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2/30)

3.

사흘 후, ‘날씨’는 무시무시하리만치 찬란하게 기승을 부렸다.

요른은 숲속의 사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훈장을 집어 들어 가만히 부조가 도드라진 부분을 만져 보았다.

어젯밤에 겁에 질려 안고 잤던 훈장이다. 그러나 아침, 백금빛 햇살이 창문에 뽀얗게 부딪혀 백열하는 중에 요른은 부조의 새 날개 부분을 검지로 건드리다가 입김을 후 불었다. 금속 훈장이 깃털로 변해 날아올랐다.

깃털은 곧 사금 같은 빛 안개로 변해 허공에 남실댔고 요른은 침대에서 사뿐 뛰어내리며 생각했다. 오늘 실험을 해 볼까, 말까.

느긋하게 고민하다가 그는 피식 웃었다. 그만두자. 어차피 잠식 따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의미가 없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기 양손을 내려보았고 깨달았다.

“왜 이런 데에 갇혀 있지?”

하얀 생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몸은 가짜다. 보잘것없는 허구. 그는 자신이 이제야 그 점을 깨달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거의 이십 년이나 이런 몸을 유지해 온 후에야 말이다. 

대체 왜 그랬더라?

요른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집을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바깥 구경을 할 뿐이다.

베스퍼가 혹시라도 기껏 자신이 하얀 청년에게 빌려 줬던 실험실의 사용 현황을 확인해 본다면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요른은 사흘 전부터는 전혀 실험실을 찾지 않았으니까.

이레 전, 베스퍼와 처음 잔 날에는 달랐다. 그때 요른은 실험실 근처의 좌표로 화급히 자신의 몸을 이동시켰고 서둘러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컴컴한 방 안에 들어서자 가슴에 고등 마법사 배지를 단 조수 한 명, 그리고 성기사 한 명이 벽 한쪽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요른을 보자 눈을 찡그렸지만 어쨌거나 인사를 해 주었다.

요른은 조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전에 움베르토의 연구소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요른은 적이 안심한 채 더듬거리며 물었다.

“사, 상자들은요.”

베스퍼가 드나들었던 목에서는 여전히 긁힌 소음만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조수는 알아듣고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마물 조각들이 담긴 상자들이 방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요른은 온몸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상자를 하나씩 내려서 열려고 애써 보았다. 하지만 곧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조수와 기사에게 거의 빌 듯이 부탁했다.

둘은 한숨을 내쉬며 상자를 내려 바닥에 늘어놓고 하나씩 열어 주었다. 마물 조각들이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요른은 도구가 준비된 곳을 가리키며 조수에게 청했다. 전에 연구소에서 그랬듯이 조각들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거나 용액에 녹여 달라는 거였다.

조수가 준비하는 동안 요른은 웃옷과 바지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흉터로 얼룩진 피부에 그날 새로 생긴 피멍이 여기저기 잡혀 있었고, 특히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는 지독했다. 그는 칼을 들어 그런 몸 여기저기를 갈라 자상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조수에게 준비된 가루와 액체를 상처에 넣어 주기를 부탁했다.

그날 밤부터 다음 날 오후까지 마물 상자 여덟 개 분량의 마물 조각이 요른의 몸에 삽입되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잠식의 기미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조수가 지쳐 나가떨어지고 요른도 기절할 지경이 되면서 실험은 중지되었다. 정신을 차린 후 요른은 제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당연하다. 움베르토가 근 4년간 실험을 했는데도 잠식이 일어나지 않았던 몸이다. 자신이 얼마나 괴물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요즘은 날씨가 워낙 좋다니 그 사고 때와 비슷한 효과가 나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다.

다행이라면 베스퍼가 다음 날도 마물 조각을 넉넉하게 보내 주었다는 거였다. 실험실에는 상자 열일곱 개가 새로 쌓였고, 요른은 조수와 함께 열두 개 분량을 자신의 몸에 주입했다. 그러나 조수는 상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더는 못 하겠습니다. 총사령관 지시라고는 해도 저는 나중에 이상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요. 혼자 하시든지, 알아서 그만두세요.”

조수는 가방을 챙기더니 방문을 열었고 성기사도 그에 따랐다. 요른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제발. 그러나 운을 떼기도 전에 사고가 먼저 움직였다.

조수와 성기사의 몸이 목각 인형처럼 덜거덕거리며 멈춰 섰다. 요른은 자신이 그들의 머리를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예외 상황이니까. 되뇌며 요른은 둘의 기억과 감정을 적당히 주물러 못 가게 말렸고, 다음 날도 어김없이 실험실로 출근하게끔 설득했다.

다음 날, 실험을 시작한 지 사흘째. 조수와 기사가 충실하게 지켜선 가운데 칼을 들고 또다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려다가 요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막시밀리안의 갈비뼈에 음각을 새겨넣고 잉크를 전송해 넣었던 기억이 났던 탓이다.

요른은 옷을 도로 입었다. 그리고 조수가 조각들을 처리하기를 기다렸다가, 준비된 가루와 액체를 마법으로 자기 몸 안에 모두 전송해 넣었다.

나흘째, 요른은 병영에서 베스퍼를 상대하며 두 시간도 넘게 일을 치렀지만, 몸을 순식간에 깨끗하게 치료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실험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서서 조수가 미리 열어 놓은 상자들을 빙 둘러보았다. 스물두 개 상자 속에서 마물 조각들이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요른은 상자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눈을 감았다. 각양각색의 마물 조각들이 상자 속에서부터 튀어 올라 허공에 떠올랐고, 안개 같은 가루로 화하더니 공기를 건너 저절로 요른의 몸에 섞여 들었다.

조수가 비명을 질렀고 기사가 검에 손을 댔다. 그러나 요른이 머릿속에서 공포를 감탄으로 바꾸어 주자 둘은 곧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쳤고, 감탄을 다시 졸음으로 바꾸자 벽에 스르르 기대더니 고꾸라졌다.

요른은 둘의 머릿속을 마저 주물러 기억도 바꾸어 주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런 실험에 참여했었다는 것도 떠올리지 못하리라.

닷새째, 요른은 실험실로 가지 않았다. 대신 숲의 사택에서 거실 한가운데에 선 채 눈을 감았다.

요른의 의식이 순식간에 대륙 곳곳의 마물들과 연결되었다. 그가 마물들에게 생각을 전해 협조를 부탁하자 상대도 곧 응답해 왔다. 수백 수천의 마물의 몸이 미세한 가루로 화해 요른의 체내로 전송되어와 소리 없이 섞여 들었다.

