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감옥 (14/30)

-2장 감옥

“그 애는 천재입니다.”

공작 부부는 성의 접견실에 앉아서 성기사 출신 가정 교사의 보고를 들었다. 열한 살짜리 독자의 마검을 다루는 능력에 대한 평이었다.

접견실 벽에는 기사도의 세 기본 원칙과 그 표어가 새겨진 석판이 걸려 있었다. 네 몸이 오직 보편타당한 격률만을 실천하게끔 하라. 네 영혼이 오직 보편타당한 의지에만 바쳐지게끔 하라. 네 심장이 오직 보편타당한 것만을 욕망하게끔 하라. 즉, 황국의 기사로서만 살아가라.

석판 아래 의자에 앉은 채, 유디트는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예의상 미소를 지었고, 공작은 진심으로 기뻐 소리 내어 웃었다. 가정 교사도 미소를 띤 채로 마저 말을 이었다.

“제 실력으로는 딱히 도움이 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자제분은 곧 기숙사에 들어가실 테니, 저는 다음 달부터는 물러가도 좋지 않을까요.”

“그리하시게.”

공작은 말하며 하인에게 말해 미리 남은 봉급에 수고금을 더해 챙겨 주고 돌려보냈다.

부부가 고용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막시밀리안은 프란첸가 도서관에 있었다. 본성 끄트머리에 따로 둥그렇게 튀어나온 그 2층짜리 공간에서 그는 제 가슴팍만큼이나 넓은 책장을 넘겨 보는 중이었다.

‘타블로.’

식물학 타블로 중에서도 갖가지 꽃들을 정리해 둔 장이었다. 매끄러운 하얀 종이에 동백, 찔레, 장미, 백합 등 꽃들이 그 종과 강, 목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수놓여 있었다. 풍요롭게 조화를 이룬 꽃밭처럼.

소년은 도안에 손을 대어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나 손끝이 줄기로부터 잎새가, 꽃받침에서 꽃잎이 분리되어 나오는 이름 모를 틈새에 닿자 그는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한번 그러고 나자 꽃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마저 꽃보다 더 진하게 불거져 나와 시야를 조각조각으로 갈라 놓았다.

‘안 돼.’

질서의 양탄자가 갑자기 지옥문이 쩍쩍 갈라져 열린 마른 논두렁처럼 여겨졌다. 막시밀리안은 그 틈새를 마치 닫아걸 듯이 애써 손끝으로 누르고 문질렀다.

그는 자기 안에 새겨져 있던 어머니와 동생의 그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 꼭 껴안은 채 분명 행복해 보였고, 막시밀리안은 자신도 당연히 그 그림을 성스러운 꿈처럼 소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 지옥문이 쩍 열려 나오며 모든 걸 시커멓게 부숴 놓았다.

막시밀리안은 타블로를 보다 말고 손을 옮겨 왼쪽 가슴을 눌렀다. 일 년 남짓이 지난 후에도 그 기억이 머리에 떠오르면 심장이 컴컴해졌다.

자신은 돌이킬 수 없이 살인자가 되었다. 마왕의 힘으로 혈육을 죽였고, 죽인 사실마저 철저하게 은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안 돼.’

그는 수백 번도 더 했던 다짐을 다시 반복했다.

‘절대로 아무것도 더 튀어나오게 내버려 둘 수 없어.’

막시밀리안은 잠시 탁자를 짚고 고개를 떨구었지만, 곧 자세를 바로 한 후 책을 덮고 밖으로 나왔다.

열두 살이 되면 기숙사로 옮겨 가서 지내게 되니, 성에서 먹고 자는 건 앞으로 한 달 후면 끝난다. 소년은 정원 한쪽 끝으로 나가서 샛문을 열어야 나오는 건물, 그러니까 별채 쪽을 잠시 바라보았지만, 곧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마음이 불안정하다. 그 애를 멀쩡한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 방문해서는 안 된다.

요른의 사람 마음을 읽고 움직이는 힘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교묘하게 윽박지르고 때려 겨우 금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애는 여전히 사람이 하는 말만큼이나 그 미묘한 안색이나 표정을 잘 읽어 내고 거기에 반응한다.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마음도 함께 읽어 내 버리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도 떨쳐낼 수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애는 도무지 말‘만’ 들어먹지는 않는다.

말을 듣지 않는 만큼 어쩔 수 없이 때려서 고통을 주는 방법도 혼용하게 되곤 했다. 물리적 고통은 어떤 괴물에게든 천사에게든 통하는 공용어처럼 작용한다는 걸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대하면서 지난 1년간 아주 잘 배웠다.

조금이라도 덜 때리려면 철가면 같이 닫아건 얼굴로만 그 애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게 되면 요른은 비로소 말‘만’ 들어 준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 애를 만나서는 안 된다. 막시밀리안은 정원을 가로질러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 쪽으로 다가가, 호위병 한 명과 함께 올라탔다.

마차는 시내 경찰서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재판정과 태형장만 견학할 예정이지만, 다음 주부터는 교도소도 들를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단정한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렸고 서장실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재판 몇 건을 방청한 후 그는 형 집행실로 옮겨 가 둥그런 공간을 무대처럼 둘러싼 객석에 앉았다. 그리고 어쩌면 요른에게 채찍질을 해야 할 날도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 너무 어린애라 몇 주 전에는 회초리로 허벅지만 때렸지만, 아이가 크면 채찍으로 바꿔야 할 날도 올 수 있다.

‘죄질에 비해서는 가볍게 때렸던 셈이야.’

소년은 돌이켰다. 막시밀리안이 직접 때린 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요른을 접견실로 불러다가 두 걸음 앞에 세워 놓고는, 서를 견학하면서 배웠던 태도 그대로 마치 판사처럼 소위 유죄 판결을 내리고 벌의 양을 정했다. 그리고 하인에게 데려가서 그대로 벌하라고 지시했다.

일곱 살짜리 요른은 영문도 잘 모른 채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맨 허벅지 뒤쪽에 회초리 스물다섯 대를 맞고 벌벌 떨고 눈물에 젖은 채 도로 올라왔다. 걷기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막시밀리안을 보자마자 잘못했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빌었다.

“뭘 안 할 건데?”

막시밀리안은 하인은 물린 후 또렷한 음색으로 물었다. 요른이 정신없이 더듬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뭐뭐, 뭐든지…….”

“네 죄목이 뭐야? 내가 아까 말해 줬지.”

“하하인자장, 사살린 거?”

요른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그치만, 나난, 네네가, 공작 부부인께서도, 다다른 사람들도 워원하는 줄 알고, 워원한다고, 새생각해서…….”

“사람들이 원한지 어떻게 알아. 또 마음이라도 멋대로 읽었어?”

“아아아냐, 그그냥, 그그렇게 느껴서.”

“요른, 어찌 되었든 죽은 자는 살리면 안 돼.”

막시밀리안이 타일렀다.

“한번 죽은 사람은 죽은 거야. 되돌려 놔서는 절대로 안 돼.”

갓 일곱 살이 된 하얀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상대를 올려다보며 떨고 있었다. 프란첸가의 독자는 지난 일주일간의 일들을 돌이켰다. 늙은 하인장이 심장 마비로 죽어 시내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며칠 후 묘지기가 구역 담당 순찰병에게 이상한 보고를 해 왔다. 그 근처 땅속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거였다.

순찰병은 흔한 괴담이겠거니 하고 윗선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지를 찾는 다른 객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하면서 소문은 점점 불어났고, 막시밀리안은 뭔가를 깨닫고는 요른을 서재로 불러 당장 그 하인장의 생명을 도로 거두라고 지시했다.

요른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왜 얼른 가서 관을 열어 주지 않느냐고 되물어 왔을 뿐이다. 장례식 때 막시가 슬퍼하는 걸, 그리고 막시가 평소 아끼는 다른 사람들도 다 슬퍼하는 걸 봤다면서.

막시밀리안은 눈을 감고 잠시 앉아 있다가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요른을 지하로 데려가서 회초리로 맨 허벅지를 스물다섯 대 때린 후 다시 데려오라고 했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있어야만 해. 지금이라도 돌이켜 놔.”

“하하지만…….”

“싫어? 그럼 널 더 때릴 수밖에 없지.”

“어, 어?”

요른이 다급하게 막시밀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차분하게 뱉어 냈다.

“나도 널 때리는 건 싫어.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네가 자꾸 나쁜 짓을 하면, 벌을 줘야만 하니까 때릴 수밖에 없어. 너 때문에 나까지 괴로워지는 거야.”

“그그치만, 아아냐, 자잘못했어…….”

“그래. 그러면 지금 당장 하인장을 도로 죽여. 여기서도 할 수 있지?”

“으, 응…….”

“했니?”

“아아니, 아직, 이이제, 으응.”

“그래. 착하다.”

막시밀리안은 미소 지었다.

“우리 요른.”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요른의 눈물 젖은 뺨에 살짝 생기가 올랐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을 때리고 쓰다듬어 준 후 다시 공동묘지에 대한 기묘한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프란첸은 이후 몇 주에 걸쳐 요른을 질책하고 또 달래면서 기억을 천천히 조작했다. 요른이 죽은 자를 실제로 살렸던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겁을 주려고 무덤에 장난을 쳐 놓았던 것처럼. 집에서 꽃병을 깨고 다녔던 것처럼 밖에서도 남의 관심을 끌려고 못된 짓을 했던 걸로 속였다.

이번에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무마시켰지만, 다음에는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게끔 해야 한다. 열네 살짜리 소매치기범에게 채찍 스무 대 태형이 집행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내가 잘해 나가야 해.’

요른의 본성 자체는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애가 실제로는 아무 죄도 더 저지르지 않게끔 압제해야 한다. 마지막의 마지막, 무해하게 자유로워질 순간까지는.

막시밀리안은 요른에게 약속했던 성을 기억했다. 얼른 구해 두고 싶었지만, 그는 아직 어렸고 금전은 물론 정보에도 한계가 있었다. 학원 도서관 고문서실에도 들러 지금은 아예 잊혀 버린 성들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계속 형장을 바라보았다.

