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30)

2.

요른은 흘끔흘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기숙사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기에 요른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식당에 들를 때마다 늘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여기가 아니면 밥을 구할 데가 없었다. 학교 바깥으로 나갈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공동 부엌을 사용하는 건 식당보다도 훨씬 더 무서웠다.

요른은 재게 걸어서 식대 쪽으로 다가갔다. 식대 중간에는 따뜻한 요리가 담긴 접시들이 가득 놓여 있었지만 요른은 맨 끝 쪽으로 가서 치즈와 햄, 얇게 자른 오이를 끼우고 버터를 바른 샌드위치 하나만 골랐다. 밖에 갖고 나가 먹기가 쉬운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샌드위치를 종이에 싸서 품에 안은 채 요른은 얼른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뒷문으로 나와서 조금만 외곽으로 돌아가면 관목 숲이 있다. 요른 정도의 체구라면 덤불에 푹 파묻혀 버리면 밖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는 얼른 숲 안쪽으로 들어가서 미리 살펴 두었던, 가장 보드라운 덤불에 등을 묻고 무릎을 구부린 채 웅크려 앉았다.

그러자 더는 아무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벌레 소리와 새소리만 평안한 침묵처럼 요른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 작은 생물들은 그가 뭘 하든 전혀 상관하지도 이상하게 쳐다보지도 않는 듯했다.

‘숲에서 살고 싶다.’

요른은 속삭이듯이 생각했다.

‘숲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나도 아무한테도 피해 주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아무도 없으면 아무한테도 피해를 줄 수가 없으니까. 거기서는 나도 그냥, 보통 사람……. 보통 생물처럼.’

나 같은 것도 숲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요른은 달콤하게 되뇌었다. 이곳에 숨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그의 머릿속에 꼭 선연하게 밝혀지는 장소가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다들 무서워하면서 어두운 얼굴로만 입에 올리는 곳이지만, 요른의 안에서 그곳은 늘 무척 살가운 꿈처럼 반짝이곤 했다.

요른은 가끔 검은 숲에 가서 사는 상상을 했다.

대륙 남부의 검은 숲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요른도 사실 2년 전 특별 견학 때 먼발치에서 딱 한 번 보았던 게 전부고, 나머지는 소문으로만 접했다.

단, 검은 숲속에 마물이 가득하다는 것만은 항설이 아니라 검증된 사실에 가깝다. 정상적인 동물은 한 마리도 없고 마물만 득시글거린다고 한다. 그리고 식물들도 다 기괴하게 변형된 채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마물이란 게 여러 동물이 섞인 것이듯, 그 ‘숲’도 온갖 식물들이 섞인 거라고 말이다.

보통의 숲에서 나무들은 거리를 두고 하나하나씩, 그것도 위로만 곧게 자라난다. 하지만 검은 숲에서 나무들은 위로만 자라는 게 아니라 동시에 옆으로도 한없이 성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 도달한다. 그들은 서로의 가지를, 줄기를, 몸통과 잎과 뿌리와 꽃들을 서로 칭칭 얽고 감고 관통하고 겹치고 으직으직 껴안아 부수며 한없이 섞여 들다가 결국 질척한 거미줄처럼 한 덩어리로 엉겨 꿈틀거린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식물들이 서로 섞여 든 넝쿨 거미줄 전체를 사람들은 ‘검은 숲’이라고 부른다.

요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법 이론 입문 시간에 배웠던 타블로를 떠올렸다. 막시가 한숨을 쉬는 걸 수십 번도 더 들어 가며 겨우겨우 외웠던 식물학 기본 타블로를.

요른은 책에 있던 박달나무와 벚나무, 단풍나무 도안을 각각 떠올렸다. 타블로상의 위치로 보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수종이다. 그러나 요른은 그 셋이 얽히고설켜 종국에는 완전히 새로운 한 그루 덩굴나무가 되어 꿈틀대는 모습을 상상했다.

요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 나무를 껴안은 채 자신의 몸도 거기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그런 곳에서라면 나도 분명 평범한 생물처럼 살 수 있을 거야.’

아니, 검은 숲을 기준으로 치면 그는 실제로 평범한 생물일지도 모른다. 반쪽짜리 마물이 뭐든 거기서는 아무 상관도 없을 거다. 그러니 자신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돌아가?

요른은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머릿속 어딘가가 둔중하게 아파 왔다. 뇌 전체가 큰 북이 되어 울리는 것처럼.

그 리듬에 맞추어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몸이 붕 떠 버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리에 걸려서 위로 확 잡아당겨지는 듯이.

‘또 이거야.’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실수다. 검은 숲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면 이렇게 되어 버린다.

시야가 순식간에 아찔해지면서 등에 식은땀이 돋았다. 반사적으로 손발을 허우적거렸지만 땅에 닿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물에 빠져 밧줄이라도 잡으려고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막시…….

‘막시밀리안…….’

요른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빌었다.

‘막시, 미안해, 미안해. 다시는 이런 생각 안 할게.’

요른은 필사적으로 빌었다.

‘잘못했어. 나 다른 데 안 갈 거야. 여기 있을 거야. 여기서 공부해서, 학원을 졸업해서, 네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가 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나 좀 잡아 줘. 못 가게, 잡아 줘.’

그런 목표가 없었더라면 요른은 진작에 자살해 버렸거나 최소한 자퇴를 하고 빈민가 뒷골목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걸어서라도 검은 숲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막시밀리안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언젠가는 꼭 그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에 머물렀다.

학원 학생 모두에게 그 징그러운 모습만으로도 피해를 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점을 늘 죄스럽게 느끼면서도 요른은 끈질기게 수업에 출석했고 매번 시험을 치렀다. 꼭 졸업만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막시에게 좋은 마검도 만들어 주고 회복 마법도 써 줄 수 있는 마법사가.

‘우리 요른.’

빌던 끝에 마침내 막시밀리안의 목소리가 뇌리에 선명하게 울렸다.

‘그래. 착하다, 우리 요른.’

막시의 장갑 낀 손이 머리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붕 뜬 것 같던 감각이 천천히 잦아들면서 중력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요른은 마침내 질끈 감고 있었던 눈을 뜨고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얌전히 덤불에 파묻혀 앉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손으로 새삼 땅을 짚어 보며 그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숲은 정말 아름다울 거야. 들어가 본 적도 없으면서도 요른은 거의 확신했다. 거기로 숨어들면 요른은 자기 자신과 아주 비슷한 것들에 둘러싸여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진심으로 검은 숲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막시가 훨씬 더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한 바로 그 막시밀리안이 곁에 있어 준다.

요른은 덤불에 파묻혀 무릎을 끌어안은 채 혼자 배시시 웃었다. 검은 숲으로 가면 요른은 물론 타고난 분수에 딱 맞는 것들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막시는 원래대로라면 요른 같은 괴물 괴물은 감히 꿈꿀 수도 없는 보석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데 어디 다른 데로 도망쳐 버릴 수는 없다. 그건 정말이지 손해를 보는 짓거리다.

요른은 자신이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배고픔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종이에서 빵을 끄집어내 한입 깨물었다.

‘어……?’

요른은 손으로 배를 누른 채 토기를 억눌렀다. 느낌이 이상했다.

배가 많이 고픈 건 확실했다. 어제 저녁밥은 얻어맞느라 도로 다 토해 버렸고, 오늘은 늦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때가 되자 너무 배가 고파서 식당으로 기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배가 그렇게 고픈데도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명치 부근이 너무 아팠다.

