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7/30)

2.

요른은 기숙사 부지 입구에서 마차에서 내렸고, 마부가 떠나는 걸 확인한 다음 십 분쯤 걸어서 강사 숙소로 향했다. 다나가 이미 숙소 입구에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요른은 문득 오늘 막시한테 털어놓지 않은 일이 생각났다. 접견실에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막상 그의 몸이 곁에 오자 다 잊어버렸다.

‘닷새 후에 수도에 들르신댔지.’

프란첸 공작 부부는 닷새 후 이 수도에 들르신다고 했으니 그전에 막시에게도 이야기해 둬야 할 터였다. 공작 부인께서 요른과도 따로 만나서 어떤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 하셨다고.

막시는 제 부모, 특히 어머니가 요른에게 접근하는 데에 예민하다. 그녀가 요른을 만나고 싶어 하면 꼭 막시에게 미리 상담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절차였다. 요른은 어릴 적 기억을 되새기며 울적해졌지만, 겨우 다스리며 다나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공식적으로는 요른은 지하 세미나실에서 강사들한테서 방과 후 개인 과외를 받는 걸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세미나실은 기록이 남게끔 예약만 해 두고 실제 사용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둘은 복도 끝에 기구실처럼 위장된 곳의 철문을 열었고, 굴처럼 생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곧 비밀 출구를 통해 학원 북부의 숲지로 나왔고, 숲속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서 흑마법 대책부 연구소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성황국의 흑마법 대책부는 여러 곳에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곳은 특히 인체 강화 연구에 할당된 곳이지만, 형식적으로는 환각 마법 연구소라는 명칭을 쓴다. 환각 및 환청 마법은 잘못 새어 나갔다가는 주변에 피해가 갈 수 있다는 핑계로 이렇게 외진 곳에 연구소를 지었다.

둘은 경비병에게 암호를 대고 연구소 입구를 통과했고 다시금 지하로 내려갔다. 실험실에서는 움베르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때 잘 왔어.”

그는 요른을 보자마자 상기된 안색으로 말했다.

“네 그 ‘막시’ 있잖아, 이번에도 아주 싱싱한 것들을 잡아 왔어. 늘 기대 이상이야. 거기 앉아.”

다나는 곧 떠났고, 요른은 아래 속옷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어 수납대에 개켜 놓고 방 중앙의 의자에 앉았다. 직원 두 명이 요른의 사지를 잡아다가 의자 손잡이와 다리 쪽에 가죽끈으로 단단히 묶었고, 손목과 발목은 사슬에도 연결했다. 사슬은 다시 바닥의 고리에 단단히 걸렸다.

오늘은 먹이는 걸로 하려나, 아니면 상처를 낸 다음 거기다 넣으려나. 요른이 생각하는 사이에 움베르토가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직원 두 명이 향로 비슷한 걸 바퀴 달린 발판에 실어서 밀어 왔다.

“이번엔 숨으로 들이마시는 거로 해 보자. 준비됐어?”

“예.”

대답하며 요른은 건너편 벽을 흘끗 바라보았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 있는 벽 오른쪽에는 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요른은 그 문 안쪽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앉아 있는 방으로 통하는 문인지는 설명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움베르토가 시선을 눈치채고는 웃음을 흘렸다.

“잘 와 있어. 걱정하지 마.”

“예…….”

“네가 마물로 변하기 시작하면 당장 베어 줄 거야. 저기서 바로 튀어나와서, 잠식이 완료되기도 전에 아주 신속하게. 걱정하지 마.”

진심으로 위로하는 듯한 투였다. 요른은 끄덕이고는 문에서부터 눈을 돌렸다.

저 안에는 성기사가 두 명 대기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와 있는 피험체가 누구인지 모르고 요른도 그 둘이 누군지 모른다. 상호 비밀 서약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문을 잠근 채 저 안에만 얌전히 대기하고 있다가, 비상시에 마법사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에만 마검을 빼 들고 방에서 뛰어나온다.

요른은 저 안에 있는 기사들 중 베스퍼가 없길 바랐다.

수도 성기사단장 베스퍼 폰 크라우스. 지난 4년간 몇 번이나 요른에게 접근해 왔고, 요른이 아무리 욕을 하며 패악을 부려도 웃기만 했던 사람이다. 오히려 보기 좋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얼굴을 하니까 정말 마물 같구나.”

그는 막시가 가르쳐 주었던 거절 방식이 통하지 않은 유일한 상대였다.

요른은 베스퍼를 되도록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베스퍼는 조카 호르스트 때문에 가끔 학원에 들를 때면 꼭 요른까지 찾아내서 소위 인사를 나누려 들었다. 프란첸가의 피후원자와는 얼굴을 익혀 두는 게 옳다면서.

‘저기 있는 게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크라우스 경만은 아니면 좋겠다.’

실험실 의자에 사지가 묶여 누운 채 요른은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그는 요른을 학원 복도 한구석으로 데려가서는 ‘인사’를 한다면서 뺨과 입술을 건드리곤 했는데, 이렇게 묶여 있는 와중이라면 어딜 어떻게 건드리려고 들지 모른다.

자신은 정말 아무한테나 홀림 마법을 쓰나 보다. 크라우스 경은 처음부터 무서웠고, 절대 홀리고 싶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그렇게나 심하게 홀려 버렸다. 요른은 자책하며 자꾸 문 쪽을 흘끔거렸다.

‘비밀 서약이야 했다지만 내 마법이 그 서약보다 더 세면 저런 문짝 따위야 소용이 없을 텐데. 그럼 대체 어떻게 막아 줘야 하지.’

요른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향로보다도 문 너머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자 때문에 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곧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 자.”

움베르토가 토닥이듯이 말하며 뒤늦게 입에 재갈을 물려 주었다. 그리고 요른의 왼쪽, 오른쪽 갈비뼈 사이와 배에 미리 뚫어 둔 상처를 통해 어른 엄지 굵기 정도의 단단한 관들을 차례차례 밀어 넣었다. 다른 직원 둘이 옆에서 계속 피를 빨아들이고 응고 마법을 쓰면서 도와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요른은 혹시 이제는 다 끝나지 않았을까 하고 몇 번이나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움베르토와 직원들은 계속 관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노트에 뭔가를 적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두어 번쯤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입에서 재갈이 빠져 있었다. 움베르토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고, 마른 천으로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주고는 직원을 시켜 물도 한 잔 대령해서 입 안을 축여 주었다. 그러고는 웃으며 물었다.

“말할 수 있어?”

“예.”

“관 다 뽑았고 대충 닫아놨어. 치료 마저 잘 받고 가.”

“…….”

“정신 돌아온 거 맞아?”

“예.”

요른이 짧게 답하고는 가슴과 배를 양팔로 안다시피 한 채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 둘이 그를 부축해서 회복실로 데려가 치료술사들 넷에게 넘겨주었다. 술사들이 그를 침상에 똑바로 눕힌 후 연계 치료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상처는 제법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갔다. 관을 삽입해서 요른의 체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뚫어 놓았던 상처다. 잿가루로 분해된 마물을 코로 들이마시게 해 놓고, 폐로 흡수되고 다른 장기로 퍼져 가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이렇게 큰 상처를 내지 않아도 될 때도 있다. 아주 가느다란 관으로만 뚫은 다음 전송 마법으로 정보를 받으면 되니까. 눈으로도 직접 들여다보는 게 필요할 때만 양 끝에 특수 렌즈가 붙은 굵은 관을 여러 군데 삽입한다.

세 시간쯤 후에 치료 마법사들이 손을 거두고 이마에서 땀을 훔쳤다. 요른은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았다. 상태가 많이 나아진 듯했다.

성황국 협회 소속 치료술사들은 그로쉔 학원 교수들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았다. 요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누가 벌써 옆의 의자에 가져다 놓은 웃옷을 도로 걸쳤다. 통증과 흉터야 며칠은 남겠지만, 당장 내일부터도 큰 문제 없이 일상생활은 할 수 있을 터였다.

요른이 도로 실험실 쪽으로 나오자 움베르토가 다른 피험체를 살피고 있다가 손을 들어 보였다.

“잘 가. 몸 상태 매일 기록으로 남기는 거 잊지 말고, 이상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예.”

“2주 후에 보자. 그리고, 요른.”

움베르토가 장갑에 묻은 피를 닦으며 덧붙였다.

“빨리 알아서 치료 마법 좀 배워. 너 때문에 저 치료술사들 특별히 데려다 놓은 건데, 쟤들 시간당 몸값이 얼만지 아냐? 다른 사람 몸 고쳐 줄 필요 없으니까 네 몸 하나에만 집중해서 얼른 좀 맞춤형으로 배워 두라고, 엉?”

“……예.”

“말한 지가 몇 년짼데 더럽게 안 들어먹지.”

움베르토가 쏘아붙였다.

“그 꿈은 좀 버려. 너 이제 굳이 기사 파트너 따위가 될 필요 없어. 그거보다 여기서 실험받는 게 훨씬 중요하고 귀한 일이야.”

“…….”

“넌 정말 훌륭한 피험체고, 우리한테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이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이게 네 ‘일’이야.”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황색 눈으로 요른의 눈을 똑바로 들여보았다.

“자부심을 가져. 딴생각하지 말고 여기 집중해.”

요른은 끄덕거렸다. 움베르토가 다시 정신없이 신음하고 있던 인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등을 돌렸다. 요른은 그 등 뒤에 꾸벅 인사하고 실험실을 나왔다.

다나가 연구소 입구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요른은 그녀와 함께 숲으로 빠져나왔고, 비밀 입구를 통해 학원 강사 숙소로 돌아왔다. 작별하고 혼자 기숙사를 향해 걸으면서 요른은 발아래 길이 채일 때마다 숨을 짧게 끊어 몰아쉬었다. 움직일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요른은 움베르토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해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용사며 성검이 다 뭐냐. 그런 걸 기다리지 않아도 너랑 나랑 이 세상을 구해 버릴 수도 있는 거야.”

움베르토는 삐걱대는 목소리로 내뱉곤 했다.

“다 네 덕분이야. 인체 강화가 성공하면 성기사들은 훨씬 더 강해져. 마물이 아무리 늘어나 봤자 정말로 승승장구하게 될 거라고. 응?”

그러면서 그는 종종 맨손으로 요른의 머리를 다 흐트러뜨리며 쓰다듬어 주었다. 움베르토는 실험실 밖으로 나갈 때면 늘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썼고, 손목이나 목도 드러나지 않게 촘촘하게 가렸다. 외부에서는 늘 얇은 사슴 가죽 장갑을 끼고 다녔으며 실험실 안에서는 면장갑으로 바꿔 꼈다. 그런데 요른을 만질 때만은 그는 가끔 장갑을 벗었다.

“훌륭해. 이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징그럽고 흉측한 괴물아, 넌 내 일등 피험체야!”

요른은 굳이 그 손길은 피하지 않았다. 움베르토가 홀려서 그러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가 않았다. 그의 말은 ‘진짜’였고, 평생 처음으로 요른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었다.

밤이 꽤 늦었다. 다른 학생들 잠을 깨우지 않게끔 목재 계단의 가장자리에만 발을 디디며 요른은 기숙사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상처 때문에 오늘 밤은 아직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기만 하고 그는 침실 겸 거실로 돌아와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수납장의 서랍에서 훈장을 하나 고이 꺼내 들어 가슴 한복판에 꽉 눌러 댄 채로야 비로소 침대에 누웠다.

가슴팍에는 부조의 윤곽이 그대로 느껴졌고, 뇌리에는 움베르토의 곧은 시선이 남아 있었다. 요른은 따스한 기분에 잠겨 들었다.

‘움베르토는 참 고마운 사람이야. 그래도 기사 파트너가 되는 걸 포기하기는 싫어.’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그는 생각했다.

‘난 역시 막시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이것도 하고 그것도 하면 되잖아.’

이론 성적은 이제 문제가 없어졌다. 말더듬이도 전보다는 훨씬 나아져서, 주문을 외우는 척을 할 수 있는 범위도 커졌다. 이대로라면 제법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다. 그러면 졸업 후 바로 기사 파트너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막시와 함께 전장을 다니고, 집에 돌아오면…….’

요른은 숲 한가운데의 오두막을 상상했다. 수도의 외곽에는 숲이 많으니 아무 데나 골라잡아 튼튼한 목조 건물을 짓고 담장도 치리라. 거기 꼭꼭 숨어서 살면 된다.

평생 혼자 살면 된다.

“그럴 수는 없어요, 프란첸 공작 부인.”

공작 부인께서 삼 주 전에 보내오셨던 편지를 떠올리며 요른은 일부러 입 밖으로 내어 속삭였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음성이 번져 나갔다. 그 목소리마저도 얼마나 침침하고 음울한지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맞선 같은 건 불가능하다.

유디트 폰 프란첸이 요른을 사람으로 봐주었고, 미래를 생각해 주었다는 건 뭐라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맞선을 알선해 주시겠다면서 어떤 잡화상 집안 소녀의 스케치 초상화와 신상을 다정한 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내 주신 것도. 하지만 그건 실수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다.

자기 덕분에 움베르토의 실험이 잘 진행되어 간다는 자부심을 느끼면 느낄수록 요른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괴물이다. 원래도 알고야 있었지만 지난 4년간 그 깨달음은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서 지극히 물리적인 지식으로 남아 주었다.

다른 피험체들은 수도 없이 잠식되어 죽어 나가는데, 요른 자신은 아무리 마물을 섞어 대도 멀쩡했다. 관찰하려고 관을 꽂을 때만 고통을 느낄 뿐 섞는 과정 자체는 그의 몸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저 물에 물을 섞듯이 부드럽게 섞여 들어갈 뿐.

‘나는 인간이 아니야.’

그러니 타인과 맺어지면 안 된다. 몸을 섞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동거도 마찬가지다. 누구와 연을 맺든 그 사람은 괴물과 한집에 살게 된다. 요른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작 부인의 편지를 받고 요른은 그야말로 기절할 만큼 놀라서 즉각 거절의 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은 다시 서신을 보내오셨고, 이번에 수도에 들르실 때 요른과 직접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부인께서 뭐라 말씀하시든 요른은 이번에도 물론 거절할 생각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막시한테 말해 둬야 해. 내일은 아직 많이 움직이기는 무리니까, 모레 성에 찾아가서 얘기하자.’

사실 서신으로 해도 될 얘기지만 요른은 직접 전하고 싶었다. 서재를 쓴다는 핑계를 겸하면 막시의 얼굴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까. 그 보석을 깎아 놓은 듯 정결한 얼굴.

이제 자야 한다. 그러나 실험을 마친 당일 밤에는 특히 악몽이 짙기 때문에 잠들기가 무서웠다. 훈장을 안은 채 요른은 계속 막시밀리안의 모습만 떠올렸다. 개선식 때 보았던 군복에 경갑주를 걸친 모습, 다과회 때의 우아한 윤곽을 거쳐 기억은 금세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7년 전 견학 때 자기 앞을 막아섰던 그 작은 등을 되새기며 요른은 입 속으로 속삭였다.

‘지켜 줘.’

그러나 몽롱해지기 직전에 결국 스며 나온 의문이 있었다. 내가 그 편지 속 소녀와의 만남을 거절한 게 정말로 그 이유뿐이었던가?

물음에 답하듯이 아직 신선한 음성 하나가 떠올랐다.

[밤까지 쓰고 가도 좋아.]

