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약속
1.
성기사단 개선 행렬을 맞아 성황국 수도의 대로는 넓게 열려 있었다.
기병대가 들어올 수 있게 길을 손질하고 건물 사이로 화환을 걸어 두었으며, 한낮이었지만 공중에는 마법으로 색색으로 불빛을 올렸다. 행렬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 대포도 몇 발 쏘아 줄 터였다.
수도에 있는 자들은 계급을 가릴 것 없이 개선 행렬을 구경하러 거리로 나왔다. 평민은 길 양쪽에 나와서 서 있었지만, 귀족이나 부유한 시민은 중앙대로 양쪽 건물의 카페나 레스토랑 상층에 앉아 있곤 했다.
요른은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 열다섯 살 난 소년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건물 뒤편으로 숨어들어와 나무의 정에게 청하는 주문을 외웠다. 벽에 딱 달라붙어 자라던 작은 가로수 가지와 담쟁이덩굴이 서로 얽히며 요른의 몸을 감아쥐어 지붕 위로 올려 주었다.
‘됐다.’
요른은 4층 건물의 붉은 기와지붕 위에 엎드려서 생각했다. 여기쯤이면 행렬이 잘 내려다보이리라.
갈퀴같이 말라빠진 손으로 기와를 움켜쥐고 있으려니 아팠다. 하지만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마물 출몰이 잦아진 시대다.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예민해져 있었고, 반쪽짜리 마물이라는 소문이 딱 어울리는 생물에게는 반사적으로 가혹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 이런 경사스러운 날 대로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 남쪽에서 환호성과 대포 소리가 섞여 들렸다. 요른은 반색하며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기사가 이끄는 기병대가 차례차례 대로를 따라 행진해 들어왔다. 맨 처음으로 들어오는 건 물론 수도 성기사단 단장이자 대륙 모든 도시 성기사단의 총사령관, 베스퍼 폰 크라우스의 부대였다.
요른은 움찔했다. 베스퍼는 훌륭한 기사에 제후지만, 사생활 면에서는 기분 나쁜 소문이 돌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저 술자리 안주로 씹으면 그만일 성격의 일이었지만 요른은 아니었고, 그를 볼 때마다 직접 살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듯한 위협을 느꼈다.
지붕에 네 발로 들러붙은 짐승처럼 수그리고 있다가 요른은 그 거구의 성기사와 직속 부대가 다 지나가고 나서야 겨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의 부대가 뒤따랐다.
베스퍼에게는 엄중한 박수만 보냈던 시민이 막시밀리안이 근처에 오자 손을 흔들었고, 이름을 직접 부르며 화환을 던졌다. 마흔이 넘은 베스퍼보다는 아무래도 열아홉 살 꽃다운 이 청년 부대장이 훨씬 더 친근하게 인기가 있었다.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먼발치에서나마 내려다보고는 미소 지었다. 같이 환호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들키면 사람들도 짜증을 낼 테고, 막시한테도 폐를 끼치는 꼴이 된다. 그는 밑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끔 몸을 숨긴 채 시선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욕심이 일었다. 눈에 비치는 영상의 질이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멀고 흐릿하다. 두 달 만에 겨우 보는 건데 눈도 코도 입술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요른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전송 마법을 외웠다.
막시밀리안과 요른 사이의 허공이 떨리며 길을 열었다. 흑발 청년의 얼굴 모습과 그 주변의 소리가 공기의 갈래를 타고 요른의 눈과 귀에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마치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 생생한 상은 요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바람에 곧 침몰해 버렸다.
‘고마워.’
요른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금 울었다.
‘살아서 돌아와 줘서, 늘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마워.’
남부의 상황은 나빴다. 몇 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마물의 출몰이 잦아졌고 그 종류도 많아졌다. 검은 숲 근처의 마을들만이 아니라, 중소도시에 해당하는 곳도 한 해에 몇 번꼴로 습격을 당하곤 했다. 게다가 마물뿐만이 아니라 검은 숲에 콕 처박혀 숨어 살던 흑마법사들마저 이제 나돌아다니며 전도 활동을 펴곤 했다.
그들이 전도하는 바는 언제나 같았다. 곧 마왕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기인 전송 마법으로 곳곳에서 소위 예언을 전하며 전단을 뿌렸다. 거짓 선지자인 성황의 세계를 깨뜨리며 마왕이 온다. 마물은 기실 정령 마법이 아니라 그분의 힘을 미리 빌려 만들어진 생물이며 우리들은 신세계를 준비하는 선민이니, 선택받고자 하는 자는 늦기 전에 우리 편에 가담하라.
마물을 퇴치하기 위해서든 전도에 바쁜 흑마법사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든 성기사들은 자주 남부에 출격했고, 몇 달을 순회하며 싸우고 수색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많이도 죽어 나갔다.
‘빨리 막시의 파트너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요른은 생각했다.
‘내년에 졸업하면 기사 파트너 시험을 볼 자격이 생겨. 바로 막시밀리안한테 배속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야지.’
꼭, 꼭 그의 파트너가 되어서 언제나 그를 곁에서 지켜 줄 수 있기를. 막시밀리안이 출정할 때마다 혹시라도 두개골의 마법진으로 신호가 전해져 올까 봐 잠도 잘 못 자고 노심초사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빌면서 내려다보다가 요른은 순간 몸의 중심을 잃었고, 미끄러질 것 같아서 휘청하며 손으로 기와 몇 개를 내려치듯이 붙잡다가 악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들었을까 봐 겁내며 요른은 어금니를 서로 콱 부딪치듯이 입을 다물었고, 몸 안을 관통하는 은은한 통증을 간신히 참았다.
‘아직도 덜 나았구나.’
움베르토의 연구소에 들른 건 그저께 저녁이었다. 가슴과 배 여기저기 관을 꽂아 넣긴 했었지만 실험 직후에는 치료술을 받았고, 어제는 기숙사 방에서 푹 쉬었다. 그러니 오늘까지는 충분히 회복되었어야 했다.
‘오는 길에는 괜찮았는데. 아까 너무 갑자기 움직였나 보다. 조심해야지.’
요른은 등허리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았다. 막시밀리안은 이미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요른은 아쉬워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그는 생각했다. 막시는 어차피 내일 밤 내 방에 들러 줄 테니까.
그때는 정말로 바로 코앞에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훈장도 하나만 더 달라고 부탁해야지. 요른은 이미 침대 곁 수납장 서랍 가득 들어 있는 훈장들을 생각하며 되새겼다. 악몽을 꿀 때마다 꺼내서 꽉 쥐어 보는 단단한 금속 물체들.