요른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빵조각을 잔디밭에 도로 토해 냈다. 토사물에 뭔가 불그죽죽한 게 섞여 있었다.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는 내리 기침을 했다. 목으로 뭔가가 울컥 넘어왔다.

소매로 입가를 닦아보자 피가 묻어 나왔다.

요른은 속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제 카를에게 차이다가 위장을 다친 것 같았다. 내버려 두면 상태가 점점 악화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으니까.

반년 전쯤의 일이다. 요른은 그때도 얻어맞다가 배를 차여서 먹었던 걸 풀밭에 도로 다 토해 내 버렸다. 학생 중 한 명이 요른더러 토사물을 도로 주워 먹으라고 시켰다. 자기가 토한 건 자기가 치워야 한다는 이유였다. 요른은 엎드린 채 성실하게 핥아먹었다. 하지만 독초가 섞여 들었던 모양인지 요른은 이후 열흘쯤 기숙사 방에 처박혀 심하게 앓았고, 간혹 시커먼 피도 토해냈다.

그때를 돌이키자 요른은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른의 몸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때문에 회복 마법사들 중에서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 그를 치료해 줄 수 있다. 요른은 막시가 자신을 치료해 줄 수 있을 만한 교수를 찾아 데려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교수는 요른의 몸을 고루 살피고는 상처들이 생긴 연유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물어 왔기 때문에, 막시는 제 친구들을 보호해 주느라 꽤 애를 먹었다.

막시는 그때 요른에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돼.’

요른은 고개를 저었다.

‘말 못 해. 내가 어제 금지된 마법을 써 버려서 막시는 이미 화가 나 있어. 거기다가 이 얘기까지 하면…….’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요른은 막시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독초를 먹고 피를 토한 게 고작 반년 전의 일이다. 또 이렇게 아파 버리면 막시는 용서해 주지 않을 거다.

그때 막시는 실제로 벌을 주지는 않고 말로만 경고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행할 거다. 막시는 자신이 예고한 벌은 그대로 집행하고야 마니까.

요른은 그걸 받고 견딜 자신은 없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죽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막시가 그때 선포한 벌은 요른이 지금까지 받아온 그 어떤 벌과도 비교할 수 없이 엄중하고 무서웠다.

요른은 한참 웅크려 앉은 채 고민했다. 그리고 막시에게 속이 아픈 걸 숨기기로 결정했다.

막시를 속여야 한다고 생각하자 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그런 벌을 받는 것과 속이는 것, 둘 중에 고르라면 어쩔 수가 없었다. 요른은 그저 배 속이 자연스레 나아지길 빌었다. 알아서 치료되어 준다면 어차피 막시를 속이는 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속이 좀 나아질 때까지는 죽이나 묽은 스프만 먹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빵은 아깝지만, 여기 풀숲 한구석에 버려 두고 가면 동물들이나 벌레가 알아서 먹어 치워 줄 것이다. 

빵을 놓아둘 만한 곳을 눈으로 찾으며 몸을 일으키다가 요른은 인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가 덤불에 도로 파묻히며 넘어져 버렸다.

“미안, 미안해.”

마도 학원복 차림의 키 큰 학생이 말하면서 얼른 요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 소리 내서 인사하면 놀랄까 봐 조용히 다가온 건데, 더 놀라게 해 버렸네.”

그의 짙은 올리브색 눈동자가 요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침착한 목소리, 단정하게 목 뒤로 묶은 결이 고운 갈색 머리. 요른은 그를 알아보았다. 아까 강의실에서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했던 필립 어쩌고라는 학생이다.

‘맙소사.’

요른은 경악했다.

‘내가 아직도 마법을 쓰고 있다고?’

필립이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며 요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요른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서 덤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며 숨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안은 채 마법을 멈추려고 노력해 보았다. 자신이 머리에서 머리로 파고드는 마법을 쓰고 있는 거라면, 어딘가 새어 나가는 틈을 막으면 멈추지 않을까.

하지만 필립은 물러서기는커녕 코앞까지 손을 내밀어 왔고, 요른은 절망했다. 그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과자 몇 개를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에 싸서는 손에 받쳐 들고 있었다.

“이거 조금만 먹어 볼래? 지금 먹기 싫으면 가져가도 좋고.”

“아, 아아…….”

요른은 머리를 틀어쥔 채로 고개를 마구 저어 대기 시작했다.

“안, 안 돼.”

필립에게 답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그만둬, 제발, 더는, 아안안돼.”

“요른.”

필립이 자세를 더 낮춰 요른과 시선을 맞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괜찮아. 이상한 거 안 들어 있어. 진짜야. 하나만 먹어 봐.”

요른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눈을 조심스럽게 들어 필립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눈이 잠깐, 아주 잠깐 마주쳤다. 그러자 필립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진짜 웃음이다. 요른은 생각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그는 요른을 향해서 정말로 따뜻하게 웃어 주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간혹 그러듯이.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조종했어.’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요른은 이를 꽉 악물었다.

요른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온갖 끔찍한 장면이 스쳐 갔다. 세상이 뒤바뀌어 버렸다. 자신이 마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요른에게 다가와서 손에 과자를 쥐여 주었다.

그들은 요른의 이름도 다정하게 불러 주고, 매일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도 해 주었다. 강의실에서도 옆에 나란히 같이 앉았고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함께 기숙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는 각자 좋아하는 요리를 집어 와서 나눠 먹었다. 숙소로도 모두 함께 걸어서 돌아갔고, 잘 자고 내일 또 만나자고 인사를 하고 나서야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 요른에게 상냥하게 굴었고 아무도 더는 그를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다.

세상이 다 가짜가 되어 버렸다. 요른이 사람들을 다 머릿속에서부터 인형처럼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홀려서 괴물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막시밀리안만은 그런 세상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전과 똑같이 요른에게 웃어 주었고 간혹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다, 우리 요른, 하고 낮고 따스한 미풍처럼 말해 주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 그건 다 가짜라는 거였다. 요른이 막시의 머릿속을 주물러서 빚어 낸 가면.

전에는 막시밀리안이 요른에게 웃어 준다면 그건 다 진짜였다. 우리 요른, 하고 불러 주면 그건 진짜였다. 사람들이 요른을 욕하고 때리는 게 다 진심이고 진짜였던 만큼 막시의 다정함도 진짜였다. 하지만 요른이 조절을 못 하고 금지 마법을 줄줄 써 대자 막시의 웃는 얼굴도 가짜가 되어 버렸다.

상상하다가 요른은 결국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필립이 놀라서 과자를 가방에 도로 넣고 요른에게 손을 뻗었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안, 돼, 오지 마.”

요른이 숫제 엉엉 울면서 뱉어 냈다.

“싫어, 미안, 죄죄송해요. 다당신, 필립, 가가짜야.”

“응?”

필립이 갸웃하면서도 반가운 듯이 웃었다.

“내 이름 기억하고 있네? 고마워.”

“죄죄송, 잘못, 했어요, 이거, 다당신이 아아니에요, 제제가 하는 짓이에요.”

요른은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 거, 다당신이 아아니야, 제제가 당신 머머릿속, 조종, 해서, 저한테 오오게 마만들었, 어요. 과자도…… 죄죄송. 저저는 마마법 조절을 모못, 해요. 제제발, 가가 주, 세요…….”

“요른?”