밤에도, 언제든, 성에 들어와. 내가 없을 때라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당연히……. 막시밀리안의 나긋한 말들과 열쇠를 넘겨주던 손길이 요른의 안에서 멋대로 조금씩 모서리와 색이 바뀌어 들끓었고, 공작 부인의 편지를 받은 날 밤에 꾸었던 꿈속의 온기와 겹쳤다.

요른은 문득 눈을 번쩍 떴고, 이를 악문 채 양손으로 가슴과 배에 남은 상처를 쥐어뜯었다. 고통 때문에 머리가 아득해졌고 많은 것이 잊혔다. 그는 비로소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도 희끗해져서야 움베르토는 허리를 폈고, 직원들더러 피험체들을 도로 각방에 데려다 놓으라고 지시한 후 손을 씻으러 실험실 한쪽의 개수대로 갔다. 그러고 나서야 쪽방에 갇혀 있던 인물이 생각나서 문을 두드렸다.

“야, 나와.”

베스퍼 폰 크라우스와 다른 성기사 한 명이 검을 찬 채로 걸어 나왔다. 움베르토가 씩 웃었다.

“아이고, 제후님, 단장님. 피곤하셨겠습니다. 그러게 며칠 더 쉬다 오라니까.”

“나흘이나 쉬었는데 뭘 더 쉬나.”

“그렇게 마물이 그리웠어? 남부에서 실컷 봤을 텐데, 여기서 또 이 반편이들 냄새라도 맡고 싶어서?”

“그렇지.”

베스퍼가 웃지도 않고 답했다.

“너 같은 반편이 냄새도 맡고 싶고.”

움베르토는 대답하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으며 오랜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이 마흔네 살의 성기사 단장, 총사령관, 후작 겸 제후는 나이가 들면서 자세가 굽기는커녕 거목처럼 탄탄해지기만 했다. 어깨는 괴상하리만치 넓고 목도 승모근이 불거져서 제법 이지적인 얼굴에도 불구하고 짐승 같은 인상을 준다.

베스퍼가 워낙 장신이라고는 해도 움베르토도 작은 편은 아니라 둘은 세 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 때문에 보기에는 어째 머리 하나쯤은 차이가 나는 느낌이었다. 베스퍼가 굶주린, 그러나 피나 고기가 아닌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이형의 욕망에 굶주린 형형한 청회색 눈으로 여섯 살 아래 친우의 황색 눈동자를 마주 들여다보았다.

움베르토는 픽 웃으며 옆의 다른 성기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눈치를 챈 듯 인사를 하고 실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움베르토는 발을 돌리며 베스퍼에게도 손짓해 보였다.

“이리 와. 되다 만 거 하나 보여 줄게.”

“아아.”

베스퍼가 눈치채고서 되물었다.

“가져갈 수 있나?”

“글쎄, 일단 보고 꼴리시는지부터 확인해 보시죠, 미친놈아.”

움베르토가 쏘아붙였다. 밖에서라면 이렇게 막말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독대할 때는 편한 대로 하고 있다. 둘은 연구소 지하에서 다시 한 층 더 지하로 내려갔고, 움베르토는 좁은 복도의 철문 하나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베스퍼는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움베르토가 자물쇠를 따고 철문을 틈새 정도만 벌어지게 열자, 사슬이 철커덩거리는 소리와 쇳소리 같은 비명이 막혀 있던 피처럼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베스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살아 있군.”

“어.”

움베르토도 친구의 표정을 보고는 데려온 보람이 있다는 듯 씩 웃었다.

“잠식된 지 사흘째인데 아직도 버티고 있어. 굉장하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철문 안쪽에서 그것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베스퍼가 그 쇠 접시를 서로 비벼대는 것 같은 신음을 들으며 물었다.

“아직 인간이라고 칠 수 있는 건가?”

“응, 생전의 의식도 기억도 있으니까. 오후에 검사해 봤는데 아직 이틀 정도는 더 버틸 거 같아.”

“돌아오는 건?”

“그건 무리야.”

움베르토가 잘라 말하자 베스퍼가 돌아보았다. 움베르토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과 목에 남은 흉터, 그리고 전신과 다리에 남은 자국들까지도 옷 아래로 훑는 걸 느꼈다.

움베르토는 물론 그 시선의 뜻은 알고 있었다. 너는 7년 전 그때 돌아오지 않았냐는 거다. 그렇게나 몸 구석구석을 잠식당해 놓고도 흉터 좀 남고 적당히 불구가 되었을 뿐, 어쨌거나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돌아오기는 했지. 움베르토는 픽 웃었다.

겉으로 다시 사람 꼴을 갖추기는 했다. 그 후로 타인을 건드리는 게 금지되었지만.

움베르토 본인도 조심스럽긴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황국 마법부에서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잠식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 살아남은 건 움베르토가 대륙 역사상 처음이었고, 아직까지도 유일하다. 그러니 아무것도 밝혀진 바가 없다. 한번 섞였던 자는 돌아왔다고는 해도 속에 잔여물이 남아 있을지 모르고, 언제 다시 변하면서 자칫 남까지 함께 잠식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협회에서는 그더러 평생 절대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애인은 그래도 받아 주려고 노력했지만, 움베르토 쪽에서 견디지 못하고 관계를 끊어 버렸다. 움베르토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옛 애인을 향해 가만히 말을 이었다.

“우리 실험실에서는 무리란 뜻이야. 나는 마물에 한 번 잠식된 몸을 다시 사람으로 돌이키는 방법은 몰라. 앞으로도 모를 테고.”

“포기할 건가?”

“그래, 포기다.”

움베르토가 답했다.

“십 년쯤 시도해 보고 안 됐으면 연구자로서 받아들여야지. 가능하다는 건 알아. 내가 산 증인이지. 하지만 내 손으로는 못 해.”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가 이어 갔다.

“되돌리는 실험은 이제 안 해. 마물을 섞어서 인체를 강화하는 건 슬슬 전망이 보이지만, 잠식된 자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건 앞으로도 불가능할 거야. 그렇게 결론 내고 이제는 강화에만 집중하려고 해.”

“그건……. 잠깐.”

베스퍼가 손을 들어 올려 움베르토의 말을 막았다. 그는 열린 틈새로 머리를 살짝 들이밀었고, 귓가에 벌레 뒷다리를 비비는 것 같은 쇳소리가 지글대는 걸 즐겼다. 집중하면 몇 마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죽여…….

죽여 주세요.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베스퍼가 감탄하듯이 뱉었다.

“아직 말을 할 줄 아는군.”

“응. 꼴은 저래도 머릿속은 아직 사람이니까.”

“기사도 아니었을 텐데. 고아나 죄수를 주로 쓴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단련된 인간은 아냐. 그래도 가끔 그냥 타고난 것처럼 정신력이 강한 놈들이 있단 말이야.”

“이런 건 실패작으로 치는 건가?”

베스퍼가 조심스레 묻자 상대가 끄덕거렸다.

“그렇지. 저걸 병사로 쓸 순 없잖아. 꽤 오래 버티고는 있지만 그래 봤자 결국은 변해.”

“완전히 변하기 전에 내 집에 데려가는 건 무리겠지?”

“무리지.”

움베르토는 딱 잘라 답했다.

제 친구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베스퍼는 이미 작은 고양이나 도마뱀 크기의 마물을 서너 마리쯤 제 성 지하실 비밀 감옥에 가둬 놓고 키우고 있다. 거기다가 이것마저 보태서 데리고 놀고 싶은 거다.

“나보고 잠식되는 와중의 인체를 유출시키라고? 저거한테 뭘 하고 싶으면 그냥 여기서 해.”

그는 틈새만 살짝 벌어져 있던 철문을 좀 더 넓게 열며 친구에게 전했다.

“이쪽 복도 입구는 이미 잠가 뒀어. 구속구는 꼼꼼하게 채워 뒀지만 조심해. 말했듯이 이틀은 더 버틸 거 같지만, 자극이 가해지면 변수가 생길 수도 있어. 마검은 곁에서 떼지 말고, 조짐이 보이면 당장 빼고 뛰쳐나와.”

“부탁하지.”

“보호대 있어?”

베스퍼가 끄덕이며 재킷 속 어딘가를 툭툭 두드려 보였다. 그리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감방 안에는 오물과 습기가 뒤섞인 듯한 퀴퀴한 냄새가 떠돌았다. 사람을 닮은 생물 하나가 사지와 허리, 목에 사슬이 칭칭 감긴 채 돌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뼈는 휘어지고, 피부는 기름에 지져진 듯 부풀어 올랐으며 머리도 두개골을 손으로 주물러 놓은 듯이 변형된 채였다.

그 생물은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몸을 약간 뒤틀었고, 고개를 돌려 베스퍼를 보았다.

덩치를 봐서 고아는 아니고 성인 죄수였던 것 같다. 그는 성기사 단장의 얼굴을 알아본 듯했다. 베스퍼도 여기저기 제법 초상화가 팔려 다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생물은 거의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된 다리를 어떻게든 구부려 무릎을 꿇은 듯한 자세로 만들었다.

“죽여 주세요.”

그리고 눈구멍 밖으로 흘러나오기 직전인 눈으로 베스퍼를 올려다보며 빌었다.

“단장, 님, 죽여 주세요.”

베스퍼는 말없이 생물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고 있던 바지의 벨트를 끄르고 단추도 풀기 시작했다. 바지를 반쯤 내리고 나서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천 주머니를 하나 꺼냈고, 그 안에서 다시금 반투명한, 탄력감 있는 주머니 같은 걸 끄집어냈다. 양 창자를 소독하고 얇게 마름질해서 만든 고급 성기 보호대였다.

생물은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은 채 묶여 있었다. 베스퍼는 벽에 고정된 사슬을 더 짧게 당기며 생물의 다리 사이에 남은 기관을 확인했고, 자신의 성기에 보호대를 씌운 채 곧바로 밀고 들어갔다.

생물이 끔찍하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움베르토는 문 틈새 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 전송 마법을 써서 감방 안의 소리가 자기 귀로 전해져 오게끔 해 두었다. 무슨 낌새라도 있으면 당장 말려야 했기 때문이다. 성기사 총사령관을 이런 곳에서 저런 꼴로 죽거나 다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을 했다면 물론 애초에 여기 데려오지 않는 게 제일 좋았겠지만, 그러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친구가 마물에 환장해 있는데 저 혼자만 지하실에 잔뜩 숨겨 놓고 안 주는 건 너무하다.

잠식된 피험체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움베르토는 괜히 얼굴과 목께의 상처를 긁적거렸다. 움베르토가 칠 년 전까지만 해도 눈알도 둘 다 박혀 있고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스퍼도 칠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성기사였다. 덩치는 컸어도 눈이 워낙 맑아 양순해 보였고, 평생을 황국 시민을 지키는 데에 바치고 싶어 했다. 그로쉔 왕국 학원 견학 건만 없었더라면 지금도 계속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멸망한 르핀 왕국의 흑마법사들이 남부에서 평범한 숲을 검은 숲으로 바꾸고 거기 숨어 살기 시작한 건 거의 삼십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숲의 성장세가 확 짙어지기 시작한 건 십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자 성황국 교육부에서는 각 왕국 학원에도 지침을 내렸다. 이 성장세는 앞으로도 한동안 꺾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 미래의 기사와 마법사들에게도 먼발치에서나마 숲을 견학시켜 주고 경각심을 고취하라는 거였다.

칠 년 전, 그로쉔 학원 교수들도 지침을 받아들여, 우수 학생들만 선별해서 학기 말에 견학을 보냈다. 당시 아직 그로쉔 수도의 성기사 단장이던 베스퍼도 호위로 동행했고, 움베르토도 특별 초청 강사로서 따라갔다.

학생들은 근처 언덕에 올라 검은 숲을 내려다보며 담당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검은 숲은 현재에 비하면 아직 그 규모가 비교도 할 수 없이 한참 작았지만, 어린 학생들이 겁을 먹기엔 충분했다. 그때 마물들이 갑자기 언덕 위에 나타났다.

사후 각국 신문에서는 그렇게 보도했다. 마물들이 어떻게 숲에서 빠져나와 언덕까지 올라왔는지는 불분명하다, 수십 마리가 마치 허공에서 솟아난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모두를 둘러쌌다고. 호위 목적으로 초빙되었던 성기사, 기병, 교수와 심지어 학생들마저도 맞서 싸웠지만 다수가 죽음을 맞았다.

열두 살짜리 막시밀리안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마검을 하나 차고 있기는 했지만 형편없이 약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열두 살짜리가 복속시킬 수 있는 마검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고 분투하여 스스로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고, 제 집안의 어린 피후원자마저도 완벽하게 보호해 냈다.

[하지 마!]

움베르토도 그 모습을 코앞에서 보았다. 어린 막시밀리안은 수없이 외치며 요른을 등 뒤로 돌려 가린 채 검을 세워 들었다. 피를 토하듯이 외치면서.

[하지 마, 내 친구들을 내버려 둬!]

그 견학은 프란첸가 독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세간에 알려진 계기였고, 마물에 대한 경각심을 전 대륙에 불러일으킨 사건이기도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마물들은 굳이 제 쪽에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아직 덩치도 작았고 신체 능력도 모자랐으며, 서로 협동할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검은 숲 아주 가까이에서만 제각각 맴돌다가 오히려 사람이 다가가면 도망가 버리곤 했다. 수십이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죽이려고 공격한 게 아니라, 잠식시키려고 공격한 건.

움베르토는 살아남기는 했다. 마물이 몸에 섞여 들었던 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다만 한쪽 눈을 잃고, 성대가 망가지고 가슴의 근육이 오그라들고 다리도 절게 되었다. 정소도 변형되어 생식 기능을 잃었고, 평생 다시는 타인을 만지면 안 된다는 명을 받았다.

베스퍼는 무시무시하게 싸워 애들을 보호하고 본인도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베스퍼도 움베르토도 침묵 서약을 해야만 했다. 그 언덕에서 본 것, 혹은 봤다고 착각했던 것들 중 일부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 베스퍼는 안아 줄 수 없게 되어 버린 연인과 침묵해야만 할 기억들 때문에 반쯤 미쳐 버렸고 마물에 집착하게 되었다.

베스퍼가 일 년의 대부분을 검은 숲 근처에서 보내는 게 과연 마물을 퇴치하기 위해서인지, 그 매혹적인 것들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서인지 움베르토는 잘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자신도 잘 분간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마물들이 갑자기 허공에서 솟아난 듯이 나타났다, 라.’

무덤까지 침묵해야 할 기억이 움베르토의 뇌리를 간지럽혔다.

‘맞는 말이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맞는 말이라는 게 문제지만.’

그리고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방식으로 사람의 몸에 섞여 들었다.

움베르토는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돌이켰다. 그는 베스퍼와는 다르다. 그 언덕에서 보았던 무섭고 아름다운 생물들은 그의 몸속에도 머릿속에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언젠가 그런 생물을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기를 꿈꾸며 움베르토는 밤낮으로 실험실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는 그 생물들에 성적으로 끌리지는 않았다. 그런 걸 만들어 내더라도 관찰하며 계속 연구하고 싶을 뿐, 거기다가 굳이 성기를 처박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잠식당해 마물이 되어 가는 저런 실패작에게는 아무 관심이 가지 않는다. 베스퍼는 저 정도만 봐도 벌써 아래가 단단하게 서 버리는 거 같았지만.

‘요른이 여기서 일한다는 건 정말 들키면 안 되겠군.’

움베르토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생각했다. 그는 그러잖아도 베스퍼가 반편이 마물이란 소문이 나 있는 소년에게 혹해 있다는 항설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 하얀 몸뚱이에 실제로 지금까지 적어도 백여 종의 마물이 섞여 들었다는 걸 알면 베스퍼는 머리가 돌기 전에 아랫배가 먼저 돌아 버릴 것이다.

