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부 1장 억제) (2/30)

제I부 기사의 검

-1장 억제

1. 

열다섯 살짜리 소년 생도는 대련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얼굴은 앳된 티가 났지만, 새카만 머리카락이 기사 생도복의 붉은 견장과 묘하게 성숙한 대조를 이루었다. 대련장 주변에서 가벼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소년은 한쪽 손을 들어 좌중에 인사해 보인 후 등에 지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뽑아내어 몸 앞에 세웠다. 아직 덜 자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대검.

그는 사냥 직전의 흑표범처럼 몸을 낮춘 후, 어느 순간 모래땅을 차고 들어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비스듬히 한 번 내려쳤고, 다시금 검 자체의 무게를 이용해서 유연하게 방향을 바꿔 횡으로 베었다.

마물은 순식간에 네 동강이 나서 바닥에 굴렀다.

소년은 마물 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금 한쪽 손만 높이 들어 보였다. 좌중으로부터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동료 학생들도 많았다.

“막시!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

생도 대련용으로 준비된 마물이다. 그러니 눈이 미리 뽑혀 있었고 발인지 팔인지 모를 길쭉한 부분들도 사슬에 묶여 있긴 했다. 그래도 어른 키만 한 마물이었는데 그걸 저 소년은 한달음에 네 동강을 낸 것이다. 요른도 학생들 틈에 섞여서 보고 있다가 그만 팔짝 뛸 뻔했다. 하지만 대신에 손이 부서져라 박수만 쳤다.

주위가 천둥처럼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소년은 한동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바닥을 살폈다. 마물 조각들이 제자리에서 꿈틀거릴 뿐, 공격할 힘은 잃어버렸다는 걸 완전히 확신한 후에야 그는 대련장에서 수십 피트쯤 떨어진 초대석에 앉아 있던 왕국 기사들 쪽으로 신호를 주었다. 기사들이 다가와서 마물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보다 잘게 썰어서 상자에 넣어 갔다.

처리가 끝나고 나서야 막시밀리안은 비로소 미소를 띤 채 좌중을 고루 돌아보며 인사했다. 그리고 오늘 대련이 예정된 기사 학원 생도들이 대기하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박수 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앉으면서 막시밀리안은 동료의 어깨를 툭 쳤다. 막시밀리안보다는 한 살 더 많은 기사 학원 생도로, 다음 순서 대련자다. 경갑주를 걸치며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막시밀리안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내.”

“응.”

동료는 대답해 놓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약속 안 잊어버렸지?”

“물론이야. 하지만 안 지켜도 되게 해 줘.”

막시밀리안은 동료의 눈을 보며 짧게 끊어 말한 후 곧 고개를 돌렸다. 동료는 그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웃다가 곧 대련장으로 걸어 나갔다.

좌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생도가 걸어 나왔지만, 막시밀리안 때와는 달리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응원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다. 막시밀리안은 이미 수십 번은 마물을 베어 보았으니 옆에서 웬만큼 번잡을 떨어 대도 괜찮다. 하지만 이 생도는 오늘이 처음이니까, 주의를 해치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가 있다. 대련장 한가운데에는 곧 새로운 마물 한 마리가 끌려 나왔다.

역시 눈이 없고, 발은 사슬에 묶여 있다. 그리고 아까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작았다.

요른은 구경꾼 역할을 하는 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서 있다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대련장 한가운데 놓여난 조그만 마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새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했다. 실제로 둘을 섞어 놓은 건지도 모른다고 요른은 생각하며 가늘게 눈을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이 뽑혔다기보다 이 마물은 원래부터 눈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눈도 귀도 없이 부리 같은 입으로만 짹짹대면서 모래가 깔린 단단한 바닥 위를 이리저리 더듬어 보려고 애썼지만, 사슬 때문에 멀리 가지를 못했다.

아주 작다. 요른은 속으로 새삼 되새겼다. 요른 자신도 열한 살짜리 치고도 몸이 작고 마른 편이다. 그런데 저 마물은 그런 요른이 양손으로 받들면 손안에 쏙 들어올 듯이 작다.

‘귀여워.’

요른은 무심코 생각했다. 실제로 손안에 받들어서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작은 새의 깃털을 쓸어 주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요른은 문득 마물 쪽에서도 자신을 바라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마물은 눈도 없었고 머리를 딱히 요른 쪽으로 돌린 것도 아닌데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서로 시선이 닿은 것 같았다. 그렇게 느끼고 나자 요른은 왠지 가슴이 찔린 듯이 시리고 아팠다.

‘구해 주고 싶어.’

요른은 결국 금지된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았다.

‘나는 평소에 조금만 맞아도 아프던데. 저건 저렇게 작은 게 사슬에 묶여서, 칼에 베이기까지 하면……. 얼마나 아플까.’

심장이 제대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구해 주고 싶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요른은 바람을 누를 수가 없었다. 막시한테 들키면 안 된다. 막시는 요른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면 또 슬퍼할 테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요른은 변명하듯이 곱씹었다.

막시밀리안이 마물과 싸울 때는 괜찮다. 그러면 요른은 진심으로 막시만 응원해 줄 수 있다. 마물 같은 거, 막시의 적이라면 다 썰려 버리라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싸울 때는 달랐다. 그럴 때면 요른은 아무래도…….

요른이 그렇게 속으로 우울하게 되뇌면서 계속 마물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소년 생도는 그 대여섯 발짝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서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마물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짓쳐 들어갈 기세로 몸을 긴장시켰다.

대마물 실전 경험은 그로쉔 왕국 학원에서도 특별한 행사다. 직접 대련이 허락되는 건 기사 학원에서도 최상위 세 명뿐이고, 관람도 기사 학원과 마도 학원 전체를 아울러 우수 학생 오륙십 명 정도에게만 허락된다. 게다가 이 행사는 한 학기에 한 번씩만 진행된다. 마물 재고가 남아돌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최우수만 골라냈다고 해도 고작 열 몇 살짜리들이다. 몸도 정신도 덜 익었다. 이런 어린애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진짜로 위험한 마물을 데려다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학교 측에서는 성황국과 협력해서 고르고 골라 거의 무해하다시피 한 마물만 골라 오고, 그나마도 사지를 자르고 눈을 뽑고 단단히 묶어 두는 등의 처리를 한다.

게다가 행사 때 대련장 주위에는 학원 교수들은 물론이고, 궁정 마법사와 성기사도 특별히 초대받아 와서 둘러서 있곤 한다. 비상시에는 이 믿음직한 어른들이 언제든 대신 치고 들어가서 마물을 처리해 줄 것이다.

마도 학원 학생 중 한 명이 하품했다. 소년 생도가 검만 뽑아 든 채 너무 오랫동안 빙빙 돌며 조심스럽게 굴었던 탓이다. 사람들이 지루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소년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고함을 지르며 짓쳐 들어갔다.

조그만 마물의 몸이 두 동강 났다.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요른은 겨우 비명을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요른은 가슴을 움켜쥐고 싶었지만, 누가 볼까 봐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허벅지 옆에서 주먹만 꽉 쥐었다. 주변은 온통 시끄러웠다. 박수 소리는 물론이고, 소년의 이름을 연호하는 외침도 들려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물을 베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검이나 정령검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마검으로만 벨 수 있는데, 마검은 노련한 기사들도 쓰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지만, 고작 열여섯 살짜리가…….

막시밀리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역시 이 애도 그로쉔 왕국 기사 학원이 자랑할 만한 수재다. 고르고 골라낸 오늘 대련자 세 명 중에서도 2위를 차지한 학생이 아닌가. 학원 교수들은 자부심 깃든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궁중 기사들도 웃으며 격려하듯이 장갑을 낀 손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훌륭해!”

“멋져! 잘 해냈어!”

소년은 박수 세례를 받으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도 좋은 귀족가의 장자다. 막시밀리안이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사 학원에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은 지나치게 뛰어난, 한 살 어리기까지 한 동료의 그림자 속에서 지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물론 막시밀리안을 더없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프란첸 가문의 그 독자는 아무리 봐도 천재가 분명한데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늘 정결한 언동으로 대하고, 학우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잘 챙긴다. 외모마저 조각같이 수려하고 목소리도 순도 높은 금처럼 깨끗하고 낭랑하다. 어떻게 이런 자가 세상에 존재해서 자기 옆에 앉아 있을 수가 있는지 문득문득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는 막시밀리안을 목숨도 맡길 수 있는 친구로 여겼다. 실제로 바로 오늘 그 비슷한 걸 맡겨 놓고 오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만큼 열등감을 느껴 온 것도 사실이다. 소년은 자신이 이렇게 찬탄 받아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돌이켰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를 띤 채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 좌중에 답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마도 학원 교수 중 몇몇이 뛰어나가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검을 꽉 부여잡은 채 모로 누워서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입에서는 거품 섞인 침이 흘러나왔다. 교수들 중 한 명이 소년의 오른팔을 잡아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눈을 찡그렸다.

“역시.”

“팔을 잘라 내면?”

“이미 늦었어.”

교수들이 서로 속삭였다. 그들은 놀라긴 했지만, 아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라는 듯이 침착한 투로 말했다. 다만 예상 가능했던 일들 중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을 뿐이라는 듯이. 

마검의 신체 잠식.

소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오그라들어 검의 손잡이와 거의 하나가 되어 버린 터였다. 변형은 오른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 가슴, 목을 지나 금세 소년의 얼굴과 머리까지 다다랐다. 소년의 관자놀이 힘줄이 튀어나왔고 누군가 목을 조른 듯이 입이 벌어지면서 시퍼런 혀가 튀어나왔다. 눈을 떴다기보다는 검붉게 부어오른 눈알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와 버린 듯한 모양을 한 채 그는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그러나 별다른 조처를 해 주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이건 소년 자신만의 싸움이다. 그들은 대신 고개를 돌려 초대받은 성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댄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소년이 마검에 이기지 못하면, 그래서 결국 마물이 되어 버리면 그 몸을 깨끗하게 동강 내 주어야 한다. 다른 답은 없다.

다만 그들은 막시밀리안이 대기하던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몇 발짝 내디뎠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소년의 비명과 신음만 간헐적으로 허공에 울려 퍼질 뿐, 대련장이 자리한 강당 중앙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모두가 바짝 긴장해서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요른만은 그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소년의 칼에 동강 나 버린 마물에게만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사람과 달리 마물은 몸뚱이를 동강 낸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마물의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은 온몸에 고루 퍼져 있기에, 저렇게 잘라 놓으면 그저 행동 불능 상태가 될 뿐이다. 작은 마물은 두 조각으로 분리된 채로도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의식도 남아 있었다.

‘죽는 것보다도 훨씬 더 끔찍해.’

생각하며 요른은 결국 손으로 자기 가슴을 짓눌렀다. 심장이 끊임없이 두근거렸다.

마물의 살점이 필사적으로 꿈틀대며 경기를 일으키는 모습이 요른의 가슴에 마치 유리 조각처럼 와서 박혔다. 요른은 자신이 눈을 뽑히고 사슬에 묶인 채 대련장 한가운데에 끌려와 칼에 베이고 동강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요른이 거의 매일같이 학원에서 당하는 일과 크게 다를 바도 없었기 때문이다. 눈두덩을 얻어맞긴 하지만 눈알이 뽑히지는 않고, 천이나 가죽끈에 묶일 뿐 쇠사슬에는 묶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이제는…… 요른의 머릿속에 부드럽게 말들이 스쳐 갔다.

저 생도도 마찬가지가 된 거야.

요른은 그제야 소년에게 생각이 미쳤고,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요른도 익히 아는 생도였다. 요른은 몇 번이고 저 손에 얻어맞고 다리에 차여 본 적이 있었다. 배를 정통으로 차인 바람에 지금 소년이 신고 있는 바로 저 신발에 토했다가 한참이나 더 맞아 본 적도 있다. 이제는 아마 다시는 그럴 일은 없겠구나. 요른은 무심코 생각했다.

저 생도는 마물을 베는 건 처음이었을 텐데, 자기가 방금 벤 것과 똑같은 게 되게 생겼네. 그런 표현이 요른의 마음 안에 떠올랐고 얼굴로도 희미하게나마 표정이 되어 올라왔다. 요른은 그러나 자신의 그런 모습을 다른 수많은 눈들이 주시하며 소곤대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소년, 혹은 갓 탄생한 마물이 마침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내장을 입으로 쏟아 내듯이 소리를 질렀고 자지러지듯이 허리를 튕기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던 와중에 임산부처럼 부어 있던 배가 터지면서 실제로 내장이 쏟아져 내렸으며, 쏟아진 내장 일부가 날카로운 촉수 같은 것으로 변하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성기사들이 검을 뽑아 든 채 급히 땅을 찼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더 빨랐다.

