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미래
1.
늦은 저녁, 병사가 임시 막사로 들어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을 때, 베스퍼는 미간만 무겁게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 민간인이라니.
성황국 수도가 위기였다. 마물 수백 마리가 몰려와 남쪽 성벽을 긁어 대고 있었고, 저지하러 나갔던 성기사 부대는 전멸 직전에 몰려 성안으로 퇴각한 지 오래였다. 피난 온 백성은 겁에 질려 두런거리다가 병사가 지나가면 한 번씩 꼭 외쳐 물어보곤 했다.
“용사는 어디 계십니까?”
그들은 한목소리로 불렀다.
“프란첸 경은? 용사는 이런 상황에 대체 어디 계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피를 토하듯이 물어도 병사들은 답이 없었다. 사실 그들도 알고 싶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북극성처럼 찬란하게 제자리를 지키던 그 스물여섯 살의 성기사는 어제 오후부터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병사들은 대신 제 상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상관은 또 성기사에게, 성기사들은 결국 베스퍼에게까지 질문을 올렸다. 그러나 베스퍼는 아무 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 인공 용사는, 그러니까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은 움베르토의 연구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으며, 재갈이 물리고 사지가 사슬로 칭칭 감겨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고 순순히 답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게 패인이었던 거 아닌가.”
사실을 숨긴 채 베스퍼는 다만 오전 막사 회의 자리에서 부하 성기사들을 채근했다. 너무 그 막시밀리안만 믿었다. 그 청년만 언제나 전방에 내보냈고 그의 승리만을 응원했다. 그가 베지 못하는 마물은 어차피 다른 아무도 베지 못할 것으로 가정하고 바로 퇴각했다.
“당신들 다 너무 그에게만 의지했어. 내가 명령을 내려도 안 들었지. 스스로 싸우는 법은 다 잊어버린 것처럼.”
“저희는 강화 시술을 받지 않았으니까요. 프란첸 경만…….”
“그게 변명이 되나? 그럼 나는 미쳤다고 매번 그의 곁까지 달려가서 함께 싸웠나?”
베스퍼가 며칠 전에 입은 뺨과 이마의 부상을 일부러 드러내며 말했다.
“강화병이든 아니든, 우린 모두 다 같은 성기사야. 몇 달간 그래 놓으니 지금 수도가 공격당하는 중인데 그 청년 하나 없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이러고 있지.”
으르렁거리는 음성이 닿자 성기사들도 파트너 마법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막사 밖에서 기병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사는 어디 계신가? 프란첸 경은?
저 물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온 도시를 휘돌아 합창처럼 증폭되기만 할 것이다. 오래 숨길 수는 없으리라. 성황국 마법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용사는 결국 처참하게 몰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성기사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은 곧 마물이 된다. 다른 길은 없다. 베스퍼도 차마 희망을 못 버려 잠식이 시작된 그 몸을 연구소 지하로 옮겨 두긴 했고, 막시밀리안 본인도 참 무섭게 싸우며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결국 그는 패배할 것이다. 움베르토가 진단해 낸 대로 아마도 일주일, 길어야 열흘 후면 말이다.
찬 공기가 맑은 가을밤 저녁, 남쪽에서 끊임없이 마물들이 그르렁대며 성벽을 두드려 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베스퍼는 막사에 들어와서 답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민간인이 무슨 일인데? 애초에 왜 여기까지 들여놓은 건가.”
“크라우스 경께 꼭 청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합니다. 그, 프란첸가의 피후원자인데요.”
베스퍼가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반쯤 세웠다.
“들어오라고 해.”
허리를 성냥개비처럼 분지를 수 있을 듯이 곯아 빠진 청년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베스퍼에게 예를 표해 보였다. 백지장 같은 흰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고, 눈 밑은 움푹 꺼진 채였다. 은빛 눈동자는 너무 창백해서 거의 아무 표정도 읽어 낼 수 없었지만, 흰자위가 샛붉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오래 울었던 것 같다.
하얀 청년이 운을 떼고 나서야 베스퍼는 비로소 그 말라 터진 음색에서 반쯤 절망한 듯한, 반쯤은 오히려 어떤 강렬한 의지로 타오르는 듯한 기색을 잡아낼 수 있었다.
“크라우스 경,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요른이 더듬더듬 청하자 베스퍼는 끄덕거렸다. 그쯤은 쉽사리 준비해 줄 수 있었다. 기사단장은 돌아올 답을 짐작하면서도, 그래서 벌써 아래가 뻐근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물었다.
“대가는?”
“괜찮으시다면, 크라우스 경.”
요른이 다시금 예를 갖추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의외로 전혀 떨고 있지 않았으며 음성은 또렷하고 확고했다.
“저를 안아 주십시오.”
* * *
약 1년 전, 늦가을. 요른은 병동 건물을 나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에가 낀 유리창처럼 몇 군데만 깃털 구름으로 희끗희끗한 채 차갑고 맑았다.
병동에서는 창이 없는 쪽에 누워 있었기에 하늘을 보는 건 딱 일주일만이었다. 요른은 그 투명한 청색을 숨으로 들이켜려는 듯 계속 하늘을 응시하며 한편 목 밑으로는 왼팔에 힘을 넣으려 애써 보았다. 그러나 팔꿈치 아래로는 거의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손목 밑으로는 반사 신경만 남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게 다였다.
그는 이제 왼손을 못 쓰는 마법사가 되었다. 아니, 청하는 동작을 할 수가 없으니, 기실 마법사라고 할 수도 없는 꼴이다.
요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잘했어.’
그는 스스로를 칭찬하듯이 되뇌었다.
성황이 요른더러 막시의 마법사 파트너가 되라고 명한 건 삼 주 전의 일이다. 그리고 며칠 전 그녀는 결국 요른을 정식으로 불러다가 여러 기사들 앞에서 막시밀리안의 파트너 역할로 모의전에 참여시키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요른이 잘해 주리라고 믿고 그러셨던 것이리라. 주변 반대를 다 잠재울 정도로 잘해 줄 거라고.
처음에 요른은 성황 폐하의 기대대로 전송 마법과 공격 마법을 동시에 쓰면서 능숙하게 굴었다. 기사들로부터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그는 일부러 더듬거리면서 실수를 저질렀고, 공격 마법 좌표를 잘못 설정한 양 자신의 왼팔과 함께 타고 있던 말의 목까지 푸른 불꽃으로 태워 버렸다.
모의전은 바로 종료되었고, 말은 즉사했으며, 왼팔이 불탄 채 낙마해 말의 몸에 깔리면서 요른은 금방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틀 후 병동에서 깨어났을 때 명은 이미 취소되어 있었다.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파트너가 될 수 없고, 그 어떤 기사의 파트너도 될 수 없다.
왼손을 못 쓰게 되었으니 이제 그는 평생 제대로 된 마법은 쓸 수 없다. 기껏해야 마검 설계나 하며 살게 될 거라고, 젊은 치료사가 우물쭈물 요른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다가 그는 요른이 빙긋 웃는 걸 보고 눈을 찌푸렸지만, 워낙 나쁜 소식을 듣고 허탈해서 그러겠거니 짐작하고는 가만히 지시했다.
“깨어나셨으니 내일은 일반 병실로 이동 부탁드립니다.”
요른은 끄덕거렸다. 그리고 치료사가 가 버린 후 누운 채 혼자 계속 배시시 웃었다. 마침내 온전히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막시가 쓸 수 있을 만한 좋은 마검을 설계하는 일만 생각하면 된다.
‘진작 이럴걸.’
좀 더 빨리 왼팔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지 않은 것 정도만 살짝 후회되었다.
열일곱 살 때 막시한테서 말채찍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후, 요른은 기사 파트너가 될 꿈은 완전히 버렸다. 대신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마검 설계만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요른은 성황국 마도 학원 연구 강사가 되었고 실제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마검 연구에만 투자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반년쯤 전부터 요른의 전송 마법 실력에 눈독을 들인 마도 협회에서 자꾸 의뢰를 해 오기 시작했다. 마물 퇴치 시 전령 역할로 기사단과 동행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느라 요른은 결국 몇 번이나 막시의 부대와도 함께 움직이게 되었는데, 막시밀리안이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눈에 보여서 불편하고 미안했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 전투 때 막시가 위험한 걸 보고 그만 두 마법을 동시에 써 버린 탓에 성황 폐하의 눈에마저 들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다음 날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4인실이라지만 사실상 아무도 없고 가구마저 이상하게 낡아 빠진 일반 병실으로 옮겨 해가 들지 않는 벽 쪽 침대에 누운 채 요른은 뿌듯하게 생각했다. 성황 폐하의 명령이라도 상관없다. 자신이 평생 꿈꾸었던 일이라도 상관없다.
막시밀리안이 싫어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닷새 후 퇴원해서 자신의 사택, 그러니까 수도 외곽의 작은 숲속에 고요히 잠겨 있는 강사 숙소 쪽으로 발을 옮기며 요른은 거의 콧노래라도 부를 듯한 기분에 잠겨 있다가 문득 떠올렸다.
