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30)

프롤로그

요른은 눈을 깜박거렸다.

오른쪽에 세 마리. 왼쪽에 두 마리, 정면에 여섯 마리. 양쪽으로는 아직 여유가 있다. 정면부터 말해 줘야 한다. 요른은 앞쪽으로 육백 피트쯤 떨어져 있는 기사 셋에게 전송 마법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여, 여섯, 정…… 칠, 시시.”

하지만 도중에 말을 더듬고 말았다.

요른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나이가 스물한 살인데 말더듬이 습관이 아직도 다 고쳐지지 않아서 꼭 결정적일 때 한 번씩 튀어나온다. 얼른 다시 고쳐 뱉으려 했지만 실수를 해 놓고 나니 혀가 더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쯤 그저 얼어 있으려니 귓가로 불평이 전해져 왔다.

―뭐라고?

―똑바로 말해!

기사 둘이 거칠게 뱉었다. 한 명은 혀만 쯧 찼다.

사나운 불평보다 그 혀 차는 소리가 훨씬 더 무서웠다. 요른은 정신없이 더듬으면서도 다시 주워섬겼다.

“저, 정, 면. 여, 여여섯 마리. 삼십 피, 트, 앞…….”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삼십 피트, 말 그대로 겨우 서른 발자국.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마물들에게는 보통 겨우 몇 초에 달하는 거리다.

아까만 해도 칠십 피트였는데 요른이 말을 더듬는 사이 삼십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다시 이십, 십이…… 고쳐 전하려 해도 의미도 없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기사들은 아직 안전하다. 정찰대를 먼저 보내 두고 나머지 병사를 끌고 따라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최전방에 나가 있던 정찰 보병들이 제각각 거의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게 멀리서부터 공기를 타고 요른의 귀에 닿아 왔다.

“빌어먹……!”

고함 소리, 비명, 뼈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리고 금방 조용해졌다.

분대 전체가 당했구나, 짐작하며 요른은 다시 눈을 떴다. 마물 여섯 마리가 죽은 자들의 살을 뜯고 있는 게 보였다.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귀에 전해지듯이 모습도 공기를 타고 와서 요른의 눈에 그대로 선명하게 박혔다. 그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먹느라 바쁘네.’

마물들은 시체 더미에 코를 처박고 있느라 주변을 경계하는 걸 잊은 채였다. 그 틈을 노려 양쪽에서 보병 분대 둘이 달려들어 포위하고 쳤다. 소대를 이끌던 기사도 말을 끌고 직접 도전했다.

‘안 돼.’

요른의 마음속에 외침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여섯 중에서도 중간의 저 마물은 크고 강하다. 검은 숲에서 나온 마물들 중에서도 드문 종류라 저 어린 기사한테는 무리다.

열아홉 살짜리 기사는 역시나 금방 반쪽으로 쪼개져 버렸다. 말도 허리가 부러져 죽었다. 기사가 들고 있던 마검도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마물이 그 위를 뭉개듯이 밟고 지나갔다.

마물의 발톱은 철갑옷도 쉽게 부수고 이빨은 뼈를 그대로 뚫는다. 반면 이쪽에서 마물에게 상처를 내기는 어렵다. 평범한 철로는 그 털가죽에조차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단, 마검은 다르다. 물론 마검의 질과 기사의 실력에 따라 다르지만.

저 호르스트라는 어린 기사는 질이 아주 좋은 마검을 갖고 있었다. 요른 자신의 설계가 적용된 데다가 황궁 최고의 장인들이 구하기 힘든 고급 재료로 만든 최신품이다. 하지만 기사 본인의 실력은 평범했다.

요른 자신이 고를 수 있었더라면 저런 자에게는 저런 검을 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 본인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지나치게 좋은 검을 갖는 것보다는 자기 실력에 맞는 검을 갖는 게 훨씬 나으니까. 아무리 커다란 곤봉이 타격력이 더 세더라도, 어린애한테는 나뭇가지를 들려 주는 게 차라리 낫듯이.

