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0)

3.

밤이 찾아왔고, 다시 새벽이 밝았다. 마도 학원 여학생 기숙사 3층의 상급생실에도 천천히 햇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린다 투트 크라흐트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밤중에 악몽을 꾸었던 듯 등에 땀이 끈적거렸다.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린다는 자신이 대충 어떤 꿈을 꾸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년 전 우연히 아버지의 실험 기록을 접했던 날의 밤과 비슷한 꿈이었으리라.

그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날 과연 정말로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서 성황국 흑마법 대책부의 실험 기록을 찾아냈던 건지도 의심이 갔다. 린다는 어쨌거나 집안의 후계자로 결정된 딸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는 그녀가 앞으로 밟아 가야 할 길을 차마 드러내 놓고 보여 주지는 못해도, 암묵적으로나마 단서를 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다. 성기사 파트너 마법사인 어머니도 린다에게는 솔직해지려 애썼다. 린다가 집안의 후계자로 결정된 4년 전부터 어머니는 살롱에 다른 마법사들을 초대할 때면 늘 린다도 함께 불러 놓았다.

마법사들은 처음에는 어린 린다 앞에서는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몇 번이나 린다가 크라흐트 가문의 정식 후계자이며,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가 향이 좋고 깨끗하지만 독하기 그지없는 술까지 내놓자 초대받은 자들은 곧 혼이 흐물흐물하게 풀린 채 실컷 떠들어 댔다.

“마물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어요. 출몰 범위도 넓어지고 있지.”

그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마법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이야 성기사와 우리 파트너 마법사들이 분투하고 있죠. 수적으로도 우세하고.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오 년 후, 십 년 후가 보이지가 않아요. 마물이 검은 숲 근처만이 아니라 온 대륙에 다 출몰하게 되는 건 그냥 시간문제야.”

“맞아요.”

다른 마법사도 끼어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글쎄, 성황 폐하가 워낙 강성하시니 설마 싶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성황국 멸망조차도 아예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에요. 제 말씀은 그러니까.”

그는 한 번 한숨을 깊이 토해 낸 다음 잔을 들며 말했다.

“성황국 체제가 무너진다, 아니면 왕국 하나하나가 망한다. 뭐 그런 게 다가 아니에요. 생물학적으로도 아예…… 이 대륙에 인간은 물론 정상적인 동식물은 씨앗 하나도 남지 않고 마물과 검은 숲으로만 가득 찰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빨리 무슨 대책을 찾지 못하는 한.”

“그런 만큼 귀족 중에서도 마법사 가문들의 역할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지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또렷하게 끊어 들었다.

린다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머니는 분명 린다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마법사들도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웃으며 끄덕거렸다.

“그렇지요. 그로쉔 왕국에서는 특히 크라흐트 가문의 역할이 중요하고, 다음 세대 가주가 되실 린다 투트 크라흐트 양의 책임이 더할 수 없이 막중합니다.”

상급생 기숙사실의 침대 위에 앉은 채 린다는 살롱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새삼 머리를 내저었다. 그녀는 열세 살 때부터 집 안의 살롱에서 끊임없이 그런 이야기들만을 들어 왔다. 절망적인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을.

그런 이야기를 들어 왔기에 그녀는 아버지의 실험 기록도 이해했다. 성황국 직속 마법사들, 개중에서도 흑마법 대책 부서야말로 말 못 할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 그런 실험에까지 손을 댔대도 이상하지 않다.

다른 학생들 대부분은 모를 것이다. 그들은 승리의 소식만 전해 듣곤 하니까. 남부에서 검은 숲이 점점 더 크게 자라나고, 그 주변에서 마물이 끊임없이 나타나기는 나타나더라도 언제나 자랑스러운 성기사들과 파트너 마법사들이 결국 모두를 퇴치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 말이다.

학생들은 자신도 그들만큼 훌륭한 마법사나 기사가 되어 공을 세울 꿈에 부풀거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울적해한다. 그러나 린다만큼 목에 칼이 바짝 다가온 것 같은 위기감은 느끼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녀만큼의 책임감도.

‘나는 재능이 없어.’

린다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은 채 생각했다.

‘언니가 나보다도 더 재능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선택된 것뿐이야. 부모님도 내 꼴을 아니까 자꾸 위기감을 부채질하시는 거지. 아버지가 그런 문서를 굳이 내 눈에 띌 만한 곳에 놓아 두셨던 것도 그렇고.’

린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천재는커녕 수재조차도 아니다. 공부라는 걸 하는 법을 대충은 알고 있는 성실한 학생일 뿐이다. 그 공부마저도 한계에 부딪혀서, 열일곱 살인데도 아직도 성황국 마도 학원으로 옮겨 가지 못하고 이곳 그로쉔 왕국 마도 학원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린다는 원래도 투트 크라흐트의 후계자로는 모자랐다. 더구나 이런 시기에 그녀가 앞으로 가문에든 왕국에든 무언가 기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결코 그런 마법사가 될 수는 없다.

기여를 하려면 그녀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의 힘을 빌려야 한다. 본인이 전투에 뛰어나지는 못하다 해도 아주 훌륭한 말을 찾아내서 그 말을 조련하는 법을 익힌다면 기병으로서의 가치를 일부 인정받을 수 있듯이, 그녀도 제 밑에 둘 것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것, 그러니까 요른을 성황국 흑마법 대책부에서 진행하는 인체 실험의 피험체로 적극 추천하는 편지를 써 보낸 걸 말이다.

‘괜찮아.’

일어서서 욕실 쪽으로 가면서 린다는 생각했다.

‘그 애의 재능은 위험해. 그나마 인성이라도 좋으면 스스로 힘을 통제하겠거니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린다는 요른의 허여멀건한 모습을 떠올렸다. 워낙 작은 데다가 꼬챙이같이 말라빠졌다 보니 몸에 제대로 맞는 학원복도 없어서 손이 늘 소매 속에 묻혀 있고, 바지도 몇 단이나 접어 다닌다.

학생들이 부르면 그 애는 웅크린 벌레같이 구부정하게 멈춰 서서 창백한 눈동자를 뒤룩대는데, 아무리 채근해 봤자 빨리 답을 내놓기는커녕, 말을 한마디씩 끊어 뱉는 것조차 힘든지 입술을 경련하며 옴쭉거린다. 린다는 그 꼬라지를 떠올리고는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으로서 너무 병신 같고 징그러운데, 하필이면 그런 게 그런 재능을 타고나서는.’

재능이라. 린다는 새삼 곱씹었다.

2년 전 실기 시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신입생에 불과했던 그 새하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 가득 불과 물을 뒤섞은 그림을 그려 냈다.

입을 꼭 다물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그 애는 허공을 두 가지 상이한 마법으로 가득 채웠고, 다른 애들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지르자 그제야 깜짝 놀란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게 놀랄 일이나 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사기로 된 세숫대야 앞에서 린다는 이를 악물었다. 온갖 복잡한 감정이 가슴 밑에서부터 치받아 올라와서 그녀는 차마 대야 앞의 거울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 애를 보거나 생각할 때의 자기 자신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거울은 피했어도 다른 사람의 말이 뇌리를 스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공손한 동작 속에 투기를 숨기고 있던 갈색 머리 소년.

―질투인가?

그 소년의 짙은 올리브색 눈동자가 린다의 안을 말갛게 들여다보며 웃었다.

린다는 고개를 저어서 털어 버렸다. 질투 같은 게 아냐.

요른은 물론 마법 재능은 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벌레에 천치니까, 과분한 힘을 휘두르게 방치하느니 다른 유능한 사람들에게 피험체로 넘겨주는 게 낫다. 그게 그 애의 소위 타고난 재능을 훨씬 더 올바르게 활용하는 길이다. 게다가……. 린다는 옆의 옷 방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만에 하나 요른이 정말로 훌륭한 마법사로 자라 버린다면, 프란첸가는 모든 걸 갖게 되는 셈 아냐.’

폰 프란첸 가문은 다음 세대에 탁월한 기사에 더해 탁월한 마법사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린다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린 그 소년을 경애했고 그런 인물의 존재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곁에 있으면 심장이 으스러지도록 아팠다. 프란첸 공작 부부는 그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그런 적자를 두어서 얼마나 기쁠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가문에서 이제 마법사마저 길러 내겠단 말인가.

린다의 부모도 올리버 폰 프란첸이 유디트를 제 반려로 선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대대로 기사 가문이었던 프란첸가가 새 시대를 맞아 마법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유디트가 장남 하나밖에 못 낳고 유산을 반복했을 때 투트 크라흐트가에서는 솔직히 안심했다. 그런데 그 유디트는 제가 마법사 후계를 못 낳자 길거리에서 괴상한 걸 주워 와서 마도 학원에 입학까지 시키고 말았다.

‘요른이 어차피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리는 없어.’

린다는 교복 재킷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혼자 끄덕거렸다.

‘재능만 타고났다고 다가 아니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애는 프란첸 가문의 마법사가 되어서는 안 돼. 차라리 크라흐트 가문의 좋은 피험체가 되어 주어야지.’

어린애를 데리고 인체 실험을 한다면 끔찍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린다는 막시밀리안이 며칠 전 대련 때 마검으로 마물의 허리를 동강 내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때는 모두가 박수를 쳐 주었다.

그 마검이라는 것도 역시나 흑마법 대책부의 비밀 실험실에서 탄생한 물건이다.

다행히 실험이 잘 진척되어서 6년 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제작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공개했더라면 누가 찬성했겠는가. 마물을 재료로 써서 마물에 대적할 검을 만들자는 생각에 말이다. 의식이 남아 꿈틀대는 마물의 몸으로 검을 만들어 기사더러 휘두르라고 한다니.

흑마법 대책부란 대범한 발상을 하고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는 부서다. 아버지는 그 부서의 장으로서 지난 십여 년간 내내 그렇게 살아왔을 테고, 린다도 앞으로 그 뒤를 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열한 살짜리 학우 한 명을 피험체로 추천하는 것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험이 성공하면 흑마법 대책부는 마검 때나 마찬가지로 결국 모두의 찬탄을 받을 테고, 크라흐트 가문의 명성도 올라갈 것이며, 부모도 린다의 가치를 인정하고 걱정 없이 뒤를 맡기리라.

린다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기숙사 건물을 나섰다. 오전에는 기마 수업이 있었다. 마도 학원생들도 나중에 전장에 따라다니려면 어느 정도 체력은 갖춰야 하고 말도 탈 줄 알아야 하기에, 체술과 기마는 필수로 배운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 때문에 린다는 식당에 들러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길목에 서서 씩 웃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린다는 거의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다행히 일부러 잔뜩 인상을 써 둔 뒤였다.

“뭐야?”

“린다 투트 크라흐트 님.”

필립이 한쪽 손을 가슴에 얹은 채 허리를 숙여 보였다. 린다는 그 동작이 공손하면서도 기품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짜증이 났다.

“됐고. 뭐야.”

“어제는 제가 실례했습니다. 사과드리고자 기다렸습니다.”

린다는 조금 놀랐지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필립이 허리를 도로 펴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제법 매력적인 미소였다. 린다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더 짜증이 났다. 페랑의 상인 놈들은 눈치도 빠르고 여자에게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설마 이 어린놈이 타국까지 와서 자기 신분을 잊은 건 아니겠지만.

린다가 잔뜩 찡그린 채 마치 받아치듯이 그의 올리브색 눈을 마주 보고 있는 사이 필립이 다시 운을 떼었다.

“투트 크라흐트가의 차기 후계자께서 타국 백성의 안위마저 신경 써서 해 주신 말씀인데 귀담아들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

“그런데, 말씀해 주셨던 바를 곰곰이 되새겨 보니, 이 아둔한 백성, 오히려 궁금한 것이 더 늘고 말았습니다. 일깨움을 주실 수 있으실지요? 이런 열린 장소에서 저와 사적으로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시는 게 저어되신다면, 사과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여 공식적으로 초대장을 발송하겠습니다.”

“됐어. 됐으니까 그냥 여기서 얘기해.”

린다가 질린 듯이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어제도 그랬지만 네 존댓말은 차라리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그냥 반말 써. 막시밀리안이 말했듯이 학원 내에서는 다 같은 학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지, 뭐.”

필립이 바로 빙긋 웃으면서 답했다.

“고마워, 린다. 나 요른에 대해서 궁금한 게 더 생겨서. 그 애가 마물의 아이라고 했잖아?”

“그래.”

“그런데 네가 근거로 들었던 얘기들, 꽤 내용이 구체적이잖아. 수도 외곽에서 마물이 든 상자를 운반하다가 포자가 새어 나왔네 하는 건 그 운반을 책임졌던 기사들 본인이나, 아니면 그쪽 소식을 다 보고받는 지위 높은 기사 가문쯤 되지 않으면 모를 텐데. 요른의 친모와 관련된 배경도 말이야, 애를 데려온 프란첸가 당사자들이 아니면 모를 얘기 아니야?”

“그래서 또 우리가 지어낸 거 아니냐는 뜻이야?”

“아, 아니야.”

린다가 날카롭게 쏘아 내자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지어낸 거냐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야. 뜬소문 같은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확실한 출처가 있을 거 같아서. 혹시 프란첸가의 고용인이나 가정 교사한테서 들은 거야?”