지난번 훈장을 넘겨받고서 한동안 괜찮았는데, 다시 꿈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실험 때문이다. 새 물건이 필요했다.
‘지켜 줘.’
요른은 입 안으로만 뇌까렸다.
막시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는 걸 확인하고는 요른은 지붕에서 내려갈 채비를 했다. 다른 부대에는 어차피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몸을 움직이다가 그는 문득 차가운 바다색의 눈동자를 마주쳤다. 대로 반대편 카페 발코니에 앉아 있던 금발의 영애.
요른은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지만, 얼른 주문을 외워 나무의 정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지의 끝부분이 다소 거칠게 그의 허리를 감아쥐었다. 숨이 턱 막히면서도 요른은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어떡하지.’
내려와서 후드를 푹 내려쓰고 다시 마도 학원 쪽으로 걸으면서, 요른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고동치는 걸 느꼈다.
‘이번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난 두 달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오늘 괜히 지붕에 올라가서.’
들켜 버렸다. 요른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린다 투트 크라흐트 백작 영애님께 자신이 경사스러운 날 이렇게 멋대로 나다닌 걸 들켜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출정 전에 세 명에게 요른의 관리를 맡겨 놓고 떠났다. 린다, 카를, 그리고 성황국 학원으로 옮겨와서 새로 사귄 생도이자 베스퍼의 조카인 호르스트 폰 크라우스에게. 그는 돌아오면 먼저 이 셋에게 보고를 받아 요른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확인하고, 그다음 날 밤에는 요른의 방으로 직접 찾아왔다. 그래서 요른이 잘하고 있었으면 칭찬해 주었고 잘못한 게 있으면 벌을 줄 약속을 잡았다.
요른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을 잡게 되었고, 전처럼 벌을 자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벌의 강도는 좀 더 심해졌다. 마르티넷은 말채찍으로 바뀌었고, 가끔 발목을 묶어 물통에 거꾸로 빠뜨리기도 했다.
지난번 막시가 귀환했을 때는 나쁜 마법을 개발한 죄로 벌을 받았다. 막시밀리안에게 도움이 될 줄 알고 애써서 꾸며 낸 마법이었는데, 실기 시간에 선보이자 교사가 새파랗게 질려서 세 명의 ‘보호자’들 중 하나인 카를에게 알렸다.
카를은 그날 저녁 요른을 제 기숙사 방으로 불러서 뒷짐을 지고 무릎을 세워 앉으라고 시켰고, 그대로 배를 열 번은 걷어찼다. 차는 동안 절대로 쓰러지면 안 된다고 명해 놓고서. 그리고 막시밀리안은 돌아오자마자 요른을 데려다가 하인을 시켜 성의 지하실에서 딱 스무 번 등을 말채찍으로 때렸다.
사실 요른은 벌을 받는 것 자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잘못해서 받는 것인 데다가, 막시한테 벌을 받는 거야 이제 익숙했다.
하지만 날짜가 문제였다. 피험체로 일한 후 사나흘은 몸에 상처가 남는데, 그걸 막시밀리안이나 그 하인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핑계를 대어서 벌 받는 날짜를 조정해 달라고 부탁할 때가 많았다.
요른은 주로 강사들한테서 개인 과외를 받는다는 핑계를 댔다. 다나나 움베르토가 잘 협조해 준 덕분에 막시밀리안은 실제로 그 얘기를 믿어 주었고, 벌을 받는 날짜를 과외가 없는 날로 정해 주곤 했다. 그래도 막시에게 거짓말을 할 때마다 오금이 다 저렸다.
‘이번에는 벌은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많이 조심했는데.’
요른은 눈이 젖은 채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걸었다. 요 두 달간 그는 아주 얌전히,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학원에서 수업만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벌을 받게 생겼다.
[개선식 날만이라도 제발 좀 그 징그러운 꼴로 얼쩡대지 마.]
사흘 전 카를은 요른을 따로 불러다가 분명히 그렇게 명했다.
[다른 사람들 눈 버리는 것도 좀 생각해. 방에 얌전히 처박혀 있어.]
그 자리에서 린다도, 호르스트도 카를의 명을 들었고 동의했다. 요른도 물론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 결국 멋대로 시내까지 뛰쳐나왔고 린다에게 들켜 버렸다.
요른은 그러나 자신이 실은 후회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거나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그냥 본 것만이 아니다. 전송 마법을 써서 훔쳐보고 숨소리도 훔쳐 들었다. 돌이키자 요른은 가슴 속이 나비처럼 파닥이는 동시에 새카맣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음험한 짓을 했는지 뒤늦게 알아챈 탓이다.
생에 있는 유일한 고귀한 것이 그인데, 그를 향한 마음으로 자신은 늘 천하고 나쁜 짓만 저지른다. 그러고도 후회하지조차 않는다.
요른은 결국 흘러내린 눈물을 소매로 닦아 냈다. 키도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여전히 키에 비해서도 너무 몸이 말라서 소매는 헐렁하게 남아돌았다. 덕분에 울 때는 손수건 대신 쓰기에 편했다.
‘칭찬만 받은 날도 있었는데.’
요른은 호르스트를 떠올렸다. 요른과 동갑인 이 생도는 처음에는 요른에게 꽤 부드럽게 굴었다. 잘못을 하면 질책이야 했지만, 때리거나 욕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둘이 화를 냈을 지경이었다.
요른도 무서웠다. 또 자신이 홀림 마법을 써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달리던 나머지 그는 어느 날 결국 호르스트에게 막시밀리안이 가르쳐 주었던 방법을 사용했다. 호르스트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그 후부터는 태도가 싹 바뀌었다.
다행이었다. 요른은 그때 호르스트의 변화를 확인하고는 적이 마음을 놓았다. 막시가 요른이 열세 살 때 새로 가르쳐 준 이 방법은 몹시도 효과가 좋았다. 린다와 카를이 이 일에 대해 막시에게 보고해 주었을 때, 막시는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서 웃으며 장갑 낀 손으로 요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오랜만에 칭찬만 받은 날이었어. 이번엔 최소한 벌은 피할 줄 알았는데, 결국 마지막 날에 다 망쳐 버렸네.’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잘못을 하면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곤 했다. 힘든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또 그런 짐을 보탤 거라 생각하니 속이 싸늘해졌다.
