 조금만 자자. 너 밤새웠잖아.”
그는 무릎을 펴고 제 몸을 일으키면서 요른도 같이 손을 잡아 일으킬 듯 잡아당겼지만, 흠칫하더니 그만두고 도로 꿇어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요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자도 괜찮겠어?”
상대가 아무 답이 없자 그는 재차 권했다.
“집에 가고 싶으면 데려다줄게. 여기서 쉬어도 괜찮으면 침대로 가자. 네가 골라 줘.”
완전히 쉬어 버린 목으로 말하는 걸 들으며 요른은 가슴이 아팠고, 동시에 조금씩 울컥울컥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하잖은가. 마법사는 생각했다. 자신은 스스로 제대로 된 판단은 하나도 하지 못한다. 기억도 다 틀리게 하고, 무엇보다 본성 자체가 끔찍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나쁜 짓만 저질러 버린다. 그래서 늘 막시가 이끌어 줘야만 그나마 사람 흉내를 내며 살 수가 있었던 거다.
그러나 지금의 막시밀리안은 명령을 내어 주지 못한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 고결하고 드높던 성기사는 이제 몸을 한껏 낮춘 채, 시선마저도 아래에서 위로만 향하며 상대의 답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답을 바로 명령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한 채로.
‘이게 정말로 내 홀림 마법일까.’
문득 그 가정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갔다.
‘내가 정말로 이런 걸 원했다고?’
생각하자 뭐라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다. 막시밀리안에게 홀림 마법을 썼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홀려도 하필 이런 식으로 홀렸단 말인가.
요른은 물론 자신이 구제 불능의 병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이런 방향의 병신이기까지 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의식 속에서라지만, 모든 것에 대해 답을 주고 옳은 길로 이끌어 줄 유일한 사람을 이런 꼴로 몰락시키고 싶어 했으리라고는 말이다.
이건 요른이 아는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정말로 막시밀리안을 홀리고 싶었다면, 오히려……. 그런 와중에 성기사가 다시 한번 물어 오는 바람에 그는 그만 그 말끝을 거의 자르듯이 하며 끼어들고 말았다.
“어떻게 하고 싶어, 요른?”
“막시.”
요른은 무릎을 꿇은 채 일부러 머리카락이 바닥에 쓸릴 정도로 몸을 바싹 낮췄다. 막시가 다시 엎드린다 해도 결코 자신을 올려다볼 수는 없게끔.
“미안해. 하지만 난 모르겠어. 네가 가르쳐 줘.”
“어?”
“어떤 게 맞아? 나 자고 가야 해,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야 해?”
마법사는 더 조아릴 데도 남지 않은 고개를 아예 바닥에 짓눌렀다.
“부탁해. 네가 가르쳐 줘.”
그러나 답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요른은 살짝 눈을 들어 보았지만 막시밀리안은 멍한 얼굴로 또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온 채로 고집스레 머리를 도로 처박았다. 한참이나 침묵이 흐른 후에야 마침내 성기사가 전해 왔다.
“……이리 와.”
막시는 상대의 오른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요른도 따라 일어나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침대에 다다라 성주는 시트를 젖히고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상대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왼손으로만 작업하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요른의 겉옷이 여기저기 찢기고 얼룩져 있는 걸 보고 움찔했다. 아까 상처는 치료하라고 명했지만 옷에 대해서는 아무 지시도 하지 않았던 탓이다.
막시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말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대신 그는 요른에게 자리가 괜찮냐, 이불을 더 준비해 줄까, 베개가 너무 높지 않느냐 등을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요른도 완강했다. 자신은 모르겠으니 막시가 부디 올바르게 골라 달라면서, 그는 뻣뻣하게 서서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실랑이를 하다가 가끔씩 운을 뗄 듯 말 듯 숨을 멈췄지만 끝까지 말은 뱉지 못했고, 결국 차라리 상대를 양팔로 덥석 안아다가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누운 채 요른은 상대가 마저 명을 내려 주기를 기다렸다. 당장 잠들라든가, 자지 말라든가, 자기는 자되 꿈은 꾸지 말라든가. 어차피 자꾸 건드려 댈 거면 아예 손으로 눈을 감겨 주거나 머리를 갈겨서 강제로 재워 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시는 침대 곁에 선 채로 상대의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바닥에 무릎을 세워서 꿇고 앉았다.
그도 의자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요른의 손을 차마 놓을 수 없다 보니 택한 바였다. 막시밀리안은 꿇어앉아 침대에 몸을 기댄 채 머리만 요른의 어깨 바로 옆 시트 위로 푹 묻었고, 곧 쌔근대며 잠들어 버렸다.
그 후로 요른은 그야말로 어쩌지도 못한 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 채로 그는 계속 간밤의 일만 돌이켰고, 자신이 홀림 마법을 쓴 걸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며 절망했다. 그러는 사이 창밖으로는 해가 중천에 올랐고, 몇 시간 동안 문밖으로는 사람 여럿이 오갔으며, 하인장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성주의 이름을 불러 대더니 곧 외부인마저 찾아왔다.
“프란첸 경?”
아까보다 더 깊고 또렷한, 허공 멀리까지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데에 익숙한 자의 음성이었다.
요른은 재빨리 주문을 외워 전송 마법을 써 보았다. 문밖에는 기사단 소속 복장을 한 병사가 와서 서 있었고, 하인장은 그 뒤에 몇 걸음 떨어져 서서 손을 모으고 있었다.
요른은 고민했다. 역시 막시밀리안을 깨워 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는 곧 막시밀리안의 새카만 머리통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그런 중대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책임감과 무력감이 겹치면서 현기증이 극도로 심해졌다.
‘말도 안 돼.’
막시밀리안과 한자리에 있을 때 요른이 조금이라도 뭔가 스스로 생각을 해야 했던 적은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미리 꼼꼼하게 지시를 내려 주었고, 현장에서도 늘 요른을 주시하고 있었다. 요른은 다만 어쩌다 그의 뜻을 거스르는 짓을 해 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는 이제 아무 가르침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그를 위해 뭘 어떻게 해 줘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건 내가 아니야. 나일 리가 없어.’
마법사는 아무래도 자신이 이따위 상황을 원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그 스스로도 모르는 괴물이라도 들어앉아 살고 있지 않은 한 그럴 리가 없다.
괴물 새끼. 요른은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미친 자식, 더러운 자식. 평생 날 괴롭혔어. 쓰기 싫은데 매번 홀림 마법이나 쓰게 만들고, 사람들을 꼬드겨 나쁜 짓만 하더니 이제 막시까지 저렇게 만들어 버렸어. 개새끼.
두고 봐. 마법사는 분노 때문에 거의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로 다짐했다. 네놈 마음대로 될 줄 알고. 내가 꼭 막시를 되돌려 놓을 거야. 그를 다시 자유롭게 해 주고 말 거야.
‘질 줄 알고.’