소매치기범 다음으로는 열일곱 살짜리 강간범이 들어왔고, 그다음에는 제 누나의 얼굴에 기름을 끼얹은 열다섯 살짜리 폭행범이 들어왔다. 강간범이 채찍 예순 대를 선고받고는 마흔네 대째에 기절해서 실려 나간 후 폭행범은 백 대를 선고받았다. 아마 세 번쯤에 걸쳐 나누어 맞게 될 것이다.

“죄질이 아무리 나빠도 초범인 애들은 태형 후에 단기 교화 시설로 보냅니다.”

서장은 첫 견학 때부터 막시밀리안에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재범은 수가 없어요. 물론 교화시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다 세금에 인력이 소모되는 일인데,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그렇게까지 투자를 해야겠습니까? 두 번째부터는 태형이 두 배로 강도가 세지고, 세 번째부터는 나이나 사정이 어떻든 종신 노동이나 사형입니다. 그게 깔끔하죠.”

“이해합니다.”

막시밀리안도 짤막하게 끊어 답했다.

그날 진행되는 태형을 모두 방청한 후 막시밀리안은 성으로 돌아갔고, 마저 남은 공부를 하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도 검을 연습했다. 서를 견학한 날에는 항상 속이 안 좋아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수련해서 가라앉히는 게 좋았다.

시간이 흘렀다. 막시밀리안은 그로센 학원 기숙사에 들어갔고 요른도 곧 따라 입학했다. 하필 요른이 입학하자마자 학원 측에서 검은 숲 견학을 보낸 탓에 마왕이 거의 강림할 뻔했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다.

막시밀리안은 열세 살이 되자 이미 성인 기사들이 쓰는 수준의 마검을 쓸 줄 알게 되었다. 린다나 카를은 그처럼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듯이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빨리 적응해서 그럭저럭 우등생이 되었고 주변으로부터 선망도 샀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잘 적응한 건 아니었다. 그로쉔 왕국 기사 학원에는 시골 소귀족 자제도 여럿 입학해 있었는데, 개중 검 실력은 나쁘지 않은데도 마검을 복속시키는 건 엄두도 못 내는 장남도 있었다. 막시밀리안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상대는 늘 눈을 찡그리며 거절했다. 아마 자존심만은 센 듯했다.

프란첸가의 독자는 학기 중에는 내내 학교에서 지냈지만 방학 때는 성으로 돌아가서 개인 교습을 받았고, 혼자 몰래 빠져나가 산중에서 짐승을 상대하거나 용병단에 섞여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특히 주말에는 부모에 청해 여기저기 견학을 다녔다. 교도소는 물론 정치범 수용소나 지하 특수 감옥에도 들렀고, 어머니께 부탁해 마물을 가둬 둔 실험실도, 정신병자 수용소도 견학했다.

그런 곳들을 둘러보고 나면 머릿속이 컴컴해질 정도로 기분이 나쁘고 정신이 산란해졌다. 때문에 성에 돌아오면 그는 바로 타블로를 줄줄 외우며 독학했고, 아무 생각도 더는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검을 수련했다. 덕분에 막시밀리안은 곧 기본 마법 정도는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성인 기사들도 쓰기 힘들어한다는 마검도 어렵잖게 복속시킬 능력을 갖추었다.

그렇게 단련해 왔기에 열다섯 살 때 그는 필립 블랑쇼가 관목 숲에서 요른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큰 동요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질적인 마물의 의식을 수십 번도 더 복속시켜 왔기에, 자기 자신의 마음 따위는 얼마든지 억압할 수 있게 된 덕이었다.

막시밀리안은 필립이라는 그 유학생이 토마스 폰 린마이어보다도 훨씬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요른이 여덟 살 나이로 그로쉔 학원에 막 입학했을 당시, 토마스는 고작 열네 살 나이로도 이미 이런저런 은밀한 소문을 등 뒤로 달고 다니던 학우였다. 제 부모를 졸라 성에 사들여 둔 아주 어린 ‘미동’이 열 명도 넘는다는 것이다.

토마스를 쫓아 버린 후, 막시밀리안은 아홉 살 난 요른에게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세 가지 예외를 가르쳤다. 첫째, 남이 너 때문에 살인을, 둘째, 남이 너 때문에 강간죄를……. 그리고 요른이 아무래도 강압과 합의를 구별도 못 할 것 같아서 세 번째 조항도 덧붙였다. 교합은 아예 생각지도 말라고. 아이는 얌전히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 블랑쇼 가의 장남은 그런 잠재적 소아성애자보다도 어떤 의미로는 수십 배는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필립의 입학 신청 소식을 들은 직후 교장의 청에 따라 그의 뒤를 캐면서부터 이미 막시밀리안은 불길한 감을 느꼈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확신에 달했다.

‘저런 자들이구나.’

어렴풋이만 머릿속을 맴돌던 상념이 그제야 명확한 윤곽을 갖추었다.

‘바로 저런 자들 때문에 마왕이 강림하는 거야.’

요른이 제 스스로 인간 세상의 왕좌에 앉으려고 들 리는 없었다. 그 애한테는 어차피 벌레나 사람이나 똑같을 테고, 왕도 비렁뱅이와 다름없을 테니까. 문제는 결국 사람들이다.

‘새로운 왕을 원하는 백성들.’

왜 사람들은 언제나 왕을 원하는 걸까. 막시밀리안은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필립과 같이 아래에서 반역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조차 까마득한 위에 새 왕좌를 세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년은 동시에 이해했다. 아마 그건 사람의 본성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군주가 되든, 남을 군주로 세우든, 우리는 왕이 없는 세계는 상상하지 못한다.

그때 희미한 생각이 막시밀리안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릴 적 그 새하얗고 찬란한 생물이 늘 띠고 있던 빛과 닮은 상념.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머릿속에서 그 빛은 붙잡기도 전에 스러져 버렸고,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그저 잊기로 했다.

그는 필립 블랑쇼라는 인간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그 반대였다. 막시밀리안은 필립에게 끌렸다. 그는 그 녹안의 상인가 장남이 인성도 곧고, 린다나 카를 같은 머리 굳은 자들보다 두뇌도 몇 배나 명민한 학우라고 느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친구로 사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잡다한 마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게 된 지 오래였다. 막시밀리안은 필립에게 요른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경고했고, 그가 경고를 듣기는커녕 상황을 점점 더 위태롭게만 만들자 작전을 짜내 본국으로 강제 송환시켜 버렸다.

몇 달 후, 요른과 함께 성황국 학원으로 옮겨 가기 직전, 열다섯 살의 막시밀리안은 내내 뚱하게만 굴던 소귀족가 장남 생도에 대한 마지막 소식을 들었다. 소위 요양소로 옮겨 가 거기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 년 전 그 생도는 그로쉔 기사 학원을 퇴학했다. 대련 도중 소위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던 탓이다. 일단 대학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 후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미쳤다’는 진단을 받고 정신병자 수용소로 옮겨졌다.

“너무 부담이 컸나 보지. 제 가문에서는 나름대로 기대주였다잖아.”

린다가 뭔가 더러운 것을 만지듯이 얼굴을 찡그린 채 말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미쳐 버릴 줄이야. 난 걔가 마검 때문에 부담을 받아서 미쳐 버린 거라고 생각 안 해. 그 반대지. 그렇게 간단히 정신을 놓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제력이 없는 인간이니까 마검 복속에 단 한 번도 성공을 못 했던 거야. 누군 안 돌고 싶어? 다들 꾸역꾸역 눌러가면서…….”

린다는 굳이 더 말을 잇지 않고 미간만 찡그렸다. 막시밀리안은 이해했다. 그는 이 소꿉친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온갖 삐뚤어진 방식으로 훨씬 더 삐뚤어진 어두컴컴한 것들을 내리눌러 왔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카를도 마찬가지다. 그가 그렇게 제 동생에게만 손찌검을 하고 윽박지르며 오직 그 애의 인생만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차라리 주변 모든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제풀에 몰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누구나 다들 나름의 억누르는 방식을 갖고 살아간다. 성황의 평화로운 세계 전체가 그러하듯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러하듯이. 경찰서, 태형장, 교도소, 지하 감옥과 정치범 수용소, 마물 및 동물 실험실과 정신병자 수용소가 막시밀리안의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는 개중에서도 정신병자 수용소가 어떻게 보면 가장 끔찍한 곳이라고 느꼈다.

그곳에는 정령의 저주를 받았는데도 삶의 의지만은 왠지 강하게 남아 있는 자들, 그래서 죽지도 못하고 계속 제 머릿속 악몽만을 반복하는 자들이 산다. 그런 자들을 밖에 내놓았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한데 모아 가둬 두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평생 그곳에 갇혀 산다. 죽여 주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할 수도 없다. 실낱같은 치료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술사들은 그곳에서는 실험적인 방법들을 계속 시도한다. 치료 시에는 손발을 묶어 두고, 평소 조금이라도 저항이나 탈출의 기미가 보이면 강제로 약을 먹이거나 곤봉으로 갈긴다.

반년 전 거기 갇혔던, 그 퇴학당한 소귀족가 장남이 이제는 다행히도 ‘요양소’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온순한 환자만 골라 마법과 약물, 수술로 더욱 온순하게 만든 후, 모든 치료를 다 포기하고 평안히 죽음만을 기다릴 수 있게 해 주는 곳이다. 수용소에 갇혔던 자들 중 그나마 신분과 재력이 보장되는 자들만이 옮겨갈 수 있는 안식처.

소식을 듣고 막시밀리안은 잠시 기숙사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굳이 찾아가 볼 의리까지야 없었다. 그러나 그 요양소는 그의 머릿속에서 어딘지 미래의 성과 겹쳤다. 요른과 둘이서 손을 맞잡고 영원히 잠들기로 한, 아직도 찾아 두지 못한 성.

그는 주말에 잡혀 있던 사냥회 참가를 취소하고, 대신 시 외곽에서도 한참 떨어져 자리한 요양소 쪽으로 말머리를 향했다.

새하얀 요양소 건물은 목가적인 풍경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위 인도주의적 귀족 몇이 사비를 들여 건립한 시설이다. 막시밀리안이 미리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대뜸 와서 견학 요청을 했는데도 소장은 선뜻 허락해 주었다.