움베르토는 제 친구의 힘도 광기도 알고 있었고, 이 연구소에서 가장 소중한 피험체를 그런 식으로 잃어버릴 생각은 없었다.

‘요른은…… 제일 비슷하지.’

그는 견학 때를 돌이키며 생각했다.

‘그때 보았던 생물들과 제일 비슷한 느낌이야. 잠식 따위가 아니라, 사람과 마물이 서로 대등하게 섞여 든 완벽한 혼종.’

양쪽의 균형이 하도 잘 맞추어져 있어서 한쪽을 아무리 더 섞어 대도 무너지지 않는 거다. 움베르토는 속으로 왠지 비실 웃었다.

‘처음엔 진짜로 혼종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겪을수록 확신이 가. 포자 어쩌고 하던 얘기가 정말이려나. 크라흐트가의 후계자가 참 흥미로운 물건을 가져다줬어.’

생각하다가 움베르토는 문득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사십 분도 넘게 흘렀는데 베스퍼는 방에서 나올 낌새가 없었다. 움베르토는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언제까지 할 거야? 보호대 찢어지겠다.”

망할 양 창자 주머니가 뭐 얼마나 튼튼하다고 그걸 차고 사십 분이나 넣었다 뺐다 하고 있나. 움베르토가 채근하자 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고, 생물의 비명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처연한 울음으로 변해 갔다.

베스퍼가 곧 걸어 나왔다. 움베르토가 혀를 쯧 차며 물었다.

“보호대는?”

“가지고 나왔어. 다른 데다 버릴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래.”

움베르토가 도로 감방의 철문을 닫아걸었다. 베스퍼가 먼저 계단으로 올라갔고, 움베르토는 친구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7년 전, 침상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움베르토는 절망해 있었고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베스퍼는 그런 연인을 위로해 주고 싶어 했다. 거구의 성기사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상관없다고 말했다. 설사 잠식되더라도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 너를 한 번이라도 더 안을 수만 있으면 된다고.

움베르토는 거절했다. 그러자 베스퍼는 뭔가를 증명하려는 듯이 작은 마물 두어 마리를 산 채로 잡아 와서 제 성의 지하실에 가두더니, 며칠 뒤 움베르토에게 고백해 왔다. 성기 보호대를 찬 채로 마물과 교합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러니 너와도 정말, 정말로 상관없다.

움베르토는 당시 기쁘기는커녕 소름이 쭉 끼쳐서 베스퍼를 거절했다. 다시는 서로 보지 말자고까지 했었다.

몇 년 후 둘은 다시 친구로는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움베르토는 이제는 베스퍼가 마물이나, 마물에 잠식되어 가는 자들을 자신의 대체물로 본다고는 믿지 않았다. 시작은 그랬더라도 그는 언젠가부터 진심으로 마물 자체에 환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단초를 제공한 건 분명 움베르토 자신이었다.

그는 옛 연인이자 친구인 자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내 자신도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숙사 방 안, 요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보니 가슴과 배가 아팠다. 통증 덕분에 어젯밤의 기억이 천천히 되돌아오면서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깨달았고, 재빨리 주문을 외워 탁상 램프에 불을 켠 후 침대 위를 살펴보았다.

“막시밀리안.”

중얼거리며 요른은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훈장을 도로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뒤척거리다가 멀리 떨궈 버렸던 모양이었다.

거대한 새 모양의 마물을 물리치는 성기사가 양각된 훈장.

‘늘 똑같은 장면이야.’

부조가 복장뼈에 꽉 눌리게끔 안은 채 요른은 되뇌었다. 악몽은 언제나 칠 년 전 견학 때의 장면을 반추했다. 마물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가운데 여덟 살짜리 요른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활짝 펼친 날개 그 자체처럼 보이는 것을 시야에 담았다.

하얗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색의 광채 같은 그 거대한 새는 요른을 향해 날아들어 머리를 채어가려 했다. 실제로 발톱이 닿았었는지도 모른다. 몸이 붕 뜨며 시야가 까마득해졌던 느낌. 그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 마!]

그렇게 외치며 막시밀리안은 볼품없는 마검으로 새의 발톱과 날개를 쳐냈다. 그러면서 그 반동으로 저도 몸이 부서질 듯 고꾸라졌다.

요른은 겨우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막시밀리안은 온몸이 까진 채로도 얼른 다시 일어나서 하얀 소년 앞에 다시 검을 세워 들고 섰다. 새가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해서 다시 요른 쪽으로 날아들었고, 다른 마물들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요른은 막시가 덜덜 떨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라고 해서 겁이 안 났을 리는 없다. 막시는 고작 열두 살이었고,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마물들은 위로든 옆으로든 그보다 두세 배는 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제 등 뒤로 돌린 채 꼿꼿하게 서서 외쳤다.

[하지 마!]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이 뱉어 내느라 더욱 떨리던 그 등.

[내 친구들한테, 손대지, 마.]

새의 몸체가 문득 허공을 가득 메웠다. 하늘 전체가 희게 보일 정도로.

그러나 그것은 곧 날개를 접고는 요른의 바로 위로 추락해 버렸다. 요른은 쿵 하고 땅바닥 위로 몸이 눌려 함께 쓰러졌다.

그 후의 기억은 희미하다. 마물들은 결국 기사들의 칼에 당하거나, 도망쳐 사라졌다. 언덕 위는 시신과 부상자들로 가득했고 부상자 다수는 어디로 옮겨볼 새도 없이 현장에서 죽었다. 초청 강사로 왔던 딱 한 명만 살아남았다고 들었다. 열다섯 살의 요른은 그때 자신을 지켜 주었던 소년의 등을 되새기며 훈장의 부조를 새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조각의 모양이나 크기, 재료만 다르지 성기사에게 주어지는 훈장의 앞면 모양은 결국 다 똑같다. 새 모양의 마물을 물리치는 기사 부조.

마물은 서로 다른 동물이 여럿이 섞인 생물이다. 개중에서도 가장 불길한 건 새 모양의 마물인데, 하늘과 땅조차도 서로 어지러이 섞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장의 부조는 언제나 새로 결정되어 있다. 그 견학 때 요른을 낚아채 가려 했던 하얀 마물도 대단히 강력한 종류였으리라.

“지켜 줘.”

요른은 중얼거렸다.

견학 때 일을 기억하게 된 건 성황국으로 옮겨 와서 피험체가 되고 나서다. 그전까지 요른은 스스로는 거의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고, 막시밀리안이 나중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해 주었던 것만 그대로 믿었다.

실험을 받으면서야 요른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간혹 엄습하던 느낌, 족쇄가 풀려 어딘가로 붕 떠 날아가 버리는 듯한 감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근저에는 이 여덟 살 때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집중해서 떠올리면 닻에 걸린 듯이 결국 땅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실험실에 계속 드나들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아무리 그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려도 고리에 걸린 듯 위로 확 끌어올려지면서 그 상들마저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머릿속의 모습에 더해 손에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한 물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막시에게 훈장을 달라고 부탁했다. 수여식 때 성황은 기사에게 원본과 약식 훈장을 따로따로 나누어 준다. 정복 차림을 할 때만 단다고는 해도 큼지막한 부조가 새겨진 금속 덩어리를 주렁주렁 매달면 무겁고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 기사들은 보통 약식으로 대체하고 원본은 집에 수납해 둔다. 그러니 요른도 막시에게 원본은 자기가 보관해 주면 안 되겠냐고 청해 볼 수가 있었다.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물은 거였지만 막시밀리안은 선뜻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요른이 제 쪽에서 청하지 않아도 적당할 때 새 훈장을 하나씩 더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요른은 막시가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끔 불안해지곤 했다.

지켜 줘.

몇 번이나 되뇌며 훈장을 꽉 안은 채 요른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다시 의식을 놓아 버렸다.

그 후로는 꽤 달게 자다가 그는 어느 순간 눈을 떴다. 나른하게 몸을 뒤척이던 중에 이불을 날카로운 틈새처럼 갈라 놓은 빛살이 눈에 들어왔고, 그 각도에 놀라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 시도 넘었, 아니. 열한 시는 됐어.’

요른은 얼른 욕실로 가서 몸을 닦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었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조금이라도 배 속에 뭘 넣고 오후 수업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가방을 들고 뛰쳐나와서 요른은 도서관부터 향했다. 막시가 시킨 대로 오늘 얼른 반납해야 할 책을 다 반납하고 그 후부터는 들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서관 건물 쪽으로 다가갈수록 심상찮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입구 앞 작은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고, 무엇보다 소리가 쟁쟁하게 들렸다. 전송 마법을 써서 일부러 주위에 널리 퍼지게끔 장치해 두고서야 얘기하는 거다. 요른은 걸음을 옮기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학생분들, 동료 교수와 강사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목청 좋은 강사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서너 명이 그 주위에서 전송 마법을 써서 그의 목소리를 사방으로 고루 전파하는 중이었다.

“이런 시국에 도서관에서 더는 고문서를 대출해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러면 우리가 어떻게 적에 대해 연구하고 배울 수가 있습니까? 흑마법사에 맞설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벽보를 봤었지. 요른은 문득 상기했다. 사흘 전, 몇 날 몇 시에 도서관 앞에 모여 항의하자는 내용의 벽보가 여기저기 나붙었다. 학교 측에서 날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수거해 가 버렸지만.

강사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또 다른 목소리가 날카롭게 끼어들며 반대쪽에서부터 허공을 갈라 놓았다.

“모든 고문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방향이 전혀 다른 전송 마법 두 갈래가 공중에서 부딪치면서 공기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강사 쪽에서는 잠시 마법을 멈췄다. 허공을 독점한 채 새로 끼어든 목소리가 전했다.

“마물이나 흑마법과 지나치게 깊이 관련된 고문서만 걸러낸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이제 학원 도서관에서는 그런 문서는 대출은커녕 진열도 안 돼요.”

“그게 문제죠. 우리는 바로 그런 문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이런 때에 그쪽 연구를 하지 말라는 겁니까?”

“저희한테 이러셔도 소용없습니다.”

상대가 잘라 말했다.

“학원 차원에서만 결정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 학원에 학생을 보내 놓은 가문에서 계속 항의가 들어왔고, 검토하다 보니 저희 생각에도 일리가 있어 보여서 위로 올려보냈죠. 결국 성황 폐하께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안이라 이겁니다.”

“가문이라!”

주변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투였다.

귀족 중에도 소위 보수파가 있고 자유파가 있다. 보수파는 흑마법에 대한 연구 자체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자유파는 우리도 그쪽 연구를 열심히 해야 대책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식이다.

남부 상황이 점점 나빠지면서 자유파가 힘을 얻고 있긴 했지만, 몇 남지 않은 보수파 가문들도 그 반대급부로 오히려 더 완고하게 굴었다. 학생 하나가 입을 열어 외쳤다. 전송 마법도 없이 악을 쓰느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지만 모두 귀를 기울였다.

“어느 가문이라는 겁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지요.”

“성황 폐하까지도 그렇게 호락호락 들어 주실 정도면 꽤 힘 있는 집안인가 본데?”

다른 학생 하나가 비웃듯이 외쳤다.

“어느 놈인데, 그 배신자가? 어느 자제분의 부모나 친척이신가?”

학생들이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요른은 한동안 지켜보다가 발을 돌렸다. 오늘 도서관에 들르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막시밀리안이 자기 성의 서재 열쇠를 내어 준 이유도 감이 왔다. 그는 정보통이 넓으니까, 이런 사태가 발생할 걸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서관은 아무래도 오늘만이 아니라 당분간 저렇게 시끄러울 거 같다.

‘책은 나중에 반납해야겠다. 내일 공부는 막시의 성에서 하면 되고.’

들러서 서재도 빌려 쓰고, 공작 부인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도 막시한테 전해 줘야겠다. 생각하며 걷다 보니 요른도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가문일까.’

일단 프란첸가는 아닐 테니 요른 자신이 켕길 건 없다. 원래도 가풍이 유한 집안이지만, 특히 유디트 폰 프란첸 공작 부인 덕에 이번 대의 프란첸은 자유파 중에서도 급진파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요즘 정말 신나신 거 같아.’

요른은 풍문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을 되새겼다. 그 이래저래 유명한 마법계의 이단아는 자기가 흑마법 연구에 얼마나 적극적인지 이제 숨기지도 않는다고 한다. 전에는 눈치를 보며 에두른 결과만 발표했는데, 상황이 나빠질수록 오히려 신명이 난 듯 마물의 유래나 성검의 정체에 대해 아슬아슬한 가설을 차례차례 내놓고 있다. 덕분에 근 몇 년간 그녀의 연구가 일반 공개 허가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프란첸 공작님은 부인의 행적을 아무래도 그리 탐탁히 여기시지 않는 것 같지만. 생각하며 요른은 옛 기억을 돌이켰다.

‘막시밀리안도 어릴 때 많이 걱정했었지. 엄마가 너무 흑마법에 천착한다면서 한번 크게 싸우기도 했어. 막시가 엄마한테 큰 소리를…… 아니, 남한테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는 건 처음 봤었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요른은 막시밀리안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걸 보지 못했다. 딱 한 번만 그는 그렇게 목청을 높여 화를 냈다. 무책임한 인간아!

기억이 맞다면, 요른은 왠지 그때 공작 부인의 품에 꼭 안겨 있었던 거 같다. 그런 채로 막시밀리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물론 이 기억도 환상일 수 있다. 요른 자신의 기억은 늘 왜곡되어 있곤 하니까, 막시의 확인을 받지 않으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

‘막시한테 물어보면 확인해 주겠지만, 만약 진짜라면 그리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닐 테니까 물어볼 수 없어. 자라면서는 둘이 다시 사이좋아졌잖아.’

어릴 때 공작 부인과 막시밀리안이 잠시 서먹해졌던 건 요른 탓이 컸다. 요른은 새삼 풀이 죽은 채 강의동 쪽으로 걸어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상처들이 쑤시는 데다가 기분도 울적한 채라 요른은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형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키가 큰, 황색빛이 짙은 금발의 여성이 도서관과 강의동 사이 길목에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요른이 알아서 피해 갈 줄 알았는데 혼자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건지 그는 아무래도 그녀를 알아보지조차 못한 거 같았다. 린다는 어쩔 수 없이 제 쪽에서 발을 돌려 멀찍이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러나 헛걸음이었다. 도서관에 도착하긴 했지만, 입구 앞 광장에 강사며 교수, 학생들이 다 몰려서 도서관장이며 교내 경찰과 아웅다웅하고 있는 꼴을 보니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오가는 고성 몇 마디를 듣고서 린다는 사태를 짐작했다.

‘프란첸이군.’

그리고 직감했다.

‘공작 부부는 아닐 테고, 막시밀리안이다. 그가 항의한 거야.’

그 자유로운 프란첸가에서 유일하게 지독한 보수파에 속할 후계자가 말이다.

그러나 린다는 곧 생각을 달리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무리 그래도 아직 너무 신인이고,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다. 그가 혼자 항의했다고 해서 학원에서 이렇게까지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

‘공작 부인께서 도와주셨나? 막시밀리안이 부탁했다면, 자기 생각과는 안 맞는 일이라도 힘을 보태 주셨을 수도 있어.’

어릴 적 일 때문에 부인께서는 아들에게 내내 부채감을 갖고 계시니까. 린다는 예전에 프란첸가 고용인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돌이키며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린다는 하릴없이 다시 학원 입구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고문서실에 들러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앞으로는 고문서실 자체를 못 쓰게 될 모양이었다.

