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5/30)

4.

밤샘 중이던 황국 마검 제작 공방의 직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재료를 재촉했다. 갑자기 ‘날씨’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언제 또 해가 쨍할지 모르니 바람이 들 때 타고 날아야 했다. 합성을 시도하며 직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태풍의 눈 안에 들어와 있는 양, 서너 마리짜리 마검 재료도 아무 문제 없이 섞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둘러 진이 그려진 가마 안에 차례차례 주형틀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달아올라 검신을 이루어 가던 재료에 갑자기 균열이 갔다. 직인들이 어어 하고 덮개를 틀 위에 올리기도 전에 주형이 다 깨져서 가마 안에서 사방으로 조각이 튀었다.

하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검들 모두가 그랬다. 가마 벽과 천장에 온통 그려 둔 마법진이 긁혀서 일부 못 쓰게 되어 버릴 정도의 폭발이었던지라, 직인들은 야밤에 청소하고 수리 신청서를 쓰느라 애를 먹었다. 날씨가 좋을 때 얼른 만들어 버리려고 무리해서 몇십 개나 한꺼번에 넣어 뒀던 터라 처리에 더더욱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갑자기 좋아졌다가 또 확 나빠지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네.”

직인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 날씨를 관장하는 신이 제힘을 한번 확 풀었다가 강제로 또 확 거두어 버린 것처럼.

그날 밤 아무리 애써 봤자 직인들은 합성 마검은커녕 일반 마검조차도 단 한 자루도 만들 수가 없었다. 마물 조각들이 검을 이루는 재료와 섞이지를 않는 것이다. 업자들은 고개를 내젓고는 자정이 되기도 전에 벌써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같은 날 밤, 황국 병동은 들끓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들이 꾸역꾸역 병자 운송용 수레에 실려 왔는데, 상처 모양이 하도 기이했기에 치료술사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연구소장인 움베르토는 아무 답도 해 주지 않았다.

특히 머리칼도 피부도 온통 새하얀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상태는 지독했다.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노릇이었는데, 몸이 특이해서 보통 회복 마법이 잘 듣지도 않았다. 움베르토가 얼른 그 소년을 평소에 어떻게 치료해 왔는지 내력이 담긴 자료를 넘겨주었고, 불러야 할 전문 치료술사들도 직접 지목했다. 그리고 만약 우선순위를 설정해야만 한다면 다른 직원보다도 그 소년을 치료하는 게 먼저라고 연구소장 자격으로 공인하기도 했다.

부름을 받고 온 치료술사 대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요른을 치료하려 애썼다. 그러는 동안 마도 협회장은 급히 전송 마법망을 이용해 협회원들을 본부 건물로 불러들여 비상 회의를 열었다.

프란첸 공작 부인은 아들이 크라우스가의 별성에서 도망쳐 버렸다는 소식을 막 전해 들은 터였다. 남편과 함께 잔뜩 실망한 채 서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협회로부터 또 다른 괴상한 소식이 날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소 늦게 회의장에 도착했다. 움베르토도 그 자리에 와서 한구석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이 그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 댔다. 그는 똑같은 답만을 내놓았다.

“말씀드렸다시피,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습니다.”

“날씨가 말입니까.”

“예. 저희 연구소는…….”

움베르토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가 곧 말을 내어 놓았다.

“사실 환각 마법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 자리의 몇몇 분들은 짐작하셨을 테지만, 마물 합성을 통한 인체 강화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반은 얼굴색이 싹 변했지만, 반은 조용히 눈만 내리감았고, 개중에도 몇은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성황 전하의 인가를 받은 건 맞지요?”

“당연합니다.”

움베르토가 운을 떼기도 전에 유디트가 가로채어 답했다.

협회원들은 공작 부인과 연구소장을 번갈아 보았다. 프란첸 공작가에서까지 알고 있다면 확실히 인가를 받아 진행되던 일이리라. 협회장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야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마저 설명드리겠습니다.”

움베르토도 다시 입을 열었다.