그러나 혼자 결심하는 동안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더 짙어졌고, 병사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요른이 참다못해 신음하기 전에 다행히 막시밀리안이 먼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확 들었다.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었다. 눈은 동공이 퍼진 채 불안하게 움직였고 안색은 파리했다. 그러나 곧 시선의 초점이 천천히 요른의 얼굴 한가운데쯤에 모여들며 안정을 찾았다.
성기사의 눈두덩은 퉁퉁 붓고 흰자위는 거의 피멍이라도 든 듯이 충혈되어 사실 눈동자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요른은 그 시선과 마주치자 어떤 경건한 막과 같은 껍질이 그와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 주위의 다른 모든 소란을 걸러내고 단둘만을 남기는 막. 막시밀리안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잘 잤어?”
한잠도 못 잤지만 요른은 얼른 끄덕여 주었다. 막시밀리안이 그 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또다시 눈물을 떨구는 걸 보며 요른은 실망했다. 자고 나면 혹시라도 마법이 풀려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살짝 품고 있었는데,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병사가 다시 한번 문짝을 때리며 성주의 이름을 불렀다.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이쪽에서부터 마침내 막 바깥의 저쪽 세계를 응시하듯이.
그 표정 때문에 마법사의 등으로 소름이 기어올랐다.
“프란첸 경.”
막시밀리안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성황이 제일 먼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자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를 향했다.
프란첸은 성황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의 여단장은 한 시간도 넘게 지각한 데다가 황국의 주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도 무시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을 보고는 성황도, 기사단장이나 마도 협회원들이나 다른 간부들도 채근하기는커녕 깜짝 놀라 침묵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프란첸 경?”
상대가 자리에 앉은 후에야 기사 간부 중 한 명이 침착하게 물었다.
막시밀리안은 질문을 던진 자 쪽으로 시선을 주긴 했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마도 협회원 자격으로 자리에 와 있던 움베르토는 그 얼굴에서 어떤 특유의 징조들을 알아보고는 놀랐고, 무심코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
젊은 성기사는 왠지 마치 아주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참석해 보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좌중을 하나하나 차례로 돌아보았고, 특히 베스퍼 폰 크라우스와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의 얼굴께에 진득하게 시선을 맺었다. 성황은 모른 척 잔잔한 미소만 돌려보냈지만, 베스퍼는 명백한 살기를 느끼고는 눈을 찡그렸다.
기사단장은 이 유능한 부하가 자신에게 이런 눈길을 보내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미움받을 만한 짓을 한 게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어제만 해도 프란첸이 후원하는, 아니, 사실상 내연 관계에 있는 게 뻔한 마법사 청년에게 보병 둘을 보냈으니까.
알아챘다면 저 여단장은 지금 꽤 속이 끓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났다고 해서 저렇게 얼굴에 드러날 자가 아니었다. 멀쩡하게 웃으면서 속으로 무슨 작전을 짠다면 모를까.
저 프란첸이 저렇게 누군가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건, 적의를 받는 타인의 탓일 수만은 없다. 그보다는 하룻밤 사이에 그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해 버렸다는 쪽이 옳다. 베스퍼는 미심쩍은 마음에 슬쩍 떠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늦으신 거요. 그 얼굴 꼴은 뭡니까?”
그는 턱짓으로 특히 상대의 왼쪽 뺨을 겨누며 꼬집었다.
“어제는 없던 상처인데,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다른 자들도 막시밀리안을 주목한 채 답을 기다렸다.
사실 흉터뿐만이 아니라 성기사의 얼굴은 온통 벌겋게 부어 있었고, 눈두덩은 못 봐줄 지경이었으며, 그나마 드러난 눈자위도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성의 술사한테서 기본적인 처치나마 받고 왔을 걸 감안하면 원래 상태는 훨씬 더 심했으리라. 협회원 하나가 이유를 추측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 부부께서는…… 강녕하신지요?”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프란첸은 한참이나 웃다가 응수했다.
“저보다 당신들과 훨씬 더 자주 연락을 취하는 분들 아닙니까? 알아서 알아보시지요.”
왜 갑자기 열다섯 살 삐뚤어진 애새끼처럼 구는 건가, 이자는.
기사단장은 그러나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너무 강박적으로 똑바르게 살더니만, 결국 삐끗해서 돌아 버렸나.
사람이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하필 이 시국에, 그것도 하룻밤 만에 저렇게 돌아 버릴 수가 있나? 그러나 회의 진행이 너무 늦어진다 싶었는지 성황이 가만히 운을 떼었다.
“늦으신 이유는 나중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첸 경. 일단 경의 의견을 듣고자 기다렸던 사안들이 있으니 그부터 처리하지요.”
맑은 목소리가 울리자 좌중은 비로소 프란첸의 후계자로부터 눈을 돌려 성황을 바라보았고, 성황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보좌관이 일어나서 여러 항목을 차례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참석자들로부터는 이미 의견을 받은 내용이었다. 수도 내 반역자 처리, 마왕군의 전도 견제 전략, 세금을 부역으로 대체하는 방안 등.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을 덧붙이고서 보좌관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마도 학원의 계약직 강사를 성기사 여단장의 파트너로 발탁하는 절차. 요른을 에둘러 가리키는 얘기였다.
“먼저 반역자들의 처리에 대해서부터 고견 부탁드립니다. 재판 절차를 줄이고, 가능한 한 즉각 구금하여 노동형을…… 프란첸 경?”
성황이 음성에 부드럽게 질책하는 기색을 실어 전했다.
“프란첸 경, 무슨 일이 있으신지는 모릅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의무를 다해 집중해 주십시오.”
막시밀리안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귀가 웅웅거려서 그는 아까부터 거의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사실 전혀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등의 통증을 견뎌내고 있었다. 검이 실제로 얹혀 있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일 년간 영혼을 부숴 놓았던 무게는 새로운 몸에도 그대로 파고들었다.
그는 기사단장을 바라보았고, 그가 어떤 목소리로 그 자신과 요른 사이의 소위 거래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지 상기했다. 막시밀리안은 또한 불구의 연구소장이 앉아 있는 곳을 곁눈질하며, 그자가 깡마른 하얀 생물을 데리고 4년간 제 실험실에서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했다.
이어서 그는 투트 크라흐트가의 차녀가 당시 겨우 열 살 남짓이나 되었던 어린애를 어떻게 실험실에 팔아넘겼을지, 다나라는 강사가 어떻게 중간에서 그 거래를 세심하게 도왔을지 상상했다.
이어서 그는 성황이 어떻게 흑마법과 마물의 유래를 숨겨왔던지, 일이 끝나자마자 용사에게 성검을 부수며 자살하기를 강요했던지 되새겼으며, 탁자에 둘러앉은 마도 협회원들이 어떻게 공방 직인을 도와 요른을 몸을 쪼개고 녹여 가마에 넣었을지 상상했다. 그리고 학원 학생들이 요른을 어떻게 취급했던지, 성황국 수도 시민 대부분이 그를 어떤 식으로 대했던지 돌이켰다.
