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음 날 학원은 시끄러웠다. 막시밀리안이 간밤에 어떤 급보를 받고 행군 중에 학원에 돌아왔으며, 기습당해서 얼굴을 심하게 다쳤다는 것이다.
“아니, 아니지.”
복도에서 생도 하나가 자기 친구가 떠드는 말을 교정해 주었다.
“그게 아니야. 급보 자체가 가짜였고 기습을 위한 미끼였다는 거야.”
“누가 한 짓이래?”
“글쎄. 라이벌 가문 아닐까? 프란첸가는 막시밀리안이 없으면 대가 끊기잖아. 방계를 데려올 수야 있겠지만, 직계는…….”
“그런데 막시밀리안 정도 되는 애를 부상을 입혔다고?”
“기습했으니까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마법을 썼다는데. 아 참, 어제 학교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어. 여럿이 똑같은 환청을 들었다나? 그냥 자기 생각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서로 얘기하다 보니까 아닌 거 같았다는 거야. 기이한 환각을 봤다는 애들도 있고.”
“그러면 막시밀리안이 듣고 돌아왔다는 급보 자체도 환각이나 환청이었다는 거야? 혹시 공격 마법도……?”
떠들면서 학생들 머릿속을 비슷비슷한 생각이 떠돌았다. 흑마법사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흑마법사들은 저 멀리 검은 숲속에서만 산다고 들었다. 하지만 혹시 그들도 막시밀리안을 용사 후보라고 생각해서 특별한 계획이라도 짰던 걸까?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 두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그런 시도를 했다면, 그거야말로 막시밀리안이 진짜로 미래에 용사가 될 수도 있다는 증거 아닐까?
학생들이 다들 제멋대로 생각하며 떠드는 동안 막시밀리안과 필립은 학생처장실에서 교장, 교감과 학생처장 앞에 서너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었다. 둘 다 뒷짐을 진 채였고 막시밀리안은 얼굴 한쪽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교장이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재차 물었다.
“요른이 아프다는 급보를 받고 되돌아왔다고? 그게 그럴 만한 소식은 아니지 않나?”
“그 애는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어젯밤에 응급 처치를 받은 후 오전에도 교수들이 애써 준 덕분에 목과 입은 제법 회복된 상태였고, 그래서 어느 정도 또렷하게 혀를 놀릴 수가 있었다.
여느 학생이라면 몇 시간 만에 이 정도로 회복되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폰 프란첸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프란첸에 고용된 치료사들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몸을 이루는 기초 성분을 분석해서 타블로상에 표기했고, 학원에 입학하자 교수와 강사들에게도 자료 일부를 전달했다.
덕분에 막시밀리안은 학원 내에서는 언제든 거의 맞춤형 회복 마법을 제공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이어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요른은 몸이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회복 마법이 잘 듣지 않으니 조금만 아파도 쉽게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결과적으로 저희 집안에서 주었던 벌 때문에 아팠던 겁니다. 그러니 책임감을 느껴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정도 기회를 포기했단 말인가?”
“이건 제가 보다 일찍 진학할 기회였을 뿐입니다. 제 존재가 전투 자체를 위해 의미가 있는 출진이었다면 저도 다르게 생각했을 겁니다.”
“알겠네.”
교장은 성기사 학원으로의 조기 진학생을 십사 년 만에 다시 한번 배출할 꿈을 놓쳐 버린 게 못내 아쉬웠다. 사실 막시밀리안은 십사 년 정도가 아니라 오십 년 만의 최연소 진학생이 될 수도 있었고, 교장은 작년에 큰 꿈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 꿈은 막시밀리안 본인의 의사에 따라 파기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올해는 차질 없이 돌아가겠거니 했는데 또 이 모양이라니 교장은 아무래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그는 한숨이나 혼자서 한번 깊이 내쉬고 털어 버리기로 하고는 운을 떼었다.
“그래. 벌을 준 것 때문에 애가 아파 버렸다니, 자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지만 심정은 이해할 만하네. 투트 크라흐트 양한테서도 들었지만 요른은 또 학원에서 도둑질을 했던 건가?”
“예. 습관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장의 질문을 듣고 필립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교장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요른은 원래 빈민가에 살던 애다. 손버릇이 나빴는데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모양이다.
3년 전, 그 애가 입학했을 때부터 왠지 교내에서 금품이나 귀한 물건, 돈을 잃어버렸다는 신고가 잦아졌다. 막시밀리안을 교장실로 불러서 한번 떠보았더니 요른은 프란첸가의 성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는 것이다. 집안의 돈이나 손님들 물건에 손을 대곤 했다고.
“그래서 저희는…… 그 애한테 체형을 줄 때가 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그때 드물게 미간을 찌푸린 채로 괴로운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말로 다스리려고 했습니다만, 고쳐지지 않아서요. 아시다시피 시내에서 경찰은 평민 소매치기범, 특히 아이들을 채찍으로 다스립니다. 야만적인 듯하지만 배운 게 적은 평민 어린애들에게는 그편이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때려서 습관을 들이는 게…… 제일 낫다고요.”
막시밀리안은 교장에게 그렇게 털어놓고는, 그래서 자신도 경찰의 방법을 따라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 후 요른이 반성하면서 집 안에서는 도둑질을 덜 했다는 것이다. 교장도 경찰이 시내의 꼬마 도둑들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아 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시밀리안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애가 내쫓길 수도 있으니까요. 제 선에서 벌을 주며 교화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성안에서는 한동안 괜찮았는데, 학원처럼 사람이 많고 탁 트인 곳에 오니 오히려 옛 생각이 났나 봅니다. 제가 다시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에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평소에는 밝고 절도 있는 모습만 보여 주던 막시밀리안이 하도 괴롭게 이야기해서 교장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막시밀리안에게 요른의 손버릇에 대해 다른 강사나 교수들에게는 얘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만약을 위해 교감과 학생처장까지만 언질을 줘 두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막시밀리안도 그에는 동의했다.
‘막시밀리안이 그렇게 약속하고 간 후로 확실히 신고가 줄었었는데.’
그러나 린다 투트 크라흐트가 아까 증언을 해 주고 떠난 바에 따르면 며칠 전에도 요른은 그녀의 장신구 하나를 훔쳤고, 막시밀리안이 그 현장을 목격해서 성으로 데려가 여느 때처럼 적절한 벌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가 감기에 걸려서 몸이 약해져 있던 걸 모르고 때렸더니 그만 심하게 아파 버린 거다.
‘또 도둑질이라.’
교장은 무심코 턱을 만지작거렸다. 요른이 입학한 지도 벌써 3년인데 아직도 손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 하긴 그런 손버릇은 어떤 중독 같은 거라 고쳐지기 어렵다고 듣기는 했다.
‘이래서 평민을 이 학교에 들이는 건 좀 위험하다고 했는데. 개중에도 빈민가 출신은 정말 들어맞지가 않아.’
교장은 요른이 입학한 후 수십 번은 더 했던 생각을 또 반복했지만 프란첸 공작 부인을 생각하며 참았다. 요른이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고, 워낙 재능이 귀한 시대이기는 하니까.
교장이 고민하는 동안 필립은 주먹을 등 뒤로 꽉 쥔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요른이 도둑질을 했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3년 내내 막시밀리안이 다른 학생들과 작당해서 그 애한테 누명을 씌워 온 거다. 만약 채찍 자국이나 다른 상처가 들켜도 너무 이상하게는 보이지는 않게 말이다.
‘애 하나를 맘을 놓고 잡으려고 별 온갖 준비를 다 해 뒀군.’
필립은 지난밤을 돌이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어젯밤 자신이 교수를 불러와서 요른의 몸에 새겨진 채찍 자국을 보여 줬다 해도 결국 소용이 없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교수가 보고를 올려 봤자 윗선에서 기각되었으리라.