“합성 마검 작업이 날씨에 영향을 받듯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피험체에 마물이 잘 섞여 들고, 나쁜 날은 잘 안 됩니다. 오늘 밤 날씨가 갑자기 좋아졌어요. 그러면서 피험체들이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물들이 지나치게 잘 섞여 들면서 잠식되었다는 겁니까?”

“예. 하지만 피험체뿐만이 아니라 직원들의 몸에도 섞여 들었죠.”

움베르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피험체의 몸에는 마물 조각을 직접 투여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실험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마물 조각들이 마치 자석으로 당기듯 허공을 건너 사람들 몸에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정말이지…….”

그는 찡그린 채 말을 이었다.

“무시무시하게 좋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갑자기 태풍의 눈 속에 들어온 것처럼요. 마검 개발부에도 확인해 보셔도 좋을 겁니다.”

“이미 확인했습니다.”

마검 개발부 관리 담당인 협회원이 손을 들고 이야기했다. 여기 오는 길에 급히 공방에 들러 당직 직원에게 물어보니, 날씨가 엄청나게 좋아졌다가 고작 이십여 분 후 갑자기 확 나빠져 버렸다는 보고가 돌아왔다고.

움베르토도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래서 합성이 갑자기 풀리면서 직원들도 피험체들도 몸이 반쯤 다 뜯겨 나간 듯한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설명이 끝나자 협회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날씨’라는 게 영향력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극에서 극으로 변덕을 부린다니. 말이 한참 오간 후 협회장이 결론을 내렸다.

“내일 성황께 보고를 올리고 정식 회의를 열어야 결정할 수 있겠지만, 일단 잠정적으로는 이렇게 하죠.”

대단히 불행한 사고였지만, 날씨라는 변수의 위험성을 확인한 기회로 삼자. 그 영향을 막을 방안이 생기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예보가 가능하게 될 때까지는 움베르토의 연구소를 폐쇄한다.

움베르토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수리 등 손상 복구에도 시간이 걸릴 바, 여러모로 정당한 결정이다.

협회장이 폐회를 선고하자 움베르토는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유디트와 거의 동시에 문을 나섰는데, 잠시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움베르토는 짐짓 아쉬운 듯 말을 붙여 보았다.

“협력이 좀 미뤄지게 되었군요.”

“어쩔 수 없죠.”

그녀는 으쓱해 보이고는 앞서 복도로 나갔다. 복도를 함께 걸으며 둘은 ‘날씨’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유디트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연구소장은 협회 건물을 나와 공작 부인과 작별하고 자택으로 향했다. 이름에 ‘폰’이 달려 있긴 했지만 그는 자기 소유의 성은 없었고, 시내 4층짜리 건물의 위쪽 2층만 빌려 살고 있었다. 집은 협회 건물과 가까웠고 시내의 이 구역은 치안이 좋았기에 그는 굳이 마차를 부르지 않고 걸어갔다. 거의 집 앞까지 다다라서 그는 문득 서늘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보자 온화한 안색을 한 청년이 휴대용 램프를 들고 대로 한쪽에 서 있었다.

“프란첸 경.”

움베르토가 먼저 예를 표했다.

“사센 경.”

막시밀리안도 답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비상 회의는 잘 끝나셨습니까?”

“눈치가 빠르시군요, 프란첸 경.”

“요른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기숙사로 찾아갔었는데, 방에 없더군요.”

막시밀리안이 다소 엉뚱하게 답했다.

“그래서 자습을 하고 있나 보다 하고 다나 강사님께 찾아갔습니다.”

움베르토는 간신히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상대를 응시했다. 막시밀리안이 유려한 어투로 이었다.

“그런데 다나 강사님이, 오늘은 그 애를 움베르토 폰 사센 경께서 맡아 가르치고 계신다 하지 뭡니까. 사센 경께서 요른의 재능을 알아보시고 오래전부터 연구소로 데려가 견습처럼 가르쳐 오셨다고요.”

“……예.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센 경의 연구소로 가 보려 했지만, 기밀 연구소로 분류되어 있으니 위치를 알 수가 없었지요.”