그리고 그 대부분을 막시밀리안 자신이 계획했고, 일부는 모르는 새에 자초했으며 방조했다는 걸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그 빌어먹을 스물다섯 살짜리를 죽이고 그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게 더할 수 없이 기뻤다. 동시에 이 스물일곱 살짜리 영혼도 반드시 갈가리 찢어 없애 버려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전에 이 자리의 모두를 죽여야 했다. 회의장 탁자 밑으로 늘어진 막시밀리안의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성기사는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려 애쓰며 상황을 계산해 보았다. 성황 앞이니만큼 검은 차고 들어오지 않았지만, 복도에서 근위병으로부터 돌려받자마자 돌아서서 치고 들어가면 된다.
베스퍼나 다른 기사들이 지키려 들기야 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몸 상태라면 그는 베스퍼도 몇 합 만에, 아니, 기습에 성공한다면 검을 마주칠 일도 없이 목을 베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움베르토야 말할 것도 없다. 그는 탁월한 연구자지만 몸은 극히 느리니까.
그다음 성황에게로 간다. 물론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성검 없이는 그녀를 상대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헤르타는 주문 없이 마법을 쓰는 자이니, 아마 접근하기도 전에 양팔이 다 분해되어 버릴 거다. 그래도 시도는 할 수 있다.
성황은 반역자에게는 용서가 없다. 자신을 베려고 시도한 데다가 계속 욕설까지 퍼붓는다면, 즉결 처형하지 않고 일부러 감옥에 가두었다가 광장에 끌어내어 본보기로 능지처참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해 준다면야 막시밀리안으로서는 반길 바였다.
다만 그렇게 죽는다면 다나나 린다를 막시밀리안 자신의 손으로 베어 줄 수는 없는 게 한이었다. 성황국 수도 시민이나 마도 학원 졸업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요른이 시내를 돌아다닐 때 적어도 손가락질 한 번씩은 보탰을 자들이나, 교정에서 굳이 제 발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지는 않았더라도, 그 애가 넘어질 때 분명 깔깔대고 뒤에서 부추기기는 했을 자들 말이다.
‘상관없어.’
막시밀리안은 되뇌었다. 그건 요른이 직접 처리하면 될 일이다. 그가 깨어나기만 하면, 말 그대로 최후의 심판이 그들에게 찾아들 테니까. 이 세계는 막시밀리안과 같은 범상한 인간은 머릿속에 제대로 그려볼 수조차 없는 고통으로 들끓게 되리라.
깨어나기만 하면…… 그러나 성기사는 곧 미간을 찡그렸다.
깨어난다고 해서 과연 지금의 저 요른이 그런 심판을 내릴 수가 있을까.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요른의 힘 자체는 지난 십여 년 내내 사라진 적 없이 없었다.
봉인된 후에도 요른은 그 능력만으로 치면 전능에 가깝게 강력한 생물이었다. 그 점은 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에 기꺼이 순종하고 언제나 당하기만 했다.
게다가 지난 세계에서 요른이 각성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는 분명 마왕으로서 강림했었다. 다만 그는 그러고도 스스로의 의지로 성검이 되는 길을 택했던 것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막시밀리안은 탁자 위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알려 줘, 막시.
바로 오늘 새벽에 하얀 생물이 엎드려 청하며 고개를 푹 숙이던 모습이 성기사의 심장을 으스러지도록 아프게 때렸고, 이어 자기가 홀림 마법을 쓴 거라고 우기면서 결국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 벌을 달라고, 제발 때려 달라고 빌던 모습도 연이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성을 떠나오기 전, 막시밀리안은 결국 그에게…….
‘죽어라.’
회의실의 둥근 탁자 앞에 앉은 채 젊은 여단장은 속으로 수없이 뇌까렸다. 막시밀리안, 이 개새끼. 죽어. 백번이라도 더 뒈져 버려. 그러면서도 그는 성황을 노려보던 시선을 내리고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직은 안 된다. 타인을 처단하는 것도 자신을 살해하는 것도 아직은 이르다. 요른부터 제대로 되돌려 놔야 한다.
억지로 권능만 깨워내는 걸로는 안 된다. 그 혼을 제대로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생각하며 막시밀리안은 탁자 위 아무 곳에나 시선을 준 채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학대는 막시밀리안 자신의 마음을 변질시켰던 것처럼 요른의 본질조차도 바꾸어 버렸고, 거침없이 찬란한 날개를 타고났던 자는 스스로 새장과 사슬을 갈구하게 되었다.
‘멍청한 일이야.’
막시밀리안은 실소했다. 자신이 십여 년간 온갖 수법을 다해 짜 맞춘 갑옷인데 이제 벗겨 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작업하는 건 저쪽에서 이쪽으로 작업하는 것과는 결이 전혀 달라서, 방법의 한 끌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약 막시밀리안 자신이 풀어 줄 수 없다면, 대안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여단장은 그 길을 선택하기는 꺼려졌다. 그가 짐작하는 한 요른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가능하다 쳐도 그건 마왕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놓아준다기보다는 또 다른 종류의 족쇄로 얽어매는 꼴이 되리라.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일단 생각을 멈췄고, 눈을 잔뜩 찡그린 채로도 어쨌거나 비로소 입을 열어 성황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안 대부분에 적당히 평범해 보일 만한 답으로 갈무리했지만 요른의 기사 파트너 승진에 대해서만은 혼자서 이질적인 의견을 냈다.
“직접 물어봐서 결정하자구요?”
기사 간부 하나가 되물었다.
“요른에게 말입니까? 프란첸 경, 요른은 일개 시민입니다. 황국이 징병을 명하면 받아들여야 할 따름입니다.”
“그도 자신의 의지는 있습니다.”
“평시라면 여지를 줄 수 있겠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군의 권한이 절대적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부가 응수하며 불안한 시선을 던져 오자 막시밀리안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망하라지.
프란첸은 속으로 되뇌었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사실 대안을 생각하면 요른이 빨리 자신의 기사 파트너가 되어 주는 게 편했다. 막시밀리안은 이전 생애에서의 이 회의 자리를 기억했다. 그때는 기사와 협회원들 대부분이 요른의 발탁에 반대했고, 무엇보다 막시밀리안 자신이 완강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었다.
반면 지금의 막시밀리안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해야 할 처지였다. 여단장에 프란첸인 그가 밀어붙이면 큰 힘이 실릴 테고, 모의전이니 뭐니 하는 시험 과정도 필요 없이 바로 이 자리에서 발탁이 결정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성기사의 머릿속에서 새카만 불꽃 같은 것이 튀면서 계획이며 논리적인 사고 따위는 순식간에 모두 갉아먹혀 버렸다. 프란첸은 찬성의 말을 꺼내는 대신 속으로 뇌까렸다. 시국 핑계 대면서 그딴 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조직이라면 망하라고 해. 탁상 앞에나 앉아서는 누굴 감히 좌지우지하려고 들어.
감히 누구를.