요른은 눈물범벅이 된 채로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고꾸라지듯이 몸을 뉘었다. 관이 몸을 뚫고 지나다녔던 상처들이 새삼 맥박 치듯이 아팠고, 밤은커녕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도 졸음이 쏟아졌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어제 설레는 마음에 잠을 잘 못자서 그런 듯도 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하자 요른은 얼른 침대 바로 옆의 수납장 서랍에 손을 뻗었다. 서랍 안에는 훈장이 든 보석함이 여럿 있었다. 요른은 백금 도금이 된 걸 꺼내 들고 가슴에 안았다.
훈장에 새겨진 문양은 모두 똑같았다. 커다란 새 모양의 마물을 성기사가 물리치는 모양의 부조. 개중에 요른은 백금 도금이 된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새의 몸체에 흰빛의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게 요른의 악몽에 나오는 마물과 제일 닮았기 때문이다.
“지켜 줘.”
요른은 그 훈장의 주인에게 빌듯이 중얼거렸고, 부조로 가슴 한복판에 낙인을 새기듯이 꽉 누른 채 선잠이 들었다.
요른이 그렇게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몸을 뉘었을 때, 린다는 대로변 카페 2층 발코니에 ‘친구’와 함께 앉은 채 여전히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저 허연 괴물은 왜 죽지도 않고 저렇게 나다니는 거야.’
4년이다. 린다는 생각했다.
자신이 저 괴물을 피험체로 제공한 공으로 마침내 진학 허가를 얻어 성황국 학원으로 옮겨 왔던 것도, 저 괴물이 움베르토의 연구소 소속 피험체가 된 것도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4년간 몸에 별짓을 다 했는데도 저 괴물은 죽기는커녕 팔팔하게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 꼴에 열다섯 살이라고 그래도 몸도 좀 컸고, 후드 아래 가려진 이목구비에도 이제 제법 마냥 아이만은 아닌 빛이 돌았다.
그 꼴을 마주칠 때마다 린다는 징그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징그럽게 생겨 먹어서는 자살하지 않고 견디며 살 수가 있는지, 거울도 보지 않는 건지. 아니, 역시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수치감이나 혐오감도 없는 것인지.
‘지가 못 할 거면 남의 손에라도 죽으라고 실험실에 보내 뒀더니, 어떻게 4년이나 죽지를 않아. 저긴 대체 왜 올라간 거야? 막시밀리안이 어차피 내일 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지독히도 억울했다. 해도 쨍한 개선식 날을 저 괴물이 지붕에 올라앉아 다 망쳐 버렸다.
주제에 저 병신은 그동안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말더듬이만은 어느 정도 고쳤고, 복잡한 주문도 조금이나마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 감겨 지붕에도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땅에 붙는 것도 모자라 허공에까지 굴러다니는 병균 꼴이지.’
린다는 다른 데로 생각을 돌려 보려고 발코니 아래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도 좋은 볼거리는 없었다. 이제 기병대 행렬은 끝나고, 수레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 조각이 밀봉되어 담긴 상자를 그득그득 실은 화려한 수레가.
상자들을 보며 시민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린다의 옆에 앉은 시골뜨기 영애도 따라 했다. 린다만 등에 소름이 쭉 끼쳐 입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일 일정을 떠올렸다.
오늘은 개선식 때문에 린다를 비롯해 대부분 연구소 직원들이 반차를 냈다. 하지만 내일 그녀는 다시 움베르토의 연구소로 견습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
린다는 주로 서류 일만 돕는지라 요른을 직접 볼 일은 없다. 그래도 그녀가 들은 바로는 인체 강화 실험이 지난 4년간 진전을 보인 건 바로 이 요른 덕분이라고 한다. 움베르토나 다나는 린다에게 몇 번이나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을 전해 온 바 있다.
“당장 성과를 내놓을 수 있을 만한 건 아닙니다. 워낙 만전을 기해야 하니까요.”
서른일곱 나이에 벌써 머리에 새치가 가득한 움베르토 사센은 린다 투트 크라흐트, 지금은 기록부서 견습에 불과하더라도 십 년쯤 후에는 흑마법 대책부 장관 자리를 물려받을 백작 영애에게 공손히 보고했다.
“그래도 충분히 앞으로 오 년 후 정도는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린다는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면 오 년 후에는 예약 1순위라는 베스퍼 폰 크라우스부터 강화 시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이상한 소문, 그러니까 마물을 좋아해서 성에 몇 마리 숨겨 놓고 키운다는 소문이 나 있는 자다. 하지만 어쨌거나 뛰어난 성기사니까 잘 버텨 낼 수 있으리라. 이런 시대에 마흔이 넘어서도 총사령관에 단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튼 잘 진행되고 있다니 다 좋은데, 그 괴물은 그만큼 실험을 당했는데 왜 뒈지질 않습니까. 린다는 간질간질하게 떠오르던 질문을 결국 입 밖에까지 내어 버렸다. 그러자 움베르토도 왠지 신이 나서는 재깍 답해 주었다.
“예, 진짜 괴물이죠.”
콧노래를 부를 듯이 답하는 꼴이 아무래도 질문의 맥락을 좀 잘못 이해한 거 같았다.
“딴 놈들은 길어야 석 달이면 잠식되거나 죽어 나가는데, 걔는 지금 4년째 온갖 짓을 다 해 대도 팔팔합니다. 진짜 좋은 걸 가져다주셨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움베르토가 씩 웃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걸 보며 린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도 기록부를 읽었다. 요른은 분명 열한 살 때부터 착실하게 2주, 못해도 3주에 한 번은 실험실에 들러서 몸 안에 온갖 마물 조각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잠식은커녕 너무나 멀쩡하게 살아서 수업도 한번 빼먹지 않고 다닌다. 졸업 때 개근상마저 받아 낼 지경이다.
린다는 점점 더 요른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힘들어졌다. 학원에 아직 재학할 때는 미칠 것 같았다. 작년에 졸업하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아직 가끔 프란첸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마주치거나, 도서관 때문에 학교에 들렀을 때 먼발치에서라도 볼 일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무서웠다.
그녀는 자기 가슴 밑바닥에 있는 게 죄책감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그건 내려다보는 듯한 혐오와 경멸이어야만 했다. 린다는 속으로 일부러 거칠게 짓씹듯이 되뇌었다.
‘징그러운 새끼. 대체 얼마나 더 섞어야 망가질 거야. 빨리 좀 뒈져 버려.’
성황국 수도 중앙 대로에 꾸역꾸역 들어서는 수레들을 노려보며 그녀는 내내 눌러 왔던 한마디마저 불쑥 떠올리고 말았다.