그 흑발의 기사 생도는 아까부터 대련장 거의 가장자리에 다다라 서 있었다. 그리고 제 친구였던 마물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한가운데로 짓쳐 들어왔다.

마물도 반응했다. 촉수들이 마치 끝에 눈이 달린 듯이 막시밀리안의 머리 쪽을 정확히 노려 찔러 들어왔다. 막시밀리안은 촉수를 검날로 비껴내듯이 쳐냈지만 서너 개가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건 막지 못했다. 그는 어깨를 뚫은 촉수를 베어 내며 그대로 달렸고, 순식간에 몸을 낮춰 마물의 무릎에 해당할 만한 부분쯤을 벤 다음 다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곧바로 몸을 반 바퀴 넘게 돌려 허리 비슷한 부분을 크게 쳐냈다. 마물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막시밀리안은 대검을 바닥에 짚다시피 한 채 숨을 골랐다.

“……약속했어요.”

교수와 기사들이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막시밀리안이 마침내 그 시선에 답하듯이 말했다.

“이렇게 되면 제가 처리해 주기로, 그리고 유품을 부모님께 양도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잇새로 짓씹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울고 있는 거 같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이 되자 막시밀리안은 다시 고개를 들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검을 들어 제 친구였던 마물의 몸을 두어 번 더 베어 냈다. 마물의 조각들이 그저 반사적으로 꿈틀거리기만 할 뿐, 더는 의지를 갖지 못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대검을 천으로 닦아 다시 등의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교수들에게 유품의 정리를 부탁한 후 다시 대련장 밖으로 나와 원래 대기하던 자리로 걸음을 향했다.

“막시밀리안.”

그러나 마도 학원 교수 하나가 그의 등을 향해 이름을 부르며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상처 치료해야지.”

그녀는 막시밀리안을 향해 다가오면서 동시에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막시밀리안도 그 손끝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자기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요른도 막시의 손 쪽으로 시선을 주고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 막시밀리안은 분명 마물의 촉수에 어깨를 꿰뚫리긴 했지만, 생도복 색깔이 어두운 탓에 얼룩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가 알려준 덕에 그는 자기 왼손의 황갈색 가죽 장갑이 피로 푹 젖어 있는 걸 눈치챘다. 피가 어느새 거기까지 흘러내린 것이다.

부상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막시밀리안은 뒤늦게 어지럼증을 느끼고 선 채로 조금 비틀거렸다. 교수가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둘은 대기소로 함께 걸어갔고, 막시밀리안은 일단 자리에 앉은 후 재킷을 벗었다. 교수가 셔츠의 어깨 부분을 가위로 잘라 내고 상처를 살피다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끔찍하군.’

성인 손가락이 쑥쑥 들어갈 만한 구멍이 어깨부터 팔 위쪽까지에 걸쳐 다섯 개는 나 있었고, 개중 큰 상처를 통해서는 뼈가 들여다보였다. 지금 회복 마법을 걸어 봤자 응급 처치만 될 뿐이다. 오늘 내일로 완치될 만한 부상이 아니었다.

이 정도 상처라면 웬만한 성인 기사도 고통을 못 참고 도움을 청했을 만하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아까 그대로 대검을 들고 싸웠고, 지금도 혈색만 나빠졌을 뿐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생도복 재킷을 벗어 제 옆에 가지런히 개켜 놓는 동작 또한 떨림도 서두름도 하나 없이 그저 평소와 같이 절도 있기만 했다.

막시밀리안은 교수가 상처와 번갈아 자기 얼굴도 흘긋흘긋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교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이 애는 어디서 이렇게까지 꾹 참고 괜찮은 척하는 법을 배운 걸까.’

마음만 갖고 될 일은 아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훈련해 온 결과일 텐데, 열다섯 살짜리 공작가 적자가 뭐 그럴 일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막시밀리안의 어깨에 대고 회복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요른은 관객으로 온 다른 학생들 틈에서 고개를 쭉 내밀고서 교수가 주문을 외우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막시를 치료해 주고 싶은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리다. 요른은 치료 마법은 쓰지 못한다. 회복의 정령에게 청하는 주문은 길고 복잡하기에, 요른같이 말을 더듬어서는 불가능하다.

막시는 어릴 때부터 자주 여기저기 다치고 다녔다. 무리하리만치 실력을 닦는 데에 힘썼던 탓이다. 군소 귀족가도 아니고 바로 그 프란첸 가문의 독자인 주제에 그는 신분과 나이를 속이고 용병들 틈에 섞여 거칠기 그지없는 훈련이나 대련에 참여했고, 늑대나 멧돼지가 잘 나온다는 숲이나 산자락에 가서 인간이 아닌 생물 대상으로도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자기 껍질을 깨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집안사람들을 걱정시키기 싫다면서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부모나 고용인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프란첸가에는 멀쩡히 전속 회복 마법사가 있었는데도 막시는 스스로 상처를 동여매고 뒷골목 민간 치료사에게 처치를 받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다리가 똑 부러져 버렸을 때도 막시밀리안은 어떻게든 시내 치료사의 집까지 기어가서 그 다락에서 이틀 밤을 보냈고, 제 부모에게는 얼른 서신을 보내 친구네 별장에서 며칠 놀고 오겠다고 둘러댔다.

그럴 때마다 요른은 자신이 학원에 입학하면 꼭 치료 마법부터 익혀야겠다고 다짐했다. 막시는 계속 저런 식으로 단련을 하려 들 테니 앞으로도 다칠 테지만, 그가 굳이 티를 안 내려고 참을 필요도 없이 요른 자신이 얼른얼른 치료해 줘 버리면 그만이라고.

분명 그렇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마도 학원에 입학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도 요른은 치료 마법을 배우지 못했다. 말더듬이 습관이 낫기는커녕 더 심해지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요른은 여전히 막시는커녕 자기 몸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요른은 우울한 얼굴이 되어서 괜히 자기 오른쪽 팔꿈치를 주물럭거렸다. 며칠 전에 울퉁불퉁한 바닥을 기면서 비느라 멍이 들었던 게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이따위 얼룩도 못 고치는데, 저렇게 뻥뻥 뚫린 상처 같은 건 어림도 없다.

‘언제 나는 막시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막시에게 마법을 걸어 주고 있는 교수가 너무 부럽고 훌륭해 보여서 가슴 속이 온통 시큰거렸다.

내가 이렇게 병신이 아니면 좋을 텐데. 요른은 결국 울컥 토해 내듯이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자 학생들한테서 매일같이 들었던 말들이 문득 뇌 속에서부터 물이 넘치듯이 찔꺽찔꺽 넘쳐 나와 귓가에 넘실거렸다. 요른, 이 병신, 반쪽짜리 괴물아.

죄, 죄, 죄송하합, 니니다…… 얘 말하는 꼴 좀 봐. 하나도 안 고쳐졌어. 괴물이라서 사람 말 못 하는 거잖아. 얜 아무리 해도 평생 못 할 거야. 징그러워 죽겠어.

어쩌면 이렇게 생긴 것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징그럽고 끔찍할까. 너 알아서 좀 자퇴하면 안 돼? 널 챙겨야 하는 막시밀리안이 불쌍하지도 않아? 너랑 같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우리는 무슨 죄야? 병신, 병신아. 기형 괴물 새끼. 요른은 기사 생도나 마도 학원 학생들이 자신의 머리를 밟거나 배를 차면서 했던 말들을 마치 외우듯이 스스로 끊임없이 뇌리에 새겼다. 다 맞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언제나 요른에게 맞는 말만 해 주고 딱 걸맞은 대접만 해 준다. 그들도 물론 거짓말을 하면서 겉으로만 대충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게 훨씬 더 편할 것이다. 마치 요른이 멀쩡하고 평범한 아이인 양 속아 주는 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3년 내내 불편을 무릅쓰고 지칠 정도로 늘 열과 성을 다해 요른을 오직 진실하게만 대해 주었다. 그가 들어야만 할 만큼의 욕만 들려주고 그가 맞아야만 할 만큼 때려 주었다. 그러니 요른으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요른을 때려 주고 나면 늘 감사 인사를 요구한다. 요른도 물론 진심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바닥에 엎드려서 모두에게 인사를 올린다. 이 팔꿈치의 멍도 그러다가 생긴 것이다.

학생들이 해 주는 말은 모두 진실이다. 하지만 진실이라고 해서 마음을 다치지 않는 건 아니다. 요른, 병신 새끼. 병신 괴물 새끼. 요른은 속으로 몇 번이고 자기 자신을 향해 중얼중얼 욕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눈물마저 찔끔 흘러나와 버려서 얼른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요른이 울적해 있는 사이 학원 교수들과 성기사들도 대련장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물의 조각을 더 잘게 잘라 상자에 담고 밀봉했다. 그러고 나자 바닥에는 소년이 원래 입고 있던 우그러진 갑주와 찢어진 옷가지, 신발, 벨트, 어머니 초상화가 담긴 펜던트 등이 남았다. 교수들은 이 유품도 따로 챙겨 고급스러운 가죽 짐가방 하나에 담았다.

자리가 대충 정리되고 나자 다음 대련자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 생도는 기권 신청을 해 버렸다. 교수들도 상황을 고려해서 기권 신청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예정되었던 대련이 모두 끝난 꼴이 되어 행사는 거기서 종료되었다. 그다음에는 기숙사 식당으로 옮겨 가서 폐회식을 하고 모두 함께 식사를 들기로 정해져 있었다. 학생들은 열을 맞춰 서서 홀을 나갈 준비를 했다.

막시밀리안만은 열에 끼어들지 않고 따로 교수들 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들은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도 완고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바로 유품을 전달하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켈러 남작 부부는 저도 평소에 여러 번 뵈었던 분들입니다. 저희는 학우를 잃었지만 그분들은 아들을 잃었어요. 부모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알았네. 우리가 곧 전령을 시켜서 소식을 전하고 유품도 딸려 보내겠네. 자네는 식당으로 가지 말고 의무실로 가서 쉬어.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잖아.”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해야 합니다.”

막시밀리안이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기사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교수님들도 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교수들은 막시밀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다. 어깨 상처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겨우 겉만 봉합하고 출혈을 멈춰 둔 것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완고했다. 말을 타고 다녀오면 왕복 한 시간 정도면 되니까 별로 몸에 무리가 되는 일도 아니라고 우겼다. 결국 교수들도 허락했고, 유품을 담아 두었던 자색 가죽가방을 그에게 내어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가슴에 오른손 주먹을 대고 예를 표한 후 가방을 받아서 홀 밖으로 나갔다.

그는 정문 앞에 서서 학교 마구간 직원이 자신의 말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익숙한 인영이 곁눈에 비쳐 고개를 돌렸다.

“요른.”

막시밀리안은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요른.”

요른은 멀찍이서 쭈뼛대며 서 있다가 조금씩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막시가 이렇게 웃으면서 ‘우리 요른’ 하고 불러 주는 순간이 너무 좋았다. 막시는 요른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이 양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서서 손짓했다. 요른은 반색해서 팔짝 뛰듯이 발을 옮겼다.

하지만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몸에서 두 피트 정도의 거리 내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원 밖에 서듯이 발을 멈춘 채 그는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물었다.

“밥…… 같, 같이 안 먹먹어? 어디 가가는 거야……?”

“응. 아까 죽은 학생 유품을 부모님께 전해드리러 가는 거야. 밤늦게야 다시 학원으로 돌아올 거 같아.”

“으응…….”

요른이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막시밀리안은 그 모양을 보고 있다가 제 쪽에서 반걸음 정도만 더 그 열한 살짜리에게 다가갔고, 아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짐을 받아 냈다.

“우리 요른, 나 없는 동안도 착하게 있을 수 있지?”

“응, 응.”

“밥 많이 먹고, 말 잘 듣고 있어.”

“응!”

요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늙은 직원이 막시밀리안의 흑마를 데려왔다. 막시는 마지막으로 요른의 눈을 보고 웃어 주고는, 안장 뒤쪽에 짐가방을 고정시키고, 곧 자신도 등에 올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요른은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홀로 돌아가서 다른 학생들과 열을 맞추어 섰다.

학생들은 식당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앙홀에서 식당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쯤이 걸린다. 10월 중순의 늦오후라 이미 바깥은 어둑어둑했지만, 마법진을 써서 여기저기 희미하게 밝혀둔 가로등 덕분에 앞이 분간이 안 갈 정도는 아니었다. 