‘막시는 많이 바쁘겠지?’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누워 있는 동안 병동을 한 번도 찾아 주지 않았다. 육 년 전, 움베르토의 연구소에서 사고가 있어서 많이 다쳤을 때는 들러 주었다던데 말이다. 요른 자신은 그때 오래 의식을 잃고 있느라 몰랐지만 치료사들이 나중에 그렇게 전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성기사단은 이제 출정을 떠나지도 않는다. 각 도시의 성벽을 닫아걸고 지켜 내기만도 빠듯하기 때문이다.
기사단이 남부로 출정했다가 개선식을 하며 돌아오곤 했던 게 고작 오륙 년 전 일이다. 그때는 토벌전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방어전의 양상으로 굳어 버렸다. 남부는 이미 패배했고, 중부와 북부만 남아 남은 국토를 마물과 흑마법사 군단으로부터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막시를 마지막으로 본 게 모의전 때지. 그때도 조금 피곤해 보였는데,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막시.’
생각하며 요른은 계속 걸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자꾸 어깨가 한쪽으로 비뚤어졌다. 왼팔의 근육이 오그라든 채 퇴화되어 상체 양쪽이 균형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른이 비칠비칠 제집을 향해 가는 동안 황궁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여덟 제후와 성기사단 대대장급 이상의 인사들, 마도 협회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게다가 문도 닫고 창문도 모두 닫은 후 커튼까지 쳐 놓아서 초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후덥지근했다.
여러 명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다시피 했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러나 양보 없이 자기 의견만 밝혔다. 성황은 한참 동안 턱을 괸 채 듣고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곧 방 안의 공기를 한 바퀴 휘돌려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여 선포했다.
“프란첸 경으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막시밀리안이 바로 받아 성황께 깍듯이 예를 표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바로 불만이 터졌다.
“프란첸 경은 너무 중요한 성기사입니다. 그가 잘못되면 손실이 큽니다.”
“프란첸 경은 게다가 독자 아닙니까? 다른 자들에게 먼저 실험해 보고, 그에게는 한참 후에야 시술하는 게 옳습니다.”
“그래요? 그 다른 자들이란 게 정확히 누가 될 겁니까.”
베스퍼가 특유의 질박한 목소리로 뱉어 내고 나서야 모두 조용해졌다. 사실 아까까지 다들 자신만은, 혹은 자기 자식만은 안 된다고 핑계를 내세우고 있었던 탓이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는 성황께로 눈길을 향한 채 조용히 물었다.
“제가 맨 처음으로 시술을 받기로 정해진 게 아니었습니까, 폐하?”
“알고 있습니다, 크라우스 경.”
성황이 깊이 끄덕거렸다.
“하지만 총사령관으로 첫 실험을 하느니 그래도 여단장이 낫지 않겠습니까. 크라우스 경은 가문의 장이시기도 하고요. 그리고 역시 나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성기사로서 나름대로 잘 버텨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예. 압니다. 그래도 린다 투트 크라흐트 경의 말에 따르면, 이 시술은 육체적인 면에 많이 기대다 보니 젊은 쪽이 아무래도 버텨 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시국에는 예약 순위 같은 형식보다는 아무래도 실용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올해 딱 쉰이 된 베스퍼는 이를 으득 물었다.
육 년 전, 움베르토의 연구소에서 사고가 있었던 직후, 크라흐트 가에서 갑자기 나서서 당시 스물도 안 되었던 청년을 굳이 시술 대상 예약자 목록에 넣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다.
베스퍼는 그래도 당연히 때가 되면 자신이 맨 먼저 시술을 받을 줄 알았다. 여전히 목록 1순위에 올라 있는 건 그였으니까. 그래서 열흘 전, 마침내 마도 협회에서 연구 결과를 귀족 일반에 공개하고 성기사 강화 절차를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성황은 이상하게 첫 시술 대상자는 공정하게 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자고 하더니, 결국 베스퍼를 제치고 황명으로 막시밀리안을 선택해 버렸다.
린다 투트 크라흐트, 그 망할 흑마법 대책부 차장은 대체 막시밀리안에게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베스퍼는 회의장 탁자 밑에서 주먹을 꽉 쥔 채로 생각했다. 성황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가 다시금 전송 마법을 써서 모두에게 전하며 폐회를 알렸다.
“마물 합성을 통한 인체 강화 시술을 받는 첫 성기사로 막시밀리안 루드비히 폰 프란첸 경이 선택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의 경과를 보아 대륙의 다른 성기사들에게도 차례로 시술하도록 하지요.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칩니다.”
움베르토는 연구소 소장실에 앉아서 바쁘게 펜대를 놀리다가, 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와서 손님의 도착을 알리자 피식 웃었다. 움베르토가 접견실로 이동할 새도 없이 곧 베스퍼가 문을 박차다시피 하고 들어왔다.
“팔자 좋군.”
베스퍼가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예산이 점점 더 넉넉하게 쏟아져 준 덕에 소장실은 꽤 아늑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움베르토가 탁자 건너편의 푹신한 의자를 손짓하며 말했다.
“거기 앉아.”
“너까지 개입한 건 아니겠지?”
베스퍼가 어쨌거나 얌전히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크라흐트 차장이 뭐라고 했든, 너도 의견을 보탤 수 있었을 텐데. 네가 별로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준 인상은 아니더군.”
“안 했어.”
움베르토가 금방 맥락을 알아듣고 답했다.
“오늘 회의에서 결국 프란첸으로 결정 났나 보지? 나도 찬성이야. 말했잖아. 나도 네 나이가 걱정이라고. 아직 그나마 마흔 줄이면 모르겠는데, 쉰은 너무하잖아.”
“이게 내 탓인가? 네가 사오 년이면 될 거라고 했었지. 그런데 거의 칠 년이나 걸려서…….”
“그리고 결과도 그때 예상했던 것보다는 불안정해.”
움베르토가 마침내 펜을 놓고, 손을 깍지를 낀 채 앉아서 제 친구를 마주 보았다.
“그 피험체를 계속 쓸 수 있었으면 몰라도, 사고 후로는 그 애 없이 진행했잖아. 그러다 보니 한계가 있었어. 젊은 기사 중에서도 정신력이나 동기가 특히 강한 자들 대상으로 먼저 진행하는 게 옳아. 프란첸이라면 딱이지.”
“그자의 동기라는 게 대체 뭔가.”
“용사가 되는 거지.”
움베르토가 웃으며 답했다.
“네 동기는 나도 알아. 한번 직접 섞여보고 싶다, 그리고…… 도태되기 싫은 거지? 마검에 서툰 자와 마찬가지로 강화 시술을 받지 못한 기사도 곧 전장에서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넌 뒤떨어지기 싫은 것, 막시밀리안은 앞으로 나가고 싶은 것. 미안하지만 후자 쪽이 더 강해.”
베스퍼는 눈썹을 꿈틀거렸고, 자기 수하의 그 여단장이 싸우던 모습을 상기했다.
요즈음의 젊은 기사들은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몸부림친다. 차라리 더 끔찍한 게 오기 전에 지금 죽어 버리고 싶다는 식이다. 반면 그 흑발 청년은 처절하게 싸우면서도 결코 자기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내놓지 않는다.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은 채 수하 기사들을 바늘구멍을 노린 듯한 좁은 승리로 이끈다.
그는 승리를 원한다. 베스퍼는 곱씹었다.
막시밀리안은 어쩌면 현재 전 대륙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향한 희망을 진심으로 붙들고 있는 성기사인지도 모른다. 마물의 홍수로부터 세계를 반드시 지켜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희망. 그 근거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용사라.”
베스퍼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전설은 이제 아무도 안 믿는 줄 알았는데. 마왕 강림 전설만 널리 퍼져서.”
흑마법사들의 예언이 위조된 것이기는커녕, 용사 전설과 같은 문서의 다른 해석이었다는 게 일반에도 알려지면서 황국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성검의 강림이라는 건 처음부터 마왕 강림 전설을 감추기 위한 거짓 해석이었을 뿐 아니었겠느냐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소문의 타격은 컸다. 황국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남부를 구원하러 내려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던 기사와 마법사는 다들 알고 있었다. 남부 도시 대부분은 그저 패배한 게 아니라 제 손으로 흑마법사들에게 성을 바쳤다는 걸. 움베르토도 제 친구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믿어. 하루라도 빨리 용사가 되고 싶으니 꼭 좀 시술을 해 달라고, 나한테도 몇 번이나 서신을 써서 정중하게 부탁해 왔거든.”
“미친놈이군. 진짜로 그 전설을 믿을 거면 성검이나 얌전히 기다리든지.”
“상황이 급하잖아. 성검이 강림하실 때까지는 인공 용사라도 되어서 버텨 보겠다는 거지. 마검 개발부에서 제법 성검 같은 합성 마검도 몇 개 만들어 뒀으니까 말이야.”
움베르토는 답하며 친구를 달랬다.