둘러보고 오는 길에 막시밀리안은 말 위에서 몇 번이나 백일몽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다. 흰옷을 입고 창가의 바퀴 의자나 정원 벤치에 앉아 있던 환자들의 잔영이 계속 뇌리에 남았던 탓이다.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도 한 시간은 말을 달려야 할 만큼 한지에 자리한 시설이었고, 담장은 얼기설기 쌓아 올린 듯이 보였지만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이 단단했다.

막시밀리안의 심장에 희미한 꿈의 온기가 감돌았다. 바로 저런 성을 찾으리라. 찾아서 요른을 가두고, 스스로를 함께 가두고 완벽하게 숲과 가시덤불로 둘러싸서.

세상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채, 끼칠 수도 없이, 다만 둘이서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는 행복한 기분으로 기숙사로 돌아와 마저 성황국으로 옮겨갈 채비를 했다.

* * *

흑마가 진창 깊은 곳, 함정처럼 파여 있던 구렁에 무릎까지 푹 빠지면서 고꾸라졌다. 타고 있던 스물한 살의 성기사는 그만 낙마하고 말았다.

막시밀리안이 제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요른이 먼저 말에서 내려서 다가왔다. 마법으로 제 발을 살짝 띄워 놓은 채 그는 상대를 일으켜 주려고 맨손을 뻗어 왔고, 그 살갗이 성기사의 살갗에 닿았다. 기사가 끼고 있던 장갑도 어느새 진흙에 묻혀 벗겨져 버렸던 탓이었다.

성기사는 손을 뿌리치고는 기를 쓰고 일어나 말에게 다가갔고, 안장 옆에서 금방 채찍을 빼내어 마법사의 얼굴을 갈겼다.

뺨이 터져 나가고 눈꺼풀도 다친 채로도 요른은 비명 하나 없이 눈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숨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말이 걷잡을 수 없이 입에서 튀어 나갔다.

“징그러운 새끼가.”

그제야 요른은 몇 걸음 물러선 후 곧 등을 돌려 제 황색 말이 서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잠시 주변의 시선이 둘에게 모였지만, 막시밀리안이 다시 제 말을 일으켜 그 위에 올라타자 곧 흩어졌다.

구렁에 걸렸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아찔하게 낙마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아직 다리를 살짝 절룩대는 흑마의 목을 쓰다듬어 달래며 막시밀리안은 돌이켰다. 저 하얀 생물 때문이다. 저 새하얀 머리카락이, 구부정한 어깨와 비쩍 마른 등허리가 오늘 행군하는 내내 눈앞에서 오르내리며 속을 긁어 댔기 때문이다.

검은 숲 근처로 향하고 있으니, 또 십 년 전 견학 때처럼 각성이 일어나지 않으려나 하는 걱정이 들어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근심은 다른 마음을 가린 꺼풀에 불과한 양 느껴졌다.

첫날과 둘째 날에는 요른은 뒷줄에서 따라왔다. 그러나 사흘째인 오늘은 진창을 걷게 된바, 마법사들이 먼저 앞으로 나서서 땅을 검사하고, 흙의 정령께 청해 어느 정도나마 길을 다져 주는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요른의 등이 오늘 행군하는 내내 여단장의 거의 코앞에서 알짱거렸다. 막시밀리안은 일부러 시선을 흐려 먼 곳을 바라보려 애썼다.

그러다가 문득 남쪽 하늘에 초점이 맺혔고, 희끄무레한 낮달이 마치 새처럼 떠올라 창백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바람에 그만 더욱 눈앞이 아찔해져 버렸으며, 정신을 차려 보니 수렁의 동공에 발이 빠진 말과 함께 몸이 푹 무너져 내린 후였다.

원망하듯 되새기다가 막시밀리안은 안장 위에서 눈을 잠시 내리감았다. 나중에 막사에 들러서 사과해야 한다. 요른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자신이 순간의 충동을 못 이겨 남을 대신 해한 것이다.

여기까지 왔구나. 성기사는 턱을 꽉 악문 채로 생각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어.’

벌이라는 핑계조차 댈 수 없이,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를 때려 얼굴을 찢어 놓았다.

아니, 사랑하는 자를 때렸다는 표현이 맞기나 할까. 이제는 짓밟는 행위 자체가 사랑과 분간이 가지도 않는다.

그를 학대하며 사랑해 온 세월이 얼마인가.

차라리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막시밀리안은 말을 몰았다. 생도 때와 달리 나이가 들고 나서는 검을 수련하는 태세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건 충동을 오히려 더 날카롭게 벼려 내기만 한다.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살짝 떨구어 말 목만 내려다보며 돌이켰다. 요른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 변해 버린 게 언제부터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켜켜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몇몇 반짝이는 장면들은 뇌리에 남아 있다. 예컨대 이 년 전, 마도 학원 기숙사 방에 들렀다가 백발이 투명한 커튼처럼 드리운 그 귓가를 보며 무심코 생각했던 기억. 이제 요른도 아이만은 아니라고.

그러자 숨이 멎을 것 같았고 무릎이 아찔했다. 어쩌면 그때 처음으로 어떤 선율이, 똑같은 현에 걸린 채로도, 다른 색을 띠고 변주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늘 두 걸음 이상 떨어진 곳에서 장갑을 낀 채로만 대했다. 하지만 그 기숙사 방에서의 깨달음 후로 요른을 건드리거나 그 온기가 느껴질 만큼 곁에 가는 건 또 다른 의미로 아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 요른’이라고 부르는 것도.

대신에 ‘내’ 요른이라는 호칭이, 스스로 무언가를 주장하듯이 끈적하고 기분 나쁜 질감으로 목구멍까지 치밀었다가 가라앉곤 했다.

상대를 향한 마음이 항상 어린 시절 그대로 순수하게 남길 바랐다. 수단이 엉망진창이라면, 최소한 그 이유가 되는 마음만은 깨끗하기를. 하지만 그건 어느 순간 몸을 한번 움트더니 날카롭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념으로 변해 버렸다.

‘늘 학대했기 때문이야.’

주둔지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요른의 막사로 향하며 막시밀리안은 되새겼다.

‘완전히 고립시켜서 내 인형처럼 만든 채로, 때리고, 폭언에, 기억을 조작하고. 십 년도 넘게 네게 해 온 일이라곤 그런 것뿐이라서.’

그래서 목적이었던 마음조차도 수단에 물들어 변질되어 버렸다.

요른의 막사로 찾아가서 막시밀리안은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고. 요른은 상처가 번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막시. 내가 잘못했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싫어하는 거 아는데 내가 손, 내밀어서 그래. 다, 닿아 버려서…….”

성기사는 제 집안의 피후원자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다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보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순간 막시밀리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뼛속에서부터 떨렸고 살이 쑤셨다. 나중에 기사단 간부들에게 배정된 막사로 돌아와, 머리에 천천히 제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속삭여 중얼거리며 그는 제 감정을 뒤늦게 말로 번역해 냈다. 

안아 주고 싶다.

안고 쓰다듬고, 손가락을 저 피부에 누르고 싶다. 자국을 남기고 싶다.

머리카락을 맨손으로 만지고 손가락에 감고 싶다. 창백하다 못해 푸릇푸릇한 목덜미의 향을 훔치고 깨물어 빨고, 입술로 숨을 나누고, 늘 함께 꼭 안고 잠들었던 그 시절에조차 본 적 없던 네 맨살과 예민하게 도드라진 부분들을 드러내고 싶다.

귀밑의 보드라운 솜털에 입 맞추고, 허리로 내려가는 등의 굴곡을 한 점 한 점 짚어 내리며 붉은 멍 같은 자국을 남겨 위로해 주고 싶다. 괜찮다고,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고, 곧 다 괜찮아질 거라고.

날 믿어. 귓가에 그렇게 속삭여 주면서, 더 아래로 굳이 손을 뻗을 것도 없이, 네게 명해서.

왜냐하면 너는 내 명령이라면 다 들어줄 테니까.

마법사의 막사 안에서 울먹이는 하얀 청년의 앞에 선 채, 맨손이 닿은 순간 치밀었던 충동이 다시금 꿈틀대는 걸 느끼며 막시밀리안은 차라리 도망치고 싶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핏속의 괴물에게 잠식되듯이 검붉어지는 감각.

새하얀 손마디가, 부드러운 실 같은 머리카락이, 희끄무레한 눈동자 밑으로 더듬거릴 때마다 도드라지는 입술과 턱의 윤곽이 여지없이 불러일으키는 괴물. 그러나 성기사는 자세를 똑바로 지킨 채 서서 마지막으로 뱉어 내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내가 잘못한 거야. 푹 쉬어.”

이 잠식은 어쩌면 훨씬 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건지도 모른다고, 자기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막시밀리안은 돌이켰다. 육 년 전, 필립 블랑쇼가 그 관목 숲에서 요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아직 덜 자란 심장이 찢기며 어두운 것이 새어 나왔다. 겨우 억눌렀지만 독이 그때 분명 전신의 피를 물들였다. 손을 놓아라.

당장 내 것에서 손을 떼.

열다섯 살 당시에는 오히려 잘 억눌렀던 감정이다. 그러나 몸이 완연히 성숙해져 갈수록 그 장면은 악몽처럼 자꾸 막시밀리안의 등 뒤를 따라왔다. 그 둘이 한낮이 드리운 보드라운 그림자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앉아 있던 모습, 그 짐짓 풍요하고 행복해 보였던 풍경이 날이 갈수록 이명처럼 증폭되며 혼을 찢었다.

필립을 쫓아 버렸던 건 세계를 위한 것이었고, 요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도 시절 막시밀리안은 확신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시간이 가면서 형태를 잃었고 나이가 스물이 넘은 지금은 오히려 비웃음만 살 것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막시밀리안은 거의 평생 기사 수련을 해 온 자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든 결국 자세를 곧게 하고 숨을 고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충동도 의심도 다스리면 되는 거라고. 그러나 아무리 야간 대련을 하고 돌아와 몸을 씻어도, 타블로를 몇 번이나 복습하며 머릿속을 바로잡아도, 밤에는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들곤 했다.

지독히도 감미로운 악몽.

‘지금 그는 진짜 요른이 아니야.’

새벽녘에 매번 막시밀리안은 머리를 감싸 쥔 채 깨어나 되뇌곤 했다.