‘막시밀리안을 위해서라도, 제발 좀.’
린다는 고개를 돌려 새삼 제가 구해다 놓은 ‘친구’, 샬로테 폰 켈러라는 영애의 희멀건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충분히 닮았나? 그녀는 자문했고, 가늘게 한숨을 쉬며 도로 난간 아래로 눈을 돌렸다.
막시밀리안 루드비히 폰 프란첸은 올해 열아홉 살이다.
소귀족 방계면 몰라도 대귀족가 직계 독자라면 이미 정혼자 정도는 있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맞선 한번 본 적도 없다. 중매가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다 거절했다.
공작 부부가 속이 탈 만도 하다. 사실 옆의 친구들도 마음이 아팠다. 이번 귀환 후 다과회를 위해 린다는 카를과 만나 상담했고, 둘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천치 같은 계집애를 하나 가져다 놓아 보자고.
둘은 목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먼저 찾아낸 건 린다였다. 그녀는 모 남작 부부가 살롱에서 개최한 독서 모임에 나갔다가 목적에 딱 맞춘 듯한 촌구석 영애를 하나 만났고, 바로 다과회에 초대했다. 그 샬로테가 지금 카페 발코니에 린다와 함께 앉아 천진하게 외치고 있었다.
“수레가 정말 끝이 없네요!”
“예…….”
“성기사들은 진짜 대단하네요. 저만큼 많은 마물을 다 퇴치한 거잖아요.”
“예, 참 대단하죠.”
린다는 귀찮아서 그저 고개나 끄덕여 주었다. 머리 빈 자들은 역시 이런 반응이나 보이기 마련이다.
이 년 전만 해도 개선 행진에는 기병대만 참가했고, 운송대는 일부러 수도 외곽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개선 행진 때 줄줄이 같이 들어온다. 성황이 전략을 바꾼 탓이다.
마물의 증가세에 대한 소문을 더는 누를 수도 없게 되었다 보니, 성황은 개선식 때 상자들을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에 실어 일종의 전리품처럼 같이 갖고 들어오게끔 명했다. 그러면 시민은 상자의 엄청난 양 때문에 불안에 떨기보다는 기사단의 압도적인 힘과 승리에 대한 약속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했다. 마물이 얼마나 불어나든 그들이 다 퇴치할 수 있다는 증거로 말이다.
그렇게 전략을 바꾼 게 일 년쯤 되었는데, 수도 여론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게 먹힌 것 같았다. 상황을 아는 린다 같은 고위급 귀족들만 속이 썩어 들어갔다.
소위 최연소 부대장이라는 막시밀리안도 그렇다. 사람들은 그 젊다 못해 어리며, 막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성기사의 존재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들은 열아홉 살짜리가 부대장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게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성기사들은 요 몇 년 너무 많이 죽었다. 부대장급도 몇 죽어 나간 바람에 막시밀리안이 일 년 전 열여덟 살 나이로 공석 중 하나를 채웠다. 위에서도 더는 직위를 내릴 때 나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래에서도 어린애가 상관이 되었다고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던 덕이다.
오직 능력만이 중시되는 체계라는 건 좋게 들리지만, 상황이 얼마나 급해졌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린다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사실상 강제 세대교체야.’
생각하며 린다는 자연스레 반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개선식이었다.
남부에서 돌아온 기사들 중 하나가 환호에 답한답시고 마검을 들어 보였다가 금세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린다도 알고 지내던 가문의 방계 가장으로, 오십이 넘은 성실한 기사였다.
기사는 말에 탄 그대로 순식간에 마물로 전락했다. 상체는 개화하듯이 벌어지면서 마치 꽃잎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가시 촉수로 된 민들레처럼 변했고, 하체는 고무처럼 늘어나 말의 허리를 꽉 졸랐다. 그러나 그가 사방을 찔러 대기 전에 열아홉 살 생일을 앞두고 있던 부대장이 금세 달려와 마상 대검으로 그를 베어 처리했다.
그때 수도 시민은 공포에 질린 게 아니라 환희에 들떴다. 늙은 기사의 몸이 막 변하기 시작했을 때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막시밀리안이 움직이자 곧 환호와 응원으로 바뀌었고, 마물이 동강 나자 온 도시의 공기가 천둥처럼 떨렸다.
당일 저녁에 벌써 막시밀리안의 시내 전투 장면 화보가 조악하게나마 제작되어 호외로 돌기 시작했고, 다음 날 아침에 당장 벽보 신문으로 붙었다. 슬픔을 표하는 탄식은 현장에서도 없었고 신문 지상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성황국에 오래 종사해 온 늙은 기사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찬란하게 떠오르는 별과 같은 젊은 기사의 활약을 직접 본 데에 흥분했을 뿐이다.
‘우리 세대야 마검에 익숙하지.’
린다는 되뇌었다. 카를도 막시밀리안도 생도 시절부터 마검을 제 몸처럼 복속시키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반면 정령검만 들고 싸우던 윗세대 성기사들은 마검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그 장년의 기사도 내내 위태위태하게 싸우다가 결국 그 지경이 된 것이다.
‘저 인간들은 곧 다 일선에서 물러날 거야.’
윗세대는 그래도 싸워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마검에 잠식당하든가, 아니면 그런 꼴이 되기 전에 알아서 물러나 영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성기사단도 그 파트너 자리도 결국 린다 또래의 후계 세대로 꽉 차게 되리라.
그래. 린다는 비웃듯이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들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늙은 당신들이 영지에 숨어서 며칠, 몇 달쯤 더 오래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우리는 최전선에서 먼저 갈기갈기 찢겨 죽으리라.
그러니까 린다는 막시밀리안이 혼인을 미루는, 아니, 사실상 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마음도 이해는 했다. 린다나 카를이 제 친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려를 구해 주고 싶어 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길어야 고작 십 년쯤 후 비참하게 죽을 게 뻔하니 결혼이고 뭐고 안 하겠다는 것과, 그 짧은 생애 동안 지저분한 소문에 시달리고 눈총을 받는 건 또 다른 얘기니까.
‘그러게 그 괴물은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이제 돌아가죠.”
수레 행렬도 마침내 꼬리를 보이고 있었기에, 린다는 옆자리 영애에게 말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로테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빛바랜 듯 옅은 금발과 옅디옅은, 하늘색이라기에도 지나치게 희박한 눈동자, 그리고 햇빛을 몇 달은 못 본 듯이 창백한 뺨에 말라빠진 팔목.