“걔가 잘되면 너도 꼭 순위에 넣어 줄게. 첫 시술은 워낙 중요하니까, 제일 성공률이 높은 애를 고를 수밖에 없어.”
베스퍼는 여전히 얼굴이 우그러진 금속판처럼 굳어 있었지만, 그래도 더 말은 보태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움베르토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그 공작가 청년이 진짜 용사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디 보자.
바람대로 시술을 해 줄 테니 어디 날뛰어 봐라. 그러나 만약 그도 해낼 수 없다면…… 움베르토의 머릿속을 린다의 음성이 스쳤다.
린다 투트 크라흐트 차장도 참 위험한 줄타기를 해 왔다고, 움베르토는 새삼 돌이켰다. 스스로가 가장 증오하는 새하얀 자가 그 계획의 핵에 들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그녀는 지난 삼 년간 녹색 눈의 청년과 계속 서신을 나누었고, 그의 사상에 천천히 물들어 갔다. 그리고 한 달 전에는 움베르토에게도 전령을 만날 장소와 방법을 전해 주었다.
“내게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대신해 줘.”
그녀는 짧게 덧붙였고, 움베르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움베르토는 막시밀리안이 패배하면 바로 전령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페랑의 그 악명 높은 ‘반역자’로부터 답을 받으면 날짜를 맞춰 성황국 수도의 성문을 안에서부터 활짝 열어 줄 것이다. 흑마법사들과 그들이 이끄는 마물들, 그리고 흑마법사들을 지난 십 년 내내 물적으로 지원해 온 사업가 협회가 당당하게 개선해 들어올 수 있게끔.
새 세상이 온다.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핏빛으로 자유로운 세상이. 움베르토는 흑마법사들이 성황 헤르타의 목을 치고 새하얀 청년을 그 옥좌에 올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곱디고운 갈색 머리의 스물일곱 살 상인가 장남이 그 앞에 무릎을 꿇을 테고, 움베르토 자신도 곁에 있으리라.
그 백색의 왕은 마침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움베르토의 오랜 흉터마저도 치료해 줄지도 모른다.
움베르토는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고, 그로쉔 순혈 대귀족가 청년의 단아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떠올리며 되뇌었다. 하지만 네게 먼저 기회를 주지. 막아 봐라, 막시밀리안.
네 세계를 지켜봐라.
마침내 찾아온 갈림길 앞에서 움베르토는 자신이 열쇠 두 개를 다 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각 그 열쇠를 움켜쥐고 문을 열려 노력할 테지만, 어느 미래를 향해 열릴지는 결국 문 자신이 선택하리라. 다만 그는 두 열쇠 중 어느 하나를 아예 내어 주지 않는 월권행위까지 범할 용기는 없었다.
베스퍼가 떠나고 나서, 움베르토는 시술 준비 겸 옛 실험 자료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육 년 전의 사고 기록과 마주친 탓이다.
“행복하기를.”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설마 이런 감상에 젖어 선택을 미루고 있는 건지 돌이켰다. 그리고 그 감상의 정체가 죄책감인지, 뒤늦은 위선인지도.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금 후회 없이 되뇌었다.
네 스스로 선택하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같은 날 이른 밤, 린다 투트 크라흐트 흑마법 대책부 차장은 자택에서 하인의 보고를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시간에 손님이라니.
요즘 부서는 바빠 미칠 지경이었다. 린다는 녹초가 되어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곤 했고, 내일도 일하기 위해서라도 제발 오늘은 이제 좀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손님 같은 건 부서에서 보는 걸로 충분하니 자택에서 또 맞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꿉친구에, 프란첸가의 독자에, 대륙 성기사단 부사령관 겸 여단장이기까지 한 손님을 쉽사리 마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린다는 마음을 다잡고는, 하인더러 접견실에 자리를 준비하고 차를 내어 오라고 했다.
린다가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막시밀리안은 창가에 서서 밤의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린다가 목소리를 내자, 곱고 청초한 그대로 마치 백합이 활짝 피듯이 완연하게 성인이 된 얼굴이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린다.”
“서로 바빴으니까.”
서신은 자주 나눴고, 공적인 자리에서야 만났지만 사석에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석 달만이었다. 린다는 표정이 좀 풀린 채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막시밀리안?”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을 뿐이야.”
청년이 전하며 린다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린다도 오늘 회의에서 막시밀리안이 첫 시술 대상자로 선택되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기에, 금방 알아듣고는 끄덕거리며 자신도 그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별일 아닌데 뭘. 나야말로 선물 고마워. 뭘 잔뜩 가져왔더라.”
“응. 그런데, 마차에서 선물을 내리다가 네 집 앞에서 수상한 자도 봤는데.”
막시밀리안이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이어 갔다.
“네 별장 대문 앞을 맴돌다가 나를 보고는 안절부절못하더라고. 품을 뒤져 보니 그럴 신분이 아닌데도 호위용 마법진이 나왔고, 서류 가방에는 서신도 잔뜩 있던데.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일단 구류소로 보내 취조를 부탁했어.”
“그렇구나.”
린다가 하인이 가져다 준 찻잔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답했다.
괜찮아. 린다는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필립은 정보원 교육을 아주 잘 시켜 두었다고 들었다. 그 전령도 취조받다가 들킬 것 같으면 알아서 자살하겠지. 그러나 곧 린다는 눈을 들어 친구의 얼굴을 보고는 깨달았다. 그런 자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군.
꾸며낸 얘기다. 린다의 반응을 보려고 한 것뿐이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이런 수까지 써 온다면, 린다가 사업가 협회원들과 서신을 나누고 있다는 점에 대해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심증이 아니라 물증 수준까지 말이다.
지난 일 년간 잘도 조사했구나. 린다는 쓰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막시밀리안은 일 년 전에도 린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필립은 잘 있냐고 물어 온 적이 있다. 린다는 필립과는 이미 한참 전에 연이 끊겼다고 딱 잘라 답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오히려 아쉽다는 듯이 되물어 왔다.
“저런. 사적으로도 연락 안 하게 된 거야?”
“그런 얘기를 듣고 어떻게 계속 연락해?”
린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네가 얘기해 줬잖아. 페랑 사업가들, 흑마법사랑 내통해서 반역을 꿈꾼다면서. 필립은 제 부모랑 같이 그 선봉에 서 있고.”
“그래. 그러니까 혹시라도 네가 더 자주 연락해 주지 않을까 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그쪽에서 정보를 빼내면 좋잖아.”
“이중 첩자 같은 거 말이야? 그런 복잡한 역할은 미안하지만 못 해.”
린다는 물론 막시밀리안의 의도를 눈치채기는 했다. 린다더러 그간 이중 첩자 노릇을 하느라 필립과 연락해 왔다고 거짓 고백하라는 거다. 그렇게 핑계를 대면 용서해 줄 테니, 빨리 털어놓고 자료를 넘겨라.
그러나 그녀는 자료를 넘겨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성황국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움베르토의 연구소에 사고가 났던 당시까지만 해도 필립의 이상은 멀어 보이기만 했다. 그가 꿈꾸는 세계를 린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도저히 동조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세계는 현실적으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필립은 흑마법사들의 힘을 빌려 대륙 일곱 왕국 중 이미 다섯 왕국을 뒤집었다. 마왕의 신세계에서는 생물 간의 경계만이 아니라 신분 질서마저 사라진다는 설에 민중이 설득되어 각 도시 안에서부터 소요를 일으켜 준 덕이었다.
페랑의 마왕군과 황국 연합군 간의 수평적 전쟁이 점차 전 대륙에 걸친 수직 혁명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승기는 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마왕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지극한 보수 성향을 띠는 그로쉔 왕국, 성황이 직접 다스리는 중북부의 황국을 제외한 다섯 나라가 이미 수도의 성문을 스스로 열어젖히다시피 항복했다.
이들은 페랑 사업가들의 주도하에 임시 공화국 형태로 연합을 이루어 남은 황국군에 맞섰으며, 기세를 몰아 이미 그로쉔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한 것은 물론, 성황국 도시마저 차례차례 공략해 오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기는 쪽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필립의 편을 들면 린다는 둘 다 누릴 수 있다. 새 세상에서도 구세에서와 변함없이 권력을 가진 쪽으로 남을 수가 있고, 한편 구세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자의 곁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뭐 하러 다 망해 가는 체제에 의리를 지키느라 소위 내통죄를 고백해야 하나.
“오 년 전이 마지막이야. 그 후로는 거래처도 바꿨고, 필립과는 전혀 연락한 적이 없어.”
당시 린다는 딱 잘라 답했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은 웃으며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더니 곧 자리를 떴다.
하지만 린다는 제 오랜 친구가 그 정도로 의심을 거둘 인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일 년간 린다의 주변을 더욱 샅샅이 조사해서는 마침내 증거까지 손에 넣고 만 것이리라. 그녀의 추천을 받기 위해 오늘 회의 때까지 기다린 것뿐, 아마 그가 원했더라면 이미 한참 전에 린다를 체포해 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소꿉친구로서의 정도 있고, 그가 시술을 받게끔 도와준 공과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린다가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막시밀리안이 가만히 물어 왔다.
