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틀 뒤, 성황의 주궁 홀에서 조찬회가 열렸다.
열흘 후면 막시밀리안의 부대를 포함해 성기사 네 사단이 다시금 남부로 떠난다. 그전에 마지막으로 열린 조찬회였다.
가문 단위로 모인 귀족들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인사를 나누다가, 메인 요리가 나오자 기다란 좌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황도 계단처럼 조금 높이 올려진 홀 앞쪽 자리에 앉고, 웬만큼 시간이 흐르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 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귀족들은 그녀의 손짓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식사만 계속했다. 근위병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은 손수레를 문밖에서부터 밀고 들어와 성황이 앉은 탁자 아래쪽에 놓아 두고 사라졌다.
성황이 몸을 일으켜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수레 위에 놓여 있는 주석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던 마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호위병들은 다시 손수레를 빈 상자가 얹힌 채로 홀 한가운데 둥그렇게 빈 공간으로 밀어갔다.
성황은 사슬 봉인이 칭칭 감겨 있는 반들반들한 묵빛 검집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모두가 볼 수 있게끔 높이 올렸다. 그리고 곧 성기사단 총사령관의 이름을 불렀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단장 겸 사령관에 새 마검을 하사합니다.”
베스퍼가 얼른 물로 입 안을 씻어 내고 나와서 성황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황이 베스퍼에게 검을 내려 주었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기사들은 모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을 벗어났다.
이 조찬회에서 마검 수여식이 있을 거라고는 다들 예상하고 오기는 했다. 새 몸을 받는 것도 음식을 소화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성황은 꼭 식사와 복속 의식을 섞어 놓곤 했으니까.
어쨌거나 검을 받는 이가 베스퍼라면 별 걱정할 건 없었다. 나이 든 성기사가 현장에서 대거 물러나는 가운데 오히려 바위처럼 점점 더 단단해지며 버텨 온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기사들은 자신의 마검에 손을 댄 채 홀 한가운데에 마련된 둥근 공간을 둘러싸고 기다렸다.
막시밀리안도 마찬가지로 검 손잡이에 오른손을 대고 서 있었고, 베스퍼도 그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둘은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베스퍼는 새 마검을 받쳐 든 채로 손수레 바로 앞으로 걸어와, 검집에 감겨 있던 사슬 봉인을 풀어 수레에 실린 상자 속에 내려놓았다.
“복속의 의식이 시작됩니다.”
성황이 낭랑하게 선포했다.
홀 안에는 침묵이 짙어졌다. 성기사가 아닌 자들은 모두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 채였다.
베스퍼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신이 온전히 드러나면서 베스퍼의 무표정한 얼굴 가죽이 순간 망치로 내리친 구리판처럼 진동했고 붉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양팔만은 마치 머리에서 분리된 다른 생물처럼 초연하게 제 손에 들린 물건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내리치기 직전의 기본 동작이었다.
노련한 기사들은 베스퍼의 동작이 정결한 걸 보고 이미 눈치챘다. 성공했군. 베스퍼는 가벼운 외마디 소리와 함께 봉인이 들어 있던 상자와 손수레를 한꺼번에 종으로 동강 냈다.
기사들이 안도하며 각자 허리춤의 마검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도 웃었고, 성황도 전송 마법으로 홀 전체를 맑게 울리며 치하했다.
“복속에 성공했습니다. 폰 크라우스 경, 이제 이 검은 경의 새로운 발톱이자 이빨이 되었으니, 그 몸을 주인으로서 통솔하고 아껴 주시길.”
베스퍼가 새 마검을 허리에 차고는 몸을 돌려 성황께 예를 표했다.
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가문 친척들이 모두 한 번씩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베스퍼는 별반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아까 먹다가 내버려 두었던 양고기 한 점만 입에 마저 털어 넣은 다음 막시밀리안이 있는 자리로 옮겨 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네. 덕분에 좋은 검을 받았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재료가 된 건 결국 자네가 동강 낸 마물들 아니겠나. 나야 주로 지휘하는 역할이고, 베는 거야 자네지.”
“늘 포위해서 몰아붙여 주시지 않습니까. 다 덕분입니다.”
막시밀리안도 공손하게 답하며 미소 지었다. 베스퍼가 웃으며 자기 아들뻘 되는 청년에게 다시금 말을 붙였다.
“하지만 이번 마검이 잘 만들어진 건 다른 덕도 좀 있었다고 들었네.”
“‘날씨’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베스퍼는 괜스레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답했다.
막시밀리안도 끄덕거렸다. 공방 직인들의 말에 따르면, 마검 제작에 쉬운 날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이 ‘날씨’라는 변수에 대해 논하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일 년쯤 전부터 황국 측에서 마물 한 마리로만 된 마검이 아니라, 여러 마물들의 조각을 섞어 낸 소위 합성 마검의 제작도 시도하면서야 떠오른 현상이다.
마물들이 강해지면서 성황은 수도의 직속 공방은 물론 각 지방 공방도 합성 마검의 제작에 주력하기를 명했다. 직인들은 다양한 생산 방식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방식을 시도하든 그와 무관하게 어떤 날에는 조각들이 대단히 잘 섞이고 어떤 날에는 섞이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즉, 성공 여부가 거의 외부 변수에만 달려 있었던 셈이다. 공방이 기후 연구소와 협력해 조사한 결과 공기 성분이며 기압에 미묘한 변화가 관찰되었고, 이후 학자들은 합성이 잘 되는 날을 ‘날씨’가 좋은 날, 잘되지 않는 날을 나쁜 날이라 칭하게 되었다.
합성 마검은 그 마릿수가 늘어날수록 만들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져 세 마리만 넘어가도 날씨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황국 직속 공방의 직인들 보고에 따르면 이틀 전날 밤 날씨가 그렇게나 좋았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리 애써도 섞이지 않을 마물 조각들이 스르르 마치 물에 물을 타듯이 서로 섞여 버렸다고.
단 몇십 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정말이지 엄청나게 좋은 날씨였다고 한다. 그래서 베스퍼의 오늘 이 마검도 탄생했다는 것이다.
“아주 완벽한 합성 마검이 탄생했다고 공방에서 기뻐했다더군. 이 날씨라는 걸 우리 마음대로 좀 조절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조절은커녕 예측할 수조차 없으니.”
“그렇군요.”
“그런데 이틀 전날 밤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 공방에서도 우연히 밤샘 작업을 하고 있던 중에 걸려든 건데…….”
베스퍼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물어 왔다.
“혹시 그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막시밀리안이 즉답했다.
베스퍼는 턱을 쓰다듬었다. 하필 그 흑마법사가 순찰병을 공격했던 날 밤에 ‘날씨’가 확 좋아졌다. 그렇다면 이 날씨의 변화란 그들의 활동과 어떻게든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두 성기사는 암묵적인 눈짓만 주고받았고, 베스퍼는 곧 화제를 바꾸듯이 물어 왔다.
“요른은 잘 지내나?”
“잘 지냅니다.”
“요즘 혼담이 오간다더군.”
“예. 크라우스 경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카분과는 이틀 뒤에…….”
“아니, 자네 말고, 요른 말이야.”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베스퍼가 왠지 진득한 웃음을 떠올렸다.
“혹시 몰랐나?”
“딱히 들은 바는 없었습니다. 그 애가 벌써 결혼 생각이 있다고 하던가요?”