엿새째도 요른은 제 사택에 앉은 채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반복했다. 그리고 오늘로 이레째가 되었다.

창밖에서는 아침 햇살이 싱그럽게 숲을 물들여 놓고 있었다. 요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험을 더 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는 이제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몸에 수천의 마물이 섞여 든 게 아니라, 그의 몸을 통해 수천 마리 마물이 서로 섞인 거다. 그 자신은 순수한 매개일 뿐이라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잠식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계속 실험을 해 온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 뭐?

지난 며칠간 요른은 훈장을 침대 위에 몽땅 다 꺼내 놓고 꼭 안고 잤다. 자기 안에서 이상한 것이 깨어 나오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육 년 전에 한 번 각성할 뻔했던 그것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힘을 되찾고 있다는 걸.

요른은 자신이 그 각성을 원하는지 아닌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이 육 년 전 잠식자들을 되돌려 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고의 원인이 된 존재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것이 깨어 나와야만 프란첸의 독자를 돌려놓을 실마리가 잡히리라. 하지만 한편 그것이 깨어나오면 애초에 그를 돌려놓고자 했던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

“막시…… 막시밀리안.”

요른은 밤 내내 중얼거리며 훈장이 으스러져라 손안에 꽉 쥐곤 했다. 

그를 사랑한다.

전에 없이 또렷하게 요른은 그 표현을 떠올렸다. 그를 사랑한다. 그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목숨도 이 몸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지가 다 뭉개져도 기쁠 테고, 지옥에 갇혀 영원히 벌을 받는다 해도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리라. 그러나 그래서 뭐?

그것은 모래알, 루비, 제비꽃, 백합, 떡갈나무, 단풍나무, 토끼, 사자, 사막, 초원, 쟁기, 보석함, 오두막집, 궁전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 인간의 형상마저 갖추어 소작농, 후작, 상인, 백작, 마구간지기, 제후, 비렁뱅이, 국왕, 또 반은 비렁뱅이이며 반은 제후인 것, 반은 상인이며 반은 국왕인 것으로……

“발탄더스.”

요른은 육 년 전 필립이 보내 왔던 문서에 새겨져 있던 이름 하나를 되뇌었다. 그리고 문득 필립의 머리에 접속해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성황국 수도 바로 근처 도시까지 와 있구나.’

그는 필립의 뇌를 건너 다른 사업가 협회원들의 머리에까지 접해서 읽어 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로쉔 수도에 앉아 있던 자들인데, 오늘 아침에 몸소 근처까지 행군해 왔다. 곧 수도에 개선할 자신이 있어서이리라.

수도 근교 도시래야 세 시간은 말을 달려야 할 만한 곳이었지만 요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머리에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었고 그렇기에 어디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광물과 식물, 식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 인간과 마물, 그렇게 성황이 애써 선을 그어 분리해 둔 모든 것들 사이사이에.

그리고 땅과 하늘 사이에도.

땅이 하늘이 아니며 하늘도 땅이 아닌 곳, 그 틈새에 무색의 날개를 펼친 악마가 산다. 그는 등으로는 하늘이고 배로는 땅이며 몸을 한번 뒤집으면 배로 땅이요 등으로 하늘이다. 그렇기에 그의 안에서는 땅과 하늘도 서로 공평하게 섞이며 한편 그를 문처럼 통과하면 땅도 하늘로, 하늘도 땅으로 변신한다.

풍뎅이도 국왕으로, 국왕도 지렁이로 변한다.

법관도 사형수로, 사형수도 경찰로.

사랑도 혐오로, 혐오는 무관심으로.

발탄더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틈새를 그렇게 부르며 두려워했고 동시에 꿈꾸었다. 질서가 가장 엄격하게 갈라 놓은 틈마다 도사린 어둠. 그것이 어느 날 솟아나 세상을 멸망시키며 동시에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고.

새하얀 청년의 형태를 띤 존재는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지난 엿새간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 버린 걸 알았다. 자신 안의 그 존재만이 잠식을 얼마든지 일으킬 수도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깨어나면 애초에 잠식을 되돌려야만 했던 이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존재에게 있어 마음 따위는 찰나의 허구에 불과하기에.

막시밀리안. 요른은 지하 감방에 갇힌, 뒤틀린 살덩이처럼 변한 목과 입으로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자의 머릿속도 파고들었다. 그리고 웃듯이 속삭였다. 나는 널 사랑해, 더없이 사랑해. 하지만 이런 마음 따위 얼마든지 다른 걸로 바꿔 버리면 돼. 나비를 뱀으로 변신시키듯이, 그런 건 일도 아니야.

“잘도…….”

아직 ‘요른’의 모습을 한 그것은 고개를 갸웃하며 뇌까렸다.

“그렇게 오래 나를 가둬 놨구나. 이런 보잘것없는 형상에.”

그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킥킥 웃었다. 소위 인간이라는 종과 비슷하긴 하지만 순수한 인간은 아니다. 반은 날짐승 계열의 마물, 반은 인간의 시체를 되살려 낸 것 정도 될까.

그는 틈새에만 산다. 그러니 형상을 갖출 때도 어느 한 종만의 모습을 취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럿이 고루 섞인 형태여야만 했다. 최소한 두 가지.

어떻게 된 일이더라. 그는 돌이키려 애썼다. 막 힘을 되찾기 시작한 차였기에 아직 기억도 희미했다.

그는 모든 것들 사이에 있었으며 서로 다른 시점들 사이에도 있었다. 힘이 억제되어 있던 동안에는 그래서 기억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그의 기억이란 한 생물의 뇌리에만 갇힌 돌이킴이 아니라, 수많은 시점을 수많은 생물의 눈으로 살피며 건너다니는 것이었기에.

그는 십팔 년 전으로 시점을 옮겼고, 프란첸가의 본성으로 장소를 바꿨다. 그리고 공작 부부와 성 고용인들, 정원과 온실의 온갖 동물들의 눈을 통해 성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요른.]

뒤뜰의 온실 정원, 여덟 살 난 막시밀리안이 하얀 생물에게 다가왔다.

사람으로 치면 네 살밖에 안 된 작은 몸이 뚱하니 혼자 앉아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왕은 그 모습을 알아보았다. 마왕 자신의 모습이다.

천천히 기억이 돌아왔다. 그가 그로쉔 수도의 골목길에 내려앉았던 것도, 어린애 시신에 녹아내려 그런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요른이라는 이름조차 흑발의 소년이 처음 만났을 때 제멋대로 갖다 붙인 것뿐이다. 막시밀리안이 제가 붙인 이름을 부르며 그 우연한 형상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하지 말랬잖아, 요른.]