린다는 이번에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귀족가에서는 전속 가정 교사 두엇은 들이는 게 보통이다. 자녀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물론이고,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방학 때는 가정 교사를 분야별로 따로 불러서 집에서도 공부를 시킨다.

그러나 돈만 있다고 훌륭한 가정 교사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가문끼리 서로 소개해서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친분이 있는 가문들에는 똑같은 가정 교사가 들락거리는 일도 흔했다.

필립이 알기로는 그로쉔의 투트 크라흐트가, 폰 메어하우스가와 폰 프란첸가는 몇 대에 걸쳐 친교가 깊은 집안이었다. 그러니 막시밀리안을 가르쳤던 가정 교사가 린다나 카를네 집에도 들락거렸대도 이상하지 않다. 이 셋이 서로의 성에도 자주 초대받아 들렀다면, 각 성의 고용인들과도 어느 정도는 얼굴을 익히고 대화도 하면서 지냈을 만하다.

생각하며 필립은 린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린다는 찡그리긴 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고, 결국 운을 떼었다.

“그래. 프란첸가 성의 고용인들이나 가정 교사한테 들은 얘기야.”

“그렇구나.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얘기까지 물어보게 된 거야?”

“뭐가?”

“상상이 잘 안 되어서. 예를 들어, 음, 네가 가정 교사한테 성황국 역사를 배우는 중이야. 그런데 가정 교사가 갑자기 외치는 거야. 요른의 엄마는 미혼모였대요! 하고. 어떻게 갑자기 그런 대화 상황이 되지……?”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야.”

린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막시밀리안을 알지. 너도 이제 어느 정도는 알 거 아니냐. 저번 대련 때도 봤잖아? 걔는 뼈가 다 드러나는 상처를 입어도 티 하나 안 내는 애야. 그런데 어릴 때…… 열두 살 때쯤인가. 우리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요른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어.”

“저런.”

“우리 셋은 서로 아주 오래 알아 왔어. 여섯 살 때 처음 만났으니까. 그런데 막시밀리안이, 늘 강철 같은 웃음만 보여 주던 애가, 그때 처음으로 그런 얼굴을 하고 고민을 털어놓았어. 당연히 우리도 놀랐지. 그런데 한 번만 그런 게 아니라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괴로워했어.”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정확히 어떤 점이 힘든 건지 내막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린다와 카를이 아무리 캐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자기가 칭얼거리는 걸 받아 줘서 고맙다고, 이런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너희밖에 없다고 감사를 표해 왔을 뿐이다.

그래서 둘은 조심스레 프란첸 성의 고용인들에게 물어보았고, 수업 시간에 가정 교사에게도 살살 캐물었다. 자기들이 이런 걸 물어봤다는 건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리고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 냈다.

“요른에 대한 건 어제 얘기한 게 다가 아니야. 프란첸네의 사적인 얘기는 빼고 말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지만, 그 마물 상자와 미혼모 배경이 다가 아니란 말이야.”

린다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살짝 낮춰서 이어 갔다.

“고용인들 얘기 들어 보니까 요른이 어떻게 막시를 힘들게 했는지 알겠더라고. 집에서 매번 물건을 깨고 자기가 안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대. 그런데 그 물건들도 이상한 마법으로 깨 놓는 통에, 진짜로 그 애가 깼다고 입증하기도 힘들었다는 거야. 막시밀리안은 늘 자기가 깨었다는 식으로 덮어 줘야 했다네. 그런데 막시가 어디 그럴 애야?”

“그렇구나.”

“그래. 그리고 이건 가정 교사가 말해 준 건데. 흑마법사들이 환청이나 환각으로 사람 잘 꾀는 거 알지? 그런 식으로 걔도 어릴 때부터 프란첸가 성에서 고용인이나 손님들, 심지어 공작 부부까지도 맨날 홀리고 다녔나 봐.”

“홀렸다고?”

“고용인들을 홀려서 과자나 음식도 받아먹고, 초대 손님들한테는 말도 안 되게 비싼 물건을 선물이라고 받아 가기도 하고 그랬다네. 이건 좀 예민한 얘기지만……. 프란첸 공작 부인을 심하게 홀려서 자기한테 말도 안 되는 호의를 베풀게끔 한 적도 있대. 그때 막시가 어머니를 말리고 정신 차리게 하느라 많이 고생했나 봐. 진짜 큰일이 날 뻔했다고 해.”

“그래, 그렇구나.”

필립이 끄덕거렸다.

“이제 알겠다.”

“알겠지? 요른은 진짜 위험한 애야.”

“응. 그러니까 막시밀리안은 물건을 자기가 깨 놓고는 요른이 깼다고 덮어씌웠구나? 막시가 그럴 애가 아니니까,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다 요른이 그랬을 거라고 믿어 줬고. 정황이 안 맞아도 요른이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마법을 썼다는 식으로 우겨 버리면 되니까.”

“뭐?”

“그리고 사람들이 요른을 예뻐하거나 애한테 관심을 두면, 그게 요른이 사람들을 마법으로 홀린 거라는 식으로 몰아갔구나? 물건을 깼다는 얘기랑 잘 엮으면 진짜 믿을 만하겠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애한테 잘해 주려다가도 이게 자기 진심인 건지 홀린 건지 몰라서 멈칫하겠고, 오히려 호의조차도 서서히 적의로 바뀌겠지.”

“너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 제정신이야?”

“열두 살 때쯤이었다고?”

필립이 린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막시밀리안이 너희들한테 요른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 게 열두 살 때였어? 그럼 요른은 여덟 살이었을 테니까, 학교에 입학하기 바로 전이네. 왜 하필 그때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가정 교사든 하인이든, 아무리 프란첸 집안사람이라고는 해도 그들은 고용인에 불과해.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포자가 새어 나온 상자나 요른 친모의 배경에 대해서까지 원래부터 다 알고 있었을 거 같지는 않은데. 막시밀리안이 때맞춰서 그 사람들한테도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흘려 둔 게 아닐까? 자기 입은 직접 열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으로 너희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끔. 그래야 훨씬 더 객관적인 얘기처럼 느껴지잖아.”

“너 미쳤어?”

“그런 정보가 아니었다면 너희는 요른이 이상한 마법을 쓰는 위험한 애라고는 느꼈어도 마물의 애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겠지.”

필립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그러나 뭔지 모를 불씨 같은 걸 품은 채 허공에 가라앉았다.

“그랬다면 그 애를 그렇게 생리적으로까지 혐오하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린다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멍하니 필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이 곱고 햇빛에 물들면 여린 금빛마저도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 부드러운 눈매에 온화하고 채도가 낮은 녹빛 눈동자. 그러나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고 그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차분하게 린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린다는 무심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넌 미쳤어.”

그녀는 애써 뱉어 냈다.

“역시 페랑의 상놈이군. 귀족을 싫어한다고는 해도, 사람이 선의로 전해 준 말을 꼬아 듣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 너희들이 사정 다 알게 되고 나니까 막시밀리안이 뭐래? 너희들보고 좀 도와 달래?”

필립이 물었다.

“요른은 사실 이렇게까지 위험하고 무서운 애다. 집에서는 그래도 자신이 어떻게든 혼자 애를 관리해 왔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힘드니까, 이왕 알게 된 김에 너희들더러 좀 도와 달라고 했겠지.”

“…….”

“이런 걸 털어놓을 수 있는 건 너희밖에 없다, 너희는 내게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이러면서 학교에서는 너희한테 요른의 관리를 맡긴 거야?”

필립은 눈은 웃지 않으면서도 입술에는 여전히 사교적인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너희들이 매번 그 애가 무슨 ‘잘못’을 할 때마다 그렇게 끌고 가서 벌을 주는 거야? 막시밀리안이 부탁한 대로?”

“친구를 도와주는 게 어때서.”

“그렇구나.”

필립이 끄덕거렸다.

“알았어. 설명해 줘서 고마워. 이제 다 알 거 같네.”

“야, 뭘 알 거 같다는 거야? 너 완전히 반대로 꼬아 듣고―.”

“에이. 농담이야.”

필립이 손을 내저었다.

“그냥 재미로 소설 한 번 써 본 거야. 왜냐면, 너희로서는 어차피 현실이라곤 상상도 못 할 일이잖아. 폰 프란첸가의 막시밀리안이 오히려 이상하고 끔찍한 놈이고 그 징그러운 요른이 가엾은 피해자라는 구도는 말이야. 귀족이 다 그렇긴 하지만, 특히 너희 그로쉔 귀족들의 뇌는 그런 상상은 아예 불가능한 재질로 되어 있지. 그래도 뭐, 소설로서는 나름 재미있지 않아? 아, 그로쉔 사람들은 소설도 잘 안 보던가?”

“안 봐. 페랑의 경박한 것들과 다르지.”

린다가 딱 잘라 답했다.

성황 폐하께서는 건국 때부터 팔 왕국 모두에 지령을 내어 권하셨다. 진실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는 환상을 머릿속에서 날뛰게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그러니 가능한 한 소설은 그 생산도 유포도 금지하라 했다.

그로쉔은 그 지령을 가장 엄격하게 받드는 나라고, 페랑은 유희의 전통이 깊어 소설의 내용 정도만을 규제하는 나라다. 필립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미안해. 우리 집 고문서나 미술품 거래도 많이 하잖아. 극본이나 서사시, 화집도 매일같이 접하다 보니 상상력이 아주 넘쳐 나 버려서 그만.”

필립은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 한쪽을 톡톡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백작 영애께서 너무 진실만을 그대로 열심히 설명해 주시길래 나도 보답으로 소설 하나 써 본 거야. 재밌었어? 하긴, 표정 보니까 그로쉔의 꽉 막힌 영애님께는 너무 자극적이었던 거 같기도 하네.”

“미친놈.”

린다는 쏘아붙이면서도 필립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놀리듯이 웃고 있는 데에 반해 그는 한쪽 손만은 허벅지 옆에서 주먹을 꽉 쥔 채 조금씩 떨고 있었다.

린다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애도 그래 봤자 열여섯 살짜리 남자애다. 쓸데없는 투지에 차 있고 분노를 잘 가누지 못한다.

막시밀리안은 다르지.

린다는 막시밀리안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소꿉친구의 강함, 아름다움, 재능과 겉으로 드러난 온유함에 더해 그 안의 치밀함과 냉랭함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모의전 때 수십 번도 더 반별로 소대를 짜서 겨뤄 보았고, 전 학원 합동전에서는 그의 파트너 마법사 역할을 맡아 곁에 서 보기도 했던 덕이다.

그녀는 미래에 막시밀리안의 파트너가 될 생각은 애초에 접었다. 도저히 수준 비슷한 것이라도 맞춰 줄 자신이 없었다. 평생 그를 적으로 둘 일은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의 전장에서 막시밀리안은 오히려 상대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배려하는 편이었지만, 실전에서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필립이 그를 적으로 삼는 것도 원치 않았다.

“네가 뭐라고 해석을 하든, 요른이 위험한 애라는 건 진짜야.”

린다는 다시 운을 떼었다.

“포자나 미혼모 같은 건 내가 정보를 들은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정보 자체가 틀린 것도 아니고. 내 말도 못 믿겠으면 토마스를 찾아가 보든가.”

“토마스?”

“토마스 폰 린마이어. 너 같은 놈이 처음은 아냐.”

그녀는 혀를 쯧 차며 말했다.

“요른이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걔랑 친해지고 싶다면서 접근했던 친구야. 하지만 걔는 요른의 본색을 깨닫고서 곧 알아서 물러났지. 걔한테 한번 물어봐. 걔도 요른한테는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고 할걸. 홀려서 피해만 본다고.”

“알았어.”

필립은 끄덕이며 린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고마워, 린다.”

“……가 봐.”

린다는 잔뜩 찡그린 채 손을 저어 보인 다음 몸을 돌렸다. 필립은 그녀의 등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립은 페랑에서도 꽤 인기 있는 타입이었다. 귀족과도 사교가 잦았던 만큼 그쪽 자녀들과도 미묘한 신경전을 주고받곤 했으니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필립 입장에서야 짜증만 났지만, 어쨌거나 어제 린다는 필립에게 친히 접근해서 경고의 말을 전해 주었다. 게다가 오늘은 사람들이 다 볼 수도 있는 교정 한가운데 서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했는데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은 여자들이 이런 관심을 보여 오면 늘 모른 척 피하거나 완곡하게 거절해 왔다. 신분 차이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모를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동성애란 귀족 사이에는 터부시되는 취향이다. 그들은 오직 혈연으로만 후계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민은 얼마든지 입양을 선택할 수 있으니 별일도 아니다. 길거리에 남아도는 게 고아 애들이고, 시장에 넘쳐 나는 게 자기 자식을 팔아 입을 덜고자 하는 부모들이다.

필립은 이미 부모에게도 자신의 지향에 대해 밝혔고 그들은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반면 귀족 가문 자제가 이런 취향에 눈뜬다면 골치가 아플 것이다. 차남, 삼남 정도라면 그래도 봐줄 만하겠지만 가문을 이어갈 장자가 동성애자라면 부모 입장에서는 쉬쉬하면서 혼인을 강제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면 본인이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평생 거짓말을 하며 억누르고 살아가거나.