기사 생도들은 죽은, 아니, 죽은 것보다 더 못하게 되어 버린 학우를 생각하며 각자 속으로 되뇌었다. 멍청한 자식, 다른 검을 고르지. 괜히 막시를 따라잡아 보겠답시고 교수들이 내놓은 것들 중 제일 강한 검을 고르더니만 그 꼴이 되었다. 강한 마검은 강한 마물을 재료로 해서 제작된다. 당연히 잠식의 위험도 클 수밖에 없는데. 거의 식당에 다다라서야 생도 한 명이 제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괜찮아.”

“뭐가.”

“막시는 해냈잖아. 그 녀석은 훨씬 더 강한 마검을 몇 개나 자유롭게 다뤄. 지금은 심지어 가끔 실전도 다니잖아. 우리의 미래는 막시밀리안이야. 저런 게 아니야.”

“너 미쳤냐? 걔는 특별해. 그놈 따라잡으려다가 무슨 꼴…….”

“하지만 알잖아. 우리 시대에는 마검을 다룰 수 없으면 절대로 고위 기사가 될 수 없어.”

생도가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우리도 막시의 반, 반의반은 어떻게든 따라가야 해. 노력하자.”

다른 생도는 딱히 답하지 않았다.

이십 년 전, 흑마법사들로 인해 대륙 남단에 검은 숲이라는 게 생겨났다. 그리고 한 십몇 년 전부터는 그 숲으로부터 마물이라는 괴이한 생물체들도 기어 나와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에는 보통 검이나 정령검만으로는 모자란다. 이제는 마검을 다룰 수 있는 기사만 왕국군까지 올라가거나 성황국 소속 성기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마검은 정령검과도 다르다. 원리는 비슷하대도 복속에 실패할 때의 부작용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기사가 검을 온전히 자신에게 복속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검에 잠식당하게 되면……

흉측하게 변해서 동강 나 버린 동료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생도 몇몇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난 성기사는 포기할 거야. 그냥 보통 검이나 정령검만 배워서 지역 방위군 같은 걸로 빠지는 게 좋겠어.

학생들이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교감은 폐회 기념사를 바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학생들은 식탁 밑에서 서로 쪽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식사 후, 식당 옆 장기 보존 식품을 보관하는 창고 옆으로 와라.

폐회사를 맡은 교감은 죽은 생도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학생들 스스로 깊이 깨닫고 있을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였다.

“모두 오늘 밤에는 생도 리하르트 폰 켈러 군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 주기 바랍니다. 이상 폐회식을 마칩니다.”

물론이지. 학생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기숙사 방에 돌아가서 잠들기 전에 각자 추모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모두 함께 할 일이 있었다. 죽은 동료를 그 눈길과 표정으로 현장에서 모욕한 자가 있었다. 또 그 괴물이다.

그 조그만 괴물한테 자기 잘못을 일깨워 주고 벌도 줘야 한다. 폐회식이 끝나고 학생들은 차례로 식당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치 우연인 양 요른을 둘러쌌고, 양쪽에서 그 애의 양 겨드랑이 아래로 살짝 손을 넣어 팔을 단단히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그렇게 요른의 몸을 거의 들어 올리듯이 한 채로 데리고 나갔다.

갈색 머리에 호리호리한 마도 학원 학생 한 명만 거기 동참하지 않고, 식당에 혼자 남아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우수 학생은 아니지만,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 특별 유학생 자격으로 기부금을 내고 행사에 참여한 터였다. 텅 빈 식당에서 그는 혼자 고개를 내저었다.

‘저 꼬마는 왜 맨날 저따위로 잡혀 사는 거야.’

이 학교에 입학한 후 서른 번도 더 했던 생각이었다.

‘사실 이미 굉장한 마법사면서. 저항할 힘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요른은 뽑혀 온 우수 학생 중 가장 어렸고, 나이에 비해서도 몸집이 작고 비쩍 말라서 다루기가 아주 쉬웠다. 학생들은 작은 개나 토끼 한 마리를 몰아붙이듯 요른을 손쉽게 창고 외벽 한쪽으로 몰아붙여 주저앉혔다.

오십 명쯤 되는 학생들이 그를 둘러쌌다. 대부분 십 대 중후반이었다. 개중 대표 격인 두 명이 앞으로 나와서 요른에게 좀 더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마도 학원의 상급생 한 명, 기사 학원의 생도 한 명이다. 가문도 성적도 좋고 무엇보다 또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 구심점을 이루는 애들이다. 막시밀리안과도 많이 친해서 가끔 성에 놀러 오기도 했기 때문에 요른도 입학하기 전부터 둘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창고 외벽 쪽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기사 생도 카를이 요른 앞에 가볍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너 오늘 뭘 잘못했는지 알아?”

카를은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학생들 중 요른으로부터 답이 돌아오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른이 긴장해서 떨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모, 모모모르겠, 어요.”

“모모모몰라? 넌 왜 언제나 몰라.”

“죄, 죄송해, 요. 가가르쳐 주세요.”

요른이 손을 모으고 반쯤 엎드린 채 청했다.

“저 저는 모르니까, 부디 가가르쳐 주세요. 부부탁드드릴게요.”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픽 웃었다. 카를이 요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일어나 봐. 얼굴 좀 보자.”

요른이 눈치를 보면서 등을 펴고,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 꿇어앉았다. 마도 학원생 린다가 주문을 외워 불빛을 요른의 머리 주변에 쏘듯이 밝혔다. 그의 허여멀건한 얼굴과 머리카락, 목덜미가 어둠 속에 선명하게 드러냈다. 학생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아, 징그러워.”

“미친…… 진짜 맨날 봐도 어떻게 맨날 새롭게 징그럽냐.”

“어우, 이건 아니다. 린다, 빛 색깔 좀 바꿔.”

“여전히 징그러워? 좀 덜하게 해 보려고 노란빛으로 바꾼 건데…….”

“차라리 원래대로 해. 시체한테 따뜻한 빛 비춘다고 따뜻해 보여? 안 어울려서 더 소름 끼쳐.”

“알았어.”

린다가 투덜거리면서 주문을 외우고 빛 색깔을 바꿨다. 요른의 머리 색과 거의 분간이 가지 않는 흰 빛이었다. 학생들은 다시금 퍼붓기 시작했다. 벌을 주기 전에 늘 외모 품평부터 하고 시작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 같이 실컷 욕을 하고 나서야 한두 명이 요른에게 직접 을러 대기 시작했다.

“요른. 너 못생겼어, 안 못생겼어.”

“야, 제대로 말해 줘야지. 못생긴 건 그래도 사람이고. 얜 징그러운 거지. 요른. 너 징그러워, 안 징그러워. 대답해.”

“저저, 징그러…….”

“저는 징그러워요, 해 봐.”

“저저는 지, 징그러, 러워요.”

“전 생긴 것만 해도 죄예요.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부디 때려 주세요, 해 봐.”

“저저 생, 징징그러워요. 자 잘못, 때때려 주세세요.”

“병신이 그거 한마디 똑바로 못 해.”

학생이 씨근덕거렸다.

“이러면 우리가 너 잘못도 없다는데 억지로 때리는 거 같잖아. 너 안 잘못했어? 그런 거야?”

“아아아니에요, 저저 징그러워요. 때때려 주세요.”

요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부탁드려요. 잘못했어요. 이이상하게 새생겨서 죄죄송, 때려 주세요.”

학생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요른의 배를 발로 찼다. 요른이 헉 소리를 내면서 엎어지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밟았다. 생도 한 명이 급하게 외쳤다.

“야, 옷부터 벗겨야지.”

“아. 야, 너 옷 벗어.”

요른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겉옷을 입은 채로 맞아서 먼지나 핏자국이 남으면 나중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순찰병이나 사감 눈에 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른이 속옷 차림이 되자 학생들은 다시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손도 쓰지 않았다. 그저 밟고 차 댔다. 명치를 두어 번 단화를 신은 발끝으로 지르자 요른은 결국 먹은 걸 다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물러섰다.

“더럽게 진짜…….”

“또 이래, 또. 대충 눈치챘으면 먹지를 말았어야지. 너 이거 도로 먹인다?”

“관둬. 저번처럼 이상한 거 같이 주워 먹고 아파 버리면 골치 아파.”

요른은 멍하니 자기 토사물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요른은 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식당에서 학생들이 요른만 빼고 서로 쪽지를 돌려대는 걸 눈치챘기에, 식사 시간 후에 맞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럴 때면 꼭 배를 차이곤 하기에 안 토하려면 안 먹는 게 나았다.

‘하지만 막시가 밥 많이 먹으라고 했는걸.’

요른은 돌이켰다. 평소에 막시는 그냥 말 잘 듣고 착하게 있으라고만 하는데, 오늘은 밥도 많이 먹으라고 해 주었다.

밥 많이 먹고, 말 잘 들어. 요른의 머릿속에서 다시금 그 목소리가 울렸다. 요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던 암회색 눈동자, 따스하고 깊은 목소리. 도저히 막시의 그런 목소리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먹었다. 나중에 토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막시의 말을 배신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나았다.

학생들은 제 신발에 묻을까 봐 겁이 났는지 요른이 다 토하고 나자 토사물 쪽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더는 배를 차지는 않았다. 물러서서 도로 요른을 둥그렇게 둘러쌌을 뿐이다. 카를이 다시 앞으로 나와서 물었다.

“너 그따위로 생겼어도 우리가 평소에 다 참아 주는 거 알지.”

“네, 네.”

“우리가 너 생긴 것만 가지고는 안 때리잖아. 참잖아. 네가 다른 것도 잘못했을 때만 이러는 거잖아. 너 오늘 뭐 잘못했어?”

“모, 모르…….”

“또 몰라? 왜 맨날 자기가 해 놓은 짓도 몰라.”

“너 오늘 웃었잖아.”

옆에서 다른 기사 생도 하나가 끼어들어 조용히 말했다. 요른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어어, 네?”

“웃었어, 안 웃었어.”

“어언제, 뭘…….”

“또 이러네. 아까 대련장에서 웃었잖아. 마검 쥐고 쓰러진 내 친구 리하르트랑 그 동강 난 마물 번갈아 보면서 키득키득 웃었어, 안 웃었어.”

“저저는…….”

“너 기뻤지? 마검이 그 작은 마물의 복수를 해 줘서.”

카를은 요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넌 항상 사람보다 마물을 더 좋아하잖아. 대련 행사 있을 때마다 사람은 안 보고 늘 마물만 쳐다보고. 우리가 몰랐을까 봐? 오늘은 아주 신났더라. 드디어 마물이 사람을 잡았잖아. 그렇게 좋았어? 아니, 좋았다고 해도 꼭 우리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웃어야 했어?”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린 친구를 잃었는데. 우리 앞에서 그렇게 웃어야 했어?”

“…….”

“왜 말이 없어. 변명할 거 있으면 해 봐. 웃었어, 안 웃었어?”

요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른이 기억하기로는 자신은 웃지 않았던 거 같다. 마물과 쓰러진 생도 둘을 번갈아 쳐다보기는 했다. 그러면서 뭔가 생각을 하긴 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냥 멍하니 스쳐 가는 생각에 불과했기에 그게 정확히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그것이 자신의 얼굴에 어떤 표정으로 떠올랐던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웃지는 않았던 거 같다. 요른 자신의 감에는 그렇다.

하지만 막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금방 머릿속을 밝혔다.

―요른.

요른이 여덟 살 때 일이었다. 열두 살 난 막시밀리안은 요른을 자기 서재에 불러다 놓고 탁자 너머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곧 운을 떼어 타이르듯이 말했다.

[왜 거실 꽃병을 깼어. 그건 어머니가 많이 아끼시는 물건이야.]

[어? 아, 안 깼는, 데…….]

요른이 말하자 막시밀리안은 놀란 듯이 요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요른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가…….]

막시밀리안은 한 자 한 자 조심스레 내딛듯이 말했다.

[네가 깼어, 요른……. 기억 안 나?]

[아니, 아니야, 나 진짜로…….]

[요른.]

막시밀리안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양팔을 들어 올려 동작을 직접 그려 보였다.

[아까 오후에 네가 이렇게, 계단참 아래로 밀어서 깼잖아. 내가 우연히 거기 있었거든. 그래서 다 봤어.]

요른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런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막시는 몇 번, 아니 수십 번은 차분하고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있다 보니 요른은 점점 자신이 그런 짓을 한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시의 이야기가 마치 요른을 주인공으로 한 정교한 소설처럼 요른의 머릿속에 생생한 그림을 피워 올렸다. 그러자 더는 기억과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요른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 막시밀리안은 손을 의자 팔걸이에 내려놓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랬다가 다시 눈을 뜨고 나지막이 목소리를 냈다.