필립이 침착하게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네가 날 조종한다고?”

“제제가, 잘못, 죄죄송해요…….”

요른은 헉헉대며 울고 있었다. 말을 더듬는 애가 울기까지 하니 솔직히 필립도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는 먼저 애를 좀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필립은 조심스레 한쪽 손을 바닥으로 뻗어 요른의 발목께를 건드렸고, 아이가 그쪽 손에 정신이 팔려 흠칫하는 사이에 얼른 어깨에 다른 쪽 손을 올렸다.

아이가 필립의 손에 한쪽 어깨가 붙잡힌 채 얼어붙었다. 그래도 차마 뿌리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저항을 못 하게끔 길들여진 탓이다.

“괜찮아. 괜찮아.”

필립은 속삭이면서 천천히 다른 쪽 손도 올려서 요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른은 벌벌 떨면서도 움직이지는 못했다. 필립은 마침내 요른의 뒤통수와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덤불에 푹 파묻혀 있던 작은 몸을 가만히 품에 안았다.

그 비쩍 마른 몸은 너무도 쉽게 가슴팍에 끌려들어 와서 갇혀 버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구겨져 버릴 것 같은 새하얀 종이 인형을 안아 든 느낌이었다. 그나마도 심장이 토끼처럼 파득파득 뛰느라 제풀에 찢어져 버릴 듯이 경련을 일으키는 종이 인형을. 필립은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식들은 이런 애를 그렇게 구타했나.’

그러나 곧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방관했던 나도 똑같아.’

요른을 꼭 안은 채 한동안 가만히 등을 쓸어 주다가 필립은 문득 그의 몸이 지나치게 따뜻하다고 느꼈다. 어린애들은 체온이 높긴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다. 그렇게 맞고 다녔으니 다쳐서 어딘가 염증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립은 팔을 풀고 조심스레 그 열한 살짜리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역시 열이 제법 높았다.

필립은 요른의 얼굴을 살폈다. 지진 자국 같은 게 얼굴 한쪽에도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열이 날 만한 종류의 상처는 아니다. 분명 옷 아래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훨씬 더 심하게 구타했으리라. 만약 배를 차 댔다면 이 애는 내장을 다쳤을 수도 있다.

필립의 가슴 안에 불씨 같은 것이 일었다. 분노에 가까운 슬픔이 피어오르는 걸 억누르며 그는 겨우 조용조용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너 열이 꽤 높아.”

“자, 잘못했어요.”

“그게 아니라…… 일단 병동으로 가자, 요른. 거기서 계속 얘기하자.”

필립은 요른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며 일어섰다. 하지만 요른은 이번에는 거의 자지러지다시피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뿌리치고는 필립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필립이 당황해서 내려다보는 사이에 손을 비비며 빌기 시작했다.

“아안돼, 제발, 제제발 가 주주세요.”

“너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아. 배 속을 다쳤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치료하러 가자.”

“아아니야!”

요른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저 배 아안 아파요, 머머멀쩡해해요. 지지진짜로.”

요른은 말하다가 필립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움찔하고는 다시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남에게 대든 꼴이 되어 버렸기에 겁에 질린 탓이다.

“가, 가 주세…… 잘모못했어요. 제가 저정말, 죄죄송해요…… 가 주, 주세요.”

“…….”

필립은 아이의 등을 굽어보고 있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일찍 결정할걸.’

그는 요른을 너무 오래 내버려 뒀던 걸 후회했다. 물론 처음부터 끼어들 입장은 되지 못했다. 지금도 그건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주, 아니, 단 며칠이라도 일찍 개입할 수는 있었다.

필립은 지난 넉 달간 이 애가 여럿에게 팔을 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걸 수도 없이 보았다. 복도에서도 심심찮게 학생들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실수인 양 넘어진 아이의 손을 밟거나 허리를 한 번씩 차고 가고, 보통 사람 같으면 제 입이 더러워질까 봐 무서워서 꺼릴 만한 모욕을 면전에 퍼붓는 걸 마치 일상처럼 목격했다. 그리고 그 애가 그걸 모두 당연한 제 몫인 양 고개를 푹 숙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보았다.

그러나 필립은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은 갓 유학을 왔으니 학원 분위기에 대해서도 이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조심스러웠다. 어린애를 저렇게까지 다룬다니 무슨 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문화 차이에 해당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무엇보다 그는 정의의 사도 같은 역할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요른의 편을 들다가 자기도 자칫 비슷한 꼴이 되어 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비싼 돈을 들여 입학한 곳에서 필립 자신까지 요른처럼 핍박받으며 아무것도 못 하는 입장이 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필립은 학교에 다니면서 천천히 요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요른이 평민 중에서도 바닥 출신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괴롭혀 대는 진짜 이유가 뭔지 감이 왔다. 그리고 필립은 무엇보다 실기 수업 때 요른이 마법을 쓰는 모습을 접하면서 전율을 느꼈다.

‘이 애는 천재다.’

넉 달 만에 필립은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검에 있어 막시밀리안이 천재인 만큼 마법에 있어서는 요른도 같은 수준의, 아니, 어쩌면 그를 넘어서는 아주 특별한 천재라고.

하지만 이 학원에서 요른은 막시밀리안과 완전히 반대로 대우받는다. 그 출신과 모습 때문에 오히려 그 재능마저도 괴물 취급받고 천대받는다.

그로쉔 왕국은 이 정도 재능을 이렇게까지 학대할 줄밖에 모른다.

‘섣불리 타국의 문화를 판단하지는 말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차별은 역시 자국에 손해지.

필립은 속으로 차갑게 웃으며 페랑을 떠나오기 전 자택의 살롱에 둘러앉아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부모님을 포함해 시민 사업가 협회 회원들, 그리고 소위 진보계 귀족에 속하는 시몽동 후작 부인이 참여한 자리였다. 2주 전, 필립은 마침내 요른에게 접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어머니와 후작 부인께 편지를 써 보냈다.

<어머니는 그로쉔에는 신분이나 가문 때문에 썩어 가는 인재가 많을 거라고 하셨지요. 다른 분들도 동의하셨고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금방 찾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엄청난 싹을 말이에요. 제가 꼭 이 애를…….>

어머니는 반색하며 아이를 꾀는 데에 쓰라고 고급 과자까지 한 상자 보내왔다. 그게 도착한 게 나흘 전의 일이다. 그 과자를 가방에 넣고 오늘 아침 필립은 기숙사 정원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요른을 따라갔던 것이다.

요른이 범재나 그 이하였더라면 필립은 이 애가 맞아 죽든 말든 끝까지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립이 이 학원에 들어온 건 스스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공부는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함에 불과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능력은 있지만 그늘에 가려진 자들을 찾아서 부추기고 연을 맺어 두기 위해 그로쉔의 수도에 왔다. 때가 무르익으면 협조를 부탁할 수 있게끔.

페랑의 사업가 협회는 큰 계획을 갖고 있었고, 대륙 각지에서 인재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필립도 클로이 상회 주인 부부의 장남으로서 그에 일조하기 위해 여기 입학했다.

필립은 요른이 천재 중에서도 무척 특별한 천재이며, 연을 맺어 두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금 당장 페랑으로 빼돌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라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 튀는 행동을 하는 걸 감수하고 그에게 접근한 것이다. 지금 빼돌리지 않으면 이 학원에서 요른은 점점 망가져 가기만 할 테고, 어쩌면 그 재능조차도 시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이 애를 얼른 페랑으로 보내야 한다. 그다음에는 후작 부인과 협회원들이 약속대로 잘 도와줄 것이다.