‘움베르토한테 부탁하면 개인적으로 알아봐다 줄 수도 있겠지만……. 필립이 웬만하면 남에게는 보여 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린다는 여전히 필립이 요른에게 전해 달라면서 넘겨준 문서의 정체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그가 유보해 준 기한은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아무 단서도 잡히지 않았다.

‘대체 나한테 뭘 준 거야.’

[너도 그 애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아?]

한 달 전 페랑과 그로쉔의 국경 지대에서 만났을 때 녹색 눈의 청년은 그렇게 말했다.

필립이 퇴학당한 후 린다는 그를 다시 못 볼 줄 알았다. 그러나 린다가 흑마법 대책부 산하 연구소들의 재료 구입을 일부 담당하게 되면서 활로가 뚫렸다.

2년 전, 아버지는 린다에게 재료 목록을 넘겨주면서 입찰을 받아 결정하라고 했다. 린다는 고심하다가 페랑의 상회 하나와 납품 계약을 맺기로 했다. 협상 장소에 나가보니 필리프 블랑쇼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열여덟 살이 된 필립은 키가 더 훤칠하게 컸고 눈빛도 이마도 더욱 반듯해졌다. 린다는 이를 꽉 깨문 채 악수를 했고, 안 그래도 국제 거래는 처음 해 보는 거라 긴장한 상태였는데, 더 어지러워져서 홀린 듯이 대화를 하다가 계약을 마쳤다. 필립이 배려해 준 건지 그래도 계약 내용은 깨끗했다.

그 후부터 둘은 편지 교환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무적인 편지만 썼지만, 어느 순간 린다는 참지 못하고 사적인 이야기도 덧붙이기 시작했다. 필립도 딱 린다가 털어놓은 정도만큼만 선을 지켜 자기 이야기도 털어놓으며 고급 편지지를 골라 성의껏 답을 해 왔다.

둘은 사업상 꼭 만나야만 할 횟수나 기간을 살짝 부풀려 서로 좀 더 자주 만났다. 필립은 여전히 프란첸 성이 있는 수도에는 들어올 수 없었지만, 풍광 좋은 국경 지대 소도시에서 만나면 충분했다. 대화는 즐거웠고 늘 신선했다. 특히 린다는 자신이 그로부터 배우는 게 많다고 느꼈다.

필립은 그러나 린다가 오해하기 전에 곧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털어놓았고,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모든 게 확실해졌다고 느꼈는지 노골적으로 묻고 부탁해 오기 시작했다. 요른은 잘 있느냐, 건강하냐, 그 애한테 이것 좀 전해 줄 수 있느냐, 그 애가 꼭 읽어 줬으면 한다.

린다는 그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 지나치게 조건 좋았던 입찰 자체가 필립의 계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요른이 잘 있냐는 물음 정도에만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 뭔가를 전해 달라는 건 모두 거절했다. 그러자 필립은 다음번에는 어투를 바꿔서 무슨 내밀한 속내라도 털어놓듯이 전해 왔다. 너도 그 애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냐고.

그러면서 필립은 카페 특실에 준비된 소위 가격 협상 테이블 위에 봉투 하나를 꺼내 놓았다.

[요른한테 이걸 한번 읽혀 봐.]

[또 무슨 수작이야.]

[너 그 애가 싫지?]

필립이 꿰뚫어 보는 듯한 올리브색 눈으로 빙긋 웃었다.

[내내 질투해 왔잖아. 알아, 린다. 난 네 심정 이해해. 그러니까 이걸 한번 읽혀 봐. 그 애의 마법 재능이라는 게 대체 뭔지 그 정체를 알게 될 테니까. 네 눈앞에서 읽혀 봐도 좋아. 운만 좋다면 바로 확인하게 될 수도 있어.]

[무슨 뜻이야?]

린다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 애가 뭐, 내 눈앞에서 괴물로 변해 주기라도 한다고?]

필립은 아무 답도 하지 않고 그저 린다의 얼굴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눈을 보며 그녀는 사실 자신은 이미 4년 전에 요른을 실험실에 보내 버렸으며, 그 애가 마물로 변해 버릴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털어놓을 뻔했다. 자신만큼 요른이 정체를 드러내 주기를 고대해 온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필립이 탁자 위로 몸을 굽혀 린다 쪽으로 고개를 좀 더 바짝 기울이며 말했다.

[여기 쓰여 있는 건 오래된 주문 같은 거야. 상대가 감추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고대인이 남긴 주문? 그런 건 아주 드물 텐데.]

[최근에 발굴된 고문서에서 내가 직접 필사한 거야. 우리 상회에서 처음 입수한 거라, 아직 대륙 어느 도서관에도 없어. 아무도 모르는 문서일걸.]

[진짜 그 애가 반쪽짜리 마물이라는 거야?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잖아.]

[사 년이 지났어. 생각이 바뀌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필립이 말하며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나는 이제는 오히려 확신하고 있어. 그 애가 사람과 마물의 완벽한 혼종이라고.]

[…….]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는 말하기 어려워. 그동안 네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무조건 전해 달라고만 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그 애의 사람 모습 뒤에 숨은 마물로서의 정체를 폭로하고 싶으면 한번 실험해 봐, 린다.]

[난 못 믿겠는데.]

린다가 말했다.

[네가 그 애한테 딱히 나쁜 짓을 하려고 들 거 같지가 않아. 전에 학원에서도 넌 내게서 정보만 빼간 거나 다름없었잖아. 또 날 이용하려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뭐?]

[내가 널 이용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너도 그렇게 만만한 인간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지. 투트 크라흐트가의 후계자잖아.]

필립이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상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가져가서 스스로 고민해 봐, 존경하는 영애님. 한 달을 기다릴게.]

[한 달 후에도 내가 안 전해 주면 어쩌려고?]

[글쎄.]

필립은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말했다.

[조금 더 위험한 수를 써야겠지.]

린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볼 때는 온화하지만 돌이키면 서늘한 인상만 남는 녹색 눈, 공손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어깨, 늘 잔잔한 미소의 형태로만 닫혀 있는 입술. 그녀는 사실 이런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자신이나, 아버지의 몇몇 노련한 친우들과 비슷한 인상.

‘재상이나 장관이 될 만한 재목이지.’

린다는 생각했다. 곧 고위 공무원으로 위촉될 그로쉔의 귀족 자제들보다 눈앞의 청년이 훨씬 더 능란하고 원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필립의 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신분제가 사라지는 세상.

린다는 아무래도 그런 건 상상할 수가 없었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건 불경이다. 머릿속의 타블로를 다 부숴 버리지 않고는 상을 그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불경. 하지만 그녀는 대신에 자신이 아는 세계 속에 보잘것없이 작은 환상은 틔워 볼 수 있었다. 필립이 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와 자신은 문제없이 맺어질 수 있었으리라. 필립이 그녀에게 빠졌을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는 사랑 없이도 충분히 본분을 다하며 명예를 지킬 성정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둘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딘지 마음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린다는 생각했다. 대체 왜 너는 요른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야.

필립은 그로쉔에 유학했을 때 요른의 홀림 마법에 단단히 걸렸었다. 그게 혹시 아직도 풀리지 않은 거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차라리 전자이길 바랐다. 그런 채 조용히 필립에게 전했다.

[알았어. 이 문서는 남에게 보여 줘도 되는 거야?]

[안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으니까, 네 좋을 대로 해.]

린다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게 정확히 30일 전의 일이다. 필립이 정해 준 기간이 이제 다 끝나가는 셈이다. 오늘 밤까지 린다가 문서를 요른에게 전해 주지 않으면, 필립도 다른 수를 써서 요른에게 접근하려 들리라.

린다는 학원 도서관에서 부지 입구로 나와 말에 올라탔고, 필립이 주었던 필사본이 든 가방을 조심스레 안장 앞에 걸쳤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미안, 필립. 아무래도 못 전해 주겠어.’

그녀는 고삐를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문서가 뭔지 그동안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어. 학원 도서관 고문서실도 세 번은 들렀고, 대학 도서관, 심지어 좀 무리해서 성황국 마도 협회 도서관에도 다녀왔는데도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어. 이런 정체 모를 걸 그런 더욱더 정체 모를 괴물한테 넘겨줄 수는 없잖아.’

린다는 느릿느릿 말을 몰기 시작했다. 여기 쓰여 있는 건 대체 무슨 주문일까, 주문이긴 한 걸까. 린다도 고대어를 알기에 해독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의미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필립은 이게 요른의 정체를 드러내 주는 주문이며,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라고 딱 잘랐다. 하지만 린다의 감에는 필립은 아무래도 요른이 끔찍한 마물이 되어 버리는 걸 바랄 거 같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는 ‘정체를 드러낸다’는 린다가 바라는 것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순간 어떤 생각이 린다의 머리를 스쳤다.

“설마.”

린다는 중얼거렸다. 인체 강화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너희들, 현세에 불만이 많은 페랑 사업가들이라도 반란 따윌 계획하진 않겠지.

* * *

다음 날 초저녁에 요른은 다시 도서관 쪽을 슬쩍 기웃거려 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시위’는 적어도 며칠은 더 계속될 거 같았다. 오늘은 칼 대신 곤봉을 허리에 꽂은 교내 헌병까지 여럿 와서 서 있었다.

가방을 가슴에 꽉 안은 채 그는 교내 마차 역으로 가서 직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직원은 요른의 모습에 익숙해진 터라 이제 처음처럼 찡그리지는 않았고, 무덤덤한 얼굴로 삯마차 한 대를 불러다 주었다.

프란첸가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요른은 가방을 더 품에 꽉 안았다. 긴장이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너무 편안해서였다.

전에는 막시밀리안을 보러 성에 갈 때면 늘 긴장해서 살갗이 간질거렸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견학 때의 기억을 되찾으면서부터 조금씩 그랬다. 어린 기사 생도의 작은 등이 마치 성벽처럼 더 어린 마도 학원생의 앞을 가려 지켜 주었고, 그때 요른은 그 등 뒤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고향이 될 거라고 느꼈었다. 그래야만 한다고.

그리고 삼 주 전, 그 기억이 공작 부인의 편지와 맞물려 또 다른,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명확한 꿈으로 피어나 버린 후에는 그리움은 차라리 확신처럼 변해 멋대로 혼을 지배했다. 마차가 막시의 성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요른은 손님으로 가는 게 아니라 어쩌다 오래 떠나 있던 제집에 귀성하는 듯 제멋대로 긴장이 풀려 버린다. 요른은 결국 주먹을 들어 자기 머리를 몇 대 쾅쾅 쥐어박았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는 생각했다.

‘몸은 조정해 뒀는데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 어쩌다 나는 혼자서 멋대로 여기까지 와 버렸지.’

요른은 마차 바닥 쪽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올해 그는 꿈속에서 막시에게 벌써 두 번이나 죄를 지었다. 몇 달 전 몽정을 했을 때, 그리고 삼 주 전 공작 부인의 편지를 받았던 날 밤.

성감은 마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꿈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소망을 덜어 내려면 몸도 마음도 아예 소거해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 요른은 잘 알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그는 양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아 버렸다.

성의 정문 앞에 삯마차가 멈춰 서자 요른은 구부정한 자세로 내려섰다. 그러나 그는 삼십 피트쯤 떨어진 곳에 다른 마차 한 대가 먼저 정차해 있는 걸 보고서 입을 살짝 벌렸다.

‘벌써? 사흘 후에나 도착하신다고…….’

“요른?”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계절에 어울리는 크림색 모자를 쓰고, 새하얀 레이스 칼라가 달린 감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부터 요른을 보며 어딘지 찡그린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도 갓 마차에서 내린 눈치였다.

“공작 부인.”

요른은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유디트 폰 프란첸 공작 부인은 올해로 마흔일곱 살이지만, 겉으로는 서른 후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그녀는 모자를 벗고 아들과 비슷한 새카만 머리칼을 드러내며 요른에게 말을 붙였다.

“네가 오는 줄 몰랐구나. 시간도 늦었는데.”

“서재를, 쓸 일이 있어서요.”

“그래?”

왠지 채근하시는 기색이라 요른은 조심스레 답했다. 유디트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손짓해서 요른을 이끌었다. 같이 들어가자는 뜻이다. 올리버 폰 프란첸 공작은 먼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막시밀리안은 접견실 창가에 서서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도 이 둘이 이렇게까지 갑자기 들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눈치였지만,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맞아들였다.

요른과 공작 부인이 함께 들어오자 막시밀리안은 웃으며 일어나서 어머니에게 다가왔고, 가볍게 어깨를 안아 인사했다. 어머니도 아들을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사실상 일방적으로 푹 안긴 것 같은 자세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접견실에서 잠시 담소를 나눈 후 넷은 곧 식당으로 옮겨 갔다. 요리사는 원래 막시밀리안의 식사만 준비하던 중이었지만, 막시가 얼른 지시를 내려 간소하나마 넷을 위한 식단으로 변경했다.

원래 그는 3인용 식단을 주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란첸 공작이 슬쩍 운을 띄워 넷으로 바꿨다.

“요른도 같이 들도록 하지.”

“서재를 쓰려고 온 걸 텐데요.”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났는데, 식사 한 번 못 하고 가면 섭섭하지 않겠나?”

공작은 말하면서 요른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어차피 저녁 식사로는 좀 이른 시각이야. 늦지 않게 끝날 테니, 식사를 마치고 나서 서재로 올라가 봐도 좋지 않겠니?”

“그러게요.”

공작 부인까지 동의하자 막시도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유디트는 순간 표정이 흐려졌지만, 곧 완강하게 말했다.

“요른도 같이 먹자. 응, 좋지?”

요른은 셋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불안하게 끄덕거렸다.

식당으로 옮겨 가서 스프와 식전주를 앞에 놓고 공작 부부와 막시밀리안은 한담부터 나누었다. 서로의 신변에 대해 물었고, 페랑 사업가 협회의 동향에 관해 이야기했다.

요른에게도 학원 공부에 대한 질문이 돌아왔다. 프란첸 공작은 요른의 말더듬이가 많이 고쳐진 것과 이론 과목 성적이 좋아진 것에 대해 넉넉하게 칭찬을 해 주었다.

반면 유디트는 요른에게 대견스러운 듯 눈길을 주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일부러 눈길조차도 너무 자주 주지는 않는 눈치였다. 요른은 그녀의 태도를 이해했고 죄책감을 느꼈다.

메인 요리 접시가 거의 다 비어 갈 때쯤 공작이 손짓해서 자기가 데려온 하인을 불렀고, 미리 정해 둔 신호를 했다. 하인은 끄덕이며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천에 씌운 네모나고 판판한 물건을 양손에 받쳐 들고 왔고, 식탁 바로 근처로 와서야 비로소 천을 벗겨 드러냈다. 고급 액자에 끼운 초상화였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경이 소개해 주신 영애다.”

공작이 운을 떼었다.

“크라우스 경의 삼촌인 헤센 지방 남작의 차녀라더구나. 마침 이번 주에 이곳 수도에 들른다고 한다.”

“그렇군요.”

막시밀리안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했다.

“출정 전에 살롱에서 독서 모임을 한번 열 예정입니다. 그때 초대드리면 좋겠네요.”

“아니, 이제 살롱이나 다과회는 됐다.”

올리버가 잘라 냈다.