마왕은 그 품을 느끼고 있다가 천천히 다른 생물들과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의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 * *

늦은 오전, 베스퍼는 제 사령실 탁자 앞에 앉아 성벽 보수 현황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급히 외치더니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바로 뛰어 들어왔다.

“사령관님, 수도 상공에, 온통, 거리에도! 그리고…….”

그러나 병사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병사가 바닥에서 사지를 뒤트는 꼴을 보고 다가가려다가 베스퍼는 한발 물러서서 검부터 빼 들었다. 마물 하나가 다리에 들러붙어 그를 잠식해 가고 있었던 탓이다.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몸을 동강 내 주면서, 베스퍼는 병사가 하려던 말을 짐작했다. 병영에도 마물들이 들어왔다는 것이리라. 아니, 딱히 입구를 통해 들어온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병영 내부의 허공에서 솟아나듯이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베스퍼는 턱을 굳게 다문 채 견학 때를 떠올렸고, 육 년 전 사고를 떠올렸다. 협회원들을 만나보면 분명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수치표를 들여다보며 말해 줄 것이다. 거의 절정에 올라 있던 것 같은 날씨가 또다시 더 엄청나게 좋아지고 말았다고. 그리고 설명해 주리라. 날씨 덕분입니다. 흑마법사들이 신체 전송 마법을 쓰듯이 마물들도 전송되어 온 거죠. 그리고 여러 마리가 공중에서 서로 합쳐지면서 금세 더 강력한 새 마물로 변해…….

육 년 전에는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현상이 수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아마 전 대륙에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베스퍼는 보고를 받지 않고도 왠지 직감한 채 1층으로 내려갔다.

“사령관님, 피하세요!”

아직 멀쩡한 사람 형상으로 남아 있던 기사들이 마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자기 주위에 갑자기 나타나서 슬슬 다가오려는 마물들을 위협해 내치려 애쓰는 중이었다.

베스퍼도 발밑에 갑자기 스르르 식물처럼 돋아나는 마물들을 피해 뛰었다. 기사들에게 뭐라 지시라도 내려보려 했지만, 운을 떼려던 순간 그들은 벌써 잠식되어 버렸다. 바깥 상황을 살피러 훈련장 쪽으로 나갔다가 베스퍼는 신음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공간이 섞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훈련장 한가운데에 황궁의 돔형 지붕이 우뚝 솟아 나와 있었고, 고개를 휙 돌려 황궁 쪽을 바라보자 지붕이 있어야 할 자리에 푸른 호수가 잔잔하게 떠올라 휘돌고 있었다. 베스퍼는 훈련장을 에둘러 시내 방향의 출구로 향했지만, 발을 디디자 오히려 숙소 복도로 다시 들어와 버렸다.

“이런 미친…….”

베스퍼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머릿속에 천둥처럼 생각이 전해져 왔다.

이게 그 전송 마법이군. 베스퍼는 바로 깨달았다. 머리에서 머리로 생각을 전하는 마법. 흑마법사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 마치 합창하듯 사령관의 뇌 속에서 외쳐 대고 있었다.

―강림하셨다!

기쁨에 젖어 미쳐 날뛰는 듯한 사고, 차라리 비명.

―그분께서 깨어나셨다!

* * *

[하지 말랬잖아, 요른.]

여덟 살의 막시밀리안은 제 성의 온실 정원에서 아이를 꼭 안은 채, 그 등을 쓰다듬으며 무척 조심스럽게 달랬다. 하지만 요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고 여러 식물을 얽어 온실 한쪽에 조그만 검은 숲 비슷한 덩굴 더미를 만들었다. 막시밀리안은 곤란해하며 손으로 이리저리 식물들을 도로 풀어 헤쳐보려 애썼다.

요른은 소년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덩굴을 헤치는 데에 여념이 없어서 그쪽을 보질 않았다. 하얀 생물은 일부러 사뿐 날아올라 덩굴 더미 앞에 딱 버티고 섰고, 소년의 시선이 그제야 요른의 은빛 눈동자에 맞추어졌다.

백색 생물은 만족한 듯 방긋 웃었다.

마왕은 온실에서 1년이 더 지난 후로 시점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생물과는 의식을 연결하지 않고 여전히 막시밀리안의 안에만 머물렀고, 그 흑발 소년의 눈으로만 자신을 살폈다. 서재에서 폰 프란첸 공작 부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섯 살짜리 ‘요른’의 모습을.

당시 아직 서른 중반이던 공작 부인은 체구는 작았지만 체축이 똑바르고 사지도 단단했다. 그녀는 요른을 한 손으로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책상 위에서 타블로를 하나 펼쳐 보여 주었다.

[이거 봐라, 요른.]

다섯 살짜리 요른은 여전히 말을 잘하지 못했고, 그래서 굳이 대꾸하지도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조금 불안하게 팔짱을 끼고 방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 가운데 유디트는 품에 안긴 생물에게 물어 왔다.

[요게 오동나무, 요게 박달나무. 오동나무는 박달나무가 아니고 박달나무는 오동나무가 아니야. 그럼 이 서로가 ‘아닌’ 틈에는 뭐가 있을까?]

몰라. 요른이 속으로 꿍얼거리다가 결국 공작 부인의 뇌를 쿡쿡 찔러 버렸다. 유디트가 눈치챘는지 아닌지 픽 웃었다.

[잘 모르겠구나?]

그녀는 빈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거기다가 깃펜으로 직접 그림을 그려 보여 주었다.

[이거 봐. 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 동그라미 안을 선, 이 밖을 악이라고 하자. 그럼 악마는 어디 있을까?]

[성 밖에 있죠.]

막시밀리안이 끼어들었다.

[동그라미 밖에 말이에요, 어머니.]

[글쎄?]

유디트가 아들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며 요른에게만 시선을 준 채, 다시 자기가 그려 놓은 선을 펜 끝으로 톡톡 두드려 보였다.

[그럼 선이 신인가? 아니잖아. 선악을 애초에 구분하신 게 신이시니 안팎이 다 신이지. 그럼 악마는 어디 있을까?]

[어머니.]

[여기지.]

막시밀리안이 채근하듯 불렀지만 유디트는 이어 갔다.

[둘을 갈라 놓은 선……. 성벽 말이야. 스스로는 선도 악도 아니면서도 둘을 연결해 주지.]