“아니, 요른 본인 생각은 몰라. 다만 프란첸 공작 부인께서 요즘 적극적으로 그 애의 상대를 물색 중이라 들었네.”
베스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안 될 일이야. 요른은 생김새가 그런 데다가 반은 마물이라는 소문까지 나 있지. 어느 집에서 제 딸을 그런 애한테 주고 싶겠나? 프란첸가에서 후원을 받는 마법사라고 해도 무리지.”
“제 생각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막시밀리안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게다가 요른은 아직 열다섯 살인데요. 제 모친이 벌써부터 그런 일에 마음을 쓰고 계신 줄 몰랐군요.”
“힘들 거 같으니 오히려 일찍부터 찾기 시작하신 거 같아. 적당히 재력이 있는 상인 집안 여식을 물색하시는 중이라던데, 무리야. 그래서 내가 제안이 있네.”
베스퍼가 막시밀리안 쪽으로 좀 더 몸을 당겨 앉으며 말했다.
“우리 집 하녀 하나와 약혼시키면 어떻겠나?”
막시밀리안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베스퍼가 마저 덧붙였다.
“아 참, 혹시 요른이 남자애 쪽 취향이면 하인 후보도 있고. 어떤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 물어봐 놓게. 자네가 내 조카랑 맺어지고 그 애는 내 하녀나 하인과 맺어지면 크라우스가와 프란첸가 사이도 더 깊어지지 않겠나. 아, 물론 자네나 요른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야. 만약 중매 결과가 좋다면 그렇다는 거지.”
“감사합니다, 크라우스 경.”
막시밀리안이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 선에서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베스퍼가 픽 웃으며 되물었다. 반은 예상했다는 투였다.
“그러잖아도 소문이 좀 돌긴 하더군. 자네가 그 애를 지나치게 싸고돈다고 말이야.”
“그건 아마 반대로 된 소문일 겁니다.”
막시밀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담을 쌓을 때는 안의 것을 지키려고 그럴 때도 있지만, 바깥을 안으로부터 보호하려고 그럴 때도 있지요. 성이 아니라 일종의 감옥인 셈입니다.”
“요른이 무슨 위험한 짐승이라도 된다는 건가?”
“짐승보다는 마검에 비유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막시밀리안이 가볍게 답했다.
“잘못 복속시키려 들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잠식되기 마련입니다. 갑자기 발톱을 드러내지요. 악의가 있다기보다 그저 천성 탓인데, 그렇기에 더욱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나도 호르스트 때문에 학원에 들렀다가 몇 번 봤네만, 그리 사나워 보이는 애는 아니던데.”
“학교에서는 얌전한 편입니다. 하지만 다과회나 사교회에서 그 애가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패악을 부렸는지, 혹시 들으신 바가 없으신지요? 그런 아이를 아무리 고용인이라 해도 크라우스가에 속한 사람에게 넘겨드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나도 웬만한 마검은 다 복속시켜 온 사람이네.”
베스퍼가 말했다.
“자네만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네. 자네도 그런 애를 잘 다스려 그래도 지금까지 이끌었지 않나? 나도 할 수 있지 않겠나.”
“경이 아니라 경의 하인이나 하녀에게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하인이나 하녀의 혼인에는 나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막시밀리안이 기습하듯이 물었지만, 베스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냈다.
“혼인을 하고 나면 요른도 내 성에 와서 살아야지. 내 고용인을 성 밖에 살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 애가 들어오는 게 옳아. 별채의 방 세 개를 다 내어 줄 생각이네. 그리고 나도 스스로 시간을 내어 그 애를 매일 교육해 주겠네.”
독신을 고수해 온 귀족가 가장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막시밀리안만 변함없이 요새의 방벽 같은 미소를 지킨 채 제 상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는 아무래도 단장님의 손을 그렇게까지 더럽힐 수는 없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안 되겠나?”
“그 애는 아주 어릴 때부터 동생처럼 키워 왔습니다. 어떤 아이인지는 제가 가장 잘 알지요.”
그는 깍듯한 투로 말했다.
“도저히 그런 생물이 단장님의 성을 더럽히게 둘 수가 없군요. 그 작은 괴물은 계속 저희 프란첸가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가져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크라우스 경.”
“알겠네.”
베스퍼가 답했다.
“하지만 성이든 감옥이든, 자꾸 그렇게 벽을 쌓다가는 자네가 의심받을 거네, 프란첸 경. 다름 아닌 바로 자네 자신이 그 안의 괴물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이네.”
“그것도 제 업보겠지요.”
막시밀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업보를 지게 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 성에만 평생 가둬 두려 합니다.”
그 자리의 귀족 중 프란첸가의 독자가 그 정도로 완곡하게 얘기하는 걸 못 알아들을 만한 자도 없었다.
그들은 제 성의 고용인을 한번 요른의 결혼 상대로 내밀어 보려 했던 생각을 접거나 한참 뒤로 미루었다. 지금 공작 부인을 도와 프란첸가와의 연을 돈독히 할 수야 있겠지만, 젊은 후계자가 저런 태도로 나온다면 나중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베스퍼가 가장 먼저 나서서 물어 준 게 다행이었다.
‘베스퍼야 그렇다 치고, 저 독자는 어쩌다가.’
다들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차기는 했다.
‘마물 취향도 아닐 텐데 왜 그런 애한테 집착하게 되어 버린 거지. 어릴 때부터 너무 완벽하게만 살다 보니 안에서 비틀려서 이상 성벽 같은 게 생겨 버린 건가.’
여하간 귀족들은 그 하얀 괴물이 프란첸가의 소유이며, 앞으로도 그 가문의 소유로만 남을 거란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성황이 포도주가 든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폐회를 선포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베스퍼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성황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가 모두의 공적을 치하하고 앞으로의 행운을 빌어 준 걸 끝으로 조찬회는 파했다. 가문의 다른 자들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전한 다음, 베스퍼는 혼자 말을 끌고 움베르토의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 건물 앞에 다다라 베스퍼는 대기하고 있던 종자에게 고삐를 맡기고 기다렸다. 곧 직원 하나가 정문을 열고 나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베스퍼가 움베르토의 이름을 대자 그는 난색을 표했다.
“지금 얘기 중이시라서요.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시는 바람에…….”
“손님?”
“예, 예. 저희도 좀 당황했습니다.”
직원이 답하는 걸 보고 베스퍼도 무표정한 가운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 비밀 연구소에 외부 인사가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사센 소장님께 말씀은 꼭 전해 두겠습니다.”
베스퍼는 알겠다고 답하고 물러났다. 밖에서 다시 종자를 불러 말고삐를 손에 쥐며 그는 연구소 건물 1층, 접견실의 창문에 흘끔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얇은 레이스 커튼이 몇 겹으로 처져 있어서 안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1층의 접견실은 인체 강화 연구소에서는 그래도 햇살이 가장 잘 들어오는 방이다. 그 방 한편의 마호가니 탁자 건너로 손님과 마주 앉은 채 움베르토는 외눈을 찡그렸고, 손님은 빙긋 웃었다.
제 아들과 정말 비슷하게 생겼군. 모자를 벗고 새카만 머리채를 드러낸 프란첸 공작 부인을 보며 움베르토는 생각했다.