그리고 금전 문제도 있다. 좋은 마검을 만드는 데에는 노력도 예산도 많이 든다. 그걸 저런 미숙한 기사에게 주었다가 본인이 죽으면서 망가뜨리고 땅바닥에 흘려서 회수도 어렵게 만들어 버리면 곤란하다.

[마검을 나눠 주기 전에 공정하게 실력을 검사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해.]

막시…… 막시밀리안이 한 달쯤 전에 그렇게 말했었지. 요른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잖아도 새로운 검이 막시밀리안에게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해 있던 차였다. 위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모르겠는데, 폰 크라우스 집안의 갓 성기사 학원을 졸업한 장남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아들이 검과 작위를 수여받은 다음 날, 막시밀리안은 가문의 후원 마법사들과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자격이 안 되는 기사는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검을 받을 수가 없게 말이야. 누구든 자기 실력만으로 겨뤄야지. 그랬더라면 이번 그 마검은 내게 돌아왔을 거야.]

막시밀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그건 지나친 자부심 표출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사실 적시였고, 그 자리의 마법사들도 가문의 다른 기사들도 모두 막시의 말에 수긍했다.

좋은 마검을 갖고 싶어 하는 건 기사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그날 요른의 귀에는 마치 막시밀리안이 다름 아닌 바로 요른이 설계해서 만든 검을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듯이 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요른은 그날 이후 가끔 행복하게 막시의 그 목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요른이 객관적으로 좋은 마검을 설계해 내는 한 막시는 어쨌거나 계속 그가 만든 마검을 갖고 싶어 해 줄 거다. 그러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막시. 막시밀리안. 우측 소대를 지휘하던 그는 지금 흑마를 탄 채 방향을 꺾어 전방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죽은 어린 기사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다. 우측의 마물 세 마리는 벌써 처리한 후였다. 그는 긴 창을 들고 있었지만, 곧 말에서 내리면서 대검으로 바꿔 잡았다.

거의 자신의 키만 한 대검. 막시밀리안이 주로 쓰는 무기다. 휘하 소대에게 진을 짜라고 명령을 내리며 그는 곧바로 직접 여섯 마물의 우두머리에게 달려들었다.

‘막시밀리안.’

요른은 그 이름을 머리 한쪽으로 되뇌며 아주 작은 마법 하나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좌측 소대의 다른 기사에게 할 말을 전했다. 뇌의 두 부분을 분리해서 따로따로 사용하듯이 두 마법을 동시에 쓰면서 이번에는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호르스트 폰 크라우스 경 사망.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 경…….”

요른은 안도감과 자랑스러움을 섞어 전했다.

“우두머리 마물로 보이는 것을 처리. 나머지 다섯 마리는 도주 중.”

막시밀리안이 다시 말에 올랐고, 보병은 남겨 두고 기병만 뽑아 추격에 나섰다. 좌측을 맡고 있던 다른 기사 쪽에서는 잠시 침묵만 전해져 왔다.

남은 마물 추적은 막시의 기병대에 맡기면 된다. 다른 기사가 할 일은 이제 군과 민간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요른. 너 이 싸움 끝나면…….”

기사가 비로소 운을 떼어 이를 갈듯이 말하는 게 요른의 귀에 전해져 왔다. 아까 죽은 어린 기사의 삼촌이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

“회복 마법을 써도 낫는 데에 닷새는 걸릴 정도로 패 주마.”

무슨 뜻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요른은 깨달았다. 저 사람은 조카 호르스트가 죽은 게 아까 요른이 말을 더듬느라 정보를 늦게 전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최전방에 있던 정찰대가 전멸한 건 분명 요른의 책임이다. 대비가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어 준 덕분에 마물들은 한가롭게 시체나 뜯어먹고 있었다. 호르스트 폰 크라우스는 그래서 오히려 기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거다.