필립은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문 채로도 손이 묶인 양 뒷짐만 지고 서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교장이나 다른 교수들은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를 듣느라 아직 필립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곧 어떤 시선이 쏟아질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필립은 어젯밤 강사 기숙사로 달려가서 회복 마법사를 불러왔다. 강사는 막시밀리안의 꼴을 보고 당연히 사정을 물었고,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을 저질러 놓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늘어놓는 인간으로 보일 게 뻔했다. 강사는 막시밀리안이 생각했던 대로 모든 게 다 필립의 짓이라고 짐작한 채 아침이 되자마자 학생처에 보고를 올렸다. 정오가 되기 전에 필립과 막시밀리안은 학생처장실로 소환되었다.
교장과 교감은 필립의 전력도 알고 있었다. 평민 중에서도 하필 페랑의 불손분자를 받게 된 게 불안해서 교장은 필립이 입학 신청을 했을 때부터 그의 뒷조사를 시작했고, 타국의 귀족과도 친분이 깊은 프란첸가에 도움을 요청했던 덕이다.
그 부모가 조사한 건지 자신이 직접 손댄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막시밀리안은 입학식 며칠 전에 교장에게 조사서를 보내왔고, 거기에는 필립이 열네 살 때 고티에 드 오귀스탱 후작의 차남에게 단검을 들이댔던 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조사서를 떠올리며 강사의 보고서를 읽었기에, 교장과 교감은 어젯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된 건지 이미 눈앞에서 다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교장은 마침내 필립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얌전히 손을 뒤로 돌리고 서 있는 키 큰 소년에게 물었다.
“자네는 채찍 자국 때문에 요른이 학대당했다고 믿어서 막시밀리안 군에게 화가 났던 거고?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가 공격 마법까지 썼고.”
“…….”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장이 가볍게 혀를 찼다.
“화가 난 것 자체는 사정을 모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왜 끝까지 대화로 풀려고 하지 않은 건가? 막시밀리안은 말로 해서 안 될 상대는 아니야.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그가 자네를 신분 문제로 무시하려 들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네. 혹시 그랬나? 그랬더라도 물론 이건 참작이 안 되는 일이지만.”
“아닙니다.”
필립은 대답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막시밀리안은 어쨌거나 끝까지 필립을 낮춰 보지는 않았다. 교장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혹시 뭔가 더 보탤 말이 더 있나?”
“없습니다.”
필립은 깨끗하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교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오늘 회의를 하고 결과를 알려 주겠네, 필립 블랑쇼 군. 하지만 아마 자네는 퇴학에 본국으로의 송환 처분까지 받을 가능성이 높아.”
학생처장이 손짓했다. 잠시 끼어들어도 되겠냐는 뜻이다. 교장이 허락하자 그녀는 운을 떼었다.
“블랑쇼 군, 혹시 또 앙심을 품을지 몰라서 말해 두겠는데, 이건 귀족과 평민의 문제가 아니야. 타국인이 그로쉔 왕국 공작가의 후계자를 살해할 뻔한 거야.”
말하다 보니 더 골치가 아파졌는지 미간에 주름이 깊어진 채였다.
“프란첸 군이 얼굴에 조금 화상을 입은 정도였다면 몰라. 하지만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지 않나. 이건 살인 미수로 볼 수밖에 없어. 그래도 학원 내에서 벌어진 일이고, 프란첸 군 본인이 자네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고 있으니 이 정도로 처리하려는 거야.”
필립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옆을 돌아보면 막시밀리안도 필립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웃음을 참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소년은 정확히 일이 이렇게 되기를 노렸던 것이리라. 필립이 정학이나 단순 퇴학도 아닌 본국 송환 처분을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제 얼굴을 태우면서 일부러 열기도 들이마셔 목까지 망쳐 놓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나를 믿었다.’
필립은 새삼 돌이켰다.
‘내가 뛰쳐나가서 사람을 제때 불러올 거라고 믿었어.’
막시밀리안은 실제로 거의 죽을 뻔했다. 필립이 당장 뛰쳐나가 사람을 불러오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망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제 자리에 똑바로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필립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떻게 보면 그는 제 목숨을 필립에게 맡겼던 셈이었다.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해, 필립.]
식당 뒤의 그 숲에서 했던 말은 과연 거짓이었을까.
학교의 높은 분들 앞에서 손을 밧줄로 묶인 양 뒷짐을 지고 서서, 두렵고 화가 난 채로도 필립은 한편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는 어제 자신이 피부로 느꼈던 감각을 되새겼다. 악의도 미움도 섞이지 않은 그저 필요에 의한 살의와 행동. 그러자 속에서부터 희미한 물음이 떠올랐다. 그는 요른을…….
그러나 교장이 손짓을 하는 바람에 그의 생각은 끊어져 버렸다. 교장은 필립에게 먼저 손짓을 해서 그를 내보냈고, 필립이 떠난 후 몇 분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막시밀리안도 내보냈다. 막시밀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필립의 선처를 부탁하는 아량까지 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피해자가 가해자와 나란히 복도를 걷고 싶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서 배려한 거였다.
당일 오후에 긴급 교수회의가 열렸다. 다음 날 아침, 결과를 담은 공문 두 장이 각각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과 필립 블랑쇼의 기숙사 우편함으로 발송되었다.
필립 블랑쇼는 제적 처리되었으며, 3일 후까지 퇴소하여 본국으로 떠나야 한다. 이후 페랑의 블랑쇼가는 그로쉔의 폰 프란첸가와 50일 내로 합의하여 후자에 상당한 금액을 보상으로 지불한다.
한편 학교 출판부에서는 공문을 작성하느라 바빴다. 학생들과 교수, 강사진, 직원들에게도 사건의 진상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멋대로 부푼 소문이 학교 담장 밖으로까지 빠져나가면 학원 관리의 문제가 되기에 서둘러야 했다.
막시밀리안의 부상에 대한 소문은 학생들 사이에서 겨우 하루 남짓 사이에 신종 음모론 같은 것으로까지 자라 있었다. 프란첸가의 그 유명한 독자를 암살하고 학원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검은 숲의 흑마법사들이 단체로 월북해 왔던 것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환청이나 환각 마법에 당했다는 애들 수도 끝도 없이 늘어서, 필립이 자신의 제적을 알리는 편지를 받아 들었을 때쯤에는 학원 애들 반은 다 자신이 그날 오후 환각을 겪었다고 서로서로에게 증언해 대고 있었다.
교장도 출판부장도 머리를 흔들었다. 애들은 원래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데다가, 시절이 시절이다. 전 같으면 아무리 어린애들이라도 단칼에 말도 안 된다고 자를 소리도 오히려 마치 비밀스러운 진실인 양 오히려 힘을 얻어 활개를 친다. 웬만한 공문으로는 이런 소란을 잠재울 수 없으리라.
그래서 출판부에서는 사건의 진실에 양념을 몇 숟갈 섞어 일부러 자극적으로 꾸며 냈다. 필립이 귀족을 혐오하고 막시밀리안이라는 인간 자체를 시기해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
요른이라는 폰 프란첸가의 피후원자 아이가 며칠 전부터 병이 나서 아팠다. 그 애는 좀 독한 감기에 걸려 열이 났던 것뿐이었는데, 필립 블랑쇼라는 페랑 출신 시민 유학생은 편견에 가득 찬 나머지 아무 근거도 없이 그걸 귀족 놈이 평민을 학대한 결과라고 믿어 버렸다.
그는 정의의 사자인 양 나서서 막시밀리안을 공격했고, 모욕을 주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겨냥해서 불 공격 마법을 썼다. 막시밀리안은 좁은 공간에서 혹시라도 필립이나 요른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할까 봐 거의 손가락 하나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얌전히 당하기만 했다.
출판부의 노련한 직원 둘이 서로 상의해 가면서 그런 내용의 공문을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양 생동감 있게 풀어내어 작성했다. 전령들이 이 공문을 교내 곳곳에 붙였고, 학원 신문 호외로도 돌렸다. 학생들은 핥듯이 읽으며 기꺼이 설득되었다.