영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 공작 부인은 전부터 마검이며 마물 합성에 관련된 신선한 이론들을 많이 내놓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위에서도 그녀에게 이 연구소의 존재에 대해 알려 주지 않을까 했다.
다만 이렇게 일찍 진행될 줄은 몰랐을 뿐이다. 프란첸 공작 부부가 성황국 수도에 며칠 머문다는 얘기야 들었지만, 의례적으로 성황께 인사를 드리고 제 아들도 살펴보러 오는 거겠거니 했지, 공작 부인만 따로 이런 특명을 부여받았을 줄은 몰랐다.
재능 하나하나가 정말 급하긴 한가 보군. 생각하며 그는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디트 폰 프란첸은 탁자 맞은편에 턱을 괸 채 앉아 있다가 움베르토의 외눈과 마주치자 그대로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마검 개발부와 이곳 연구소가 서로 협력하면 어떻겠냐는 거죠.”
“여기서 하는 실험은 기밀인데요. 다른 부서와 나눌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다 공개하라는 건 아니지요.”
유디트가 소녀처럼 방긋 웃었다.
“중요한 결과 몇 가지만 제게 넘겨주시면 제가 알아서 수정해서 개발부에 넘기겠습니다. 위험한 연구를 적당히 에둘러 보고하는 건 제가 평생 해 온 작업인걸요? 흑마법 대책부 장관님과도 다 얘기가 되어 있는 일입니다.”
“성검 때문입니까?”
“예.”
유디트가 답했다.
“논문에도 썼지만, 저는 성검이란 결국 마검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혹은 최소한 그런 식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죠.”
“저도 그 논문은 봤습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생각 아니십니까?”
“마물의 몸은 마물로만 상처 입힐 수 있지요. 특히나 강한 마물로 된 마검일수록 좋고요.”
“그거야 사실입니다만.”
움베르토는 끄덕거렸다. 강한 마물을 섞은 검을 쓰면 약체 마물 따위는 기사가 힘을 크게 쓸 필요도 없이 썰어 버릴 수 있고, 반면 약한 마물로 된 검으로 강한 마물을 상대하기는 무리다. 검이 상하거나 심지어 부러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유디트가 되물어 왔다.
“그렇다면 모든 마물을 사살할 수 있다는 성검이란 결국 뭐겠어요?”
“사살하는 게 아니라 정화하는 건데요. 다른 얘기죠.”
“그래요, 전설에 따르면 물론 성검은 마물을 다 정화해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하죠.”
유디트가 왠지 차갑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그 신비로운 성검이 강림해 주시길 기다리느니, 우리가 이 손으로 제작할 수 있는 한의 범위에서만 얘기하자고요. 성검을 그냥 어떤 마물이든 베어 버릴 수 있는 최강의 마검이라고 치잔 말이죠.”
“……그렇다면야.”
“성검을 그렇게 정의한다면, 성검이란 뭐겠습니까?”
“가장 강한 마물로 된 마검이겠죠.”
“그래요. 그럼 가장 강한 마물이란 뭐죠?”
“글쎄요. 흑마법사들 예언에 따르자면 마왕이려나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여러 강한 마물을 섞으면 대충 그들을 합한 만큼 더 강한 마물이 나올 겁니다.”
“그렇죠.”
유디트가 미소 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움베르토 씨가 진행하시는 작업이란 게 여러 마물을 서로 섞는 거 아닌가요?”
“아뇨. 아까부터 자꾸 미묘하게 엇나가시는데, 사람 몸에 마물을 섞어서 강화하는 겁니다.”
“그래요. 하지만 어떤 인간 피험체의 몸에는 여러 마물을 한꺼번에 섞어 넣기도 하신다던데요? 그래도 그 인간은 몇 년째 멀쩡하게 살아남았고요.”
움베르토가 입을 다물었고, 유디트가 생긋 웃었다. 움베르토는 결국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흑마법 부서 위쪽 인간들은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이 공작 부인한테 대체 어디까지 털어놓은 거야.
그래도 그자들이 설마 피험체 신상에 대한 침묵 서약을 깨지는 않았으리라 믿으며, 그는 공작 부인에게 떠보듯이 물었다.
“그 피험체에게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아뇨, 그게 누군지야 아무래도 좋고요.”
공작 부인이 손을 저어 보였다.
“안심하세요. 저는 피험체들 신상은 전혀 모릅니다. 그거야 이 연구소 핵심 기밀 아닌가요? 제가 알고 싶은 건 다만, 그 피험체를 촉매로 해서 마물을 서로 합성할 수는 없냐는 겁니다. 몸뚱이 전체를 쓰기는 아깝다면 살점이나 조직 일부만 이용해도 좋고요.”
“그다음 그 섞인 걸 마검 재료로 이용하자고요?”
“합성 마검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게 온갖 마물이 다 잘 섞여 드는 몸이 있다는데, 왜 그 몸을 촉매로 쓰면 안 되죠?”
유디트가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러면 성검에 무한히 가까운 마검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예, 안 될 건 없습니다.”
움베르토가 찡그린 채 답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는 이해하겠습니다. 단, 그는 저희 인체 강화 실험에 있어서도 중요한 피험체입니다. 아예 망가져 버릴 정도로 마검 개발부 쪽에 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이죠.”
공작 부인이 얼른 받아 답했다.
“빌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연구소에서 마물 합성 실험도 진행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얘기예요. 인체를 매개로 다수 마물을 서로 섞는 실험을요. 그 섞인 걸 어떻게 다시 합성 마검 재료로 활용할지는…… 마검 개발부에서 생각해 보라고 하고요.”
“알겠습니다.”
움베르토가 끄덕거리며 괜히 벽시계 쪽으로 흘끗 눈길을 주었다. 유디트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베르토가 배웅하기 위해 문 쪽으로 따라 나오자 유디트가 손을 내밀었다.
“공작 부인.”
“에이, 같은 학자끼리 그렇게 예를 차리면 섭해요. 악수로 하죠.”
움베르토가 가슴에 손을 댄 채 허리를 숙여 보였지만 유디트는 고개를 저었다. 움베르토는 조심스럽게 얇은 사슴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제야 만족한 듯 마주 잡아 흔들고는 떠났다.
움베르토는 한숨을 쉬며 탁자로 돌아와 유디트가 넘겨주고 간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마검 개발부의 실험 일정표다. 이쪽 연구소 일정도 저쪽과 대충 맞추라고 참고용으로 주고 간 것이다.
“마검 개발부가 요즘 합성 마검에 열성인 건 알지만, 정말이지.”
잘도 이 연구소의 실험이랑 연결할 생각을 했군. 움베르토는 왠지 피식 웃어 버렸다. 전에도 느꼈지만 저 유디트 폰 프란첸 공작 부인은 움베르토 자신보다도 더 대담한 구석이 있다. 성검을 그런 식으로 정의할 생각을 하다니.
하기사 용사는 그렇다 치고, 그놈의 성검을 손 놓고 강림만 기다릴 수는 없긴 하다고 움베르토도 생각했다. 기다리는 동안 죽어 나갈 인간들이 몇인가. 아니더라도 돌이킬 수 없이 변해 버릴 자들이.
그는 무심코 손을 올려 자기 왼쪽 눈의 상처를 건드렸다. 눈알과 눈꺼풀이 사라진 자리에는 울퉁불퉁하게 녹아내린 살점만 남아 있었다. 오른쪽 눈마저 내리감자 어둠 속에서 기억만이 깊게 파고들어 왔다. 그 언덕, 고통과 공포,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베스퍼의 얼굴.