[연결이라뇨. 악에서 선을 보호해 주는 거죠.]

[이 성벽은 안팎으로 반은 선이고 반은 악이니 둘을 동등하게 섞어 주지만, 한편 그 자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야. 그리고, 악에서 선으로 어떻게 그냥 들어올 수 있니? 반드시 이 성벽을 통과해야만 하지. 그러니까 실은 이 벽이 악을 선으로 변신시켜 주는 거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도 악으로…….]

요른은 들으면서 동시에 공작 부인이 입에 담지 않은 희미한 생각을 읽었다. 신이 선악을 갈라 놓기 위해 그어야만 했던 선.

그 무색의 균열. 그건 세계가 질서정연하게 갈라지기 이전의 순수한 혼돈이 현세에 남긴 흔적이자, 그 질서로부터야 처음 깨어난 불화의 씨앗이다. 현세의 원죄이자 미래. 막시밀리안이 또 끼어들었다.

[어머니, 어린애한테 그런 얘기는 좀…….]

[내가 요즘 해석 중인 고문서가 있거든. 그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마왕 강림 예언으로도 볼 수가 있어요.]

유디트가 요른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요른, 너 말이야, 난 사실 마왕을 꼭 나쁘게 안 본다? 그건 신세계의…….]

말하다가 공작 부인은 고개를 돌렸다. 막시밀리안이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다가와서 요른을 모친의 품에서 채어갔다.

[이 무책임한 인간아!]

그가 소리를 지르자 유디트가 멍하니 쳐다보았지만, 아홉 살 난 막시밀리안은 다섯 살 난 요른을 번쩍 들어 안고는 얼른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문을 닫아걸고 요른을 벽 쪽에 세워 놓고 자신도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짐짓 명령했다.

[저런 거 듣지 마. 너, 이제 우리 엄마랑 얘기하지 마.]

왜? 요른이 머리로 전하자 막시밀리안이 답했다.

[아무래도 널 마왕이라고 생각하시고 떠보시는 거 같아. 위험해.]

요른은 고개를 저었다. 너네 엄마 아직 나 마왕이라고까지는 생각 안 해. 마왕의 힘을 엄청 잘 쓰는 천재 흑마법사쯤 되는 줄 아는 거지. 벌써 그 이상으로 넘겨짚을 사람은 아닌데?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바짝 들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 엄마 똑똑하단 말이야. 지금은 몰라도 금방 알아채실 거야.]

―넌 내가 마왕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말이 안 맞잖아.

[너는…… 그런 게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실제로 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절대로 안 되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막시밀리안이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걸 느끼며 요른은 되물었다. 

―굳이 안 되어야 해?

[마왕은 나쁜 거야.]

막시밀리안이 꾹꾹 눌러쓰듯이 말했다.

[우리 엄마는 좀 유별난 사람이라서 저렇게 말하는 거야. 마왕은 당연히 나쁘지. 넌 그런 게 되면 불행해져.]

―그래?

[당연하지. 내가 말했지?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가 있다고.]

소년은 하얀 생물의 손을 꼭 잡은 채 설득했다.

[그것 봐. 엄마 얘기 듣다 보니까 너까지 이상한 소리 하지. 넌 바보니까 그냥 외워. 마왕은 나쁜 거고 넌 그런 거 되면 안 돼. 그리고 이제 너 저런 사람이랑 놀지 마.]

누구더러 바보래. 요른이 속으로 투덜대는데 그 아홉 살짜리가 갑자기 눈물을 떨구었다.

그 흑발 소년은 남 앞에서는 전혀 울지 않다가 요른 앞에서만 아주 가끔 울었다. 아마 상대가 어차피 그의 마음속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왕은 상념이 복잡한 색을 품고 소년의 핏속을 흐르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엄마는 날 안 좋아하는데, 소리까지 질렀으니 이제 아예 미워하게 되어 버렸을지도 몰라.

막시밀리안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으로 눈물을 털어 냈다. 그리고 물기가 남은 암회색 눈동자로 다시금 요른을 응시했다.

마왕은 바로 그럴 때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심장과 눈과 손을 통해 ‘요른’의 모습을 한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그 하얀 생물은 무서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초라한, 우연하고 보잘것없는 형상, 마물과 인간의 혼종처럼 보이는 기이한 몸이 그 흑발 소년의 눈으로부터 바라보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애틋하고 따스하게 반짝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마왕은 작은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네 엄마 피해 다니도록 노력해 볼게. 그러자 소년이 곧바로 요른에게 다짐시켰다.

[나랑 약속한 거 꼭 지키는 거다?]

무슨 약속. 요른은 심드렁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막시밀리안이 불안해하면서 채근해 오는 게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 흑발 소년은 당황해서 말했다.

[나랑 평생 같이 살기로 한 거.]

내가 왜. 요른은 생각을 일부러 톡 쏘듯이 밀어 보냈다. 난 뭐든지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왜 너랑 살아?

[약속했잖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약속해 놓고.]

―그땐 네가 맘에 들었으니까.

[지금은?]

―지금도 좋아하긴 해. 하지만 이건 그냥 마음인걸.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난 지금 당장 널 미워해 버릴 수도 있어.

[그럼 안 돼. 내가 널 행복하게 해 준다고 했잖아.]

막시밀리안이 또렷하게 선포했다.

[너도 알잖아. 둘이 서로 좋아하면 둘 다 많이 행복해지는 거. 네가 날 계속 좋아해 주면 나도 널 계속, 계속 좋아할 거야. 그럼 우리 둘 다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그래?

[너 지금 안 행복해?]

행복해. 요른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것 봐. 앞으로도 내가 꼭 널 행복하게 지켜 줄게.]

소년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톡톡 쳐 보였다.

[맹세해. 네가 다른 무엇이 되어서 겪을 수 있을 것보다 내가 훨씬 더 널 행복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요른, 마왕 같은 건 되지 마.]

아홉 살짜리 소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요른은 그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계속 내 요른으로만 남아 줘. 나도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요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년은 이상한 제안을 하고 있었다. 마왕이 되지 말고 대신 자신의 반려가 되어 달라고.

그게 어떻게 ‘대신’이 된다는 거야. 마왕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도 혹하기는 했다. 지난 일 년간 마왕은 사실 막시밀리안을 수도 없이 시험해 왔다. 그는 이 소년에게 다 보여 주었다. 그가 어떤 권능을 갖고 있는지 바로 눈앞에서 보여 주고 또 보여 주면서 겁을 주고 놀려 댔다. 그래도 소년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 머릿속을 파고들어 봐도 그 소년은 올곧고 한결같았다. 그의 눈으로 요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 하얀 생물의 형상은 늘 무구했고 신성한 광기처럼 아름다웠다. 소년은 요른을 무척 자주 안아 주었고, 그럴 때마다 마왕은 소년의 안으로 들어가 그의 팔과 피부로 자신의 몸을 느끼곤 했다. 그 품 안에서 달콤한 향기처럼 짙어져 버린 몸을.