린다의 등에 대고 필립은 가슴에 주먹을 댄 채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했다. 그로서는 이래저래 거절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고, 린다라는 인간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방금 그녀의 감정을 이용해서 정보를 캐내려 들었고 그녀도 기꺼이 응해 주었다. 남이 베풀어 준 호의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게 옳다.

필립이 떠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린다도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미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흔적을 눈으로 더듬었다.

‘왜 늘 이렇게 되지.’

그녀는 속으로 속삭였다. 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 버러지 같은 조그만 아이한테 관심을 갖는 걸까.

그녀는 필립이 요른의 입장에 이입해서 분노하는 건 이해는 했다. 이 학원에 단둘뿐인 평민이니 동정심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막시밀리안이 그 애를 그렇게까지 싸도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쓴다고 믿을 수밖에 없잖아.’

린다는 확신했다. 사실 그녀는 스스로도 요른의 그 마법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필립에게 거기까지 설명해 주기에는 부끄러웠다. 가장 내밀한 기억 중 하나를 드러내는 것 같았고, 어차피 필립이 믿어 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필립, 너야말로 멋대로 생각하는 거 아냐? 귀족은 결국 평민을 괴롭히는 역할밖에 안 한다고. 하지만 말이야.’

오히려 필립이야말로 상상도 못 하는 거 아닐까. 귀족이, 개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드높은 귀족 자제도 밑바닥 평민에 괴물같이 흉측한 꼬마애 하나한테 진심으로 사랑을 퍼부을 수 있다는 걸. 그런 구도야말로 저 페랑 사업가 자제의 머릿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거 아닐까.

필립이 지금 막시밀리안이라는 귀족이 요른에게 무슨 적의를 갖고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그냥 오해다. 홀려서 그런 거든 뭐든 막시밀리안은 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막시밀리안이 그 애를 정말로 아끼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았더라면 린다나 카를은 요른의 교육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애들을 다 동원해서까지 그 애를 굳이 매일같이 감시하고 공개적으로 벌을 주지는 않았으리라.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고작 사 개월 전에 입학한 필립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린다는 요른이 정말 싫었다. 그러니 막시밀리안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괴물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차라리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해 버렸으리라. 그냥 싫기만 한 거라면 이렇게 학생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그 애를 교화하고 교정해 주려고 애를 쓰지는 않는다.

막시밀리안은 그 괴물 꼬마를 어떻게든 사람으로 키워내고 싶어 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 애를 돌보느라 지지리도 고생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손을 놓아 버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린다도, 카를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다 거기에 함께 힘을 보태 주는 것뿐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린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필립은 모른다. 막시밀리안이 그때 어떤 얼굴을 했는지 말이다. 반년 전, 요른이 독초를 주워 먹고 생사를 헤맬 정도로 아팠을 때.

린다를 비롯해서 애들은 요른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막시밀리안이 사흘째 기숙사 제 방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밖에서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보다 했을 뿐이다. 그는 실전을 나갈 때도 있었고, 프란첸가에서 진행하는 여러 외부 행사에도 참여하곤 했으니까.

나흘째에야 린다는 막시밀리안은 물론 요른도 수업에 나오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카를에게 상담했고, 다른 애들에게도 부탁해서 여러 교수나 강사들한테 번갈아 물어서야 사정을 전해 들었다. 막시밀리안이 치료 마법 전문 교수 한 명에게 하인을 보내 요른의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 주길 부탁했다는 것이다.

[요른이 독초를 먹었다는 거 같은데.]

강사 하나가 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꽤 많이 먹었던 모양이야. 학교 부지에도 자라는 풀이야. 정원사들이 보이는 족족 뿌리 뽑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 없애지는 못하거든. 그걸 어쩌다 먹었는지, 원. 혹시 너희들 짐작 가는 거 있니?]

애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서 린다에게 찾아왔다. 린다는 방과 후에 모임을 열어 나흘 전 요른의 교육에 참여했던 애들을 다 불러들였고, 각자에게 그때 했던 행동을 하나하나 반추해 보라고 했다. 요른더러 토사물을 도로 집어먹으라고 했던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린다와 카를은 그 학생을 데리고 그날 저녁 바로 요른의 방이 있는 기숙사 건물로 찾아갔다. 막시밀리안이 내려와서 1층 공동 거실에서 셋을 맞이했다. 그는 요른이 고비는 넘겼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둘과 함께 찾아왔던 세 번째 학생이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막시밀리안, 독초는 사실 내가…….]

막시밀리안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린다는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손을 저어 그 학생이 더 말하지 못하게 제지했다. 카를도 학생의 어깨를 꽉 누르며 눈치를 주었다.

[얘가 그런 게 아니야.]

린다가 급히 말했다.

[나흘 전에 요른을 벌줄 때 우리 셋이 제일 적극적으로 나섰어. 그래서 다 같이 책임을 지고 찾아온 거야. 얘 혼자 뭘 어떻게 한 건 아니야.]

카를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린다는 그 학생도 학생이지만 막시밀리안을 구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를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리라.

막시밀리안은 학생에게서 린다에게로 눈을 돌렸고, 그대로 몇 초쯤 침묵했다. 린다는 그의 얼굴 안쪽에서 꿈틀거리던 어떤 시커먼 것이 잦아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는 곧 평소처럼 친근하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셋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어차피 실수였겠지. 누구 실수였는지는 내가 모르는 게 나을 거 같아. 부탁할게.]

[그래.]

[알았어.]

린다와 카를이 얼른 답했다. 세 번째 학생은 퍼렇게 질려서 입을 다문 채 떨고만 있었다.

그 학생이 실토하게 내버려 뒀다면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흠 없는 평판을 망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만큼의 무언가를 그 요른이라는 괴물에게 걸어 두고 있었다.

‘역시 마법이야.’

식당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기마 수업이 진행되는, 울타리에 둘러싸인 공터 방향으로 곧바로 걸어가며 린다는 되뇌었다.

막시밀리안은 물론 요른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마법은 숨처럼 몸 안에 솔솔 흘러 들어와 뇌를 직접 녹여 버리니까. 막시밀리안은 결국 늘 어느 정도는 홀려 있는 상태인 거다. 그렇게 자주 얼굴을 보는 상대니까 홀리지 않을 리가 없지.

‘멋대로 상상하라지.’

린다는 필립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요른이 사람을 홀릴 줄 알며 프란첸가 사람들을 엄청나게 고생시켜 왔다는 건 그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도 아무리 막시가 열심히 관리를 하고, 학교 학생들이 다 같이 죽도록 고생하며 벌을 줘도 그 애는 호시탐탐 마법을 써 대고 있는 거다. 그래서 막시를 홀리고, 카를을, 필립을 홀리고, 그래, 그때처럼 린다마저도 홀려서…….

린다는 요른의 흉한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머리도 피부도 시체처럼 허옇다. 워낙 작고 말라빠진 게 늘 웅크린 버러지같이 구부정하게 서 있으니 더 쫄아 붙어 보인다. 걸을 때도 절뚝거리며 발을 질질 끌고, 말을 할 때면 눈알을 불안하게 뒤룩대며 힘겹게 입술을 옴쭉댄다.

징그러운 새끼. 린다는 일부러 입 속으로 씹듯이 중얼거렸다. 천치 새끼.

그러나 아무리 되씹어 봤자 그녀는 어떤 환상 같은 기억이 뇌리를 비집고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의 집에 놀러 갔을 때다. 아직 자신은 열한 살 정도였고, 카를도 열 살, 막시밀리안은 아홉 살이었다. 셋은 정원에서 한창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린다는 숨을 곳을 찾다가 뒤뜰의 유리 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고무나무와 알라만다 덩굴이 섞여 자라던 구석에서 새하얀 천사를 발견했다.

어린 린다는 충격을 받아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건 천사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모습으로부터 도저히 인간의 것일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아름다움이 흘러나와 백작 영애의 뇌를 녹였다. 그녀는 당장 엎드려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구해 주세요.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결국 온실 바닥에 쓰러졌다. 지금까지 잘못되었다고 추호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모든 옳고 똑바른 것들이 잘못된 것 같았고, 세상이 다 비틀려 있는 듯이 몸 주변에서 온통 엇갈려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그저 그 흰 빛의 아이에게 빌고 싶었다. 제발,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

그때 막시밀리안이 급히 뛰어왔다. 요른!

그는 바닥에서 뒹굴며 우는 린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애한테 뛰어갔다. 그러면서 외쳤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반은 빌듯이, 반은 달래듯이 말하면서도 아홉 살의 막시밀리안은 제 몸의 반밖에 되지 않는 그 작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듯이.

언제까지고 지키겠다고 맹세하듯이.

열일곱 살의 린다는 마침내 기마 수업장에 다다랐다. 잔디가 고르게 자란 공터를 둘러싼 울타리 바로 앞에 서서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면서 마치 스스로에게 변명하듯이 속삭였다. 그래.

‘지독한 홀림 마법이었어.’

공터에는 말들이 벌써 준비되어 있었고 새벽 공기 속으로 콧김을 뿜으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 앞에 정렬해 있는 게 보였다. 린다도 울타리 한쪽의 문을 열고 얼른 발을 옮겼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흑마법 대책부에서 요른을 데려가 주길.

데려가서 그 반편이의 몸에 마물 조각들을 잔뜩 섞어 넣어 주기를.

흑마법 대책부가 진행하고 있는 건 인체 강화 실험이었다.

린다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서류에 따르면, 성황국 흑마법 대책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병사의 몸에 마물을 섞어 강화하는 방법을 연구해 왔다. 특히 마검 개발이 성공한 후 마물에는 역시 마물로 대항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안이 위에서도 큰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길거리 고아나 죄수를 이용한 연구 중 지금까지 몸에 마물이 제대로 섞여 든 자는 손에 꼽을 만했고, 겨우겨우 섞인 자들도 몸은 강화되었으되 금방 의식을 잃고 폭주해 버려서 병사로서는 쓸 수가 없었다고 보고서에 쓰여 있었다. 기사가 마검에 잠식되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 버린 자들은 아무리 애써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수 없었단다.

보고서에는 결국 완전히 마물화되어 버린 피험체들을 처리하기 위해 성기사들을 늘 대기시켜 둔다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 성기사 중에서도 성황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소수만이 이 실험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만약 실험이 성공할 경우, 가장 먼저 강화 시술을 받기로 예약되어 있다고 한다.

보고서를 읽고 나서 린다는 처음 며칠은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가 좀 맑아지고 나자 곧바로 떠오른 건 요른의 모습, 그리고 그 애가 반쪽짜리 마물이라는 결코 근거가 없지만은 않은 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부서의 서류에 사용된 표현에 따르자면, 요른은 마물이 섞여 ‘강화된’ 인간이라고 칭해도 좋으리라. 흑마법 대책부가 내내 인공적인 실험을 통해 노리던 바가 포자와 어린 미혼모의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사된 것이다. 단, 요른의 경우에는 육체 강화가 아니라 마법력의 강화로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이겠지만.

‘그럼 그 애 몸을 잘 연구해 보면 단서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인간과 마물을 잘 섞을 방법을 알아보려면, 이미 섞인 몸을 갖고 실험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가 있겠어?’

고민하다 린다는 지난 밤 아버지에게 요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외모, 재능, 행동거지, 포자와 미혼모 배경에 대해서까지 쓸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 담아 보냈으니 판단은 이제 아버지가 할 일이었다.

린다는 아버지가 부디 요른이 피험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 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 애가 성황국 수도로 이송되어 실컷 실험을 당하고, 결국 언젠가는 폭주해 버리기를 그녀는 간절히 소망했다.

그녀는 며칠 전 대련장에서 보았던 제 학우의 모습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건 고작 마검 하나에 잠식당한 거였다. 요른은 이미 반쪽짜리 마물이니까,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마물 조각을 제 몸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넘치도록 삼킨 다음에야 변하기 시작하리라.

그러면 요른은 평범하게 잠식된 기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끔찍한 꼴이 되어 실험실에서 사슬에 묶인 채 온몸을 뒤틀며 짖을 것이다. 노련한 성기사들이 달려와 그 애를 적당한 크기로 토막 내어 상자에 담으리라. 흑마법 대책부에서는 그 조각들로 다시 실험을 반복하거나, 아니면 마검을 만들 재료로 공방에 나누어 줄 것이다.

요른이 그렇게 전락한 모습을 떠올리자 린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마침내 머릿속 천사의 광채를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애의 지긋지긋한 마법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편지를 읽고 곧 사람을 보내오기를 기대하며, 린다는 자기 앞으로 다가온 암갈색 말의 고삐를 잡고 목을 토닥거려 주었다.