“한 명이라도 덜 겪는 게 좋긴 하지.”
다소 허탈하게 중얼거리면서 움베르토는 요른을 생각했다. 이 일정표대로라면 사나흘 내로 그 애를 다시 불러들여서 이번에는 성질이 좀 다른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그는 직원 하나를 불러서 다나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했다.
* * *
이틀 후 시내 양장점에서, 요른은 양팔을 펼쳐 든 채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안경을 쓴 노인이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조심스레 줄자를 둘러 가슴둘레를 재었다. 요른은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천장만 쳐다보려 애썼다. 노인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정면을 봐 주십시오. 치수가 달라집니다.”
요른은 얼른 머리를 내렸다.
그는 프란첸 공작 부인이 소개해 주신 양장점의 시민 대상 점포에 들어와 있었다. 한 상회에서 경영하는 양장점이 대로를 끼고 한쪽에는 시민 대상, 한쪽에는 귀족 전문 점포를 서로 살짝 엇갈려 마주 보게끔 내어 놓고 있는 터였다.
[맞선을 보려면 옷도 좀 갖춰 입고 가야 하지 않겠니.]
공작 부인은 어제 마도 학원에 직접 들러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양장점의 주소가 적힌 명함을 내어 주셨고, 주머니에 동화도 넉넉히 담아 넘겨주셨다.
[새로 한 벌 맞추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으니까……. 내가 거기 미리 네 이름으로 사 놓은 기성복이 있거든. 그걸 네 치수에 맞춰 수선해 달라고 해.]
[예, 예.]
[늦어도 사흘 후까지는 꼭 맞춰 두고 내게 영수증을 보내렴.]
그녀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요른은 감사를 표하며 돈을 받아들었다.
치수 측량이 끝나자 주인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요른더러 이제 내려와도 좋다고 했다. 요른은 조심스레 발을 디뎠고, 주인이 한걸음 물러서며 말하는 걸 들었다.
“닷새 후까지는 수선해 두겠습니다. 가지러 오시겠습니까, 배달해드릴까요?”
되도록 시내를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요른은 배달을 부탁했다. 주인이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맞선 축하드립니다. 저희 정장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요른은 창백해진 채 대충 예를 표한 후 양장점에서 나왔다.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포치 아래까지 짓쳐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눈이 시렸다. 요른은 한쪽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눈 위로 우산처럼 받쳤다. 그 그늘을 통해 길 건너편 점포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막시밀리안. 요른은 자칫 그 이름을 속삭일 뻔했다. 하지만 그 전에 그가 먼저 눈을 들어 이쪽을 겨누고는 웃었다.
“요른.”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요른이 나올 시간에 일부러 딱 맞춰서 자신도 맞은편 점포에서 빠져나왔다는 듯이.
막시밀리안은 대로에 가득한 햇빛을 통과해 길을 가로질렀고, 이쪽 점포의 2층 포치 아래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 요른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늘 그렇듯 두 걸음 정도의 거리만 두고.
“맞선 때문에 옷 맞춘 거야? 어머니한테서 얘기 들었어.”
“응.”
끄덕거리면서 요른은 질문을 입 안에 머금었다. 너는……?
막시밀리안도 그 초상화 속의 여인 때문에 옷을 맞추거나 수선한 것이리라. 막시가 다시 운을 떼었다.
“8일 후에 만난다고 했던가? 라우라 포글이라는 상인가 따님이 그때 이 수도에 들르신다고.”
“응.”
“그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응.”
요른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시밀리안이 싱긋 웃었다.
“별거 아니잖아. 평소에 늘 하던 대로 하면 돼.”
“응, 응.”
“너무 긴장하지 말고.”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눈을 맑게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잘해 왔잖아. 믿을게.”
요른이 물끄러미 마주 시선을 던지자 그는 긍정의 뜻으로 생각했는지 곧 돌아섰다. 하지만 요른은 사실 등 뒤로 주먹을 꽉 숨겨 쥐고 있었다.
‘뭐지.’
요른은 숨이 막힌 채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주먹을 쥔 게 아니었다. 몸을 타고 휘도는 힘이 손마디를 우그러뜨리듯이 안으로 죄어들었기에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긴장해 있자니 힘겨워서 자꾸 등이 굽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만은 마치 허공에 꽂힌 양 막시밀리안의 등을 향해 꼿꼿하게 들렸다.
억지로나마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요른은 자신의 상태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어딘가 몸이 아픈 건가, 혹시 실험의 부작용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몸의 모든 감각이 너무도 막시밀리안의 뒷모습만을 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막시밀리안이라는 듯이. 어디서 나온 건지도 모를 이상한 상념들만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헤엄쳤다.
나는 물론 잘 해낼 거야, 막시.
그러면 너는?
요른은 8일 후 맞선 자리에서 또 패악을 부릴 것이다. 물론 라우라라는 그 소녀 쪽에서 먼저 요른을 거절할 확률이 더 높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손톱만 한 호의라도 보인다면 요른은 당장 막시와 약속한 방법을 쓸 거고 그래서 그 소녀를 자기 인생에서 확실하게 내쫓아 줄 것이다.
맞선이라고는 해도 요른은 그 소녀의 근처에도 가지 않은 채 그렇게 끝낼 것이다. 옷깃 한 점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내일 그 초상화 속 또래 마법사의 손을 잡아 줄지도 모른다. 최소한 함께 걷는 동안만은 예의로라도 팔짱 정도는 허락할 수도 있고, 살롱 피아노 앞에 나란히 붙어 앉아 담소를 나눌지도 모른다.
턱이 하도 앙다물려서 입술에 감각이 없어져 갔다. 요른은 지금 자기 자신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에 어떤 한 장면만이 자꾸 떠올랐고, 지금 돌아서서 떠나가는 막시밀리안의 등과 겹쳤다. 열두 살짜리 기사 생도의 작은 등.
[하지 마.]
언덕 위에서 그는 검을 꽉 쥐고 들어 올린 채 떨고 있었다.
[하지 마, 내 친구들을 내버려 둬!]
며칠 전, 프란첸가 별성의 서재에서 요른은 분명 막시가 누군가와 맺어져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도 마음을 지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보며 요른은 그 감각을 다르게 이해했다. 나흘 전 한밤중에 요른의 안에서 깨어나온 기억인지 환각인지 모를 장면이, 그 어린 소년의 등이 환한 조명처럼 그의 모든 다른 기억을 새롭게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건 소망이 아니었다.
협박이었다.
눈앞이 어둡게 붉어지면서 순간 그로쉔 학원 시절의 기억까지도 한꺼번에 번득였다. 막시는 요른이 뭔가를 잘못하면 연을 끊어 버리겠다고 겁을 줬었다. 요른은 그러나 당시 자신이 과연 그 선언을 두려워만 했던가 돌이켰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정오의 태양 아래 백색 소년의 뇌리에 감겨들었다.
막시밀리안, 네가 하지 말라고 해서 그날 나는 하지 않았다.
네가 약속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작은 네가 그렇게 떨면서 내게 빌고 또 빌었기에 나는 당장 그만두었고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언덕 위에서와 똑같이 등을 보이며 너는 이제 나를 떠나가려 하고 있다.