[요른,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 기억력에도 문제가 있는 거 같아.]

[어…….]

[언어에 문제가 있는 애들은 기억도 왜곡하기 쉽다고 해. 오늘 가정 교사한테서 배웠어. 책에서도 확인해 봤고. 너, 네 어머니 쪽 일이나 어린 시절도 다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잖아. 공식 자료가 다 있는 일도 다 가짜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좀 이상하긴 했는데…….]

막시가 요른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걱정 마. 오늘 꽃병 일은 모르는 척해 줄게. 나만 본 거 같으니까.]

[응.]

[고맙습니다, 해야지, 요른.]

[고, 고마워.]

[그래.]

막시가 그제야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요른. 이제부터 네 기억은 내가 대신해 줄게. 내가 곁에 있을 때는 내가 제대로 기억하면 되니까 괜찮아.]

[응! 고마워.]

[하지만 밖에 나가면 위험해. 자꾸 네 기억대로만 말하다 보면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게 될 거야. 물론 나야 네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잘못 기억할 뿐이라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막시밀리안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 말을 믿어. 내가 어떤 사람들 말을 믿어도 될지 미리 지정해 줄게. 그럼 그 사람들이 네 대신 기억해 줄 거야. 알았지? 넌 그 사람들 말만 믿으면 돼.]

[응.]

[그래. 우리 요른, 참 착하다.]

막시는 안심한 듯 웃으며 요른에게 초콜릿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그 후로도 요른은 막시의 집 안에서 그의 부모가 아끼는 수많은 물건을 깨거나 망가뜨려 놓고는 혼자서는 제대로 기억해 내지조차 못했다. 막시는 늘 요른이 기억해 내는 걸 도와주었고, 그렇게 도와주면서도 막시는 한편 요른의 잘못을 다 덮어 주었다. 그래서 결국 요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요른과 막시 둘밖에 모르는 비밀로만 남았다.

요른은 기사 생도인 카를, 마도 학원 학생 린다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이들은 모두 막시랑 아주 친한 사람들이다. 막시가 지정해 준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이 사람들을 믿으면 된다.

―말 잘 듣고 있어.

막시가 머릿속에서 다정하게 속삭였다. 요른은 다시 반쯤 엎드리며 청했다.

“모,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 세세요.”

“또야? 또 몰라? 네가 웃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예, 모모르, 저저는, 기억을 잘…… 부디 여러분, 이 가가르쳐 주세요.”

“…….”

학생들은 엎드려 비는 요른의 꼴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카를도 픽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요른이 카를이 웃는 소리를 뭔가 지시를 내리는 소리로 잘못 알아들었던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소름이 카를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말도 안 돼.’

그는 저항하려고 애썼다.

요른은 의심할 바 없이 징그럽게 생겼다. 아주 백지같이 새하얀 머리카락과 역시나 희박하리만치 옅은 은빛 눈동자, 정맥이 여기저기 푸르죽죽하게 비치는 허연 피부. 몸에도 살이 하나도 없고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기계 장치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다. 카를만큼 요른의 외모가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학생은 없으리라. 그의 어머니 쪽 친척은 오십 년 전에 멸망해 버린 옛 르핀 왕국의 기사였다. 대륙에서는 드물게도 해양 무역으로 무척 흥했던 나라 말이다.

덕분에 카를도 어린 시절 바다 너머 대륙과 그 민족들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이야기를 듣고 그림도 본 적 있었다. 그렇기에 카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바다 너머에조차 이렇게 생긴 인간은 없다고.

그는 자신 있게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요른의 외양을 징그럽게 여기는 건 전혀 나쁜 게 아니다. 요른은 우리 민족에 속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인간에 속하지 않는 거다. 저 애를 징그럽게 여기는 건 인종 차별 같은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능이라고.

그에 대해서는 카를은 여전히 확신했다. 저건 인간 꼴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 특히 이런 밤공기 속에서는……. 카를은 입 속에서 이를 악물고 주먹도 꽉 쥐어 보았다. 살결이 간지러웠고 가슴 속이 나비 날개처럼 파득거렸다. 비단실 같은 감각들이 뒤섞여 머릿속에 선명한 표현을 자아냈다.

‘사랑스러워.’

생각하자 결국 심장마저도 쿵 하고 두드려 맞은 듯이 두근거렸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괴롭힐 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끝 하나 안 다치게 지켜 줘야 하는데, 오히려 발로 차고 짓밟았다니. 

이 애는 아름답다. 달빛에 비친 새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눈동자는 그 어느 인간의 평범한 눈과 머리칼보다 순결하고 아름답고, 푸르스름하게 투명한 피부도 차라리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시피 성스럽다. 우리는 무슨 죄를…….

징그러워.

사랑스럽다.

사람 꼴이 아니야.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답다.

카를은 소리를 지르면서 손바닥으로 요른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떤 악마의 마법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너 무슨 짓 했어, 이 새끼야.”

요른이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카를은 그 머리를 밟았다.

“방금 또 무슨 마법 썼어.”

“야, 살살 해.”

“막시한테 말할 거야. 네가 또 홀림 마법 썼다고. 괴물 새끼가.”

“으아아냐, 아냐.”

뺨이 구두창에 눌린 채로도 요른은 미약하게나마 저항하듯이 말했다.

“아아아니야, 아무 마마법도, 막시한테는…….”

“했어. 했잖아. 이 개새끼가, 주문도 못 쓰는 게.”

거칠게 뱉어 내면서, 카를이 주위에서 말릴 새도 없이 요른의 어깨와 가슴 주변을 마구 걷어찼다.

“이 새끼 또 주문 없이 마법 썼어. 머릿속에 직접 들어왔어. 날 조종한 거야. 빌어먹을, 이 미친 게.”

“야, 그렇게 차면 죽어. 야, 야……. 얘 좀 잡아라.”

아냐. 아니란 말이야. 요른은 맞으면서 속으로 수도 없이 외쳤다.

남의 머리에 접속하는 건 물론 할 수는 있다. 마법이랄 것도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할 수 있었고 숨 쉬듯이 쉬웠다. 그렇게 생각을 직접 나누는 게 요른에게 있어서는 말 같은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쉬웠다. 왜 다들 그렇게 안 하는지 늘 궁금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할 줄 모르는 걸까 하고 건방지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막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흔해 빠진 마법일 뿐이고, 다들 당연히 할 줄 알지만 인간답게 참는 거라면서.

살인도 거짓말도 사실 누구나 언제든지 늘 할 수 있지만 절대로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서로 생각을 직접 읽어 내거나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 줄 수 있지만 절대로 하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거나 글자를 써서 언어로만 생각을 교환한다. 그게 사람 간의 예의이고, 법도이며 도덕이다.

요른이 하는 건 아주 나쁜 짓이다. 급수로 치면 거의 살인이나 같은 거다. 막시는 늘 그렇듯 요른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답게 말로 해야지, 요른.]

[그치만…….]

[어떻게…….]

막시가 답지 않게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이런 것까지……. 스스로는 모를 수가 있니.]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애쓰는 듯했지만, 곧 양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 모습이 요른의 가슴에 깊게 파고들었다. 막시는 요른이 아무리 바보 같아도 늘 상냥하게 타일러 준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지쳐 버린 듯 저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요른은 아주 어릴 때 이미 한번 막시를 깊이 상처 입힌 적이 있다. 그 기억을 돌이키면 마치 칼로 배 속이 헤집어지는 듯이 아팠다. 또다시 막시를 상처 입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요른은 급히 앞으로는 절대로 그 ‘마법’은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막시가 요른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다가 결국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 우리 요른 착하다. 이렇게 말 잘 들으니까 괜찮아.]

[응, 응.]

[내가 늘 곁에 있어 줄게. 넌 아무것도 몰라도 돼. 내가 다 대신해 줄게.]

막시가 약속하듯이 말했다.

[언제나 내 말만 들으면 돼. 그러면 아무 문제 없어. 할 수 있지, 요른?]

[응!]

[내가 늘 곁에 있을게.]

막시가 다짐하듯이 말하는 걸 들으며 요른은 자신이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른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고 병신이니까 막시는 늘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거다. 물론 빨리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어 막시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구제불능의 병신이라서 기쁠 때도 있었다. 동시에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르긴 했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그 마법은 몇 년 전부터는 전혀 쓰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안 했는데……. 하지만 요른은 생각을 입으로 뱉어 낼 수는 없었다. 숨이 컥컥 막혀서 뭍으로 끄집어낸 물고기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데만도 바빴다. 그러다가 정신을 놓아 버렸다.

학생들이 만류했지만 카를은 기절한 요른을 몇 번이나 더 발로 찼다. 학생들이 겨우 카를을 질질 끌어서 뒤로 데려갔다. 빌어먹을. 생도 하나가 중얼거렸다.

“저거 어쩔 거야. 숨은 쉬나?”

“누가 회복 마법 좀 써라.”

“저 새끼 괴물인 거 잊었어? 몸도 남다르셔서 보통 사람용 회복은 잘 안 들어. 지가 얼른 지 몸뚱이 용으로 좀 배우면 편할 텐데, 병신 새끼가 말더듬이라서…….”

“빌어먹을, 카를, 좀 참지.”

“저 더러운 게 먼저 마법을 썼잖아. 너도 당해 봐. 진짜 기분 더러워.”

“누구 물 가진 사람 없어? 물 좀 줘 봐.”

학생 하나가 가방에 넣고 있던 수통을 내놓았다. 다른 학생이 받아서 요른의 관자놀이에 찬물을 부었다. 요른이 헐떡이면서 깨어났다.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야, 너 걸을 수 있겠어?”

“…….”

요른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두 발로 섰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시야는 흐렸으며 아무리 눈을 깜박거려도 눈꺼풀 안으로 계속 지렁이 같은 실금이 기어 다녔다. 입으로는 토사물이라기보다 이제는 위장이나 허파 자체가 그대로 튀어나올 거 같았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린다가 손을 저어 보였다.

“됐다, 됐어. 카를한테 꽤 맞았으니까 그걸로 쳐 줄게. 오늘은 이만 인사하고 가 봐.”

“감, 사, 합니다.”

“그래그래. 야, 옷 입고.”

요른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지와 웃옷을 도로 입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비척비척 걸어서 어떻게든 기숙사의 다락 1인실로 돌아갔다. 요른의 기숙사 건물에서 가까운 곳에서 때려 주어서 다행이었다.

요른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씻거나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팠다. 그냥 통증만 있는 게 아니라, 몸이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카를한테 차인 가슴과 배 속이 얼얼해서 아직도 숨이 막혔고 계속 욕지기가 일어 입가로 침이 흘렀다. 요른은 웅크린 채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잘못해서 맞는데도 우는 건 뻔뻔하다. 그래도 늘 울음이 나와 버린다.

깜박 잠들었다 깨어 보니 막시가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막시.”

요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랬다가 온몸이 다 으스러지는 느낌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막시가 그 꼴을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복 마법을 아직도 못 쓰니까 이러잖아. 그렇지?”

“응…….”

“얼른 배워야지.”

“응, 응. 미안해.”

“애들한테 들었어. 또 잘못했다면서.”

“어, 으응, 하하지만, 말 잘 들었어…….”

더듬더듬 짚어 가며 요른이 답했다.

“벌 자잘 받았어. 시키는, 대로, 했어. 진짜야.”

“거짓말하면 안 되지. 벌 받는 도중에도 또 금지 마법 썼다고 들었어.”

“아니야!”

요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랬, 어, 진짜로, 아 아니야!”

“요른. 너 기억력에 문제 있잖아.”

막시가 나지막이 타일렀다.

“게다가 많이 맞았을 텐데, 그러면 정신도 더 흐려지니까 기억도 더 왜곡되지. 정말 마법을 안 썼다고 확신할 수 있어?”

“…….”

“네가 잘 기억이 안 나면 누구 말을 믿으랬지?”

“다른, 사람, 들.”

“그래. 그럼 어떻겠니. 네가 마법을 썼겠어, 안 썼겠어?”

“…….”

“요른?”

“썼, 썼어…….”

“그래. 그러면 사흘 후에 수업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 나한테도 따로 벌 받아야지. 몸 조금 나을 때까지는 기다려 줄 테니까.”

“……응.”

“착하다.”

막시는 웃으면서 두꺼운 장갑을 낀 왼손으로 요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갑에서는 말의 땀과 밤공기 냄새가 났다. 요른은 눈을 감았다. 막시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맞은 아픔도, 앞으로 받을 벌에 대한 두려움도 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을 받은 기분에 전신이 찌르르할 정도로 뭉클했다.