마왕은 물론 그런 마음도 자신이 손만 대면 순식간에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도, 아예 관심을 끊게끔 하는 것도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혹은 괴상하고 지저분한 성벽으로 탐미하다가 스스로 몰락하게끔 유혹하는 것도. 요른은 그 꼴을 상상하며 킥킥 웃곤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한 번도 굳이 그러고 싶은 적은 없었다.

그의 안에서부터 보고 만진 ‘요른’을 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변하지 않을 거야? 요른이 소년에게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 물었다. 막시밀리안이 결연하게 답했다.

[절대로.]

―평생 나만 좋아할 거야?

[응.]

소년은 작은 주먹을 가슴에 붙이며 기사 서약을 하듯이 다짐했다.

요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혹한 이유를 인정했다. 이 소년을 통하면 그는 자신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되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왕이 될 수 없는 유일한 것.

불변의 사슬에 구속된 자가.

알았어, 알았어. 요른은 작은 손으로 소년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네가 정말로 평생 나만 좋아해 줄 거라면, 나도 널 계속 좋아할게.

[응!]

―그리고 평생 너랑 살게.

[응.]

소년이 눈이 접히도록 웃으며 요른의 몸을 꽉 껴안았다. 요른은 다시금 막시밀리안의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부터 자신을 느꼈다.

사람이란 대단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어떻게 이런 어린애가 어떤 것을 이런 식으로 감각할 수가 있을까. 정체도 모를 생물을 데려와서는 제 마음속에서 이런 것으로 삼아 버리고 그대로 지켜나갈 수가 있는 걸까. 마왕은 무엇이든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어떤 고정된 형태를 처음부터 빚어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이 소년에게 질투마저 느꼈다.

좋아. 그는 선심 쓰듯이 전했다. 네가 이 마음을 계속 지킬 수 있다면야.

마왕 대신 너의 ‘요른’이 되어 주지.

막시밀리안이 열 살, 마왕이 요른의 모습으로 쳐서 여섯 살이 될 때까지 2년간 둘은 프란첸 성안에서 서로 서로에게 완벽한 반려로 살았다. 깨어 있을 때도 늘 마음과 감각을 공유했고, 잘 때도 손을 꼭 잡고 같은 꿈을 꾸며 잠들어 바로 곁에서 깨어났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마왕은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그는 제 것이 된 흑발의 소년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그 애는 언제나 너무 마음속에 많은 걸 쌓아 두었고, 옳은 일이 아닌 건 생각지도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마왕은 자신이 그 애의 속마음을 대신 읽고 이루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왕은 어느 날 소년이 가슴 깊이 억눌러 온 은밀한 소망을 마치 선물처럼 몰래 이루어 주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자 그 열 살짜리는 저주라도 받은 양 병석에 누워 버렸다.

마왕은 그 근처의 기억은 굳이 들춰 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이 그 일을 기점으로 해서 자기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새 기억을 조작해 넣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그렇게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비로소 마왕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깨달았다는 듯이, 소년은 요른더러 잠시만 스스로를 봉인하고 기다려 달라고 청해 왔다. 마왕은 청을 들어주었다.

마왕은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망각하고 말더듬이 어린애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로쉔 학원에 갓 입학했을 때, 하필 학원에서는 학생들을 검은 숲 근처로 견학을 보냈다. 언덕 위에서 그는 순식간에 자신의 고향을 기억해 냈다. 그가 처음으로 날아올랐던 장소.

숲의 둥치에 내린 어둠과 잎새가 반사한 햇살이 섞여 탄생했던 새.

마왕은 그날 강림할 뻔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격변하며 일렁이는 몸을 제 등 뒤로 가리며 필사적으로 외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제 마음속으로만 소년은 전하고 또 전했다. 요른, 하지 마, 나랑 살기로 했잖아.

사랑해. 그는 그때 그 표현을 처음으로 썼다. 열두 살짜리 주제에 신과 자연과 어머니와 아버지와 제가 정원에 키우던 토끼와 새와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 합해서 몇 곱절을 더해서 겹쳐 썼다. 사랑해, 요른. 제발.

기다려 줘.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꼭 네가 결코 마왕이 될 수 없는 미래를 가져올게. 그때가 되면 널 깨워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 줄게. 약속은 사라진 게 아니잖아. 미루어진 것뿐이야. 그 미래 속에서 우리 다시 함께하자. 둘만의 성에 숨어서 영원히 같이 살자.

마왕은 물끄러미 소년의 등을 바라보다가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간절하게 등 돌린 눈으로부터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선택했다. 변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 같은 건 딱히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안에서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으로 남을 수 있다면.

지켜 줘. 그날 요른은 생각했다. 그래, 마왕 같은 건 되지 않을게. 네가 나를 이대로 지켜 줘, 막시밀리안.

마왕은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막시밀리안에게 맡기고 잠들었다. 계속 그의 요른으로만 살아갔다. 막시밀리안의 소위 계획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그가 왜 용사가 되고 싶어 하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얼마나 어리석게 세계를 지키면서도 요른과 함께할 방법을 찾았다고 믿으며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 왔는지 알면서도.

“바보 어린애야.”

숲속의 작은 목조 사택 안에 서서, 스물두 살 청년의 모습으로 마왕은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마왕은 움베르토의 옛 연구소 지하 감방에 사슬로 묶이고 철근에 꿰여 있는 육체의 안으로 들어가 그 마음속을 더듬었다. ‘요른’이 되어 생각을 읽는 힘을 금지당한 후에는 그의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에, 이제야 십여 년 치의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지난 십오 년간 막시밀리안이 보고 느껴 온 요른의 모습.

마왕은 웃었다. 그리고 선택했다. 그 어릴 때처럼, 달래듯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상대의 뇌리에 조용히 속삭여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는 약속을 지켰어.

지금도 지키고 있어. 마왕은 막시밀리안이 제 몸속의 마물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누구를 떠올리는지 똑똑히 보았고, 그래서 사택 거실에 깡마른 다리로 선 채 자기 형상을 차마 바꿀 수가 없었다. ‘요른’의 감정에 지배당한 육신이 눈물을 흘려 냈다.