“그 가방을 든 남자 말이야. 혹시 너도 아는 바 없어?”
“없어.”
“그렇구나.”
막시밀리안이 답했다.
“미안하지만 린다, 그러면 네게도 구류소에서 물어야겠다.”
“이 시국에 지금 흑마법 대책부 차장을 체포하겠다고?”
“부서장님이 건실하시니까 괜찮겠지.”
린다의 소꿉친구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수준 높은 마법사고 일도 성실하게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인력은 아니야. 이 정도 내통죄라면 백작 부부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야. 공사 구별을 못 하는 분들은 아니시잖아.”
막시밀리안이 주문을 외워 창가로 불빛을 피워 보냈고, 곧 자택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가 데려온 병사들이 밀고 올라오려는 걸 그녀 수하 경비병들이 당황해서 막아 보려는 소리다.
린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망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막시밀리안? 린다는 친구의 얼굴 쪽으로 차마 눈을 들지도 못하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전히 성황을 믿고 그녀의 기사로 남을 수가 있어? 린다도 그렇게 쉽게 필립에게 기울어진 건 아니었다. 육 년 전, 요른을 연구소 피험체로 넘겨주어 버렸다는 걸 들켰을 때, 그녀는 막시밀리안을 강화 시술 대상자 목록에 올리고 1순위로 추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받고 나자 그는 적의를 유보하고 린다를 사적으로 찾아왔고, 페랑 사업가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때는 린다도 얼굴이 금세 파랗게 될 정도로 질렸고 실제로 당장 필립과의 연락도 끊었다.
린다가 다시 생각을 바꿔 제 쪽에서 먼저 필립에게 편지를 쓴 건 그 삼 년 후의 일이었다. 린다 자신이 갓 스물세 살이 되었던, 그리고 동갑내기 카를이 남부의 요충지에서 죽음을 맞았던 해.
시신은 전장에서 거두었지만, 카를의 몸에는 아무래도 마물이 아니라 사람 손에 당한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막시밀리안.”
병사들이 접견실까지 들이닥치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쥐어짜듯이 물었다.
“너도 카를이 죽었을 때 흔들렸잖아. 안 그래?”
“린다, 일어서.”
막시밀리안이 여상스레 명했다.
“손은 뒤로 돌리고. 그래야 안 다쳐.”
“카를이 우리한테 그런 편지를 보낸 직후에 죽었는데? 암살일 수도 있다고, 너도 그때는 인정했잖아. 성황이 제 죄를 감추려고 카를을 해한 걸 수도 있다고.”
“린다.”
병사들이 올라왔기에 막시밀리안이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린다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외치듯이 말했다.
“카를 폰 린하우스는 전장에서 제 조부를 만났어!”
“린다, 손을 뒤로 돌리고 벽을 보고 서.”
“어머니 쪽의 조부, 그러니까 르핀 왕국의 기사였던 자를 만났다고 썼어. 마물화되었다지만 얼굴 반이 그대로 남아 있고 가문의 문장까지 피부에 녹아들어서 알아봤다고. 마물의 유래란 어쩌면…….”
막시밀리안이 직접 다가가서 린다의 팔을 가볍게 꺾어 잡고 수갑을 채웠지만, 그녀는 지지 않고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이 모든 일은 다 성황 본인이 자초한 걸 수도 있어. 넌 어떻게 그자에게 계속 충성을 바칠 수가 있지, 막시밀리안?”
“넌 지금 카를의 죽음을 이용하고 있어.”
병사들이 다가오려는 걸 손짓으로 제지하며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너는 그저 필립에게 반한 것뿐이잖아, 린다. 육 년 전에는 정말로 연락을 끊었다는 건 알아. 그래도 너는 언제든 그와 다시 연이 닿을 핑계를 찾았겠지. 그의 편을 들어 주어도 좋을 핑계를 말이야.”
“네가 뭘 알…….”
린다가 대들려다가 움찔했다. 막시밀리안의 안색이 창백했다.
입술까지 완전히 핏기가 빠진 채 성기사 여단장은 흑마법 대책부 차장의 신병을 수하 병사에 인도했고, 그녀는 양어깨가 잡혀 끌려 나갔다. 겁에 질린 하인들 사이를 걸어 막시밀리안도 천천히 투트 크라흐트의 별장을 빠져나갔다.
린다를 구류소로 데려가는 걸 굳이 끝까지 보지도 않고 그는 지시만 내린 후 성황국 병동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시내 한쪽을 통과해야 했고, 타고 있던 말의 발굽 소리에 뒤섞여 술에 취한 음성이 귀에 닿았다.
“새 세상이 그렇게 나쁘겠어?”
있지도 않은 아이들 밥값을 구걸해서 술값으로 써 버리는, 이 골목에서 유명한 노숙자 주정뱅이였다. 오늘 밤은 왠지 대로까지 나와서 혼자 외쳐 대고 있었다.
“지나가는 기사님, 그렇게 나쁘겠어? 우리 밑바닥 놈들한테는 어차피 다 똑같아. 게다가 성황은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했다면서. 마왕이 그보다 더 나쁘겠어?”
“그래도 현세가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지요.”
막시밀리안이 답했다.
“다들 마왕이 어떤 자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르신. 현세의 죄과가 더 끔찍한 신세계를 당겨 올 핑계가 될까요?”
주정뱅이는 성기사가 이렇게 깍듯하게 답까지 해 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놀랐다. 기사는 미소 짓고 있긴 했지만, 가로등에 비친 안색만은 상대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난 건지 그냥 고통에 미쳐 버린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얬기에 더욱 겁이 났다. 주정뱅이는 뒤로 물러났고, 무심결에 허리를 숙이며 인사마저 해 버렸다.
“아니, 그, 죄송합니다. 요즘 고생이 많으십니다.”
막시밀리안은 빙긋 웃어 보인 후 계속 목적지를 향해 말을 몰았다. 고개가 자꾸 갈기 위로 숙어졌다.
……돼. 입술 사이로 순간 숨이 달싹거렸다.
핑계를 대면 안 돼.
그는 곧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앞만 본 채 나아갔다. 병동에 닿아 그는 치료술사 한 명을 찾았다. 술사가 인사하며 소식을 전했다.
“오늘 퇴원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조금 빨리 돌려보냈습니다.”
“밤에는 계속 그랬나요?”
“예. 사람 없는 병실에 격리해 두길 잘했습니다. 몽유병치고도 이상한 증상이니까요.”
답하면서 치료술사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막시밀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열흘 전 술사의 연락을 받고 이 프란첸가의 후계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해 주기는 했다. 자기 집 피후원자는 원래 잠자리를 옮기면 조금 특이한 몽유병 증상을 보이곤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술사는 대체 몽유병이 어떻게 저 혼자 깨어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같은 병실 환자들도 모두 함께 들떠 움직이며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게 하는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그가 워낙 뛰어난 마법사다 보니 꿈결에도 남에게 환각 마법 같은 걸 쓰는 것 같더라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그도 말이 되지 않는다. 요른은 왼손이 다 망가진 채로 병동에 실려 왔다. 그러니 주문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잘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답하며 은화를 세 닢이나 전하자 술사는 아무 말도 더 보태지 않기로 했다. 술사가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막시밀리안도 병동 밖으로 나와 다시 말에 올랐다.
밤이 늦었다. 요른은 숲속 제 사택에서 잘 자고 있으리라. 그러니 지금 ‘날씨’도 좋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보려는 게 아니라, 제 눈과 별들 사이를 채운 공기를 꿰뚫어 보려는 듯이.
* * *
막시밀리안의 시술 날짜는 사흘 후 새벽 한 시로 정해졌다. 예보에 따라 ‘날씨’가 가장 좋을 만한 일자와 시각으로 맞춘 것이다.
귀족들은 이제 모두 알고 있었다. 육 년 전, 날씨가 한번 미친 듯이 좋았다가 마개를 닫듯이 도로 확 꺼져 버린 적이 있었다고.
기록에 따르면, 그날 밤 후 몇 달간 날씨는 지나치게 잔잔했다고 한다. 일반 마검도 생산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단다. 그러나 결국 조금씩 풀리기 시작해서, 하루하루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를 반복했지만, 이후 육 년을 종합해 보면 평균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황성에서 회의가 있었던 날 밤, 수도 협회 본부 건물 최상층, 막시밀리안의 시술 일정을 정하느라 예보 전문가들은 몇 개월 치 기상 자료를 다 펼쳐 놓고 훑어보는 중이었다. 전조를 읽는 예보는 불가능했지만,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동향을 짚어 내는 건 가능해진 터였다.
자료를 살피며 그들은 대륙을 점점 더 강한 바람이 에워싸고 가두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탁한 안개에 갇힌 듯 전 대륙이 어떤 기후에 푹 잠겨 침몰해 가고 있다.
“특히 밤에 강해지지.”