뇌혈관 어딘가에서부터 울컥 어둠이 흘러나와 눈앞이 얼룩졌고, 막시밀리안은 현기증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느라 자신과 동급의 간부 의견을 답도 없이 무시한 꼴이 되어 버렸다.
성황도 마침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고 기사단장도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부관이 대신 뭐라 질책하려 들었지만 헤르타가 손을 들어 말렸다.
“알겠습니다, 프란첸 경. 피징병자의 의사를 아예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 안이 있다면, 그게 이상적이기야 하겠지요. 곧 그의 자택으로 서신을 보내 정식으로 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막시밀리안은 예를 갖춰 감사를 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시선만 피했다.
분위기가 심란한 채로나마 황성 회의가 그럭저럭 끝을 맺자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이명이 귀를 찢어 놓으면서 무릎이 흔들렸다.
‘따라왔군.’
막시밀리안은 깨달았다. 저주가 따라왔다.
아무래도 육신이 바뀐다고 해서 영혼이 받았던 저주가 사라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 스물다섯 살의 몸은 아직은 튼튼하지만 곧 혼에 물들어 망가져 가기 시작하리라.
막시밀리안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지난 생애 때는 성검이 밤마다 몸을 보충해 주었기에 성검 없이는 얼마나 빨리 정신이 망가져 버릴지, 수명이 닳아갈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짧으면 안 되는데.’
오늘 아침 그는 요른에게 천천히 하자고 약속하고서야 성을 빠져나왔다. 요른 자신은 알아듣지도 못할 약속이었지만, 혼자서라도 전하고서 등을 돌렸다. 단숨에 될 일이 아니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네게 꼭 자유를 돌려주겠다고.
요른을 풀어 주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초조한 걸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성황이 뒤에서 그를 묵묵히 응시했고, 움베르토가 몰래 둘을 번갈아 눈짓하다가 곧 막시밀리안의 등을 따랐다.
“프란첸 경.”
회의실에서 좀 멀리 떨어진 복도 한구석까지 와서야 움베르토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고 막시밀리안이 돌아보자 실소를 흘리며 확신했다. 역시 저주받았군.
아직은 아니다. 움베르토는 생각했다. 당분간 관찰하며 정황을 캐보는 게 좋다. 하지만 그가 저주받은 게 확실하다면, 이건 분명 필립에게도 알려 줄 가치가 있는 정보다. 연구소장은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상관하실 바가 아닐 텐데요.”
“제가 치료법을 아는 병 같아서 그럽니다.”
말하면서 성긴 금발의 마법사는 씩 웃었다.
“나중에 한번 제 자택으로 초대드려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부디 응해 주시길.”
* * *
일주일 후 주말. 토요일, 요른은 프란첸 별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구부정하게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세는 구부정했지만 다짐만은 단단했다.
‘내가 잘해야 해.’
막시를 하루라도 빨리 되돌려 놔야 한다. 그러나 방법을 고심하다 보니 요른은 지난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타고 돌았던 쳇바퀴에 또다시 뛰어들어 버렸고, 무력한 멀미를 느꼈다.
요른 스스로 뭔가 일을 벌이려다 보면 틀림없이 나쁜 짓만 하면서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그러니 막시한테 물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막시밀리안이 완전히 돌아 버렸기 때문에 지금 요른 쪽에서 어떻게든 그를 돌려놔야만 한다.
눈물이 울컥 솟았지만 요른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눈물 자국이 남은 채로 성주를 만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완전히 변해 버린 막시는 제 집안의 피후원자가 울 때마다 슬픈 표정이 되어 버리는 데다가, 달래 주려고 그러는지 자꾸 닿아 오기까지 한다. 손도 꼭 잡고, 어깨도 쓸어 주다가 못내 끌어안는다.
그러면 요른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져 버리고, 막시가 계속 그런 상태로 머물러 주길 바라기까지 하게 된다.
“징그러운 새끼.”
마법사는 마차에 앉은 채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더러운 새끼, 변태 자식. 욕을 하며 실컷 쥐어박다가 그는 머릿속 괴물을 위협하듯 중얼거렸다. 기다려. 막시한테 걸린 마법을 풀어 줄 방법만 알아내고 나면 당장 죽여 주지.
두개골부터 빠갤까, 안에서 뇌부터 곤죽을 만들어 버릴까. 괴물 놈을 살해하는 망상을 펼치다 보니 좀 기분이 나아졌다. 혼자 입을 삐죽대며 요른은 막시가 이상해져 버렸던 날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침실로 찾아온 병사를 돌려보낸 후, 막시밀리안은 문을 닫고 다시 요른이 누워 있는 쪽으로 돌아와 속삭였다.
“미안해. 깨워 버렸네.”
“으응, 아니.”
요른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젓다가 움찔했다. 막시밀리안이 도로 침대 옆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손을 잡았던 탓이다.
“요른, 그…… 마법 써 줄 수 있을까?”
“응?”
“나 지금 회의 가 봐야 할 거 같아. 사실 가기 싫은데, 당분간은 눈가림…… 아무튼 가야 해. 그런데 이대로는 아무래도 못, 갈, 거 같아서.”
그는 웃고 있었지만, 안색은 파리하게 질린 채였다.
“손, 놓아야 하면, 못 갈 거 같아. 아까 저기 서 있는 동안에도.”
막시밀리안이 문 쪽을 살짝 턱짓해 보이며 말했다. 고개는 돌리지 못한 채, 눈은 요른의 얼굴에 고정한 채로. 마법사의 손으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너, 없어졌……을까 봐 좀, 아니, 많이, 무서웠어. 부탁할게. 마법, 써 줘.”
“무슨 마법…… 얘기야?”
“네가 그동안 나한테 걸어 뒀던 거랑 같은 마법.”
성기사가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이 방으로 찾아왔잖아. 내 몸에 뭔가 마법을 걸어 둔 덕에 내 상태가 변했다는 걸 눈치챘고, 그래서 신체 전송 마법으로 왔던 거지? 내 뼈 어딘가에 나 몰래 마법진을 새겨 놓고 네 몸이나 도구랑 연결해 둔 거 아냐?”
그는 조금쯤은 예전의 자신을 되찾은 듯 또박또박 읊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른이 얼어붙고 말았다. 들켰구나.
그 와중에도 마법사의 가슴속을 한줄기 어두운 기색이 훑고 지나갔다. 막시밀리안에게 지난 밤 정말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눈치챘는지 막시가 재빨리 다시 입을 열어 설명했다.
“수련하던 중이었어.”
“응?”
“전설 같은 얘기긴 하지만, 최고로 단련된 기사들은 심장 박동도 조절할 수 있다잖아. 그래서 나도 매일 밤 한 번씩 시도해 봤거든. 지금까지는 늘 실패했는데 어제 처음으로 성공한 거야. 네 마법진이 거기 반응한 거 아닐까?”
“심장을 스스로 멈췄, 어?”
“응.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어.”
요른은 멍하니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례한 표현이 마구 떠올랐다. 막시가 단련에 무리하게 힘쓰는 거야 전부터 알았지만, 별 정신 나간 짓도 다 하는구나. 그러다가 다시 뛰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마법 써 줘서 고마워, 요른.”