* * *

요른과 필립, 막시밀리안이 식당 뒤쪽 숲에서 만난 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사흘째 아침, 요른은 새벽녘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막시밀리안이 지시를 내리고 떠나간 후 한 발짝도 기숙사 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만 가끔 창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막시가 창에도 커튼을 쳐 두라고 해서 쳐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른 새벽이나 어스름한 저녁쯤에 커튼 틈만 살짝 들추고 내다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창밖의 풍경은 아직 그림자가 져 있었지만 이슬처럼 맑았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오히려 이 축축하고 신선한 색채는 말라 버리리라. 수풀 사이로 토끼의 귀도 보이고, 작은 다람쥐가 뺨을 부풀린 채 나무 둥치를 기어오르는 모습도 보여서 요른은 아쉽게 창유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에만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동식물은 좋아하지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굳이 검은 숲에 가지 않고 방에 처박혀서 살기만 해도 괜찮겠다.’

생각하니 마음속에 살짝 희망이 피어올랐다. 마법사 중에는 은둔 생활 같은 걸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자신도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 될지도 모른다.

요른은 책상 쪽으로 가서 어제 막시밀리안의 하인이 두고 간 빵을 서랍에서 꺼내어 작은 접시에 올렸고, 컵에 물도 따랐다. 막시는 약속했던 대로 하루에 한 번씩 하인을 보내서 먹거리는 물론 강의 필기도 전해 주었다. 그러니 지난 사흘 내내 방 밖으로 나갈 필요는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빵에 마른 소시지 몇 줄을 끼워서 잘 씹어 먹고 손을 수건에 탁탁 털고, 접시를 치운 후 요른은 필기 노트를 책상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하인이 막시 친구의 이론 수업 노트를 필사해 놓은 복사본이다.

노트에는 복잡한 도표와 그에 대한 설명이 가지런히 필사되어 있었다. 요른은 이 하인이 차라리 자신보다 타블로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타블로는 늘 어려워.’

요른은 교재와 필기를 번갈아 보면서 생각했다. 타블로는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냥 외우려고 해도 도무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암기하려 할 때마다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오니 어쩔 수가 없다. 골을 누가 아주 가느다란 철사로 조각조각 나눠 놓는 듯, 눈앞에 있는 분류표가 요른의 뇌를 직접 구획별로 쪼개놓는 듯이 아팠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말로는 마법사라면 이런 두통은 누구나 다 겪는 거고, 극복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했다. 요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학생들은 정말 대단해. 이렇게 아픈데도 어떻게 이런 걸 다 외우고 다니지.’

요른은 사실 여전히 대부분의 마법을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쓸 수가 없었다. 타블로를 이해하지를 못하니 길을 그리는 주문을 외울 수도 없고, 주문을 못 외우니 정령에게 청을 올릴 수도 없다. 그냥 원래 자신이 하던 대로 ‘어떻게든’ 정령 마법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뿐이었다.

결과로만 따지자면 사실 요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다른 애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거의 모든 마법을 다 쓸 줄 알았다. 다만 프란첸 부부도 막시밀리안도 요른이 정상적으로 마법을 쓰는 법을 배우기를 바랐고, 그래서 학교에 넣어 둔 것이다.

그러나 1년 전 여름 방학, 막시밀리안은 결국 포기하고 일시적인 타협책을 찾았다.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불과 공기 마법 몇 가지는 당분간 그냥 요른이 원래 쓰던 대로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단, 주위 눈이 있으니까 주문을 외우는 척은 하라는 것이었다.

[이건 속임수야. 네가 제대로 된 마법을 배울 때까지만 그렇게 해. 안 그러면 주위에서 너무 이상하게 볼 테고, 네가 뭘 제대로 배우기 전에 퇴학당할 수도 있으니까. 알았니?]

그렇게 말하며 막시밀리안은 거의 탈진한 듯한 얼굴로 요른을 쳐다보았다. 요른이 입학한 지 딱 2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막시나 프란첸 부부는 사실 입학 후 1년쯤이 지나면 요른도 타블로를 어느 정도 익히고 주문도 외우면서 정상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요른이 남들에게도 설명해 줄 수 있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주문 없이도 온갖 마법을 다 쓸 수 있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요른은 두 학기를 다 보내고 나서도 전혀 진전을 보이지 못했고 이론 성적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반면 실기 성적은 말도 안 되게 월등해서, 교수나 강사들은 요른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학생들이 이 애를 너무 무서워하고 있는 데다가 자기들도 솔직히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휴학이나 유급, 나아가 조심스럽게 자퇴 등의 얘기까지 꺼냈다.

막시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그다음 1년 동안은 내내 직접 요른을 붙들고 가르쳤다. 그는 방과 후에는 물론 방학 중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요른을 제 기숙사 방이나 성의 서재로 불러 단독 과외를 해 주었다. 기사 생도임에도 불구하고 막시는 타블로 관련 과목 성적도 아주 좋았기 때문에, 가르치는 데에도 자신이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요른은 막시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을 내지 못했다. 요른이 영 알아듣지 못하는 걸 매일같이 눈앞에서 보면서 막시도 서서히 지쳐 갔다.

1년 전 그날 저녁에도 막시는 요른에게 온갖 방법으로 다 타블로를 가르쳐 줘 보려고 기숙사 제 방 책상 위에 분류표며 도안을 잔뜩 쌓아 놓고 애쓰다가 기진해진 상태였다. 요른은 미안해서 울기 직전이었다. 막시밀리안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고, 눈 밑에 그림자가 푹 파인 채로 결국 한숨처럼 말했다. 당분간은 차라리 주문을 쓰는 척만 하라고.

[이론 과목은 내가 족보를 주고 나올 만한 문제만 가르쳐 줄 테니까. 어떻게든 대충 유급을 피할 점수만 내자.]

[응!]

요른은 반색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곧바로 평소의 단단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덧붙였다.

[다 그러자는 건 아니야. 회복 마법은 절대로 네가 원래 쓰던 대로 쓰면 안 돼. 물의 정령을 쓰는 마법도 안 되고. 이 두 가지는 네가 실제로 주문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아예 봉인해 두기로 했지?]

[으……응.]

[불과 공기 마법 중 기본적인 것만 그렇게 하자는 거야.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조처일 뿐이야. 약속해, 요른.]

막시밀리안이 요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다짐시켰다.

[넌 결국 제대로 된 마법을 배워야 해. 안 그러면 어떻게 국가시험을 통과해서 마법사가 되겠어.]

[응, 아알아…….]

[마법사가 되어야 날 도와주지.]

[응!]

막시밀리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줘서, 요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라 해도 막시는 요른이 어엿한 마법사가 되기를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요른은 입 밖으로 내놓기에도 너무 소중한, 아니, 내놓았다가는 당장 비웃음만 당해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꿈을 속으로만 조그맣게 떠올렸다. 

막시는 요른이 그의 파트너 마법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건방진 얘기일까. 물론 막시는 날 아주아주 싫어해. 그치만…….’

프란첸 공작 부인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요른은 마법 재능만은 있고, 막시처럼 강한 기사는 분명 강한 마법사를 필요로 할 테니까, 어쩌면, 어쩌면.

그날 막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요른은 괜히 책상 위의 타블로를 만지작거렸다. 그 후로 그는 불과 공기 마법은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척하면서 써 왔다. 하지만 그러려다 보니까 쓸 수 있는 마법 수가 확 줄어들었다. 고급 마법은 주문이 길고 복잡한데, 요른으로서는 도저히 발음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말 더듬는 것만 나아져도 외우는 척은 할 수 있어.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마법을 쓸 수 있을 텐데.’

타블로도 못 외우지, 말도 더듬지. 정말이지 할 줄 아는 게 없다. 병신 새끼 같으니. 요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게 막시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꿈이나 꾸고 있고.’

요른은 잠시 우울하게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하나 쓰면서 동시에 주문을 외워 보기 시작했다. 우울하다곤 해도 매일 익숙한 그 우울이니 별다를 것도 없다.

기숙사 방 안의 공기가 술사 자신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물결쳤다. 공기의 정을 쓰는 전송 마법.

요른은 자기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낸 목소리가 방 안을 정확히 한 바퀴 돌아 오른쪽 귀로 돌아오게끔 해 보았다. 강의실에서도 자주 쓰는 마법이다. 조금 큰 강의실에서는 뒤쪽까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니까, 교수가 둘러앉은 학생들 전부에게 고루 소리를 전달할 때 쓴다. 전장에서도 다수 병사에게 명령을 전달할 때 널리 활용되는 마법이다.

마법 자체는 쉬웠다. 하지만 좌표를 설정하는 주문이 다소 긴 편이라 요른은 결국 음절을 헛뱉고 말았다. 요른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잘근거렸다.

이 정도도 못 하면 안 된다. 이래서는 파트너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년부터 시험도 못 보게 된다.

요른 때문에 그로쉔 마도 학원 교수들은 회의를 거쳐서 전에 없던 실기 시험 규정 하나를 추가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에 있어서 타블로를 이용해서 주문을 쓰는 경우에만’ 통과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다음 학기부터 적용된다.

요른은 아직은 이 규정이 적용된다 해도 시험을 잘 치러 낼 수 있다. 하급 학년이 배워야 할 마법들은 주문이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두 살이 되어 중급반으로 올라가면 다르다. 요른은 곧 이론은커녕 실기 시험조차도 통과하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한번 천천히 주문을 한 자 한 자 발음해 보았다. 그때 목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비릿한 향이 콧속까지 치밀었다. 요른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많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지난 사흘간 방에서만 쉬면서 막시네 하인이 가져다주는 것만 먹었더니 배 속이 좀 편안해졌다. 그래서 요른은 다쳤던 게 다 나아 가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오늘 저녁에는 막시네 성에 가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설마 더 악화되진 않겠지.’

걱정을 하면서도 요른은 마음이 조금 설레었다. 어쨌거나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반가웠기 때문이다.

벌을 다 받고 난 당일 밤에는 막시밀리안은 꼭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서 다정하게 침대맡에 앉아 주곤 한다. 그러다 보니 요른 입장에서는 사실 이제는 벌을 받는다는 게 진짜 벌인지 상인지 구별도 잘 안 될 지경이었다. 벌이 끔찍하게 아프고 괴로운 만큼 막시가 곁에 있어 주는 건 더욱더 무섭도록 달콤했다.

‘오늘 저녁에 성에 가면 막시한테 필립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겠다. 그 사람한테 어떻게 경고해 줬는지.’

막시는 분명히 잘해 줬을 거라고 요른은 믿었다. 입학 초에 요른에게 접근해 왔던 토마스라는 중급생도 막시밀리안이 결국 잘 설득해 주었으니까.

요른이 당시 금지 마법을 쓴 벌로 채찍을 맞고 돌아왔을 때, 토마스는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요른의 주변에서 사라져 있었다. 교정 먼발치에서 두어 번쯤 어쩌다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토마스는 눈을 찡그리며 바로 발을 돌려 요른을 피해가 버렸다.

‘막시는 필립한테도 분명 그렇게 해 줬을 거야.’

요른은 떠올리며 무심코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놓고 그는 자기가 한 짓에 놀랐다.

식당 뒤 관목 숲에서 필립한테 이십 분이나 손을 잡혀서 앉아 있었다. 오른손에 남은 흔적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소년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가슴이며 어깨, 등과 허리와 양팔에 남아 있었고, 머리카락에도 손길의 자취가 스며들어서 조금만 경계를 풀면 생생하게 다시 한낮의 햇볕처럼 달아올랐다.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요른은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필립이 주었던 온기 대신에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때 창문에 뭔가 조그만 돌조각 같은 게 부딪쳤다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새인가 생각하고 요른은 몸을 일으켰다. 딱따구리가 가끔 목재 창문틀에 이상하게 부리를 받아 댈 때가 있는데, 그러면 창이 상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얼른 쫓아 주어야 한다. 요른은 커튼을 살짝 걷고 창문 양쪽을 살폈다. 그러다가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주고는 얼어붙었다.

필립 블랑쇼가 올려다보고 있다가 요른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요른은 얼른 도로 커튼을 치고 창에서 물러났고, 무릎이 벌벌 떨리기 시작해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막시가 아직 설득을 못 시켜 줬구나.’

필립이 요른의 기숙사 방이 어딘지 아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같은 마도 학원 학생이고, 기록부를 찾아보면 나올 테니까.

‘그렇다고 진짜로 찾아오는 게 어딨어. 왜 계속, 계속 나는 이런 마법을…….’

요른은 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앉아 있다가 겨우 가슴을 진정시켰다. 오늘 저녁이다. 오늘 저녁에 벌을 받고 나면 훨씬 더 나아질 거다.

두어 번 더 창문에 돌조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지만 곧 조용해졌다. 필립은 포기하고 가 버린 거 같았다. 문으로 들어오려고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래 봤자 요른이 열어 주지 않았을 테지만.

요른은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쳐 놓고 주문을 연습하면서 막시의 하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저녁 식사 때를 살짝 넘겨서 하인이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고, 요른은 따라 내려가서 마차에 올랐다.

막시밀리안은 성의 1층 손님 접견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요른을 보자 일어서서 웃어 보였다. 요른은 막시의 모습을 보고는 너무 강한 빛에 쏘인 듯이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예쁘다.’

이 시간이면 막시밀리안은 간소한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높은 칼라를 덧댄 새하얀 고급 셔츠에 안쪽 가장자리에 미려한 금 자수가 놓인 검은 조끼, 같은 색의 재킷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구두도 새것이었다.