이건 요른의 책임일 수 없다. 그냥 실력도 경험도 부족한 어린 기사가 만용을 부렸던 것뿐이다.

그래도 요른은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저 베스퍼는 오늘 저녁쯤 병사들을 시켜서 자신을 린치할 거고, 요른은 린치를 그저 고스란히 받아 줘야 한다. 막시가 요른에게 어릴 때부터 수백 번도 더 당부했기 때문이다.

[요른.]

막시는 언제나 그렇게 안타까운 투로 운을 떼곤 했다. 어린 동생을 가르치듯이.

[남이 널 미워하면 다 정당한 이유가 있는 거야.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해서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남이 네게 소위 폭언을 하든, 폭행이나 고문을 하든 절대로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 그게 네가 인간으로서 옳은 일을 하는 거야.]

너는 스스로 옳게 생각할 줄을 몰라. 그러니까 늘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네게 해 주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그래야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가 있지. 

막시는 늘 요른을 붙잡아 앉혀 놓고 어르고 토닥이듯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까, 늘 그래왔듯이 오늘 저녁에도 그대로 맞아 주면 된다. 어차피 회복 마법을 쓰면 며칠이면 낫는다.

막시밀리안이 남은 마물을 추적하고, 베스퍼가 마을의 피해 상황을 살피는 동안 요른은 계속 원격으로 여기저기를 살피고 두 기사에게 역시 원격으로 계속 상황을 전해 주었다. 다시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사와 병사들은 전방에서 싸운다. 각자 마물 하나하나와 코앞에서 칼과 발톱을 맞댄다. 그러니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다. 요른과 같은 마법사가 멀찍이 뒤에서 이렇게 전황 전체를 살피고 기사들 서로에게 상세하게 전해 주면 훨씬 싸우기가 편해진다.

곧 막시밀리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요른은 얼른 그의 몸을 살폈다. 막시밀리안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마물의 피다. 휘하 병사들도 대부분 멀쩡히 돌아온 것 같았다. 막시는 아까 마을 안에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서 우두머리 마물의 거대한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마물은 동강이 난 채로 아직도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말에서 내려 그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잘라 들었다.

전리품이다. 성황께 보여드려 확인받은 후, 궁중 마법사들이 연구할 수 있게끔 협회장에게 전할 것이다. 베스퍼는 젊은 기사의 뒷모습을 반은 진심으로 경탄하는 눈으로, 반쯤은 어쩔 수 없이 시기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이벌 가문의 흠 없이 빼어난 독자.

대피소에 숨어 있던 마을 주민들이 슬금슬금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병사들의 시체와 마물들의 시체를 번갈아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성황국 수도 외곽 마을에 또 마물이 내려왔다. 아직 8월인데, 올해 벌써 두 번째다.

“어떻게 그 먼 검은 숲에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는지 모르겠어.”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게. 이게 대체 몇 마리야. 다 어디 숨어 있다가 슬금슬금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담.”

다른 주민이 받아 말하면서 새삼 몸을 떨었다. 지난번에는 그나마 세 마리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열 마리나 되었다. 지능도 점차 발전하는 건지, 이제는 매복 비슷한 것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마물들은 주민 신고를 받고 달려온 지역 방위군 두 분대를 급습해서 순식간에 전멸시켜 버렸다. 남은 방위군은 자력으로 마물을 소탕하기는 포기한 채, 시민을 대피시키고 황성에 즉시 지원 요청을 올리는 역할에만 힘을 쏟았다. 요청에 응답해서 세 명의 성기사가 각기 파트너 마법사 한 명, 그리고 소대 하나씩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섰다.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 베스퍼 폰 크라우스와 지난달 막 기사 서임을 받은 호르스트 폰 크라우스. 어린 호르스트를 제외하면 모두 경험 많은 기사들이었다. 특히 막시밀리안은 생도 시절부터 이미 검은 숲 근처에서 마물 대상으로 여러 번 근접전을 치러 본 경력이 있었다. 요른은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전령 역할로 특별히 따라왔다.