“어, 어?”
“나한테 그렇게 신경을 써 줘서 고마워.”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어서 또렷하게 전해 왔다.
“하지만 이젠 해제해 줘. 사정이 좀…… 내 상태가 네게 계속 전달되는 건 당분간은 안 좋을 거 같아. 부탁할게.”
“응, 응, 물론이야. 잘못했…….”
“대신에 네 몸에 같은 마법을 걸어 주면 좋겠어.”
요른은 성기사가 부드럽지만 완고하게 청하는 걸 들었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고 싶거든. 너처럼 전송 마법으로 뛰어오지는 못하겠지만, 당장 알기라도 하고 싶어.”
“무슨 소리야. 막시, 너 아까부터 이상해.”
“네게 무슨 일…… 네가 많이 다치거나 위험해지면 내가 바로 알게 해 줘. 할 수 있어? 아, 대충 알겠다. 네 심장과 연동해서 내 두개골 안쪽에 진을 새기면 되는 거지? 그래. 뇌로 직접 신호가 오면 좋겠네.”
“막시밀리안!”
요른이 못 견뎌 소리를 질러 놓고는 제풀에 더듬거렸다.
“미, 미안해. 그렇지만 나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응?”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를 그저 말끄러미 응시하는 동안, 요른은 숨을 한 번 훅 들이켠 다음 겨우겨우 한마디씩 끊어 냈다.
“이건, 진짜 네가, 아니야. 내가, 너한테…….”
“홀림 마법을 건 거라고? 아니야.”
그러나 막시가 먼저 딱 잘라 내는 바람에 요른은 멍하니 입만 벌렸다.
“이거 나 맞아. 내가 진짜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니까, 넌 쓸데없는 생각 할 필요 없어. 내 말만 들으면 된……. 아니, 이게 아니라. 미안해. 아무튼 넌 전에도 홀림 마법 같은 거 쓴 적 없어. 다 내가 거짓말했던 거야. 이래봤자 넌 또, 네가 내 머리를 조종해서 이렇게 말하게끔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성기사가 정말로 상대에게 묻는다기보다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하며 끄덕거렸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야 잘 알아. 하지만 이건 진짜 나 맞아. 지금 당장 못 믿는 건 알아. 당연해. 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앞으로 꼭 믿게 해 줄게. 꼭.”
“아, 아니야. 알잖아, 막시.”
“꼭 풀어 줄게, 요른.”
“아니란 말야.”
하얀 청년이 울먹이며 항의했다.
“내가 널 풀어 줘야 한단 말이야. 넌 나 잘 알잖아, 막시. 이거 내 짓이야. 지금 이건 진짜 네가 아니란 말이야.”
“그래, 그래. 한 번에 풀릴 얘기가 아닌 건 알아. 나중에 얘기하자. 요른, 일단 지금은 마법 좀 써 줄 수 있어? 부탁…….”
“그거 금지 마법이잖아.”
요른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쓰면 안 되잖아. 이거 너 아니야. 내가 홀린 거란 말이야. 돌아와, 막시. 잘못했어.”
막시밀리안이 놀라서 얼른 몸을 일으켜 요른의 양 손목을 꽉 잡았다. 요른이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갈기려 들었기 때문이다. 눈물 콧물이 다 흐르게 울면서 새하얀 청년이 계속 뱉어 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벌줘, 막시. 나 금지 마법 썼잖아. 몇 개나 썼고 네 몸에도 썼잖아. 돌아와, 돌아와서 벌 달란 말이야…….”
흐느껴대는 양을 바라보며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를 부득 갈았지만, 곧 눈을 내리감고 안색을 정리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있어.”
손목이 잡힌 채 요른은 자동인형처럼 동작을 딱 멈췄다. 막시밀리안은 그의 팔을 놓아 주고는, 침대에서 두 발짝쯤 떨어진 곳에 의자를 하나 놓고 앉았다.
의자 위에 똑바로 앉은 채 그는 상대의 눈을 쏘듯이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판결이 떨어지기 직전의 침묵과 같은 차가운 시선을 마주치자 요른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머리 위로 낭랑한 명이 떨어졌다.
“마법을 써, 요른.”
“그치만…….”
“너 때문에 지금 회의에 갈 수가 없잖아.”
막시밀리안이 혀를 찼다.
“넌 우리 집안 피후원자야. 내가 프란첸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널 더 잘 살펴 주겠다는 건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내게 감시당하는 게 싫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빨리 진을 새겨. 지금 황궁 회의가 거의 한 시간째 여단장 없이 진행되고 있는 셈인데, 그 피해는 이제부터 일 분 일 초가 네 책임이야.”
요른은 서둘러 제 심장 바로 위 갈비뼈에 진을 새겼고, 거기 연동된 진을 막시밀리안의 두개골 안쪽에 새기고 잉크를 부어 넣고 굳혔다. 마법이 완성되었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막시밀리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상대에게 다가왔다.
요른은 침대에 엉거주춤 앉은 채 기다렸다. 잘 알 수가 없었다. 금지 마법을 썼다고 혼이 날 건지, 아니면 오히려 빨리 써 주지를 않고 지체했다고 혼이 날 건지.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침상 곁에 서서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엉뚱한 소리만 툭 던져 왔다.
“건드릴게.”
“어?”
“앞으로는 난 너를 건드릴 거야.”
“그렇지만…….”
“쓸모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까 받아들여.”
요른은 막시밀리안을 올려다보았다가 금방 움츠러들었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기에, 정말로 싫은데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만져야만 한다는 티가 났다. 이어서 성기사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살이 베일 듯한 혐오를 섞어 뱉어 냈다.
“손도 잡고, 안기도 할 거야. 알았어?”
“응.”
요른이 얌전히 끄덕거렸다.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와 요른을 끌어안았다.
회의에 늦는다고 하지 않았나. 요른이 걱정하기 시작했을 즘에야 그는 비로소 팔을 풀어 주며 천천히 몸을 물렸다. 그의 머리칼이 요른의 뺨과 코끝을 스쳤고 아찔한 찰나 숨결이 서로 섞여 들었다.
머리가 텅 빈 채 하얀 청년은 무언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그대로 돌아서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갈게. 넌 신체 전송 마법 써서 돌아가.”
“응…….”
“참, 집에 도착하면 도착했다고 나한테 꼭 머리로 전해 주고. 알았지?”
끄덕이며 요른은 방금 자신이 뭘 기다렸던가 돌이켰고, 무심코 아랫입술 안쪽을 살짝 핥았다. 막시가 문을 열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천천히 하자, 요른.”
“응?”
성기사는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등 뒤로 문을 닫고 나갔다.
요른은 혼자 방에 남아 있다가 결국 금지 마법을 써서 집으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막시는 막시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좀 안심이 된 터였다. 마지막에 막시는 조금 원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막시밀리안은 저녁 늦게 숲의 사택으로 찾아왔고, 요른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눈이 다 감기도록 웃었다.