한 명이 중얼거리며 표의 몇 부분을 가리켰다. 늘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이르는 시간대에 바람은 가장 강하게 휘돌며 넘실거린다. 낮에는 꾹 눌러 자제하고 있던 날씨의 신이 꿈속에서는 그만 고삐를 놓아 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육 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 협회원들은 새삼 돌이켰다. 뭔가가 한번 열렸다가 다시 강제로 막혔지만, 결국 온전히 돌이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틀어막아 둔 마개의 틈으로 오래된 건물에 비가 새듯이 자연스레 물이 새면서 아예 벽 자체가 망가져 가고 있다.
날씨가 좋으면 합성 마검도 만들기 쉽고 인체 강화 실험도 잘 진행된다. 하지만 협회원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공식적으로 차마 밝히지는 못했지만, 수도 마법사와 성기사들은 날씨라는 게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요소라고는 생각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날씨는 마왕의 힘이다!”
흑마법사들이 곳곳에 그렇게 전도하며 돌아다녔던 탓이다.
“날씨는 곧 그분의 존재다. 보아라, 이 돌풍이 가장 거세지는 날, 그분이 결국 강림하시리라!”
성황국 마도 협회원들은 같잖은 거짓말이라고 비웃으면서 이를 일소하는 공문을 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의심하던 바를 전도 덕에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 날씨라는 건 정상이 아니다. 이건 타블로의 질서에 속하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타블로를 다 뒤섞어 버린다. 마물이란 안 그래도 생판 다른 동식물이 뒤섞여 만들어진 생물인데, 날씨가 좋으면 그런 마물들을 서로 더 섞어 강력한 합성 마검을 만들 수가 있다. 심지어 사람 몸에도 마물이 안정적으로 잘 섞여 강화병이 탄생한다.
흑마법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날씨가 아주 좋은 밤에는 장소들마저 서로 뒤섞인다고 한다. 그래서 전혀 다른 곳으로 사물이나 신체를 전송하는 마법까지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날씨가 정말로 아주, 아주 끔찍하게 좋은 밤에는 머리에서 머리로 생각을 전하는 마법도 쓸 수 있다고 우겼다.
실제로 흑마법사들은 종종 신체 전송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마법을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일부러 일반 시민 앞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민중은 점점 더 마왕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그 힘에 감복했다.
늦가을 밤,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성기사의 몸을 더욱더 강화시켜 줄 시술을 준비하면서도 마도 협회원들은 절망에 시달렸다. 자신들이 악에 대해 악으로 맞서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황국은 오래전부터 마왕의 힘으로 마왕에 맞서 왔던 꼴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힘이 하루 중 절정에 달하는 시각을 골라 협회원들은 신실한 성기사의 몸에 마물을 섞어 넣을 것이며, 기사가 어두워진 몸으로 일어서면 그 손에 가장 강력한 합성 마검을 들려 주리라. 그리고 그 몸과 그 검으로 마물들을 베라고 명할 것이다.
협회원들이 계산을 마치고 자료를 움베르토의 연구소에 전달했다. 움베르토는 강화식을 프란첸 경의 몸에 맞추어 수정하고 최종 임상을 거쳐야 하니 사흘을 더 달라고 요청해 왔고, 마도 협회에서는 최종적으로 일정을 정해 성황의 인가를 받았다. 인가서를 받아들고서 협회원 하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성검이 빨리 강림하면 좋겠군.”
그때까지만 악으로 악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과는 달리 수도 귀족들은 다 알고 있기는 했다. 성검 전설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 유디트 폰 프란첸의 주장대로, 마왕 강림과 용사 각성은 같은 고대 예언의 두 가지 해석일 뿐이다. 서로를 배제하는 두 미래.
용사가 성검의 주인으로 각성해서 마물과 흑마법사를 모두 물리치면 마왕은 강림하지 못한다. 이 미래도 진짜다.
다만 협회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짓이 성검 강림 때까지의 일시적 변책인지, 마왕의 힘을 끌어다 쓰며 그의 각성을 점점 더 앞당기는 행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전자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프란첸 공작 부부가 아들이 첫 시술 대상자로 선택되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시술 하루 전이었다. 둘은 그로쉔 수도에 있던 본성을 빼앗기고 패퇴해서 북부 국경 지대의 요새를 지키던 참이었다. 지리적으로는 성황국에 더 가까워졌지만, 교통도 정보망도 많이 손실된 바람에 소식을 늦게 받았다.
올리버도 유디트도 요새를 비울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성안에 틀어박혀 탄식할 뿐이었다.
“제 몸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 멍청이는.”
유디트가 침실에 앉아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죽을 수도…… 살아남아도 불임이 될 수도 있는데!”
“어차피 혼인은 안 한다잖아.”
올리버가 담담하게 말했다. 유디트가 어이없다는 듯이 돌아보자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래를 위해 싸우고 싶은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
“미래가 와 봤자…….”
유디트는 욱해서 뱉을 뻔했지만, 곧 눈을 내리감았다. 미래가 온다 해도, 만에 하나 모든 게 다 성공한다고 해도 그 미래 속에 아들이 원하는 건 이미 없을 수도 있다.
날이 다가오자 막시밀리안은 채비를 했다. 깨끗한 옷을 입고 혼자 움베르토의 연구소 지하로 가서, 다시금 옷을 모두 벗고 아래 속옷만 걸친 채 연구소장과 직원들 여럿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험실 한가운데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육 년 전에 요른이 앉았던 자리였다. 의자는 그때 다 부서져서 새 걸로 마련했지만. 직원들이 그의 사지를 가죽끈으로 조이고 특히 손목과 발목을 사슬로 칭칭 감아 바닥의 고리에 연결했다.
성황도 자리하여 한쪽에 서 있었고, 베스퍼를 위시한 성기사들 여섯 명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막시밀리안이 비스듬히 눕듯이 앉은 의자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둥그렇게 둘러싸고 허리춤의 마검에 손을 댔다.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움베르토가 말하자 막시밀리안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움베르토가 성황 쪽을 쳐다보았고,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는 손을 들어 허가했다.
움베르토는 직원들을 시켜 막시밀리안의 몸체와 팔다리 피부 일부를 벗겨냈고, 근육까지 깊이 상처를 낸 다음 용액에 녹인 마물 조각을 부어 넣었다. 동시에 입을 벌리게 해서 목에 깔때기를 꽂았으며, 내장에도 가느다란 관을 삽입해서 보다 묽게 갠 액체를 천천히 주입하며 상태를 살폈다. 양 눈과 머리카락, 피부 겉면에도 고운 가루를 뿌렸다.
몸에 조각들을 넣는 동안 막시밀리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주입을 끝내고 움베르토와 직원들이 물러간 다음에야 그는 숨을 참았고, 묶인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괴로운 시간이 흘렀다. 성황 헤르타는 꼿꼿이 선 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성기사들도 교대로 자리를 지켰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에야 막시밀리안의 상태는 안정되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배겨 피가 줄줄 흐르던 것이 가벼운 흉터만 남기고 깨끗하게 나았고, 신음을 뱉느라 갈라졌던 목소리와 악물어 끝이 다 갈렸던 치아도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숨을 조금씩 고르며 막시밀리안은 안색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그가 지난밤 의자에 막 앉았을 때와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움베르토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연구소장도 그제야 마주 미소를 떠올렸다. 직원들이 휴식을 권했지만 내내 제 피험체 바로 곁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터였다.
움베르토는 목발과 의족 끝을 바닥에 꾹꾹 누르듯이 짚어 가며 갓 완성된 강화 기사에게로 다가와 팔을 묶은 가죽끈을 손수 풀어 주었다. 곧 다른 직원들도 도왔다.
“새 신체의 복속에 성공했습니다.”
성황의 음성이 실험실 안의 허공을 청명하게 울렸다.
연구소 직원들은 웃었고, 둘러싸고 있던 성기사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황도 은은한 미소를 품은 채였다. 막시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직원 한 명이 회복실을 가리켜 보였다. 그가 몸을 닦고 의복을 다시 갖춰 입고 오자 성황이 앞서 복도로 걸어 나갔다.
성황과 막시밀리안, 성기사들은 마검 개발부의 공방으로 향했다. 전송 마법으로 급보를 받은 직인들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공방장이 기대에 부푼 투로 말하며 그들을 지하의 가장 깊은 방으로 안내했다.
다소 좁은 방이었다. 성황과 막시밀리안에 더해 공방 직원 셋에 성기사 여섯까지 총 열한 명이 들어서자 금세 공기가 답답해졌다. 성기사들은 공방장이 방문을 닫은 후 램프에 불을 켜고 벽을 향해 손짓하는 걸 보았다.
관 같은 검은 상자들이 사슬 봉인이 걸린 채 벽 속 수납장 여기저기에 누워 있었다. 성기사들은 그 안에 모두 합성 마검이 담겨 있으리라고 쉽사리 짐작해냈다.
“아시다시피, 날씨가 점점 좋아진 덕에 작년부터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섞인 검도 만들어 낼 수가 있었습니다.”
공방장이 설명했다.