막시밀리안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침 길에서 아는 협회원을 만나 물어보자 오늘 밤 하필 그 연구소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아마 비상 회의가 잡히지 않았을까 짐작했습니다. 그 협회원분도 회의에 가시는 길인 듯했고요.”

거짓말이다. 움베르토는 생각했다.

어느 정신 나간 협회원이 비상 회의가 잡힌 이유를 길거리에서 그렇게 흘리고 다닌단 말인가. 아마 막시밀리안은 그런 협회원을 만난 적도 없으리라. 다나를 찾아갔다는 것 정도가 진실이겠지.

이 특출난 성기사가 그녀를 어떤 식으로 위협했을지, 어디까지 정보를 받아 냈을지 움베르토로서는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대신에 경의 자택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회의가 끝나 돌아오실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러셨군요.”

“궁금하군요. 연구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연구소장은 자신이 회의에서 내놓았던 설명을 반복했다. 막시밀리안은 주의 깊게 듣고는 끄덕거렸다.

상대의 표정은 잘 읽어 낼 수 없었지만, 움베르토는 그가 만족했으리라 추측했다. 움베르토는 피험체들이 날씨 영향을 받아 폭주했다고만 했지, 피험체 중 하나가 그 날씨라는 것의 원천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움베르토는 무심코 속으로 뇌까리며 상대에게 마저 전했다.

“그 일에 휘말려서 요른도 그만 많이 다쳤습니다.”

“그렇군요.”

막시밀리안이 마치 준비해 둔 듯이 즉답했다.

“그럼 지금 황국 병동에 있겠군요.”

“예. 치료사들이 애쓰는 중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생명은 건질 수 있겠다고 들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쪽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이 예를 표해 보이고는 길 한쪽으로 물러났다. 움베르토더러 먼저 지나가라는 뜻이다. 자택 쪽으로 마저 걸으려다가 움베르토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프란첸 경, 칠 년 전 견학을 기억하십니까?”

“그로쉔 왕국 학원의 검은 숲 견학 말씀이십니까?”

“예.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압니다.”

막시밀리안이 맞받으며 미소 지었다.

“사센 경도 초청 강사로 계셨지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프란첸 경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두 살 나이로 그렇게까지 용기 있게 나서시다니요. 그 조그만 피후원자도 등 뒤로 지키시면서 말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때 누구에게 말씀하셨던 겁니까?”

“뭘 말입니까?”

“하지 마라, 그만두라고요. 마물들은 어차피 말을 못 알아들을 텐데요.”

“저도 아직 어린애였잖습니까.”

막시밀리안이 웃으며 답했다.

“그저 무서워서 비명처럼 나왔던 말일 뿐입니다.”

“흑마법사들의 예언을 알고 계시죠? 마왕 강림 말입니다.”

“알기는 압니다.”

“그 예언을 믿으십니까? 아시다시피 해석의 문제지, 고문서 자체가 위조된 건 아니니까요.”

“글쎄요. 어차피 현실이 될 일은 없을 예언입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제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용사란 마왕을 베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 해석에 따르자면, 애초에 강림하지 못하게 하는 자겠지요.”

“그래도 강림하고야 만다면요?”

막시밀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움베르토는 그만 웃어 버렸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그는 마왕을 벨 생각이 없는 용사 후보자의 곁을 지나 자택 쪽으로 발을 옮겼다. 

저 청년은 얼마나 끔찍하게 노력해 왔을까. 어떤 식으로 족쇄를 채웠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적인 방법만 동원했을 리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움베르토는 그로쉔 학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요른의 모습을 기억했다. 학대당하고 짓눌린, 몸도 마음도 엉망으로 조종당한 모습. 그쪽이 다루기 편하니까 움베르토도 당시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움베르토 폰 사센, 멸망한 르핀 왕국 출신이자 귀족의 성조차 모욕적인 방식으로만 물려받은 사생아에, 시내 사택을 월세로 전전하며 살아온 데다가 몸까지 망가진 그는, 그러나 이 아름다운 순혈 대귀족에게 한 번쯤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왕이라는 게 꼭 그렇게 끔찍한 존재이기만 할까?

‘과연 결코 강림해서는 안 되는 자일까?’