“네가 이겼어, 용사야.”

요른은 눈을 감은 채 황국 마도 협회의 장이 있는 곳으로 자기 몸을 이동시켰다.

협회장은 본부에 회원들을 불러다 놓고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이변을 맞이한 터였다. 병사의 보고를 받고 밖으로 뛰쳐나온 그는 허공이든 바닥이든 마물투성이에, 공간마저 일그러져 시내 건물들의 벽과 지붕, 창문과 바닥이 서로 섞여 뭉크러져 가는 꼴을 보았다. 게다가 머릿속에는 흑마법사들의 생각이 마구 침투해서 날아다녔다. 그분이 오셨다! 드디어 강림하셨다!

협회장은 차라리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더는 아무런 싸울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상 싸울 방법 따위 강화 기사가 모두 실패한 후로는 사라져 버렸다. 악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뿐이다.

“멸망이로군.”

중얼거리다가 그는 보병 두엇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걸 보았다. 그들은 곧 쫓아오던 마물에 발목을 잡혀 잠식되어 갔다.

하지만 보병들은 아프거나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만 겁을 냈을 뿐, 금방 새 몸을 받아들였고, 하나는 곰 같은, 하나는 새 같은 머리를 들더니 각자 여섯 개와 네 개의 다리로 달려 도시 한쪽으로 사라져 갔다.

멸망인가, 신세계의 시작인가. 협회장은 마음이 시꺼멓게 썩어 가는 와중에도 속으로 뇌까렸다. 그때 백색의 형상 하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요른. 협회장도 물론 그 반쪽짜리 마물이라는 소문이 붙은 연구 강사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깡마른 몸에 백발, 은빛 눈동자. 그러니까 그자가 맞았다.

그러나 협회장은 무릎을 꿇었다.

천사, 악마, 아니면, 대체.

―마법사들을 모아 주십시오.

혼란에 빠져 덜덜 떠는 협회장의 머리에 그것이 또렷한 사고를 전해 왔다.

―마검 설계 전문가들을 모아 주십시오. 지금 당장 공방으로 가야 합니다.

“무얼, 지금, 어쩌라고.”

협회장이 더듬거리자 그 알 수 없는 존재는 빙긋 웃었다.

협회장은 그가 자기 머릿속을 뒤져서 기억을 읽어 갔음을 깨달았다. 그 하얀 생물은 순식간에 어떤 마법사들이 적합한지 알아냈고, 그들을 모두 마검 제작 공방 안으로 소환했다.

협회장과 마법사 서너 명이 공방에 도착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거나 괜스레 자기 어깨나 얼굴을 만져 보았다. 흑마법사들이 이런 마법을 쓴다고 듣기는 했지만, 몸이 다른 장소로 전송되는 걸 직접 겪어 보는 건 다들 처음이었던 탓이다.

같은 장소에 직인들도 이미 다 소환되어 있었다. 하얀 청년은 마치 공방 전체에 음성을 퍼뜨리듯 그 자리의 모두에게 낭랑하게 생각을 전했다.

―검을 만드십시오. 대검 형태로요.

“뭘, 무슨, 검을 말입니까.”

―성검을.

청년이 미소 지었다.

―저를 재료로 쓰시면 됩니다.

“무슨 소리를……. 사람을 재료로 써서 무슨 검을 만듭니까.”

공방장이 항의했다. 그러나 그 하얀 청년이 날개를 펼치자 그는 주저앉아 버렸다.

무색의 새와 인간 청년이 합해진 듯한 모습으로 그는 마법사들의 머릿속에 자신이 짠 설계를 전했고, 공방장에게는 가마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알려 주었다.

그들은 전해 듣고 끄덕거리면서도 주저했다. 믿을 수가 없었고, 또한 인정할 수 없었다. 신성에 가까운 아름다움. 진정 이런 자가 마왕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왕은 정말로 악인가?

그러나 마왕의 의식이 그들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조종했고, 사지마저도 인형처럼 움직였다. 마법사들이 마왕을 설계대로 조각내고 분해해서 재료와 섞었다. 직인들이 융해된 마왕을 주형틀에 넣어 가마에 넣었다.

마법사들 다섯은 가마와 주형틀 속 불과 물의 정령께 청해 검이 잘 녹고 또 굳어지게끔 도왔다. 마왕이 그들의 머리를 서로 연결해 준 덕분에 쓸 수 있었던 연계 마법이었다. 몸이 조각나고 다른 재료와 섞인 채로도 그의 의식은 일부나마 계속 남아 있었고, 가마에서 검을 꺼내 식힌 후에야 잠들 듯이 잦아들었다. 마지막 환희의 잔영 같은 것만 남긴 채. 

이제 됐어.

난 다시는 변할 수 없이 네 것이 된 거야.

* * *

“안 돼.”

성황국 수도 남쪽의 근교 도시, 필립 블랑쇼는 회의 도중에 탁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요른, 왜, 왜…….”

그는 이를 부득 갈았지만 곧 주저앉아 버렸다. 다른 사업가 협회원들이 당황해서 사정을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왕이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만은 소식을 전해 준 걸 그나마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패배했습니다.”

필립이 한참 후에야 겨우 한마디 뱉었다.

“후퇴해야…….”

그러나 그는 곧 허탈하게 웃었다. 후퇴해도 소용없다. 페랑까지 돌아가 성문을 모두 닫아건다 해도 결국 패망하리라.

마왕군은 페랑에서는 국왕 한 사람의 목만 베었다. 귀족들 대부분과 협상이 가능했던 덕에 페랑은 그렇게 무혈 개혁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타국에서는 사정이 받쳐 주지 못했고, 특히 그로쉔에서 그들은 거의 모든 왕족과 귀족을 처형해야만 했다. 그러니 복수의 궤가 돌아오면 페랑의 시민은 처참하게 짓밟힐 것이다.

르핀과 마찬가지다. 삼십 년 전 그 해양 왕국이 반역을 핑계로 멸망당했듯, 부활한 성황국은 페랑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 버리리라.

요른, 요른. 나의 왕이여. 신세계의 주인이여. 왜 그런 선택을. 그러나 필립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가 원망과 배신감에 차 있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며 오열하는 동안 흑마법사들도 대륙 각지에서 기후의 변화를 금방 눈치챘다.

바람이 걷히듯이 날씨가 흐려져 가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곧 생각을 서로 전할 수 없게 되었고, 자기 몸을 전송하는 마법도 쓸 수 없게 되었으며, 마물을 새로 섞어 낼 수도 없게 되었다.