“네 중매회들은 됐다, 이런 얘기다. 되어 가는 꼴을 보니 그 카를조차도 너보다는 먼저 약혼하게 생겼더구나. 그것도 네 덕분에 말이야. 요즘 애들은 우리 때보다야 혼인이 늦는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막시밀리안, 혼인도 네 의무 아니냐?”

“아버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누구 눈치를 보는 거냐.”

올리버가 노골적으로 역정을 냈고,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부친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디트는 괜히 접시로 시선을 떨구었고, 요른은 감을 못 잡고 셋을 불안하게 번갈아 보다가 식탁 아래에서 양손을 꽉 모아쥐었다.

“넌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보아서도 안 된다. 너는 프란첸가의 독자야. 귀족가 여성과 혼인해서 대를 이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막시밀리안이 받아 말했다.

“저는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요.”

식당 안에 잠시 살얼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요른은 쪼그라들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하인들마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올리버가 제 아들을 쏘아보고 있다가 노기를 억누르는 사자처럼 낮게 뱉었다.

“어찌 되었든 이 영애와는 꼭 만나라. 둘이 얘기를 나눠 보고 나서 생각하거라.”

“혼인 생각이 없는데, 오해가 생길 만한 자리를 굳이 마련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단둘이 만나라.”

올리버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제대로 된 한나절 짜리 맞선 일정을 짜 주고, 장소도 지정해 줄 테니 그대로 따라라. 거절하면 베스퍼가 곤란해진다. 네 상사와 불편해지고 싶진 않겠지.”

“알겠습니다.”

제 아버지의 음성을 읽어 내고서 막시밀리안은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짧게 답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다.

요른은 탁자 밑에서 무심코 손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디저트가 나온 후로 다시 대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졌다. 식후주로 달콤한 백포도주를 한 잔씩 마신 후 식사가 끝났고, 요른은 소매를 내려 손등에 남은 자국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부와 막시밀리안은 살롱으로 자리를 옮겨 좀 더 얘기를 나누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요른이 인사를 드리고 물러가려는 순간 공작 부인이 불렀다.

“요른, 서재에 가니?”

“예, 공작 부인.”

“그래. 나도 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자.”

유디트가 요른에게 손짓해 보이며 먼저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요른은 주저했다. 그는 아까부터 자기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서재에 올라가서 잠시 앉아서 쉬며 진정할 생각이었는데, 공작 부인께서 동행하시면 그럴 수가 없게 된다. 그래도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요른은 유디트의 뒤를 따랐다.

막시밀리안은 잠시 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제 아버지가 말을 걸며 살롱 쪽으로 재촉하자 곧 등을 돌렸다.

2층 서재에 도착하자 요른은 막시한테서 받았던 열쇠를 품에서 꺼내 들고 문을 열었고, 문 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유디트가 먼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요른이 따라 들어오자 공작 부인은 손짓해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바로 물었다.

“무슨 책을 보러 왔니? 왜 학원 도서관을 안 쓰고.”

“학원 도서관이 폐쇄되어서요.”

요른이 얼른 답했다가 표현을 고쳤다.

“아니, 폐쇄된 건 아닌데요. 시위를 하고 있어서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막시가 배려해 주었어요.”

“아아.”

유디트가 생각났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문서 검열 건 때문이구나. 그래……. 미안하다.”

요른은 공작 부인이 왜 사과하시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유디트가 곧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성에 너무 늦은 밤에 찾아오지는 말렴. 막시밀리안도 피곤할 테니까, 밤에는 쉬게 해 줘야지.”

“예, 저, 저는 서재만 보려고. 막시는, 쉬게 두고요.”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

유디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왠지 화가 나신 눈치라 요른은 점점 더 겁이 났다.

“죄, 죄송해요. 안 올게요.”

“네 잘못만은 아니다.”

유디트가 잘라 말했다.

“그래도 네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있단다. 요른. 그런데 안 하겠다고 답했잖니.”

영문 모를 소리라서 요른은 눈을 깜박거렸다. 공작 부인이 곧 말을 이었다.

“왜 그 아이와의 맞선을 거절했니? 주선자로서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더구나. 평민치고 참 괜찮은 집안의 아이였단다. 네 마법 연구에 앞으로 금전적으로도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 정도야.”

“공작, 부인.”

요른이 핏기가 싹 빠진 채로 더듬거렸다. 하지만 어차피 워낙 백지 같은 얼굴이라 티도 별로 나지 않아, 유디트는 그가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모를 터였다.

“그 애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무슨 뜻이니?”

“저는, 공작 부인, 아시잖아요. 저는 괴물이에요.”

요른이 더듬더듬 뱉어 냈다.

“모습도, 말도 생각도 다, 이상해요. 아시잖아요. 저는, 사람이랄 수도 없, 고요.”

아주 오래전에 유디트 부인은 요른이 이런 말을 하면 안타까운 표정으로 굽어보곤 했다. 공작 부인은 요른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가엾어하는 것 비슷한 반응이라도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무표정한 채 요른을 차갑게 쏘아보고만 있었다.

“너는 프란첸가에서 후원받는 마법사가 될 사람이야. 그게 고작 중소 상인 집안 여자와 혼인할 자격으로서 모자란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너 지금 우리한테 유세라도 떠는 거니. 타고난 생김새를 극복할 만큼도 우리가 충분히 지원을 못 해 줬다는 거야? 데려와서 어릴 때는 성에서 키우다시피 했고, 학교도 다 보내 주고, 성황국으로의 진학도 도와줬잖아.”

“그런, 뜻이, 공작, 부인, 아니에요.”

요른이 떠느라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어가며 답했다. 프란첸 공작 부인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신 적은 없었다. 요른은 자신이 그녀에게 보냈던 거절 답장에 대체 뭐라고 썼던가 돌이켜 보려 애썼다. 유디트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 애를 설득해서 다시 약속을 잡아 두었다. 지금은 여행 중이라 하니, 열흘 뒤에 만나거라.”

“예, 예?”

“라우라 포글이라는 애야. 편지에도 썼었는데, 이름 기억하니?”

유디트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요른 쪽으로 내밀었다. 요른은 엉겁결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받아들었다.

“제 아버지와 함께 사업차 여행 중인데, 열흘 뒤에 성황국 수도에도 들른다고 하는구나. 그때 만나거라. 그 애가 묵을 숙소를 알려 줄 테니 서신을 보내 꼭 약속을 잡고, 만난 다음에는 내게 경과를 보고해.”

“공작, 부인…….”

“그 애 쪽에도 네 태도가 어땠는지 물어볼 생각이야. 성의 있게 대하렴.”

공작 부인은 지갑을 도로 재킷 안쪽에 넣고는 말했다.

“그럼, 보려던 책 잘 보고 집에 돌아가려무나. 너무 늦게 머물지는 말고.”

“……예, 공작 부인.”

요른은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유디트가 서재 밖으로 나간 후 그는 다시 한번 손안의 명함을 들여다보았고, 머리가 어질거리는 바람에 탁자 모서리에 손을 짚고 섰다. 그는 공작 부인이 왜 저렇게까지 태도가 차가워지신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공작 부인이 요른의 바람을 눈치채신다면 무시무시하게 노여워하시리라. 하지만 그녀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부인께 답장을 쓸 때는 그런 마음이 드러날 여지는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혹여 드러났을까?

요른은 탁자에서 손을 떼고 의자를 하나 당겨 앉았다. 눈앞이 빙글거렸다. 답장을 쓸 때도, 방금 말씀을 드릴 때도 요른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깊은 사실을 그저 숨겼을 뿐이다.

‘내가 그 소녀와의 만남을 거절한 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인간이 아니니까. 괴물이니까. 누군가 이런 것과 생을 함께 보내게 만드는, 그런 죄를 지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도 분명 사실이긴 해.’

하지만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사람만은 자신과 함께 삶을 보내 주길 원한다.

모순이지. 요른은 인정했고, 차라리 허탈하게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삼 주 전 공작 부인의 편지를 읽으며 그렇게까지 무서운 충격을 받았던 건 라우라라는 그 소녀가 가엾어서만은 아니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상상의 가장 먼 끄트머리에도 닿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와 맺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런 생각을 볼 수 있는 눈이 태생적으로 멀어 있었던 양 아예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띄워 준 건 공작 부인의 그 편지가 처음이었다.

요른은 그날 편지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라우라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읽었고, 그 알파벳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탐했다. 그 가엾은 소녀의 이름이 아닌,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영롱하고 고결한 이름이 들어와 줄 수도 있을 자리를.

공작 부인의 편지를 홀린 듯이 수십 번도 더 되풀이해서 읽느라 새벽녘에야 겨우 잠든 그 날, 요른은 막시밀리안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학원을 졸업한 후 막시밀리안은 제 집안의 피후원인을 ‘우리 요른’이라고 불러 주지는 않게 되었다. 늘 짧게 이름만 불렀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밤의 꿈속에서 막시밀리안은 한 성인이 또 다른 충분히 성숙한 타인을 대하는 투로 말했다.

—나의 요른.

그리고 손을 내밀어 왔다.

‘돌아가자.’

요른은 어디로? 하고 되묻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저 손을 맞잡았을 뿐이다. 막시밀리안이 웃으며 끌어당기더니 제 반려를 품에 꼭 안았다.

둘은 서로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먼저 혀를 살짝 밀어 넣으며 장난을 친 것도, 팔을 풀고 상대를 성 쪽으로 재촉한 것도 요른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어딘지 쑥스러운 듯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맺어진 자들은 나란히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새장처럼 생긴 유백색의 성, 평생을 함께할 보금자리로. 고용인도 아무도 없는 텅 빈 성이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단둘만의 성으로 약속된 곳이었으니까.

요른은 꿈에서 깨어났다.

몸에 걸어 둔 마법은 완벽했기에, 성기가 반응을 일으켰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피부가 간지러웠고 심장이 엉망진창으로 두근거렸다.

요른은 미친 듯이 손톱으로 팔을 긁었고 머리를 주먹으로 갈겼다. 종국에는 편지 칼을 찾아들고 그 끝으로 팔목을 몇 번이나 찌르며 신음한 끝에야 겨우 어느 정도나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흐느끼다가 그는 동이 틀 무렵 겨우 다시 선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에도 아직 꿈의 잔상이 남아 요른은 차마 펜을 들지 못했다. 이틀은 더 지나서야 그는 기숙사 방 책상 앞에 앉아 공작 부인께 거절의 답을 쓰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 제안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모로 사람의 자격을 갖추지 못해, 연애나 혼인은 무리…….

답장을 쓰는 내내 펜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혹시 그 떨림이 공작 부인께 어떤 단서를 드렸던 건 아닐까 하고 요른은 문득 돌이켰다. 그러나 순간 더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자신이 아까 식탁에서 또 금지 마법을 또 써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공작 부인은 마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친절하셨는데, 식사 후 태도가 바뀌셨으니까. 서재의 의자에 앉은 채 요른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아까 식당에서 계속 막시밀리안을 훔쳐보고 있었지.’

막시와 같은 식탁에서 만찬을 드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앞으로도 한참 동안 보지 못할 모습이라서 욕심이 났다. 망설이면서도 결국 요른은 막시밀리안이 주석 술잔의 가장자리를 입술에 대고, 은식기를 맨 손가락 사이에 쥐고 움직이는 모습을 흘끔흘끔 수도 없이 훔쳐보았다. 뺨이 뜨거워지고 귓속이 맥박 소리로 꽉 찰 때까지.

‘그러면서 내가 공작께도, 공작 부인께도 멋대로 마구 마음을 흘려 전해 버린 게 아닐까? 아니,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막시에게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른은 몸을 숙였고,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간신히 속을 추슬렀다. 눈물만 카펫 위로 뚝뚝 떨어졌다.

요른도 아까 그 폰 크라우스가 영애의 초상화를 보았다. 공작 부부는 이제 강제로라도 막시밀리안에게 정혼자를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막시는 요른과 다르다. 어느 영애든 기꺼이 그의 반려가 될 테니 그는 선택만 하면 된다.

다만 막시 쪽에서 지금까지는 계속 선택을 미루어 왔다. 요른은 이해했다.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쉬이 나올 리가 없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를 않을 거다.

‘하지만 공작님과 공작 부부께서는 마음이 타시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심하게 몰아붙이신 거야.’

그래서 막시밀리안은 결국 수긍해 버렸다. 이번에만은 그 영애와 정식으로 맞선을 보겠다고 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또렷하게 끊어 내던 음성이 떠오르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밑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요른은 의자 위에서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상해.’

아까 1층에서부터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랐다.

익숙한 우울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샛붉어진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 뒤틀린, 이를 가는 듯한 신음이 자꾸 새어 나오려고 해서 요른은 입 안에서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쓴맛만 가득 퍼졌다.

겁이 더럭 났다. 아무리 잘못을 많이 했거나 얻어맞아 아픈 날에도 이런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서재에서 거울이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지만, 막상 거울 앞에 서자 자기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졌다. 고개를 숙인 채 그는 대신 속으로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빨리 결혼해 줘, 막시.’

입 밖으로도 속삭여 보려고 했지만 한기 때문에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거의 쓰러질 듯이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발, 제발 그 영애와 결혼해 줘. 그래서 이 마음을 지워 줘. 이건 너무 괴롭고 무서워. 부탁해, 막시밀리안.’

요른이 서재에서 그렇게 울다가 겨우겨우 서책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던 순간, 프란첸 공작부인도 1층 살롱으로 내려가 올리버와 막시밀리안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겠다고 했다.

“둘이 천천히 얘기해. 나는 목욕하고 쉴게.”

“요른한테는 얘기했나?”

“잘했지.”

유디트가 생긋 웃어 보이고는 공작에게 눈짓을 되돌려보냈다. 그도 아들한테 잘 얘기해서 설득하라는 뜻이다.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갔다. 올리버가 유디트의 잔향을 쫓듯이 잠시 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말했다.

“저래 봬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 네 엄마가 흑마법이나 마물 연구에 대해 어떤 태도인지 알잖냐. 하필 그런 사람에게 도서관 건을 부탁해서.”

“어머니도 본인이 아예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하실 분은 아닙니다.”

막시밀리안이 답했다.

“저도 기본적으로는, 시절이 이런바 다들 흑마법 연구에도 힘써야 대책도 마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료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어야 하고요. 하지만 현실적인 위험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특정한 고문서, 아니, 고문서로 위조된 저술을 일부러 도서관에 유통하는 세력이 있다는 거냐? ‘전도단’ 말이야.”

“예.”

그는 짧게 끊었다가 다시 운을 떼었다.

“흑마법사들의 전도 활동이야 전부터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더 극성이죠.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저희는 남부 마을을 들를 때 마물 퇴치만 하고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흑마법사들이 뿌린 전단도 거두고, 포교 활동도 잡아냅니다.”

“그 ‘마왕’에 대한 거 말이지.”

“그렇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답했고, 공작도 괜히 턱을 쓰다듬었다.

마물의 출몰만큼이나 흑마법사들의 전도 활동도 골치 아파진 지 오래였다. 십 년 전만 해도 검은 숲에 갇혀 살다시피 하던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슬금슬금 활동 영역을 넓히더니, 요즘은 마을뿐만이 아니라 여러 소도시에까지 걸쳐 전도 활동을 한다. 장기인 전송 마법으로 목소리나 영상도 전하고, 전단을 뿌리기도 하며 열심이다.

전도 내용은 언제나 한 가지다. 머지않아 마왕이 강림하여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것이다.

성황의 시대는 가고, 마왕의 시대가 온다.

가짜 질서인 타블로를 깨부수며 그분이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신다. 진정으로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 그 자체이신 분.