감히 떠나 봐라. 요른의 피가 혈관의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들끓으며 외쳤다. 어디 다른 자를 찾아봐라.
나도 내 안에서 이 마음을 지워 버리고 말 테니.
너는 그게 내게 있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아주 잘 알고 있지.
막시밀리안.
그는 자신이 생각만 했는지,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냈는지 알 수 없었다. 젊은 성기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고, 멀찍이 선 채 고개만 돌려 불렀다.
“요른.”
요른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피가 소용돌이치며 목을 막았다. 막시밀리안이 답도 기다리지 않고 낭랑한 음성으로 전해 왔다.
“나는 용사가 될 거야.”
다소 뜬금없는 소리였다. 대로변의 다른 사람들도 듣고는 그 앳된 청년을 돌아보았지만, 그가 수도 성기사단의 막시밀리안이라는 걸 알자 금세 납득하고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주변은 돌아보지 않고 요른에게만 눈길을 준 채 재차 다짐하듯이 말했다.
“내 인생에 다른 목표는 없어. 난 반드시 용사가 될 거야.”
“으, 응.”
요른이 그제야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날 믿어?”
“응.”
요른은 이번에는 즉답했다.
거기 답하는 건 숨 쉬듯이 쉬웠다. 꾸며낼 필요도 없이 그저 바위가 바위라는 식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되었다. 대륙의 누구든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 그런 포부를 밝혔을 때 굳이 의심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막시는 희미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난 내일이랑 모레는 바쁠 거야. 하지만 출정 전에 한번 기숙사로 다녀갈게.”
“응.”
요른이 답하자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요른은 왠지 마음이 조금 평온해진 채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주고 있었다.
요른은 그날 밤 편히 잘 자고 다음 날 수업에 들렀다. 저녁에는 연구소에 가야 할 터였다. 실험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지고 내용도 변한 탓이다.
원래 다나의 편지에는 모레 연구소에 들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요른은 다나의 편지를 받은 날 저녁에 바로 강사실을 찾아갔고, 쭈뼛거리면서도 면담을 요청했다. 일정을 며칠이라도 조정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물어 왔다.
“늦춰 달라는 것도 아니고 더 일찍 하자니, 무슨 일이니?”
“저기, 저, 제가.”
“응.”
다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한참 제 손만 만지작거리다가 요른은 아흐레 뒤에 맞선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리다시피 했지만 다나는 재깍 알아듣고 끄덕거렸고, 흔쾌히 날을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그래, 너도 그럴 나이가 되었구나. 잘하고 오렴.”
“실험, 은요.”
“앞으로도 계속해야지.”
다나가 딱 잘라 말했다.
“맞선이 잘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지? 안심해. 잘 안 될 거야. 앞으로도 평생 혼자 살면서 우리 피험체로 일해 주면 돼.”
“……예.”
“움베르토도 말했잖아. 네 길은 소위 정상적인 삶이 아냐. 우리 실험실이 딱 맞아.”
요른은 다나가 칭찬의 의미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어쨌든 공작 부인께서 마련해 주신 자리니까 꼼꼼하게 준비해야지. 상대한테 초췌한 꼴을 보이면 곤란하니까, 가능한 한 일찍 해치우고 충분히 쉰 후에 나가고 싶다는 거지?”
“예.”
“그래, 당연히 이해해. 실험 날짜는 그럼 이틀을 앞당겨서 모레로 하자.”
요른은 감사의 예를 표하고 물러 나왔다. 그리고 주말인 다음 날 양장점에 들러 옷을 맞추었고, 그다음 날인 오늘 학교에 나온 것이다.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으러 교정을 돌아다니면서 요른은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폰 프란첸 공작가 후계자의 맞선에 대한 이야기.
지난 며칠 내내 이랬다. 가는 곳마다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맞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학원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시내 상인들도 어쩐지 모두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었던 탓이다. 이야기가 어찌 우연히 새어 나간 건지, 아니면 공작 부부가 막시밀리안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 일반에까지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요른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강의실에 갈 때든, 마법진을 그릴 재료를 사러 시내 화방에 나갈 때든 그의 귀에는 여지없이 프란첸가의 독자와 크라우스가 영애의 이름이 마치 자석에 끌리듯 끌려 들어와 쏙쏙 박히곤 했다.
“그 후계자가 드디어 공식적으로 맞선을 보는군.”
화방에서 선물용 고급 깃펜을 고르던, 잘 차려입은 손님 하나가 말했다.
“다과회나 독서회에서 섞여 만나는 게 아니야. 드디어 맞선이야. 딱 단둘만 만나서 자기 성의 갤러리와 정원, 살롱 같은 데에서 한나절은 시간을 보낼 거란 말이야.”
“거기서 그치겠어?”
친구인 듯한 자가 받아서 이죽거렸다. 진열장 물건을 정리하던 여드름 난 어린 직원은 벌써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른 손님은 모른 척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공작 후계자치고는 좀 나이가 늦었지 않나. 그러니 급히 일을 처리하려고 들 텐데, 그러면 일정을 말이지.”
“가둬 놓고 원래 한나절 일정이던 걸 이틀로 강제로 늘려 버릴 수도 있다, 그건가?”
“쉬…….”
손님은 제가 말을 꺼내 놓고는 괜히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리며 웃었다. 다른 손님과 직원 아이도 헛웃음을 쳤다.
요른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수도에서는 이제 귀족이나 부유층은 물론, 저 꼬마 직원 같은 온갖 무지렁이도 막시밀리안의 맞선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사람들 말만 듣자면 막시와 그 영애의 혼사는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둘이 서로가 마음에 든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죽을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는 고백 정도만 받아 내면 두 집안에서 당장 발 벗고 나서서 둘을 붙여 놓으리라는 것이다.
며칠 내내 학원에서든 시내에서든 이런 얘기를 듣고 다니느라 요른은 어제 양장점 앞에서 막시를 만났을 때 이미 많이 흔들려 있던 상태였다. 막시가 포부를 밝히는 걸 듣고 나서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졌는데, 교정을 걸으려니 속이 다시 들썩대기 시작했다.
수업이 모두 끝났다.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건물을 나오면서 요른은 속이 경련하듯이 쑤시는 걸 느꼈다. 그는 급히 외벽 한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괜찮아.’
요른은 가방으로 가슴을 꽉 눌렀다.
‘이제 돌아가서 방에만 있으면 돼. 그러면 더는 아무 얘기도 안 들리니까 나아질 거야.’
그리고 저녁에는 연구소에 들르면 된다. 그는 생각했다. 거기 있는 동안에는 어차피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요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걷는 도중에 위장이 너무 심하게 계속 조여 들었다. 기숙사 방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가방을 바닥에 대충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다.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을 때 쓰는 작은 나무 대야에 속을 게워내며 요른은 조금 울었다.
‘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위액까지 다 토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왜 멋대로 원하고, 멋대로 실망해서 이렇게까지……. 어떻게 이렇게 한심한 인간일까.’
요른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고, 세면대가 놓여 있는 벽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망설였다.
그는 사실 지난 며칠, 막시밀리안이 맞선을 수락했던 만찬을 떠올리며 방에서 자주 울었다. 하지만 울고 난 다음 지금까지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고 세수도 고개를 숙인 채로만 했다. 자기 꼴을 마주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다. 요른은 숨을 짧게 훅 들이쉬고는 거울을 직시했다.