필립은 말하자면 요른을 투자 가치가 있는 자산으로 여기고 접근한 거였다. 그러나 이왕 다가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자 그의 안에서 그때까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러느라 린다네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불퉁거리고 말았다.

필립은 그동안 요른에게 늘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입하고 있었다. 그들 둘은 마도 학원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한 평민이었다. 필립의 입지가 훨씬 낫기야 했지만, 둘 다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제약에 묶여 있다는 건 똑같았다. 겉으로 방관했다고는 해도 마음속으로 동정하고 분노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으로만 치면 필립은 언제나 그 애를 지켜 주고 싶었다. 다만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들을 생각해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교정에서 그 새하얀 아이의 작고 깡마른 모습이 눈에 스칠 때마다 심장이 쿡쿡 쑤시는 걸 눌러 참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그는 자신이 위선자라고 느끼면서도 되뇌었다.

‘이제부터는 다 괜찮을 거야. 얼른 친해져서, 이 애가 나한테 마음을 조금만 열어 주면 바로 설득해야지. 페랑으로 가서 우리 협회의 계획에 참여하라고. 거기서는 이 애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가 있어. 주변에서도 사랑받고 인정받으면서.’

요른은 여전히 필립의 발 앞에 엎드린 채 떨고 있었다. 필립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애의 거의 뼈만 남은 손을 쓰다듬었다. 요른이 흠칫하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필립이 달래듯이 속삭였다.

“요른, 요른. 괜찮아. 그럼 의무실 가지 말자. 우리 지금 여기서 잠시만 얘기하자.”

“가, 가 주세…….”

“응. 네가 원한다면 갈게. 하지만 먼저 얘기해 줘. 설명해 줘.”

필립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왜 얼른 가 버려야 하는지 설명해 줘. 납득이 되면 가 줄게.”

“…….”

“천천히, 아주 천천히라도 좋아. 기다릴게. 설명해 줘. 네가 뭘 잘못했다는 거…… 아니다. 이렇게 묻자. 네가 날 조종했다는 게 무슨 뜻이야?”

요른이 창백한 은빛 눈동자로 필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답은 돌려주지 않았다.

필립은 아까 강의실에서의 상황과 요른이 했던 말, 그리고 학대받는 아이들 특유의 죄책감을 머릿속에서 서로 이리저리 연결해서 스스로 답을 내보려 애썼고, 그러다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수가 있을까. 그는 주저하다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날 마법으로 조종해서 너한테 과자를 주게 만들었다, 이런 거야? 내가 내 의지로 행동한 게 아니라?”

요른의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네, 네.”

아이가 엎드린 채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여 댔다. 정답이었나 보다. 필립은 탄식하듯이 한숨을 내쉬었고,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을 참았다.

‘얘는 어떻게 그런 신기한 상상을 할 수가 있지.’

그는 이 열한 살짜리의 사고 경로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애는 누군가가 자기 같은 것에게 스스로의 의지로 관심을 보여 올 리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누가 다정하게 대해 온다면 자신이 마법으로 상대의 마음을 조종해 버린 것일 수밖에 없다, 다 자기가 저지른 짓이고 자기 잘못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렇다 쳐도 특이해.’

마법으로 타인을 조종한다는 부분이 아무래도 너무 특이하다. 괴롭힘당하는 애가 모든 걸 다 자기 탓으로 돌리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그 내용이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건 흥미롭다.

요른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이긴 하지. 필립은 곱씹었다. 저 애는 실제로 소위 유혹 마법이라고 불리는 계열의 술수를 몇 개쯤 쓸 줄 아는 건지도 모른다.

필립도 사냥터나 유흥가에서 이용되는 마법 몇 가지를 접해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공기의 정령에게 청해 미끼의 냄새를 멀리까지 퍼뜨린다거나,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원래는 서로 섞이기 힘든 여러 성분을 한데에 섞어서 흥분제를 제작하는 식이다. 그런 마법들은 공식 명칭과 상관없이 속칭 ‘유혹 마법’으로 통한다.

요른도 뭔가 그런 류의 마법을 쓸 줄은 알기 때문에, 그걸로 자신이 남을 조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필립은 다시금 조심스레 말을 골라 물었다.

“그래. 네가 날 마법으로 조종했구나. 그게 어떤 마법인데?”

“아아아시잖, 아요, 그그금지, 마마법이요.”

“음…… 흑마법을 뜻하는 거니? 금지 마법이라면 그거밖에 모르겠는데.”

“머머리, 아, 새생각을…….”

요른이 자기 머리와 필립의 머리를 번갈아 손가락질해 보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제제 머리랑, 다당시신 머머리를 연결, 하는 마마법, 이요. 새생각을 전달.”

‘아이고.’

필립은 결국 그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머리에서 머리로 생각을 전한다고?”

“예, 예예.”

“그래. 너는 남의 생각을 읽고 또 네 생각을 남에게 전할 수도 있다는 뜻이구나. 그래서 네가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와서 나를 조종했다고?”

“네, 네.”

요른이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리며 답했다. 필립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으면서도 이 애가 너무 가엾다고 느꼈다. 어린애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이 애는 남이 자기 의지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준다는 걸 믿느니 차라리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버리는 쪽을 택했던 거다. 요른이 덜덜 떨면서 빌듯이 몇 마디 덧붙였다.

“쓰쓰면 안 되는 거 아, 아는데, 저저는 써, 써 버리곤 해요. 아안 써야 하는데, 조절을 자잘 못해서…… 죄죄송, 해요.”

“요른.”

필립이 가만히 달랬다.

“그건 아니야. 네가 지금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말은 해 줘야겠다. 생각을 읽거나 전달하는 마법 같은 건 불가능해. 이 대륙의 아무도 못 해. 성황 폐하도 못 하시고 심지어 흑마법사들도 못 하는걸. 그러니 네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그건 네가 쓰고 싶어도 절대 못 쓰는 마법이야.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아아니야, 그건…….”

“그런 마법은 없어.”

요른은 필립이 딱 잘라 말하는 걸 들었다. 그리고 필립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페랑이라는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했지.’

요른은 생각했다.

‘그 나라에서는 뭔가 잘못된 걸 가르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내 마법일까? 내가 이 사람이 이렇게 내게 거짓말을 해 주게끔 조종하고 있는 거 아닐까.’

요른은 두 번째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더 울적해졌다.

‘안 되겠구나…….’

필립이 아까 설명해 달라고 했을 때 요른은 희망을 얻었다. 자신이 마법을 쓰는 걸 억제할 수는 없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알아듣게 설명해 주고, 그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 일깨워 주면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설명을 해 보니 이런 방법은 의미가 없는 듯했다. 요른은 남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상대에게 설명을 해 주면서도 동시에 그가 자기 설명을 믿지 않게끔 조작할 수도 있다. 심지어 필립이 거꾸로 요른 자신에게 이런 거짓 설명을 해 주게끔 조종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요른은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필립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기 마음 한편에서 가느다란 의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고, 스스로 당황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필립은 수학이나 음악 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읽었다. 그들은 말과 글로 배운 적이 없어도 숫자나 음들 사이의 관계를 머릿속에 타고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필립은 요른도 마찬가지로 타블로를 머릿속에 타고나다시피 한 부류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말로 표현하거나 배우기를 어려워하는 거라고.