성기사단이 연락을 받고 실제로 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이래저래 한 시간은 걸렸다. 그동안 주민이 수십도 넘게 죽었다. 그래도 성기사단은 일단 도착하자 몇십 분 만에 마물 열 마리를 모두 해치웠다. 성황국 기사와 마법사들이 솜씨가 뛰어나긴 한가 보다 하고 마을 주민은 서로 속삭였다.

“하지만 작은 승리일 뿐이지.”

피를 뒤집어쓰고 동료의 시신을 살피던 병사 한 명이 중얼거렸다.

이건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징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물 출몰은 성황국 수도민에 있어서는 강 건너 불 보듯 한 일이었다. 검은 숲은 대륙 먼 남쪽에 있다. 마차를 타도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곳이다. 육칠 년 전까지만 해도 그 근처 지역에서만 간혹, 정말이지 아주 간혹 마물이 사람 사는 곳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데에 그쳤다. 그러던 것이 슬금슬금 남부의 제법 큰 도시들로까지 번지더니 올해는 마침내 성황국 수도 외곽에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가, 아니, 이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모르겠다. 진짜로 성검을 든 용사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그 고문서 속 전설이라도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어쩌면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마을 주민은 서로 소곤대며 병사들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특히 그들의 눈은 한 사람에게 몰렸다.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된 흑발의 젊은 기사. 그러나 그가 시선을 눈치챈 듯 주민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오히려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대검으로 집채만 한 마물을 동강 낸 기사라기에는 지나치게 미려하고 섬세한 용모였다. 색채라기보다는 순수한 암흑에 가까운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가볍게 젖어 이마며 관자놀이에 착 달라붙어 있었는데, 백합이 이슬에 젖은 듯 고운 그 얼굴은 남녀 할 것 없이 심금을 울렸다. 

막시밀리안은 주민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 고개를 돌려 제 병사들 쪽을 향했고, 베스퍼를 도우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의 음성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낭랑하고 또렷하게 공중에 퍼지자 병사들은 그대로 지시에 따랐다. 마을 주민 모두의 머릿속에 순간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용사 후보라면 역시 저 청년밖에 없어.

황혼이 짙어 가는 가운데, 막시밀리안과 베스퍼는 남은 병사들을 모아 마을 광장에 정렬시켰다. 마지막으로 시체 소각을 하고 돌아가면 된다.

마물의 시신은 태우지 않고 수거해 가서 마검의 재료로 활용한다. 그러나 마물에 당한 가축이나 사람 시체는 현장에서 바로 소각해야 한다. 확실하게 증명된 바는 아니지만, 마물에게 당해 죽은 자는 그 자신도 마물로 변한다는 설도 있으니 만전을 기하는 게 좋다.

병사들은 마을 곳곳에서부터 갓난애, 노인, 청년, 임부의 시체를 가축의 살점과 뒤섞어 수레에 실어 왔고 다시 광장 한군데에 겹겹이 쌓아 놓았다. 시신 더미에 불이 붙어 타들어 가기 시작하자 눈물을 흘리는 주민도 있었다. 요른은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체 소각이 이루어지는 동안 마법사들도 바빴다.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상처 입은 병사나 민간인의 몸을 치료해 주었다. 요른은 치료를 돕지 않았다.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요른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마법 천재라는 작자가 자기 몸은 잘만 치료하면서 남의 몸은 전혀 치료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요른 자신의 몸은 뼈가 아예 가루가 되어도 잘만 재생시키면서 남이 다치면 찰과상도 낫게 해 줄 수가 없다.