‘어.’
타인 같은 창백한 은빛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그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손을 들어 매끄러운 표면을 매만졌다. 평생 스스로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감정의 정체를 그는 거울 속에서야 알아보았다. 평소 요른을 향하곤 했던 다른 사람들의 얼굴.
자책감이나 슬픔도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도 아니다. 오직 상대만을, 그것도 대등한 땅 위에서가 아니라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송곳같이 노려 깔아뭉개는 표정.
“안 돼, 안 돼.”
그는 거울 표면을 손끝으로 누르며 속삭였다.
“네가 왜, 네가 뭔데. 그러지 마. 막시밀리안한테 그러지 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요른은 거울을 끊임없이 달래듯 쓰다듬으며 되새겼다. 잘못한 건 요른 자신이다. 멋대로 그와 닿는 꿈을 꾸었고 몽정했다. 멋대로 그를 사랑해서 반려가 되기를 원하기까지 한다.
엎드려 빌어도 용서받지 못할 망상을 혼자서 수도 없이 해 놓고 그런 걸 들어 주지 않는다고 상대에게 화가 나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아무리 한심한 생물이라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러나 거울 속에서 은빛 눈이 전해 왔다. 아니, 그건 네 망상이 아냐.
그게 약속이었다.
요른의 눈앞에 다시 그 열두 살짜리의 작은 등이 짙어졌다. 그는 자신이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건지, 거울 속의 눈동자가 금지 마법으로 전해 오고 있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두 눈을 손으로 누르고 신음하며 요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가짜 기억이야.’
그는 한 자 한 자 눌러쓰듯이 되새겼다.
‘나는 기억이 불안정하니까, 견학 때 있었던 일도 스스로는 거의 떠올리지 못했는걸. 막시가 나중에 옳은 기억만 정해서 잘 얘기해 줬잖아. 그것만 믿으면 되는데.’
요른은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둠 속에서 환상만 점점 더 어지러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떴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주었던 문서에 새겨져 있던 단어 하나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순간 울컥 눈꺼풀 밑으로 튀어나와 포효하며 그를 불렀다.
“싫어.”
요른은 외쳤다.
“그런 건 몰라. 나는 요른이야. 막시…… 막시밀리안!”
우리 요른.
착하다, 요른.
막시밀리안이 늘 불러 주었던 이름이다. 그러니 자신이 다른 이름이 있을 리가 없다.
요른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침대 곁으로 다가가 수납장 서랍 안을 뒤졌다. 훈장이 두어 개 만져지자 그는 당장 움켜쥐고 가슴에 꽉 안았다. 그리고 견학 때의 일을 떠올리며 진정하려 애썼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바로 그 기억이 이제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린 막시밀리안이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며 요른의 머릿속에 정돈해 넣어 주었던 기억이 더 강력한 다른 상들로 대체되어 버렸다. 흑마법사가 건네주었던 문서가 불러낸, 오히려 마치 이쪽이 요른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일인 양 생생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기이한 환상의 조각들로.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개중에서도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불가능하다.
그게 요른 자신이었을 수는 없다.
한참을 헤매다가 요른은 다른 기억을 붙잡기로 했다. 그는 개중에도 가장 신선한 장면을, 어제 양장점 앞에서 접했던 막시밀리안의 낭랑한 음성과 얼굴의 윤곽을 떠올렸다. 용사가 되겠다고 선포하던 그 단단한 몸과 태도.
그러면서 그 하얀 소년은 훈장을 제 가슴 한복판에 꾹 눌렀다. 기사가 새를 살해하는 모양의 양각을 심장에 각인시키듯이, 가슴뼈가 뻐개지는 느낌마저 들 때까지.
난 용사가 될 거야. 한낮의 태양 아래 열아홉 살의 성기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 음성이 환상 속 열두 살 소년의 목소리와 완전무결한 화음처럼 겹쳤다. 약속할게.
그리고 그 음률이 고운 사슬처럼 그를 땅으로 끌어당겼다.
요른은 땀에 젖은 채로 정신을 차렸다. 훈장을 꽉 틀어쥐고 있던 손은 마디가 어긋날 정도였고, 훈장의 금속 부분에 너무 눌려서 복장뼈도 삐걱거렸다. 그래도 중력감만은 돌아와 있었다. 요른은 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속삭이며 훈장에게 말을 걸듯이 하고는, 맥박이 조금 더 진정된 다음에야 그는 훈장을 다시 수납장에 넣었다.
요른은 벽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았다.
가루 치약으로 잘 거품을 내어 이를 닦은 후 그는 연구소에 들를 채비를 했다. 그러나 웃옷을 챙겨입던 손을 멈추고 요른은 잠시 주저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혹시라도 실험을 받는 도중에 이런 식으로 발작해 버리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곧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연구소에서는 워낙 아프고 정신이 흐리니까 쓸데없는 상념이 끼어들 겨를도 없지 않던가. 방에서 이러고 있느니 거기 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요른은 훈장을 실험실에도 가져갈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털어 버렸다. 거기 가면 어차피 속옷 빼고는 다 벗어야 하고 소지품도 넘겨줘야 하니까, 자칫 잃어버리기나 하기 십상이리라.
그는 여느 때처럼 아무 짐도 들지 않고 기숙사 열쇠만 챙겨 나갔고, 강사 기숙사에 들러 미리 기다리고 있던 다나와 합류해서 비밀통로를 지나 연구소에 도착했다. 실험실에서는 움베르토가 직원들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확인하듯이 요른에게 물어 왔다.
“편지는 받아봤지?”
“예.”
“그럼 오늘은 좀 다른 실험을 한다는 것도 알지?”
“예.”
요른은 끄덕이며 다나의 편지에 쓰여 있던 일정을 돌이켰다. 오늘은 몸에 마물이 섞여 드는 과정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몸을 매개로 해서 마물이 서로 몇 마리까지 섞일 수 있나 수를 센다고 했다. 움베르토가 다시 물어 왔다.
“지난번 실험한 후로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지. 몸은 괜찮아?”
“괜찮아요.”
“원래대로면 2주 간격은 줘야 하는데, 미안하다. 다른 부서랑도 협력하게 되면서 일정도 바뀌었어. 아 참, 맞선 얘기 들었어. 만나서 잘 거절할 거지?”
“예. 날짜를 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앉아라.”
요른은 윗옷과 바지를 개켜 놓고 의자에 앉았다. 직원들은 요른의 가슴 한복판에 남은 이상한 자국을 보고 갸웃했지만, 곧 능숙하게 그의 사지를 가죽끈으로 묶었고, 발목과 손목에는 따로 사슬을 감아 바닥의 고리에 연결했다.
곧 움베르토가 지시를 내렸다. 고통 때문에 요른은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침침한 눈으로 깨어나곤 했다.
치료 마법사들이 의자 양옆을 지키며 계속 마법을 써 주었다. 평소와는 달리 배 속이 아니라 팔목과 허벅지, 어깨 곳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요른이 정신을 차린 걸 보자 움베르토가 나직이 설명해 주었다.
“살점을 떼어 냈어. 혹시 부분만 써도 되나 하고.”
“…….”
“잘 안 되네. 네 몸에 마물 섞이는 거 있잖아, 아무래도 생명이 붙어 있을 때만 되나 봐. 떼어 내서 죽고 나면 하나도 안 섞인다.”