“다만 써 주실 기사님이 계시질 않아서요. 아무리 탁월한 성기사라 해도 운용하기는커녕 손에 잡기만 해도 잠식되어 버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듣기로 이제 프란첸 경께서는…….”
“실험해 보지요.”
막시밀리안이 장갑을 낀 손으로 개중 가장 큰 상자 하나를 손짓해 가리켰다. 공방장이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수납장에서 상자를 끄집어 냈고, 옆의 조금 더 넓은 방으로 옮겨 가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젊은 여단장이 탁자 쪽으로 다가가자 성기사들이 공방장을 제 뒤로 돌리며 그 주변으로 간격을 벌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섰다. 아까 움베르토의 연구소 실험실에서와 마찬가지 태세다.
막시밀리안은 상자를 묶은 봉인을 풀고, 다시 상자 속 검집에 칭칭 감겨 있는 사슬 봉인을 풀었다. 두 봉인을 모두 다 정리해서 상자 속에 내려놓은 후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곧고 넓은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성기사들의 몸이 긴장해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청년은 피식 웃었고,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상자와 탁자를 한꺼번에 두 동강 냈다. 조각난 사슬 봉인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 있던 공방장에게 막시밀리안이 부탁했다. 검을 등에 지고 다니다가도 쉽게 어깨 쪽으로 올려 뽑아 들 수 있게끔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공방장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다른 검집과 걸이 끈을 가져오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성황이 그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선포했다.
“마검의 복속에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눈을 내리감으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이제 이 검은 경의 새로운 발톱이자 이빨이 되었으니, 그 몸을 주인으로서 통솔하고 아껴 주시길.”
“……괜찮으십니까?”
성황이 뱉은 말의 여운이 가신 지 한참이 지나서야 성기사 중 한 명이 겨우 입 밖으로 말을 내었다. 막시밀리안이 돌아보며 끄덕거렸다.
“괜찮습니다.”
“아까 공방장이 열두 마리가 섞인 검이라고 하던데요.”
“예. 하지만 사센 경의 말씀대로입니다. 제 몸 자체가 마물과 섞이고 나니 검이 저를 동료로 착각하는군요.”
성기사들은 강화 기사가 깊은 눈매를 휘며 소년같이 웃는 걸 보았다.
“복속이 비교도 되지 않게 쉬워졌습니다. 전에 다섯 마리가 섞인 걸 복속시켰을 때보다도 오히려 수월했습니다.”
질문을 던졌던 성기사는 문득 저도 강화 시술을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리를 저었다. 이 젊은 여단장은 맨몸으로도 이미 다섯 마리짜리 합성 마검을 복속시킬 수 있는 자였다.
게다가 아까 실험실에서 보지 않았는가. 무서운 몸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단련을 시작했던 건지, 얼마나 극의를 이룬 건지 모르겠다. 청동빛으로 그늘진 근육의 섬유 하나하나와 고요한 호흡의 결이 곧 제 혼이며 의지인 것 같은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 성기사의 손가락 하나라도 제멋대로 비끗해 버리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는 오직 그런 생애만을 살아 왔을 것이다.
공방장이 가져온 장치를 받아 막시밀리안은 능숙하게 제 상체에 끈을 조이고 대검을 칼집째 등에 걸쳤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성황을 먼저 궁으로 모신 후 성기사 여섯 명과 함께 제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오늘까지만은 막시밀리안의 곁에 내내 머무르며 그를 감시할 예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 문제 없이 시간이 지나갔고, 소식을 받은 모두가 부푼 마음으로 새 희망에 들뜬 채 내일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 여단장은 당장 내일부터 다시 수도 외곽 방어전에 투입된다.
수도 북부 구역의 숲속에서 스물한 살의 하얀 청년만이 한기에 떨며 꿈에서 깨어났다.
요른은 창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숲은 고요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소스라쳐 깨어난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는 일어나 창으로 다가갔고, 커튼을 열려고 노력해 보다가 웃으며 손을 바꿔 올렸다. 왼손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는 걸 자꾸 잊어버린다. 하지만 오른손에도 떨림이 남아 생각처럼 정교하게 움직이질 않았다.
‘무슨 꿈을 꾼 거지.’
요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사고 전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악몽을 꾸더라도 최소한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육 년 전, 움베르토의 연구소에서 사고가 난 후 요른은 한 달간 성황국 병동에 입원했다. 첫 2주는 아예 의식이 없었고 나머지 2주는 상태를 지켜보느라 머물렀다. 그 마지막 2주가 다 지나가기 전 움베르토가 병실로 찾아와서 말하자면 해고를 통지했다.
요른은 서운한 마음에 차서 그 외눈박이 연구소장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눈도 못 들고 그저 명을 받아들이기만 했을 테지만, 움베르토에게는 왠지 그럴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요른은 문득 그가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데다가, 무릎을 긴 천으로 덮어 가려 놓기는 했지만, 발목 아래로는 나무둥치 같은 것만 삐죽 튀어나와 있다는 걸 눈치채고 놀랐다.
[나도 말하자면 사고를 당했어.]
움베르토가 시선을 눈치채자 웃으며 말했다.
요른이 입만 반쯤 벌리고 있자, 움베르토는 곧 그에게 연구소 사고 당시의 일이 어디까지 기억이 나느냐고 물어 왔다. 요른은 치료사들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날 밤 실험실에서의 일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고의 후유증인지 그 직전 며칠 동안의 기억도 희미하다고. 움베르토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별로 좋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기억하지 마.]
[예…….]
[아무튼 연구소는 임시 폐쇄에, 너는 특히 너무 잘 섞여서 위험하니까 아예 해고하기로 했어. 몸조리 잘하고 앞으로는 너 졸업 후에 하고 싶다는 그거, 뭐더라. 마법사 파트너 시험에나 집중해.]
요른은 끄덕거렸지만 아무래도 섭섭했다. 최고의 피험체라고 매번 맨손으로 머리까지 쓰다듬으면서 칭찬해 줘 놓고는 이렇게 팽하다니. 그래도 움베르토가 다리가 잘린 채 앉아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큰일이 벌어졌던 거 같아서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센 씨.]
대신에 요른은 진심을 담아서 전했다.
[그래. 너야말로 잘 돌아왔다.]
무심결에 흘린 말인 듯했지만 요른은 순간 번쩍 귀가 트였다.
[돌아왔, 다고요?]
[어?]
[저, 돌아온, 건가요?]
[응.]
움베르토가 픽 웃으며 답했다. 요른은 머뭇거리다가 재차 물었다.
[마물에 잠식되었다가 돌아온 거야. 돌아온 사람들도 너 말고도 몇 명 있어. 말했듯이 날씨가 참 이상한 밤이었거든. 개중에 네가 제일 크게 다쳤는데도 제일 멀쩡하게 돌아왔어. 흉터야 남겠지만, 기적으로 알고 살아.]
요른은 새삼 양팔을 들어 살펴보았다. 손에는 가벼운 상처만 남았지만, 양 팔목부터 어깨까지는 톱날로 찢었다가 억지로 접붙인 것 같은 흔적이 깊이 파이거나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다리나 몸체도 비슷하게 엉망진창인 걸 간병인이 몸을 닦아 줄 때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 꼴로 돌아왔고 살아남았다. 요른은 움베르토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사센 씨.]
[내가 아니라니까. 날씨 덕분이라고, 날씨.]
[혹시, 돌아오는 거, 실험하고 싶으시면요. 도와드릴게요.]
[응?]
[제가 제일 멀쩡, 하게 돌아왔다고 하셨잖아요. 잠식된 사람 돌아오는 건 불가능, 하다고 알려진, 일인데, 일어난 거잖아요? 계속 실험하고 싶으시면요, 제 몸에 다시 한번 섞어서…….]
[너 해고라니까.]
움베르토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은 고맙다만 현재로서는 실험하는 거 자체의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쉬기나 해라.]
말하더니 옛 상사는 바퀴 의자의 방향을 돌려 방을 나갈 채비를 했다. 요른은 입술을 자근거렸다. 그에게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움베르토가 먼저 떠올린 듯 돌아보며 전해 주었다.
[아 참, 걱정하지 마. 막시밀리안은 몰라.]
요른은 기쁨에 심장이 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정말로요?]
[그래. 그냥 내가 널 맘에 들어 해서 연구소에서 견습 직원처럼 가르쳤던 건 줄 알아. 그러다가 이번 사고에 휘말렸다고 말이야.]
움베르토는 씩 웃더니 이번에야말로 바퀴 의자를 제법 능숙하게 돌돌 굴려서 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요른은 한숨을 내쉬었고,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그렇게 실험이 중지된 후 요른은 악몽은 꾸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요른은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다. 훈장을 껴안지 않고도 잠들 수 있었고, 붕 뜨는 듯한 느낌도 사라졌다.