‘저건 내가 알던 원래의 요른이 아니야. 내가 억눌러 놓은…… 전락시켜 놓은 모습이잖아. 나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는 거지.’

저 요른은 스스로는 판단도, 생각도,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막시밀리안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고 시키는 대로만 느낀다.

그 외모며 태도, 몸의 자세도 다 막시밀리안 자신이 지난 십여 년에 걸쳐 빚어내다시피 한 것이다. 그가 구슬리고 속여 흐리멍덩해진 눈, 교묘하게 폭언을 퍼붓고 벌을 줄 때마다 겁에 질려 굳어가던 안색, 점점 더 움츠러들어 구부정해져 버린 어깨, 사람을 똑바로 향하지 못하는 시선.

그를 안으려면 말만 하면 된다는 걸 막시밀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요른은 당장 명령으로 받아들여서 복종하리라.

실제로 꿈속에서 요른은 철저하게 상대의 지시대로 움직여 몸을 열어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스스로는 손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요른을 앞에 세워 놓고 두 발자국쯤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두꺼운 승마용 장갑마저 그대로 낀 채로 입으로만 나긋나긋 명령했다. 음성도 한 치도 높이지 않은 채로.

요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옷을 벗었고, 막시밀리안이 가리킨 가구에 올라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다리가 충분히 벌려지지 않자 그는 기꺼이 제 양 발목을 묶어 고정했고 손으로도 살집을 잡아 넓게 벌렸다. 그리고 정신없이 더듬거리면서도 어디에 어떻게 넣어 달라고 제 입으로 간청해 왔다.

다행히 늘 그쯤에서 막시밀리안은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가위눌림에서 빠져나오려 애쓸 때와 마찬가지로 몸을 뒤틀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그러나 성기는 이미 끝이 축축해진 채, 허벅지를 따라 기분 나쁜 기생 생물처럼 길고 묵직하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망가졌어.’

창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을 어깨로 맞으며 성기사는 손안에 얼굴을 묻었다.

‘원래의 너를 그리워해야 하는데, 널 그때의 찬란한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생각만 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의 요른도 사랑해. 그를 안고 싶어. 내가 망쳐 놓은 너를 그 망가진 모습 그대로 안고 싶어. 더, 더 망가뜨리면서.’

지독히도 오랫동안 요른을 통제하고 독점했다.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 되어 버렸다.

“괜찮아.”

막시밀리안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넌 결국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나를…….

행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막시밀리안은 마침내 버려진 성 하나를 사들였다. 재작년에 남부로 옮겨간 카를에게 부탁해서 진작에 골라 두었던 성인데, 이제야 매입 절차가 완료된 것이다. 당시 카를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요새로 삼을 만한 걸 찾는 거야?”

“아니, 그런 요충지에 있는 거 말고. 르핀 왕국이 건재했을 때는 샬로테의 영지가 수도랑 동해 사이 경유지였잖아. 그러니까 옛 귀족이 별장 용도로 지어 뒀다가 버린 게 있을 텐데.”

“그런 작은 거? 뭐에 쓰게.”

“믿어 줘.”

막시밀리안이 말하자 카를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단단한 소꿉친구가 괜한 일을 벌인 적은 없었으니까.

혼인으로 새로 얻은 영지라 어차피 토지 조사도 한번 완전히 새로 해야 한다, 그런 김에 꼭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카를은 남부로 떠나갔다. 그리고 실제로 석 달쯤 후부터 상세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편지들을 읽다가 막시밀리안은 가끔 눈을 내리감곤 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서 올바른 미래가 온다면, 지금 카를이 가 있는 곳은 더는 군사 요충지로 쓰이지 않을 것이다. 그 지역은 다시 한산하기 그지없는 시골로 돌아갈 테고, 그중에서도 한참 변방에 떨어져 있는 버려진 고성들에는 아무도 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고성 매입 문서를 침실 수납장에 넣고 잠가 두었고, 성의 스케치와 위치가 담긴 지도 사본은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다. 무슨 짓을 하든, 지금 어떻게 느끼든 결국 그 성으로 가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었다. 거기서 요른은 마침내 원래 모습대로 깨어난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을 심판해 줄 것이다.

계획은 조금 달라졌다. 막시밀리안은 이제는 그 성에서 행복해질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는 벌을 받길 원했다. 그 하얀 마왕이라면 꿈속에 훌륭한 지옥을 짓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상대가 자신에게 저질러 온 일에 대해 빠짐없이 대가를 치르게끔 해 줄 것이다.

‘미안해, 요른.’

잠들기 전에 이제 그는 더는 수련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을 억누르는 태도가 요른을 짓밟는 작업과 결이 맞물려 있으며, 그래서 오히려 악몽을 부추긴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손을 모아 기도하듯이 빌었다. 양손을 입술 앞으로 모아 쥔 채,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줄 자에게 속삭이듯 빌고 나서야 자리에 몸을 눕히곤 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돌아와서 내게 벌을 줘. 미안해.’

올바른 미래 속에서라면 그는 이 세상에 마왕으로 강림하지는 않겠지만, 막시밀리안 한 사람에게만은 반드시 강림하여 심판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성기사는 그나마 조금은 짐을 던 듯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대대장에서 연대장으로, 연대장에서 여단장으로 승진하면서 막시밀리안은 수하 기사들과 함께 매일 같이 마물을 베고, 조각들을 실험실이나 공방으로 운반하고, 마왕 전설에 동조하는 ‘반역자’들을 잡아들여 가두고 심문과 처벌을 지시했다.

일상을 반복하며 젊은 성기사는 세상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었던지도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악을 억누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악을 억누르는 온갖 수단과 방법들이 세상 그 자체인 건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된 탓이다.

성기사는 시대가 거칠어지기 이전의 일들을 상기해 보려 애썼다. 지금은 전시라 그런 거고, 분명 전에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평온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으리라고 믿으며.

그러나 그는 평화를 아는 세대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려 애를 쓰면 뇌리에는 자꾸 어린 요른의 얼굴만 선연하게 새겨지곤 했다. 그 얼굴을 겨우 떨쳐 놓으면 다시금 지금의, 구부정하게 쪼그라든 생물의 모습이 그 자리를 채우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속이 답답해지면 막시밀리안은 가끔 성에서 혼자 말을 타고 나와 산길을 산책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로 발을 옮겨도 정확히 타블로의 그 계절과 그 지역에 해당하는 날씨가 몸을 눌렀고, 시내로 들어서면 타블로상의 어느 직업군에 속하는 평민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그 가장 어린 자손들마저 매년 새롭게 황국민 학교로 빨려 들어가 머릿속을 타블로로 채웠다.

“감옥이군.”

어느 봄, 성의 3층에서 꽃을 색채대로 배열해서 그림을 만들어 둔 정원을 내려다보며 무심코 중얼거려 놓고서는 그는 제풀에 놀랐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됐든 정신병자나 범죄자, 흑마법사, 마물과 반역자들이 세상에 날뛰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순수한 지옥이다. 그러니 악에 대해 그나마 차악으로 대항하고 있는 거라 해도 그만둘 수는 없다.

요른이라면 그저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겠지만.

“너는 그런 왕이지.”

막시밀리안은 발코니에서 물러나 서재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요른이라면 정신병자의 가장 불가해한 악몽도, 범죄자의 가장 끔찍한 욕망도 소박하고 성실한 시민의 무해한 소망과 다름없이 그대로 존중해 주리라. 성기사는 어린 시절, 막시밀리안 자신의 소원을 선물처럼 몰래 이뤄주고는 기뻐하던 천진한 얼굴을 떠올렸고 웃어 버렸다. 역시 그런 세상이 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요른에게 십여 년간 저질러왔고 또 저지르고 있는 일들이 악이라는 걸 부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모든 일이 빨리 다 끝나고 자신이 심판받기를 원했다.

그랬기에 막시밀리안은 이듬해 카를의 편지를 받고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마물이란 본래는 성황이 주문해서 만들어 낸 생물이었으리라는 점 또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막시밀리안.”

카를은 제 두 소꿉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장례는 폰 린하우스의 본성에서 치러졌고, 식장에는 폰 프란첸도, 투트 크라흐트 가의 주요 인물들도 자리했다. 린다는 식이 끝난 후 막시밀리안을 따로 불러내어 말을 걸어 왔다.

“견갑골 사이에 난 자국 봤지. 카를은 마물에 당한 게 아냐. 암살된 거야.”

“잊어버려.”

막시밀리안은 잘라 말했다. 린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 일이야?”

“네가 언젠가 말했지.”

성기사는 미소를 띤 채 친구에게 전했다.

“다들 뭔가를 억누르며 산다고. 성황국도 마찬가지야. 평화에는 대가가 있을 수밖에 없어.”

“그런 식으로 변명을…….”

“글쎄. 변명을 하고 있는 게 어느 쪽인지 잘 생각해 봐.”

그는 상대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네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진짜 이유가 뭔지 말이야. 맨땅에 날아든 사건은 아닌 거 같네. 카를의 죽음을 핑계로 삼고 싶은 다른 일이라도 있어?”

바다색 시선이 흔들렸다. 막시밀리안은 등을 돌리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삼 년 후, 스물여섯 살의 성기사 여단장은 결국 마법부 차장 린다 투트 크라흐트를 체포해야만 했다. 린다는 끝까지 원망스레 소꿉친구를 바라보며 따졌다.

“넌 어떻게 그자에게 계속 충성을 바칠 수가 있지, 막시밀리안?”

핑계 대지 마.

막시밀리안은 순간 쏘아붙이듯이 뱉을 뻔했지만 겨우 어투와 음성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병사들더러 그녀를 구치소로 이송시키라고 지시했다.

말을 타고 요른이 왼팔을 다쳐 입원했던 병동으로 향하는 길에 그는 되새겼다. 그래, 알고 있다. 지금 흑마법사라고 불리는 자들은 사십 년 전 성황의 명을 받들었던 르핀 왕국의 궁중 마법사들이다. 자국 기사들의 몸에 각종 맹수를 섞어 강화병을 만들라는 기밀 임무를 부여받았던 자들.