요른은 깜짝 놀랐고, 막시밀리안이 바보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 큰 어른이 저렇게 넋을 빼고 웃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저 프란첸이. 아무래도 자신이 그를 홀리면서 뇌를 완전히 잘못 주물러 버린 게 틀림없었다.
요른은 이를 꽉 깨문 채 어쨌거나 상대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막시밀리안은 방에 들어와서 거실과 부엌 사이의 네모난 식탁 앞에 앉았고, 요른이 차를 준비하는 내내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시선으로는 요른의 머리쯤을 계속 쫓으면서. 요른은 찻주전자로 바로 그 자기 머리통을 깨 버리고 싶었다. 대체 어쩌다가 나는 대륙 최고의 성기사를 저 꼴로 만들어 버린 걸까.
“요른.”
막시밀리안이 요른이 차를 받쳐 들고 식탁 쪽으로 다가오자 가만히 불렀다.
“응?”
찻잔을 막시 앞에 내려놓으면서 마법사는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막시는 그 대리석을 깎아 놓은 듯 단아한 뺨이 안 어울릴 정도로 발갛게 달아서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고, 요른과 눈이 마주치자 귀까지 색이 번졌다.
“요른.”
“응…….”
“요른.”
“응.”
답이 돌아올 때마다 그는 점점 더 행복하게 달아올랐지만, 어느 순간 홍조가 눈자위까지 번지면서 입가도 울음처럼 일그러졌다. 탁자 위로 고개를 떨구며 성기사는 집주인에게도 식탁 반대편 자리를 권했다.
요른은 온순하게 앉았다. 막시밀리안은 상대가 앉자마자 한쪽 손을 달라고 해서는 제 손안에 꽉 쥐었다.
막시는 맨손이었다. 정찰을 마치고 바로 온 탓인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어느새 벗어 버린 것이다.
요른은 상대의 살이 닿자 불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가락 안쪽에도 다 암석처럼 굳은살이 배겨 있는 걸 느끼며 어딘지 뭉클해지기도 했다. 사실 장갑을 벗은 사람 맨손이라기보다는, 가죽 장갑 안에 숨겨져 있던 철갑 기계에 콱 틀어 잡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철갑 기계는 놀라울 정도로 따스했고, 강하게 두드러진 골격의 짜임새는 정밀했으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타고 내리는 선은 교묘하리만치 부드러웠다. 사실은 쇠라도 쥐어 우그러뜨릴 수 있겠지만 그 힘을 숨소리도 없이 안으로만 감춘 것처럼.
요른은 눈을 깜박거렸다. 막시밀리안은 탁자 위에서 상대의 왼손을 제 오른손으로 잡은 채 한참을 조몰락대고 있다가, 왼손도 마저 올려 깍지를 끼듯이 겹쳐 잡았다. 그런 채로 성기사는 눈을 감았다. 세 개의 손을 합쳐 기도라도 하듯이.
그 모습과 온기가 요른의 머리 한구석을 간지럽히면서 어떤 그리운 추억과도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따스하고 오래된 것은 마법사의 성숙한 혈관을 타고 흐르며 새로운 것도 함께 깨워냈다.
요른은 피부가 따끔거린다고 느꼈다. 왜 손이 잡혀 있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혀 밑으로 단맛이 도는지, 몸속의 점막처럼 붉은 곳들이 쿡쿡 쑤시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상하게 들뜨고도 초조하고, 억울한 채로 그는 바랐다. 좀 더…….
요른은 기다렸다. 자신이 뭘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로. 다만 막시밀리안이 조금씩 손에 힘을 주거나 손등을 쓰다듬어올 때, 손가락들이 새로이 서로 얽힐 때마다 살 속이 간지러웠고, 스쳐야 할 곳의 아슬아슬한 주변만 에두르는 듯이 안타깝고 어지러워서, 상대가 그보다 더 들어와 주어야 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좀 더.
성기사가 제 오른손 검지로 상대의 왼손 약지와 중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칫 이상한 신음마저 흘려 버릴 것 같아서 요른은 이를 깨물었다. 그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스스로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요른은 상대의 무섭도록 단단한 손을 자기 쪽에서 마주 쥐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며, 마음속으로만 간절히 빌었다. 부디…….
명령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시켜 준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뭐든지. 그러니 부디 명령을.
그 혀로, 목소리로 명령을. 알 수 없는 소망에 푹 젖어 있느라 그는 막시가 물어 오는 것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요른,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어, 응?”
“그러니까…….”
막시밀리안은 상대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어조를 바꾸어서 명했다.
“토요일 저녁에 내 성으로 와. 일곱 시 반. 만찬 초대야.”
“응.”
요른이 끄덕거렸다. 마침내 손도 거두어서 탁자 밑으로 늘어뜨린 채로 막시가 마저 말했다.
“좋은 옷 입고 와. 내일 나랑 같이 양장점에서 골라.”
“응?”
요른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말았다. 막시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른, 넌 우리 집안 피후원자야.”
“응…….”
“그런데 사람 같지 않게 징그럽다든가, 기형 마물이라든가 하는 소리를 듣고 다니면 되겠어? 전에는 몰라도 이 시국에는 위험해. 우리 가문에까지 폐가 되잖아.”
“미, 미안해.”
“차림이라도 좀 정돈하고 다녀 봐.”
막시밀리안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턱짓했다.
“옷도 사고, 머리도 정리해. 몸도 너무 말랐으니까 더 먹어서 찌워. 내일 옷 고르고 나면 같이 식당에도 갈 거야. 원체 생긴 게 흉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만큼 꾸미고 다닐 노력 정도는 해야 프란첸가도 체면이…….”
그러나 말하면서 막시밀리안은 얼굴이 점점 더 핼쑥해지다가 아예 입술까지 다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원체 생긴 게 흉한…….”
막시밀리안은 더듬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흉하게, 생긴 건…….”
그는 뱉은 말에 제가 상처 입은 듯이, 너무 피를 흘려 어지럼증을 타는 듯이 앉은 채로 등이 구부정해지고 얼굴빛이 거무죽죽해졌고, 요른도 깜짝 놀라서 같이 질려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곧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마저 푹 떨궜다.
그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도, 악문 턱도 덜덜 떨리는 게 요른의 시야에 비쳐 들었다. 성기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들고 다시 운을 떼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침묵했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지만 경건할 정도로 깊었다.
“넌 아름다워.”
말하며 막시밀리안이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맑은 눈이었다. 아무 단단한 갑옷 같은 어둠도 없이 활짝 열려 그저 투명하기만 한 눈. 요른은 소스라쳤다. 그건 요른이 알고 사랑하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넌 아름다워, 요른. 차림이나 머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넌 그런 걸 초월해서 아름다운 존재야.”
그는 미사여구라기보다는 그저 농부가 황혼에 대해 감탄하듯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지금 믿을 수 없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깨어나면, 기억이 올바르게 돌아오면 다 알게 될 거야. 나는, 그냥, 범상한 인간이고.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건 껍질밖에 없으니까.”