막시밀리안은 요른이 다시 자리에 눕는 모습을 지켜본 후 다락방에서 나왔다. 요른의 기숙사 방 열쇠를 복사해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다. 요른에게는 하나만 주었고, 오히려 막시 자신이 두 개를 챙겼다.

그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왼손 장갑을 벗어서 탁탁 털었다. 그렇게 두꺼운 장갑을 꼈는데도 뭔가 묻어 버렸다는 듯이 손바닥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아 내려다가, 문득 몸에 닿는 것조차 두려운 양 차라리 차가운 벽을 짚었다.

그는 잠시 벽에 손을 누른 채 서 있었다. 침범한 온기가 부디 씻겨 내려가기를 빌듯 기도처럼 눈을 감고서. 그리고 기사 생도 기숙사 부지로 돌아가는 길에 장갑을 소각장에 버렸다.

요른은 막시가 머리를 쓸어 주고 간 뒤로는 제법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요른은 수업에 늦을 뻔했다. 기상이 늦었기 때문이다. 몸은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고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요른은 무엇보다 거울을 보고 신음했다. 카를한테 뺨을 세게 맞은 바람에 얼굴까지도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어쩌지.’

얼굴이 이래서야 선생들이 알아챌 거다. 학원 폭력이 어쩌고 하면서 조사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학생들한테 피해가 간다.

‘내가 회복 마법을 못 써서 그래.’

요른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낫게 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주문을 외웠다.

불이나 공기, 물의 정령에게 청하는 건 다행히 치유의 정령에게 청하는 주문보다 훨씬 짧다. 요른은 상처가 난 곳을 중심으로 얼굴을 살짝 지졌다. 이래 놓고 혼자서 불 공격 마법 연습을 하다가 폭발해서 그슬렸다고 하면 된다. 요른은 말을 잘 더듬으니까, 좌표나 방향 설정에 문제가 있었겠거니 하고 선생들도 믿어 줄 거다.

요른은 다소 안심한 채 가방을 들고 강의동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져서 요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역시나 움츠러들게 된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요른!”

모르는 목소리였다. 요른은 가슴이 철렁했다.

요른은 자신이 오늘 무슨 짓을 했던지 돌이켜 보았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숙사동에서부터 강의동 방향으로 걸어온 것밖에 없었다. 방 밖으로 나온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뭔가 잘못했을 거 같지는 않은데.’

요른은 용기를 내어 소리가 났던 쪽을 돌아보았다. 결이 좋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키가 크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학생이 한 명 서 있었다.

그 갈색 머리 학생은 금세 걸음을 옮겨 요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길쭉한 몸이 제 옆에 바짝 달라붙어 서자 요른은 얼어붙고 말았다. 학생은 요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도 울리케 교수님 이론 수업 들으러 가는 거지? 같이 가자.”

학생은 상대가 반응이 없자 좀 겸연쩍은 듯 웃으며 덧붙였다.

“이 나이에 왜 그 수업을 듣나 싶지? 내가 워낙 늦게 입학했어. 참, 난 필립이라고 해. 이쪽 발음으로는 필립이지만 실은 ‘필리프 블랑쇼’야.”

그는 다소 이국적인 억양으로 자기 이름을 밝힌 다음 요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요른이 맞잡아 주지 않자 곧 머쓱하게 거두고, 말로만 재촉했다.

“가자. 늦겠다.”

요른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요른은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어 보려고 애썼다. 뭔가 비꼬는 말인 건 확실했다. 어디로 끌고 가서 몇 대 때려 주겠다는 걸 어떻게 에둘러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른은 워낙 사람 말을 잘 못하다 보니, 이렇게까지 은근하게 전해 오면 알아듣기가 힘들다.

하지만 알아듣기 힘들다고 해서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데다가, 그러면 더 혼이 날 테니까. 요른은 얌전히 필립이 이끄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요른은 속으로 점점 더 겁에 질려 가기 시작했다. 맞은 바로 다음 날, 그것도 수업이 있는 날 아침부터 끌려가는 일은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었다. 요른이 벌을 받느라 수업을 빼먹게 되면 선생들 눈에 띄어서 곤란하니까 학생들은 보통 수업이 다 끝난 늦오후나 저녁 시간을 이용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끌고 가다니, 자신이 모르는 새 뭔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러 버렸나 보다, 하고 요른은 생각했다.

‘어떻게 나는 이럴 수가 있지.’

요른은 눈앞이 캄캄해진 채 되뇌었다.

‘방에서 나온 지 겨우 오 분이야. 나는 어떻게 그런 짧은 시간 동안 또 뭔가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 버린 걸까.’

병신. 머저리 새끼. 요른은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동시에 자신은 이제 어디로 가서 맞게 될 것인지, 또 몇 사람이나 더 기다리고 있을지를 가늠해 보느라 옆에서 필립이 뭐라고 하든 거의 알아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몇 분 후 요른은 자신이 어느새 강의동 건물 앞에 서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울리케 선생의 이론 수업이 있는 건물이다.

필립은 계속해서 요른을 건물 안으로 이끌었고, 둘은 나란히 2층의 대형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의 눈길이 쏠렸다. 하지만 필립은 아무렇지도 않게 요른에게 물어 왔다.

“오늘 네 옆에 앉아도 돼?”

요른이 대답하지 않자 필립은 제 쪽에서 긴 의자에 먼저 앉고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려 보였다.

“앉아. 수업 같이 듣자.”

요른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학생들은 인상을 쓰고 이쪽을 말없이 노려보거나, 혹은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필립이 학생들과 함께 뭔가를 계획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지금 혼자서 튀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요른은 기억해 냈다.

입학 거의 직후에 요른에게 접근해 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때도 요른은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곧 천천히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학생이 혹시 진심으로 요른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요른은 곧 끌려가서 벌을 받았다. 상급생들한테서 오랫동안 벌을 받았고, 막시한테도 따로 벌을 받았다. 막시의 말에 따르면 그 학생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요른에게 관심을 가진 게 아니었다. 요른이 금지 마법을 써서 홀렸다는 것이다.

“머리에서 머리로 전하는 거 있잖아. 네가 또 그걸 써서 그 학생을 머릿속에서부터 유혹한 거야.”

약속을 어기고 금지 마법을 써 버렸으니 요른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막시는 냉랭하게 선고했다. 그는 하인을 불러서 요른을 지하 체벌실로 데려가라고 했다. 체벌용 소형 채찍인 마르티넷으로 등을 스무 대 때린 후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돌려보내라고.

그 냉랭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요른은 이가 딱딱 부딪치도록 떨었다. 마르티넷으로 맞는 건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그때는 처음이라서 너무 겁이 났다. 요른은 막시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려서 자신이 절대 일부러 마법을 쓴 건 아니라면서 용서를 빌었다. 모르는 새에 써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막시는 고개를 저었다.

“믿어 줄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익혀 둬야 해.”

“막시, 막시 나 무, 무섭…….”

“걱정하지 마. 네가 망가지지는 않을 정도로만 할 거야. 난 경찰이 시내에서 평민 꼬마 도둑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그 애들은 마르티넷이 아니라 아예 말채찍으로 맞기도 해. 네 나이 정도면 이 정도 채찍질은 괜찮아. 오히려 도둑들이 맞는 것보다는 조금 적게 기준을 잡은 거야. 날 못 믿는 거야, 요른?”

“아냐 미믿어, 그, 그렇지만.”

“잘못을 해 놓고 벌은 안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

막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자신도 몰랐다는 건 믿어 줄게. 무심코 써 버렸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말로만 약속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도 익혀야 해. 그런 마법을 쓰면 벌을 받는다는 걸 네가 아주 뼛속 깊이까지 깨달아야지. 나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말로 약속을 해 봤자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거니까, 때려서 가르칠 수밖에 없잖아.”

“난…….”

“네가 스스로 조절을 못 하니까 이쪽에서 이런 수고를 해야 해. 때리는 건 노동이야, 요른. 나도 힘들어. 내 하인도 힘들겠지. 상급생들도 매번 힘들 거야. 그런데도 너를 위해 일을 해 주는 거잖아. 받아들여.”

요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만 숙였을 뿐이었다.

벌을 받고 나서 요른은 일주일은 똑바로 누워서 잘 수가 없었다. 옆으로 누워도 갈비뼈 쪽이나 옆구리에 생긴 상처가 배겨서 아팠고, 그렇다고 아예 배를 깔고 엎드리면 숨쉬기가 불편했다.

막시가 거의 매일 밤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서 침대 곁에 앉아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요른은 울다가 단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시는 일주일 내내 찾아와 주었고, 마지막 날 밤에는 위로하듯이 타일러 주기까지 했다.

“다시 이런 일이 없으려면 네가 똑똑히 자각하고 있어야 해.”

요른이 무척 좋아하는 깊고 낭랑한 목소리가 어스름한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너를 좋아하는 건 불가능해. 너는 생긴 것도, 말도, 성격도, 인성도 모든 게 다 이상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너를 보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끼게 되어 있어. 나처럼 너를 혐오하면서도 잘 대해 주는 건 가능해. 그건 자기 수련이나 기사도의 문제거든. 하지만 타인이 너를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질 수는 없어.”

요른은 끄덕거렸다. 어차피 매일같이 들어 왔던 말이고 그저 당연한 얘기였다. 다만 그는 막시의 음성이 파도처럼 자신의 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걸 눈을 감고 즐겼다. 언제까지라도 그가 그렇게 침대 머리에서 조곤조곤 속삭여 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면서.

“누군가 네게 다정하게 군다면 그건 둘 중 하나야. 너를 이용해서 내게 접근할 생각이거나, 아니면 네가 또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금지 마법을 써 버린 거야.”

막시는 가만히 요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느 쪽이든 다음부터는 꼭 내게 보고해. 알았지? 네 쪽에서 먼저 알려 주면 벌은 주지 않을게.”

요른은 끄덕거렸다. 그러자 막시는 결국 또 못 이긴 척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착하다, 요른.

막시는 그날도 장갑 낀 손으로 가볍게 요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떠났다. 요른은 편안하게 잠들었다.

그로부터 3년 뒤, 10월 중순. 강의실 한가운데에서 요른은 필립의 얼굴을 바라보며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 버리다니.

막시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엇보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야 해.’

요른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카를한테도 그렇고, 오늘 이 필립이라는 사람에게까지 이런 짓을 하다니. 아무래도 요즘 자신은 무슨 배설물을 질질 흘리듯이 마법을 써 버리곤 하는 거 같다고 요른은 생각했다. 모르는 새에 이 둘 말고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뭔가 피해를 입힌 건 아닐까.

이 몸은 대체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막시는 요른이 자진 신고하면 벌은 안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스스로 청해서라도 벌을 받는 게 옳지 않을까 하고 요른은 생각했다. 부디 때려 달라고 엎드려서 비는 게 나으리라. 지난번보다도 훨씬, 훨씬 더 많이 때려 달라고 해야 한다. 자신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요른……?”

필립이 요른의 안색을 살피다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괜찮아?”

요른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필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왔기 때문이다.

요른은 전기가 통한 개구리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서 그 손을 피했다. 그리고 가방을 도로 집어 들고는 처음에는 뒷걸음질 치듯이, 그다음에는 몸을 돌려 재빨리 달려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필립이 등 뒤에서 두어 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무시했다.

‘저 애는 대체…….’

필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학대받는 아이들의 태도나 반응에 대해, 개중에서도 정신적으로 바닥까지 학대받는 애들에 대해 좋든 싫든 잘 알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길바닥의 고아 애들을 꾀어서 돈 한 푼 주지 않고 일꾼으로 부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필립은 생각하며 요른이 나가 버린 뒷문 쪽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앞문으로 교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립은 기다란 강의실 탁자 위에 책을 펼쳤다. 오늘은 마침 성황과 제후, 왕과 귀족, 또 귀족 중에서도 여러 직위를 세세하게 다룬 부분 진도를 나가게 된다. 그는 다음 시간에 진도를 나갈 만한 부분도 미리 넘겨 보았다. 법관, 세무사, 상인, 농민, 농노, 마부, 자택 고용인, 종자, 병사, 마구간지기 등 평민의 각종 직업과 그 위계가 나열되어 있다.

‘성황, 제후, 왕, 귀족……. 평민.’

필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새삼 책의 맨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 보았다. 정령의 다섯 속성을 분류해 둔 표가 나와 있었다. 불, 물, 공기, 흙, 치료.