마법에는 필립이 알기로는 아직까지는 성황 본인을 제외하면 이런 종류의 천재는 나타난 적이 없었지만, 다른 분야의 예를 들어 보면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요른이 주문 없이 마법을 쓰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생각을 머리에서 머리로 직접 전하거나 읽어 낼 수 있다는 건 이와도 완전히 다른 얘기다. 필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건 완전히 종류가 다른 마법이잖아. 아니, 이미 마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저주받은 이단자들이라는 흑마법사들조차도 어디까지나 타블로를 이용한다. 그들은 검은 숲에 살면서 마물을 만들어 내긴 하지만, 이것도 본질은 정령 마법이다. 불의 정령에 청해 동물들의 몸을 재로 분해하고 이 잿가루를 다시 물의 정령에 청해서 새롭게 섞어 낸다.

흑마법사들은 타인의 눈과 귀에 끊임없이 풍경과 목소리를 전해서 상대를 거의 미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는 듯이 착각하게끔 몰아붙여서 말이다. 하지만 이도 결국 공기의 정령께 청하는 전송 마법이다. 응용해 내는 방식이 특이해서, 그렇지 흑마법사들도 결국 5대 정령에 의지하고 있다.

‘평소에도 우리는 공기를 통해 소리를 듣고 물체를 보니까, 전송 마법이란 그걸 좀 더 확장하는 데에 불과하지. 하지만 생각이라. 그건 대체 무슨 정령께 어떻게 청을 해야 전할 수가 있지?’

필립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지식을 총동원해서 요른이 했던 얘기를 어떻게든 말이 되게 만들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 길도 보이지 않았다.

‘아냐. 말이 안 돼. 그런 마법을 쓰려면 아예 타블로를, 정령 마법이라는 체계를 벗어나야…….’

필립은 순간 머릿속에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어 떨쳐 버렸다.

‘……이렇게 망가진 어린애가 횡설수설한 걸 가지고 나는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요른은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이 타인을 조종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느라 생각을 전하네 어쩌네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필립 자신까지 거기 말려 들어가 동조해 주어서는 안 된다. 필립은 대신 요른에게 장난스러운 조로 말을 걸었다.

“요른, 난 역시 여기 있을래.”

“어…… 어?”

“내가 가야 하는 이유 말이야, 납득이 안 돼. 역시 네 곁에 있을래.”

말하면서 필립은 요른이 엎드려 있는 바로 옆에 와서 털썩 앉았다. 요른은 어쩔 줄 모르면서도 자기도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필립은 아이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오래 있지는 않을게. 딱 이십 분만 있다가 갈 거야. 그 정도면 괜찮지?”

“안, 안 돼, 요.”

“네가 내 머리를 조종하는 마법을 쓴 거라고 치자. 그래도 이십 분만 쓰고 마는 건 괜찮잖아?”

필립이 타일렀다.

“금지 마법이라고는 해도 그 정도는 무해한 범위 아냐? 네가 딱히 내게 무슨 짓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십 분만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거잖아. 그 정도는 어차피 내가 제정신일 때라도 들어 줬을 거 같거든?”

“그그럴 리가, 아아냐.”

“이십 분만 있다가 갈게. 그다음엔 네가 붙잡아도 가 버릴 테니 걱정 마.”

짐짓 단호한 척 잘라 말하면서 필립은 머릿속으로 가만히 더듬었다. 이십 분 동안 이 애한테 뭘 해 줄 수 있을까. 과자는 주면 안 될 것 같다. 속을 다쳤다면 오히려 이런 설탕이며 초콜릿이 많이 들어간 건 위험하다. 그냥…….

필립은 가만히 제 왼손으로 요른의 오른손을 잡았다.

요른은 저항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 버렸을 뿐이다.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만 들려 오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필립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눈앞의 나무 둥치를 바라보았고, 흙의 향기를 맡았고, 가지들을 올려다보다가 종국에는 하늘로 시선을 향했다. 두고 온 동생들 생각이 났다. 이렇게 손을 잡고 황국민 학교에 데려다주곤 했던 터울 짧은 동생들이.

왼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 애가 앞으로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오 년, 늦어도 십 년 내로는 자신도 훨씬 더 당당하게 이 애의 행복을 위해 나서 줄 수 있기를 필립은 속으로 조용히 빌어 보았다. 사업가 협회가 계획한 일이 잘되어서 세상이 정말로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좋겠다, 자신도 거기 일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마음에 새겼다.

요른은 전신이 차갑게 굳은 채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다른 사람이 잡아 준 게 얼마 만인지 기억해 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평생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기억할 수 있는 한에는 처음이라고.

자꾸 눈물이 흘러나오려고 하는 걸 요른은 겨우겨우 억눌렀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었다. 오른손이 무척 따스했다. 분명 자신이 체온은 더 높은 것 같은데도, 필립이라는 이 학생의 손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따스했다. 그래서 더 죄책감이 느껴졌다. 자신은 지금 다른 사람을 조종해서 마치 거머리처럼 온기를 빨아먹고 있는 거다.

요른은 필립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손이 잡힌 채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천천히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필립에 대해서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시.’

요른의 안에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이 뜨끔거리기 시작했다.

필립에게 잡혀 있는 손이 따스하면서도 싸늘하게 아파 왔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막시밀리안을 배신하고 있다고 느꼈다.

막시밀리안은 단 한 번도 맨손으로는 요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품에 안아 주지도,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에 다른 사람의 맨손이 닿아 버렸고 몸이 다른 사람의 품에 푹 안겨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한 번도 그를 만져 주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그를 만졌다. 그 사람이 준 온기도 감촉도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자기 쪽에서도 그에게 몸을 푹 기대어 버리고, 다른 쪽 손마저도 제발 잡아 달라고 빌고 싶을 정도로.

‘싫어.’

요른은 되뇌었다.

‘싫어. 막시……. 막시한테 가야 해.’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막시가 요른더러 늘 남의 말을 잘 들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른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필립이 말한 이십 분이 얼른 지나가기만 바라며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릴없이 빌었다.

‘막시, 와 줘. 와서 날 데려가 줘.’

하지만 그도 물론 막시가 와 줄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요른 쪽에서 얼른 막시를 찾아가야 한다.

요른은 사실 아까 강의실에서 도망쳐 나온 직후 막시에게 보고를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바빴다. 기숙사 쪽으로 찾아가 보았지만 막시의 사실에 딸린 하인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몸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시밀리안은 현재 하급생 대상 지도 대련을 진행 중이고, 점심때는 다른 가문의 손님을 맞아 특실에서 식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요른은 일단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에 다시 막시를 찾아가 보려고 했다. 다만 자신이 강의실을 나온 후에도 필립을 계속 유혹하고 있었을 줄은, 그래서 여기까지 꼬여 냈을 줄은 몰랐다.

‘막시는 오후에는 역사 수업을 듣는다고 했지.’

그 강의실로 찾아가서 자신이 얼마나 자제가 안 되는지 낱낱이 보고해야겠다고 요른은 다짐했다.

막시는 언제나 딱 적당한 벌을 주지만, 이번에는 요른 쪽에서도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이 때려 달라, 몸이 낫기를 기다려 줄 필요도 없으니 사흘 후 말고 바로 오늘 벌을 달라. 그리고 마르티넷 말고 말채찍을 써도 좋다고 당부해 두리라.