카를도 다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그는 막시밀리안에게는 ‘천치 같은’ 여자를 찾아다 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냐면서 다소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아무것도 직접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린다는 며칠 전 자신이 누군가를 먼저 찾았다고 카를에게 언질을 주었고, 카를은 그렇다면 자기 쪽에서는 더는 찾아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카를이 먼저 찾았다고 해도 그 또한 린다와 마찬가지로 연한 백금발에 눈의 색소도 옅고, 피부도 멀겋게 희고 비쩍 말라서는 긴장하면 말이나 더듬는 천치를 지목했으리라.
‘당연해.’
린다는 씁쓸하게 곱씹었다. 카를이 아무리 둔하더라도 십오 년 지기인데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다. 게다가 귀족 사회 내에서는 이미 웬만큼 말이 돌고 있으니, 그도 몇 다리 건너서 돌아온 말들을 들은 바도 많으리라.
막시밀리안은 오늘 황성으로 들어가서 저녁 뷔페 겸 결산 회의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밤에는 제 성으로 돌아가 세 명의 보호자가 미리 보내 놓은 보고서를 찬찬히 살핀 다음, 내일은 기숙사로 직접 찾아가리라. 하인도 대동하지 않고 으슥한 밤길을 혼자 말을 달려서.
‘우리야 홀림 마법 때문인 걸 알지. 네가 끌린 게 아니라, 그 애가 끊임없이 널 홀려 왔다는 걸 너무 잘 알아.’
린다는 입술을 깨물 듯이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을 지나치게 싸고돈다는 불만이야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늘 터져 나오곤 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도 요른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후부터는 그 불만의 성질이 변하면서 기분 나쁜 의심으로 바뀌었다.
카를은 어느 날 사냥회에 갔다가 제 존경해 마지않는 친구에 대해 가당찮은 소리가 나오는 걸 듣고는 폭발해 버렸고, 다음날 학원에서 요른을 제 기숙사 방으로 불러다가 장갑 낀 손으로 뺨을 때리고 배를 차면서 노골적으로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막시를 꾀는 짓 좀 제발 그만두라고.
하지만 요른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을 뿐이다. 자기는 금지 마법을 일부러 쓰지 않으며, 특히 막시한테만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고.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린다도 바닥에서 버르적대는 요른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냅다 차 버렸다.
[네 마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애가 네게 그렇게 집착할 수가 있는데!]
물으며 그녀는 요른의 머리를 마저 밟아 눌렀다.
[걔가 너 같은 걸 이렇게까지 잘 돌봐 준다는 것 자체가 네가 금지 마법을 써 왔다는 증거 아냐. 내 말 틀려?]
그러자 요른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금지 마법을 더는 쓰지 않겠다는 소리도 끝까지 내어 놓지 않았다. 호르스트까지 가세해서 셋이서 아무리 더 때리고 채근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마막시는, 워낙 훌륭하니까, 착하고, 그래서 내게도 잘해 주는 거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변명이랍시고 뱉어 내는 걸 들으며 린다는 등이 오싹해졌다. 결국 이 거머리는 제 숙주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평생 동안 말이다.
‘뻔뻔한 생물이야.’
린다도 카를도 이를 갈았고 호르스트도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 숙주의 나긋한 부탁의 형태를 띤 사실상의 명령 때문에, 셋은 이 거머리를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요른은 셋 앞에서는 이렇게 울고 빌어 봤자 제 방으로 돌아가서는 킥킥 웃을 게 뻔했다.
프란첸 공작 부부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제 아들이 괴물한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챘을 만하다. 그러니 그렇게 애가 타서 막시밀리안을 빨리 결혼시키려고 하시는 거다.
린다는 허여멀건한 영애를 앞세우고 카페 1층으로 내려가며 생각했다. 미안하다, 막시밀리안. 요른이 네게 홀림 마법을 못 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네 눈을 속여서 방향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한숨처럼 되뇌었다.
‘이번 주말에 걔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천치 같고 허연 여자애를 데려가 볼 테니까, 제발 이쪽으로 틀어 줘라. 이 방법도 안 된다면 나도 모르겠다.’
계단 난간을 짚다가 린다는 문득 눈을 내리감았다. 사실 다른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요른의 마물로서의 정체를 폭로해서 처리해 버릴 방법이 있기는 했다. 단, 페랑의 그 청년이 진실을 말해 준 게 맞다면 말이다.
그녀는 별장 침실의 수납장에 잘 숨겨 놓고 나온 문서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나지막이 청하며 그 문서를 건네주었던 사람의 얼굴도 어쩔 수 없이 뇌리의 수면에 찰랑거렸다.
[부탁할게.]
그러나 그 무척 결이 고운 갈색 머리가 제 안에서 자르르 윤을 내기도 전에 린다는 얼른 고개를 저어 털어 버렸고, 카페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말을 데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아직은 안 된다. 그녀는 생각했다. 필립이 정해 준 기간은 아직 일주일쯤 더 남았다.
그 문서의 정체를 스스로 어느 정도라도 알아본 다음에야 전해 주든지 말든지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필립의 진짜 목적도. 린다는 말에 올라 고삐를 자신의 별장 쪽으로 가볍게 당겼다.
* * *
나흘 후 오후 세 시, 프란첸 별성의 정원에서 주말 다과회가 열렸다.
손님들은 마차를 타고 수도 동쪽 외곽 언덕의 잘 닦인 길을 올랐다. 남편으로 기울어지는 한 자락에 프란첸 가문의 깃대가 걸린 회백색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은 원래는 프란첸 공작 부부가 성황국 수도에 들를 때 별장으로 쓰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성으로 쓰고 있다. 열일곱 살에 성기사 작위를 받고 1년 후 부대장으로까지 임명되면서 이곳에 상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주라고는 해도 막시밀리안은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늘 출정하기 바빴던 탓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수도 사교 생활에도 지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상하듯이, 한번 귀성하면 그는 꼭 주말에 조찬회나 다과회, 독서토론회를 열어 젊은 귀족들을 초대했다. 오늘도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자리가 열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손님들은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반은 린다의 동행으로 온 남부 출신 영애 때문이었고, 반은 늘 그렇듯 요른 때문이었다.
대화가 시작되자 그 시골뜨기 영애는 금방 깨달은 것 같았다. 다과회에 초대받은 다른 젊은 귀족들은 모두 대귀족가 자제였고, 기사, 마법사이거나 최소한 대학에서 연구자 과정을 밟고 있었다. 대화 주제도 외교, 마검 제작, 예언 해석 등으로 무겁고 날카로웠다.