그랬기에 3일 내내 필립은 거의 기숙사 방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교장도 그더러 교정을 돌아다니지 말고 방 안에서 귀국 채비만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방에만 있어도 창문 아래에서 가끔 썩은 과일을 던지는 학생들이 있었고, 문밖에서 괜히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부서질 듯이 복도 벽이나 문을 두드리는 애들, 낙서를 해 놓고 가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필립도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밤이 깊어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는 램프도 없이 후드만 하나 둘러쓰고 걸어 나와 요른의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쫓겨나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꼭 요른의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창문에 돌을 던져서 그 애가 잠시 내다보기만 해 줘도 좋다, 아니면 편지를 전하고 가면 된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요른의 이름으로 된 편지함은 막시밀리안이 검사할 테니까, 기숙사 건물 안까지 들어가서 방문 밑으로 밀어 넣고 가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애한테 전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 단 일부라도 실제로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명.’
필립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지난 며칠 필립에게 신경을 써 준, 사실 아주 많이 신경을 써 준 다른 한 명한테도 인사는 남기고 가는 게 옳다.
그러나 필립은 건물을 빠져나와 얼마 걷기도 전에 허공을 맴도는 불빛을 보았고, 거의 동시에 학생 몇에게 팔을 붙들렸다. 억센 손들이 팔을 비틀며 움켜잡았고 필립은 거의 신음할 뻔했다.
하지만 곧 금발의 여학생이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제 머리 위에 밝혀 두었던 불빛을 필립의 뺨 근처로 옮겼다. 필립은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희미하게 웃었고, 팔이 뒤틀려 잡힌 와중에도 어떻게든 공손하게 허리와 머리를 숙여 보였다.
“백작가 영애님.”
“또 어딜 가려는 거야.”
“영애님의 소관 사항이 아니실 텐데요.”
“상관이 있지. 네가 또 막시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어떻게 알고.”
“그걸 믿어?”
필립이 나직이 말하자 린다가 마치 기습당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불빛을 자기 얼굴 쪽에서 더 멀리 치워 버렸다.
“방으로 돌아가.”
“…….”
필립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부탁했다.
“한쪽 팔만 놓아 줄 수 있을까.”
린다가 찡그린 채로도 학생 한 명에게 턱짓해 보였다. 왼팔이 놓여 나자 필립은 말없이 품에서 네모나게 각이 잡힌 서류 휴대용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다른 애들 눈에 띄지 않게끔 밑으로 내려서 들었다.
린다도 눈치챘는지 불빛을 허공으로 조금 더 높이 올려 주었다. 필립은 린다에게 주머니를 건네주었고, 건네준 다음에는 가슴에 왼손 주먹을 올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원래는 오른손으로 하는 인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린다는 다른 애들을 시켜 필립을 도로 제 방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는 길 한쪽으로 물러났고, 빛의 조도를 조금 줄여 머리 위로 올린 채 아까 받았던 주머니의 단추를 풀었다.
주머니 안에는 편지 두 봉이 들어 있었다. 다소 두터운 한 봉은 요른 앞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하나, 얇고 판판한 봉투의 겉면에는 린다의 정식 성명이 쓰여 있었다. 린타 카롤리네 투트 크라흐트.
놀라울 정도로 정결하고 섬세한 장식체였다. 린다는 그쪽부터 먼저 꺼내 들었다.
봉투를 열자 허브향이 퍼졌다. 라벤더와 이름 모를 꽃들이 뒤섞인 향을 품은 상아색 편지지 한중간에는 역시나 훌륭한 장식체로 딱 한 문장만 새겨져 있었다.
<고마워.>
린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요른 앞으로 된 편지 봉투를 보고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필립은 어쨌거나 그녀를 믿고 편지를 넘겨준 것이다. 그러나 펼쳐 보고 나서 린다는 결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전해 줄 수는 없다.
<요른, 넌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자기 발로 서기만 하면 돼.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길…….>
“무책임한 소리를 하네.”
린다는 중얼거렸다. 편지 말미에는 필립의 페랑 자택 주소인 듯한 것이 따로 기입되어 있었다.
린다에게 썼던 것과는 달리 평범한 정서체다. 그러나 획은 가늘지만 힘이 있었고, 줄 간격이 정확하며 점 하나도 오해의 여지가 없이 명료했다. 나보다 훨씬 잘 쓰네. 생각하면서도 린다는 주문을 외워 허공에 작은 불꽃을 불러냈고 그 안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
불꽃이 편지를 먹어 들어갔다. 린다는 눈앞의 허공에서 막 타들어 가기 시작한 문구를 바라보았다. 요른, 네가 부르면 언제든, 어떻게든 올게. 이 주소로 연락해…….
말도 안 되지. 린다는 생각했다. 필립은 이제 아마 다시는 그로쉔 왕국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시골 마을이면 몰라도 주요 도시에는, 특히 프란첸가의 본성이 있는 이 수도에 입성이 허락될 리가 없다.
필립 자신도 모를 리는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오겠다는 거다. 말 그대로 어떻게든.
“……왜 그런 애한테.”
너든, 막시밀리안이든. 린다는 새카맣게 흩어지는 잿가루를 눈으로 좇으며 중얼거렸다.
* * *
이틀 후 새벽, 삯마차 한 대가 필립의 방이 있는 기숙사 건물 바로 앞에 섰다. 해가 뜨려면 두 시간도 더 남은 시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교문도 닫혀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몰래 떠나라고 학교 측에서 배려해 준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바로 이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일찍부터 깨어 있었다. 마차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학생들은 기숙사 건물에서 저마다 창으로 몸을 내밀고 허공에 마법으로 불빛을 밝혔고, 그럴 실력까지는 아직 안 되는 하급생은 램프를 들고 나와서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들은 야유하며 가끔 살상력은 없는, 그러나 냄새가 나쁜 뭔가를 마차 쪽으로 던졌다. 결국 직원들도 뛰쳐나와서 말리고 선생들한테 연락을 하러 서둘러 달려가면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필립은 일단 겨우 마차 안에 앉기는 했지만, 야유가 계속되자 울컥해서는 마차 속에 숨어 있느니 교문까지 걸어서 나가겠다고 하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마중하며 돕던 직원이 겨우 밖에서부터 마차 문을 붙잡아 막으면서 마부를 재촉했다.
필립을 태운 마차는 몹시도 빠른 속도로 달려 기숙사 부지를 빠져나갔고, 곧 학원 부지의 입구에 도착했으며, 동이 틀 때쯤에는 그로쉔 수도를 빠져나갔다.
요른은 제 방에서 자고 있다가 소란이 대충 진정되고 해가 중천에 떠오른 다음에야 눈을 떴다. 창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걸 잠결에 듣기는 했지만, 아직 열이 덜 식어서 꿈인지 아닌지조차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면서 그는 눈을 비볐다. 오래 자서 그런지 몸이 무거웠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가 요른은 깜짝 놀랐다. 막시밀리안이 반쪽짜리 마스크를 쓴 채로 침대 발치 바로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그는 요른에게 약간 부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붕대는 풀었지만 얼굴이 완전히 다 나으려면 닷새는 걸린다고 해서, 그동안은 학원 내 어린 학생들을 놀라게 하지 않게끔 오른편 얼굴에는 은제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로 했다.
요른은 눈을 깜빡이며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자신이 며칠이나 잔 건지, 막시가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출장 나간 곳에서 얼굴에 부상이라도 입어서 일찍 돌아온 걸까. 마스크에 가려진 왼눈 대신 오른쪽 눈으로만 요른을 바라보며 막시가 말했다.
“사흘 내리 잤어. 잘 잤니?”
“으, 응. 막시, 얼굴…….”
“그래.”
막시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회복 마법 쓰면서 일부러 푹 재워 둔 거야. 교수님이 아까 들렀다 가셨는데, 너 잘 낫고 있대.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다시 수업 들어가도 될 정도라고 하셨어.”
“그럼…….”
“필립은 이제 갔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대. 넌 다시 밖에 나가도 돼.”
요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금방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요른, 나랑 얘기해야 할 거 있지?”
“…….”
요른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막시밀리안이 다시 채근했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요른.”
“뭘, 언제…….”