계속 이렇게 질질 흘리듯이 금지 마법을 써 대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몸뚱이는 정말이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요른은 그렇게 곱씹으면서 자꾸 필립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그는 손을 놓아 줄 기색이 없었다.

‘언제 이십 분이 다 지나가는 걸까.’

요른은 시계가 없었다. 회중시계는 아주 비싼 물건이었다. 이십 분이라고 말한 걸 보니 필립이라는 이 학생은 그런 걸 갖고 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느다란 금사슬 하나가 필립의 학생복 바지 앞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벨트 한쪽에 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요른은 그가 얼른 시계를 꺼내 보고 시간이 다 지났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필립은 시계를 꺼내 볼 기색조차 없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듯 눈마저 감고서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필립의 어깨에 그늘이 드리웠다.

요른은 자신의 머리 위도 컴컴해진 걸 눈치챘다. 짙은 체향과 같은 어둠.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으니 정오를 한 시간쯤이나 겨우 넘긴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땅거미처럼 훅 끼쳐 와 두 사람의 몸을 거머쥐었다.

설마. 요른은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막시밀리안이 거기 서 있었다.

그는 요른의 정수리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마, 막시.”

요른은 놀라서 순식간에 필립의 손을 뿌리치고는 무릎으로 기어서 두어 걸음 물러나 앉았다.

“나 아아까 보고하하려고 했, 했는, 데, 대대련 수업, 하고 이 있다고…….”

“알아.”

막시가 끄덕거리고는 고개를 깊이 숙여 요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린다한테서 얘기 들었어. 또 금지 마법을 썼다더구나. 하지만 요른, 그럼 당장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어야지. 나와서 돌아다니니까 자꾸 똑같은 일이 생기잖아.”

막시의 음성은 나긋했지만 채근하는 투가 살짝 섞여 있었다. 필립이 요른의 곁에 붙어 있는 걸 보고 사정을 대강 짐작한 듯했다. 요른은 정신없이 끄덕거렸다.

“으으, 응. 배배고파서 그만…… 자자잘못했어.”

“그래. 일어나. 방에 데려다줄게.”

“마막시, 역, 역사 수업은?”

“한 번쯤은 빼먹어도 돼.”

“안, 돼.”

요른이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나나 때문에, 또, 아안 돼. 막시…….”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해. 자, 일어나. 돌아가자.”

요른은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인 채 일어났다. 막시는 요른이 사고를 치면 가끔 수업을 빼먹거나 약속을 취소하기까지 해 가며 도와주곤 했다. 지난번에 독초를 먹고 피를 토했을 때도, 막시는 치료사를 찾느라 급히 다른 가문의 식사 초대 하나를 물리치고 학원으로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요른은 막시에게 비슷한 짓을 시켜 버린 것이다.

필립은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좀 멋쩍어졌다. 둘 다 필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립은 막시가 대체 언제 다가왔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느낌이 고요한 애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까지 아무 기척도 없이 움직일 수 있다니 신기했다. 기사로서 훈련한 결과겠거니 싶긴 했지만.

‘둘이 각별한 사이이긴 한 거 같아.’

필립은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은 아까부터 말하면서 계속 요른만 쳐다보고 있었고, 필립에게는 물론 주변의 어떤 다른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요른도 마찬가지로 막시밀리안에게만 눈을 둔 채였다.

요른은 몸을 일으킨 후, 막시밀리안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이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저도 세 걸음쯤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저기.”

필립이 소리를 냈다.

막시밀리안이 돌아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더니 몸을 돌려 한달음에 필립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미안해, 필립.”

그가 손을 내밀며 사과했다.

“잘 지냈어? 미안해. 애만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네. 린다한테서 요른이 강의실에 왔다가 갑자기 나가 버렸다고 들었거든. 강의는 웬만하면 안 빼먹는 앤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걱정이 되어서 한창 찾고 있었어. 그런데 찾아내서 안심한 바람에 그만…….”

“괜찮아.”

필립이 악수를 받아 주며 웃었다.

‘역시 저 둘은 형식적인 사이인 거 같지는 않아.’

필립은 속으로 되뇌었다.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집안의 피후원자라서 형식적으로 신경을 써 주는 게 아니라, 진짜로 마음 깊이 둔 듯한 눈치였다.

이 적자는 형제가 없다고 했었지. 필립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막시밀리안은 대귀족 가문의 자제치고 드물게 독자다. 어머니 유디트가 몸이 약해서 첫째를 낳고는 유산을 반복하다가 임신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녀는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지만, 몸은 좋게 타고나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 막시밀리안은 제 손으로 주워 왔던 이 아이한테 동생처럼 마음을 쏟을 만도 하다. 필립은 실제로 다른 학생들이 불평하는 소리도 종종 듣곤 했다. 막시는 요른한테 너무 정을 준다, 그 애가 프란첸가의 독자에게 들러붙어 그의 유일한 약점이자 흠이 되고 있다고.

막시밀리안이 학원 내에서 드러내 놓고 요른에게 잘 대해 줘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유도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고 필립은 생각했다. 학생들은 오히려 막시밀리안이 신경을 써 줄수록 요른을 더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완벽한 막시한테서 떨어져, 징그러운 빈민가 괴물아, 뭐 이런 심정 아닐까.

‘한번 떠볼까.’

필립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막시밀리안 본인은 이 애를 정말로 아끼는 눈치긴 한데. 만약 그렇다면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어.’

요른을 빼돌리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감이 왔다. 막시밀리안도 요른이 학원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야 잘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는 페랑은 신분 차별도 덜하고, 최소한 도시 상류층 기준으로는 생물학적 지식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는 나라라는 점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처럼 지식이 두루 깊은 자가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동생 같은 애를 이 지옥에서 빼내서 좋은 환경으로 옮겨 주겠다는데 형 비슷한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는 없으리라. 물론 요른은 더 이상 프란첸가의 피후원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사적으로 인연이 끊기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요른도 막시밀리안을 저렇게 따르는데 연이 끊길 리가 없다. 편지라도 자주 보내고 가끔 여행도 하면 되겠지.

막시밀리안이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쉬워지겠지만, 먼저 한 번 떠볼 필요는 있다. 필립은 악수를 마치고 손을 놓으며 속으로 할 말을 골랐다.

“막시밀리안, 너무 오지랖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 애 열이 나더라.”

필립이 짐짓 조심스레 운을 떼자 막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어딘가 다쳤거나 병에 걸린 거 같았어. 살펴봐 줄 수 있겠어?”

“아…….”

막시밀리안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리고, 저기, 애가 좀 이상한 망상을 하는 것 같던데.”

필립이 말을 이었다.

“자기가 생각으로 사람을 조종한다고 생각하더라고. 그러니까, 머리에서 머리로 생각을 전달하는 마법 같은 걸 써서 말이야. 사실 아까 내가 강의실에서 얘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거든. 그랬더니 얘가 펄쩍 뛰면서 도망쳐 버린 거야. 자기가 무슨 금지 마법을 써서 나를 유혹했다나? 사람이 자기한테 관심을 보일 수가 있다는 걸 워낙 상상조차 못 해서 그러는 거 같던데.”

그는 일부러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어린애가 오래 학대받다 보면 그렇게 망상에 빠져 버릴 수도 있거든. 솔직히 너도 이 학원에서 요른이 받는 취급이 어떤지 알잖아. 말하기 뭐하지만, 너무 오래 그런 망상에 빠져 있다 보면 헤어 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어. 정신적으로 영구히 문제가 생겨 버리는 거야.”