그러니 남들이 경멸한대도 할 말이 없다고, 막시는 몇 달 전 요른을 자기 성의 손님방으로 불러 차와 간식을 내어 주면서 타일렀다. 학원에 처박혀 연구만 하다가 갑자기 전령 역할을 하라는 명을 받아 군에 섞이게 된 요른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요른.]

전혀 손은 대지 않으면서도 마치 목소리로 요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듯, 막시는 무척 따스하게 말했다.

[네가 치료 마법을 기술적으로 못 쓸 리가 없잖아. 그건 네 천성이 그런 거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거지. 남은 절대로, 절대로 도와주기가 싫은 거야. 너는 아주 징그럽게 이기적인 인간이고, 그 마음이 네 마법에 반영되는 거야.]

요른은 끄덕거렸다. 막시는 늘 다정하다. 요른을 안타깝게 여기고 일깨워 준다. 친동생은커녕 핏줄 비슷한 것도 통하지 않는데도 요른이 네 살 때부터 내내 동생처럼 보살펴 주었다.

“네가 그런 인간이니까, 타인이 너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건 당연해. 일상에서 그래왔듯이 군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같은 편 병사들이 너를 욕하고 때려도 절대로 저항하면 안 돼. 알았지?”

요른은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끄덕거렸다.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요른은 막시가 가르쳐 준 건 언제나 순순히 따라왔으니까.

막시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 같은 병신은 정말이지 태어나서 단 하루도 제대로 된 인간처럼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늘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막시는 꼭 덧붙이곤 했다. 걱정하지 마.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굴지는 못하게 내가 막아 줄 거야. 네가 죽거나 아예 망가지지는 않게.]

그렇게 말해 줄 때 막시의 목소리는 늘 감미롭고 따스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너는 저항하지만 않으면 돼.]

내가 막아 줄게. 학창 시절부터 요른은 특히 좀 많이 얻어맞아서 잠들기 힘든 밤이면 막시의 그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꺼내어서 수없이 매만지곤 했다. 오늘도 죽지 않았고, 뇌가 손상되지도 않았다. 막시 덕분이다.

막시는 십여 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 유서 깊은 대귀족가의 독자는 어느 자리에서든 요른은 ‘자신이’ 후원하는 마법사라고 꼭 한 번씩은 강조해서 거론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아무리 요른이 미워도 죽여 버리거나 아예 못 쓰게 만들어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막시는 그런 식으로 늘 요른을 뒤에서 지켜 주었다.

시체 소각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곧 회군하겠구나. 막시밀리안이 베스퍼와 이야기하고 있는 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요른은 문득 막시와 눈이 마주쳤다.

막시밀리안이 빙긋 웃으며 허리에 찬 검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는 검을 두 개 차고 있었는데, 개중 하나는 호르스트가 쓰던 마검이었다. 요른은 끄덕거리며 오늘 막시의 공적을 되짚어 헤아려 보았다. 막시는 그 커다란 우두머리 마물을 베었고, 남은 마물도 모두 추적해서 죽였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목숨도 거의 낭비하지 않았으며 남이 떨어뜨린 마검의 남은 부분까지 잘 회수해 왔다.

요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땅거미가 깊어지는 가운데 흑발 기사의 모습만이 마치 빛처럼 그의 눈에 스며들었다.

* * *

시체 소각이 끝났다. 거주민이 길을 열고 고마움을 표하는 가운데 회군이 시작되었다.

황성의 남쪽 입구 앞에서 막시밀리안과 베스퍼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병사들더러 멈추라는 뜻이다. 성황이 근위병 십여 명만 거느린 채 직접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깃대로 신호를 받고는 병사들이 곧 모두 자리에서 멈춰 무릎을 꿇었다. 막시밀리안과 베스퍼도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었고, 파트너 마법사들과 요른도 마찬가지로 따라 했다.

“성황 전하를 뵈옵니다.”