“매년 네 생일 때마다 말해 주지 않았니? 남이 너 때문에 너무 큰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이어 갔다.
“지난번에 독초를 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야. 너 때문에 학생 하나가 살인자가 될 뻔했어. 그런데 이번에 또 카를한테 이런 짓을 했어?”
“나나, 나나난…….”
요른이 평소보다도 더 더듬으며 쏟아 냈다.
“몰랐어어, 다다친줄 모몰랐고, 다쳤, 어어도, 나나을 줄 아알고…….”
“다치기 전에 알아서 처신했어야지. 내가 뭐라고 했지, 요른?”
“난…….”
“네가 다시 외워 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한 예외가 둘 있지. 그 두 가지가 뭐야?”
요른은 막시가 매년 보여 줬던 그대로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웅얼거렸다. 타인에게 저항하면 안 된다. 언제나 그대로 따라라.
단, 남이 너를 죽일 거 같으면 막아 주어라. 또한 남이 너를 강간하려 들면 반드시 저항해라. 그럴 때는 금지 마법을 써서라도 막아 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혼이 너 때문에 죄로 물들어 망가지고 저주받는다. 요른이 다 외우고 나자 막시가 끄덕거렸다.
“그래. 그런데 또 안 지켰네.”
“…….”
“벌 받고 싶어?”
아이가 고개만 떨구고 있자 막시가 차근히 물었다. 요른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듯이 답했다.
“아아니야.”
“아니야? 그런데 왜 안 지켰어.”
“요용서해해, 줘.”
요른은 막시를 더는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개도 시선도 푹 떨구어 버렸다.
“잘못했어…….”
“너는 마음만 먹으면 사실 얼마든지 막아 줄 수 있잖아.”
막시밀리안은 냉랭하게 말했다.
“상대를 전혀 다치게 하지 않고도 행동만 막아 줄 수 있어. 그런데도 그냥 안 한 거네. 카를이 그렇게 밉니? 그 애가 살인자가 되어서 인생을 망치고, 정령한테도 영원히 저주받았으면 좋겠어? 아무리 너라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마음을 먹을 수가 있어.”
“아아냐, 그그런 거…….”
“아니면 내가 싫어서 그랬어?”
“아냐!”
요른이 악을 쓰듯이 답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 갔다.
“날 싫어해? 그래서 내가 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했구나.”
“아아냐, 그런 거거는 저정말 아니야.”
“예외 수칙 안 지키면 나랑 연 끊기로 했잖아. 그렇지? 네가 우리 집 피후원자든 아니든, 나랑 다시는 사석에서는 서로 안 보기로 했어.”
있는 힘을 다해서 부정하느라 요른은 어느새 고개를 번쩍 들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막시가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걸 벌로 하기로 정했잖아. 벌을 꼭 받고 싶어서 그랬구나.”
“아아냐, 그거, 아아, 냐, 자잘못해했어, 잘모못, 했어…….”
“요른.”
막시밀리안이 들릴 듯 말 듯 아주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난 네게 뭐든 다 해 줘. 공부도 가르쳐 주고 기억도 대신해 주고 벌도 주잖아. 네가 네 힘으로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뿐이야. 타인이 너 때문에 죄를 저지를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을 지켜 주는 거. 그런데 넌 그마저도 안 해. 이러면 나도 널 포기할 수밖에 없지. 나도…… 지친단 말이야.”
“그그때 너무 가갑자기라서, 나 내내가 그그렇게 많이 다칠 줄 모모르고…….”
“카를한테 얘기 들었어. 네 배를 찼다던데. 그날은 벌을 많이 줄 필요가 있어서 평소보다 훨씬 세게, 여러 번 찼다고 했어. 모르겠니? 그 애는 널 믿었어. 너무 위험한 상황이면 네가 막아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자기가 살인자가 될 수도 있을 위험마저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서 네게 벌을 준 거야. 카를은 너를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
막시밀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남의 신뢰를 배신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를 뻔한 거야.”
“일부러, 그그런 게 아아니야.”
“요른, 솔직히 말해 봐. 정말로 네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거 눈치 못 챘어? 애들이 널 때릴 때도 배를 그렇게까지 연달아서 차지는 않잖아. 카를 같은 단련된 기사 생도가 진심으로 걷어차면 단 몇 번이라도 너 정도 어린애는 죽을 수도 있어. 처음부터 훨씬 더 아프지 않았어?”
“그렇……기는…….”
“그래. 넌 알면서도 저항을 안 한 거지. 아니면 최소한 마르티넷으로 맞기 전에 내게 말해 줄 수 있지 않았니? 배가 아프니까 무리라고 말했어야지. 그러면 나는 당연히 벌을 미루고 치료사부터 찾았을 텐데. 너는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싶었던 거야?”
“아냐!”
“너는 내가 정말로 그렇게 밉니?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네. 나를 살인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벌을 받아서 나랑 연을 끊고 싶었던 거지. 노리고 그랬다고밖에는 못 보겠어.”
“아아니야, 그그런 거 저정말 아니야.”
요른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마막시, 나한테, 넌…….”
하지만 입술을 움직이자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막시는 자신에게 뭘까. 막시밀리안은 워낙 아름답고 훌륭했기 때문에 요른은 굳이 자신이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난파선 위에 떠 있는 북극성처럼 그는 이 세상에 있어 유일무이한 존재였고, 그건 요른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막시밀리안 본인의 성품이자 본질이었다.
지금도 막시는 잃어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별처럼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그건 요른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요른은 말을 잃고 그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도 요른을 물끄러미 마주 응시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요른은 얼른 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아 내고 더듬더듬 주워섬겼다.
“그냥, 구별이 자잘 안 돼. 예외라는 거……. 저항하하면 안 되지만 어떨 때는 꼭 해해야만 하 한다는 거. 드들으면 알겠는데, 실제 사상황이 되면 잘 구구별이 안 돼.”
“구별하는 감각을 길러.”
막시밀리안이 잘라 들었다.
“늘 네 몸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고 올바로 대처해. 요른, 내가 언제까지나 네게 모든 걸 하나하나 다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아냐. 다른 사람들이 네 일을 대신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너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자신…….”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목소리가 순간 갈라져 나가는 들었다. 역시 목이나 어딘가를 다친 것 같았다. 막시는 말을 희미하게 삼켰다가 겨우 다시 토해 놓았다.
“……타인을 지켜 줄 수가 있어야지.”
뱉어 놓고 그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하는 동안 입을 워낙 꾹 다물고 있느라 그는 순식간에 입술이 하얗게 질려 버렸고, 요른은 막시가 너무 화가 나서 질려 버린 것이라 생각하고는 저도 같이 얼굴에 핏기가 다 빠져 버렸다. 막시가 다시 운을 떼었다.
“잘 구별할 수 있도록 해, 요른. 절대로 남에게 저항하지 마. 다 시키는 대로만 해. 하지만 어떻게든, 절대로…….”
숨처럼 어떤 발음이 새어 나오려던 찰나 그는 어휘를 바꾸었다.
“절대로 남을 살인자로 만들지는 마. 그건 무시무시한 죄야. 알겠어?”
“응.”
“정말로 알아들은 거야?”
“응, 응.”
“그래.”
막시밀리안은 몸을 일으켰고, 침대 발치의 의자를 도로 벽 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번에는 아예 연을 끊지는 않을게. 하지만 앞으로 한 달간은 네 방에 찾아오지도 않을 거고, 너랑 단둘이 얘기하는 일도 없을 거야.”
“응!”
요른은 훌쩍대면서도 반색해서 답했다.
막시는 곧 등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그가 기숙사 방문을 여는 뒷모습을 흘끔대며 요른은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막시가 자기가 예고했던 그대로 벌을 주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딱 잘라 연을 끊어 버릴 거라고 선포해 놓고 고작 한 달이라니.
그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막시는 지금 기사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요른은 입을 딱 닫고 막시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까지 자기 무덤을 파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 달로 갈음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막시밀리안이 가 버린 후 요른은 침대맡 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노트 두 권을 뒤늦게 발견하고서 만지작거렸다. 지난 사흘간의 수업 필기였다.