움베르토가 요른의 흐린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본체에 직접 해야겠다. 오늘은 특히 많이 섞어 넣을 테니까, 상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말해. 즉시 그만둘 거야. 알겠니?”
“예.”
요른이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자마자 움베르토는 작업을 시작했다.
요른은 피부 상처를 통해 마물 가루를 받아들이고, 입으로 잘게 썬 조각들을 삼켰고, 배에 열린 구멍을 통해 녹인 용액을 내장 안으로도 직접 주입당했다. 움베르토가 바로 옆의 동료에게 말했다.
“열 마리째인데 아무 반응도 없어.”
“그러게요.”
동료가 답했다.
“셋을 섞으나 열을 섞으나 반응이 똑같아요. 아무 거부 반응도, 잠식 전조 증상도 없네요. 예상이야 했지만, 역시 참 괴상하게 훌륭한 몸이에요.”
“더 넣어 보자.”
“여기서 더요?”
“성검 만들려면 이 정도로는 안 돼.”
움베르토가 말하는 게 들렸다.
“적어도 수십 마리는 섞어야겠지. 오늘은 역치를 알아보려는 거니까, 반응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올 때까지 소량씩 계속 넣어 보자. 마릿수는 늘리되 한 마리당 극소량만 해서.”
“알겠습니다.”
“……까지 머무른다면서.”
둘의 대화에 섞여 요른의 귀에 결이 전혀 다른 얘기가 들려왔다.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 경 말이야. 오늘 맞선이잖아? 그런데 부모가 슬슬 맘이 달았는지, 하인들 시켜서 그 영애랑 둘이 한 방에 가둬 놓을 거래.”
“밤 내내?”
“응. 못 나오게 잠가 놓고, 무슨 핑계를 대고 문 앞에 병사도 배치해서.”
“그래도 둘이 아무 짓도 안 해 버리면 끝이지. 아니, 그래도 소문이 난다 이건가?”
“그럼. 불장난도 아니고 정식 맞선에서 그렇게 밤을 보내 놓고 결혼은 안 해 버리면 아무래도 소문이 나니까.”
“조용히 좀 하죠.”
움베르토는 미간만 살짝 찌푸렸고, 동료가 대신 혀를 차며 개수대 쪽을 돌아보았다. 샬레와 시험관 등을 씻고 있던 스물 후반쯤 된 애들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어린 축이다 보니 허드렛일밖에 받지 못해 심심했던 모양이다. 애들은 얼른 씻은 것들을 건조대에 걸쳐 놓고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동료는 다시 의자에 길게 누워 있는 요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움베르토는 마침 노트에 필기를 하던 중이었다. 동료는 뭔가를 눈치채고 움베르토의 어깨를 급히 움켜잡았다.
“그만, 그만하죠.”
말하며 그는 요른의 가슴께를 가리켜 보였다.
“반응이.”
피험체의 가슴 한복판에 남아 있던, 뭔가 단단한 물체에 꽉 눌렸던 듯한 붉은 멍 자국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대신에 그 자리의 살점이 변하며 철갑 같은 흰 깃털이 자라나더니 순식간에 어깨, 목, 허벅지와 사지를 에둘렀다. 머리칼이 뾰족한 부리 모양의 투구로 바뀌어 얼굴 전체를 감쌌고 등이 쩍 갈라지듯이 열리며 후광 같은 날개가 돋아나 의자를 부수었다.
직원과 움베르토는 뒤로 물러서면서 성기사들을 불렀다. 베스퍼와 다른 자가 뛰쳐나와 마검을 뽑았지만, 새의 빛이 닿자 마검은 사기그릇처럼 깨져 버렸다.
“빌어먹을.”
움베르토가 중얼거렸다.
“새는, 저런 건, 섞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는 곧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부서져라 틀어쥐었다. 또렷한 사고가 뇌를 파고들어 왔기 때문이다.
감히.
‘그랬지, 내일과 모레는 바쁘다고 했지. 내일만 바쁜 게 아니라.’
몰랐던 것도 아니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 영애와 밤을 보내게 될 거라고. 그런데도 나를 기만하고 그렇게 웃으며 등을 돌렸어.
두개골 안에서 점멸하는 감각이 움베르토의 혈관과 뱃속, 피부로도 신호를 전했고, 덕분에 온몸이 타는 듯이 아팠다. 완전히 압도당한 채로도 움베르토는 어떻게든 스스로도 생각을 해 보려고 애쓰며 뇌의 남은 부분을 짜냈다.
아니야. 이건 내 자신의 생각이 아냐, 남의 생각이야. 움베르토는 일부러 입 밖으로 내어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내 뇌를…… 그러나 그는 찡그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를 깨물었다. 아니, 모두의 뇌를 지배하는 거야.
수십 년의 연구로 단련된 움베르토의 머리는 다행히 하나의 사고만으로 꽉 차지는 않았고, 빈구석 곳곳에서 어떤 착상이 깨어났다. 그러나 거기서 해결책 비슷한 거라도 끄집어내기도 전에 허공에 또 다른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신음했다.
그 견학 때의 재현이다.
움베르토는 베스퍼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어느새 자기 앞에 바짝 다가와 있다는 데에 놀랐다. 마검이 부러진 채 그 성기사는 자신의 몸으로라도 상대를 막아 지켜 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넓은 등.
움베르토는 이를 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갈았고, 인간 소년과 새의 형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지러지며 변모하고 있는 것, 밤하늘에 불꽃이 수놓이듯 실험실 허공 사방에서 움터 나오는 마물들 한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백색의 존재에게 외쳤다.
“요른!”
움베르토는 자기 음성이 지나치게 처연한 게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해, 후회할 거야!”
* * *
성황국 수도 시내 골목, 중년의 성기사는 손을 들어 수하 병사들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검을 든 채 마법사 파트너와 함께 스스로 앞으로 나섰다.
“잘도 숨어 다녔군.”
그는 후드를 뒤집어쓴 흑마법사에게 말했다.
다가갈수록 시체 냄새가 매캐하게 엄습했다. 흑마법사들은 반쯤 죽은 몸으로 살고 있다더니 정말인가. 막시밀리안의 부관인 그 성기사도 흑마법사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긴장한 채 접근했고, 파트너는 왼손을 살짝 밖으로 뻗은 채 두 걸음 정도 뒤를 따랐다.
흑마법사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뒤로 물러서다가 벽에 등을 대는 걸로 봐서 몰아붙여진 건 확실한 듯했다. 파트너가 흑마법사의 환각 마법을 경계하는 동안 성기사가 말했다.
“얌전히 무릎을 꿇어. 양손은 머리 뒤에 깍지 껴서 대고.”
흑마법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파트너가 날카롭게 신음했다.
성기사도 제 뇌를 누군가 다른 자가 가지고 노는 듯한 감각에 당황했고, 파트너의 상태까지 확인하고 나자 손에 진땀이 났다. 평소에 강철같이 의지해 온 파트너인데 막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당해 버렸다. 병사들도 이미 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상대라니. 그는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흑마법사에게 검을 겨눈 채 말했다.
“그만해. 아니면 벤다.”
“내가 아니야.”
흑마법사가 웃음기 섞인 소리로 답했다.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
그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성기사는 긴장했고, 파트너도 남은 정신을 그러모아 마법을 쓸 채비를 했다. 그러나 흑마법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어떻게……?”