물론 황국에서는 마왕이라는 것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 그건 흑마법사들이 꾸며 낸 우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저 마물들의 꼴을 보면 그들이 꿈꾸는 신세계라는 게 어떤 모양인지 알 수가 있지 않은가. 온갖 섞이면 안 될 것들이 징그럽게 뒤섞인 형상을 그들은 자유라고 부른다.

그러나 남부에서 흑마법사들의 전도는 실제로 꽤 효과를 거두었다. 수도에서야 매번 개선 행렬만 이어지지만, 현지 주민은 마물의 증가세와 그 힘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기사단이 승리하고 수도로 돌아가봤자 마물들은 금세 다시 침입해 들어왔고, 주민은 겹겹으로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

대륙 남부민에게는 이미 황국보다 마물이 현실이었다. 마왕이든 뭐든 그 새로운 현실의 중추가 되는 힘이 있다면, 차라리 그 힘에 복속되고 싶은 마음도 들리라. 그렇게 막시밀리안은 아버지에게 그간 압수했던 전단들의 내용이며 전도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올렸다.

“성황이 이백 년 전에 강림했듯이 이제 마왕이 강림할 때라는 거죠. 그날이 오면 성황도, 그를 따르는 마법사나 기사, 백성도 모두 심판받을 거라는 내용입니다.”

“그래. 그런 내용을 이제 전단으로만 뿌리는 게 아니라, 도시의 도서관에도 유통하려 든다고?”

“예. 새로 발굴된 고문서의 필사본으로 꾸미면 조달이 가능하니까요. 남부 도서관에서는 이미 저희가 몇 건이나 잡아낸바 있습니다. 학원이나 대학 도서관을 노리면 지식인층까지도 단번에 파고들 수가 있죠.”

“그 얘기는 나도 들었다.”

“최소한 이 성황국 수도의 학원 도서관에만은 그런 문서가 들어오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천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부탁드린 겁니다.”

“수도 학생들이 어디 그런 게 들어온다고 쉽게 전도당할 애들이냐. 교수들도 그렇고. 이 대륙에서 가장 신실한 자들인데.”

“바로 그래서 흑마법사들이 고문서로 꾸며 내서 배포하는 겁니다.”

막시밀리안이 바로 답했다.

“아시다시피 고대인의 예언은 절대적이죠. 그러니 성황께서 아무리 부정하신대도, 마왕 강림설이 원래부터 고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던 양 하면 수도 학원생도 마음이 동할 겁니다.”

“정말 위조라고 생각하느냐?”

“위조라고 해 두는 게 낫겠지요.”

공작이 조용히 묻자 아들도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둘 다 유디트로부터 들은 바야 있었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말자는 뜻이었다. 올리버는 그제야 고개를 깊이 끄덕거리며 파고들었다.

“좋아. 네가 어머니께 부탁드린 뜻은 알겠다. 하나 더 묻자. 이건 사실 흑마법사들 자신만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야. 고문서를 위조하려면 특수한 잉크와 종이가 필요하고, 화학 처리도 해 줘야 해. 무엇보다 도서관에 책을 조달하는 기존 납품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예.”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실제 사람과 물자가 움직여야 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배후도 예상하고 있니?”

“아버지 생각과, 또 어머니 생각과도 같을 겁니다.”

“페랑인가?”

“그 사업가 협회겠죠.”

올리버가 막시밀리안의 답을 듣고 끄덕거렸다.

페랑의 사업가들이란 타블로의 질서에 몹시도 불만이 많은 자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 자신이 그런 태도를 숨기지도 않는다. 지식 수준도 높고, 중소 귀족과 비교하면 재력마저 더 나은 자들도 있는데 신분제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소리 높여 신분제 완화를 요구해 왔고, 몇 년 전부터는 협회 단위로 꽤 의미심장한 움직임도 보였다. 그들이라면 소위 신세계를 가져오기 위해 마물과 흑마법에 기대를 걸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자들이라면 어쩌면 현세의 질서를 부수어 줄 ‘마왕’의 강림을 진심으로 바랄지도 모른다. 그래, 이 이야기는 또 나중에 하자. 지금은 네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폰 크라우스가의 조카분은 꼭 만나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야지. 하지만 그 얘기가 아니야.”

올리버는 아들의 암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주변의 눈이 있으니 행실을 조심해라.”

“경거망동하지 않으려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아들이 모른 척 답하는 걸 듣고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경이라면 차라리 낫겠지. 그는 마물을 좋아한다고 암암리에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니, 그가 어떤 괴이한 자, 그러니까 사람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하게 생긴 소년을 좋아한다고 하면 특유의 성벽이겠거니 할 거다. 하지만 네가 그러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로 오인받을 수도 있어.”

“예, 아버지. 누구에게든 쓸데없는 여지를 주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꾸 말을 돌리는구나.”

올리버가 푹 기대어 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곧추세워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막시밀리안, 그 애가 정 마음에 들면 가끔 안아라. 밤에 조용히 네 침실로 불러들여서 한 번씩 안고 돌려보내라. 그 정도로 두고 결혼은 해. 귀족 중 정부를 두는 사람들은 널렸다. 권할 만한 건 아니지만, 딱히 문제가 될 일도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

“그 애한테 마음이 있다고 해서 혼인 자체를 피할 이유는 전혀 없단 얘기다.”

올리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전에는 네가 요른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공작은 지극히 조심스레 서두를 떼었지만, 막시밀리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듣고 있었다.

“우리가 그 애를 정식으로 입양하려고 했던 적이 있으니까. 그게 가슴에 맺힌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일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어차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요.”

“너처럼 훌륭한 아들을 두고도 유디트는 만족하지 못했어.”

공작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디트는 늘 마법사 후계자를 바랐으니까. 네가 요른을 데려온 후, 그리고 그 애가 기이한 재능을 선보인 후 유디트는 요른에게 애정을 많이 주었지. 너를…… 제쳐두고서 말이다.”

공작은 그날을 기억했다. 유디트는 여섯 살짜리 요른을 입양하고 싶다고 밝혔다. 올리버도 수긍했다. 단, 귀족이 평민을 입양하는 건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둘은 요른을 올리버의 사생아로 꾸미기로 했다.

유디트는 결혼 전부터 마법사 후계자를 원했다. 둘은 아이를 낳으면 반씩 나눠서 각각 기사와 마법사로 키우기로 약속을 하고서야 혼인식을 치렀다. 하지만 유디트는 막시밀리안만 낳아 놓고는 유산을 반복했다.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자 유디트는 막시밀리안을 마법사로 키우면 안 되겠냐고 올리버에게 청해 왔다. 하지만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프란첸가는 대대로 기사 가문이었고, 아이가 한 명밖에 없다면 그 애는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유디트는 수긍했지만 그 후 우울에 가까운 깊은 상실감에 빠져 버렸다.

유디트는 막시밀리안에게 모친으로서 형식을 갖춰 모자람 없이 잘 대해 주기는 했다. 하지만 깊은 정은 갖지 못하는 티가 났다. 그때 여덟 살짜리 막시밀리안이 네 살짜리 요른을 집에 데려왔다.

자기 시동으로 쓰겠다고 우기면서 데려오긴 했지만, 시동으로 쓸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저 놀이 친구로 데려온 거다. 둘은 성안은 물론이고 정원, 뒤채까지 다 헤집고 다니며 깔깔대고 놀았다.

올리버는 막시밀리안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늘 의젓하게만 행동하던 아이였다. 말은 못 해도 동생이 무척 갖고 싶었나 보다 하고 그는 아들을 쳐다보며 다소 울적하게 짐작했다.

그리고 올리버는 유디트의 태도에도 놀랐다. 그는 자기 아내가 어린애한테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갑게 굴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요른이 주문도 없이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며 유디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탄성을 질렀고, 아이를 꼭 안아 주고 정수리에 자기 뺨을 비비곤 했다. 막시밀리안이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건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유디트는 결국 어느 날 요른을 입양하자는 얘기를 꺼내 왔다. 그녀가 오직 자기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만 그랬더라면 올리버는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얘기를 꺼냈다.

[막시밀리안한테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어.]

그 말이 올리버의 흉금을 흔들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과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당신도 봤지. 사실 늘 동생을 원했던 거 같아. 다른 집안 애들은 형제가 대체 몇이야.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낳아 주질 못하니까.]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답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스스로 충분히 사랑해 주지도 못하면서, 형제도 만들어 주지 못하니까. 올리버, 나는 어차피 내 마법사 후계자도 있었으면 좋겠어. 겸사겸사해서 이 애를 들이자. 당신한테 희생을 요구하는 게 된다는 건 알아. 그래도 한 번 숙고해 주면 고맙겠어.]

[괜찮아.]

올리버가 답했다.

[내 사생아로 꾸미면 간단한 일이야. 진행해 보도록 하지.]

유디트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올리버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웃었다. 아내가 얼마나 아이를 더 갖고 싶어 했던지, 밤에 몰래 잠옷 차림으로 침실 발코니로 빠져나가 울곤 했던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목소리로 그녀에게 막시밀리안은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선포했던지.

둘은 차근차근 입양 계획을 짜나갔다. 그러나 생각만큼 일이 잘 되지가 않았다. 집안 고용인들에게는 한동안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얘기가 술술 새어 나가 버렸고, 무엇보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막시밀리안의 반응이 너무나 의외였다.

부부는 그때 처음으로 자기 아이가 그렇게 억눌러 온 감정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 애는 몸을 다치든 마음을 다치든 늘 의연했고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그런 애가 입양 얘기를 듣고는 때 열 살 때 처음으로 그렇게 울음을 터뜨렸고, 자기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뭐라 말할 수 없는 서운함, 요른에 대한 질투를 드러내며 악문 잇새로 그간 가슴이 썩을 정도로 눌러 담아 왔던 것 같은 말들을 흘렸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막시밀리안이 눈물을 삼키며 더듬거렸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죠. 저도 노력했는데, 어머니는 내내 그 애만. 그리고 그 열 살짜리는 차라리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는 대놓고 그 애만 친자식 취급하시겠네요. 그러려고 들이시는 거니까.]

유디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황했지만, 막시밀리안이 더 새하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면서 부모 앞에 서 있었다. 유디트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에 올리버가 대신 나서서 입양은 없던 일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로 유디트와 막시밀리안은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삼 년은 지나서야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얘기하며 같은 식탁에서 만찬을 들게 되었다. 성안에서 막시밀리안의 바로 옆방에서 지내던 요른은 그날 이후 별채에 따로 방을 갖게 되었다.

“그때 일에 대해 우리가 정식으로 네게 사과한 적이 없지. 미안하다.”

“그 일은 정말로 다 잊은 지 오래입니다.”

올리버는 뒤늦게나마 머리를 숙였지만, 막시밀리안은 딱 잘라 답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른 잘못도, 어머니 잘못도 아니었고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죠. 그때 그런 식으로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서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네가 그 애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좋아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고.”

올리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네게 많이 미안했다. 그래서 네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뒀던 거야.”

아들이 묻는 듯이 바라보자, 공작은 차근히 털어놓았다.

“집 안에서든 학교에서든, 네가 잘 대해 주는 척하면서 요른을 내내 손바닥 안에 가두고 조종해 온 걸 유디트도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거야. 특히 유디트는, 자신이 뭐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제가 요른한테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막시밀리안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네가 그 애를 싫어해서 그랬던 거라면 차라리 낫겠다는 심정이다.”

올리버가 잘라 들었다.

“언제부터 마음이 변한 거냐, 아니면 사실 계속 그랬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언가 행동을 잘못한 게 있나요?”

“사 년 전에 왜 진학 기회를 버려 가면서까지 말머리를 돌렸느냐?”

“아버지, 충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른은 저희 집안의 피후원자입니다. 저는 그때 책임을 다하려고 했을 뿐입…….”

“왜 언제나 수도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그 애의 기숙사부터 찾아가지? 네가 없을 때조차 수하 순찰병들을 시켜 그 애 주변을 감시하고, 편지함마저 검열하며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뭐냐.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그 순찰병들이 서로 뭐라고 쑥덕거릴 거 같으냐?”

“제가 수하 병사들더러 그 애 주변을 감시하라고 한 건 맞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하시는 이유만은 아닐 겁니다.”

“이유‘만’은 아니라고 하는구나. 결혼은 왜 안 하겠다는 거냐?”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그런 건 이유가 되지 않아. 나는 네가 그 애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요른에 대한 마음 때문에…….”

올리버는 막시밀리안의 입가에 순간 미소가 그늘지는 걸 보았다.

그는 아들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자기보다 거의 서른은 더 먹은 아비를 대하면서 그 열아홉 살의 청년은 가끔 그런 식으로 웃곤 했다. 경멸이나 조소가 아닌, 그저 경험이 일천하여 어쩔 수 없이 순진한 자를 대할 때와 같은 씁쓸한 미소.

“아버지와 저는 세대가 다릅니다.”

청년이 타이르듯이 전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건 아닌지, 조금만 더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나도 바로 사 년 전까지 현역 성기사였다.”

올리버는 패배를 예측하면서도 완강하게 방어해 보았다.

“지금이야 영지 관리 일 때문에 왕국 기사로 물러앉긴 했지만, 전장에서의 경력은 너보다 훨씬 길어.”

“예. 하지만 이제 물러앉으셨지요. 좋은 때에 물러나신 겁니다.”

막시밀리안이 끄덕이며 이어 갔다.

“폰 크라우스 경의 조카 따님은 꼭 정식으로 만나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동갑내기라면 제가 대는 이유를 이해해 주실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분 쪽에서 먼저 거절의 뜻을 비치실지도 모르고요.”

“얘야.”

“아버지는 영지로 물러나셨지요. 하지만 저는 평생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저희 세대에는 물러앉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겁니다. 마검에 잠식당하거나 마물에게 밟히고 찢겨서요.”

“막시밀리안!”

“부정하실 수 있습니까.”

막시밀리안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지금 이 추세로 보면 저희 세대는 아무리 애써 봤자 모두 다 그렇게 죽을 겁니다. 제 수명은 길어야 십 년쯤 남았을까요? 다른 예측이 가능하시다면 지금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

“저희는 아버지 때처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세대가 아닙니다. 결혼은 팔자 좋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아이라니요. 린다도, 카를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과회나 조찬회에 모여 앉을 때마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서로가 시체로 보입니다.”

아들의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올리버의 눈을 적셨다. 마흔일곱 살의 공작은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는 사실 영지 관리 때문에만 물러앉은 건 아니었다. 더는 마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물은 수만 많아진 게 아니라 점차 더 강해졌고, 그런 마물과 맞서기 위해서는 점점 더 강한 마검이 필요했다. 나이 든 기사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제 검에 잠식되어 죽거나 올리버처럼 성기사직을 반납하고 제 영지로 돌아갔다. 생도 시절부터 목숨을 걸고 마검을 손에 잡아 온 젊은이들만이 기사단을 채웠다.

올리버는 막시밀리안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 검사로서라면 올리버도 아직 스무 번에 한 번쯤은 이겨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검사로서는 예닐곱 살 어린애와 어른만큼의 차이가 난다.

그는 아들이 가끔 자신을 어린애처럼 쳐다보는 걸 충분히 이해했다. 세대가 다르다. 올리버는 마물로 변한 동료를 베어 주는 책임을 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열아홉 살 난 아들은 생도 시절부터 벌써 스무 번도 더 그런 책무를 맡았다. 그래도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온 자가 물려줄 수 있는 마지막 유물을 전하듯이 올리버는 간절하게 입을 열었다.