두 밤이 더 지났다. 아침이 밝았고, 요른은 제법 가뿐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막시밀리안이 회복 마법 교수 말을 전해 준 바에 따르면, 분명히 늦어도 오늘부터는 학교에 가도 된다고 했다. 요른은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책상 쪽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오래 쉬었더니 전보다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요른은 기분 좋게 기숙사 건물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금방 1층 정문 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공문을 발견하고 그 앞에 못 박혀 섰다.
공문에는 막시밀리안, 필립, 그리고 요른 자신의 이름까지도 들어 있었다. 빳빳한 종이에 박힌 글자를 빠짐없이 읽어나가면서 그는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요른은 자신이 널브러져 자는 동안 바로 코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줄은 전혀 몰랐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기숙사 방 문간에서 필립의 모습을 본 기억은 어렴풋이 났지만, 그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둘이 그렇게 싸웠고,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크게 다치고 기도에도 화상을 입었단다. 필립은 제적당하고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요른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채로 가방을 가슴에 꽉 안은 채 건물을 나섰다. 교정의 오솔길을 가로질러 그는 어느새 강의동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건물로 들어서기 직전, 학생 몇 명이 정문 계단 한쪽에 앉아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문에야 그런 얘기까지 굳이 노골적으로 써 놓지는 않지.”
한 학생이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기도에 화상을 입었다면…… 결국 막시밀리안은 생명까지도 위험했던 거 아냐?”
학생의 말에 누군가 동조하며 답하는 듯했다. 하지만 요른은 그 목소리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머리에서 쿵 소리가 나면서 귀가 컴컴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요른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실제로 이미 주저앉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아찔하게 흐른 후에야 그는 자신이 여전히 서 있기는 하다는 걸 알아챘고, 겨우겨우 걸음을 재촉해서 강의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의 화장실 한 칸에 숨어들었다. 문을 닫고 손으로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후에야 요른은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나 때문이야.’
그는 이를 악문 채 목이 찢어져라 울었다.
‘내가 홀림 마법으로 필립을 꾀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어. 막시가 죽을 뻔했어.’
결국 요른은 그날 수업은 가지 못했다. 그럴 정신도 없었고, 우느라 얼굴이 퉁퉁 부어 버려서 어딜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서 도로 기숙사로 돌아갔고 그날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막시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하루치 수업을 다 빼먹어 버린 꼴이었다. 평소라면 막시가 저녁에 한 번쯤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고 들러서는 왜 수업에 안 나갔냐면서 채근해 주었을 만도 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그날 요른의 방에 걸음하기는커녕 하인조차 보내오지 않았다. 약속대로 앞으로 한 달은 요른의 눈앞에 스치지도 않을 모양이었다.
요른은 여러모로 울기만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저녁쯤이 되자 여러 다른 정황도 천천히 머릿속에 윤곽이 잡혔다. 막시밀리안뿐만이 아니다. 필립도 요른의 마법 때문에 괜히 나쁜 사람이 되어서 쫓겨났다. 페랑의 평민이라고 들었는데, 평민이 왕국 학원에 들어오려면 여러모로 어려웠을 게 뻔하다. 그런데 그 노력이 다 수포가 되어 버린 거다.
‘나는 괴물이야. 악마야. 그냥 흉하고 병신인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나빠.’
침대에 엎드려 요른은 시트를 온통 끈적하게 눈물 콧물로 적셨다. 게다가 막시밀리안은 목숨만 잃을 뻔한 게 아니었다. 조기 진학 기회도 잃었다.
요른에게 성에서 벌을 주었던 날, 막시밀리안은 분명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앞으로 2주 동안은 학교에 못 올 거라고 했었다. 아까 공문을 읽고 요른은 그 일이라는 게 막시의 성기사 학원 진학과 관련해서 뭔가 중요한 기회였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시는 요른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행군 도중에 학교에 돌아와 버렸다.
요른은 시트를 손으로 꽉 쥐었다. 흐느끼느라 진이 빠져 버린 머릿속에 막시밀리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만 남아 울렸다.
[요른, 난 네게 뭐든 다 해 줘. 네 힘으로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뿐이야. 그런데 넌 그마저도 안 해. 나도…… 지친단 말이야.]
그는 정말로 그마저도 안 했다.
카를이 살인죄를 지을 뻔했는데 방치했고, 막시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그러느라 안 그래도 흉측한 몸뚱이가 심하게 아파 버리기까지 해서, 막시가 중요한 출진 도중에 말을 돌려야만 했다. 자신이 다 망쳐 버렸다.
요른은 울고 또 울다가 문득 몸을 일으켜 주먹으로 자기 얼굴을 쳤다. 서너 번쯤 때리자 코피가 흘러내렸고 주먹도 아팠다.
그는 얼굴이고 손이고 완전히 다 부서져 버릴 때까지 갈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더 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수업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고 시험도 통과해서 막시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한편 다른 생각도 요른의 머리 한편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막시는 역시 요른이 곁에 없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마법사를 꿈꾸느라 이렇게 기생충처럼 막시한테 들러붙어 발목만 잡느니, 없어져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막시는 타인을 살인자로 만들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요른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면 그건 상관없는 일 아닐까.
요른은 적색이나 주홍색, 청색조차도 아니라 백색 불꽃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사람의 몸을 순식간에 뼛속까지 다 태워 버릴 수 있는 고급 공격 마법이다.
다만 주문이 좀 길고 어려운 게 문제였다. 요른은 손을 살짝 몸 밖으로 펼쳐 내민 채 더듬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죽는 마당에까지 굳이 주문을 외우는 척할 필요는 없다. 그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머릿속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몸 안으로 바로 파고 들어갔다.
심장부터 태워 버리고 싶어서 요른은 바로 흉곽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침입을 가로막듯이 순간 얼굴 하나가 지독히도 선명하게 차올랐다.
칠흑색의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 눈동자에 그림자를 떨구었고, 살풋 웃는 뺨 밑으로는 그 머리칼만큼이나 새카맣고 깊은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우리 요른.]
안 돼. 생각이라기보다는 농축된 감정에 불과한 것이 열한 살짜리 몸의 혈관을 구석구석에 퍼져 길을 막았다.
‘그를 잃게 돼.’
죽어 버리면 다시는 그를 볼 수가 없다.
요른은 머릿속에서 들끓던 백색 불꽃을 거두었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침대 옆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요른의 입 속에서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가 피어올랐다. 한 달.
“그, 리고. 또, 한, 달.”
쇳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요른은 막시밀리안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달이란 길다면 길지만 평생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요른의 몸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기에, 주어진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치료술사들이 프란첸가의 의뢰에 따라 예측해 낸 바에 따르면 그래도 삼사십 년 이상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니 이번 한 달만 버티면, 또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 버리지 않는 한, 요른은 그다음부터는 다시 몇십 년간은 막시를 볼 수 있다.
‘한 달만 잘 참고 기다리면 다음 한 달 동안은 막시를 매일 볼 수가 있어.’
요른은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한 달도, 또 그다음도. 살아만 있으면 매일매일.’
셈하다가 요른은 그만 웃어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울었다. 그는 자신이 죽는 게 더 나은 생물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랬고, 사실은 막시밀리안을 위해서도 그랬다.
그래도 그는 매일 막시가 보고 싶었다. 하루가 지나면 또 다음날 그를 보고 싶었고, 또 그다음 날도 그랬다. 게다가 막시 쪽에서도 그를 돌아보아 주었다. 그런 아름다운 것이 매일 자신을 보고 이름을 불러 주고, 자신이 아프면 달려와 준다. 그런 생을 버릴 수는 없다.
‘인정하자.’
요른은 또렷하게 되새겼다.
‘나는 기뻤어.’
막시밀리안은 요른 때문에 행군 도중에 돌아왔고 조기 진학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쁘기도 했다. 공문에서 그 소식에 눈이 닿았을 때, 요른의 안에는 기쁨으로 환하게 달아오른 부분이 있었다. 금방 눅진한 죄책감으로 식어 가긴 했지만 그 원천은 분명 기쁨이었다.