새로운 바람이 분다. 그의 머릿속에 스산한 문장이 지나갔다.

이백 년의 질서에 갇힌 대륙에 싱싱한 피의 돌풍이 분다. 타블로가 무너진다. 생물이 섞여 끊임없이 이종이 생성되고, 국경이 무너지며, 신분과 혈통, 죄와 도덕, 광기와 이성의 경계도 융해되어 세상은 마치 해일과 같은 혼돈에 휩쓸린다. 

그런데 그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걸까?

아니면 저 흑마법사들의 말대로 전혀 다른 무언가의 시작일까.

그러나 움베르토는 입을 다문 채 막시밀리안의 곁을 그저 지나쳐 걸었다. 너무 가벼운 질문이다. 막시밀리안은 여덟 살 때 그 작은 맹아를 제 손으로 주워 왔고 이후 몇 년을 한 성에서 함께 살다시피 했다. 마왕이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막시밀리안만큼 잘 아는 자가 있을까.

저 공작가 독자는 그 어린 시절 어떤 혼돈을 보았고 무슨 기괴한 일들을 겪었을까. 그 애가 이대로 자라 버린다면, 자유롭게 꽃피어 버린다면 세계는 멸망을 맞이하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을, 그런 확신만을 주입하는 일들을.

그래서 그는 우연히 손아귀에 들어온 그 작은 영혼을 비틀어 버렸다.

타고난 힘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어차피 평범한 아이로는 보일 수 없을 바 차라리 그럴듯한 소문을 퍼뜨려 진실을 가렸으며, 철저하게 고립시켜 바깥의 명민한 눈들을 피했다. 그 애를 이용하고 싶어 할 자들로부터든 더 늦기 전에 처리하고자 할 자들로부터든. 특히 그 유디트가 같은 성에서 지내면서도 뭔가를 알아채고 행동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관심을 거두게끔 유도했는지 모르겠다.

고작 네 살이 더 많은 소년은 그렇게 상대를 오직 제 꼭두각시로만 전락시켜 갔다.

하지만 차마 목숨을 거두지는 못했다.

‘피곤하게 사는군.’

자택에 들어가 단 한 명 있는 하인에게 재킷을 맡기며 움베르토는 생각했다.

그는 요른에 대해 아직 누구 다른 사람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마왕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움베르토는 한참은 더 고심해 볼 생각이었다. 그라면 아직 여러 도서관 고문서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기도 하니까, 판단은 그다음에 해도 좋으리라. 다만…….

‘내가 스스로 판단을 내릴 때까지 저 프란첸가의 독자께서 기다려 주실지 모르겠어.’

특히나 병동에 다녀온 다음 막시밀리안은 어떤 심경이 될지 모른다. 다나에게도 급보를 보내 두려고 움베르토는 하인을 불렀다. 그러나 움베르토가 쪽지를 넘겨주기도 전에 귓가가 찌르르 울렸다. 흐릿하긴 하지만 전송 마법이었다.

움베르토의 사택 앞 길목, 막시밀리안은 근처 가로수 한 그루에 묶어 두었던 말을 풀고 등자를 딛지 않고도 한달음에 올라탔다.

그러나 병동 쪽으로 고삐를 당기며 그는 곧 현기증에 겨운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 * *

움베르토의 연구소에서 사고가 있었던 다음날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수도에 흑마법사가 숨어들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황국은 수도 시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기사단은 마물 상자 밀수꾼을 색출한다면서 아직도 시내를 수색 중이지만, 그들은 사실 흑마법사를 찾고 있는 거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카페나 장터에 모여서 배신감을 토로하다가 종내에는 광장에 모여 황국의 공식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성황은 주말에 뒤늦게나마 황성 발코니에 올라 전송 마법으로 공문을 발표했다.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밀수꾼인 줄 알았던 자가 수색 과정에서 흑마법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혼란을 야기할까 봐 일반에는 발표가 조금 늦어진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자는 아직도 이곳 수도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황은 호소했다.