파트너가 토해 내듯이 말했다. 그리고 성기사의 시선을 눈치채자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말하자면 전송 마법이야. 하지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성기사가 등이 차가워진 채로 물었다.
“자기 몸을 어딘가로 전송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말하자면 그렇다고밖에는…….”
“말이 돼?”
“나도 믿을 수 없어.”
파트너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
실제 사물을 전송하는 건, 더군다나 신체를 전송하는 건 불가능하다. 최소한 정령 마법의 틀 안에서는 그렇다. 타블로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거대한 힘의 원천이 정말로 존재하는 게 아닌 한……. 생각해 보려 애쓰다가 그는 환각에 압도당해 못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성기사는 조금 더 오래 버텼다. 그러나 그도 결국 벽에 등을 기대었다. 병사들은 모두 바닥을 뒹굴고 경련하며 한목소리로 합창하게 된 지 오래였다. 성기사도 결국 그 합창에 가지를 보탰다.
“아, 이런, 젠장. 발탄더스, 발탄더스.”
수도 시내의 다소 외진 곳, 평상복 차림으로 호텔 2층 방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막시밀리안도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섰다.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북쪽 외곽의 폰 크라우스가 별장에 있었다. 그 아담한 성 3층 침실에 베스퍼의 조카 영애와 함께 갇힐 뻔했지만, 양가 부모가 그렇게 나올 걸 미리 꿰뚫어 보고 있었던 덕에 직전에 핑계를 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영애는 아쉬워하긴 했지만 이해하고 협조해 주었다.
호텔 옆방에서든 바로 앞의 식당 테라스에서든 사람들이 이상한 주문 같은 단어를 되뇌며 수런대기 시작한 게 그의 귀에도 들어왔다.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다른 이름을 또렷하게 머릿속에 떠올렸다.
요른.
그리고 그는 탁상 램프를 켜서 높이 쳐든 채, 저 혼자밖에 없는 방 안 풍경을 마치 누군가에게 생생하게 전하듯이 한 바퀴 빙 둘러 눈에 담았다.
린다는 수도에 마련된 크라흐트가 별장 서재에 앉아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각이 머릿속에 새하얀 꽃무리처럼 흐드러지면서 단어 하나가 마치 눈물처럼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고 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던 단어였다. 필립이 주었던 문서에 여러 번 나왔던 이름.
수십 번도 더 읽었기 때문에 그녀는 문구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필립은 주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서사시 형식의 여행기에 가까웠다. 한 고대 여행자의 수기.
여행자는 깊은 동굴에서 어떤 비밀스러운 문을 마주하고 손잡이를 건드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는 대신 스스로 살아나와 그의 눈앞에서 변신하고 또 변신했다.
그것은 모래알, 루비, 제비꽃, 백합, 떡갈나무, 단풍나무, 토끼, 사자, 사막, 초원, 쟁기, 보석함, 오두막집, 궁전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 인간의 형상마저 갖추어 소작농, 후작, 상인, 백작, 마구간지기, 제후, 비렁뱅이, 국왕, 이어 반은 비렁뱅이이며 반은 제후인 것, 반은 상인이며 반은 국왕인 것으로 변했으며, 그리고 또…….
맙소사, 너는 악마인가 천사인가? 여행자는 외쳤다.1)
그것은 그러나 비웃듯이 천사에서 악마의 모습으로, 다시 악마에서 천사의 모습으로 변했을 뿐이었으며, 마침내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하늘과 땅마저 서로 어지러이 열고 섞는 문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여행자는 그 백색의 새를 보며 스스로 제 질문에 답하듯 탄식했다. 아, 아, 너는.
“발탄더스.”
페랑 수도의 상회 지하실에 앉아 밤늦게까지 장부를 정리하며, 필립은 문득 그 이름을 되새겨 보았다. 자신이 보낸 문서가 잘 전달되었을지는 흑마법사가 돌아와 봐야 알 일이었다.
“어서 자유로워지렴, 요른.”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길. 스무 살의 상인 청년은 가만히 입 속으로만 뇌까렸다.
* * *
“후회할 거야, 요른!”
움베르토는 짓씹듯이 외쳤다.
“그를 배신하지 마!”
뱉다가 이상하게 이입해서 울컥 목이 메어 버린 바람에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베스퍼는 그때 마물이 옮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움베르토를 기꺼이 안으려 했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려 했다. 그걸 증명하려고 그는 마물과 자기까지 했다. 배신하고 떠나 버린 건 움베르토 쪽이었다.
‘너는 물론 나보다 훨씬 더 끔찍한 반편이다. 하지만 너도 그런 사람이 있어.’
움베르토가 짐작하는 게 맞다면, 그 사람의 방식은 베스퍼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어찌 되든 그런 존재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움베르토는 생각을 문구로 빚고 그 획 하나하나까지 다듬어 가능한 한 가장 선명하게 떠올렸다. 읽어야만 할 책처럼 보는 자의 눈앞에 펼쳐지게끔.
‘그를 배신하지 마.’
‘그가 먼저 배신했지.’
비웃는 듯한 구절이 마주 전해 왔다.
역시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읽기도 할 수 있군. 움베르토는 더욱 집중해서 떠올렸다.
‘모르는 일이야. 풍문만으로 짐작하지 마.’
‘감히…….’
그때 문득 전해 오던 사고가 멈췄다.
대신에 천진한 웃음소리 같은 게 천둥처럼 사위를 가득 채웠다.
칠 년 전 언덕 위에서와 똑같은 장면이 움베르토의 주위에 드러났다. 허공에 솟아났던 마물들이 돌연 분해되기 시작했고, 그 마물들에 마치 푹 안긴 듯이 감싸여 부드럽게 섞여 들어가던 직원들도 풀려나 순수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날씨……인가.’
움베르토는 생각했다. 마물과 마물, 사람과 마물이 서로 물과 물처럼 섞여 들고 있었던 게 갑자기 뚝 멈추어 버렸다. 섞는 매개가 되어 주던 것이 갑자기 기능이 정지해 버린 것처럼, 혹은 스스로 일부러 기능을 멈춰 버린 것처럼.
이미 마물이 첨예하게 섞여 들었던 부분이 되뜯겨 나가면서 직원들의 몸에는 지독한 상처가 남았다. 그들의 비명을 들으며 움베르토는 무심코 왼쪽 눈의 흉터를 감쌌다. 베스퍼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자신의 등 뒤로 돌린 채 지키고 있었다.
베스퍼가 문득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실험실 한가운데로 다가갔다. 다 부서진 의자에는 소년이 맨몸으로 늘어져 있었다.
원래 살이 새하얗던 소년은 거뭇하게 질린 채 다 으스러진 턱으로 기침을 하며 거품 섞인 핏덩이를 토해냈다. 참혹한 몰골이었다. 상처의 형태는 다른 직원들과 비슷했지만 요른 쪽이 비교할 수 없이 정도가 더 심했다. 하기사 그렇게 엄청난 마물로 변했다가 돌아온 것 아닌가.
베스퍼는 움베르토 쪽을 돌아보았다. 움베르토는 이미 회복 마법사들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다행히 처음부터 다른 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덕인지 거의 다치지 않았고, 연구소장이 악을 쓰다시피 하며 부르자 문을 빼꼼 열고는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빨리.”
움베르토가 재촉했다.
“저 애를 치료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