저녁 늦게 진지한 회동이 있는 날인가 보다 하고 요른은 짐작했다. 아버지 쪽 지인들 등 지위 높은 어른들과 약속이 있을 때면 막시는 이런 차림이 된다. 그런 와중에도 요른과의 약속을 지킬 시간을 내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요른은 얼른 막시밀리안 쪽으로 뛰어가서 그 두어 걸음 앞을 맴돌았다. 막시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요른과 눈높이를 맞추었고, 부드럽게 칭찬해 주었다.

“그동안 방에만 잘 있었다고 들었어. 착하구나.”

“응!”

“지하로 내려가서 벌 받고 나서 다시 여기로 올라와. 내게 인사하고 가. 알았지?”

“응.”

늘 똑같은 순서다. 지하에서 벌을 받고, 1층 접견실로 올라와서 막시한테 인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간다. 그리고 돌아가서 상처가 아파 앓느라 못 자고 있노라면 막시가 제 쪽에서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찾아와 머리맡에 앉아 준다.

막시가 가볍게 손짓해 보이자 감색 재킷을 입은 하인 한 명이 다가와 요른을 지하 체벌실로 이끌었다. 요른은 웃옷과 바지를 벗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등에 마르티넷 서른다섯 대를 맞은 다음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하인은 곧 요른더러 벽에 가슴팍을 대고 붙어 서게끔 했다. 그리고 준비해 뒀던 깨끗한 천으로 그의 등에 번진 피와 땀을 닦아 내고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아 주었다. 요른은 비틀거리면서 다시 스스로 옷을 입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하인이 늘 그렇듯 무심한 투로 물어 왔다. 요른은 끄덕거렸고, 하인은 그를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끌었다.

둘은 석조로 된 컴컴한 지하층에서 빠져나와 촛불과 마법 램프가 뒤섞여 걸려 있는 1층 복도로 걸어 나왔다. 요른은 몸에 이상한 한기가 도는 걸 느꼈다. 아까는 지하라서 서늘한 건 줄 알았는데, 1층에 다 올라와서 걸어가는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핑 돌면서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요른은 입을 꽉 다문 채 피를 겨우 도로 삼켰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막시한테 인사를 안 하고 그냥 바로 기숙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접견실에 들어가자 막시밀리안이 책을 보고 있다가 눈을 들고는 미소 지었다.

“그래. 잘 버텼구나.”

요른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막시가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본 후에야 겨우 한마디 내놓았다.

“응.”

막시밀리안은 요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하인에게 물었다.

“몇 대 때렸죠?”

“시키신 대로 서른다섯 대를 때렸습니다. 처치도 다 해 주었고요.”

“알겠습니다.”

답하고는 막시는 요른에게 말했다.

“나 오늘 밤에는 네 기숙사로 못 찾아가. 아버지가 주신 일 때문에 어디 갈 데가 있거든.”

요른은 너무 반색하는 기색을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그저 끄덕거려 보였다. 막시는 여전히 뭔가 의심을 품은 듯한 눈으로 상대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래도 말을 계속 이었다.

“2주쯤은 학교에도 못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다른 애들 말 잘 듣고.”

필립은 어떻게 됐어……? 하고 묻고 싶었지만 요른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막시가 바로 말해 주었다.

“필립은 아직 설득을 못 시켰어.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계속 방에만 있어. 알았지? 내 하인이 필요한 건 다 준비해 줄 거고, 린다랑 카를도 하루에 한 번씩은 들러서 네 상태를 확인할 거야. 혹시 뭔가 이상이 생기면 그 둘한테 꼭 얘기해.”

“응.”

요른은 짧게 뱉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막시가 마침내 요른더러 가 보라고 손짓하면서 자기도 몸을 일으켰다. 요른은 막시의 뒷모습을 바라볼 새도 없이 하인이 손짓하는 대로 정문으로 향했다.

막시 쪽에서 오히려 고개를 돌려 요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곧 등을 돌렸다. 두 번째 기회마저 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전방 부대를 지휘하는 성기사들과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나야 했다.

요른은 마차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옆구리에 남은 상처를 일부러 제 손으로 쥐어뜯었다. 평소보다 다섯 대 정도 더 맞긴 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눈앞이 핑핑 돌았던 적도, 내장을 다쳐서 속에서 피가 올라온 적도 없다. 역시 이미 다쳤던 게 악화되어 버린 거라고 요른은 생각했다.

막시에게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그는 2주는 학교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니까, 그동안 푹 쉬면서 나아 버리면 된다. 요른은 마차에서 내리다가 바닥에 엎어질 뻔했다. 마부가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굳이 부축해 주려고 들지는 않았다.

프란첸 집안의 고용인 대부분은 요른에게서 뭔가가 옮을까 봐 두려워한다. 요른 자신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어릴 때 멋대로 홀림 마법을 쓰면서 그들 머릿속을 다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요른에게 손을 대거나 가까이 가는 것조차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늘 요른을 지하실로 끌고 가서 벌을 주는 하인도 막시밀리안에게 지목받아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상당한 보상을 약속받고서야 겨우 용기를 낸 거라고 들었다.

마부는 그를 기숙사 건물 바로 앞에 내려 주었다. 요른은 계단 난간을 손으로 잡은 채 가까스로 삼 층까지 올라가 제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엄청난 피로감과 고통이 엄습했다. 

괜찮아. 요른은 생각했다. 며칠 이렇게 누워 있으면 나을 거야.

요른은 깜박 잠이 들었고 악몽을 꾸었다. 자신이 금지 마법을 마구 써서 모두를 홀려 버리는 꿈이었다. 필립, 학원 학생들, 프란첸가의 고용인들, 공작 부부, 막시밀리안, 거리의 시민들, 성안의 귀족들, 국왕, 그리고 멀리, 멀리까지 날아서…… 성황.

요른은 눈을 번쩍 떴다. 숨을 몰아쉬며 그는 창 쪽을 살폈다. 햇빛이 희끄무레하게 커튼에 스며들어 살랑이고 있었다. 요른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러나 마치 때려눕혀지듯이 다시 침대 위로 거꾸러졌다.

요른은 거꾸러진 그대로 잠시 더 졸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막시의 하인인 듯했다.

하인은 아침에는 요른에게 그날의 먹거리를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막시 친구들의 수업 노트 필사본을 배달해 준다. 요른은 기어 내려오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와서 아무 깨끗한 웃옷이나 하나 걸치고 욕실 쪽으로 가서 세수를 했다. 하인이 막시한테 보고할 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인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요른은 문을 열어 주었다.

필립이 노크를 하던 모습 그대로 가볍게 주먹을 쥐고 서 있었다.

“어.”

요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 어어…….”

그는 뒷걸음질 치다가 주저앉을 뻔했다. 노크 횟수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누군지 묻고 정해 둔 답도 들었어야 했는데. 그만 잊어버렸다.

눈앞이 어질거렸고 시야가 검어졌다. 정신을 잃다시피 한 번 완전히 새카맣게 까마득해진 후에야 요른은 누군가의 손이 자신을 더듬는 걸 느꼈다. 필립이 그의 어깨와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그제야 요른은 자신이 주저앉을 뻔만 한 게 아니라 아예 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렸고, 필립이 자신의 몸을 안아 올리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필립은 요른을 양팔에 받쳐 들고 침대로 데려가 눕혀 놓고 이마를 짚었다.

요른은 멍하니 필립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가물거려서 아무리 눈을 깜박거려도 안개 껍질 같은 게 벗겨지지 않았다. 필립이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묻는 목소리만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귓가를 적셨다.

“요른? 요른. 얘기 좀 해 봐. 왜 이래. 너 열이 진짜 높아.”

요른은 입가로 뭔가가 흐르는 걸 느꼈다. 시트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그는 필립이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대어 튜닉을 들춰보는 걸 눈치채고 흠칫했지만, 전혀 저항할 수는 없었다. 필립의 손이 갈비뼈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요른은 그 와중에도 눈을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은 아직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막시밀리안의 하인이었다. 그는 이쪽을 보고 주춤하더니 식사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문 앞의 바닥에 내려놓고 도로 발을 돌려 사라져 갔다.

안 돼.

가지 마, 막시한테 알리지 마. 요른은 속으로만 끊임없이 빌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필립의 팔 안에서 그는 곧 정신을 잃어버렸다.

필립은 요른의 눈이 뒤집히다가 감겨 버리는 걸 보았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는 아이의 얼굴에 이리저리 손을 대어 보았다. 요른의 안색은 평소보다도 더 창백했다. 뺨에서도 이마에서도 불같이 열이 났고, 입가로는 피가 흘러나왔다.

필립은 망설이다가 요른의 상의를 벗겼다. 마른 몸에 천이 헐렁하게 감겨 있는 것뿐이라서 벗기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붕대가 온통 감겨 있는 상체를 보고 역시나 잠시 더 망설이다가 그는 조금씩, 다시 감아 줄 수 있게끔 천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매듭을 풀고 어깨 부분부터 벗겨 나갔다. 그리고 요른의 등을 뒤덮은 상처를 보고는 잠시 망연한 표정으로 침대 곁에 앉았다.

“얘는 열한 살이야.”

그는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얘는…… 아직 열한 살이야.”

필립은 요른의 어깨 쪽에 다시 붕대를 감아 눕혀 주었다. 그리고 침대 곁 의자에 앉은 채 생각을 가다듬었다. 요른은 아마 이미 내장 어딘가를 다친 상태였을 거다. 그런 채로 또 이렇게 얻어맞았다.

그는 학생들이 아무리 교정에서 아이를 구타한다고 해도 도구까지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마구잡이로 때리며 괴롭히는 게 아닐까 했다. 그런데 마치 경찰에서 훈육 목적으로 벌을 주듯이 채찍질을 한 다음, 약을 바르고 붕대까지 감아서 되돌려 보내는 주도면밀함이라니.

필립은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도 어린 일꾼들에게 이런 짓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인이라 닳고 닳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이윤을 노리는 사업가이기 때문에, 어린 노동력을 무급으로 굴리려면 말 그대로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줘 가면서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야 하기 때문에 택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족 자제랍시고 고작 십 대 중후반 애들이 자기보다 더 어린 애한테 이런 짓을 했다. 아무 실용적인 목적도 없이 그냥 밉고 괴롭히고 싶어서만 열한 살짜리를 내장을 망가뜨리고 채찍으로 수십 대를 때렸다.

애를 제 발로는 수업도 못 나가게 방에 가둬 놓더니, 저희들이 끄집어 데리고 나가서 이런 짓을 하고 되돌려 보냈다.

“나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서 필립은 잠시 눈을 감았다. 페랑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사업을 물려받게 되면 절대로 어머니를 따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지금 부리는 애들은 어쩔 수 없다고 방관했다. 사업이 그녀 손에 있을 때는 아직 일꾼들도 다 그녀 소유니까, 나중에 필립 자신이 정식으로 후임이 된 후에야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기서도 비슷한 이유로 그는 요른을 넉 달간 방관했다. 그리고 그 애는 지금 침대에 누워 피와 땀에 젖어 쌕쌕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어쨌거나 치료사를 불러야 해.’

그도 요른의 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아마 학원의 치료 마법 교수 중에서도 수준이 높은 원로에게 부탁해야 하리라. 필립은 두어 명을 마음속으로 꼽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기숙사 방문이 열렸다.

린다와 카를이 들어오다가 필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필립도 그대로 침대 곁에 멈춰 섰다.

린다는 그렇다 치고, 카를은 아무래도 필립이 예를 갖추어 인사해 오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나 필립은 일부러 등을 꼿꼿하게 펴고 서 있다가 둘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나이치고도 키가 워낙 큰 편이라 충분히 둘 다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카를이 먼저 명령하듯이 말했다.

“나가.”

“안 그래도 나가려고.”

필립이 나긋하게 답했다.

“치료 마법 교수 한 분을 불러오려고 해. 그동안 아이 곁을 좀 지켜 줄 수 있겠어?”

“우리가 다 알아서 해. 너는 나가서 네 방에나 돌아가.”

“왜?”

“막시밀리안은 우리한테 얘를 맡겼어. 너는 외부자야. 나가.”

“난 얘 친구야.”

“걔가 무슨 친구가 있어.”

카를이 피식대며 말했다.

“나가. 애 더 얻어맞기 전에.”

린다가 카를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러나 필립은 이미 그 어조에서 미묘한 기색을 눈치채고 되물었다.

“내가 있으면 얘가 더 얻어맞아?”

“나가라고.”

“애를 왜 이렇게까지 때렸어?”

“말귀를…….”

“내가 얘 친구가 되고 싶어 해서, 그래서 얘한테 채찍질을 했어?”

필립은 말하면서도 자기 어조에 놀랐다. 남에게 이런 식으로 떨면서 말을 뱉어 본 건 2년 전 딱 한 번밖에 없었다. 한번 뱉어 놓고 나니 눈꺼풀 바로 밑까지 시뻘건 물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에 멈출 수가 없었다.

“날 못 만나게 애를 방에 가둬 놓고 벌로 때린 거야?”