“어차피 이제 모든 사실이 알려진바, 부디 수색에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여론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기사단을 향한 수도 시민의 불신은 전에 없이 깊어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흑마법사가 이미 너무 많은 사건을 벌여 놓았던 탓이다.

흑마법사는 침입한 당일 밤 순찰병 한 명의 머리를 망쳐 놓았다. 그리고 이틀 후 한밤중에는 다나라는 마도 학원 강사의 한쪽 눈을 도려냈고, 그다음 날에는 마도 협회원인 움베르토 폰 사센의 양다리를 잘라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유유히 다시 어디론가로 숨어 버린 것이다.

“그자가 이렇게 온갖 사건을 다 일으키는 동안 수도 기사단은 대체 뭘 한 건가?”

행상 한 명이 제 곁에 좌판을 펴놓고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마물은 그렇게 그득그득 퇴치해서 가져오는 자들이, 흑마법사 하나는 그 난리를 치고 돌아다니는 동안 못 잡아들여?”

“시가전은 다를 수도 있지.”

동료가 달래듯이 응수했다.

“퇴치랑 색출이 같나. 시내에서 쥐 잡듯이 사람 하나 찾아내는 건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좀 더 지켜보자고.”

수도 시민들이 나름대로 토의하는 동안 수도 성기사단 간부들과 마도 협회원들은 매일같이 비상 회의를 열었다. 대체 이 일이 어떻게 새어 나간 건가?

그러나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다. 당연히 흑마법사 본인이 퍼뜨렸으리라.

“전송 마법에 워낙 능한 자 아닙니까.”

협회원 하나가 한숨처럼 말했다.

“성황국 수도 치안의 약점을 공표할 기회를 놓칠 리가요. 될 때마다 환청으로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거겠죠. 그 흑마법사, 그날 밤 차라리 수도 밖으로 도망가 버렸길 바랐는데. 아직도 시내에 있다니.”

“다나와 움베르토까지 공격을 받았습니다. 왜 그 둘인 걸까요?”

“둘 다 인체 강화 연구와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베스퍼가 받아 답했다.

“그 실험이 흑마법사들에게 실제로 위협이 된다든지요.”

“그런 것치고는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협회원이 고개를 저었다.

“특히 움베르토는 대체하기 힘든 인재잖습니까. 연구를 중지시킬 목적이라면 그를 죽여 버렸으면 더 편했을 텐데요. 손이나 눈도 아니고 다리를 자르다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더 토의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몇몇만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흑마법사는 첫날 밤 이미 수도 바깥으로 도망쳐 버렸던 게 맞지 않을까. 다나와 움베르토에게 저질러진 일이 정말로 그자의 소행일까.

흑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던 고위 귀족 중 하나가 정보를 일부러 공공에 흘렸을 수도 있다. 자신의 소행을 흑마법사의 짓으로 미루기 위해. 하지만 협회원들은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않았다. 그 정도 가설을 아무 증거도 없이 내놓을 수는 없었다.

베스퍼는 회의가 끝난 후 말에 올라 황국 병동으로 향했다. 움베르토는 아직 병상에 누워 쉬고 있을 터였다. 그는 도중에 몇 번이나 가죽 장갑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치료 마법으로 수복할 수 있는 건 다리가 아직 달려 있는 채로 상처를 입었을 때다. 완전히 절단되었을 때는 답이 없다. 싱싱할 때 가져오면 다시 붙이려 시도나마 해 볼 수 있지만, 범인은 잘려 나간 다리를 태워 버리고 떠나는 치밀함을 보였다.

움베르토는 4인실 한쪽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베스퍼를 맞아 주었다. 안색은 이제 꽤 회복된 듯했다.

“요즘 흑마법사 때문에 바쁘지 않나? 여기까지 행차할 시간이 돼?”

“다리는 어쩔 거야?”

베스퍼는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으며 바로 물었다. 낡은 목제 의자가 무너질 듯이 삐거덕거렸다. 움베르토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좋은 의족을 달아 준대. 의족에 목발을 더하면 어느 정도 스스로 운신할 만하다는군.”

“이상하지 않나.”

베스퍼가 말했다.