이름 뒤에 ‘폰’을 달고 있긴 했지만 할 줄 아는 건 회계밖에 없으며, 몇 주 뒤 여행을 마치고 나면 다시 남부 시골로 내려가 보잘것없는 영지 관리나 평생 맡게 될 그녀는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긴 했지만 그녀는 어차피 거의 질문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자 손님들도 곧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그 희멀건 영애는 곧 입을 다물고 식탁 밑으로 제 손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인 한 명이 정원으로 나와 성주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막시밀리안이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 최연소 부대장은 체구가 크기는 했다. 키는 또래 청년들보다 두 치에서 세 치는 더 컸고 어깨와 가슴도 넓었다. 그러나 허리는 호리호리해서 선이 우아했고, 동작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집채만 한 마물을 수도 없이 부수어 놓았다던 강력한 육신은 단정한 암적색 재킷에 감싸인 채 마치 꽃대가 굽어지듯 늦오후의 허공에 나긋한 자취만 흘렸다. 무엇보다 그 얼굴.
비둘기같이 고운 뺨, 갸름하고 단아한 턱선과 미려하리만치 섬세한 이목구비. 특히나 저 까맣고 긴 속눈썹이 드리운 깊디깊은 눈매에 장미 향이 날 듯한 입술이라니, 제 키만 한 대검을 휘두른다는 기사의 얼굴로는 너무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대로 계속 나빠진다면 저 탁월한 청년도 늦어도 십 년 내로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노쇠할 새도 없이 저 꽃 같은 모습 그대로. 초대받은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의 신세도 예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막시밀리안이 하얀 꼬챙이 같은 손님을 데리고 돌아왔다. 자리는 순간 조용해졌다. 손님은 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것에게 인사를 돌려주는 자는 없었다. 막시밀리안만이 그 생물의 이름인 듯한 것을 친근하게 부르며 테이블 한구석을 가리켰다.
“요른, 거기 앉아.”
요른은 주춤주춤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저와 어딘지 닮은, 옅고 광택 없는 금발에 눈의 색소도 희박한 영애가 앉은 자리의 건너편에. 그가 자리를 잡자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자리를 떠 버렸기에 요른은 곧 그 소녀와 단둘이만 앉은 꼴이 되었다.
간식이 새로 나오면서 대화가 더 무르익었다. 그러나 요른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샬로테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기에 둘의 테이블은 덩그러니 침묵 속에 남았다.
영애는 반은 겁에 질리고 반은 호기심에 찬 눈치였다. 상대를 흘끔거리면서 한동안 제 손 가죽만 거의 꼬집듯이 만지작거렸지만, 침묵이 더 견디기 어려웠던지 결국 입을 열었다.
“막시밀리안과는 어떻게 아세요?”
샬로테는 요른이라는 그 생물이 고개를 번쩍 드는 걸 보았다. 의외로 이목구비는 곱상했다. 마치 열서너 살 난 소년처럼 보이는 그것은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놀라기만 했다기보다는 어딘지 겁에 질린 듯했다.
“저, 저는 평민이에요.”
그녀는 그가 더듬거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프란첸가에서 후원해 주셔서 마도 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그렇구나. 나이가 어떻게 돼?”
“열다섯이에요.”
“그래? 생각보다 많네. 너 그럼 학원에서는 몇 학년이야?”
영애는 의자 두어 개를 건너서 상대방의 자리 쪽으로 붙어 앉으며 살갑게 물었다. 요른은 불안하게 눈을 굴리다가 답했다.
“졸업반이에요.”
“진짜? 열다섯 살이라면서. 그거 되게 일찍 졸업하는 거 아냐?”
“이이년, 저정도, 이일찍, 이에요.”
하얀 소년이 못내 입술을 깨물자 샬로테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자지러지는 소리에 다른 귀족들도 곁눈질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활짝 웃으며 얇은 천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요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참 대단하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구나.”
‘속이 참 뻔한 작자군.’
젊은 귀족들은 말없이 조소했다.
같은 귀족 자제에게라면 저 영애는 열 살짜리한테라도 저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불쌍하고 괴물같이 생긴 평민 소년에게라면 머리를 쓸어 줘도 좋다고 생각했으리라. 그 애는 분명 영애님의 손길에 황송하리만치 고마워할 테니까.
그녀는 실제로 지금 무척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자기보다 못한, 훨씬 더 못한 손님이 와서 자기 바로 앞에 앉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의 머리를 개처럼 쓰다듬어 주면서 감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서 잃어버린 자존심이 반이나마 회복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새하얀 소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더러운 게.”
“어……?”
“징그러운 병신이 어디다 감히 손을 대.”
샬로테는 깜짝 놀라서 손을 뗐다. 소년은 관자놀이에 온통 푸릇하게 정맥이 돋은 채 창백한 눈을 더 희뜩하게 뜨고 뱉어 냈다.
“가죽을 벗겨 버리기 전에 꺼져.”
손님들이 대놓고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막시밀리안도 멀찍이서 둘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만족한 듯 희미하게 웃었고, 카를이 서 있던 스탠드 테이블로 옮겨 가서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를이 한숨을 내쉬고는 맨 끝의 테이블로 건너가서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영애를 달래 주었다. 그는 곧 손을 내밀고 뭐라 속삭이더니, 상대가 그 손에 자기 손을 조심스레 겹쳐 오자 꼭 잡아서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마 손님용 휴게실로 안내해 주었으리라.
둘이 사라진 후 남은 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대화를 나누었고, 요른은 혼자서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오후 여섯 시 반쯤이 되어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도 카를은 기척이 없었다. 휴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건지, 아예 같이 들어가서 그녀를 위로해 주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각자 말이나 마차를 타러 성 앞쪽으로 나오면서야 손님들은 카를의 마차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아마 제 마차로 샬로테를 집에 데려다주러 간 것 같았다.
“또 이렇게 되는군.”
손님 중 한 명이 살짝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막시밀리안은 늘 이런 식이다. 누굴 데려와도 그는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다른 친구를 골라 붙여 줘 버린다.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농담처럼 프란첸 별성의 모임은 중매회라는 말이 떠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를 폰 린하우스에게 저런 남부 촌뜨기라니. 몇몇은 막시밀리안이 너무했다고 생각했지만, 몇몇은 샬로테의 영지 위치를 가늠하며 그의 뜻을 짐작했다. 귀족들은 악수를 하거나 가볍게 서로 어깨를 두드려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하나씩 자리를 떴다.