필립은 카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성큼성큼 걸어갔고, 바짝 코앞까지 다가가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했어야지. 접근한 건 난데 왜 얘를 때려? 왜, 나는 무서웠나? 똑같은 평민인데 개중에서도 치사하게 더 약한 놈만 골라 때리다니, 이게 귀족 나리가 하실 짓인가?”

“……야, 필립.”

린다가 옆에서 조그맣게 채근했지만 필립은 듣지 못했다. 못 들은 척한 게 아니라 귓가에서 계속 피가 웅웅 맴돌며 맥박치고 있어서 실제로 남의 소리는 들어오지가 않았다.

카를은 뭐라 항변하지 못하고 필립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필립이 2인치는 더 컸지만 카를은 단련된 기사 생도였다. 그는 자신이 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이 길쭉한 놈을 때려눕힐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은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요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 괴물 꼬마를 편들어 줄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는 것도 아니고, 등을 쭉 펴고 당당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며 꾸짖는 타인이 나올 거라고는.

카를의 머릿속에 어느 어스름한 저녁이나 새벽, 요른의 모습이 가끔씩 더없이 가엾고 아름답게 비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카를은 요른이 홀림 마법을 써서 그런 거라고 믿었고 그래서 요른을 오히려 더욱더 혐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기숙사 방 안으로 비쳐드는 찬연한 아침 햇살 속에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요른에게 정말로 나쁜 짓을 해 왔다고 느꼈다. 그저 아주 평범하게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해 왔다고. 그 바람에 그는 순간 해서는 안 될 말을 변명처럼 내뱉고 말았다.

“우리가 때린 건 아냐.”

린다가 그의 옆구리를 급히 쿡 찔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필립의 그러잖아도 살짝 질려 있던 얼굴이 아예 새하얗게 핏기가 빠져 버렸다. 카를도 따라서 좀 질려 버렸다.

필립은 무언가 물으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말을 내놓지는 않은 채 도로 꾹 다물었다. 어차피 둘이 제대로 대답해 줄 거라고 믿지는 않는 건지, 스스로가 돌아올 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런 건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필립은 다만 곧 나지막이 운을 떼어 선포했다.

“나가.”

그리고 이제 오히려 제 쪽에서 명령하듯이 말하며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난 이 애 친구야. 내가 곁도 지키고 교수도 불러올 테니까 너희들은 나가.”

말이 안 되잖아……. 린다는 그 와중에도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떻게 곁을 지키면서 나가서 교수도 불러와.

카를도 린다도 사실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필립을 금방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체적으로든 마법 실력으로든 그는 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만 둘은, 특히 대련 경험이 많은 카를은, 필립이 죽거나 아주 크게 상처를 입을 때까지 반항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지금 필립은 위협 같은 게 통하지 않을 상태이기에, 정말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평생 방 안에서 장부와 고서적만 만지작거렸을 거 같이 생긴 놈이 이런 투기를 발할 줄은 몰랐다. 카를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린다는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생겨서 성질은 더러워. 제가 잘 숨기고 있는 줄 알았겠지.’

그녀는 결국 카를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일단 물러가 주자는 거였다. 카를이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여기서 물러나 버리면 어쩌라고?”

“어차피 막시밀리안이 올 거야.”

“2주 후에나 오잖아. 그래서 우리한테 신신당부하고 간 거고.”

“하인이 우리한테만 찾아온 건 아냐. 막시한테도 급보를 보냈대. 아직 수도에서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곧 전달받겠지.”

“그거야 소식만 전달한 거지, 걔더러 오가라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해결해야지.”

“…….”

린다는 픽 웃으며 재차 카를에게 손짓해 보였다. 카를은 조금 둔하고, 린다가 어린 시절 우연히 보았던 몇몇 중요한 장면들을 보지 못했다. 그는 요른을 향한 막시밀리안의 감정이 어떤 결로 짜여 있는지 잘 짚어 내지 못한다.

납득하지 못한 채로도 카를은 린다의 손길을 따라 주춤주춤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둘이 나간 후에도 필립은 잠시 주먹을 꽉 쥔 채로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심호흡을 서너 번은 한 후에야 그는 다시 침대 곁자리로 돌아가서 아이를 살펴볼 여유를 낼 수가 있었다.

의자에 앉으니 다시금 귀에서 웅 소리가 나면서 눈앞도 빙글 돌았다. 그는 제풀에 피식 웃어 버렸다.

‘이렇게 한 번 화가 나면 미친 듯이 달아올라 버리는 습관은 정말로 좀 고쳐야 하는데.’

필립은 자신이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생긴 거나 몸가짐으로만 치면 그는 아주 멀쩡한, 아니, 오히려 나긋하고 공손하다는 느낌을 주는 편이다. 그러다가 화가 나면 한 번씩 폭발해 버리는 통에 2년 전 페랑에서도 지위 높으신 잡화점 손님께 사고를 쳐 버렸던 적이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폭발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속으로 되뇌면서 괜스레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귀족 자제분들을 코앞에서 좀 심하게 빈정대어 버리긴 했지만, 막시밀리안이 보장해 주지 않았던가. 학원에서는 어차피 다 같은 학우라고.

‘막시밀리안.’

필립은 이를 악물 듯이 생각했다.

그가 이 애를 이렇게 때렸다.

‘막시밀리안도 곤란하겠군. 내가 교수를 모셔 오면 이 상처도 다 들킬 텐데. 누가 때렸냐고 물으면 어쩔 거야.’

필립은 다 말해 버릴 작정이었다. 교수가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그는 학생들의 학대에 대해 다 말하고, 채찍질은 막시밀리안이 한 짓일 수도 있다고도 얘기할 참이었다. 모든 게 입증된다고 해도 폰 프란첸가의 자제에 대해 교수들이 실제로 심한 벌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판을 떨어뜨리는 효과 정도는 있으리라.

무엇보다 만약 교수진이 필립의 말을 믿어 준다면, 원래 필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아이를 페랑으로 데려갈 수도 있으리라. 학대의 흔적이 이렇게까지 뚜렷한데 아예 안 믿어 주기도 힘들 것이다. 요른이 국외로 최소한 몇 년 교환학생이라도 다녀오는 게 그 애 자신에게도, 이 학교를 다니는 귀족 자제들의 인성 교육에도 더 도움이 된다고 봐 주겠지.

프란첸 공작 부부는 제 겉보기에는 흠결 하나 없는 아들이 어린 피후원인에게 무슨 짓은 해 왔는지는 몰랐을 수도 있다. 아니, 알더라도 드러내놓고 인정하기는 힘들리라. 그러면 그들도 아들의 버릇을 고칠 겸 요른을 국외로 보내 서로 떨어뜨려 놓는 일에 찬성해 줄 수도 있다.

‘토마스 투드 린마이어…….’

필립은 자신이 이틀 전에 만났던 학생의 이름을 되뇌었다. 요른이 막 입학했을 당시 그 애한테 접근했다던 학생이다.

린다 덕에 이름을 알아낸 후 필립은 그에게 편지를 전해서 식당 뒤편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요른에 대해 물어보았다. 토마스는 얼굴을 확 구기며 답했다.

“그때는 걔가 마법을 신기하게 쓰길래 흥미가 돋았던 것뿐이야.”

“그런데 왜 더는 안 만나게 됐어?”

“솔직히 나 너랑 이런 식으로 단둘이 얘기하기 싫은데. 막시밀리안이 뭐라고 했든 신분 차이란 엄정한 거야.”

“답만 해 주면 얼른 갈게.”

필립은 얼른 잘라 들었다.

그는 토마스가 대는 핑계를 믿지 않았다. 편지 따위야 무시하면 그만인데도 만남에 선뜻 응해 주었으면서 이제 와서 신분 차이가 어쩌고 한다. 게다가 정말로 신분 차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학생이라면 2년 전에 요른에게 접근했을 거 같지는 않다.

지금 그는 뭔가를 필립에게 말해 주고 싶지만, 그대로 입 밖에 내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는 거다. 토마스는 더더욱 얼굴을 찡그리더니 겨우 뱉어 냈다.

“처음엔 몰랐지. 하지만 걔는 가까이할수록 내가 죄를 짓게 돼.”

“무슨 뜻이야?”

“너도 접근하다 보면 알게 될 텐데.”

토마스가 혀를 쯧 찼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애가 아니야. 기분 진짜 더러워지기 전에 빠져나와.”

“무슨 죄?”

“내 손으로 직접 안 저지른다고 내 죄가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잖아?”

토마스는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가 버렸다.

필립은 이제야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필립이 요른한테 접근하면, 요른이 방에 감금된다. 필립이 요른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면 요른이 채찍으로 얻어맞는다.

……선을 지켜.

막시밀리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친 새끼.”

필립은 픽 웃으며 토해 냈다.

역겨운 위선자 새끼. 겉모양에 속아서 좋게 판단했던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막시밀리안은 귀족 중에서도 최악의 유형이다. 제 손으로 직접 골라낸 평민 어린애 하나를 사육하듯이 키워 왔다.

필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있다가 다시 요른의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을 재어 보았고, 욕실에 가서 수건을 차게 적셔 와서는 땀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나갈 채비를 했다. 아까 린다 일행에게는 이상하게 말을 해 버렸지만, 아이 옆을 잠시 비우더라도 역시 교수부터 불러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막시밀리안은 어차피 앞으로 2주 동안은 여기 없어.’

필립은 어제 합동 식당에서 애들이 떠드는 소문을 들었고, 오늘 오전에 수업 시간에는 교수 입으로 확실한 소식을 들었다. 오늘 출발했다면서 겨우 어제 오후부터나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걸 보면 꽤나 갑자기 결정된 일인 거 같긴 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오늘부터 열흘간 검은 숲 주변 지대를 순찰하는 성기사들 틈에 섞여 실전을 나간다. 단, 이번에는 처음으로 후방 지원 부대가 아닌 전방 부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막시밀리안을 위시한 그로쉔 왕국의 성기사들은 지금 수도 외곽에서 다른 왕국의 성기사단과 합류한 후 한창 남쪽으로 행군 중일 것이다.

정식 성기사들은 그쪽에 현재 파견 나가 있는 동료들과 교대해서 석 달을 복무하고 나서야 돌아온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이번에는 견습생으로 참여하는 것뿐이라, 열흘만 머무르면서 활동 평가를 받을 예정이다.

평가가 괜찮으면 그는 방학 때는 꼬박 두 달간 검은 숲 주변 지대에 배치된다. 그리고 그 두 달의 평가도 괜찮으면…… 필립은 어제 식당에서 기사 생도 한 명이 마치 제 일인 양 자랑스럽게 말하던 걸 떠올렸다.

“막시밀리안은 다음 학기에 바로 성황국으로 떠나서 성기사 학원에 편입하게 된대. 실전 경험을 수업 대신 인정해 주는 거지.”

왕국 기사 학원을 떠나 성기사 학원에 진학하는 정식 연령이 17살이니 막시밀리안은 2년 일찍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16살은 간혹 있지만, 15살로 들어가는 학생이 나오는 건 십여 년에 한 번씩이나 있는 일이었다.

‘기사 생도로서는 참 열심히 사는 인간이긴 한데.’

필립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아무튼 그 잘난 프란첸가의 독자는 앞으로 2주는 학교에 돌아오지 못할 거고, 필립이 뭘 하든 제지하지도 못할 것이다. 요른을 치료해 주고 막시밀리안과 다른 학생들의 행실을 고발하기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는 요른의 품을 뒤져 기숙사 방 열쇠를 찾아냈고, 마지막으로 그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러나 문손잡이를 잡기 직전에 그의 머릿속에 생각 한 줄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갑자기 성 밖에서부터 성안으로 던져진 횃불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안 돼.’

필립은 눈살을 찌푸렸다.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방금 자신이 왜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더듬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기숙사 방문을 열고 나갔고,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짙은 황색 금발의 학우를 알아보고도 별 내색 없이 열쇠로 문을 잠갔다. 린다가 벽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교수는 불러오지 마.”

“수업 안 가?”

필립이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물었다.

“오늘은 종일 여길 지키고 계실 예정이십니까, 크라흐트 백작가의 영애님? 수업을 빠지면서도 성적을 낼 수 있는 유형의 학생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너 도를 넘고 있어.”

“예. 참 제가 도를 넘었지요. 다른 분들이 아니라 제가요.”

필립이 웃으며 린다의 옆을 지나쳐 가려고 했다. 린다가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막았다. 그러느라 그녀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고,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면서야 다시 운을 떼었다.

“불러올 필요 없어. 일만 복잡해져.”

“아무리 막시밀리안이라도 저 애가 죽으면 곤란해질 텐데?”

“금방 죽어 버릴 거 같은 상태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열이 높아서 위험해. 너무 늦지 않게 조처해야지.”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네가 부르는 것보다는 막시밀리안이 직접 부르는 게 훨씬 나으니까.”

“너무하네. 2주 후에 부르라는 거야?”

“하인이 아침에 너랑 요른을 보고 막시한테도 바로 서신을 전했어. 급보로 보냈을 테고, 성기사랑 병사들은 아직 수도 외곽 정도에서 행군 중일 테니까 지금쯤은 받았을 거야.”

“그래서 폰 프란첸의 독자께서 당신이 사육하시는 작은 괴물 때문에 행군을 중간에 끊고 돌아오기라도 하신다는 겁니까, 영애님?”