“노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

성황 헤르타 프란시스코 아우렐리우스가 부드럽게 답했다. 올해 이백스물네 살이라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마흔 정도로나 보이는 고아한 여성이다.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 마물 열 마리라. 개중에도 하나는 상당히 특별한 것 같더군요. 아, 그쪽이 머리입니까……?”

“예.”

막시밀리안이 양손으로 주머니를 내밀자 성황이 받아 들고는 머리를 꺼내 들었다. 성황의 손이 닿자 머리에서 피와 오물이 씻겨 나가고 깨끗한 모습이 되었고, 잠시 그 안에 원래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이 마물은 원래 물소, 늑대, 불곰, 독수리, 독사 등 아홉 마리의 동물이었다.

그러나 곧 빛이 꺼지며 머리는 아홉이 다 뒤섞여 변형된 마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성황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힘으로도 여기까지가 한계다. 원래 모습을 확인하는 것. 살아 있는 마물은 고사하고, 시체라 해도 이전의 형태로 되돌려 낼 수는 없다. 전설의 성검만이 그런 힘을 갖고 있으리라.

성황은 머리를 다시 천으로 감싸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기사에게 치하하는 말을 건넸다.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 경, 역시 믿음직합니다. 앞으로도 왕국을 위해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흑발의 젊은 기사에게 신뢰를 보내는 성황의 목소리를 들으며 베스퍼 폰 크라우스는 옆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 조카는 목숨을 바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져서 죽었다 이건가. 역시 성황 전하도 이긴 놈만 치시는 건가.

막시밀리안이 경갑주만 두른 가슴 앞에 오른손 주먹을 대고 감사의 예를 표했다. 성황은 기사 둘 뒤쪽에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요른에게도 눈을 돌렸다.

“앞에서 싸우는 기사들은 용맹하지. 하지만 뒤에서 도운 거라면 역시 요른, 자네 공을 무시할 수 없어.”

성황이 친근한 투로 말했다. 요른은 놀라서 눈을 들어 성황의 얼굴을 보았다가, 예에 어긋나나 싶어서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성황이 계속 낭랑한 목소리로 이어 갔다.

“전황을 그렇게 넓은 범위에 걸쳐 파악하고 여러 사람 사이에 전달해 주다니……. 공기의 정령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해요. 소리도 모습도 공기를 통해 전달받는 거죠?”

“예, 예.”

요른은 대충 대답했다. 거짓말이다. 공기의 정령이고 뭐고 모른다. 요른은 그런 식으로 마법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정령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답하는 게 옳다는 건 안다. 다른 마법사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정령 마법’만 쓰니까.

성황은 요른이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열심히 대답하는 양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언제 봐도 괴상한 젊은이다.

‘괴상하고 가엾은 청년.’

올해 스물한 살이라지만 요른은 겉으로는 겨우 십 대 후반쯤이나 되어 보였다. 앳되어 보인다기보다는 덜 그린 그림처럼 어딘지 채워지지 못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다. 무엇보다 그는 너무 하얗다.

얼굴은 창백한 정도가 아니라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가운데 정맥마저 여기저기 푸릇푸릇하게 비쳐 얼음물에 빠져 죽은 시체 꼴이고, 머리카락도 새하얗고 눈동자마저도 침침한 회색 안개 같은 은빛이다. 거기다가 몸까지 음지 식물처럼 바싹 곯아 있으니 정말로 시체처럼 보인다.

‘이 청년이 경원시되는 건 이상하지는 않아.’

성황도 이해했다. 이런 피부색, 머리나 눈 색깔은 성황이 알기로 이 대륙의 어느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다. 여러 민족이 섞이다가 튀어나온 돌연변이거나 아니면 어떤 기형이리라. 그 때문인지 찬찬히 뜯어보면 분명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제법 미형인 얼굴인데도 아름답다기보다는 오싹한 인상을 준다.