한편 요른은 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안으로 옮겨 가서 1층 접견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막시밀리안을 기다렸다. 손님들을 모두 배웅한 후 막시밀리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요른은 상벌을 기다리는 작은 동물 같은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막시밀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그, 그래?”
“응. 네가 아주 밉다고, 다시는 마주치지도 않고 싶다면서 집에 갔어. 카를이 데려다줬고.”
“다행이다.”
요른이 그제야 안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막시.”
“네가 잘한 거야.”
막시가 드물게 두 번이나 칭찬해 준 바람에 요른은 가슴이 뭉클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재작년에 요른에게 가르쳐 준 방법은 지금까지 아주 잘 통하고 있었다.
요른은 나이가 들었어도 결국 홀림 마법 자체를 자제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성황국 마도 학원으로 옮겨 온 후에는 오히려 더 고삐가 풀려 버린 것 같았고, 재능이니 천재니 하는 달콤한 소리를 하면서 요른에게 접근하는 학생이나 마법사들의 수가 자꾸 늘어났다.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아직 어릴 때는 그래도 때려서 잡아 보려고 애썼다. 요른이 좀 자라고 나서는 마르티넷을 말채찍으로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서서히 지쳐 가는 듯하더니, 어느 날 저녁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요른이 또 누군가를 유혹해 버려서 벌로 성의 지하에서 채찍질을 당한 후였다. 말채찍으로 바꾼 후에는 통증도 후유증도 더 심해졌기에, 그날 열다섯 대를 맞은 후 요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하인을 따라 접견실로 비틀비틀 걸어 올라왔더니 막시밀리안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 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때리는 건 포기하자고.
[여기서 더 때리다간 죽을 수도 있겠어. 때려서 고치는 건 포기하자.]
[그러면 어떻, 게 해.]
열세 살의 요른은 등에 남은 고통 때문에 벌벌 떨면서도 절망해서 되물었다.
[나 홀림 마법 쓰면 안 돼. 고치고 싶, 어. 계속, 도와줘.]
[마법을 쓰는 것 자체는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
막시밀리안이 조용히 달랬다.
[가끔은 쓰게 될 거라고 가정하고 대책을 마련하자. 네가 마법을 써서 누가 네게 끌려들더라도, 사후적으로 물리쳐 주는 거야.]
[어떻게……? 설명해 주는 건 통하지 않, 았잖아. 그때, 필립한테도, 안 통했고.]
[그래. 그러니까…….]
막시밀리안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흘려 냈다.
[욕을 하자.]
[으, 응?]
[네가 평소에 매일 듣는 욕들 있잖아. 그걸 네게 접근하는 상대에게 도로 뱉어 줘. 잘 기억하고 있지?]
[응, 하지, 만 그러면 안 되잖아.]
[안 되지.]
막시가 잘라 말했다.
[사람들은 네게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는 그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지. 하지만 똑같은 말을 다른 사람들한테 하면 어떻겠니? 생각해 봐, 네가 나를 욕하는 거야. 네가 들었던 표현들 그대로를 써서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꼭 너 같다고 주장하는 거지.]
[말도 안 돼.]
요른이 흰 낯이 아예 납빛으로 질려서 항의했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제풀에 눈가에 눈물마저 찔끔 맺혀 버린 채였다. 막시밀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운을 떼었다.
[예를 든 것뿐이야. 하지만 이해하겠지? 너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은 아주 많이 기분이 나빠질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누군가 네게 접근하면, 네가 들어 왔던 욕을 그대로 써서 돌려주도록 하자.]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이며 요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아무리 네 마법이 세더라도, 너무 기분이 나빠서 확 깨어 버릴 수도 있어.]
[응, 응. 그건 알겠어.]
요른은 끄덕거렸다. 막시밀리안이 만족한 듯 미소를 띤 채 다시 의자 등에 기대었다.
[그래. 착하다, 요른. 이제부터는 그렇게 한번 해 보는 거야.]
그날 후로 요른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욕을 해 주었다. 인이 박이다시피 들어 온 말들이라 그대로 따라 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고,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눈앞에 들이밀어졌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거울처럼 흉내 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말로 안색이 싹 변했고, 아무리 강력하게 홀려서 다가왔던 듯한 자라도 치를 떨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 방법이 통하는 걸 확인하고는 요른은 너무 기뻤다. 막시와 약속한 후 요른은 오늘날까지 늘 이 방법을 써 왔고, 지금까지 통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명, 그 거구의 성기사를 제외하면 이 방법은 언제나 완벽한 효과를 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샬로테라는 영애가 이상하게 친근하게 굴었지만, 요른이 그 방법을 쓰자 얼굴이 파래졌다가 빨개지더니 곧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요른도 남을 울리고 싶지야 않았다. 그래도 이게 홀림 마법에 걸려드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상대를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자리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그게 차라리 낫다는 걸 아니까 개입하지 않았고, 막시밀리안은 지금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 주고 있다.
요른은 접견실 의자에 몸을 편안하게 기대었다. 린다가 의외로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사흘 전 기숙사 방에서도 막시는 별말 없이 훈장 원본만 하나 더 건네주고 떠났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이렇게 요른에게 웃어 주고 좋은 말만 해 준다.
무척 만족한 채 요른은 막시밀리안이 먼저 접견실을 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은 채 오히려 요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고, 열쇠 하나를 꺼내서 상대가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서재 열쇠야. 앞으로는 이 성의 서재를 써.”
“어, 응?”
“학원 도서관은 쓰지 말라는 뜻이야.”
막시가 말했다.
“이제 공부하고 싶을 때는 이 성의 서재만 써. 원하는 책이 있으면 가져다 둘게.”
요른은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막시라면 알아서 요른에게 좋은 일을 해 주고 있는 것일 게 뻔하니까. 다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려서 아무 답도 못 한 것뿐이다. 막시밀리안의 몸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써도 탁자 위로 수그린 그의 옆얼굴과 흰 카라로 반쯤 가려진 목덜미의 윤곽이 체향처럼 훅 끼쳐 왔다.
괜찮아. 요른은 일부러 맞은편의 벽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성감은 정지시켜 뒀어. 내가 지금 느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이런 정도 감정은 아름다운 조각상을 봐도 느낄 수 있는걸. 그러나 요른은 몇 주 전 꿈속에서의 감각이 멋대로 상대의 몸에 덧씌워지려는 걸 눈을 거의 질끈 감듯이 깜박여 씻어 내며, 두 손을 허벅지 위로 모아 잡은 채 한쪽 손 밑에서 제 다른 쪽 손등을 꼬집으며 버텼다.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막시밀리안이 물어 왔다.