성황은 그들더러 자국의 왕과 귀족들에게도 알리지 말고 성황국 직속으로만 실험을 진행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고, 강화 기사들은 자아를 잃은 채 괴물이 되었으며, 이들이 거리로 도망쳐 나와 자국 시민을 살해하면서 실험은 일반에도 공개되고 말았다.

원래도 성황국에 소속감이 약했던 해양 왕국 르핀은 이 일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르핀은 원래도 바다 건너 타 대륙의 국가들과도 교류가 많던 나라였으니, 성황국에 반역하면서 외국의 힘을 빌리려 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황은 자신이 명했던 바는 싹 감추고, 르핀이 이단적 ‘흑마법’의 힘을 빌려 반란을 일으켰다고만 공고했다. 그 나라의 마법사들이 자국 기사들을 ‘마물화’해서 강화 군단을 만들려 시도했으며 이제 외세까지 끌어들이려 든다고 말이다.

외국군이 바다를 건너 도착하기 전에 나머지 일곱 왕국은 서둘러 연합 전선을 짜서 르핀을 멸망시켰다. 성황은 이후 대륙 바깥 국가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쇄국 정책을 폈다.

르핀의 궁중 마법사들 일부가 살아남아 괴물이 된 기사들을 데리고 간신히 남부로 도망쳤다. 그들은 강화병을 만들던 기술로 식물을 섞어 검은 숲을 지어 그 안에 은둔했으며, 생활이 안정되자 동물을 서로 섞은 마물마저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황국에 복수하고 싶었던 건지 절망에 차서 그저 대륙 모두가 다 미워져 버렸던 건지는 알 수 없다.

‘대륙 바깥에도 나라들은 있지.’

막시밀리안은 새삼 되뇌었다. 바다 멀리 건너에는 다른 대륙도 있고, 거기에는 성황국민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산다.

그곳 사람들은 귀가 길고, 피부는 전나무 껍질처럼 어두우면서 녹빛마저 감돈다고 한다. 동성혼은 일절 허용되지 않으며 이성 간에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기본이다. 신분제는 없으나 돈으로 사고파는 노예제는 있다. 태형은 없으나 대신 죄에 따라 피부에 기하학적 낙인을 새긴다. 동물은 털이 짧아 모피로는 거의 쓰지 못하며, 식물은 먹을 수 있는 열매가 거의 없지만 약재로는 좋다.

성기사는 성황의 의도를 이해하기는 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세계다. 막시밀리안은 그쪽 대륙을 지배하는 건 ‘천제’라는 자라고 들은 바 있다. 이쪽의 성황에 해당되는 자다.

이쪽 대륙민에게 그 천제라는 자의 권능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곳의 ‘수도승’들이 배를 타고 와서 르핀에 들렀다가 놀라서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황의 힘도 저쪽 대륙의 생물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르핀의 상인들은 전했다. 만약 전쟁이 나면 서로 마법으로 승부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의미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순수한 물리력의 싸움이다. 그러니 성황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는 언젠가는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강화병들을 만들어 두려 한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오래전부터 마물의 유래를 캐 보려 노력했다. 생도 시절부터 모친께 부탁드려 여러 도서관을 뒤졌고 문서를 사들였으며, 동화나 민담으로 분류되어 있던 몇몇 자료들을 역사적 기록으로써 읽어 냈다. 요른의 힘을 눈앞에서 보았던 탓이다.

그래서 카를의 편지까지 받고 나서는 어느 정도나마 사십 년 전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고, 성황뿐만이 아니라 당시 고위 귀족들이 어떻게 진상을 덮으려 노력했던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프란첸가도 개입했으리라.

‘성황은 나름대로 대륙을 지키려 했던 거야.’

막시밀리안은 말의 갈기 위로 고개를 숙인 채 되뇌었다.

‘저쪽 대륙의 천제라는 자도 우리 존재를 아는 한 뭔가 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성황도 무슨 수를 낼 수밖에 없었겠지. 선박이 발전하고 교역이 잦아지면…… 언젠가는 대륙 간 전쟁이 날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 대비책이라는 것이 안타깝게도 실패한 것뿐이다. 그 실패를 은폐하려다가 황국을 강화하려 했던 힘이 황국에 복수를 꾀하는 힘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정도 죄를 짓지 않고 지켜지는 평화가 있던가.

‘……핑계를 대면 안 돼.’

성황은 신은 아니다. 신이라 해도 아마 어떤 특정한 민족들의 염원만을 들어줄 수 있는 신이리라. 막시밀리안은 희미하게 품어온 생각을 돌이켰다. 그녀는 오직 우리 여덟 왕국에만 강림해 준 신이니, 우리도 그녀를 지켜 주어야 한다.

우리도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이백 년간의 태평성대가 아무 대가 없이 존속해 왔으리라 믿는 건 배신에 가깝다. 르핀의 멸망 말고도 수많은 죄가 있었고 잊혔으리라. 희생 없는 질서란 없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 했고, 다시금 앞만 보고 말을 이끌었다. 당연히 그는 끝까지 성황의 기사로 남을 것이다. 흑마법사들의 복수가 그 자체로는 어쩌면 정당하다 해도, 그 뒤에 오는 건 혼란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과연 이성적으로만 선택한 것인지, 지극히 감정적으로도 결단을 내린 것인지는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카를의 편지를 받고 사십 년 전의 진상에 대해 확신했던 날 일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기억했다. 네 편을 들어줄 수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환희. 요른, 널 깨워 줄 수 있어. 옳은 게 오히려 네 쪽일 수도 있어. 그 애와 늘 손을 잡고 꼭 껴안고 다녔던 시절에조차 느껴본 적 없던 격렬한 빛이 전신을 채웠다. 몸이 아예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듯한 느낌.

며칠 후 카를이 죽고 암살이 의심된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막시밀리안은 오히려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건 성황이 자기 죄를 인정한 것과 같다. 그가 정말로 죄를 지었다면, 이 세계가 부서지는 게 정당하다면. 네가 새 왕좌에 오르는 게 옳다면, 나는 네 기사가 되어…….

바로 그 기쁨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반대쪽 길을 선택했다.

자신이 행복한 게 옳은 길일 리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모든 게 완벽하고 행복하다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자신은 분명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수많은 타인이 불행해질 일을 선택하려 드는 것이리라. 이런 마음은 억눌러야만 한다.

린다를 체포한 후 막시밀리안은 성황국 병동에 들러 술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른의 각성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빨리 용사가 되어야 한다. 성검이 강림해 줄 때까지 버텨 낼 길을 찾아야 한다. 그는 강화병 시술을 받았고, 성공하자마자 요른의 사택에 들러 그에게 다시금 승리를 다짐해 주었다. 상대의 못 쓰게 되어 버린 왼손에 물끄러미 시선을 준 채.

괜찮아.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요른이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저런 걸 고치는 건 일도 아니야.

정화의 미래가 오면 르핀의 흑마법사들은 반역자로서 사형당하고 잊힐 것이다. 성황국은 복구되고 대륙은 다시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평성대를 누리리라. 그러나 요른은 아니다. 막시밀리안, 자신은 아니다.

그 마왕은 막시밀리안에게만은 강림해 준다. 아무것도 잊지 않은 채 돌아와, 오직 한 사람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판하고 갈기갈기 찢어 줄 것이다.

막시밀리안 자신만은 대륙의 평화와 마왕의 심판 양쪽을 모두 가질 수 있다.

그 미래를 위해 성기사는 성실하게 버텨 갔다.

그가 강화병이 된 후 처음으로 치렀던 전투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끝났다. 막시밀리안이 마물을 상대하는 동안 베스퍼는 흑마법사 한 명을 생포해 오기까지 했다. 막시밀리안도 이틀 후 지하 감옥의 심문실에 들러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심문실에는 시체 냄새가 그득했다. 후드를 벗겨 놓고 보자 흑마법사는 얼굴이 반쯤 썩어 있었고, 나머지 반쪽은 양서류 껍질처럼 변형되어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들은 저주받은 지 오래라고 들었다. 진작에 죽었어야 할 몸을 마왕의 힘을 이용해서 겨우 움직이며 살고 있었을 터였다. 왕이 강림하면 비로소 생명을 돌려받으리라 믿으면서.

벽의 사슬에 묶인 채 흑마법사는 막시밀리안이 들어오든 말든 고개도 들지 않았다.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미 썩어 가는 육신에 효과가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성기사가 인사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동안 들은 척도 않고 있다가 마지막 말에만 겨우 답했다.

“알 게 뭐야.”

“카를 폰 린하우스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다시 운을 떼었다.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게 당신인지 다른 마법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카를의 편지에는 복수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구세계를 부술 계획이라면 신세계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워 두셨을 거 아닙니까.”

성기사는 상대와 눈을 마주치려 애쓰며 깍듯이 물었다.

“어떤 질서를 바라시는 건지요.”

“그거야 사업가 협회가 알아서 제 배를 불리는 방향으로 정하겠지. 관심 없어.”

“딱히 바라는 바도 없으시다면, 왜…….”

“이 어린애야.”

그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입술로 킥킥 웃었다.

“꺼져라.”

막시밀리안은 잠시 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려 보았지만, 흑마법사는 고개를 돌린 채 눈마저 닫아걸듯 감아 버렸다. 스물여섯 살의 성기사는 가볍게 예를 표해 보인 후 방 밖으로 나왔다.

이후 몇 달간 막시밀리안은 잘 버텼다. 몸 안에 들어오는 마물의 수가 늘어날수록 상태도 점차 불안정해졌지만, 그래도 지지 않고 늘 가장 강한 마검을 골라 전장을 향했다. 버티다 보면 성검은 반드시 강림해 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연구소에서도 공방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매진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결국 정화의 능력을 갖춘 검을 벼려 내고야 말 거라고.

성검의 강림 시기에 대한 예언이 워낙 두루뭉술한 걸 그렇게 이해하려는 학자들은 막시밀리안 말고도 제법 있었다. 사람의 노력으로 결실을 볼 일이기에, 고문서에도 예언이라기보다는 ‘노력하고’ ‘믿음을 가지면’ 하는 둥 응원 같은 말밖에는 쓰여 있지 못한 거라고.