이 외모 때문에 이 청년은 처음부터 그렇게 친구가 없었으리라. 그리고 친구가 없다 보니 점점 더 특이한 인간이 되었고, 또 그렇게 특이해진 만큼 더욱더 친구를 사귈 수가 없게 되었으리라. 그러다 보니 말을 쓸 일이 없어서 그렇게 더듬게 된 건지도 모른다.

폰 프란첸가에서는 이 젊은이를 학창 시절 내내 후원해 놓고도 졸업 후에는 결국 마도 학원의 연구 강사라는 한직에 밀어 넣어 버렸다. 성황으로서도 그런 결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밑에서 쉬쉬하려고 들어도 성황의 귀에는 정령들이 소식을 전해 준다. 요른이 귀족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그러다 보니 그 밑의 하인이나 병사들도 자연스레 그들의 태도를 따라 한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성황이 보기에는 딱히 그런 따돌림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괴한 소문이야 있지만, 소문일 뿐이다. 소문이 있어서 따돌리는 게 아니라 따돌리다 보니 소문도 멋대로 붙은 거다. 그런 소문이 붙기에 딱 좋은 생김새이긴 하니까.

그러나 성황만큼이나 그 소문이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반쪽짜리 마물이라니, 말도 안 되지.’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마물은 흑마법사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생물이라 생식력이 극히 낮다. 저희끼리도 어려운데, 하물며 인간과 교합하여 아이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요른은 평판이 나쁘다. 아무리 마법사로서 개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평판이 나쁜 사람을 궁의 협회에 들이거나 기사의 파트너로 임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성황은 오래 묵혀 두었던 생각을 다시금 곱씹었다.

마물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 시국에 이런 인재를 계속 썩혀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황은 가만히 운을 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요른. 이런 시기에 폰 프란첸 경이나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하지만 왜 당신에게 매번 이렇게 기껏해야 후방 전령 역할만 맡기는지…….”

성황이 부러 좀 아쉽다는 투로 이어 갔다. 한 음절 한 음절,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깊은 힘을 실어서.

“앞으로는 공격에도 가담하게 될지도 몰라요. 곧 정식으로 프란첸 경의 파트너 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 진로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으시길.”

성황이 말하자 순간 막시밀리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요른도 그 시선을 곁으로 느끼고 움찔 떨었다. 그러나 요른이나 막시밀리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베스퍼가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성하. 하지만 그건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입니까, 크라우스 경?”

“이자는 말을 더듬습니다. 오늘도 이자가 말을 더듬은 바람에 전달이 늦어져서 제 조카가 죽었습니다. 주문 한 구절마다 한시를 다투는, 동료의 생사가 걸리고 마는 전장에서 파트너로 활동하는 건 무리입니다.”

“호르스트의 죽음은 애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건 요른의 책임은 아니었습니다.”

“성하―”

“저는 성황입니다.”

성황 헤르타가 조용히 말했다.

“이 나라에서 정령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입니다. 공기의 정령은 요른도 사랑하지만 저를 훨씬 더 사랑하지요. 그대들이 싸우는 동안 저도 성안에서 전황을 모두 전달받고 있었습니다. 크라우스 경, 그대 조카가 전사한 건 요른의 탓이 아닙니다. 호르스트 자신이 너무도 용맹했던 탓입니다.”

베스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막시밀리안도 가만히 입을 열어 전했다.

“성하. 크라우스 경의 얘기는 일부 사실입니다. 요른은 말을 더듬습니다.”

말하면서 막시밀리안은 요른 쪽으로 한번 측은한 듯이 눈길을 주었다.

“가엾은 아이입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긴장하면 버릇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전장의 파트너로는 무리입니다. 전송 마법은 그나마 미리 그려 둔 진을 활용할 수 있지만, 공격 마법은 매번 입으로 주문을 외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하지만 저는 오늘 요른이 공격 마법을 쓰는 걸 보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성하?”