하지만 몇 달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곧 자신이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뿐이었다. 일어나면 등이 차가웠고 머릿속이 눅진거렸다. 가끔 꿈의 내용을 되새겨 보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스스로 걸어 잠근 문에 막힌 듯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평소라면 그냥 세수 한번 하고 털어 버리면 족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어나서도 한참 동안 기분이 나쁜 날이 꼭 한 번씩 있는데, 오늘은 특히 심했다. 요른은 간신히 커튼을 젖히고 창문도 열고는 햇살에 물든 공기를 숨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요른은 그날 느지막이 마도 학원에 출근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기 전 늦오후에야 도서관에 들러 황국 신문을 훑어보았고, 따로 끼워 놓은 호외에서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 새벽에 강화 시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꿈이 남긴 불길한 기운이 겹치며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그러나 요른이 도서관을 뜨려던 순간 어린 직원이 새 호외를 가져와서 신문 전시대 곳곳에 끼워 놓았다. 시술은 성공했다! 새 몸을 얻은 프란첸 경은 열두 마리 마물이 섞인, 거의 성검을 방불케 하는 합성 마검마저 복속시켰으며, 내일부터 당장 전장에 투입될 것이다.
도서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호외를 집어 들고 눈이 빠져라 읽어 나갔고, 정숙 지침이고 뭐고 서로를 재촉하듯 말을 쏘아 대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요른은 무심코 한 장 갖고 나가려다가 직원의 제지를 받았고, 도로 전시대에 내려놓은 후 비틀거리며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센 경의 연구가 성공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워낙 급한 시국이니 바로 기사에게 시술을 한 건 이해는 가지만, 왜 막시밀리안을 맨 처음으로 했지. 요른은 컴컴한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폰 크라우스 경이 첫 대상자가 될 거라고 들었는데.
시술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 기적적인 소식이 이상하게 요른의 맥박을 어둡게 물들였다. 그는 마차를 타고 바로 막시의 성으로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거기 있을지, 아니면 내일 출진을 대비하느라 황성이나 병영에 가 있을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요른은 하릴없이 제 사택으로 돌아갔다. 헤매듯이 발을 옮기느라 평소보다 더 걸음이 늦었다. 통나무를 잘라 벽을 쌓아 올린, 거의 오두막 같은 볼품없는 건물이 눈에 비칠쯤이 되자 그 곁에 흑마가 한 마리 풀을 뜯고 있는 것도 보였다.
익숙한 인영이 말 근처의 나무 그늘에 서 있다가 제 쪽에서 먼저 요른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요른은 걸음을 재촉했다.
“막시.”
늘 그렇듯 요른은 달려오다가도 막시의 발 두 걸음 앞쯤에서 딱 멈춰 섰고, 그제야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괜찮아?”
“뭐가?”
“시술받았다고 들어서…….”
“응. 새 검도 받았어.”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등에 멘 검 손잡이를 보여 주었다.
“내일 출정이야. 넌 한참 병동에 있었지? 그쪽 치료술사한테서 얘기 들었어.”
“응.”
“이 검은 열두 마리가 섞였다던데. 네가 설계한 검이야?”
“응.”
요른이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쑥스러웠지만, 막시가 칭찬해 주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눈을 내리깔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역시나 말해 주었다.
“그래. 잘했어.”
“내일, 너무 빠르지 않아? 새 몸으로 싸워 본 적 없잖아. 대련이라도 충분히 해 보고 가지.”
막시밀리안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요른도 입을 다물었다.
마물들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수도 성 밖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리 지어 마을을 유린하는 데다가, 성벽을 공격하는 경우마저 생겨나고 있다. 막시는 오늘 하루를 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아플 것이다.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요른은 문득 막시밀리안이 허벅지 옆에서 주먹을 살짝 쥐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눈을 들어 보자 그의 시선은 요른의 왼손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표정을 지우고 물어 왔다.
“오래 못 만났지? 이번 출정 전에 확인해 보려고 왔어. 잘 지내고 있어?”
“응, 응.”
“왼손은 잘했어.”
막시밀리안이 잘라 말했다.
“못 쓰게 되었다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응…….”
“그래. 네 마법은 너무 위험하니까, 그렇게라도 전장에서 빠지는 게 나아. 이제 원하던 대로 마검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겠네.”
“응, 응.”
“그래. 나도…….”
막시밀리안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턱을 꽉 무는 듯했지만 결국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만 떠올렸다.
“……꼭 이길게.”
그러나 목소리는 날 것을 토해 내듯이 거칠었다.
요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막시밀리안은 몸을 돌려 가볍게 말에 올랐고, 인사도 없이 사라져 갔다. 한참 동안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요른도 천천히 집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가 왜 굳이 다녀간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건실한 모습을 보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문을 여는 찰나 그 목소리의 잔상이 속삭였다. 이길게.
내내 불길하게 남아 있던 어둠이 순간 기쁨과도 같은 온기로 변해 마음을 뒤틀었다. 아니, 그 기쁨이 다시 불길한 색을 띤 듯도 했다. 요른은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막시밀리안은 다음 날 수하 기병 두 부대를 이끌고 남쪽의 마을로 출진했다.
사실 ‘예전에 마을이었던 곳’이라고 칭하는 게 옳다. 주민은 삼분지 일은 죽고 나머지는 다른 마을로 옮겨 갔으며, 농지는 버려진 채 남은 작물들도 곯아 빠졌다. 가축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썩어 가고 있었다. 마물 몇 마리가 시신의 썩은 부분과 싱싱한 부분을 가리지 않고 씹다가 고개를 들어 병사들을 보았다.
막시밀리안은 부대장들에게 손짓한 후 자신은 말에서 내렸다. 그는 자기 몸의 변화를 잘 가늠하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전투마라 해도 그의 움직임을 버텨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날고 달리고 기는 마물 수십 마리가 곧 몰려들었고, 몇 마리는 제 동료들을 부르려고 허공을 향해 짖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가 그 고성을 사방 곳곳에 더욱 증폭시켜 퍼뜨려 주고 있으리라.
박쥐와 표범, 늑대가 섞인 모습을 한 마물이 높은 곳에서부터 독수리처럼 휘돌다가 짓쳐 내렸고, 막시밀리안이 대검을 쥔 채 마주 베었다.
“사람이 아니야.”
지켜보고 있던 병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젊은 여단장은 그날 혼자서 마물 여든일곱 마리를 베었다. 땅에서 베다가 뛰어올라 날개 달린 서너 마리의 등을 이리저리 번갈아 거닐며 나머지 나는 것들을 베었고, 키 몇 배는 넘는 높이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면서도 어디 하나 삐끗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발 달린 것들을 가격했다.
“미친놈.”
함께 왔던 베스퍼가 웃으며 뇌까렸다. 파트너 마법사들과 협력해 흑마법사 한 명을 추적해 포박한 후였다.
성황국이 다시 승기를 잡은 날이었다.
* * *
막시밀리안이 세 번째로 출진해서 승리를 거두었던 날, 성내에서는 간단한 개선식이 있었다. 축포를 쏘거나 불빛을 쏘아 올리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은 알아서 기사단을 맞으며 들꽃이라도 꺾어 던졌고, 대륙 첫 강화 기사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용사’라고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두 달 뒤 수도 성기사단은 주변 마을 대부분을 수복하고 남쪽 요새 두 개를 탈환했다. 방어전은 점점 더 탈환전의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말 그대로 투신처럼 싸우며 승승장구했다. 부상도 없이 하루에 세 자릿수의 마물을 베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어 갔다. 그러나 전쟁이 탈환전으로 돌아선 건 막시밀리안 혼자만의 공은 아니었다. 그가 성공하자 다른 성기사들도 곧 차례차례 시술을 받은 덕이다.
움베르토는 다른 성기사들의 몸에는 막시밀리안처럼 강한 마물을 넣지는 않았다. 버틸 만한 신체도 정신력도 아니었다. 맞춰서 시술했는데도 가끔 버티지 못하고 잠식되어 버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성공률은 높았다. 강화 기사들이 속속들이 탄생해 전공을 세웠다.
반면 연구소장은 막시밀리안을 때때로 다시 불러다가 조금씩 더 섞어 주곤 했다. 그는 이제 스무 마리가 섞인 마검도 다루었으며, 맨몸으로도 마물에 어느 정도는 맞설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성안의 시민들은 물론 일반병, 그리고 곧 성기사들도 막시밀리안을 용사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움베르토의 연구소도 칭송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기뻐하는 건 아니었다. 강화 시술을 처음부터 반대했던 보수파 귀족과 일부 시민은 머리를 저으며 삐딱하게 굴었다.
“용사는 무슨. 저게 사람이야? 마물이지.”
막시밀리안이 귀성할 때면 자발적으로 몰려드는 민중의 틈에 섞여 그들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저 몸에 섞여 든 게 대체 몇 마리째야. 게다가 매번 ‘날씨’가 좋은 날에 시술을 한다면서. 마왕의 힘으로 마물에 맞서는 건데, 성황이 옳다면 정령한테서 천벌을 받을 일 아닌가?”
“맞아. 이게 오래 갈 싸움이야?”
하나가 말하면 하나가 받아 외치는 게 수순이었다.
“똑같이 마왕의 힘을 쓰는 거면 결국은 저쪽이 더 강할걸!”