“왜 팔이나 눈이 아니고 다리지. 너더러 오히려 꼼짝 말고 앉아서 연구나 계속하라는 거 같지 않나.”

“하라는 게 맞을 거야.”

“그러면 대체 왜…….”

“그냥 화가 난 거야.”

움베르토가 잘라 답했다.

“미래를 위한 게 아냐. 과거야. 복수를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겠지. 그게 다야.”

“너도…… 흑마법사의 소행이라고는 생각지 않나 보군.”

“난 더러운 짓을 아주 많이 했어, 베스퍼.”

그는 옛 연인에게 또렷하게 전했다.

“내 피험체들은 대부분 가족이 없는 자였지만, 친구나 애인이 없었는지까지는 내가 알 수가 없지. 그들이 이때다, 흑마법사 핑계를 댈 수 있으니 잘됐다 하고 날 공격했는지 뭔지 알 게 뭐야.”

“그래 봤자 다들 평민일 텐데, 널 공격할 만큼 실력이 좋은 자가 있다고? 너 뭘 숨기고 있는 거냐.”

“아무래도 좋아.”

움베르토가 잘라 냈다.

“칠 년 전 그날 후로는 언제든 이 정도 벌은 받아야 할 인생만 살았어. 오히려 후련하군.”

“미쳤냐.”

베스퍼가 으르렁거리자 움베르토는 픽 웃었다. 그는 다리를 잃은 날 밤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가로등 불빛이 적은 골목,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로 눈 밑까지 가린 자는 어둠 속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나 순식간에 그의 다리를 무릎 밑으로 잘라 놓고, 잘려 굴러다니는 다리에 마법으로 주홍색 불꽃을 점화시켰다. 움베르토가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자 그는 속삭였다. 음성의 결이 드러나지 않게 숨소리만으로 속삭이는 것인데도 수정처럼 또렷하게. 

[앞으로 행실을 조심해라.]

베스퍼의 자리는 내가 대신할 수 있으니까.

그래. 움베르토도 듣자마자 생각했다. 요즘은 얼마든지 열아홉 살 청년이 기사단 총사령관의 자리를 꿰찰 수도 있는 시대지. 적당히 암살한 다음 견장만 바꿔 달면 돼. 검을 든 자가 떠난 후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출혈을 막는 마법을 쓰며 움베르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 지독한 인간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나는 어차피 다시는 그 꼬마를 피험체로 쓰지 않을 생각이었단 말이다. 너무 위험해. 걔가 퇴원만 하면 당장 은퇴시킬 생각이었다고. 그 애의 정체인지 뭔지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생각도 최소한 아직은 전혀 없고.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그저 화가 났으리라. 움베르토는 이해했다.

병동에서 그 새하얀 소년의 꼴을 보고 그는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이 그저 속으로만 무시무시하게 화가 났으리라. 그 애를 그런 상황까지 몰아붙인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사고가 났던 밤, 움베르토가 급보를 보내기도 전에 다나가 제 쪽에서 먼저 자택 근처까지 찾아와서 전송 마법으로 말을 걸어 왔다. 자신이 막시밀리안에게 거의 다 불어 버렸다는 것이다. 연구소의 실체는 물론이고, 그로쉔 학원에서 그녀와 움베르토가 어떻게 요른을 꾀어서 실험 참가에 동의하게 만들었던지도. 그가 이미 대부분 다 짐작한 채 차근차근 책문했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움베르토는 이미 각오했다. 그리고 다나가 한쪽 눈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자신은 다리를 잃으려나, 팔을 잃으려나 생각했을 뿐이다.

“너 혹시 옛날에 너랑 나랑 잤다고 사람들한테 불고 다녔냐?”

“아니.”

친구가 뒤척이며 묻자 베스퍼는 찡그리면서도 금방 답해 주었다. 움베르토는 미간을 약간 좁혔다. 그럼 어떻게…… 그러다가 문득 상기해 냈다.

막시밀리안은 칠 년 전 견학 때 움베르토가 초청 강사로 자리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베스퍼가 움베르토를 대하던 태도도 보았으리라. 특히 움베르토가 다쳤을 때, 그래서 베스퍼가 모든 단단한 껍질을 다 놓쳐 버리고 무너졌을 때.