아직 물론 어느 도시든 시내는 마물투성이였고 식물들도 잠식되어 여기저기 검은 숲과 비슷한 넝쿨이 뻗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이 더 생겨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흑마법사들의 예상이 맞다면, 이미 있는 마물들도 곧…….

“……후퇴해.”

흑마법사 하나가 공기를 이용하는 정령계 전송 마법으로 동료들에게 말을 전했다.

다른 자들도 말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제 그들은 다시 검은 숲으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마왕은 각성했지만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신세계는 오지 못한다.

그는 구세계의 검이 되었다.

* * *

막시밀리안은 눈을 떴다.

사슬에 묶이고 철근에 온몸이 꿰인 채였다. 그는 입 안 가득 고인 피를 토해 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피가 붉은색인 걸 눈치챘고, 자기 사지가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걸 보았다.

막시밀리안은 몸 안의 마물이 모두 복속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이 복속시킨 건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를 짐작했고 기쁨에 떨었다. 웃는 바람에 입과 코에서 또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웃고, 웃느라 피를 토하면서 한참을 더 버텼다. 어느 순간 감방 문이 열리더니 직원 둘이 들어와서 막시밀리안의 모습을 확인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환하게 웃더니 사슬을 풀고 철근을 빼내어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몸이었다. 원래는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변형되면서 다 터지고 찢어져 버렸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진 채 그는 피를 좀 더 토해 냈다. 하지만 이미 폐와 위에 고여 있던 걸 토해 낸 것뿐, 상처는 금방 사라졌다.

몸속 마물들의 회복력 덕분이다. 이제 그것들은 그를 지배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살펴 온존해 주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움베르토가 절뚝대며 직원 한 명을 더 데리고 들어와서는 강화 기사에게 의복을 전해 주었다.

“오래 걱정시키셨습니다, 막시밀리안 경.”

“성검입니까?”

그가 움베르토를 보자마자 물었다.

“성검이 강림해서 저를 주인으로 삼은 겁니까?”

“그건 본인이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움베르토는 웃으며 말했지만, 막시밀리안은 그의 외눈이 젖어 있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성기사가 뭐라 묻기도 전에 움베르토가 면박을 주듯 먼저 이어 갔다.

“갑자기 몸속의 마물이 다 복속되신 거 아닙니까? 하지만 프란첸 경 본인의 힘은 아니었고요. 그렇다면야 성검이 경을 선택하면서 억눌러 준 거겠죠.”

“그러면…….”

“예. 성검은 정화의 검이니까요. 이제 주인으로서 명을 내리시면, 마물들을 아예 몸속에서 다 씻어 내실 수도 있을 겁니다.”

움베르토는 젊은 성기사가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순간 움베르토는 좀 짜증이 났고, 동시에 고여 있던 눈물을 결국 흘려 냈다.

“옷이나 좀 입고 그러시든가요.”

움베르토가 직원을 시켜 의복을 다시 한번 들이밀며 말했다. 그리고 되뇌었다. 행복하길, 요른.

너는 세계를 버렸다. 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 마지않던 신세계를 버렸다. 그러니 부디 네 자신만은 행복하길.

움베르토는 방에서 나왔고, 직원들도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감방 안에서 옷을 대충 꿰어 입자마자 복도로 뛰쳐나와 달렸다.

연구소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그는 계속 제 발로 달리려고 했고, 직원이 급히 부르며 말을 내어 주려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움베르토까지 붙어서서 겨우 말렸다.

“말이 더 빨라요, 말이. 갑자기 바보가 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그제야 청년은 대답하고 한달음에 말에 올랐다.

말을 재촉해 숲길을 달려 그는 금세 수도 시내까지 들어왔다. 상황을 보고도 막시밀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어릴 때 요른이 프란첸 성내에서 보여 주었던 편린은 이보다 심하면 더 심했지, 나을 건 없었다.

오히려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가장 끔찍한 현상까지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전에 성검이 강림해 준 것이다.

청년은 시내 서쪽 외곽으로 향했다. 움베르토가 그더러 마검 개발부 공방으로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검이 마련되어 있고, 성황이 그에게 손수 내어 줄 거라고 했다.

성검이 강림했다기보다는 마치 누군가 공방에서 손수 만들어 낸 듯한 지시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당연한 듯 말을 재촉했다. 그는 처음부터 성검은 하늘에서부터 뚝 떨어지듯이 강림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죽도록 애를 써서 어느 순간 만들어 낼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시기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그저 믿음을 갖고 성실하게 노력하라는 건 그런 의미였으리라고.

막시밀리안이 말을 모는 도중에도 가끔 마물이 달려들었다.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썼던, 아까 의복과 함께 돌려받은 합성 마검을 뽑아 들고 그들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마물들이 마치 성검의 주인을 알아본 듯 길을 내어 주는 듯한 몸짓만 남기며 곧 공손히 물러섰기 때문이다.

흑발의 기사는 거의 날듯이 말을 몰았다. 건물 앞에 베스퍼와 다른 성기사들이 서 있다가 막시밀리안을 보자마자 손짓했다.

“빨리!”

막시밀리안이 말에서 내려 공방 안으로 들어서자 성기사들이 그 등 뒤로 문을 닫아걸었다. 텁텁한 복도를 따라 걷자 막시밀리안이 전에 처음으로 열세 마리짜리 합성 마검을 뽑아 들었던 방이 나왔다. 널찍한 탁자 위에 검신은 물론 손잡이까지도 새하얀 대검이 검집도 아무 봉인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성황 헤르타도 그 자리에 황제의 의상을 갖춰 입고 서 있었고, 막시밀리안이 도착하자 검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아쉽게도 제가 건네드릴 수는 없군요.”

그녀는 설명했다.

“손을 댈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 검은 주인만이 만질 수 있는 모양입니다.”

대검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창백한 시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딱히 불길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양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 전율하듯 탄성을 뱉었다.

복속의 식을 치를 필요도 없었다. 전설대로 그 검은 스스로 막시밀리안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손에 잡자마자 가장 성공적인 복속 의식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감각, 아니, 그것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순수한 승리감이 젊은 성기사의 온몸에 흘러들었다.

“복속에…… 성공하셨습니까?”

“아뇨.”

베스퍼가 묻자 막시밀리안이 답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복속된 꼴입니다. 강제로 주인이 되게끔 말입니다. 예,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성공했군요.”

성황이 잔잔하게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시험 삼아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성검에 자신의 몸을 정화해 달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몸에 섞였던 마물 조각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 분해되는 걸 느꼈다.