‘막시를 위해서가 아니야. 그저 내가.’
요른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직시했다. 막시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했다.
‘내가 막시를 매일 보고 싶어.’
오늘도 그를 보고 내일도 또 그를 보고 싶다. 이 눈에 그를 담을 수 있는 날들이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면 그중 단 하루도 버릴 수가 없다. 평생 막시한테 도움은커녕 계속 폐만 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하루하루 생애를 이어갈 것이다.
눈앞이 빙글 돌면서 욕지기가 밀려와서 요른은 명치를 짓눌렀다. 자신이 전보다도 훨씬 더 흉측하고 징그럽게 여겨졌다.
정신 차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려 애쓰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물론 마법사가 되는 길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막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삶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요른은 자기 마음의 밑바닥을 더듬으며 곱씹었다.
그거면 된다. 막시밀리안을 매일 볼 수 있는 삶. 요른은 그러나 아침에 강의동 계단 앞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심장이 덜컹하면서 그는 저절로 좀 더 깊은 곳으로 낙하해서 목표를 받쳐 주는 주춧돌 같은 것에 다다랐다. 그리고 다시 표현을 조금 더 가다듬어 입 속으로 속삭였다.
‘막시밀리안이 언제나 내 눈앞에 안전하게 살아 있는 삶. 그러니까, 내가 그의 생명을 늘 지켜 주는 삶.’
거기까지 또렷하게 떠올리고 나자 요른의 입가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차올랐다.
‘예외 상황.’
요른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홉 살 때부터 막시가 매년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가르쳐 주었던 용어다.
막시밀리안은 요른에게 뭐든 다 해 주고 하나하나 가르쳐 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본인이 없어져 버리면 어차피 요른은 더 이상 아무런 보살핌도 지시도 받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막시밀리안 본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꼭 그가 내려 준 지시에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건 예외 상황이니까.
그는 문득 자신이 처음으로 순전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만 뭔가를 결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막시나 카를, 린다나 아무 다른 학생들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로. 요른은 와락 겁이 났고 자신이 분명 뭔가 또 심각하게 잘못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대로 멋대로 일을 벌였다가는 온 세상에 대고 끔찍한 죄를 짓게 될 거 같았다.
그러나 요른은 동시에 반문했다. 그래서, 자신이 개입하지 않아서 만약 막시밀리안이 죽어 버리면?
다시는 그를 볼 수가 없게 되면?
‘안 돼. 어차피 그건 안 돼.’
‘어차피’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요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표현이 자신의 핏속에서 넘어서려야 넘어설 수 없는 벽과 같은 물리적인 강제성을 띠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가 사라져 버리면…….
이 모든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요른은 순간 짧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족쇄가 풀린 듯이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른은 얼른 막시밀리안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고 생명줄처럼 붙들었다. 그 무겁고 선명한 닻은 항상 그를 땅에 붙들어 주었다. 그런 채로 요른은 그를 지켜 줄 방법을 고심했다. 지금껏 늘 자신을 지켜 주었던 사람을 이제 자기 쪽에서도 지켜 줄 방법을.
집중해서 생각하고 있자니 천천히 중력감이 되돌아왔다. 땀에 젖은 채 마룻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요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방 안에 어둠이 짙어져 있었기에, 요른은 탁상 램프를 켜려고 침대 옆 수납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기숙사나 강의동 등 학원 건물 복도 벽에 배치되어 있는 마법 램프들에 생각이 미쳤다.
‘그 램프들은 불이 꺼져 버리면 직원한테 바로 연락이 가지.’
각각 덮개 안쪽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램프들로, 야간에 어쩌다 빛이 약해지거나 꺼져 버리면 이 마법진을 통해 담당 직원이나 당직 강사에게 신호가 전송된다. 그러면 직원이 들러서 진을 조정하고 주문을 외워서 다시 점등해 주고 간다.
막시한테도 비슷한 방법을 쓰면 되겠구나. 요른은 생각했다. 램프의 빛을 막시밀리안의 심장 박동으로 치환하고, 덮개에 마법진을 새기는 대신 그의 갈비뼈 안쪽에 새겨 두면 된다.
좋아. 혼자 중얼거리면서 요른은 책상으로 가서 검은색 잉크병을 하나 꺼내 놓았다.
그는 병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이 충분히 있는지 확인한 후 잉크를 인체에 무해한 성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눈꺼풀을 내리감고, 머릿속에서만 눈을 뜬 채 의식을 한쪽은 잉크 쪽으로, 다른 쪽은 막시밀리안의 몸 안으로 향했다.
요른의 시선을 타고 잉크와 막시밀리안의 체내가 순식간에 서로 연결되었다.
잉크병과 막시밀리안의 몸은 서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는 숱한 사물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수십 개의 돌벽, 수십 명 사람의 몸과 식물의 줄기, 동물의 살과 뼈, 목재와 철제 가구들. 하지만 요른의 시선은 사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관통했다. 그는 막시밀리안의 심장 바로 위쪽을 보호하는 뼈 세 개에 아주 가느다랗게 음각으로 자국을 새겼고, 검은 잉크를 바로 그 틈새에 전송해서 안착시켰다.
어떤 고등 마법사가 이 작업을 관찰할 수 있었다면 그는 경탄하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여러 마법을 동시에 쓰고 있는 데다가, 주문도 없고, 원리에 들어맞지도 않는다.
하지만 요른 본인은 마법 개수나 원리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으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잉크가 온전히 안착되자 요른은 표면을 보호하고 굳혔고, 동시에 자기 두개골 안쪽에도 비슷한 작업을 했다. 즉 음각으로 일부를 깎아 내고 잉크를 채워 넣었다.
막시밀리안의 갈비뼈 안쪽과 요른의 두개골 안쪽에 서로 상응되는 마법진 두 개가 새겨졌다. 요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시의 심장 박동이나 체온, 호흡에 심각한 이상이 생기면 요른은 바로 머리에 신호를 전해 받게 된다.
‘그러면 바로 달려가야지.’
그는 바로 막시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몸을 전송하는 마법을 써서 1초도 지체하지 않고 가 닿을 것이다. 그리고 적이 누구든 처치해 주리라.
사람이라면 죽이고, 자연물이라면 가루조차 남지 않게 소멸시켜 버리리라. 그리고 막시가 뭐라 하든 그를 치료해 줄 것이다. 주문을 쓰는 회복 마법이 아니라, 요른이 원래 쓰던 회복 마법으로. 누가 봐도 가망이 없는 상태라 해도 순식간에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살려 내고 말 것이다.
막시는 물론 아주 싫어할 거다. 요른은 금지 마법을 한꺼번에 수 개나 써 버린 죄를 짓게 될 테고 몸이 다 부서지는 벌을 받게 될 게 뻔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어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어떤 벌을 받게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만은 막시조차도 어쩔 수가 없는, 요른 자신이 정한 예외 상황이다.
요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책과 고통만으로 얼룩진 생에 처음으로 어떤 반짝이는 보석 같은 심지가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무너지지 않을 힘의 원천이.
* * *
일주일이 더 지났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해가 눈에 띄게 짧아졌다. 교정의 식물들 위로는 강의 대부분이 파하는 시간, 그러니까 오후 다섯 시쯤만 되어도 벌써 황혼빛 그림자가 흘러 다녔다. 학생들도 머리칼과 이마와 뺨이 붉게 그늘진 채 강의실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요른은 그 인파에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건물 지하실 구석에 있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화장실 한 칸에 숨어서 다른 학생들이 먼저 다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막시밀리안과 필립 사이의 다툼을 둘러싼 교내 여론은 어느 정도는 가라앉았다. 그래도 아직 식당이나 구내 카페에서는 간간이 씹을 거리로 떠오르곤 했고, 공문도 아직 주요 건물들 게시판에서는 철거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학생들은 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도 요른을 쳐다보고 손가락질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때문에 요른은 강의가 끝나도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저녁 여섯 시가 한참 넘어서야 머뭇머뭇 복도로 기어 나오곤 했다. 그쯤 해서 나와 보면 강의동에는 거의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요른은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미 땅거미가 내린 지 오래라 복도 양쪽 벽에는 램프 불빛이 총총 밝혀져 있었다.