“너는…….”

필립이 놀리듯이 말하자 린다는 뭐라 대꾸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잔뜩 찡그린 채 양쪽 귀를 틀어막았고, 곧 머리까지 움켜쥐었다.

린다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필립도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관자놀이 한쪽을 눌렀다. 뒤늦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신음하며 필립은 무어라고 끊임없이 되뇌듯이 생각했다. 아니, 머릿속에 주어진 생각을 그저 받아들였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백열하고 있긴 했지만 그건 필립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필립은 생각했다. 동시에 그 자신의 생각보다도 오히려 더 또렷하고 정갈한 신호가 그 위로 마치 합주처럼 겹쳐 왔다.

―가지 마.

‘그럴 리가 없어.’

―가지 마.

두 반짝이는 음률이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섞여 버릴 듯한 아찔한 느낌에 필립은 거의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꽉 눌렀다. 그리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요른?”

―가지 마.

의지가, 바람이, 애원이 필립의 뇌 속에서 반짝이며 호흡했다. 필립은 린다가 복도에 상체를 기댄 채 창백해져 있다가 곧 짧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고는 도망쳐 버리는 걸 보았다. 나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필립은 몸을 돌려 열쇠를 다시 문손잡이 아래쪽 구멍에 끼워 넣었다.

요른은 그저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안색은 푸르죽죽했고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숨소리가 힘겹게 쌕쌕거리는 가운데 입술이 조금씩 달싹거렸지만, 말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대신에 필립의 머릿속에 자꾸 섬광 같은 신호가 밝혀졌다.

―가지 마.

“요른.”

말을 하려다가 필립은 요른이 그 관목 숲에서 얘기했던 걸 상기했다. 저저는 머, 머리에서 머리로, 새생각을…… 필립은 입 밖으로 말을 뱉는 대신 속으로 가만히 새겼다.

‘요른, 너 아파. 지금 나는 치료사를 부르러 가려는 거야.’

―가지 마.

‘너 많이 아파. 치료사가 필요해.’

―안 아파.

요른이 부드럽게 전해 왔다.

―하나도 안 아파. 누워서 쉬면 돼. 가지 마.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알리지도 마.

‘요른.’

―막시가 올 때까지 쉬면 돼. 그러면 다 나아. 막시한테 말하지 마. 들키기 싫어.

‘……요른.’

―막시한테 들키기 싫어. 곤란하게 만들기도 싫어. 안 돼. 가지 마.

대화인지 뭔지도 모를 것을 나누면서 필립은 요른이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읽어 내기도 할 수 있다는 걸 확신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이의 사고는 그 모서리도 결도 무척 섬세했고, 입으로 하는 말보다 수십 배는 빠르고 정확했다. 요른은 말더듬이가 아니다. 말이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다.

“페랑으로 가자.”

그러나 필립 자신은 범상한 인간일 뿐이었고, 그래서 굳이 입을 열어 말했다.

“나랑 페랑으로 가자. 너를 절대로, 절대로 이런 곳에서 썩히지 않아.”

요른은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립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여지없이 작열하는 듯한 신호가 뒤따랐다. 가지 마. 그 신호는 아직은 그저 내용만을 전했지만, 필립은 그것이 뇌 속에서 사실상 물리력을 띠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요른은 불안정한 상태다. 어쩌면 필립이 정말로 떠나려고 하면 강제로 머리를 조종해 버릴지도 모른다. 혹은 자칫 실수로 필립의 물컹한 뇌를 아예 영영 상하게 해 버릴지도 모른다.

필립은 포기하고 조용히 침대 곁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그리고 말을 전했다.

“알았어. 여기 있으면서 널 돌봐 주기만 할게. 안 나갈게.”

그리고 그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쓸었다.

그 기척에 요른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깨어났다. 그 새하얀 시선이 필립의 눈동자를 꿰뚫었다.

요른은 곧 다시 잠들었다. 필립은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성스러운 것에 닿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도 없었고, 누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지 마.’

그로쉔 학원 교정, 복도나 건물 안팎을 떠돌던 학생, 교수, 강사진과 직원 다수는 생각했고 동시에 속으로 갸웃했다. 뭘 가지 말라는 건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들 대부분은 곧 머리를 한 번 흔들고 잊어버렸다. 맥락 없는 상념의 조각들이 마치 백일몽처럼 의식의 저변을 흘러 다니다가 가끔 눈에 띄기도 하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호를 특히 강하게 전달받았던 몇몇 학생들은 찡그린 채 잠시 혼란에 빠졌고, 교수 중 한둘은 만에 하나 흑마법사들이 여기까지 환청 마법으로 공격해 온 건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역시 곧 잊어버렸다.

새하얀 어린 토끼를 몇 주간 먹이를 주어 길들였던 생도도 신호를 강하게 전달받은 학생 중 하나였다. 그녀는 마침 교정의 오솔길을 가로질러 강의동에서 기숙사 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콧노래나 부르면서 걷던 그녀는 섬세한 빛살 같은 상념의 줄기에 거의 물리적으로 뇌를 후려쳐진 느낌을 받고 비틀거렸다.

가지 마.

안…… 하나도 안 아파…… 쉬면…… 마…….

들키기 싫…… 쉬면…… 그러면 다 나아…….

가지…….

열세 살짜리 생도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아무 나무 그늘에나 주저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미쳐 버린 건지, 아니면 흑마법사들의 환청 마법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는 건지 생각했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수도까지 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은 남쪽 검은 숲속에 숨어 살면서, 가끔 그 근처 마을들에만 먹거리나 소식을 구하러 나다닌다는데.

그러니까 아무래도 그녀는 미쳐 버린 게 틀림이 없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생도는 쭈그린 채 제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대로 눈을 꽉 감고 있다가 그녀는 몇 분은 흐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 환청 비슷한 감각은 사라져 버린 후였다.

‘뭐였던 거지.’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득 그녀의 시야 구석으로 뭔가가 얼룩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토끼네.”

생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녀가 알던 새하얀 꼬마 토끼는 아닌 것 같았다. 덩치는 비슷했지만, 언뜻 스친 색깔은 갈색이었다.

아니, 자색인가. 짐승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 토끼가 아닌가. 그와 동시에 등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마물인가?’

의문이 번득거렸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련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없었고, 따라서 마물을 실제로 본 적이 아직 평생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도는 머뭇거리며 키가 제 무릎까지나 올 만한 작은 짐승을 바라보았고 천천히 품의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

마치 그 움직임에 응답하듯이 짐승도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짐승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고, 토끼처럼 양순하게 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꺾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부엉이처럼 고개를 한 바퀴 완전히 돌려서 다시 그녀를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훑어보았고, 고양이처럼 야옹 하고 소리를 내며 목구멍으로는 개처럼 그르릉거렸다.

생도는 뒷걸음질 쳤다. 짐승은 앞으로 달려들 듯 몸을 움츠리며 쥐 같은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지만, 곧 풍뎅이 같은 여섯 개의 다리로 말처럼 다가닥다가닥 놀랄 만큼 빠르게 뛰어서 나무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생도는 품속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기만 한 채 한동안 몸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본 걸 교내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짐승이 아까 자기 머릿속에 들어왔던 이상한 생각들과 마찬가지로 환각에 불과한 것이었던지, 진짜로 눈앞을 지나갔던 건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감각만이 꺼지지 않고 몸의 구석구석을 타고 돌았고 그래서 그녀는 혈관이 온통 다 타는 듯이 괴로웠다.

‘예뻤어.’

그 새하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이 새하얗던 토끼와 마찬가지로 저 이채로운 짐승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몸 안에 악마가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성황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그녀는 머릿속에 이론 시간에 배웠던 타블로를 생생하게 떠올리려고 애썼고, 아까 보았던 동물의 신체 부위나 동작의 특징을 조각조각 따로 떼어 내어서 타블로상에 위치시켜 보았다. 개, 고양이, 풍뎅이, 토끼, 쥐, 부엉이, 말.

조각들을 그렇게 서로 멀찍이 떼어 내고 나니 원래 짐승의 모습도 머릿속에서 분해되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조금씩이나마 다시 핏속에 질서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생도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기숙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 환각이었을 거야.’

그녀는 자신을 달래듯이 생각했다.

‘이런 데에 마물이 왜 있어. 잘 먹고 잘 자고 나면 다 없어져. 내가 요즘 몸이 안 좋은가 봐. 아니면, 여기 마도 학원이잖아. 어느 바보 같은 교수가 무슨 환각 마법 실험이라도……. 그래, 그랬나 보다.’

그렇게 되뇌며 생도는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잊어버릴 수만은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린다에게 뒷일을 맡기고 수업에 가 있던 카를은 자기 머릿속에 침입한 생각이 누구 것인지 짐작하고 이를 갈았고, 린다는 요른이 있는 방에서 가능한 한 멀리까지 도망가서는 교정 한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죽여 버리고 싶어.’

그녀는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은 왜 저런 걸 지키는 거야. 왜 인간으로 키우려고 그렇게 애쓰는 거야. 죽여 버리고 싶다. 아버지가 꼭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린다가 곱씹는 동안 카를은 요른이 또 이런 금지 마법을 써 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벌을 주어야 하나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수업이 끝나면 바로 달려갔으리라. 그리고 요른에 열에 들떠 있든 말든 억지로 깨워서라도 코피가 날 때까지 뺨을 갈겨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

‘죽여 버리고 싶다.’

그도 생각했다.

‘프란첸 공작 부인은 괴짜시지.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애 아냐. 아무리 자기 어머니가 후원해 주는 애라지만, 저런 걸 왜 살려 두는 거야. 이럴 때마다 뭘 어떻게 벌을 주고 관리하라고. 이러다가는 막시도 지치고 우리도 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겠다. 그냥 실수로 어디 절벽에서 밀어 버리면 안 돼?’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그 괴물을 죽여 버리기는커녕 늘 싸고돈다. 카를은 막시가 작년 초에 이미 성황국 학원으로부터 조기 진학 제안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이유로 그 제안을 보류했던 건지도.

카를 같으면 황송해서 머리를 스무 번쯤 조아리고서라도 받아먹었을 기회였다. 카를은 교실에 앉은 채 혼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도 남부의 경사진 숲지, 막시밀리안은 안장 위에서 문득 시선을 들어 먼 곳을 응시했다.

성황국으로부터 전달받은 대로 제작해서 맞춘 전방부대용 경갑주를 걸친 채였다. 잎새의 복잡한 중층을 통과해 내려온 햇살이 그의 이마와 눈썹, 입술을 싸락눈처럼 적셨다. 다른 성기사들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혼자서 속도를 내어 달리는 중이었지만 그는 올바른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고, 더욱 빨리 닿기 위해 박차로 말의 배를 걷어찼다.

* * *

해가 저물고, 요른이 있는 기숙사실 안도 곧 어스름하게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필립은 욕실에서 얼룩진 수건을 빨고 있었다. 요른은 자다가 한 번씩 피를 토해 내느라 깨어나곤 했다. 열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두 시간 전에 그는 요른의 붕대도 갈아 주었다. 서랍에서 붕대 뭉치와 함께 상처에 바르는 약도 찾아냈던 덕이다.

‘약도 붕대도 고급품이야.’

필립은 입을 꾹 다문 채 생각했다.

‘이 애가 직접 구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닌데. 워낙 다치는 일이 잦으니까, 프란첸가에서 하인이라도 시켜서 준비해 준 건가.’

밖에 알리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준비해 준 물건들일 것이다. 필립은 수건을 짜면서 코웃음을 쳤다. 어쩌면 하인이 아니라 막시밀리안이 직접 전해 준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짐짓 다정한 척 물건을 넘겨주고, 아이가 반색하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징그러운 위선자 새끼.’

필립은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리며 물기를 짜낸 천을 욕실 창가에 널었다. 그동안 어둠은 더 짙어져 버렸다. 필립은 주문을 외워 욕실 벽에 걸린 램프를 밝혀 두고는 새 수건을 하나 집어 들고 나왔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필립은 침대 곁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눈치챘다. 침실 탁상 램프의 노란 불빛이 그의 윤곽을 도드라지게 비추어 냈다.

필립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지만 금방 털어 버렸다. 분명 필립 자신이 아까 켜 놓고는 잊어버린 것이리라. 막시밀리안은 잠든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필립을 보았고,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네. 애를 잘 돌봐 줘서 고마워.”

“남부로 파견 나간 줄 알았는데.”

막시밀리안은 딱히 답하지 않았다. 필립은 그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와 관자놀이에 착 달라붙어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몇 걸음 더 다가가자 막시밀리안에게서는 스산한 밤공기 내음과 더불어 축축한 말 털과 가죽 냄새가 났고, 갑주도 장갑도 아직 벗지 않은 채였다.

소식을 받자마자 행군 도중에 바로 여기로 달려온 것 같다고 필립은 짐작했다. 의심스러웠지만 모습으로 보아서나 시간으로 보아서나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필립이 뭐라 묻기도 전에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내가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돌아가 봐. 요른 곁을 지켜 줘서 고마워. 프란첸가에서 조만간 꼭 보상할게.”

“…….”