그다음은 동식물에 관한 장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을 정령의 5대 속성에 따라 분석하고 분류해 둔 도표가 몇십 페이지에 걸쳐 가득 그려져 있다.

그다음에는 광물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분석 및 분류해 둔 장이 나온다. 그리고 기후, 날씨, 지형에 관한 장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 뒤로도 식기나 의자, 책상 등 사람이 만든 물건들을 역시나 정령 속성에 따라 분류하는 장이 등장하고, 이는 오늘 배울 귀족과 평민 등 사람들 사이의 위계를 다루는 장으로 또 그대로 이어진다.

‘정말로?’

필립은 생각했다. 이 마도 학원에 가득 찬 귀족 자제들이야 이런 의문을 마음에 담아 볼 이유가 없겠지만, 필립은 열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거의 평생 곱씹어 왔다.

‘동식물이나 광물, 기후는 그렇다고 쳐. 그런 거야 정령 속성에 따라 분석하고 분류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정말로 귀족과 평민, 재상과 사업가 사이의 구분이 동식물의 분류만큼 명백한가? 소위 자연스러운 거야?’

필립은 교수의 설명을 귓등으로 흘리며 책을 이리저리 앞뒤로 넘겨 보았다.

‘그런 것조차 정말로 정령의 다섯 속성에 귀속되는 질서인가?’

물론 필립은 이런 게 소위 이단적인 생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황께서 가라사대, 자연과 인간은 하나다. 자연의 모든 것은 5대 정령의 속성에 귀속되므로, 인간이 제 손으로 만들고 행하는 모든 것도 그러하다.

그러니 국경이나 신분 차이 또한 뱀과 말, 석회암과 사암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이며 신성한 것이다. 인간이 이 자연적 조화를 깨뜨리려 하면 정령의 저주를 받아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성황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가 이렇게 말로만 포교했더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강림했던 이백 년 전, 전쟁과 농민 봉기로 황폐해져 가던 대륙의 왕들이 강제로 서로 평화 협정을 맺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성황은 실제로 마법이라는 걸 쓸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 처음으로 나타난 ‘마법사’라는 존재였다.

헤르타가 강림하여 포교에 나섰을 때 여덟 왕국은 몇 차례나 그녀에게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불과 바람의 공격 마법으로 가장 강력한 기병대조차 순식간에 몰살시켰다. 한편 나무와 흙의 방어 마법을 써서 자기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전투 사이사이에는 주변 마을의 다치고 병든 민간인들을 찾아가 치료 마법으로 회복시켜 주는 자비까지 보이면서, 동시에 그녀는 공기의 정령을 이용한 전송 마법으로 각 영주와 왕들의 귀에 끊임없이 전했다.

[나는 이 세계의 질서를 완벽하게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이런 힘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정령의 존재를 믿으십시오. 세계의 모든 것이 그들에 귀속되어 있음을 믿으십시오.]

강림한 지 고작 육십 일 만에 헤르타는 승리를 거두었다. 여덟 왕국의 왕들이 모두 그녀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했던 것이다.

성황이 된 헤르타는 대륙 한가운데에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성황국을 건립했고 나머지 여덟 왕국을 이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성황이 여덟 왕국의 정치적 주권을 앗아가 버린 건 아니다. 그로쉔 왕국을 포함한 여덟 왕국은 각각 독립 국가로서 주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단, 대륙 내 국제 관계에 있어서만은 황국법에 따라 대륙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각자의 이득을 넘어서서 긴밀하게 협력하게 되었다. 일종의 종교적 통일을 이룬 셈이다.

‘마법이라.’

필립은 기사와 마법사를 다룬 페이지를 쓸어 보며 곱씹었다. 성황이 당시 승리했던 건 실제로 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땅을 뒤집고 강을 일으켜 세우며 세계가 정령의 질서에 따라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성황의 자리에 오른 후 헤르타 폰 아우렐리우스는 대륙 각지에 학교를 세우는 데에 힘썼다. 시민은 일곱 살이 넘으면 반드시 황국민 학교라는 곳에 입학해서 정령 속성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금 그 정령 속성에 따라 동식물과 광물에서부터 시작해서 각 민족과 계급, 직업에 대해서까지 모두 다 한 줄에 꿰듯이 배운다. 성황국이 건립된 이래 대륙의 모두가 그런 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는 실제로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나는 아직 공기 마법과 불 마법 약간밖에 못 써.’

필립은 씁쓸하게 되뇌었다.

‘배움이 너무 늦었지. 하지만 그런 나도 알아. 이런 마법이나마 쓰려면 입문 수업은 들어야 했고, 그 얇은 책에 실린 분류표만큼은 다 외워야 했으니까. 그리고 마법을 쓰는 동안 몸으로 깨닫고 말지. 이게 진실이라는 걸.’

필립이 익힌 입문서는 고작 백여 페이지짜리였지만, 마도 학원 상급생들은 이삼천 페이지가 넘는 분류표들을 머릿속에 담는다. 자격을 얻은 마법사들은 수만에 이르는 분류표를 외우고 다닌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그 수만 개의 도표들을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도표로 합쳐 놓는다. 이는 한 장의 카펫에 비유할 만하다. 5대 정령이 카펫 중심에서 핵을 이루고, 그 주변으로 대륙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물과 생물들이 오밀조밀 수놓인 무늬처럼 서로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거대한 분류표. 이 분류표를 마법사들은 ‘세계 타블로’라고 부른다.1)

성황 헤르타는 타블로를 마치 타고난 듯 머릿속에 담고 있는 존재다. 그녀는 모래알 하나만 보아도 그것이 타블로상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곧바로 정확히 짚어 낼 수 있다. 다른 마법사들은 후천적으로 책을 읽으며 열심히 익힌다.

마법사라면 누구든 타블로를 필요할 때 언제든 머릿속에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푸라기에 마법으로 불을 붙이려면, 타블로 한중간에 수놓인 불의 정령으로부터 가장자리에 수놓인 ‘지푸라기’라는 사물까지 이어지는 가장 빠르고 적확한 길을 찾아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을 묘사하는 주문을 외워 주어야 한다.

‘나는 솔직히 도표 수만 페이지를 다 외우고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 놓기까지 할 자신은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필립은 새삼 되씹었다. 그는 스스로 마법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조금 다른 목적으로 학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알겠어. 마법은 실제로 타블로에 따라 작동한다. 세계란 정말로 그렇게 생겨 있는 장소인 거야. 성황은 역시나 진실을 말하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면…….’

필립은 무심코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그리고 내가 아무리 돈을 벌어 봤자, 선박을 사들이고 상점을 열어 봤자 귀족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단 말인가. 평생 이대로 그 사치스러운 자들에게 세금이나 뜯기고 살아야 하나.’

성황이 옳다면 세상이 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세계는 영원히 타블로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조화를 유지해야만 한다. 인간이 그 질서에 불복하여 사욕을 챙기려다가는 멸망의 길을 갈 뿐이다.

하지만…….

필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교수가 하는 말을 귀에 담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머니의 사업이 잘나가고 있다고는 해도 유학 비용은 만만치가 않다. 귀한 강의를 이런 식으로 흘려 버리는 건 사금을 손가락 사이로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수업이 끝나고 필립은 짐을 챙겨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느새 눈앞에 다른 학생들 세 명이 와서 서 있었다. 개중 한 명은 필립도 아는 얼굴이었다. 린다 투트 크라흐트.

“잠깐 얘기 좀 하자.”

린다가 나직이 말했다.

필립은 피식 웃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던 탓이다.

그는 나머지 둘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이 이 백작 영애와 같이 다니는 모습을 몇 번쯤 보긴 한 것 같았다. 기 센 쪽에 붙어 다니는 떨거지들쯤 되나 보다, 짐작하며 그는 린다에게 되물었다.

“왜?”

“나가서 얘기하지. 좀 조용한 데로 가자.”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될까? 나는 다음 수업도 있어서, 어디 나갔다가 오려면 좀 번거로운데.”

“아까부터……. 필립 블랑쇼랬나. 너 평민 아냐? 우리한테 존대 안 해?”

“학원에 들어온 이상 다 같은 학우지 뭐.”

필립은 입학식 때를 떠올리며 여상스레 답했다. 그러자 린다도 뭔가 기억난 게 있었던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옆의 둘이 쏘아 대기 시작했다.

“미쳤군.”

“페랑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그 나라는 상것들한테도 너무 권한을 많이 줘.”

“돈만 많은 너희 같은 치들이랑 우리가 같아? 마법을 입문이라도 했으면 잘 알 텐데. 타블로상에 위치가 달라.”

“예예, 나으리들. 존대해 드릴 테니 부디 하고 싶은 말씀만 얼른 해 주십시오.”

필립이 귀찮다는 듯 짐짓 허리까지 숙여 보이며 말했다.

“저는 돈만 많은 치라서 시간도 돈으로 세는데, 덕분에 벌써 십 페니는 잃은 거 같네요. 상인 체질이라 슬슬 오금이 다 저릴 지경입니다.”

“…….”

린다가 찌푸리고 있다가 내뱉었다.

“요른에게 접근하지 마.”

“예?”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모른 척 반응했다. 린다가 다시 운을 떼었다.

“그 괴물 말이야. 그거, 마물 새끼야. 반쪽은 마물이라고. 그 더러운 새끼 건드리지 마. 네 말대로 어쨌거나 같은 학우니까 널 위해서 해 주는 얘기야. 넌 유학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는 거 같으니까.”

“걔가 마물이라고요?”

필립이 짐짓 놀란 듯 되물었다.

“와, 책에서 본 마물이랑 완전히 다른데요? 걔는 그냥 쪼끄만 애 같던걸요.”

“……반쪽짜리라고 했잖아.”

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필립은 그녀의 얼굴을 새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로쉔 백작가 투트 크라흐트 집안의 둘째 딸, 린다 투트 크라흐트는 예쁘고 실력도 좋아서 학원에서 인기 있는 학생이다. 황색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가 강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린다가 실력이 좋다고 해 봤자 출신 가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크라흐트가는 유서 깊은 마법사 집안이다. 린다의 어머니는 왕국 기사의 파트너고, 아버지는 성황국 마도 협회 흑마법 대책부에서 일한다. 둘 다 그쪽 일이 하도 바빠서 영지 관리 일은 장녀에게 미리 다 물려주다시피 한 형편이다.

장녀 게르다는 마도사의 길은 포기하고 일찍부터 영지 관리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둘째 린다가 상대적으로 재능이 있었던 편이라, 부모가 어릴 때부터 많은 지원을 해 주었고, 마도 학원에도 일부러 기부금을 잔뜩 부어 조기 입학시켰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이 차녀의 성적은 학원에서 겨우 상위권에 드는 정도에 그쳤다. 올해 열일곱이라 졸업 때가 다가오는데도 내내 모범생이라면 당연한 정도의 성과만 냈을 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적은 없다. 작년에는 성황국 마도 학원으로의 편입도 실패했다.

그러니 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해 봤자 집에서는 꽤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린다는 필립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새삼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튼 내 말 들어. 우리가 걔 때릴 때도 주로 발로만 차는 거 알아? 옮을까 봐 그래. 마물의 살이 맨손에 닿는 건 위험할 수도 있잖아. 옆에 안 가는 게 좋아.”

“마물도 애를 낳을 수가 있나 봐요? 그것도 사람이랑?”

“넌 어디까지 무식한 거야? 당연히 못 낳아.”

“예? 그런데 어떻게……?”

“포자 말이야, 포자.”

린다 옆에 있던 학생이 목청을 높여 끼어들었다.

“알지? 마물은 아무리 부숴도 살아 있잖아. 가루가 되어 버려도 생명의 마지막 조각은 남아 있단 말이야. 그런데 기사들이 상자에서 넣어서 운반하다가 가루가 새어 나갈 때도 있어. 상자 틈으로 빠져나가서 꽃가루나 곰팡이 포자처럼 넘실넘실…….”

“요즘은 물론 많이들 조심하니까 그런 일은 없어.”

린다가 가만히 잘라 들며 제 친구한테 눈치를 주었다.

학생은 주눅이 든 듯이 입을 다물고 한발 물러섰다. 린다가 다시 이어 갔다.

“하지만 십 년쯤 전에는 아직 기사들도 마물의 특성을 잘 몰랐으니까, 간혹 사고가 나기도 했어. 이 그로쉔 수도 외곽에서도 마물 조각을 실어 가던 마차가 엎어지는 불상사가 있었지. 상자에 금이 가면서 포자 같은 게 새어 나왔고, 수도 쪽 허공으로 넘실넘실 날아갔다더군.”