점점 더 속삭이듯이 말하다가 막시밀리안은 더듬어 대기까지 시작했다.
“그래도 껍질이라도 고르다 보면 조금씩 기억이 나지 않을까 해. 네 원래 모습과 비슷하게 보이게끔 고르다 보면 말이야. 미안해. 나는 이런 것밖에는……. 그, 그리고, 사소한 거라도 네가 스스로 이것저것 자꾸 선택하다 보면, 다소나마 자아도 회복되지 않을까…….”
‘완전히 돌아 버렸구나.’
기사가 열심히 늘어놓는 걸 들으며 요른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아름…… 뭐?’
차마 그 표현을 끝까지 주워섬기지도 못한 채 마법사는 식탁 밑에서 허벅지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소름이 쫙 끼친 탓이다.
‘이 머릿속에 있는 괴물 놈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듣고 싶을까?’
탁자 건너편에서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는 프란첸의 유일한 후계자를 바라보며 요른은 속이 끊어질 듯 뒤틀렸다. 그는 방금 자기 홀림 마법이 작동하는 순간을 똑똑히 보았다. 막시는 분명 평소와 같은 충고를 조곤조곤 잘만 해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아 버렸다.
성기사는 몇 번이나 원래의 냉랭한 얼굴로 돌아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개개 풀린 표정으로 헛소리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마법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다.
‘괴물 새끼.’
요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누르며 뇌까렸다.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이 아름답다느니 하는 미친 소리 같은 건 듣고 싶지가 않았고, 막시가 저렇게 어쩔 줄을 모르며 더듬거리는 꼴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요른 따위의 병신이나 할 짓을 저 막시밀리안이 저지르는 꼴은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역시 자신이,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요른이 쓴 홀림 마법이 아니다. 그 순간 막시가 상대의 가정에 확신을 더해 주는 행동을 했다.
“요른.”
성기사가 상체를 식탁 위로 기울이면서 고개를 바짝 들이댔다.
“혹시 듣고 있어?”
요른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긴 했지만, 초점이 살짝 엇나간다는 걸 눈치챘다. 성기사는 상대의 탁한 은회색 눈동자를 관통해서 어딘가 훨씬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있었다.
하얀 청년의 머릿속에 순간 당일 아침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막시밀리안은 그때도 이상한 소리를 했다. 요른 안의 누군가가 깨어날 줄 알았다고 말이다.
게다가 방금도 막시밀리안은 네가 깨어나면 다 알게 될 거라느니 어쩌니 중얼거리지 않았던가. 요른은 섬광처럼 돌이켰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요른의 머릿속 어딘가를 들여다보고, 거기다가 말을 걸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역시 내가 아니야.’
마법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막시밀리안은 요른 안의 괴물과 소통하고 있다.
요른은 괴물의 정체가 희미하게 짐작이 갔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다. 움베르토의 실험실에서 4년을 지내며 충분히 깨달았던바, 아마 진짜로 반쪽짜리 마물이거나, 어떤 형태로든 마물이 이리저리 섞인 몸일 것이다. 그러니 이 괴물도 그 마물 쪽의 자아일 가능성이 높다.
‘절대로 안 져.’
요른은 새삼 다짐했다. 막시가 그동안 이런 반쪽짜리를 그나마 사람처럼 키워 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괴물 놈한테 져 버릴 수는 없었다.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막시.”
“응.”
답하며 막시밀리안이 비로소 하얀 청년의 얼굴께에 제대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른의 시선이 상대의 눈동자를 살짝 비켜났다.
“내가 꼭 구해 줄게.”
하얀 청년은 암회색 눈동자 저편의 어딘가를, 제 탓으로 그곳에 갇혀 있을 영혼을 찾아 더듬으려 애쓰며 말했다.
“응?”
“응, 내일 양장점에 가자. 식당에도 가.”
“그래.”
“하지만 네가 다 골라 주는 거야, 막시.”
상대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지는 걸 보고 요른은 재빨리 덧붙였다.
“난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한테 시켜 봤자 다 틀린 것만 고를 거야. 네가 안 도와주면 난 안 돼, 막시. 꼭 다 골라 줘.”
“그게 아니라…….”
“네가 아니면 난 아무것도 못 해.”
요른이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기억나, 막시? 내가 널 위한답시고 늘 나쁜 마법들만 개발해 냈던 거. 너 아니었으면 난 그게 나쁜 건지도 전혀 몰랐을 거야. 바쁜데도 넌 날 언제나 그렇게 잘 챙겨 줬지. 이제 내가 뭘 입어야 할지, 먹어야 할지도 네가 하나하나 다 정해 주겠다면…….”
순간 하얀 청년의 눈앞이 짜릿하게 흐려졌다.
“……그건 좋아.”
답하면서 요른은 이상하게 살이 선득거리는 걸 느꼈다. 막시가 아까 손을 잡고 쓰다듬어 주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안타깝고 초조한 간질거림. 동시에 뇌 속에서 묘한 속삭임이 부풀어 올랐다. 감히…….
또 네 편한 대로만 하려고 드는군.
이제 와서 도망치려고?
“내게 명령해.”
시야도 들뜨고 귓속까지 이상하게 번개로 된 피가 고동치듯이 웅웅거려서 요른은 자신의 음성이 얼마나 서릿발 같이 번뜩였는지, 눈이 어떤 새파란 은빛으로 달아올랐으며 어떤 미소가 자신의 입술을 벼려 냈는지 알지 못했다. 가차 없는 선고를 내리듯이 그 하얀 생물은 말했다.
“언제나 내게 명령을 내려,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안은 한참이나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알았다고 답하고는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요른을 한번 꼭 안아 준 후에.
요른은 그날 막시가 돌아간 후 밤에 잠들기 전까지 자신이 뭘 했는지는 잘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억지로 돌이키지 않으려 드는 게 아니라, 기억이 흐릿한 것뿐이다. 변명하듯이 되새기며 마법사는 프란첸 별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다음 날, 그러니까 화요일에 둘은 실제로 시내 양장점에 들렀고, 민간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요른이 옷도 메뉴도 절대로 스스로는 고르지 않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결국 막시밀리안이 골라 주었다. 고르면서도 그가 상대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맞춰 주려고 드는 게 기분이 나빠서 요른은 막시가 뭘 내밀든 똑같이 무표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요른은 점점 더 화가 났다. 막시가 명령만 하면 요른은 가시로 된 법복이라도 입을 거고, 불붙은 술이라도 목구멍에 털어 넣을 터였다. 그리고 행복할 것이다.