필립은 순간 그 진지하고 차분한 말투에 끌려들 뻔했다. 그러나 곧 웃으며 말했다.

“네가 때렸잖아?”

“응?”

“채찍질 말이야. 네가 한 거지?”

막시밀리안은 그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필립이 채근했다.

“왜 그랬어?”

“우리 집안의 일이야. 네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나도 관련된 일이니까 필요가 있지. 내가 이 애한테 접근했기 때문에 애를 때린 거야?”

“필립.”

막시밀리안이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전에도 얘기했지. 이 애는 내 동생 같은 애야. 동생을 괜히 때리겠어? 너도 동생이 있지? 둘이나 있잖아. 클로이랑 디디에.”

“…….”

“클로이 때문에 너는 2년 전에 네 부모님 상회에서 경영하는 잡화점 손님이랑 싸울 뻔도 했잖아. 그 손님은 내 지인이기도 해. 고티에 루이 드 오귀스탱 후작의 차남이지? 드 오귀스탱 후작은 세금 콜레기움에서 오래 일하셔서, 블랑쇼 상회에도 도움을 많이 주시던 분이고.”

막시밀리안은 페랑식 인명과 기관명을 능숙하게 발음하며 말을 이었다. 분명 아직 몸에 땀이 식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음성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공공장소에서 자기 아들에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큰 소리를 내면서 망신을 주는 바람에, 후작께서는 화가 나서 블랑쇼 가와 연을 끊겠다고 나오셨잖아. 하지만 너도 그때 동생을 위해서 그랬던 거지? 최소한 너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 집안의 차남이 네 열한 살짜리 여동생한테 손을 대려는 걸 봤다고 말이야.”

필립은 램프의 불빛이 자기 얼굴은 비추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막시밀리안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걸 후회했다. 언제 이렇게까지 조사를 다 마쳐 둔 건지 알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빙긋 웃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 눈에 이상하게 보이거나 좀 무리한 일도 하게 되잖아. 너라면 특히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

“……네가 한 일과 내가 한 일은 종류가 다른 것 같은데.”

“관점의 차이 아닐까.”

막시밀리안이 바로 받아서 말했다.

“조금 더 시야를 넓게 가져 봐, 필립. 아무튼 이런 얘기는 나중에 계속해도 좋을 거 같아. 원한다면 기꺼이 성으로 초대할 수도 있어. 지금은 이만 가 봐.”

“치료사를 불러올까?”

“아니, 내가 내일 새벽에 교수를 부르러 갈 거야. 지금은 이대로 자게 놔둬도 괜찮을 거 같아.”

“내가 떠나면 또 그 애한테 벌을 줄 건 아니고?”

“왜?”

“그 애가 나를 유혹해서.”

“얘가 널 어떻게 유혹해.”

“요른이라면 할 수 있지.”

필립이 응수했다.

“저 애라면 사실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잖아. 너야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었겠지.”

막시밀리안이 농담을 들은 듯이 웃었다. 그러나 필립은 막시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갔다. 마침내 필립은 자신이 사람의 감정이나 영혼을 흉내조차 내지 않는, 순수하게 가죽으로만 된 가면 같은 걸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 가장자리도 중심점도 없어서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기조차 힘든. 필립은 간신히 시선을 흐리지 않고 거기 그림자처럼 푹 파인 두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난 저 애를 페랑으로 데려가고 싶어.”

“그건 안 돼.”

“마물이 출몰하는 시대야. 저런 능력이 있는 애를 정말로 네 손아귀에 가둬 놓고 이런 식으로 썩힐 거야? 네가 뭔가 심리적으로…… 억제가 안 되는 거라면, 내가 아예 눈앞에서 거둬가 줄게. 그럼 결국 네게도 도움이 될 거야.”

“무슨 능력?”

그가 되물어 왔다. 필립은 그 광택 없는 음성에 찔려 잠시 눈을 감았지만, 곧 마지막 힘을 내듯 불렀다.

“막시밀리안.”

그 후 십 년도 넘게 필립은 이 질문을 후회했다. 그는 분명 다르게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답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저 애는 대체 뭐야?”

그러나 필립은 그때 그저 그렇게만 물었고, 막시밀리안은 가면을 구겨 마치 연극을 하듯이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필립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상대가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다만 기계처럼 정교하게 웃는 얼굴로부터 짐승에 가까운, 증오가 아니라 필요에만 의한 순수한 살의가 전해져 왔다. 막시밀리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필립, 난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무슨 의미야.”

“입학한 지 겨우 사 개월이잖아. 여기 입학하는 다른 애들은 집에서 가정 교사한테 웬만한 기본은 배우고 와. 하지만 너는 그럴 기회까지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혼자서 책을 뒤져 봤대도 누구한테 배우지는 못했겠지. 그런데도 벌써 불 마법과 공기 마법 일부를 쓸 수가 있잖아.”

말하면서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왼손 장갑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공기 마법보다도 불 마법을 더 잘 쓴다고 들었어. 위력은 크지 않아도 좌표 조정을 아주 잘한다면서. 물론 그래도 너는 아직 하급생이니까, 멈춰 있는 사물을 잘 겨냥할 뿐이고 움직이는 대상은 무리겠지. 그래도 실기 수업 시간에 그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면 자신감에 차서 조금은 오만해질 수도 있겠다.”

“……뭘 그렇게 조사를 열심히 했어.”

“그냥, 부러워서. 나는 마법을 못 써. 기사 생도니까 어쩔 수 없지. 알잖아. 기초 마법이라도 쓸 수 있는 기사는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야. 기사로서 수련할수록 마법을 쓰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니까 나는 아마 앞으로도 마법은 못 쓸 거야.”

알고 있다. 필립은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찡그린 채로도 생각했다. 마법사는 자기 몸 외부의 정령에게 청을 하여 그들의 힘을 빌려 쓴다. 이 청을 올리기 위해 그때그때 특정한 동작을 하고 주문을 외운다.

기사는 자기 자신의 육체에 깃든 정령들을 복종시켜 힘을 쓴다.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단련을 통해 몸을 구석구석 강화하고 통제한다. 이렇듯 정령을 활용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니 마법사는 기사처럼 몸을 쓸 수가 없고, 기사는 마법을 쓸 수가 없다.

막시밀리안은 왼쪽 장갑을 램프가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손 장갑은 굳이 벗으려는 거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너희들이 부러워. 이런 좁은 실내 공간에서는 나는 움직임이 막히기 십상이거든. 지금은 특히 요른이 이렇게 바로 옆에 누워 있기도 하니까, 이 애 안전에 신경 쓰다 보면 한계가 있어. 하지만 마법은, 특히나 위력과 좌표 조정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좁은 곳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오히려 이점이 될 수도 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지금이라면 너도 나를 꽤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필립은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

“무슨 오해가 있나 싶네. 네게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당연히 대화로 풀어야지. 널 해할 생각은 전혀 없어. 게다가 상황이 어떻든 너와 내 실력은 댈 게 못 돼. 네가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건 지금 당장 목을 칠 수도 있다는 건 사실 너도 잘 알잖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막시밀리안이 진심으로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이래 봬도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인걸. 하지만 필립, 너는 다르지.”

그가 눈이 다 감기도록 생긋 웃었다.

“너는 늘 투기를 숨겨 왔잖아. 린다와 카를도 오늘 오후에 너랑 다퉜다면서? 둘이 요른의 편지함에 내 앞으로 서신을 남겨 뒀더라. 네가 오늘 밤 나랑 싸웠다고 해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거야. 게다가 너는 전력이 있잖아. 페랑에서 드 안톤 후작의 차남에게 단검까지 들이댔던 전력이 말이야. 욱하면 피가 올라서 폭력적인 수단에까지 손을 대는 성격은 고치는 게 좋을 거야, 필립. 왜냐하면…….”

막시밀리안이 한숨을 쉬고는 마저 말을 이었고, 왼쪽 손의 손가락들을 차례로 구부리며 어떤 준비 동작 같은 걸 해 보였다.

“넌 이제 마법도 조금이나마 쓸 줄 알잖아. 불 마법은 주로 공격 계열이고. 그런 걸 쓸 줄 아는 사람이 울컥해 버리면 자칫 상대가 정말로 심하게 다치는 수가 있어.”

“무슨 말…….”

“물론 너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설마 나를 정말로 해할 생각이었겠어? 단초를 제공한 건 나 아닐까 싶어. 내가 그냥 움직이기만 한 걸 너는 위협으로 느끼고 반응해 버린 거지. 넌 워낙 좌표며 위력 조정을 잘하니까, 적당히 경상만 입힐 자신도 있었을 테고. 내가 섣불리 피하려고 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너를 해칠 생각도 없고 그럴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아.”

“그렇다 해도 죄는 커, 필립.”

막시밀리안은 혼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었다.

“교훈 삼아서 앞으로는 처신을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어렵게 들어온 학원인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퇴학 처분을 받으면 너무 서럽잖아. 하지만 본인 책임이니까 어쩔 수도 없고.”

막시밀리안은 말을 마치고 왼손을 허공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동시에 필립은 그가 또렷하고 짧고 빠르게 문장 두어 개를 발음하는 걸 들었다. 정령께 청하는 동작과 주문.

필립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마법까지 쓸 줄 아는 기사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 그것도 한 세대가 아니라 몇 세대를 통틀어 몇 명 정도다. 생도 시절부터 마법을 쓸 줄 알았다는 기사는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래도.

‘눈치를 챘어야 했어.’

필립은 뒤늦게 생각했다. 그의 뇌리에 또렷한 장면이 지나갔다. 탁상 램프.

마도 학원의 기숙사 방에 있는 구비된 조명은 보통 마법으로밖에 켤 수가 없다. 학생들더러 평소에도 연습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갖춰 둔 것이다. 그러나 필립 자신은 아까 침대 옆의 램프를 켜 두지 않았다. 요른은 자고 있으니 그가 켜 놓았던 것일 수도 없었다.

필립은 막시밀리안이 방금까지 자신에게 늘어놓았던 말들을 되새겼고 단번에 이해했다. 그러나 필립이 뭘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주홍빛 불꽃이 막시밀리안의 얼굴 왼쪽 반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신음 하나 내지 않은 채 자신이 불러들인 불꽃을 견디고 있었다. 왼쪽 이마 위의 머리카락과 눈썹은 흔적도 없어졌고, 눈꺼풀이 우그러져 눈을 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코가 뭉그러지면서 비강도 일부 녹았으며 뺨이 형체가 변하고 입술도 오그라들면서 왼쪽 입꼬리가 서로 들러붙었다.

불꽃은 곧 사그라들었다. 막시밀리안은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침대 옆 의자를 약간 끌어당겨 그 위에 똑바로 등을 펴고 앉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남은 오른쪽 눈으로 필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역시 오른쪽 뺨으로만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결국 못 이기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필립의 눈앞에서 막시밀리안의 남은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려 갔다. 필립은 앞으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필립이 자신의 목이나 턱께를 매만지며 이리저리 훑어보는데도 막시밀리안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고, 헐떡이면서도 가벼운 미소를 품었다. 필립은 이를 악물었다.

‘가야 해.’

가서 치료 마법사를 불러와야 한다.

필립은 판단을 내리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프기도 엄청나게 아프겠지만 막시밀리안은 지금 숨을 잘 쉬지 못하고 있다. 비강도 거의 다 막혔는데 열기를 들이마셔서 기도도 망가졌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사정이 넉넉한 교수나 강사들은 학원 밖의 자택에서 지내는 게 보통이니, 지금 강사 기숙사에 남아 있는 자들은 경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폰 프란첸가의 독자다. 일단 왕국 마도 학원의 강사쯤 되는 자라면 누구든 최소한 응급 처치는 해 줄 수 있으리라.

‘……내가 내 무덤을 파러 가는군.’

“기다려. 회복 마법사를 불러올게.”

필립은 알면서도 막시밀리안을 안심시켜 주려는 듯이 또렷하게 전했고, 걸음을 재촉해서 복도로 달려 나갔다.

막시밀리안은 자세를 똑바로 유지한 채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숨을 아끼려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고 고개만 살짝 왼쪽으로 튼 채였다. 오른편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자의 몸이 자신의 시야에서 아예 벗어나지는 않게, 그러나 만약 그가 깨어난다 해도 그쪽에서는 자신의 왼쪽 얼굴을 볼 수는 없게끔.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막시밀리안은 오른쪽 뺨에 와 닿는 시선을 느꼈다. 아이가 자신의 기침과 가쁜 숨소리, 타는 냄새 때문에 깨어난 건지, 열에 들떠 있느라 깊이 잠들지를 못해서 자연스럽게 눈이 뜨인 건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산소를 구하느라 벌리고 있었던 입술을 다시 조용히 다물었고, 고개는 움직이지 않은 채 시선만 그쪽으로 돌렸다. 오른쪽 입꼬리를 뺨으로 끌어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고 어두운 오른쪽 눈동자로 그 창백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두꺼운 장갑을 낀 오른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더 자.

막시밀리안이 기침과 숨을 누른 채 입 모양으로만 말하자, 요른은 좋은 꿈을 꾼 듯이 행복한 표정이 되더니 금방 다시 눈을 감았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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