제 몸이 되었던 부분들이 뜯겨 나가는 고통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비틀거렸지만, 고통은 금방 사라졌다. 몸이 상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상처가 가장 싱싱한 새 살과 피로, 고통이 생명의 환희로 변하듯이.

반쯤 새로 태어난 듯 오히려 전신에 힘이 넘쳤다. 막시밀리안은 성검을 다시 조심스레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공방장에게 여느 때처럼 등에 메고 다니다가 뽑을 수 있게끔 검집과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방장은 끄덕이면서도 왠지 막시밀리안의 눈을 피했고, 곧 옆방으로 사라졌다.

“마물을 굳이 하나하나 벨 필요도 없겠군요.”

막시밀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사실 꼭 베는 검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명하면 됩니다. 명령만 잘 내리면 아마 지금 당장 전 수도의 마물들을 다 정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잠식자도 되돌리고요.”

“그렇군요.”

성황이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프란첸 경.”

막시밀리안은 성검을 양손으로 잡아 몸 앞쪽으로 세워 수련의 기본자세를 취한 채 명했다. 성황국 수도의 마물들을 모두 정화하고 잠식자들을 되돌려 내라고. 그는 검이 부드럽게 진동하듯이 반응해 오는 걸 느꼈다.

수도 시내를 활보하던 마물들이 원래의 동식물로, 잠식자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상처 하나 남지 않은 채였다. 성검이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대로 전해 왔기에 막시밀리안은 웃으며 눈을 떴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작은 불안이 남았다. 사실 아까 명령에 조건 하나를 덧붙였었기 때문이다. 요른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막시밀리안이 방을 나서려 들자 성황이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확인할 게 있습니다.”

“뭘요?”

헤르타가 재차 물었지만 막시밀리안은 답도 않고 건물 밖으로 나와 흑마에 올라탔다.

막시밀리안은 곧바로 말의 배를 가볍게 걷어찼다. 그는 의무를 다했다. 물론 이제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물을 정화하고, 소위 마왕군의 잔당을 처리해야겠지만, 이곳 수도에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그는 말을 미친 듯이 재촉해서 숲속의 사택에 도착했고 땅에 뒹굴듯이 뛰어내렸다.

“요른!”

그는 외쳐 불렀다.

답은 없었다. 사택의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못 견디고 창문으로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결국 문을 차서 부수고 들어가서 샅샅이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막시밀리안은 숨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상황이 급해지니 요른도 마법사로서 불려갔나 보다.

하지만 요른이 죽거나 다쳤을 리는 없다고 막시밀리안은 생각했다. 마물들이 그 애를 해할 리가 없으니까. 그는 다만 목조 건물의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요른, 드디어.

너는 자유야.

용서부터 빌어야 한다. 머릿속에 소망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빌기는 해야 한다. 어떻게든, 죽도록, 빌어야지. 마침내 빌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막시밀리안은 남부의 벽지에 사들여 둔 버려진 성을 떠올렸다. 어릴 때 약속했던 대로 찾아둔 둘만의 성. 어느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그 성의 벽과 지붕을 요른에게 부탁해서 다시금 덩굴과 가시덤불로 굽이굽이 두르고, 그 주변에만은 검은 숲을 기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단둘이 손을 맞잡고 영원히 잠들어 같은 꿈을 꿀 것이다.

그 꿈속에서 요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든 막시밀리안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소리 따위는 뱉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는 그 하얀 생물에게 너무,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까. 지옥에 밀어 넣고 고문한대도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웃음이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그는 곧 다잡고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왔고, 다시 흑마에 올라탔다. 성황은 아까 그가 달려 떠나는 등 뒤에 대고 황궁 회의실로 오라고 정령 마법으로 전했다. 성기사단 간부와 마도 협회원 모두와 모여앉아 탈환전에 대해 의논하게 될 자리였다. 중부와 남부 대부분의 도시를 되찾기 위한, 성스러운 탈환전.

회의장에서 원정 계획에 대한 의논이 끝난 다음에야 성황은 막시밀리안에게 성검의 재료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용사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움베르토가 일어나서 마저 찬찬히 설명했다. 그래도 용사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자리의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낯빛을 잃었다.

탈환전 출정은 연기되었다. 용사가 쓸모없어졌기 때문이다.

용사는 회의장에서 갑자기 등에 메고 있던 성검을 뽑아 내렸고, 그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검신을 마치 말을 걸듯이 한참 응시했다. 답이 없자 그는 검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채로 그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날에 얼굴이며 팔, 몸이 온통 베여 피가 흐르는데도 신경 쓰지조차 않는 듯했다. 병사 몇이 검에서 그를 떼어 놓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베스퍼가 목 뒤를 후려갈겨 기절시킨 후에야 끌고 나갈 수 있었다.

제 성에 데려다 놓긴 했어도 용사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베스퍼도, 공작 부부도, 성황도 직접 찾아가 보았지만 누가 방문하든 그는 제 침실 한구석에서 성검만 검신째 끌어안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있으며, 치료를 해 주려고 다가가면 악을 쓰며 못 오게 한다고 술사들이 전했다.

그게 벌써 열흘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죽거나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워낙 단련된 기사인 데다가, 아무래도 성검이 그의 몸을 보살펴 어느 정도로는 온존해 주고 있는 것 같다고 치료술사들은 방문자에게 제 의견을 전달했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용사는 그 상태에서 헤어나올 줄을 모르는 거라고. 성황이 결국 조심스레 막시밀리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프란첸 경. 주인을 베면 성검 자신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자 용사는 소스라치며 겨우 검을 안은 몸에서 힘을 풀었다.

막시밀리안은 결국 몇 주가 더 지난 후에는 성 밖으로 나왔다. 알아볼 수 없이 말라빠지고 표정이 완전히 변하고, 뺨에는 상처가 생긴 채였다. 성검에 베인 상처였는데, 막시밀리안 본인이 발악하는 와중에도 다른 상처는 술사들이 결국 다 치료해 버렸지만, 이것 하나만은 남겨 주었다고 한다.

용사를 앞세운 성기사단이 대륙을 돌아다니며 마물을 정화하고, 사업가 협회와 흑마법사 잔당을 모두 처리하고 검은 숲을 일소하는 데에는 일 년쯤이 걸렸다.

그 후 용사는 실종되어 버렸다.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지친 나머지 어느 숲에 숨어 은둔한다는 얘기도 나돌곤 했다.

성검의 행방도 묘연해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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