말을 맺으며 필립은 막시밀리안의 반응을 살폈다.

막시밀리안도 요른이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만 알지, 그 결과로 애가 얼마나 망가져 버렸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혹은 요른이 한때 괴롭힘은 받더라도 이겨 내고 결국은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라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본인이 워낙 강인한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있다. 요른이 이 학원에 계속 다니면서 이런 괴롭힘을 버텨내는 과정도 오히려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는 식으로 여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람은 약할 때 너무 상처받으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늦기 전에 아예 다른 장소로 도망쳐 버리는 게 더 나을 때도 많다. 필립은 그 점을 막시밀리안에게 슬쩍 암시하면서 겁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반응을 볼 참이었다. 그가 당황할지, 당황한다면 얼마나 당황할지, 아니면 그조차도 이 애가 응당 감내해 낼 수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반응해 올지.

막시밀리안은 다소 난처한 듯 웃으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이 애는 내 동생 같은 애거든. 진심으로 아끼고 있어.”

“응, 그런 거 같았어. 그래서 얘기한 거…….”

“얘는 내 동생 같은 애야.”

필립은 문득 막시밀리안이 ‘동생’보다는 ‘내’라는 단어에 힘을 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는 얘한테 뭐가 되고 싶은 거야, 필립?”

“나는…….”

필립은 말을 골라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이 질문이 대체 왜 튀어나온 건지, 상대의 의중이 뭔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 그저 솔직하게 뱉어 내고 말았다.

“그 애의 친구가 되어 주고 싶어.”

답을 듣고는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필립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한낮의 숲속에서 빛 한 톨 반사하지 않는 흑발과 암회색의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그 아름다운 소년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구나. 난 필립 널 친구라고 생각해.”

“……고마워.”

“고마울 게 뭐 있어. 다 같은 학우인데 당연히 친구지. 하지만 대등하게 지내려면 서로 배려도 해 줘야 해. 그리고 배려라는 건 그게 기본이잖아. 선을 지키는 거.”

필립은 막시밀리안이 눈이 다 감기도록 웃으며 마치 음절 하나하나를 조형해 내듯이 말하는 걸 들었다.

“이 애는 내 동생 같은 애야.”

“…….”

“앞으로도 서로 친하게 지내자, 필립.”

막시밀리안이 필립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요른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요른은 안절부절못하며 둘을 번갈아 보고 있다가 막시를 쫓아갔다.

필립은 둘의 등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한 충격 때문에 잠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둘이 사라져 버린 후에야 천천히 머릿속에서 어떤 조각들이 짜 맞추어졌다.

‘설마.’

그는 생각했다.

‘……설마.’

요른은 잰걸음으로 막시밀리안을 따라갔다. 막시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쫓아다니려면 늘 조금 버겁다. 하지만 오늘 특히 걸음이 더 빠른 것 같았다.

요른은 잠시 발을 멈췄다. 목으로 뭔가가 넘어왔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요른은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도로 삼켜 버렸지만, 비릿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코피를 삼켰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요른이 다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하자 막시밀리안도 별말 없이 다시 등을 돌려 걸었다.

둘은 요른이 지내는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막시밀리안은 이번에는 요른을 앞세워 계단을 올라갔다. 방에 도착해서 요른이 문을 열어 주었고, 막시밀리안이 먼저 들어가서 의자 하나를 놓고 앉은 다음 요른을 기다렸다. 요른도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막시밀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막시밀리안은 한동안 요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요른이 망설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막시, 나나 부탁할 게…….”

“손을 잡고 있더구나.”

“으응.”

요른이 소스라치듯이 하며 답했다.

“내가 그그런 게 아아니고, 자잡혀 버버려서.”

“많이 친하니?”

“아아냐!”

요른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처처음 만나났어. 가강의실에서…… 그래서, 도망, 그그랬는데도 시식당밖밖에서…… 기기다리고 있었, 그래서, 수숲에서.”

요른은 말을 최대한 조리 있게 해 보려고 애썼지만 아무래도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막시라면 이 정도만 해도 다 알아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가만히 주시하고만 있었다.

낌새가 이상해서 요른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야 막시밀리안이 다시 운을 떼었다.

“그 애는 네가 금지 마법을 쓴다는 걸 알고 있더라. 네가 직접 설명해 준 거야?”

“응.”

요른이 끄덕거렸다.

“내내가 자제가 아안되니까, 상대하한테, 설명해해 주, 려고 했어. 그그런데…….”

“그래. 하지만 소용이 없었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네가 상대가 그 설명마저도 안 믿게 조종해 버리면 끝이잖아. 그렇지?”

“응.”

요른이 풀이 죽어서 답했다. 막시가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요른. 나름대로 애썼구나. 하지만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 설명은 하지 마. 내가 대신해 줄게. 내가 그 애한테 잘 얘기해서, 앞으로는 네게 절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해 줄 거야. 하지만 설득하는 데에 좀 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은 너도 숨어 있을 수 있겠니?”

“응!”

“그래.”

막시가 끄덕거렸다.

“착하다, 우리 요른. 걱정 마. 내가 해결해 줄게. 하지만 잠시만 너도 도와줘. 당분간 이 방에만 꼭 숨어 있도록 해. 알았니?”

“응응.”

“수업도 나가지 말고 식당에도 가지 마. 물론 산책도 안 돼. 이 기숙사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안 되고.”

“응.”

“강의 필기는 내가 다른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받아다 주고, 하인을 시켜서 물과 식사도 매일 가져다줄게. 그것만 먹고 지내. 이제 나가도 괜찮겠다 싶으면 내가 따로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와서 말해 줄 테니까 그때까지는 계속 이 방 안에만 있어. 문도 창문도 잘 잠가 두고, 나나 내가 보낸 사람들한테만 열어 줘. 알았지?”

“응응, 무물론이야.”

요른은 안심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막시는 늘 요른을 도와준다. 하지만 거기 더해서 조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서 요른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 그런데 막시, 나 부부탁…….”

“응?”

“벌 좀, 줘.”

“무슨 벌?”

“마법, 나나 오늘 또 써 버렸잖아.”

요른이 말했다.

“어어제 카를한테 썼는데 오늘, 또, 써 버렸, 으니까. 사사흘 후 말고 오늘, 바바로 벌 주주면 안 돼? 나 무서워. 너무 자자주, 이 이번에는, 막시, 내 마법, 훠, 훨씬 더더 가강해해져서, 피필립, 하한테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요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요른은 입학 초의 그 학생을 떠올렸다. 그 학생이 했던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요른에게 수업 시간에 말을 걸거나 식사 때 마주 앉으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필립이라는 학생은 요른을 안아 주었다. 과자도 주려고 했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손도 꼭 잡아 주었다.

“빨리 벌, 바받고싶어. 오오늘 당장. 채채찍, 부탁할게 마막시. 나 마법 제발, 모못 쓰게 해해 줘. 어 얼른, 마많이 좀 때려, 줘.”

“안 돼.”

막시밀리안이 잘라 말했다.

“규정에 따라야지. 오늘 건은 내게 제때 보고했으니까 벌 받을 필요 없어. 벌을 주면 내가 규정을 어기는 게 되잖아.”

“그그치, 만…….”

“예정대로 사흘 후에, 네가 어제 카를에게 마법을 쓴 건으로만 벌을 줄 거야.”