기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다른 자들이 뒤에서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뿐이라고 일부 문헌학자들은 말했고, 막시밀리안도 늘 그 말을 믿고 전장에 나섰다. 그의 생각에도 선이란 결국 그런 것이어야만 했다. 사람들이 악과 싸우며 모두 함께 스스로를 갈고닦아 도달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극의.

그러나 성기사는 어느 날 한순간 전장에서 균형을 잃었다. 하늘에 새가 날고 있었던 탓이다.

새하얀, 너무 멀어서 차라리 항성처럼 반짝이는 새.

그것은 기사들에게도 마물들에게도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으며, 땅에서 벌어지는 일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무구하게 자유로웠다.

젊은 성기사의 뇌리에 오랜 기억이 스쳤다. 어느 골목의 풍경. 그런 존재를 굳이 이름을 불러 복속시켰다.

그런 자를 마치 인간처럼 사랑했다.

어쩌면 모든 건 내가…….

“막시밀리안!”

베스퍼의 목소리가 뒤늦게 귓가에 와 닿았다. 허공에서 닥쳐오는 마물을 겨우 베어 냈지만 이미 오른팔의 반이 잠식된 후였다.

허리에서 다른 마검을 뽑아, 잠식되지 않은 쪽의 팔을 움직여 몇 마리를 더 베어 낸 후 막시밀리안은 신음하며 물러났다. 더는 검을 가눌 수가 없었다. 베스퍼가 성기사 둘을 불러 엄호하며 그를 얼른 말에 태웠다.

“데려가.”

베스퍼가 마저 목적지를 지시하는 걸 들으며 막시밀리안은 숨을 골랐다. 움베르토의 연구소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는 의식이 남아 있었지만, 지하 감방에 묶인 후로는 희미해졌다. 아주 가끔만 눈앞이 보일 정도로 정신이 돌아왔고, 온 힘을 다해 그 상태에 머무르려 애썼지만 금방 다시금 눈도 귀도 시커멓게 변해 버리곤 했다.

감방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 앉아 있는 게 눈에 띌 때마다 그는 뭔가 부탁을 했다. 그러나 무슨 부탁이었는지는 제 귀에도 들리지 않았고, 그나마 곧 목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그는 누군가가 쓰다듬는 듯한 손길을 느꼈다. 마음 그 자체를 쓸어 주는 듯한, 몹시도 그리운 손길.

눈을 뜨자 세상은 이미 구원되어 있었다.

성검이 강림한 걸 깨닫고 막시밀리안은 달렸다. 한달음에 말을 타고 달려 공방으로 향했으며, 검을 등에 멘 채 다시 요른의 사택으로 달렸다. 그러나 집은 비어 있었다. 요른을 바로 만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곧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성기사는 황궁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가 끝나고 성황이 성검의 재료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도 그는 상황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한 맥락에서 요른의 이름이 거론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무대를 잘못 찾은 배우처럼.

움베르토가 일어나 다가와 용사의 어깨를 짚었다.

* * *

“프란첸 경.”

베스퍼의 부관이 말을 몰고 용사의 곁으로 다가와 불렀다.

“행렬에서 벗어나고 계십니다. 돌아오십시오.”

용사는 고삐를 잡고 다시 열에 섞여 들었다. 부관은 다시 부대 선두로 멀어져 갔고, 주변 기병들은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원래대로라면 성검을 등에 멘 용사가 총사령관인 베스퍼와 나란히 선두에 서서 기사단을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상태를 보고 간부들은 출전 직전 회의를 거쳐 용사를 뒷줄에 세우기로 결정했고 성황께도 그렇게 보고를 올렸다.

막시밀리안은 베스퍼 수하의 기병들에 둘러싸인 채 열을 맞추어 말을 몰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려 애썼지만, 곧 고개가 짓눌렸다. 등의 통증 때문에 몸을 똑바로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행군 내내 등이 아팠다. 성검이 등 뒤에서 희고 차가운 불꽃처럼 타오르며 흉곽을 꿰뚫어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순간 하늘이 희뜩하게 빛나며 그의 몸을 마저 내리눌렀고 막시밀리안은 비명도 못 지른 채 말에서 미끄러졌다.

“용사님.”

다행히 병사들이 그를 받쳐내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장갑 낀 둔탁한 손들 사이에서 하얀 맨손을 찾아 헤맸다. 지금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잡을 것이다.

강제로 일으켜 세워지다시피 해서 용사는 말 안장에 기대어 섰다. 그러나 말에 오르려는 동작조차 취하지 못하고 곧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임시 막사였다. 용사는 성검부터 찾았다. 다행히 검은 침상에 기대어 놓여 있었다. 그는 급히 손을 뻗어 검을 제 몸 곁으로 끌어올렸고, 품에 끌어안았다. 그런 후에야 막시밀리안은 총사령관이 침상 옆에 앉아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니 제대로 챙겨 먹으라고 했잖소.”

베스퍼도 막시밀리안이 깨어난 걸 눈치채고는 채근했다. 눈이 마주치자 막시밀리안의 안에서 다시금 충동이 꿈틀거렸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원정을 떠나오기 이틀 전 오후에야 막시밀리안은 베스퍼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었다. 자신이 지하 감방에 묶여 있는 동안 요른이 어떤 식으로 실험 재료들을 얻어 냈는지 말이다.

기사단 간부 회의가 끝난 후 베스퍼는 막시밀리안을 따로 복도 한쪽으로 불러냈고, 차분하게 정리해서 사정을 들려주었다. 두 성인 간의 정당한 거래였으며, 숨길 건 아무것도 없고 숨기는 게 오히려 예의에 맞지 않으니 들려주겠다는 식이었다.

병영 복도에 총사령관과 마주 서서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도 용사는 성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귓속의 공기가 찢어질 듯 울렸고, 등이 너무 아프고 무거워서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베스퍼는 제풀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린 막시밀리안의 몸을 토닥이듯이 일으켜서 벽 한쪽의 벤치에 앉혀 주었다.

눈앞이 어느 정도나마 맑아진 후에야 용사는 고개를 들어 이미 복도 끝으로 멀어져 버린 상대의 등을 바라보았고, 성검 대신 허리춤에서 대인용 장검을 빼 들었다. 그런 채 뒤늦게나마 걸음을 재촉해서 기습했지만 베스퍼는 금방 알아채고 상대를 가볍게 제압해서 던져 버렸다.

“원정 끝나고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시오. 그때는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지. 지금 이건 그냥 하극상 아닌가.”

복도 한구석에 널브러진 채 막시밀리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새하얀 바탕에 푸른 장식이 새겨진 궁륭이 온통 샛노랗게 얼룩져 시야에 비쳐 들었다.

“식사나 제대로 좀 해 두시고. 내일모레가 출진인데, 그 몸으로 행군이나 하겠습니까.”

베스퍼가 혀를 차더니 곧 떠나갔다. 용사는 한참 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등이 아팠다.

벽에 내던져져 그대로 미끄러져 내린 바람에 성검이 자신의 등과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미안해. 뇌리에 문장이 떠올랐지만 그는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용사는 기듯이 몸을 일으켜 겨우 창가를 짚고 일어났다. 사실 왜 일어나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습관에 따를 뿐이었다. 마음에 상관하지 않고 주어진 과제를 그대로 해내는 습관. 그리고 그렇게 습관적으로 움직여 낼 때마다 등이 더욱더 으깨지듯 아팠다.

막시밀리안은 황궁 밖으로 나갔고, 수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 등자를 딛고 말에 올라 원정 채비를 하러 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올라가 토한 다음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더 움직이지 못했다.

“주인님.”

하인이 뒤늦게야 발견하고 그를 부축해 침실로 옮겨 놓았다. 등의 검을 끌러 주려 하자 프란첸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마.”

“편하게 해 드리려고…….”

“하지, 마.”

용사는 눈에 핏발이 선 채 소리 질렀다.

“거, 건드리지, 마.”

하인은 얌전히 물러났다. 성주의 몸은 고작 몇 주 만에 끔찍할 정도로 말라빠졌고, 눈 밑이 푹 파인 채 안색도 검게 변했다. 전에 입던 옷들이 맞지 않아 다 새로 수선해야 했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는 듯 행동하시더니 요 며칠은 말까지 더듬거리시기 시작했다.

저주받으신…… 하인의 뇌리에 적확한 표현이 떠올랐지만, 그는 삼키고 성주의 침실을 떠났다.

막시밀리안은 쉬다가 저녁 늦게야 겨우 서재로 가서 몇 가지 서류를 처리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는 동안은 잠시 검을 끌러 놓을 수밖에 없었기에, 뺨에 상처가 남아 있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침대에 누운 채 그는 성검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주인을 다치게 하면 검도 아프다고 해서 이제 그는 검신째 껴안지는 못했다. 검집을 씌운 채 매만질 뿐이었다.

거기 있어? 그는 수백 번도 더 떠올렸던 물음을 다시 전하려 애써 보았다.

거기 남아 있어?

일반 마검에는 재료가 된 마물의 의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자아를 가질 정도는 아니고 본능만 남아 있는 정도지만, 본능만 남은 만큼 더욱 거칠게 꿈틀거려대서 성기사들은 복속에 애를 먹곤 했다.

그러니 요른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면 더 많은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자아의 편린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막시밀리안은 희망을 품어 보곤 했다. 어쩌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제로 며칠 전 성황께 여쭈었을 때, 헤르타는 잠시 고심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그녀는 막시밀리안이 원정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방법을 찾아 놓겠다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알겠습니다. 예언의 시기는 지났으니, 그가 돌아온다 해도 다시 마왕으로 강림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겠지요. 요른을 되돌려 놓을 방법을 찾아보고 있겠습니다. 프란첸 경은 일단 무탈히 임무를 다하고 오십시오.]

프란첸 별성의 침실, 막시밀리안은 검을 안은 채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의 음성을 떠올렸고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성황의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답을 들은 순간 죽을 듯이 기뻤던 만큼 더욱더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불신하는 데에는 익숙한 자였다. 헤르타는 막시밀리안이 얼른 원정을 떠나게끔 하기 위해 일단 아무 약속이나 내걸어 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 가능성이 더 높으리라. 오히려 그녀는 대륙의 정화가 끝난 다음에는…….

거기 있어?