“아들아, 그래도 미래를 계획하지 않을 수는 없…….”

“그렇죠.”

막시밀리안이 잘라 들었다.

“제 미래란, 만약 가능하다면, 단 하나뿐입니다. 용사가 되는 겁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오만한 얘기구나.”

“꼭 제가 용사가 될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기사라면 누구든 그걸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열아홉 살의 청년은 여상스레 답하며 아버지의 눈을 맑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렇다면 더더욱 저는 혼인도 연애도 상상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도 예언을 닳도록 읽으셨을 텐데요. ‘용사에게 있어 그 반려란 오직 성검뿐이다’.”

“그 구절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용사가 되어 세계를 구하려면, 지극히 외로운 길을 가야 할 겁니다. 상징적인 의미라 해도 결국 마찬가지죠. 다른 쪽은 생각도 하지 말고 검에만 집중하라는 뜻일 테니까요.”

“얘야.”

“세대가 다릅니다.”

막시밀리안이 다시금 툭 뱉어 냈다.

“저는 용사가 될 거예요. 그것만이 제 생의 목표입니다. 아버지, 저는 그렇게만 가문을 빛내겠습니다. 다른 건 용서해 주세요. 혹시라도 미래가 올 수 있다면, 저는 그 미래를 가져오는 역할만 하고 싶습니다. 그 후는 방계 혈족을 하나 들여 맡겨 주세요. 친척 간 입양은 드물지만 금지된 건 아니잖습니까.”

“나는…….”

올리버는 마른침을 삼켰다.

꼭 대를 이으라는 것만이 아니다. 네가 결혼하고 아이도 갖는 행복을 경험하길 원했다. 네가 정말로, 정말로 좋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인해 반평생 무척이나 행복했고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버는 입 안으로 말을 삼켰다. 세대가 다르다.

윗세대가 대륙의 평화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 세대가 이런 짐을 받았다.

해양 왕국 르핀이 외세와 모의하여 성황에 반기를 들었다가 멸망한 건 올리버가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황국 성기사단은 당시 르핀의 궁정 흑마법사들을 모두 다 잡아들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리하여 그 잔당이 남부의 숲 지대에 숨어들었다.

그들은 평범한 숲의 일부를 검은 숲으로 변화시켜 그 안에 숨어 살기 시작했고, 넝쿨이 충분히 짙어져 은둔 생활이 안정되자 그 안에서 연구를 계속해 마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반역 때 병사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했던 그 실험체들을 망국의 마법사들은 훨씬 더 발전된 형태로 대량 생산하여 숲속에서 충분히 키운 후 밖으로 내보냈다. 마치 세상에 복수하려는 듯이.

올리버 대에 터져 나온 갈등이었으며, 그가 속해 있던 기사단이 무력했던 탓에 뒤처리마저 부족했다. 그 후 약 삼십 년, 서서히 조여드는 절망 속에서 다음 세대는 자기 자신의 목숨이 잦아든 후의 미래 따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공작은 아들의 오랜 친구인 카를 폰 메어하우스에 대한 소식도 들었다. 막시밀리안과 달리 그는 철이 든 후부터 여러 영애들을 만나고 다니기는 했지만, 약혼은 계속 미루고 있었다. 최근에야 샬로테 폰 히르쉬라는 시골 영애와 아주 잘되어 가고 있는데, 바로 막시밀리안이 그에게 그 영애를 소개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단, 막시밀리안과 카를이 샬로테에게 눈독을 들인 건 사랑 때문도, 가문 간의 인연 때문도 아니었다. 둘 다 남부에 새로운 군사 요충지가 필요다고 느끼던 와중에 그녀의 영지가 마침 딱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은 그녀의 작은 성을 요새로 개축한 후 그쪽으로 옮겨 가서 살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젊은 귀족들은 다들 마물과의 싸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못 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공작은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에게 마음을 준 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마음조차도 불모로 내버려 두리라.

이들은 지금 싹을 틔운 것이 자라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세대가 아니다.

“게르다 폰 크라우스라고 하셨죠. 사실 이미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 분입니다.”

성검을 멋대로 제 미래의 반려로 맞아 버린 아들이 아버지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분도 마법사로서 좋은 성과를 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젊은 귀족들이 서로를 잘 알아 두는 건 중요하죠. 언제 누가 어떤 장소에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성심껏 대하고, 깊이 대화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네 좋을 대로 해라.”

올리버가 던져놓았다.

그는 여전히 만에 하나라도 막시밀리안이 그녀에게 마음이 동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예 버리지는 못했고, 그래서 살짝 비틀어 짜 둔 맞선 일정을 바꿀 마음은 굳이 먹지 않았다. 실제로 둘이서 밤을 보내 보면 어떨지 모른다. 아무리 미래가 닫혀 있더라도 현재는 제멋대로의 힘으로 불꽃을 튀기고야 마는 법이니까.

막시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제 아버지도 올라가서 쉬시는 게 어떻겠냐는 뜻을 비쳐 보였다. 공작도 말없이 따라 일어났다.

아버지가 손님용 침실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후 막시밀리안은 하인을 불렀다. 그가 묻자 하인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십 분쯤 전에 마차를 타고 돌아가셨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조끼 앞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계 판을 내려다보았다. 밤 열 시 오 분, 그의 지시를 받은 야간 순찰병 중 하나가 요른의 기숙사 주변을 돌고 있을 시간이었다.

요른은 기숙사로 되돌아가는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이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덜거덕거렸다. 막시가 받아 본 초상화가 자꾸 떠올라서 그는 몸을 떨었다.

더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숨만 계속 쌕쌕거리며 흉곽을 뒤흔들었고 어금니가 서로 맞부딪혀 삐걱거렸다. 요른은 가방을 안고 웅크린 채 진정하려 애썼다. 그러던 와중에 마차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앞으로 쏟아지듯이 넘어질 뻔했다.

“미친놈.”

마부가 욕을 뱉는 게 요른의 귓가에 와 닿았다.

요른은 마차 창으로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순찰병 복장을 한 사람이 제 귀를 양손으로 막은 채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가로등 빛에 물든 대로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입으로도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게 꼭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뭐지.’

요른은 살짝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이 부근에서 자주 보는 야간 순찰병으로, 막시밀리안 수하의 보병이었다.

막시 수하의 순찰병들은 교대로 학원 정문 근처를 맴돌다가 요른을 발견하면 소지품을 뒤지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다음에야 들여보내 주곤 했다. 요른이 학원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은 늘 그랬다. 하지만 지금 저 순찰병은 자리를 떠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요른이 갸웃하는 동안, 사람을 칠 뻔했다고 욕을 하며 마부가 다시 말고삐를 당겼다.

마차는 곧 학원 건물이 멀찍이 삐죽삐죽 솟아 나와 보이는 한적한 외곽 도로에 들어섰다. 그러나 왠지 정문 쪽으로 더 다가가지는 않고 제자리에 멈춰 버렸다.

요른은 의아해서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밖으로 뺀 채 마부 쪽을 바라보았다. 마부는 양손에 고삐를 잡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뒤를 돌아보았는데, 마차 앞쪽에 걸어 둔 램프에 비친 그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 있길래 요른은 깜짝 놀랐다.

“당신…….”

마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혹시 당신도…… 들립니까?”

“네?”

“쉬…….”

마부는 검지를 제 입술 앞에 가져다 댄 채 눈알을 불안하게 굴리더니 다시 물어 왔다.

“안 들리세요?”

요른은 마부를 그저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마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삐를 마부석 양쪽의 고리에 걸어 놓고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고개를 저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요른에게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전했다. 들리지 않는 소음을 뚫고 외치듯이.

“내리십시오.”

“괜찮으세요?”

“내리, 십시오. 저는…….”

그는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결국 신음하기 시작했다.

“아, 아, 내리십시오. 제가 지금, 이상하네요. 맙소사, 구해 주소서.”

요른은 그가 하는 양을 멀거니 보고 있다가 결국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제 귀를 막다 못해 눈두덩마저 꽉꽉 눌러 대며 절망한 듯 앉아 있다가 성황님께 빌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누군가한테 그만하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요른은 잠시 마차 곁에 서서 고민했다. 그때 요른의 귓가에도 찌르르 파동이 일었다.

―이쪽으로.

모서리를 다 벼려 낸 것 같은 또렷한 음향.

마주 보고 직접 전해 듣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선명했다. 요른은 그제야 사태를 짐작했다.

‘전송 마법이야.’

누군가 전송 마법으로 마부의 눈과 귀를 끊임없이 엉뚱한 소리와 풍경으로 뒤덮고 있는 거다. 아까 순찰병에게도 같은 수를 썼으리라.

깨닫고 나니 적이 마음이 놓여 요른은 가만가만 발을 옮겨 마부에게 다가갔다. 사실을 알려 주면 마부도 안심할 것이다. 마도 학원 상급생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아무리 학원 측에서 엄격하게 벌점을 준다고 해도, 실력 좋은 애들은 자기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상급 학생들이 전송 마법이나 빛 마법으로 학원 근처에 오는 일반 시민을 갖고 노는 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부에게 말을 걸려던 순간 천둥같이 증폭된 음성이 하얀 소년의 귀를 뚫었다.

―말하지 마십시오.

요른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귓속이 찡했고 골통까지 울렸다. 그 목소리가 이번에는 순식간에 음량을 바늘구멍을 관통하듯 날카롭게 줄여 전했다.

―기다리십시오.

마부가 갑자기 소스라치더니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저리 가, 저리 가!”

그는 양팔을 휘두르며 뭔가를 쫓는 듯한 동작을 했고, 채찍을 휘두르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말고삐를 잡았다.

요른은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거의 쓰러질 뻔했다. 코앞에서 마차가 확 움직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두 마리 동물의 육신이 움직이는 기운, 발굽의 편자와 나무 바퀴가 마차 길 돌들과 맞부딪혀 우직거리는 소리가 잠시 밤공기를 가득 채웠고, 곧 고요해졌다.

‘저 마법사, 방금 마부에게 뭔가를 보여 줬구나.’

요른은 바로 깨달았다.

마법사는 요른에게 말을 걸면서 동시에 마부에게 어떤 무서운 영상을 전송했다. 마물 화집을 펼쳐 놓거나, 조각상을 세워 놓은 채 그 상을 비추어 쏘아 보냈을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저렇게 금방 실제랑 착각하고 겁을 집어먹을 정도면 대단히 선명한 상을 보여 준 것이리라.

‘학생이 아냐.’

상대의 실력을 짐작하고서 요른은 좀 불안해졌다. 이건 학생 수준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다시 귓가에 소리가 전해져 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움츠러든 채로도 왼손을 살짝 움직이며 요른은 제 쪽에서도 주문을 외웠고, 상대 마법의 근원지를 추적해 가며 발을 옮겼다.

요른은 학교 부지를 둘러싼 담장 옆의 샛길로, 다시금 샛길 옆에 좁게 마련된 녹지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가로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나무 그늘 속에 아주 희미하고 작은 청색 불빛이 점멸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코앞까지 접근해서야 불빛 곁으로 두꺼운 후드 자락이 슬며시 윤곽을 드러냈다.

―일러바치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후드를 뒤집어쓴 자는 요른이 지척에 왔는데도 직접 대화하는 게 아니라 전송 마법을 써서 목소리를 전했다. 소리가 오가는 통로를 실처럼 가느다랗게 조정해 둔 채였다.

보통 남이 듣지 말았으면 할 비밀 대화를 할 때 쓰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 두면 다른 사람은 바로 옆에 와도 들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첨예하게 좁힐 수 있는 사람은 요른이 알기로는 성황국 마도 학원 교수 중에도 한둘밖에 없었다.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요른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흑마법사가 성황국 수도 한가운데를 돌아다니고 있을 리는 없다.

상대는 요른더러 좀 더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해 보였다. 요른이 망설이면서도 다가가자 그는 큼직한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고, 얼른 가방에 넣으라는 듯이 턱짓해 보였다.

요른은 냄새 때문에 당황했다. 아까부터 쿰쿰한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후드를 뒤집어쓴 자한테서 나는 것 같았다. 보이는 건 후드밖에 없긴 했지만 딱히 더러워 보이지는 않는데도 그랬다.

‘썩는 냄새야.’

요른은 봉투를 얌전히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때 후드를 쓴 마법사가 갑자기 청색 불빛을 희게 바꿔서 자기 오른손 쪽으로 옮겼고, 동시에 왼손을 살짝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요른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야간 순찰병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까 환청에 쫓겨 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 구역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병사는 어둠 속의 형체를 희미하게나마 알아보았는지 이쪽으로 급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오지 마. 요른은 생각했다. 병사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마법사가 무슨 조처를 취하리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찰병은 곧 그늘 밑에 선 자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다.

“요른?”

아무리 어둑어둑한 그늘 속인 데다가 불빛이 희미하다고 해도, 그 정도 새하얀 머리카락은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병사는 화가 난 듯 걸음을 더욱 재게 놀려 다가왔다.

“아까 환청, 너였냐? 못된 장난질이나 하고. 얼른 이리 안 와?”

요른은 가려고 했다. 하지만 병사가 곧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이를 으드득 갈았다.

요른은 다시 고개를 돌려 후드를 쓴 자의 오른손을 보았다. 그는 제법 화려한 도색 화판집 같은 걸 꺼내 들고 있었는데, 화판집 속에는 낱장마다 각종 마물의 모습이 대단히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었다. 아마 저 그림을 지금 순찰병의 눈에 꽂아 넣으면서 귀로도 기괴한 소리를 불어넣고 있을 터였다.

요른은 안절부절못하고 둘을 번갈아 보며 순찰병이 차라리 얼른 도망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순찰병은 귀를 틀어막은 채로도 필사적으로 요른의 얼굴과 왼손 쪽을 살폈고, 아무래도 그 소년이 주문을 외고 있는 거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는지 곧 허리에서 칼을 빼 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어디야!”

눈도 귀도 환각으로 꽉 차서 현실은 거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그는 호기를 부리듯이 외치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안 속아, 이 마법사 놈아! 어디 있어!”

칼은 빼 들었대도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병사는 그저 제자리에서만 쓰러질 듯이 발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외침을 듣고 다른 자들이 몰려올 수는 있었다.

후드를 쓴 마법사가 왼손의 모양을 바꾸며 재빨리 다시 주문을 외웠다. 순찰병은 버티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곧 칼을 떨어뜨리고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요른은 입을 약간 벌렸다.

“어…….”

순찰병은 엄청난 굉음을 듣고 있는 듯했다. 청각만 잃고 끝날 수도 있지만, 뇌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면 목숨까지 위험하다.

요른의 왼손이 움찔거렸다.

저 후드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능숙하다지만 요른은 소위 말해 천재였다. 그는 지금 공기의 모든 떨림을 알아볼 수 있었고 얼마든지 중간에 끊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끼어들면 안 된다고 느꼈다.

남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마. 그는 막시밀리안의 명을 되새겼다.

이건 두 타인 사이의 일이다. 막시는 요른더러 언제나 남의 말만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팽팽해 보이는 순간에 요른 자신의 판단으로 끼어드는 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되든, 무슨 결론이 나든 결국 저 둘이 각자 요른보다는 더 나은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할 것이다. 요른은 결국 왼손을 늘어뜨린 채 하릴없이 둘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순찰병이 머리를 움켜쥔 채 거의 짐승 울음 같은 소리를 냈고,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요른의 뇌리에 문득 막시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했던 말이 스쳤다. 첫째, 너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 돼.

‘혹시 이게 지금 나 때문인가?’