말하면서 그는 사뭇 다정하게 요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차피 너 지금 몸이 못 버텨. 열도 난다면서. 어제 맞은 게 좀 나아야 벌도 제대로 받지. 방에 있으면서 몸을 회복해 둬. 사흘 후에 봐서 충분히 회복한 거 같으면 원래 예정보다 몇 대 더 때려 주든가 할게. 그 정도는 사정 봐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조르지 마.”

“응…….”

“그래. 착하다, 우리 요른.”

막시는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요른의 기숙사 방문을 밖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그고 건물 정문으로 빠져나왔다.

막시밀리안은 합동 강의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사 수업은 이미 끝나 버렸지만, 고문헌학 수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은 잔디 사이 모래로 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교정은 완연한 가을 햇살에 잠겨 들떠 있었다. 녹색과 황색, 적색의 잎들이 온통 수면의 잔물결처럼 반짝거렸고, 호수 속을 노니는 물고기들처럼 수풀이나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짐승들이 돌아다녔다. 토끼나 고양이, 들쥐, 다람쥐, 가끔은 고슴도치도 눈에 띄었다.

작은 짐승들에게 사람이 먹이를 주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긴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엄중하게 벌을 받는 교칙도 아니고, 교수들도 암암리에 눈감아 주는 게 보통이었기에, 학생들이 짐승들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일은 꽤 있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먹이를 주다가 친해져서는 쓰다듬고 뒹굴며 놀기도 했다.

열세 살짜리 기사 생도 하나도 그날 나무 그늘에 배를 깔고 엎드려 눕다시피 한 채 토끼 한 마리를 품에 끼고 데리고 노는 중이었다. 깡마르고 어린, 털 사이사이로도 그림자 한 톨 들어설 틈 없이 백색 광채 그 자체처럼 하얀 토끼였다.

그녀는 그 새하얗고 조그만 토끼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면서, 지난 몇 주 내내 당근을 가져와서 먹인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말라빠져서 경계가 심하더니 이제는 살살 달래면 손을 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어린 토끼는 사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기는 했다. 겁에 질린 탓에 오히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학생이 자기를 쓰다듬는 걸 얌전히 허락해 준 것뿐이었다. 그녀도 토끼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이며 계속 최선을 다해서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을 쓰다듬다가 그녀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막시밀리안과 얘기를 직접 나눠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하고 외모도 멀리서도 바로 눈에 띌 만큼 수려한 생도였기에 그녀는 그를 금방 알아보았고, 공포에 질린 채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 막시밀리안이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건가?

그녀는 분명 적의를 느꼈다고 생각했다. 태양도 일식처럼 가려 버릴 만큼 어두운 살의를. 그러나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막시밀리안은 곧 빙긋 웃으며 싱거운 인사를 던져 왔다.

“안녕. 토끼 귀엽네.”

“응, 어…….”

학생은 문득 생각했다. 혹시 막시밀리안도 만져 보고 싶은 걸까? 적의가 아니라 질투 비슷한 거였을까. 그녀는 토끼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조심스레 왼팔 안쪽으로 보듬은 채 상대에게 전했다.

“와서 만져 볼래? 못 도망가게 내가 잡고 있을게.”

“아냐, 괜찮아.”

“응? 괜찮아. 안 물어. 만져 봐.”

그녀가 말하자 막시밀리안이 왠지 피식 웃었다.

“물 수도 있어. 조심해.”

“응?”

“종이 다르니까……. 조심해.”

“에이, 이렇게 귀여운데? 봐봐, 쪼끄맣고, 하얗고.”

그녀가 토끼의 귀를 쓸다가 조그만 앞발마저도 손가락 끝으로 내리 쓰다듬으며 말했다. 막시밀리안이 딱히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한 거 같지는 않기에 안심이 된 차였다. 아까는 아무래도 자신이 영 착각했나 보다.

“너무 예쁘잖아. 안 예뻐?”

“예뻐.”

막시밀리안은 뱉어 놓고서 이상하게 한참 동안 침묵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직전에 그는 다시금 빙긋 웃으며 어른스러운 투로 충고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자꾸 만지면 정 붙으니까, 장갑이라도 끼고. 알았지?”

이상한 충고였다. 그녀가 갸웃하는 동안 막시밀리안은 손을 저어 인사해 보이고는 도로 제 갈 길로 가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고문헌학 수업 강의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 왔고, 늘 같이 앉던 패거리가 양옆으로 와서 날개처럼 퍼져 앉았다. 곧 교수가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는 약 2년 전에 처음으로 해석에 성공한 예언 필사본을 교탁 위에 펼쳐 놓고 그 내용을 학생 한 명에게 암송시켰다.

내용은 짧고 간단했다. 용사와 성검 전설. 어둠의 시대가 찾아오면 성검을 든 용사가 일어나 어둠을 정화하고 다시 세계를 빛으로 되돌리리라.

몇천 년 전에 작성된 건지 가늠도 안 가는 석판 문서였지만 이 ‘어둠의 시기’가 검은 숲이 나타난 현재를 가리키는 거라는 데에는 문헌학자들도, 역사학자들도 마법사도 심지어 성황 폐하도 이견이 없었다. 역사상 전쟁과 봉기, 역병, 흉년 등으로 대륙이 황폐해진 적이야 많았지만 지금처럼 마물이라는 이상 생물체가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언력이 있었던 고대인들은 까마득한 미래마저도 건너다보고 이런 기록을 남겨 두었던 것이리라. 용사가 필요해지고야 말 미래를.

암송을 들으면서 학생들, 특히 기사 생도들은 왠지 서로를 흘끔거렸다. 주인이 강제로 복속시켜야만 하는 마검과는 달리 이 성검이라는 건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여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마검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검을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고 생도들은 생각했다.

대륙의 어떤 현직 기사든 기사 생도든, 이 전설을 접하고 나서 성검이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꿈꾸어 보지 않은 자는 없으리라. 그러나 최소한 이 학원의 기사 생도들은 속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기는 했다. 우리 세대에 용사가 나타난다면 그건 아마…….

생도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픽 웃고는 한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막시밀리안은 주변 이목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정말로 느끼질 못하는 건지 그저 교수와 칠판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교수는 내용 암송이 끝나고 나자 곧바로 해석법에 대한 강의에 들어갔다.

막시밀리안은 사실 어머니 유디트 덕분에 전혀 다른 해석법도 알고는 있었다. 그의 모친은 흑마법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연구자 타입의 고등 마법사들이 그렇듯이 문헌학에도 능통했다. 지식은 활용하기 나름이지 결코 지식 그 자체가 악할 수는 없다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마치 악한 것처럼 보인다면 활용법이 틀려서 그런 것뿐이라고.

단, 그녀는 대중의 무지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폰 프란첸 공작 부인으로서의 위치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연구의 결과는 에둘러 발표하더라도 방법은 숨기고 또 숨기만 했다. 집 안에서도 남편의 눈마저 피해서 자기 아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주워온 요른에게 실컷 떠들어 댔을 뿐이다.

막시밀리안은 그때 생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책임한 인간아!

남에게 큰 소리를 내 본 건 그게 처음이었다.

그는 책으로 눈을 내려 페이지 전면에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는 고대 문자들을 응시했다. 마치 문자들 스스로가 눈을 뜨고 그쪽에서부터 막시 자신을 응시해 주기를, 그리하여 확실한 답을 주기를 기다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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