기억력도 더럽게 좋은 인간 같으니. 움베르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새삼 자기 양팔을 들어 올려 보았다. 다리만 잘라 갔다.

움베르토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대신 굳이 베스퍼의 목숨을 걸고넘어졌다.

“연구는…… 계속할 거냐?”

“당연히.”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날씨 예보가 가능해질 때쯤이면 나도 운신에 익숙해질 테니, 그때쯤 연구소로 돌아가면 되겠지.”

답하면서 움베르토는 생각했다. 여러모로 보아 저 프란첸가의 독자는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내가 살아서 연구는 계속하길 원하는 거다. 어쩌면 베스퍼를 제치고 제가 먼저 강화 시술을 받으려 들지도 모르겠다. 무릎 밑부터 양다리가 잘려 나간 사센 가의 사생아는 왠지 기분 좋게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누웠다.

베스퍼는 그런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움베르토는 앞으로 사오 년쯤 후면 강화 시술이 실제로 가능해지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때 베스퍼는 묻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너를 안을 수 있나?

마물을 섞어 강화한 몸이 된다면, 이제는 너와 섞여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러나 베스퍼는 그때도 묻지 않았고 지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움베르토 때문에 마물과 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마물에 집착하느라고 움베르토와 같은 어정쩡한 반편이와도 잔다고 쳐야 할 셈이다.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해서 했던 일이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베스퍼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자로부터 눈을 돌렸다.

린다는 성황국 수도의 제 별장 안에 앉아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보내온 급보를 손에 펼쳐 들고 있었다. 투트 크라흐트 가문에 내통 혐의가 제기되었다. 성황국에 익명으로 제출된 고발문에 따르면, 크라흐트의 일원이 페랑의 사업가 협회와 협력해서 흑마법사의 성황국 수도 침입을 도왔다는 것이다.

물증은 없는 고발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하도 상세해서 성황 폐하의 관심을 모았다. 이미 성기사단 한 소대가 그로쉔의 크라흐트 본성을 찾아와 문서를 수색하고 갔으며, 페랑 왕국 정부도 곧 사업가 협회를 대대적으로 조사할 예정이라 한다. 린다의 별장으로도 황국 병사들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아버지는 전했다.

그러나 린다는 그 편지 때문에만 떨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익명의 고발장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 만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폰 사센이 병동으로 실려 간 바로 다음 날 막시밀리안은 성의 살롱에서 독서회를 열었는데, 그와 몇 분쯤 지극히 암시적인 대화를 나누며 린다는 천천히 깨달았다. 그가 모든 걸 알아챘고, 이제 그녀의 적이 되었다는 걸.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은 린다 투트 크라흐트의 적이 되었다.

그는 린다를 다나나 움베르토처럼 대놓고 불구로 만들어 버리진 않을 것이다. 투트 크라흐트 가문은 너무 크고, 린다도 이런 시기에 없애 버리기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태도가 평생 다시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애가 이번에 죽어 버렸으면 됐는데. 린다는 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웅크린 채 안타깝게 속삭였다. 그랬더라면 홀림 마법도 풀려 막시는 더 이상 그 애한테 천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하얀 괴물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회복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고, 온몸에 처참한 흉터가 남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린다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막시밀리안 자신이 독서회에서 은근슬쩍 비쳤던 얘기이기도 하다.

‘아.’

그녀는 뒤늦게 곱씹었다. 그는 그때 용서의 실마리를 준 건지도 모른다. 혹시 린다가 그에게 한 가지 특권을 준다면.

린다가 고심하는 동안, 한참 동쪽으로 떨어진 프란첸가의 별성 정문에서 유디트 공작 부부는 아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올리버는 이미 마차 안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고, 유디트는 아직 문 앞에 선 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소동을 몰고 다니기라도 하는 건지, 일주일 남짓 있었는데 별일을 다 겪고 가는구나.”

“고생하셨어요.”

막시밀리안도 웃으며 답했다.