용사는 다만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말을 걸다가 선잠에 빠져들었다.

“출진 일을 미루는 게 어떻겠냐.”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드는 자리에서 올리버 폰 프란첸 공작이 아들에게 말을 걸어 왔다. 성검 강림의 소식을 들은 후 그는 바로 아내와 함께 성황국 수도로 올라와 프란첸 별성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청원을 올려 주마. 그 몸으로는 무리다.”

“충분히 쉬었습니다.”

일단 원정을 다녀와야 한다. 용사는 생각했다. 그래야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유디트도 조심스레 목소리를 높여 말렸다.

“막시, 얘야. 너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비틀거리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으로는 맑은 수프 한 사발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반도 축내지 못한 채였다.

유디트는 입을 다물었지만 오싹 소름이 끼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들의 저런 모습을 평생 딱 한 번 보았다. 아들이 열 살 때, 부모에게 소리를 질렀다가 제풀에 죄책감에 질린 나머지 정령의 저주를 받아 병상에 누웠을 때. 그러나 차라리 그때의 모습이 지금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초봄의 오전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녹빛과 각종 꽃들의 색채가 어우러진 정원을 건너 성 앞 광장으로 나갔다. 수하 기병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말과 사람들 모두 상태도 좋았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대열을 지켜선 모습도 깔끔했다.

공작 부부가 챙겨 주지 않았더라면 사실 막시밀리안은 이들을 채비시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전에는 매일매일 그런 작업을 해 왔던지, 왜 해 왔던지도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들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햇빛이 너무 쏘는 듯이 강하다고 느끼며 용사는 피신하듯이 다시 성내로 들어왔다. 어이가 없었다.

이 세상에 햇빛이 비쳐서는 안 되었다.

이건 불의다. 봄은, 이 햇살과 온기는 모두 불의다. 증오가 어지럽게 그의 혈관을 태웠다. 겨우 제 방으로 올라와 침대 위로 쓰러지듯이 몸을 반쯤만 걸치며 엎드린 순간 막시밀리안은 다시 잠이 들었고, 출진 일인 다음 날 새벽까지 그대로 잤다.

베스퍼를 위시한 기사단 간부들과 마지막 회의를 마친 후 용사는 행군길에 올랐다. 그러나 첫 도시를 정화하고 두 번째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는 벌써 낙마해 쓰러졌고, 덕분에 기사단 전체가 예정에 없이 막사를 세우고 쉬어야 했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베스퍼가 계속 말했다.

“곧 취사병이 식사를 가져올 테니 드시오. 다 비워야 합니다.”

막시밀리안은 베스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베스퍼가 눈치챘는지 피식 웃었다.

“원정 끝나고 얼마든지 상대해 드린다고 했잖습니까. 일단 식사나 하시오.”

일어나 앉은 채 기다리자 병사가 스프와 물을 가져왔다. 용사는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그 물컹거리는 괴물 같은 것을 한 토막씩 위장에 집어넣었고, 입을 틀어막은 채 토기를 눌렀다.

다음 날 그는 다시 말에 올랐다. 두 번째 도시에서 도착해서 용사는 간부 몇과 함께 그곳 영주의 주성 가장 높은 탑에 올랐으며, 성검에 명해 당장 그곳을 중심으로 한 주(州)의 삼분지 일에 해당할 지역 전체를 정화했다.

용사는 요른이라면 사실 전 대륙을 한꺼번에 정화해 버릴 수 있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주인인 자신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이란 기껏해야 높은 산에 올라 내려다본 전경 정도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공간도 도시 하나와 그 근방 정도에 한정되어 있다. 그나마 막시밀리안은 어린 시절 요른과 꿈에서 노닌 바가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높이 올라 상상할 수 있었고, 제법 아득한 규모의 공간에 대해서도 한꺼번에 정화의 명을 내릴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마음속으로 명을 내리면 성검은 바로 들어 주었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 봤자 대화에는 응해 주지 않으면서도, 그 새하얀 검은 명령에만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복종했다. 그래서 용사는 명령을 내릴 때마다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었다.

정화 의식을 치른 후에는 개선식 비슷한 시내 행군이 이어졌다. 기사단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화환을 던지고 박수갈채를 보내며 시민도 도시 방위군도 웃었다.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 해맑고 신실한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막시밀리안은 눈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감히.

용사는 당장 검을 빼 들고 그 얼굴 하나하나를 다 그어 내리고 싶었다. 등이 너무 아팠고 무거웠으며, 햇살은 섬뜩하도록 밝고 맑았다.

봄이었다. 서로 덩굴처럼 엉켰던 식물들도 모두 정화되어 원래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수 목련꽃과 배나무 여린 잎들이 징그럽게 피어나 시내 곳곳을 장식하는 걸 보며 막시밀리안은 소스라쳤다. 자연이란 수치를 모른다.

시내를 행군하는 내내 막시밀리안은 기병과 다른 기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간혹 그에게 어떻게든 접근해 오려는 시민도 있었다. 이 도시의 젊은 부부도 개중 하나였고, 특히 여자 쪽은 아이가 안긴 품을 내보이려 애쓰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왔다.

“고마워요, 용사님.”

여자가 울먹이며 외쳐 댔다. 잠식되었다가 정화의 의식 후에야 제 모습으로 돌아온 아이라고, 남편이 옆에서 역시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설명해 주었다. 용사는 아이를 베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전혀 잘못된 감정이라 느끼지 않았다.

―신세계에…… 어떤 질서를 바라셨던 건지요.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흑마법사에게 던졌던 질문을 기억했다.

―알 게 뭐야.

그리고 그 답을 이제야 이해했다.

용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정령의 저주를 받아 미쳐 가고 있다. 그 흑마법사의 반쯤 썩어 있던 몸만큼이나 자신의 몸도 영혼도 지금 썩어 가고 있을 테고, 앞으로도 오직 썩어 가는 것 외로는 달리 살아갈 길이 없으리라. 

그래서 뭐?

용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세상은 마침내 싱싱하게 아름다웠으며, 모두가 행복했고, 그 자체로 지킬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걸 증오했다.

요른이 사라졌다.

이 뒤로 올 모든 것들은 그 무덤에서 자라난 독초일 뿐이다.

너를 짓밟고 부수고, 조각내고 녹여 내고서야 온 것들.

보기 좋을수록 더 역겹고, 선할수록 기만에 불과하다. 모두 죽어 버려라. 말에 올라탄 채 막시밀리안은 이명이 귀를 찢으면서 눈앞이 꺼멓게 멀어지는 걸 느꼈다. 단순히 식이나 잠자리의 문제가 아니다. 십여 년 전 병상에 누웠을 때와 비슷한 감각. 아마 그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이 어린애야.

감방에서 흑마법사가 비웃듯이 던졌던 말을 돌이키며 용사는 말 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 몇이 쭈뼛한 느낌을 받고는 돌아보았지만, 시민들은 그마저도 멋대로 좋게 해석해 버린 듯, 오히려 더 크게 환호를 내지르며 용사의 이름을 불렀다.

병영 곁에 마련된 임시 막사에 도착해서 병사들은 짐을 끌러 내렸다. 하룻밤만 쉬고 새벽에 바로 다음 도시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병사들 사이로 떠도는, 다시금 찾아올 영원한 태평성대를 점치는 말들을 들었다.

목소리는 기대에 차 있었고 가끔 웃음소리도 더해졌다. 용사의 심장이 찢겨 나가며 어두운 물 같은 것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그는 기꺼이 미쳐서 이 죄인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손이 성검 쪽으로 움직이기 전에 그는 도망치듯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성기사단이 대륙의 성황국령을 모두 떠도는 데에는 약 일 년이 걸렸다. 용사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기사단이 행군 속도를 늦춰야 했던 탓도 컸다.

막시밀리안은 나중에는 정화의 명을 내리는 데에만도 애를 먹었다. 그래야만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고, 성검이 꼬박꼬박 순종하는 것 자체가 괴로웠기 때문이다. 의지도 상상력도 약해지면서 명이 미치는 범위도 갈수록 좁아졌다.

막시밀리안은 새 도시에 도달할 때마다 겨우겨우 의식을 치르고 시내 행군을 마친 후 하루가 다르게 약해져 가는 몸을 막사 침상에 누였다. 그나마 원정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성검이 몸을 온존해 주어서였다. 검을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는 상태가 조금 나아지곤 했다.

밤에 잠들기 직전에 용사는 늘 하루 중 가장 끔찍하게 지쳐 있었다. 죽음과 같은 잠에 짓눌린 가운데 요른의 얼굴이 가끔 눈꺼풀 밑으로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막시밀리안은 기뻐하지도 못하고 다만 소스라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 자신이 망쳐 놓았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처 입히고 멋대로 조종했던 자다. 그 자신이 명했던 대로 두 발짝 내로는 들어오지도 못한 채 원을 그리듯이 맴돌던 발, 타인과 시선을 맞추는 것도 괴로워하던 눈, 먹을 때도 늘 남의 눈치를 보느라 깡말라 버린 몸, 아무렇지도 않게 움베르토의 연구소 지하 실험실의 의자에 앉았을 다리와 베스퍼의 사실에서 옷의 단추를 풀었을 손.

요른의 성숙한 모습이라고 해 봐야 온통 그렇게 막시밀리안 자신이 그에게 저지른 죄의 흔적뿐, 상대 자신의 오롯한 표현이라 할 만한 건 단 한 점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의 찬란한 잔영만이 가끔 빛을 흘려 더더욱 속을 찢어 놓았다.

막사의 침상에 누워 막시밀리안은 차마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목으로 삼켰다. 그러나 무심코 말이 흘러나와 버리는 새벽도 있었다.

“도, 돌아와, 줄 거라고…….”

그는 검을 꽉 안은 채로 속삭이곤 했다.

“네가 돌아와 줄 거라고 생각해서, 나, 나는, 미안…….”

품속의 검은 침묵했다.

용사는 사실 요른이 돌아와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늘 원했던 것, 가장 올바르고 곧은 것의 형상을 취한 채 그는 상대의 손안으로 돌아와 주었다. 주인에 한없이 순종하기만 하는 손잡이 달린 물건이 되어.