끔찍하게 싫고 괴로워도 아무 상관 없다. 오직 막시의 명령이기 때문에만 수행하는 일이 되는 셈이니 요른은 오히려 더욱더 기껍고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머릿속 괴물은 대체 무슨 재미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수요일, 막시는 미치도록 바쁜 중에도 짬을 내어 저녁에 요른을 자기 성의 갤러리로 초대했다. 작품을 하나 넘겨주고 싶으니 골라 보라는 것이다. 목요일에 그는 상대를 시내의 고급 카페로 불러 차와 간식 메뉴판을 넘겨주었으며, 금요일에는 밤에 사택으로 찾아와 잡화 카탈로그를 보여 주면서 선물을 고르게끔 했다. 하지만 요른은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막시밀리안은 매일 요른에게 자신이 고른 선물을 하나씩 주었고, 자신이 고른 차와 간식을 먹인 후 그를 자기 멋대로 꼭 안고 쓰다듬고는 돌려보냈다.
지난 일주일 내내 그런 식이었다. 막시가 자꾸 이리저리 불러서 괴롭혀 대는 통에 요른은 늘 저녁 늦게, 혹은 아예 밤늦게나 사택에서 혼자 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기진한 탓에 잠들기 전까지의 일과는 늘 흐릿했다.
그래, 흐릿하다. 요른은 생각했다. 돌이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기억이 안 나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난 아무 짓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마차 안에서 괜히 제 몸을 가두듯이 꽉 안은 채 마법사는 좀 더 쓸모있는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프란첸 성 내에서는 상주 술사들이 방어망을 펴고 있으니 괜찮았지만, 시내에 있는 동안은 달랐다. 감청하는 눈과 귀가 내내 막시와 자신을 따라다녔다. 그들 중 한쪽은 정령계 전송 마법을 쓰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은 그마저도 아니었다.
‘막시한테 왜 감시자들이 붙은 걸까. 그것도 성황국과 흑마법사 양측에서 동시에.’
자신이 막시의 뇌를 건드려 놓은 게 그의 평소 생활에도 뭔가 변화를 가져온 게 아닌가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른은 겁이 덜컥 났다. 그럴 리가 없지만, 없어야만 하지만, 혹시 막시가 반역 혐의라도 받을 만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닐까.
‘하지만 이 시국에 진짜로 의심스러운 거라면 구금이라도…… 아니, 못해도 성에 연금이라도 시켰겠지. 아직은 괜찮은 거야. 뭔가 있다 해도 심증뿐인 거고.’
빨리 막시를 되돌려 놔야 한다. 요른은 입술을 자근대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가 잘해야 돼.’
요른이 마차에 올랐을 때 즈음, 막시밀리안도 병영 자료실을 빠져나와 귀가길에 올랐다. 뒷문으로 나와 말에 올라타면서 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빠르군.’
미행이 따라왔다. 성황이 그새 감시인을 딸려 놓았던 탓이다.
전송 마법으로 엿듣고 엿보며 감시하는 거야 진작 눈치챘지만 이제 미행까지 붙인다. 첫날 회의장에서 너무 티를 냈나 하고 성기사는 돌이켰다.
각 도시에서 마왕군에 감화되는 자들이 늘어가고, 수도에도 내통자들이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던 시기다. 성황은 혹시라도 측근 중에서도 역심을 품은 자가 나올까 봐 극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제일 유력한 용사 후보라는 자가 하룻밤 만에 사람이 확 변한 듯 나타나서 있는 대로 불퉁거려 댔으니, 불안해할 만도 하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후회할 수는 없었다. 이명이 계속 귀를 쑤셔 대는 통에 안장 위에서 잔뜩 찌푸린 채로 뇌까렸을 뿐이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자들, 그 쓰레기 같은 작자들을 반의반에나마 걸맞은 태도로 대해 준 게 어떻게 잘못일 수가 있나, 죄라면 다 죽여 버리지 못한 게 죄일 뿐이지.
머리가 아팠다. 시야 한쪽에 얼룩이 생길 정도로 관자놀이에서 피가 짙게 두근대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은 말 위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시내 외곽부터는 일부러 숲으로 들어서서 말을 이리저리 몰아 미행을 따돌린 후 다시 천천히 제 성으로 향했다.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넘겨주고 들어오자 하인장이 프란첸의 피후원자가 접객실에 이미 와 있다고 보고했다. 막시밀리안은 말을 듣자마자 거의 무심결에 양손의 장갑을 다 벗어 품에 넣고는 접객실로 향했다.
향하는 동안 어지럼증이 깊어지면서 다리가 허청거렸다. 한 걸음씩 옮겨 놓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고, 손끝에 피가 돌지 않는 게 느껴졌다. 복도 한쪽 벽에 일렬로 주욱 뚫려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처럼 검었다. 이 모든 건 다 꿈일 수도 있었다.
열어야 할 문 앞에 도착해서 막시밀리안은 숨을 멈췄다. 심장이 귓속을 후려치듯이 뛰었다.
하인장은 성주의 낌새가 이상했던 김에 천천히 따라왔다가 그가 접견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보았다. 말을 걸어 보았으나 주인은 답이 없었고, 하인장은 고민하다가 얌전히 문만 열어드린 후 옆으로 비켜섰다.
막시밀리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요른.”
이름을 부르자 가느다란 목이 까닥거렸고, 새하얀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백발에 반쯤 가린 눈꺼풀이 문득 내리감겼다. 햇살이 문 쪽에서부터 비쳐 들어와 눈을 찌른 탓이다. 막시밀리안은 급히 제 등으로 해를 가리며 하인장에게 손짓해 문을 닫았다.
“잘 있었어?”
말을 걸며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걸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너무 빨리 걸어가면 자칫 또 틀린 길로 접어들어 그에게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선을 은빛 눈동자 속에 못 박은 채, 인사에 답하는 흐릿한 목소리를 귀에 담고, 답이 끊기자 또 괜한 말을 물으며 막시밀리안은 한 걸음씩 소리도 기척도 없이 다가갔다. 자신의 아무것도 상대의 색채와 음성과 온기를 가리지 못하게끔.
겨우 손이 닿을 거리에 들어오자 그는 하얀 생물의 어깨를 건드렸고,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끌어안았다.
비쩍 마른 몸속의 심장 고동이 그대로 막시밀리안의 심장으로 전해 왔다. 막시밀리안은 그 생명이 발하는 신호가 자신의 뇌 한쪽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른이 진을 새겨 준 덕분이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 혼만은 살과 피로는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탓이다.
그는 요른이 자기 마음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처럼 퐁당 파고들어 와서 그 안을 제 물결로 채워 주면 좋겠다고. 그러나 열어 줄 수 없었다. 그의 혼은 이제 상대가 모르는 게 좋을 기억들로 더럽혀져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최소한 상대에게 말로는 전할 수 있었으면 했다. 사랑한다고 귓가에 속삭여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는 요른이 자신이 하는 말은 아직 단 한마디도 믿어 줄 수 없으리라는 걸, 홀림 마법이 어쩌고 하며 자기 머리나 깨 버리고 싶어 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막시밀리안은 품 안의 몸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되새겼다.
앞으로는 꼭. 그러나 다짐할수록 막막해졌고, 지난 일주일간의 장면들이 차례로 떠올라 불길한 말을 속삭였다.
어쩌면 결국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