공작 부인은 잠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고 때문에 요른의 몸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고, 유디트가 주선했던 맞선은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 몸으로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들도 맞선은 보기는 보았으나 결국 혼인은 평생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남편인 올리버도 어쩐지 이번에만은 반쯤 포기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유디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결국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시밀리안, 진심이니? 아버지랑 했다던 얘기 들었다. 결혼은…… 정말로 그런 이유로 안 할 거라고?”

“예.”

“용사가 되려고?”

“예.”

“내가 어릴 때 해 줬던 얘기 기억하니?”

유디트가 조용히 운을 떼었고, 목소리를 더욱 죽여 예언 얘기를 꺼냈다. 그녀가 발표한 후 협회원들 사이에서는 이제 정설이 되었지만 일반인들은 아직 전혀 모른다. 막시밀리안도 음성을 낮춰 답했다.

“예. 압니다. 흑마법사들의 예언은 사실 위조된 게 아니죠.”

“그래.”

유디트가 이어 갔다.

“성검을 든 용사 전설, 그리고 마왕 강림 전설은 사실은 똑같은 고대 예언서의 두 가지 해석이야. 성황국은 첫 번째 해석을, 흑마법사들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거고. 내가 이게 무슨 의미랬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셨지요. 첫째로, 미래가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거죠.”

막시밀리안이 바로 답했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비로소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정해지는 거예요. 둘째로, 미래가 한쪽으로만 정해진다면 두 미래는 겹칠 수가 없어요. 용사가 먼저 흑마법사와 마물을 모두 퇴치해 세상을 정화하면 마왕은 강림하지 못합니다.”

“그래. 네가 어릴 때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하지만 이것도 한 가지 의견일 뿐이야. 내가 말한다고 넌 진짜로 다 믿어 버렸던 거니? 아직도 믿고 있고?”

“그럼요.”

어머니는 아들이 문득 소년같이 웃는 걸 보았다.

“흑마법사들이 전도를 시작하기도 훨씬 전에 벌써 두 가지 해석을 다 끌어내셨던 분이시잖아요. 믿고 있어요, 어머니. 저는 꼭 그런 용사가 될 겁니다.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할 여력이 없어요.”

“……그래.”

유디트가 석연찮게 답했다.

그녀는 그 두 미래가 겹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아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막시밀리안이 아직 어렸던 시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최근에야 점점 거의 확신처럼 짙어져 가는 의혹 하나를.

하지만 그녀는 연구자로서 자신의 의혹이 어긋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고, 확실하지 않은 얘기로 상대를 흔들어 놓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아들의 어깨를 한 번 더 안아 준 다음 공작 부인은 마차에 올랐다. 하루빨리 인공 성검을 만들어 낼 수 있기만을 바라며.

막시밀리안은 어머니를 배웅한 후 곧 하인에게 부탁해서 자신에게도 말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하인이 고개를 숙이면서도 되물었다.

“마차가 아니고요?”

사흘 뒤가 출정인데 피곤하지 않으시겠냐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혼자서 다녀올 데가 있다고 답했다. 하인이 예를 표해 보이고 물러난 후, 말을 기다리며 그 젊은 용사 후보는 조용히 하나의 미래를 그렸다. 모든 어두운 백성이 정화되고, 옥좌가 세워지기도 전에 저절로 무너져 버린 세상에서.

더는 강림할 수 없는, 마침내 제 어두운 운명에서 풀려난 존재와 함께 그는.

비로소.

부디 네가 자유로워지길. 되뇌는 순간 한편 가망 없는 소망이 떠올라 독처럼 피에 퍼졌다. 용서해 줘. 그러나 단련된 몸은 경미한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았고, 막시밀리안은 흑마가 발 앞에 멈춰 서자 가볍게 그 등에 올랐다.

요른은 그가 사흘 후 출정을 떠날 때까지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들른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매일 한 번씩은 들러볼 예정이었다. 마지막 날에도 깨어나지 않는다면,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한 번만, 단 한 번만 몰래 뺨을 쓸어 보고서.

맨손으로 닿는다면 다시는 그 곁에서 떠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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