요른은 스스로 그런 검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렇게도 무한히 자유롭던 존재가 자기 의지로 이런 끝을 맺었다.

내가 그런 생물로 키워 냈다.

막시밀리안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으깨진 벌레처럼 경련하다가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다시 잠 속으로 떨어졌다.

일 년 후 겨우 원정이 끝났다. 막시밀리안은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에 실린 채로 성황국 수도에 입성했고, 곧바로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 쉬어야만 했다. 그는 이제 사지를 거의 가눌 수가 없었고 한낮에도 사물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수하 기사들은 그를 병자 취급하게 된 지 오래였다.

사흘을 내리 잔 후에야 막시밀리안은 겨우 다시 의복을 갖춰 입고 마차에 올랐고, 황궁에 들러 성황을 알현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가 옥좌에 앉아 그를 반겨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그녀 주위에 평소의 호위병이 아니라 베스퍼를 위시한 성기사와 마법사들이 자리해있는 걸 보고는 금방 성황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녀는 알현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명했다.

“검을 넘겨주십시오.”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성하.”

“아니오.”

성황이 잘라 말했다.

“그를 돌려낼 수 있으리라 정말로 기대하신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프란첸 경.”

“성검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소한 지금 경의 손에 맡겨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정령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헤르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세상이 증오스러우십니까?”

“…….”

“성검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주인만을 섬기지요. 그러니 선한 의지를 가진 자의 손에 들어가면 정화의 검이 됩니다. 하지만 저주받은 자의 손에서 어떻게 작용할지는 나조차도 모릅니다. 원래는 마왕이었던 검이니까요. 프란첸 경, 부디 성검을 넘겨주십시오. 황국의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기사도를 지켜서.

막시밀리안의 머리에 문장 셋이 차례로 떠올랐다. 네 몸이 오직 보편타당한 격률만을 실천하게끔 하라. 네 영혼이 오직 보편타당한 의지에만 바쳐지게끔 하라. 네 심장이 오직 보편타당한 것만을 욕망하게끔 하라. 즉, 황국의 기사로서만 살아가라. 용사는 웃으며 되물었다.

“검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게 넘겨주기 저어되신다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성황이 용사의 눈을 몹시도 투명하게 들여다보았다.

막시밀리안은 그 시선을 이해했다. 주인을 베면 성검도 고통을 느낀다. 주인을 살해하면 성검은 아마도…….

원정을 떠나기 전, 헤르타는 그렇지 않아도 귀족들을 불러다 모아 놓고 그 점에 대해 넌지시 암시한 적이 있었다. 보통의 마검조차도 자살의 용도로 이용되면 금이 가거나 못 쓰게 되어 버린다고.

“당신을 저주합니다.”

막시밀리안이 말하자 헤르타는 끄덕이며 맞받았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도 이해하시겠죠. 당신은 늘 이해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성검도 이 세계에 남겨 두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당신을 벨 수도 있어.”

“하지만 하지 않으실 테지요.”

성황은 흔들림 없이 맞받았다.

막시밀리안은 웃었다. 그녀를 벨 수도 있다. 이 몸은 이제 기사로서는 거의 아무 쓸모가 없지만, 성검에게 명해 강제로 움직일 수는 있으리라. 저 흑마법사들이 썩은 몸을 몇십 년간 움직여 왔듯이.

그는 성기사단 모두를 베고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의 목을 베고, 성검을 든 용사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검을 든 마왕이 되어 저 옥좌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렇게 겨우 평화를 되찾았다고들 기뻐하고 있는 이 세계를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전 대륙에 정화 대신 끊임없이 저주의 명을 내리면서.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그 길은 택하지 않았다.

왜 택하지 않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만 궁으로 오는 길에 들었던 어린아이들의 웃음을 떠올렸고, 뼛속에서부터 증오와 혐오에 사무쳤지만 한편 그 애들 자신은 아직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용사는 자신의 감정을 불신하는 데에 익숙한 자였다.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명하며 등에서 성검을 반쯤만 빼 들었다. 검집은 여전히 등에 비스듬히 고정한 채로 칼자루에 가까운 쪽 검날이 왼쪽 목덜미에 닿게 조절한 후, 그는 단번에 손잡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끌어당겼다.

명령에 담긴 의지는 깨끗했고 성검은 아무 저항 없이 명을 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유리처럼 부서져 갔다.

잘려 나가 바닥에 뒹굴던 머리가 역시나 바닥에 떨구어져 투명한 재로 화하기 시작한 검날 쪽을 향한 채 빌었다. 다시 가고 싶어.

도와줘, 요른.

너는 어디에나 있지, 시간과 시간 사이에도.

다시 갈 수만 있다면.

* * *

……이번에는.

문장이 잠시 뇌리에 가물거렸다. 막시밀리안은 눈을 떴다.

한밤중인 듯 시야는 어두컴컴했지만, 창의 각도나 격자 모양, 희미하게 달빛에 비친 가구들의 윤곽으로 보아 자기 성의 침실 한가운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을 해내고는 바로 욕실로 걸어 들어가 거울을 마주했다.

그러나 욕실은 침실보다도 훨씬 더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눈을 감고 체내를 속속들이 훑다시피 하며 자신의 상태와 나이, 계절과 시각을 가늠했다. 몸을 통제하는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익힌 기술이었다.

‘스물다섯 살, 가을인가.’

몸 상태가 순수하지 않았다. 원래의 몸에 뭔가 아주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것이 섞여 든 듯한 인상. 그래도 대강 그 정도 나이였고 그 정도 계절 속에 있었다.

죽음의 찰나 마지막으로 꾸는 꿈일까, 아니면 설마 정말로. 생각하며 막시밀리안은 숨을 토해 냈다.

막시밀리안은 평소에 요른더러 사람 마음을 읽지 말라고 했었다. 지난 일 년간 성검은 그의 명령에는 순종하면서도 대화에는 응해 주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그게 요른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검이 여전히 그 명을 받들어 주고 있는 탓은 아닌가 의심했었다.

검이 부서지는 순간 그 금제가 풀어져 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마침내 검이 제 주인의 소망을 읽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나마 이루어 준 것일 수도 있다.

웃옷의 단추도 잠그지 못한 채 막시밀리안은 욕실의 매끄러운 벽에 등을 기대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무심코 손을 올려 뺨을 만져 보았고,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걸 확인하자 안도했다. 그때 문밖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막시.”

소리는 점점 커졌고, 울음이 섞여갔다.

“막시,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안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구석에 주저앉은 채 잠시 정신을 잃다시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눈물로 푹 젖은 채,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소리를 참고 있었다는 걸. 손을 놓았다가는 통곡을 해 버릴 것 같아서 그는 한동안 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요른이 중얼거리며 혼자 방 안을 휘도는 게 들렸다.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고, 사지를 움직일 때마다 바늘에 찔린 듯이 아팠으며 무엇보다 등이 너무 무거웠다. 이제 성검은 얹혀 있지 않은데도 새하얀 유령 같은 무게가 번뜩이며 흉곽을 꿰뚫었다. 그는 다시금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신음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이번에는.

팔꿈치로 땅을 짚고, 기도하듯이 손을 모은 채 몇 분은 더 엎드려 있다가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덜덜 떨리는 팔다리를 추슬러 일어나면서 그는 생각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저 요른은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거고, 자신은 대체 어떤 식으로 이곳에, 이 시점에 전송된 걸까.

이전의 몸은 분명 목이 잘려 죽었으니 소위 영혼만 전송되어 온 걸 수도 있다. 자신의 스물다섯 살짜리 옛 몸에 말하자면 빙의된 것이다.

‘몸의 원래 주인은 죽었나 보군.’

막시밀리안은 가만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있던 영혼을 비워 줘야 했을 테니 이 몸은 아마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으리라. 심장이 정지하면서 스물다섯 살의 프란첸가 독자는 죽고, 그 자리에 스물일곱의 자신이 빙의하면서 시신이 되살아난 것이다.

잘됐군. 막시밀리안은 웃음을 흘렸다. 그 멍청한 어린애는 뒈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서 이를 악물었다. 그 멍청이가 다치거나 뒈지면 바로 알고 찾아올 수 있게끔 요른은 상대의 몸에 어떤 마법을 걸어 두었던 것이리라.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졌다. 여러 번 더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막시밀리안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안개에 묻힌 달처럼, 어둠 속에서 새하얀 인영이 어슴푸레한 빛을 냈다.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창가로 다가와 드러난 이목구비도, 움츠러든 어깨도 핏자국도 믿을 수 없이 또렷해서 꿈같았다. 두려워서 어느 순간 그 몸을 품에 안았다.

그러자 모든 게 풍요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시간이 흘렀다. 아무렇지도 않게 밤이 가고 동녘에서 붉게 물든 황금빛이 창으로 넘치도록 흘러들어 와 상대의 얼굴을 적셨다. 막시밀리안은 그 손을 꽉 잡은 채 원래는 그 누구도 타인에게 해 줄 필요가 없었어야만 할 말을 했다.

“너는 자유야.”

요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불안하게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훑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여 버렸다. 막시밀리안도 마주 고개를 숙인 채 상대의 창백한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아 제 이마에 댔다.

알고 있었다. 골목에서 그 생물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내내 저항하며 헛되이 먼 길을 돌아오느라 숨 쉬듯이 죄를 지었던 것뿐이다. 말들이 들끓어 오르며 그의 뇌리에 성흔과 같은 낙인을 새겼다. 기사도를 지켜서.

다시는 내 몸은 보편타당의 격률에 현혹되지 않으며,

내 혼의 의지는 타인의 선에 눈멀지 않고,

내 심장은 이름 모를 옳음을 욕망하지 않으리라.

“요른.”

입술 끝으로 그 이름을 빚어 바치며 그는 마지막 계시를 받아들였다. 즉, 너의 기사로만 살리라.

성기사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제 신의 손을 놓아 주었다. 요른이 눈치를 보듯 흘끔흘끔 올려다보았고, 그 바람에 둘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은빛 눈동자 안으로 훅 빨려 들어가던 순간 흑발 청년의 오른손도 저절로 움직여 그 뺨에 닿았다.

손끝은 입술까지 흘러 내려가 불빛에 닿은 나비처럼 떨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거두어들이며 눈을 감았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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