“요른?”
“응, 응.”
요른은 입 안이 바싹 마른 채로도 얼른 주워섬겼다.
“알았어.”
“서재는 오늘부터 바로 써도 돼.”
막시가 상대의 침묵을 잘못 해석한 듯이 덧붙였다.
“밤까지 쓰고 가도 좋아. 집에 갈 때는 마차를 빌려 줄게.”
“아냐!”
요른이 소리쳤다가 입술이 파랗게 되어서 얼른 입을 꽉 다물었다.
“고마, 워. 하지만 오늘은 그냥 갈게. 다음부터 잘 쓸게.”
“오늘 무슨 일 있어?”
“응, 그, 개인 교습.”
요른이 답했다.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렇구나. 다들 잘 가르쳐 주고 있어?”
“응. 다, 다나도 그렇고 다들. 나 성적 많이 올랐잖아.”
요른은 켕기는 마음을 감추었다. 그는 지난 4년간 이 헌신적인 후원자에게 계속 거짓말을 해 왔다.
성황국 마도 학원으로 옮겨 온 후 요른의 이론 과목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자 제일 기뻐한 건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는 성적표만 확인한 게 아니라, 요른에게 타블로 도안 몇 개를 내어 주면서 직접 간이 시험을 진행한 적도 있다. 분류 방식을 설명하고 길을 그리는 주문을 외워 보라는 것이다.
요른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이론을 실제로 익힌 게 아니라, 시험 때마다 다나 등 흑마법 대책부 소속 강사들이 훔쳐다 주는 문제지와 답안지를 그냥 외우기만 한 거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막시가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면 요른은 얼른 변명하곤 했다. 보면 읽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직 설명까지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막시는 처음에는 그 변명을 믿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요른이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의심이 점점 짙어 가는 눈치였다. 다나가 요른에게 넌지시 전해 준 바에 따르면, 막시는 요른의 자습을 맡은 강사들에게 그 애가 대체 어떤 식으로 공부하고 있느냐고 직접 문의하고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있었던 건 아냐. 미리 말을 맞춰 두었으니 잘 넘어갔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나는 요른더러 조심하라고 덧붙였다. 인체 강화 실험 내용을 폰 프란첸가에 들키게 되면 국가 차원에서 일이 커진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집안 피후원자를 피험체로 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공작 부부는 사적으로도 화를 낼 거다. 그리고 요른 본인도 입장이 곤란하게 된다.
“네가 애초에 왜 피험체가 되기로 동의했는지 다 폭로될 거야. 막시밀리안은 자기가 진학했던 게 물밑 거래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럼 기분이 어떻겠니?”
다나의 음성이 하얀 소년의 머릿속을 차갑게 관통해 흘렀다. 접견실에서 막시밀리안을 마주 본 채 요른은 다시 한번 확언했다.
“강사님들 다들 정말 잘 가르쳐 주셔. 기말고사도 통과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막시밀리안이 끄덕거렸다.
“아무튼 열쇠는 가져가. 서재는 앞으로 내가 없을 때도 와서 마음대로 써.”
“아아냐, 안 돼. 네가 없, 을 때 어떻게 멋대로 와.”
“안 그러면 네가 내 출정 때는 서재를 쓸 수 없잖아. 도서관을 써야 할 일은 꽤 많지 않아?”
“그래도…….”
“대신에 학교 도서관은 이제 절대 가지 마.”
막시가 잘라 말했다.
“이미 빌린 책이 있으면 그것만 반납하고 끝내. 그 뒤로 또 학교 도서관에 가면 묶어서 물통에 거꾸로 넣는 벌을 줄 거야. 알았지?”
“응, 응.”
요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쇠를 탁자에서 집어서 품에 넣었다. 막시밀리안이 마침내 방을 나갔다. 하인이 뒤에 남은 요른을 마차를 탈 곳으로 안내했다.
요른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사 한 명이 성으로 찾아왔다. 막시밀리안의 수하 보병 중 하나로, 파견에는 따라가지 않고 수도 시내 순찰대에 복무하는 자다. 그는 막시밀리안에게 그가 부재하는 동안 압수해서 모아 두었던 편지들을 네모난 가죽가방에 담아 내밀었다.
막시밀리안은 받아 들고 작업실로 올라가 문을 잠근 채 가방을 열어 보았다. 큼직한 종이봉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단순한 서신이 아니라, 여러 문서의 필사본을 모아 보낸 것이다.
우편으로 보낸 물건이 아닌 건 확실했다. 겉봉에 송신인의 이름도, 수신인의 이름도 없었고 소인도 찍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투의 종류나 끈을 묶은 양식으로 보아 페랑 물건인 듯했다. 전령에게 주소를 외우게 한 다음 직접 들려 보내 온 것이리라.
그 먼 땅에서 요른의 기숙사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막시밀리안으로서도 잘 짐작할 수 없었다. 페랑의 사업가 협회는 전 대륙에 걸쳐 상당히 정교한 정보망을 갖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민한 문서를 전하려면 우편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을 직접 보내는 방식을 쓰리라고는 막시밀리안도 짐작은 했다. 때문에 그는 성황국 수도로 옮겨 온 이래 늘 순찰병 여럿을 시켜 교대로 마도 학원 주위를 감시했고, 수상한 자가 눈에 띄면 소지품을 조사하여 압수하라고 지시를 내려 두었다. 그리고 지난해에만 해도 세 번은 이렇게 배달원을 적발해서 문서를 압수해 냈다. 올해는 두 번째였다.
막시밀리안은 봉투를 열고 문서들을 책상 위에 차례차례 꺼내 놓았다. 고문서 필사본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현대의 전단처럼 보이는 것도 섞여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남부 소도시에서 흔히 보았고 압수했던 것과 같은 전단이다. 필사본에서나 전단에서나 똑같은 단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발탄더스…….
살피느라 한 장 한 장 뒤지다 보니 필사본들 사이로 작은 쪽지 하나가 삐져나왔다. 두텁고 매끄러운 고급 종이에 딱 두 줄만 새겨져 있었다.
<어서 자유로워지길
―너의 P가>
막시밀리안은 왼손을 펴고 짧게 주문을 외워 허공에 주홍 불꽃을 피워 낸 후 그 안으로 문서를 차례로 밀어 넣었다. 필립이 애써 보내온 종이들이 모두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