램프를 올려다보며 요른은 나흘 전 막시밀리안의 몸종에게 물어서 전해 들었던 소식을 되새겼다. 몸종이 혼자 직원용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걸 보고 얼른 뛰어가서 물어봤더니, 그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한숨을 세 번쯤 내쉬긴 했지만 결국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
“막시밀리안 주인님의 전방 부대 파견은 아버님의 지인이신 베스퍼 폰 크라우스라는 성황국 수도 성기사단의 단장님이 주선하신 일입니다. 그 부근에 영지를 갖고 계신 후작님이시고, 그로쉔의 현 제후이시기도 하죠.”
하인이 말하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걸 막시밀리안 주인님이 중간에 멋대로 팽하고 돌아와 버리신 겁니다.”
막시밀리안과 프란첸 공작은 물론 사후에 폰 크라우스가에 정식으로 사과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베스퍼는 냉랭한 답을 보내왔다고 한다. 막시밀리안을 앞으로도 검은 숲 근처의 방위군으로 파견하기는 하겠지만 전방 부대에 고려해 주기는 어렵다. 당 생도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후방 지원 부대에서만 활동하게 될 것이며, 성기사 학원으로의 조기 진학은 없던 얘기로 치겠다.
베스퍼는 서면상에서 조리 있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귀한 기회를 자기 친형제도 아니고 집안의 피후원자 어린애 하나 때문에 저버리는 생도를 중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막시밀리안 본인이 빨리 성기사가 되어 황국에 봉사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자란다고 볼 수밖에 없으니까.
요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 소식을 들었다. 몸종도 소식을 전해 주면서 화가 난 눈치였고,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요른을 노려보았다. 왜 프란첸의 독자는 이런 생물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하는 눈빛. 몸종은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베스퍼 폰 크라우스 경의 편지를 받아 주인님께 전해드린 건 올해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요른은 그 말뜻을 알 수가 없어서 몸종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말투에 원망이 섞여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외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막시의 몸종은 한숨을 내쉬더니 억지로 예를 갖춰 인사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무튼 요른은 자신이 막시의 한 점 흠 없이 밝던 장래를 비틀어 버렸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듯이 우울해지고 말았다. 몸종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요른은 그래도 무슨 수가 나서 막시가 다시 기회를 제공받고 조기 진학에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스퍼의 편지로 인해 그 희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나도 이런 심정인데, 막시는 대체 어떨까.’
요른은 한 달 동안 막시를 볼 수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막시밀리안이라도 지금 요른을 보면 짓밟아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시는 막시니까, 속이 어떻든 꾹 참고 요른을 웃는 낯으로 대해 줄 것이다. 그러면 거기다가 뭐라고 사과의 말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요른도 꾹 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대해야 한다. 그런 건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요른은 지난 일주일 내내 그랬듯 오늘도 고개를 더 푹 숙인 채 땅만 쳐다보면서 강의동 복도를 기듯이 걸어갔다. 그러다가 입구 쪽으로 빠져나오기 직전에 길쭉하고 짙은 그림자를 밟았다.
‘막시?’
고개를 들었다가 요른은 역시 실망했다.
분명 지금 막시랑 마주치기는 무서운데, 못 마주치니까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 그림자만 스쳐도 기대하고 또 실망하게 된다. 요른은 입이 조금 삐죽 나온 채로도 어쨌거나 눈앞의 인물을 알아보았다. 다나 하우저 강사 선생님.
그녀는 이 그로쉔 마도 학원의 강사는 아니다. 학회와 특별 세미나 때문에 임시로 들른, 원래는 성황국 마도 학원에서 일하는 초대 강사다. 학기 말에는 다시 성황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들었다. 그는 가방을 가슴에 꽉 껴안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하세요, 다다나 선생님.”
“응, 요른.”
다나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답했다.
그녀는 워낙 작달막해서 그 정도만 해도 요른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요른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눈을 피하면 버릇이 없다고 애들한테 맞았기 때문에 억지로 상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마주 보면 징그럽다고 욕을 먹긴 했지만 맞지는 않았다.
그렇게 불안하게나마 시선을 맞추고 있자 다나는 방긋 웃으면서 무언가를, 요른 스스로는 아직 알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칭찬하듯이 요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요른은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설 뻔했다. 하지만 다나는 겁먹지 말라는 듯이 부드럽게 청했다.
“너 잠시 시간 괜찮니?”
“예, 예?”
“내 강사실로 갈까? 우리 잠시 얘기 좀 하자.”
“예…….”
요른은 얌전히 따라갔다. 강의동 삼 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가느다란 교각을 건너가면 교수 및 강사동 건물로 옮겨갈 수 있다. 다나는 4층의 임시 강사실에 먼저 들어가서 요른에게 손짓했고, 요른이 들어오자마자 얼른 문을 닫았다.
요른은 강사실 구석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사람이 문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위치를 지키고는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체구나 드러난 턱 부분으로 보아 남자 같았다. 그가 다나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애가 맞습니까?”
기괴하게 삐걱대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나가 얼른 답했다.
“모습을 보면 짐작이 가시지 않습니까.”
“하긴.”
그가 요른에게 다가오더니 턱을 붙잡고 얼굴을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았다. 그는 손이 컸고, 그 커다란 손에 얇고 부드러운 사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특이하긴 하네요. 하지만 이런 건 사실 그냥 생물학적 돌연변이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돌연변이라고 해도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시험해 볼 가치는 있어요.”
다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모습뿐만이 아닙니다. 당신도 이 애의 성적기록부를 보셨잖아요? 저는 우리 영애님께서 상당히 가치 있는 피험체를 찾아줬다고 생각합니다.”
다나는 다시 요른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정하게 물었다.
“요른, 요즘 고민이 많지 않니?”
“응, 네?”
“막시밀리안이 너를 살피러 오느라고 조기 진학 기회를 잃었다고 들었어. 그렇지?”
요른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 새하얀 눈이 금방 젖어 드는 걸 보며 다나가 미소 지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조금 도와주려고 한단다. 막시밀리안도 그렇고, 너도 그래. 이런 시대에 너희같이 재능 있는 애들이 빨리 황국 학원으로 진학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실수 좀 했다고 내쳐지면 이 대륙의 손실이야.”
“네네, 마, 막시는, 정말로, 훌륭해요.”
“응응.”
다나가 끄덕거렸다.
“그래서 막시밀리안이랑 너를 다음 학기 정도에 둘 다 황국 조기 진학생으로 보내 주려고 한단다. 둘이 같이 가면 정말 좋겠지, 안 그러니?”
다나는 요른의 눈이 커지고, 그 푸르죽죽한 뺨에 순간이나마 생기가 도는 걸 면밀하게 관찰했다.
다나는 후드를 쓴 남자 쪽을 흘끗거렸다. 남자가 네모난 가죽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나는 한쪽 손으로는 요른더러 책상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다른 쪽 손으로는 아이의 손에 깃펜 하나를 들려 주었다.
“네가 저기에 서명만 하면 돼. 나머지는…… 요른?”
“그, 그치만.”
요른이 당장이라도 펜을 놀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말했다.
“막시는, 맞, 맞아, 당장 가야 해요. 하지만 저 저는, 막시랑 다달라요. 타타블로도, 잘 모모르고, 나이도, 너무 적, 고요. 저저 같은 거한, 테, 그런 기회, 는…….”
“알아.”
다나가 생긋 웃었다.
“너는 이론 과목 성적이 엉망이지? 그것도 감안해서 그러는 거야. 너 같은 애는 이런 데에서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교육받는 것보다는 성황국 학원에서 일찍부터 특수 교육을 받는 게 나아요. 거기서는 재능 있는 애들은 방과 후에 개인 수업도 따로 해 주거든.”
그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요른의 귓가를 휘감았다.