“저런.”

“그 사고가 났던 시기가 요른이 잉태되었을 만한 시기랑 딱 겹친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마 그 포자가 수도까지 날아와서 사람 몸속으로, 그것도 하필 가임기 여성의 배 속으로 들어갔던 걸 거야.”

“와, 그거 재밌네요.”

필립이 추임새를 넣듯이 끼어들었다.

“요른네 엄마가 그런 경우란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넘실넘실 어쩌고 하다가 자궁에 쏙 들어가 버리는 건 실제로 증명하기가 엄청 힘들 거 같은데, 그 여자가 마물 애를 임신했는지 어떻게 알아냈대요?”

“아니, 너는 대체…….”

린다가 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걔 생긴 꼴을 보면 모르겠어? 그럼 그게 사람 애로 보여?”

“음? 저는 요른의 머리랑 피부는 그냥 알비노가 아주 심한 건가 했는데요. 눈은 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색소 쪽 돌연변이일 수도 있고요.”

“알비…… 뭐? 돌……?”

“아이고.”

필립이 씩 웃었다.

“저희 페랑 왕국이 마법은 좀 떨어져도 생물학이 발달해서요. 이거 영 모르시는 용어를 써 버렸네요. 죄송해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 애도 저렇게 생길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로쉔 백작가의 린다 투트 크라흐트 님.”

필립이 다시금 예를 갖춰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외모만 가지고 사람더러 마물이라니, 이 나라 귀족들은 좀 무식한 구석이 있네요. 게다가 저 애는 프란첸가에서 후원해 주는 아이 아닙니까? 평민인데도 후원을 받으려면 웬만한 재능 가지고는 안 될 텐데요.”

“우리가 생긴 것만 갖고 그러는 게 아니야. 요른의 생모라는 여자는 미혼모였어. 아비가 누군지도 몰라. 주위에서 아무리 다그쳐도 끝까지 안 밝혔대. 그래서 애가 성도 없이 그냥 요른인 거야.”

린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수상하지 않아? 게다가 그 여자는 요른을 낳고도 출생 신고도 안 했어. 자기 애에 대해서 감추고 싶은 게 여간 많은 게 아니면―.”

“아이고, 맙소사.”

필립이 픽 웃었다가 문득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 나라 귀족은 평민의 삶에 대해 그렇게도 모릅니까?”

“뭐?”

“저도 제 나라에서는 페랑의 귀족에 대해 불평하곤 합니다만, 이건 좀 심하네요. 나이도 열일곱이나 되신 분이 말이죠. 평민 미혼모가 애 아비를 못 밝히는 경우는 흔하다 못해 넘칩니다. 아비 되는 자한테서 직접 협박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신분이 다른 자라 스스로 조심하는 걸 수도 있어요. 출생 신고도 마찬가지죠. 평민에, 그것도 여자는 워낙 배운 게 없으니 관청에 신고라는 걸 할 생각조차 못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너 아까부터 말투만 존대지, 내용은…….”

“네?”

“……됐어. 언젠가 정령들이 네 태도를 벌주실 거다. 그리고 요른이 마물의 애라는 데에는 뭣보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 너도 알 텐데.”

린다가 잔뜩 찡그린 채로도 또렷하게 뱉어 냈다.

“그 잘난 재능 말이야. 걔는 주문 없이 마법을 쓸 줄 알아.”

“아아, 그거요. 예, 저도 잘 알죠.”

“걘 말을 더듬거려. 타블로도 잘 못 외워. 이론 쪽은 솔직히 아주 쩔쩔매지. 그런 주제에 시켜보면 어떻게든 마법을, 그것도 어른도 잘 못 다룰 어려운 마법들을 써낸단 말이야. 그러니 늘 우수 학생으로 뽑히곤 하는 거야. 프란첸가의 후원을 받는 것도 그 덕이야. 어떤 재능이든 재능이 급한 시대니까 거리에서 주워 와서 여기 입학까지 시킨 거지.”

팔짱을 낀 채 그녀는 마치 선포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마법을 쓰는 방식이 아니야. 반쪽이라도 마물이 아니고서야 불가능…….”

“그러게요. 주문도 없이 타블로도 안 외우고. 마치 그저 타고난 듯 마법을 쓰다니 도무지 평범한 인간 같지가 않죠.”

필립이 잘라 들었다. 그리고 일부러 천진한 투로 말했다.

“저도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요른은 꼭 성황 폐하 같아요. 그렇죠?”

린다가 입을 벌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옆에 있던 둘도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너, 너 이 미친―.”

“예? 아니, 그렇잖아요. 성황 폐하도 주문도 없이 온갖 마법 막 다 쓰시니까요. 타블로도 뭐, 머릿속에 타고나셨으니 따로 공부 안 하시고요. 제 말은요, 이왕 특별 취급할 거면 우와, 저 요른이란 애 성황 폐하랑 진짜 비슷하다, 이래도 된단 말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들 미워하고 마물 취급까지 하려고 드는지, 원. 무식해서들 그런가? 아니면…….”

필립이 린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

“설마 질투이려나?”

“…….”

린다가 순간 하얗게 질린 채 굳어 버렸다. 필립이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진짜 다음 수업에 늦겠어요. 이만 갈게요.”

다른 학생 둘이 달려들어 막을 채비를 했다. 하지만 린다가 제지했다. 그리고 조용히 전했다.

“난 경고했어.”

“예예. 잘 들었습니다.”

“마물이 옮아도 모른다.”

“예예예.”

필립은 강의실을 나와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멍청이들.’

건물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마물의 애? 포자가 사람 배에 들어가서 뭐가 어째? 성황 폐하도 웃으시겠다. 무식한 것들은 답이 없어.’

아무리 타블로의 질서가 어쩐다 해도 필립은 역시 평생 저런 귀족들의 수발이나 들며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멋 모르는 사람들은 귀족이 평민을 보호해 주니까 그들을 섬기는 건 당연한 거라고 떠들어 댄다. 기사와 마법사 대부분이 실제로 귀족이긴 하니까. 하지만 그거야 학원 등록금이며 장비값이 워낙 비싼 데다가, 귀족 자제에게는 입학 특혜로 할인까지 엄청 해 주니까 그런 거 아닌가. 딱히 그들만이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왕국 마도 학원이나 기사 학원의 문은 원칙적으로는 평민에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할인 없이는 부담이 너무 크다. 필립처럼 평민 중에서는 극부유층에 속하는 집안이라 해도 몇 년 후에는 허리가 휘어지고 말 정도다.

귀족은 대대로 왕국의 안녕에 봉사해 왔으니 왕가에서도 그들에게 특혜를 주는 게 당연하다는 게 핑계지만, 사실은 능력 있는 평민이 상류 사회로 진입하는 걸 막으려는 제도다.

‘머저리 같은 계집애가.’

필립은 린다의 오만한 얼굴을 떠올리고서 속으로 울컥해서 되뇌고 말았다. 사실 더 심한 욕을 하고 싶었지만, 백작 영애께서 굳이 외국 상민 놈에게 사적으로 경고하러 찾아왔던 마음을 짐작하고서 꾹 참았다. 그래도 발걸음이 절로 거칠어졌다.

‘마물 같은 소리 하네. 밑바닥 평민 꼬마가 엄청난, 설명하기도 어려운 재능을 보이니까 귀족 자제 놈들이 다들 화가 난 거지. 애가 생긴 것도 유별나다 보니 별 거지 같은 소문을 다 붙여서 괴롭히기 딱 좋은 거고.’

그래도 요른은 사실 운이 아주 좋았던 경우다. 바느질로 연명하는 어린 평민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던 아이니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대도 골목에서 도둑질이나 하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애는 귀족의 눈에 들어 마도 학원에 입학했다. 보통 귀족가도 아니라 폰 프란첸 공작가의 후원을 받으며 말이다. 그리고 그 애가 프란첸 부부의 눈에 띄게 된 계기는…….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 필립은 무심코 입 속으로 그 공작가 독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그는 저 린다 같은 멍청이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지.’

필립은 불편한 마음으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인정하듯이 생각했다. 이 시대의 이상적인 귀족상이라는 걸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그 소년의 모습이 될 것이다.

막시밀리안에 대해서는 필립도 페랑에서부터도 익히 얘기를 들어왔다. 그 소년은 단순히 프란첸 가문의 독자라서 유명한 게 아니었다. 인성, 태도, 지성이며 실력, 모든 걸 통틀어서 기사 생도들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특히 그의 마검을 다루는 능력에 대해서는 온갖 낭설이 국경을 넘어서까지 흘러 다녔다.

필립은 소문이 좀 과장된 게 아닌가 했다. 열너덧 살 나이에 마검을 몇 개나 자유자재로 다루고, 성기사들과 함께 검은 숲 근처로 실전까지도 나다닐 정도의 생도라니 말이다. 후반 지원 부대 쪽에 배치된다고는 한다지만, 그래도 그만한 어린 생도가 마물 대상의 실전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로쉔 수도로 유학을 온 후 필립은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이 동료 학생이나 교수들과는 보통 검으로, 초대받아 들른 성기사들과는 마검으로 대련하는 모습을 보며 필립은 뼛속까지 소름이 쭉 끼친 채 깨달았다. 이 소년은 명실상부한 천재라고.

그러나 그는 검에만 천재인 게 아니었다.

인성을 갈고닦는 것도 능력으로 칠 수 있다면 프란첸의 독자는 그에 있어서도 천재임이 틀림없다고, 필립은 사 개월 전 입학식 때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은 채 확신했다.

필립이 유학을 다녀오겠다는 뜻을 굳혔을 때 주변 여러 사람이 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경고했다. 그로쉔 왕국은 대륙의 여덟 왕국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축에 속한다고 말이다.

“그로쉔의 마도 학원이야 유명하지. 그러니까 네가 우리 협회 일을 도와줄 거라면, 그 나라 수도로 유학을 가겠다는 건 말리지 않아.”

필립의 어머니도 걱정스레 운을 떼었다.

“하지만 그로쉔은 페랑과 달라. 페랑에서는 우리처럼 부유하고 충분히 교육을 받은 평민은 귀족과도 사교하지 않니. 직위나 땅을 던져 주는 건 아니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 터놓고 얘기는 한단 말이야. 하지만 그로쉔에서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을 거야.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모든 면에서 아주 엄격하게 지켜지는 나라란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이것도 어쩌면 그 나라가 마법이 강한 것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타블로가 워낙 엄중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필립이 씩 웃으며 받아 말했다.

“페랑이 오히려 특이한 거죠. 이 대륙 다른 나라들은 안 그렇잖아요. 협회 일이 아니더라도 저도 슬슬 이 우물에서 나가서 넓은 세상 좀 제대로 경험해야죠.”

그러니 필립은 학원을 꽉 채운 귀족 자제들부터 꽤나 경원시 될 각오를 하고 유학을 왔다. 그는 자기 집안의 자금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졸업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3년쯤 버티면서 중급반까지만 수료하고 마법의 기본만 익혀 두려고 온 거였다.

그러나 그로쉔의 현실은 그가 각오했던 것보다도 더했다. 입학식 때부터 그는 사방에서 따갑고 공격적인 시선을 느꼈다. 필립은 그해 특혜 없이 입학한 유일한 학생이었기에 홀에 배정된 자리부터가 달랐다. 맨 뒷줄에 혼자 덩그러니 동떨어져 서 있어야 했으니 평민이라고 이름표를 붙여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신입생들은 입학식 내내 필립을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제 친구와 잡담하는 척하면서 이 자리에 ‘돼지’가 한 마리 와 있다고 일부러 큰 소리로 지껄이던 학생도,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화를 입는다고 짐짓 걱정하는 척 중얼대며 지나가던 강사도 있었다. 아무리 각오를 하고 왔다고는 해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필립은 반은 우울하고 반은 화가 난 채로 입학식을 버텼다.

입학식이 끝난 직후 같은 홀에서 선후배 간 사교회가 열렸다. 신입생은 물론 상급생들까지 몰려서 홀은 온통 북적거렸다.

필립은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는 학생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자기 쪽에서 굳이 말을 걸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홀을 가득 채운 학생들이 다 오만한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유학을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뼛속까지 한기가 들 만큼 화가 치미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페랑의 귀족들도 본심은 쓰레기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는 생각했다.

‘이쪽 어린놈들은 비교할 수조차 없군.’