수도 시민 대부분이 용사님을 원호하며 박수를 보내긴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섞여 괴물이라고 야유하는 자들도, 그에 흔들리는 자들도 분명 있었다.
성황도, 마도 협회도 이런 불평분자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그 위험도 인지하고 있었다. 필립 블랑쇼가 흑마법사들을 지휘해서 여전히 수도까지도 선동문을 보내오는 가운데, 내부에서 불만이 커지면 정말로 안에서부터 문을 열어 주는 배신자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문헌학자들은 성검의 강림 시기를 찾기 위해 온갖 고문서를 다 뒤졌다. 성검이 강림해서 막시밀리안이 진짜 용사가 되면 다 해결될 일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찾고 찾다가 신음하며 제 머리만 감싸 쥐곤 했다.
“강림한다는 예언만 있고 도무지 언제 나타난다는 소리는 없어.”
최근에 더 간절하게 애를 써서 그렇지, 십여 년 전 용사 전설을 해석해 낸 후부터 학자들은 계속 노력해 오긴 했다. 대체 이 성검이란 건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건지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서들을 뒤져봤자 뻔한 소리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신실하게’ ‘노력하며’ ‘승리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 ‘가장 힘든 시기에’ 성검은 강림한다.
“장난하냐고, 이 고대인이란 작자들도.”
문헌학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한 달쯤이 더 흐르자 일이 터졌다.
성공적으로 시술을 받았던 성기사들이 잠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움베르토는 기사들이 제 몸에 비해 너무 강한 마검을 쓰기 시작한 걸 패인으로 보았다. 마물이 섞인 몸은 마검을 쉽게 복속시킬 수 있지만, 잠식되었을 때의 부작용도 크다. 이미 몸에 섞인 마물 조각을 매개 삼아 훨씬 더 쉽게 침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항변했다. 아무리 이쪽이 강해져 봤자 마물들도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그것들을 상대하려면 가능한 한 가장 강한 물건을 골라잡고 무리하는 수밖에 없다.
움베르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화 기사들은 늘 공방에서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합성 마검을 받아 들고 전장을 달렸고, 싸우던 도중에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잠식되어 버리곤 했다. 수십 마리의 마물이 뒤섞인 거대하고 끔찍한 몰골이 되어 울부짖으며 그들은 방금까지도 곁에서 같이 싸우던 병사들을 갈가리 찢고 우적우적 먹어 치웠다.
수도 내에서 불만과 항의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강화 기사들이 승리하고 돌아와도 시민들은 전처럼 가까이서 환호를 내지르지는 않았다. 멀찍이 물러서서 절제된 박수 소리만 내며 응원의 뜻을 내비쳤을 뿐이다. 가끔 몇 명씩 꼭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좋은 마물 병사를 만들어서 내어 주고 왔군!”
“훌륭해, 성황국 마도 협회는 마물 편인가 봐!”
성기사들은 못 들은 척 행군했지만 그들도 알고는 있었다. 강화 기사들은 엄청나게 강력한 마물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다음번에는 적으로 돌아오리라.
잠식율이 너무 커지고, 득보다 실이 앞선다고 판단하자 성황은 강화를 중지시키고 움베르토의 연구소도 폐쇄했다. 막시밀리안이 시술을 받은 지 딱 넉 달만의 일이었다.
남은 강화 기사들만 죽도록 싸우다가 하나씩 잠식을 일으켰고, 결국 한 달쯤 후에는 막시밀리안만 남기고 모두가 마물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불평분자들도 이 단 하나 남은 강화 기사에게는 나름의 존경을 표했다. 그 스물여섯 살의 청년은 전장에서는 사라져 버린 동료들의 몫을 다 하겠다는 듯 괴물같이 날뛰었지만, 개선해서 돌아올 때는 똑바로 말 위에 앉아 시민에게 고루 웃으며 인사했고, 화환도 하나하나 받아 주었다. 성 내에 돌아와서는 제 사비를 털어 시민과 사병에게 식량과 술을 나눠 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전투 보고서도 꼬박꼬박 정갈하게 써서 올렸다.
“인간이 아니지.”
귀족들은 좀 다른 의미로 평하며 웃어 버리곤 했다.
아직 성검만 받지 못한, 그 여러모로 준비된 ‘용사’가 시술을 받은 지 반년. 탈환전은 다시 수도 방어전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매일매일 성벽을 갉아 대는 마물들에 맞서고, 병사들을 수도 없이 잃고 성내로 퇴각하면서 시간은 절망적으로 흘렀다.
그래도 막시밀리안 개인만은 한 번도 패배를 겪지 않았다. 그는 이제 서른두 마리 마물이 섞인 마검을 휘둘렀고, 마치 진짜 성검처럼 그 검은 거의 모든 마물을 검불처럼 베어 넘겼다. 다만 전체 형세가 나빠지면 그도 검을 거두고 동료를 지키며 퇴각할 뿐이었다.
시민들도 귀족들도 성검이 강림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저 용사가 부디 자신에게 걸맞은 반려를 맞기를.
막시밀리안마저 잠식되어 버리면 답이 없다. 저 용사가 아직 저렇게 건실할 때, 바로 이 순간에, 부디 성검이 그에게 내려지기를.
그래서 베스퍼는 차마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 막시밀리안마저 잠식되기 시작했을 때.
전장 한가운데에서 그 몸이 변하기 시작했을 때.
[막시밀리안?]
베스퍼가 급히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그 용사는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순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을 끈 게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베스퍼도 따라서 올려다보았지만, 마물도 아니고, 흔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생김이 잘 보이지도 않게 높이 올라가 청명한 하늘에 별처럼 반짝이는 새.
그때 허공에서부터 마물이 덮쳤고, 막시밀리안은 급히 쳐냈다. 그러나 그의 오른팔이 마검에 먹혀 변하기 시작했다.
베스퍼는 용사의 몸 반쪽을 망토와 깃발로 가린 후 말에 태웠고, 성기사 둘을 불러 성내로 데려가라고 시켰다. 막시밀리안이 제 안에서 싸우며 버텨 주어서 다행히 잠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되었고, 그가 아직 몸을 가눌 수 있을 때 움베르토의 연구소까지 실어 보낼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폐쇄된 연구소라도 피험체와 기타 자료를 정리해야 했기에, 일부 직원은 남아 있었다. 전 연구소장도 연락을 받고 얼른 입구로 나왔다.
베스퍼가 딸려 보냈던 성기사 두 명 중 한 명이 저녁에 병영으로 돌아와 사령관실을 찾았다. 그들은 막시밀리안을 연구소 지하 2층의 감방에 가두고 가장 두꺼운 사슬로 몇 겹이나 묶어 두었다고 전했다. 여전히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제정신인 데다가, 몸도 삼분지 일 정도밖에 변형되지 않았단다.
“굉장히 열심히 싸우고 계세요. 잠식자가 돌아오는 게 전례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분이라면 혹시나 해서……. 프란첸 경 본인도 기다려 주길 원하셨습니다. 지하에 구속해 두고 저희가 교대로 감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
베스퍼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 성기사를 베었다.
파수꾼을 두는 건 의미가 없다. 막시밀리안이 마물로 변하면, 강화 시술도 받지 못한 이런 성기사들로는 어차피 상대도 안 된다. 어쩌면 막시밀리안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목격자 숫자나 줄여 두는 게 낫다. 베스퍼는 연구소 지하실로 찾아가서 감방 안을 지키고 서 있던 성기사도 마저 베었다.
“마왕이라도 되어 버리는 거 아닌가.”
검에서 피를 닦은 후, 베스퍼는 벽에 묶여 신음하는 막시밀리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이제 어쩔 겁니까, 용사여.”
별 기대 없이 물은 거였는데 상대의 뭉개진 입술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스퍼는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요?”
“성검은, 강림, 합, 니다.”
막시밀리안이 목에서 금속음을 울려 냈다.
“제, 제가 져도, 성검은, 강림합니다. 믿어 주십, 믿음, 잃지 말고, 부디.”
“미친.”
베스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당신 대신 그거 들고 세상이라도 구하라고?”
뱉다가 베스퍼는 흠칫했다. 얼굴을 녹이듯이 울음이 청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를, 구해, 주세요.”
핏물에 가까운 눈물을 삼키며 혀가 움직였다.
“용사가, 되어 주십, 크라우스, 경. 누, 누구도 그런 짐을, 지면 안 돼. 그를 구해 줘.”
“뭐라는 거야.”
“마왕.”
막시밀리안이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모두 끌어 청했다.
“그, 그가 마왕이 되지 않게, 해, 주십, 그를 구해, 줘. 누구라도, 용사가 되어 줘. 제, 제발, 그에게 다른, 미래를.”
그러나 숨이 뭉크러지더니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입 속이 변형되면서 더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듣고 있다 못해서 베스퍼는 연구소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그 아름다운 청년이 변형되어 가는 꼴이며 그 신음에 간질간질하게 흥분해 버린 스스로를 허탈하게 비웃으면서, 감방문뿐만이 아니라 복도의 문까지도 이중 삼중으로 잠근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