이 후드를 쓴 사람에 내게 이 봉투를 전해 주려고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나 때문일 수도 있어. 요른은 생각했다.

그러나 요른은 그게 조금이라도 일리가 있는 생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그에게 스스로 판단하거나 자기 판단의 무게를 가늠하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요른은 혼란에 빠진 채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다.

문득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륙의 남단, 언덕 위에서 사람들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뒹굴었고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어 갔으며, 흑발의 열두 살짜리 소년도 칼을 뽑아 들고 요른의 앞을 지키고 섰다. 그때도 요른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아니야.’

요른은 무심코 속삭였다. 당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하고 있던 걸 그만두어 버렸던 거지.’

마도 학원을 둘러싼 담장 옆, 요른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자 후드를 쓴 자의 마법이 멈추어 있었다.

담장 옆 샛길, 아까까지만 해도 복잡한 음과 빛을 갈래갈래 실어 나르느라 진동하던 밤공기는 호수 속처럼 잠잠해져 있었다. 요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마법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요른은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순찰병이 멍하니 담장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요른은 얼른 불빛을 하나 켜 들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순찰병은 손으로 귀와 코 밑에서 피를 대충 닦아 내면서 그 피 묻은 손으로 뺨에서 눈물도 훔쳤다. 비칠거리면서도 병사는 몸을 반쯤 일으켰지만, 금방 담을 짚으며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바로 옆의 땅바닥을 가리켜 보이며 웅얼거렸다.

“검을…… 좀.”

요른은 그가 아까 땅에 떨어뜨렸던 검을 집어 올려 가져다주었다. 순찰병은 검을 허리의 검집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손이 벌벌 떨리고 손목도 이상하게 꺾이는 바람에 도로 떨어뜨렸다. 기진맥진한 채로 앉아 있다가 그는 요른 쪽을 올려보지도 못한 채 겨우 목소리만 냈다.

“여기서 뭐 하…….”

목소리가 갈라지는 바람에 그는 몇 번 기침하고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뭐 하고…… 있었니?”

“그게요.”

요른은 후드를 쓴 마법사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고, 가방을 열어 봉투를 병사에게 건네줄 채비도 했다. 그러나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말하지 마십시오.

음색은 몹시도 밝고 또렷했다. 아직 근처에 있구나. 요른이 생각하는 동안 마법사가 덧붙였다.

―말씀하시면 저는 그를 죽여야만 합니다.

병사가 숨을 몰아쉬며 상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도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요른은 고심할 겨를도 없이 주워섬겼다.

“……쥐를 본 거 같아서요.”

“뭐?”

“많이 큰 쥐라서요. 놀랐어요. 자세히 보려고요.”

병사가 지친 와중에도 어이없다는 듯이 뱉길래 요른도 얼른 답했다. 병사는 겨우 요른 쪽으로 시선을 약간 올리며 다시 물었다.

“아까 불빛은 너였니?”

“예. 어두워서, 쥐가 잘 아, 안 보여서요.”

요른은 입 속에서 침이 말라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병사는 요른이 이 정도로 횡설수설하는데도 믿어 주는 것 같았다. 코와 귀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머리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듯한데, 그 덕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운을 떼었다.

“그래. 그러면 혹시 근처에서 마법을 쓰는 다른 사람은 못 봤니?”

―모르는 척하십시오.

“마법사요?”

“내가 아까 당한 거 봤지? 아직 아마 이 근처에…….”

그러나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잇기가 힘겹기도 하지만, 민간인 학생에게 너무 많이 털어놓는 것도 꺼려진 모양이었다.

“아니다. 들어가 보렴. 안에 들어가면 경비병 좀 불러다 줄래?”

―그건 괜찮습니다. 불러다 주십시오.

“예.”

“너무 늦게 다니지 마. 앞으로는 마차에서 내렸으면 바로 들어가. 혹시 오는 길에 누구 만나진 않았고?”

“누누구요?”

“저번처럼 누가 너한테 이상한 거 넘겨주려고 한 적 없어? 내가 지금 직접 검사할 수가…….”

―없다고 답하십시오. 봉투는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서 바로 살펴보십시오.

“어어없, 어어요.”

긴장하자 말더듬이가 도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답을 마치자 병사도 마침내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완전히 늘어져 버렸다. 요른의 귓속에 마법사의 목소리만 계속 꽂혀 들었다.

―문서에 계약서 계열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읽어 보시고 승인하시면 저희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삼십 분 내로 안 살펴보신다면, 제가 이 도시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음성은 거기서 끊어졌지만, 요른도 그 뒤의 말들을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다.

병사가 허리에 차고 있던 소형 램프에 불을 밝혀준 후 요른은 서둘러 학원 대문 쪽으로 다가가 야간용 샛문을 열고 부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에게 빨리 순찰병 쪽으로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다음 자신은 기숙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혹시 그 목소리가 또 쫓아올까 봐 걱정했지만, 학원에 들어온 후부터는 들려오지 않았다. 요른은 상급생 기숙사 3층의 제 방으로 올라와서 문을 닫고 빗장 두 개를 다 걸어 잠갔다. 그리고 신음을 뱉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맙소사.’

하루 저녁에 여러모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너무 빨리 걸었더니 가슴과 배 속에 아직 덜 나은 상처도 새로 따끔거렸다. 그러나 그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마법사는 삼십 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다.

‘뭘까.’

가방 속 봉투를 꺼내서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요른은 침침한 눈을 소매로 문질렀다.

‘보고 나서 새벽에 막시한테 보고해야지.’

마법사는 요른이 봉투 속 물건을 살펴봐 주지 않으면 사람들을 해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살펴본 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빨리 읽어 보고 막시에게 연락하면 된다.

요른은 문서들을 차례차례 꺼내 놓았다. 문서라고 해도 두 장뿐이었으나 글씨가 워낙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읽어야 할 양은 적지 않았다. 요른은 개중 한 장의 오른쪽 맨 아래에서 P라는 머리글자와 짧은 당부의 말을 발견하고서 갸웃했다. 누굴까, 왜 자기들한테 오라는 걸까. 그러나 곧 탁상 램프를 켜고 본문의 글자들에 한 땀 한 땀 눈을 주었다.

기숙사 건물 앞뜰, 상급생 하나가 취한 채 비틀거리며 제 방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는 오늘 시내에서 친구를 만나 너무 오래 놀았으며 카페에서 학생들이 저녁에 ‘사과주스’를 달라고 하면 슬쩍 건네주는 도수 약한 술마저 넉 잔이나 마셔버렸다. 발을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세상이 빙빙 돌던 참에 그는 술도 깰 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러다가 3층 창문에도 눈이 스쳤다.

“어, 어.”

신음하며 그는 우뚝 멈춰 섰다.

천사, 아, 아니, 악마. 그는 현기증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창가를 물들이고 있는 그 백색의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자신이 그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계시처럼 뇌에 직접 부음받고 있는 것인지도. 그는 다만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말이라기보다 독특한 탄식 같은 어조로.

“아, 발탄더스, 발탄더스.”

* * *

다음 날 순찰병들은 시내를 속속들이 뒤지기 시작했다.

연구소로 납품되어야 할 실험용 마물 조각 일부를 빼돌린 도둑이 있는데, 그가 시내에 숨어 있으리라는 명목하에서였다. 강한 마물은 마검 재료로 가치가 높다 보니 밀매꾼도 있기 마련이다. 시민들은 납득하고는 자기 집 대문이며 창고를 기꺼이 열어 주었다.

협조에 감사하며 순찰병들은 성기사와 마법사의 지휘하에 새벽부터 대로와 골목을 다 훑고 다녔다. 하지만 지휘하는 자들, 그리고 순찰병 중에서도 급이 높은 몇몇은 수색의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 성황국 수도 시내에 흑마법사가 침입했다.

그자는 대담하게도 마도 학원 바로 근처까지 접근해서 해당 구역 순찰병에게 환각 마법을 잔뜩 쓰고는 사라졌다. 순찰병은 치료를 받고는 있었지만, 뇌의 손상이 완전히 복구될 거 같지는 않았다. 평생 어지럼증과 이명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터였다.

흑마법사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대체 어떻게 잠입한 건지, 왜 그 순찰병을 죽이지는 않은 건지 혹은 못 한 건지는 아직 전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각 분대에는 가능한 한 생포해서 심문에 부칠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터였다.

막시밀리안도 연락을 받고 시내 수색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가끔 생각에 빠진 듯이 보였다. 그리고 오후에 보병 교대 시간이 되자 잠시 부관에게 대행을 맡기고는 자리를 떴다.

요른은 기숙사 방에서 회복 마법 주문을 공부하고 있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열아홉 살짜리 성기사단 부대장이 붉고 검은 제복을 갖추어 입은 채 거기 서 있었다.

“막시.”

“잘 있었어?”

요른은 끄덕거렸다. 막시밀리안이 들어와서 방 한가운데에 의자 하나를 놓고 앉았다.

“어제 흑마법사 한 명이 시내에 들어왔었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어…….”

“일반에는 비밀이지만, 우리가 지금 시내를 수색하고 있는 게 사실 그것 때문이야. 혹시 어젯밤에 뭐 본 거 없어?”

“수, 순찰병.”

요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학원 입구 쪽에서 네 수하 병사를 만났어. 마법사한테 당했다고,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가, 같아서, 경비병을 불러줬었어.”

“그래. 우리가 찾고 있는 것도 그 마법사야. 근처에서 뭔가 본 거 없어?”

“순찰병도 물었었는데, 난 본 게 없었어.”

“그렇구나.”

막시밀리안이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네 방을 수색할게.”

“…….”

“요른?”

“으, 응.”

막시밀리안은 책꽂이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요른은 책을 주로 빌려서만 봤기에, 방 안에 있는 건 제 키보다 조금 큰 5단짜리 작은 책꽂이뿐이었다. 그래도 책들 사이의 틈새를 하나하나를 살피고 조금 큰 책은 열어서 페이지를 넘겨 보기까지 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막시가 방을 뒤지는 동안 요른은 엉거주춤 창 쪽의 벽에 기대어서 서 있었다. 책상 서랍과 수납장을 뒤지고, 침대 속, 의자 속이나 창틀 아래까지 살펴보고 나서야 막시밀리안은 다시 방 중앙에 놓아 두었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요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문서야.”

“응?”

“다른 기사들은 몰라. 아직은 나만 아는 정보야.”

막시밀리안이 조용히 꺼내 놓았다.

“시내에 중요한 내통자가 살고 있거든. 그자에게 어떤 문서를 전해 주려고 했던 거 같아.”

“응……. 응.”

“그러다가 순찰병한테 들켜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일단 눈에 띄는 아무한테나 맡겼을 수도 있어. 절대로 누구한테도 넘겨주지 말라고 협박을 했겠지? 나중에 도로 찾아가려고 그랬을 거야. 문서에 추적 마법을 걸어 두었을 테니까.”

그런 거라면 괜찮을 거다. 요른은 생각했다. 어젯밤 읽은 다음 바로 태워 버렸으니까, 다시 찾아온대도 내어 줄 게 없다. 막시밀리안이 다시금 요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잘 생각해 봐. 어젯밤에 누군가 네게 이상한 봉투를 넘겨주지 않았어?”

“그, 그런 적 없어.”

“그래?”

막시밀리안이 끄덕거렸다.

“그럼 정말 아무 일도 없었구나.”

“응.”

“그래.”

그는 요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물었는데 네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지. 그리고 내가 방금 방도 다 뒤졌잖아. 그랬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안 나왔지. 그럼 어젯밤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으응.”

“어젯밤 너는 내 성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학원으로 돌아왔고, 정문에서 내려서 기숙사로 향했어. 그리고 방에 올라와 바로 씻고 잠들었고. 맞지?”

“나…….”

요른이 타들어 가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 는……. 막시.”

“이게 맞아.”

막시밀리안이 잘라 들었다.

“날 못 믿는 거야, 요른?”

“아, 아니.”

“따라 해 봐.”

막시밀리안이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고, 요른은 얌전히 제 입으로 따라 했다. 나는 어젯밤 네 성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학원으로 돌아왔고…… 막시밀리안은 만족한 듯 어렴풋이 웃었다.

“그래. 그대로 외워 둬.”

“응…….”

“혹시라도 누가 뭐라고 하든, 네 스스로 의심이 들든 내가 방금 말해 준 것만이 진짜야. 외워 두고 믿어. 그럴 수 있겠어?”

요른은 막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는 늘 ‘외워 둬.’ 하고 명령만 했고, 기실 명령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는 질문형으로 끝을 맺었다.

표정도 이상했다. 막시는 언제나와 똑같이 나긋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그러나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고는 집어 낼 수 없었다. 문득 막시밀리안이 검 손잡이에 오른손을 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요른의 안에 어떤 얼음 같은 불씨가 점화되기도 전에 그는 손을 도로 늘어뜨렸다.

막시밀리안은 양손을 어깨 위까지 천천히 들어 보였다.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항복하듯이. 여전히 요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응.”

요른은 겨우 답했다.

막시밀리안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온기가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요른에게 다가오더니 장갑 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주었다.

“착하다, 요른.”

그의 손이 닿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막시가 손을 거둔 후에도 한참이나 요른은 지나치게 밝은 광채에 데인 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곧 돌아서서 방을 떠나 버렸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 등과 어깨가 마지막으로 요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어제 한밤중에 요른은 머릿속에서 저런 등을 보았다. 아직 훨씬 더 작고 여린 등이었지만.

언덕 위, 열두 살짜리가 짊어지기에는 우습도록 간절한 말을 하고, 버거운 약속을 내걸며 떨던 등.

하지만 요른은 고개를 흔들었다. 막시가 아니라면 아닌 거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후드를 뒤집어쓴 마법사를 만나 고문서 필사본을 받아 왔고, 이상한 글귀들을 읽고서 골이 다 쪼개지는 듯했고, 기억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안 가는 기괴한 장면이 파드득 깨어 나와 뇌리를 뒤덮었다. 막시가 그간 머릿속에 주입해 주었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장면들.

공포가 엄습했다. 까마득한 허공까지 단번에 날아오르는 느낌에 요른은 수납장의 서랍을 열고 뒤집어서 훈장들을 모두 쏟아 내고, 손이 으스러져라 서너 개씩 한꺼번에 붙들고 가슴에 누른 채 지켜달라고 빌었다.

어떻게 다시 잠든 건지, 정신을 잃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눈을 뜨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몸속에서 어떤 벽이 문이 되어 열려 버린 듯한, 아슬아슬하게 틀에 걸쳐서 닫아 놓기만 한 듯한 느낌만은 여전히 남은 채로.

그래도 막시가 아무 일도 없었다면 없었던 거다.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막시에게 보고를 올릴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문서를 태워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요른은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봐도 요른이 결국 프란첸 부인이 아끼던 꽃병을 깨 놓고도 모른 척했던 게 맞았고, 아무리 아닌 것 같아도 내내 금지 마법을 줄줄 흘리며 성안 사람들을 홀리고 다녔던 것도 맞았듯이. 막시가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다.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고 떠오른 것도 늘 그렇듯 또 다 가짜 기억에 불과하다.

요른은 따스한 족쇄가 목에 감긴 양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그 족쇄에 감겨 있을 수 있길 빌었다. 그가 보호해 주는 가운데 언제까지나 그의 다정한 말들에 묶인 채로 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때 초상화 속 영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슬 어딘가에 균열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른은 땅으로 돌아오려는 듯이 상체를 숙이고 시트를 감아쥐었고, 견디기 힘들어지자 다시금 서랍에 넣어 두었던 훈장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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