필립은 여기저기 뷔페식으로 놓여 있는 먹거리나 잘 골라 먹고 배정받은 기숙사 방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음식이나 음료의 질은 훌륭해 보였기에 맛은 보고 싶었다. 막 접시 하나를 꽉 채워서 무알콜 맥주까지 집어 들고 구석의 스탠드 테이블로 돌아오던 중에 그의 귓가에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안녕. 필립 블랑쇼 맞지?”

홀의 소란을 뚫고도 구석구석까지 다 전해질 만한, 울림이 좋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필립은 조금 당황해서 돌아보았다. 기사 생도복 차림의 조각같이 아름다운 흑발 소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열넷,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생도였다. 키는 크지만 얼굴에 아직 어린 티가 속속들이 남아 있어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년에게서는 그맘때 십 대 남자아이들에게 흔한 거친 인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단단해 보였지만 동작은 무척 부드럽고 단아했다. 이목구비는 미려하고 섬세했으며, 암회색 눈동자는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오랫동안 글을 써 온 사람처럼 깊었다. 샹들리에의 빛조차 다 흡수해 버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은 갸름하고 앳된 얼굴에 기이하게 성숙한 그림자를 더해 놓았다.

“난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필립에게 악수를 청해 왔다. 자기 유명세를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상대가 자기 이름을 들어 보았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한 투였다. 필립도 조용히 마주 손을 내밀었다.

“알고 있습니다. 페랑에서부터 말씀 많이 들어 왔습니다.”

“어……? 정말?”

그가 문득 아주 어린 소녀처럼 웃으며 뺨을 붉혔다. 깜짝 놀랄 만큼 순수한 미소였다.

“쑥스럽네……. 고마워. 그런데 너도 말 놔 주라. 우리 이제 같은 학우잖아.”

그는 특히 마지막 문장에 힘을 실어서 일부러 홀 전체에 맑게 퍼뜨렸다.

인사를 나눈 후 막시밀리안은 필립을 일부러 제 친구들이 있는 홀 중간 자리로 끌어갔고 여럿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러고는 필립이 잘 알 만한 무역이나 금융, 고문서 거래 관련 주제를 골라 대화를 진행했다.

필립은 막시밀리안의 태도에 놀랐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 지식의 깊이에도 놀랐다. 그는 아는 게 많으면서도 그 지식을 자신이 직접 떠드는 대신 날카롭고 좋은 질문들로 벼려서 상대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필립은 충분히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드러내어 풍부하게 답해 줄 수 있었다.

필립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막시밀리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주변에 다른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몰려와서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막시밀리안은 필립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데에 감사를 표하며 다시 악수를 청한 후 물러갔다.

그때 필립은 주위에서 자신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이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들로부터 노골적으로 경멸받을 걱정은 할 필요 없으리라는 점도 말이다.

막시밀리안이 떠난 후에도 상급생이나 교수들이 필립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 왔고, 질문도 던지곤 했다. 날이 선 질문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필립은 잘 받아넘겼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늦게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소문보다도 더 대단한 애네.’

필립은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채 몇 번이나 입학식장에서의 일을 돌이켰다.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린데, 그리고 솔직히 세상 경험은 엔간한 귀족가 자제보다는 내가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쪽이 더 단단한 느낌이야. 검 실력까지도 소문대로라면 정말 굉장하겠군. 하지만…….’

그는 무심코 찡그리며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

열다섯 살짜리가 진심으로 저럴 수는 없다. 필립은 속으로 곱씹었다.

필립은 대여섯 살 때부터 부모의 상회를 도우며 여러 사람을 만나 왔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난 인물이라 해도 저 나이에 저 정도 자아를 갖출 수는 없다. 저건 연기다. 자신이 어떤 인물로 보이고 싶은지를 계산해서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갈고닦아 만들어 낸 인격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대단해지기’ 위해 막시밀리안은 아주 어릴 때부터 노력해 왔을 거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노력했을까.

필립은 멋대로 피부를 타고 오르는 감각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 어린애가 그렇게 공을 들여서까지 감춰야만 했던 것.

주변에 절대로 들키면 안 될 자신의 실체라는 건 대체…….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어 털어 버렸다. 이건 너무 나가는 생각이다.

‘내가 아무리 귀족을 별로 안 좋아한다지만, 세상에는 정말로 그냥 아주 뛰어난 귀족 자제도 있을 수 있는 법이지.’

필립은 조금 반성했다.

‘귀족 놈이 훌륭하면 속에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다, 사실은 미친놈일 거다 뭐 이렇게까지 넘겨짚는 건 너무하잖아. 좋은 놈은 좋게 봐주자. 이유가 뭐든 그 애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까지 열심히 갈고 닦아 온 거야. 그게 흠은 아니잖아?’

이후 사 개월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필립은 막시밀리안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그를 점점 더 좋게만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모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훈련장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땀을 흘렸다. 학우 누구에게나 잘해 주었고 필립에게도 늘 다정하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 왔다. 특히 필립은, 합동 식사 때 장갑을 벗고 숟가락을 들던 막시밀리안의 아직 덜 자란 손이 자신이 생전 보아 온 어느 농부나 목수의 손보다도 더 터지고 굳은 곳이 많은 걸 보고 감동받았다.

단, 그런 막시밀리안도 요른만은 구해 줄 수 없는 것 같았다. 바로 자기 집안에서 후원하는 아이인데도 말이다.

평민이라도 아버지 쪽을 따른 성은 있는 법인데, 그 조그맣고 말라빠진 애는 성도 없이 그냥 ‘요른’이라고만 불렸다. 미혼모 아들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 애는 학원에서 친구랑 어울리기는커녕 매일 심하게 얻어맞고만 다니는 거 같았다.

필립이 보기에 막시밀리안이 그 애를 보호해 주기 위한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필립은 막시밀리안이 학원 복도나 정원 한가운데에서 그 애를 “우리 요른”이라고 더없이 부드럽고도 또렷한 소리로 부르는 걸 들었고, 그 애와 눈높이를 맞춰 주려고 맨바닥에 무릎마저 꿇고 앉는 걸 보았다. 그렇게 부르면 요른도 반색하며 당장 품에 안길 듯이 달려가곤 했다. 신분 차이가 워낙 엄정해서인지 진짜로 안기지는 못했지만.

필립이 듣기로는, 네 살짜리 요른을 길거리에서 처음 발견한 게 바로 어린 막시밀리안이었다고 한다. 막시밀리안은 대귀족가의 아들이면서도 평민의 생활에 관심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하인 한 명만 데리고, 혹은 아예 혼자서 시가지를 쏘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막시밀리안은 길을 잃고 장터 뒷골목에 들어갔고, 거기서 요른을 만났다. 마법을 배운 적도 없었을 게 뻔한 평민 아이가 골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의 정령에게 뭔가를 청하고 정령이 그 청을 기꺼이 들어주는 모습이 공작가 독자의 눈에 비쳐 들었다.

깜짝 놀라고 흥미가 돋기도 해서 막시밀리안은 그 애를 자기 시동으로 삼기로 결정했고, 하인을 시켜서 아이의 홀어머니에게 적당히 사례한 후 매일같이 성에 데리고 와서 놀았다. 일 년쯤 데리고 놀다 보니 막시밀리안의 어머니인 유디트 폰 프란첸도 그 애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디트 공작 부인은…… 좀 특이한 분이야.”

필립은 수업을 같이 듣던 학생에게 조심스레 요른이 후원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학생은 왠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답해 주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찌그러져 버렸는지 필립도 사정을 모를 바는 아니었다. 학원 학생들은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는 필립에게 정중하게 대해 주었지만, 일대일로 마주쳐 보면 반응이 달랐다. 평민의 자식이 사적으로까지 대등하게 말을 걸어오는 건 영 꺼림칙해하는 듯했다. 그래도 이 학생은 필립의 질문에 나름대로 성실하게 답을 해 주려고 애를 쓰기는 했다.

“삼 년 전에 은퇴하고 왕국 마도 협회로 빠져 버리시긴 했지만, 그전에는 바로 이 학원에서 교수로 일하셨어. 그래서 우리도 잘 아는데, 뭐랄까, 후대를 발굴하는 데에 좀……. 너무 집착하신달까.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재능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으시는 분이야. 다른 귀족 가문이면 그런 애를 주워 와서 여기 입학까지 시키는 건 사실 생각도 못 했을, 아니, 안 해야 했을 일인데.”

그런 소리를 하면서 필립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스스로도 기분이 이상해졌는지, 그 학생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얼른 자리를 떠 버렸다.

그리고 필립은 그날 오후 요른이 또 복도에서 양팔을 잡혀 어딘가로 끌려가는 걸 보았다.

‘막시밀리안은 그 애한테도 잘해 줘.’

이론학 수업을 마치고 린다 투트 크라흐트와의 기분 나쁜 대화, 그러니까 요른이 마물의 애네 아니네 하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논쟁까지도 마친 후 필립은 강의동 건물 정문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며 생각했다.

‘진심인지 아닌지야 몰라도 그는 분명 요른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 입학식 때 나한테 해 줬던 것과 똑같아. 늘 일부러 다른 학생들 앞에서 드러내 놓고 그 애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거야. 내 친동생 같은 애다, 그렇게 선포하듯이.’

그는 입 속에 쓴맛이 도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요른은 늘 맞고 다녀. 학원생들 전부가 다 나서서 걔를 괴롭혀. 막시밀리안 정도 되는 인물이 그만큼 애를 쓰는데도 결국 요른은 보호받지 못해. 한계가 있는 거야.’

막시밀리안은 귀족 중에서도 대단히 빼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요른처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가 오히려 그걸 빌미로 해서 핍박받는 걸 전혀 보호해 주질 못한다. 마물이니 어쩌니 하는 정신 나간 소문마저 돌고 있는데도 막아 주지 못한다니.

요른은 필립과도 다르다. 훨씬 바닥을 기는 평민, 아니, 빈민 출신에 말도 더듬고 생긴 것마저 특이하다. 삼사 년 기본만 익히고 사라질 필립과는 달리 졸업 후 진짜 마법사 사회로 진출할 아이이기도 하다.

그러니 요른을 향한 이 잘난 귀족 자제분들의 적의는 필립을 향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다. 프란첸가의 후원도 그 집안 독자의 선의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학원에서부터 애들끼리 벌써 이 꼴인데, 나중에 진짜 마법사라도 되면 어떨까. 귀족들로만 꽉꽉 찬 마법사 사회에서 저 애는 어떤 식으로 더 끔찍한 괴롭힘을 받게 될까.

훌륭한 귀족이라는 게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귀족 한둘이 평민에게 관대를 베풀어 주는 방식은 역시 한계가 있다. 필립은 되뇌었다.

그 애 스스로가 직접 힘을 갖게 되지 않는 한. 아니, 최소한 이미 가진 힘을 발휘할 길이라도 찾지 못하는 한.

‘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정문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면서, 필립은 평생 수백 번은 새겨 온 말을 또 한 번 되새겼다.

‘이 질서를 벗어날 출구가.’

그는 계속 걸어 강의동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잔디 사이의 모랫길을 따라 걷다가 방향을 바꿔 바로 기숙사 식당으로 향했다.

필립은 아까 린다네에게 거짓말을 했다. 다음 수업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점심시간에 맞추어 얼른 식당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요른을 기다려 볼 요량이었다.

‘그 애도 배는 고플 테니까.’

요른은 어디 다른 데 나가서 뭔가를 사 먹을 돈도, 타고 나갈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점심시간쯤 되면 결국 학생 식당에 들르리라 짐작했다. 필립은 문득 자기 가방 속을 확인했다. 포장된 과자 몇 개가 얌전히 잘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며칠 전에 우편으로 보내 주셨던 페랑식 고급 과자다.

‘원래 오늘 수업이 끝나면 주려고 가져왔던 건데.’

요른의 옆자리에 앉아서 같이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과자를 주면서 사담을 걸어 볼까 했다. 하지만 그 애는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펄쩍 뛰면서 도망가 버렸다.

필립은 요른을 본의 아니게 강의실에서 쫓아내 버린 꼴이 된 셈이었고, 그게 영 미안했다. 사람이 저한테 선의를 갖고 접근해 오는 일이 없다 보니 오히려 잔뜩 겁을 먹은 것이리라.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이번에는 만나면 과자부터 몇 개 쥐여 줘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배고픈 어린애를 꾀는 데에는 과자만 한 게 없으니까. 그리고 좀 더 친해지고 나면…….

‘……이 생각은 나중에 하자.’

필립은 머릿속을 털어 버렸다.

곯아 빠진 어린애를 두고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부터 고민하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먼저 인간적으로 친구가 되어 주자, 나머지는 어차피 그다음 단계라고, 변명하듯이 되뇌며 필립은 식당 쪽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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