“나이도 문제가 안 돼. 마법사는 기사와 달라서 조기 진학자도 꽤 있어. 너는 개중에서도 어린 편이기는 하지만, 아주 튀는 건 아냐.”
“그그리고, 저 서명 못, 해요.”
요른은 마지막으로 저항해 보았다. 거의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렇게 좋은 일이 갑자기 벌어질 리가 없다는 직감.
“계약, 그그런 건 다, 공자작 부인께서 해, 주, 셔야…… 제가 하하면, 효력, 없다고.”
“괜찮아. 이건 특별한 경우라서, 너만 서명을 하면 되게 해 두었단다. 아주 높은 분이 허락하신 거야.”
“마막시.”
요른이 뱉어 냈다.
“막시, 한테 머먼저 물어볼, 게요. 그그다음에, 다시…….”
“요른.”
남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귀찮네. 그냥 다 말해 줘, 다나.”
“움베르토.”
남자는 손을 들며 다나를 제지하더니 후드를 벗었다.
요른은 이를 악물었다. 남자의 귀밑에서부터 왼쪽 이마까지 꿈틀거리는 듯한 흉터가 번져 있었다. 깃을 높이 올린 튜닉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 흉터는 목을 타고 아마 가슴 깊이까지도 뻗어 있을 듯했다.
남자는 후드 때문에 흐트러진 새치 섞인 금발을 손으로 대충 쓸어서 정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저 상처가 났을 때 목을 다쳐서 그런 삐걱대는 소리로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얘야, 이건 비밀 계약이야. 비밀이 지켜질 때만 너도 이득을 볼 수가 있는 거란다. 네가 다른 사람한테 다 불어 버리면 우리도 너나 막시밀리안에게 아무 혜택도 못 줘. 무슨 뜻인지 알겠니?”
“어, 어…….”
“우린 화가 나서 막시밀리안에게 오히려 불이익을 줄 수도 있어. 예를 들어서, 조기 진학은커녕 나쁜 추천장을 보내서 평범한 진학조차도 어렵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지.”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후작은 내 막역한 친구이기도 해. 막시밀리안이 멋대로 굴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더구나. 크라우스가는 그로쉔 내에서는 프란첸가에 살짝 밀리지만, 성황국으로 가면 우세하단 말이야. 내가 언질을 주어 부추긴다면 베스퍼가 네 ‘막시’의 진학을 방해하는 건 문제도 아냐. 막시밀리안이 실제로 잘못을 안 한 것도 아니니까.”
“아, 안.”
“하지만 그 반대로 네가 우리 제안에 응해 주기만 한다면 일은 쉽지.”
움베르토라는 남자는 요른의 발 앞으로 다가왔지만 몸을 낮추지는 않았다. 그대로 요른을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며 씩 웃었을 뿐이다.
“꼬마야, 알고 있냐? 막시밀리안은 원래부터 너도 성황국 학원으로 같이 데려가길 원했어.”
“예?”
“막시밀리안은 진짜 뛰어난 애야. 몇십 년에 한 명도 안 나올 천재지. 그런 애한테 올해 처음으로 조기 진학 제안이 왔을 거 같아?”
그가 말을 이었다.
“성황국 학원은 진작에 그 애를 탐냈어. 베스퍼는 작년에도 그 애한테 이미 비슷한 제안을 했고. 그렇지만 그 애 스스로가 거절한 거야. 혼자는 안 된다, 요른과 같이 진학하는 조건으로만 가고 싶다고 했대.”
“어? 아, 아냐.”
“요른도 아주 재능 있는 학생이니까 자기랑 같이 성황국 쪽으로 일찍 옮겨 가는 게 더 낫다고 했다는구나. 여러 가지 의미로 특별 관리가 필요한 애라 놓고 가기가 영 불안하대. 그래서 그 잘난 조건 조율해 드리느라 1년이 미루어진 거야.”
“그, 그럴 리…….”
“베스퍼는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 작년에 기껏 좋은 기회를 주었더니, 그 잘난 폰 프란첸의 독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덥석 물기는커녕 되도 않을 조건부터 내걸었어. 올해 그걸 겨우 맞춰줬더니,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팽해 버렸어. 막시밀리안의 진학은 처음부터 너 때문에 미뤄졌고 올해도 너 때문에 아주 엉망이 되어 버린 거잖아. 난 걔도 진짜 이해가 안 가. 넌 뭐, 걔를 어떻게 꼬신 거냐?”
요른은 움베르토를 올려다보며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다나조차도 난처한 듯 웃어 보이기만 했다.
움베르토의 얘기는 아무래도 진짜인 거 같았다. 요른은 하얗게, 다시 파랗게 질렸다가 결국 질질 울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에 움베르토가 요른의 손에서 펜을 채어가 버렸다.
“서명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움베르토는 그제야 한쪽 무릎을 꿇고 요른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한쪽 눈은 흉터에 뒤덮여 흔적을 알아볼 수도 없이 뭉그러져 있었지만 남은 한쪽 눈은 형형하고 예리했다. 그는 그 표범 같은 황색 눈동자로 요른을 쏘듯이 바라보며 움베르토가 말했다.
“지금은 일단 구두로만 답해도 좋아. 너, 다음 학기부터 성황국으로 와서 우리한테서 실험 받을 거야, 말 거야?”
“실, 험, 요?”
“네 몸을 우리가 유용하게 써 주겠다는 거야.”
그가 말하고는 요른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아주 징그럽게 생긴 만큼 어쩌면 나름의 장점도 있을지 모르거든. 그걸 우리가 개발해 주겠다고. 어때, 좋지?”
“…….”
“형식상으로는 다나나 다른 강사들한테서 방과 후 개인 수업을 받는 꼴이 될 거야. 실제로는 우리 실험실에 드나들 거고. 아 참, 너한테 진짜로 타블로를 가르쳐 주지는 못해도 성적 올리는 건 도와줄 거야. 시험지도 다 미리 훔쳐다 주고 답도 알려 주마. 어때? 졸업하기 좋겠지? 사람들이 네가 진짜로 과외를 받고 있다고 믿어 주기도 할 거고 말이야.”
“그그치만 나나, 진, 짜로 마법, 배워야…….”
“어렵게 구는구나. 네가 지금 얌전히 응하지 않으면 너의 막시는 앞으로도 성기사 되는 데에 차질이 생겨. 반면 네가 예, 답만 하면 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어쩔래?”
움베르토는 짜증스럽게 요른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네가 망쳐 놓은 일에 책임도 안 질 거야?”
요른은 한참 동안 울면서 입술만 달싹거렸지만, 결국 답을 내놓았다.
* * *
2주 후, 올리버 폰 프란첸 공작은 하인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아 들었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가 보내온 편지였다.
내용을 읽어 보고 올리버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기숙사의 막시밀리안에게도 전해 주라고 했다.
막시밀리안이 평소에 행실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그간 막시밀리안과 함께 활동했던 후방 부대 쪽 기사들이 간곡하게 막시밀리안을 변호했고, 그래서 베스퍼도 결정을 재고했다는 소식이었다. 올리버 공작의 독자는 원래 예정대로 방학 때 두 달간 전방 부대에 섞여 검은 숲 근처 지대에 파견될 테고 그 성적에 따라 진학 여부를 심사받을 것이다.
올리버는 바로 베스퍼에게 답을 써서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재로 향했다. 내달 추수제 기념 왕궁 사냥회에서는 직접 만날 텐데, 그때도 인사를 전해야 하리라. 특히 사냥회에서 올리버는 베스퍼에게 다른 일도 슬쩍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그는 성황국 내에 두루 연줄이 많은 사람이니 아들 또래의 귀족 영애들도 훤히 꿰고 있을 것이다.
공작가 후계자가 열다섯 살이면 약혼은 일러도 인연을 구하기 시작하기에는 마냥 이르지만은 않은 나이다. 마음 가는 영애를 찾고 나면 아들은 다시는 그 새하얀 소년 때문에 행군 도중에 말머리를 돌리지는 않으리라.
프란첸 공작은 자꾸 불길한 예감이 치미는 걸 누르며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