“그냥 제자리에서만 사용한 것도 아니에요. 불 공격 마법을 프란첸 경이 있는 곳까지 전송해 보냈고 그게 우두머리 마물의 배를 때려 집중을 흐트러뜨렸죠. 프란첸 경, 경의 오늘 공적은 경 자신의 힘만은 아니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굳은 표정이 되었고, 베스퍼도 살짝 입을 벌렸다. 둘을 번갈아 보며 성황이 미소 지었다.

“공격 마법을 쓰면서 동시에 전송까지 할 수 있는 마법사는 저는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제가 처음 보았다면 이백여 년 만에 처음 봤다는 거죠. 이런 인재를 이 시국에 아낄 수가 있을까요? 말을 더듬는 건 훈련해서 고쳐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을 아무리 훈련 시켜 봤자 단기간에 요른과 같은 능력을 갖추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황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요른을 곧 프란첸 경의 파트너로 임명할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좋은 짝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요른이 파트너로서 충분한 성과를 낸다면 그 핑계로 이제 그를 궁중 마도 협회로도 불러올 것이다. 얼어붙은 두 기사와 요른을 뒤로 하고 성황은 등을 돌렸다.

병사들은 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지쳐 있던 병사들을 성황이 괜히 와서 더 기다리게 만든 건 아니다. 성황은 온 김에 병사들을 제법 회복시켜 주고 돌아갔다.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다친 것들을 치료하고 재생시켜 주는 왕.

검은 숲이 자라나기 전까지만 해도 왕국은 이 성황 헤르타의 통치하에 이백 년이 넘게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대륙의 생명체 모두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 성황이 지금 요른에게 죽음과 같은 미래를 내리고 떠났다.

요른은 차마 막시밀리안 쪽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막시는 요른이 죽지는 않게 지켜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상관없어.’

요른은 차가워진 손끝을 맞잡으며 생각했다. 요른 자신이 죽는 건 상관없다. 막시는 성황에게 들키지 않고 요른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서른 가지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 요른을 말없이 지켜 주었던 만큼 손바닥을 뒤집어 말없이 죽여 버릴 수도 있으리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을 터다. 하지만 그러면 막시는 기사도에 어긋나는 죄를 짓고 만다. 평생 바르게만 살아온 그가.

막시가 그렇게 되는 건 싫다. 막시 자신도 분명 그런 길은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줘야 해. 요른은 다짐했다.

막시는 요른을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사실은 그를 싫어한다. 요른은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막시 본인이 수십 번도 더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요른, 알지? 나도 네가 정말 싫어. 세상에 널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자부심 가득한 태도로 요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조곤조곤 전해 오곤 했다.

[나는 싫어도 계속 네게 잘해 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늘 훌륭한 기사로 살고 싶거든. 기사도의 원칙에 따라 널 언제나 잘 보살펴 줄 거야. 사람들은 친동생이 아무리 끔찍하게 싫어도 피가 섞였으니 어쩔 수 없이 잘해 주잖아. 난 기사도를 피처럼 따를 거야.]

그리고 가끔씩 물음을 덧붙이기도 했다.

[믿을 수 있지?]

응. 요른은 즉각 답했다. 그러면 막시는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래. 네가 믿어 주면 나도 절대 널 배신하지 않아.]

막시는 요른을 싫어한다. 요른이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부터, 그러니까 겨우 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그 사실을 요른의 귀와 뇌에 새겨 넣듯이 끊임없이 속삭여 주었다. 요른도 자신이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막시가 자신을 정말로 얼마나 싫어하는지 몸으로 깨닫게 된 건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사 년 전, 요른은 막시와 함께 검은 숲 근처의 마을로 향해 가고 있었다. 날씨는 좋지 않았고 행군은 길었다. 성기사단은 한때 늪이었던 곳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길은 진창에 가까웠기에 특히 기병이 애를 먹었다. 막시의 말이 먼저 발목이 빠졌고, 낙마하면서 막시도 몸이 반은 다 푹 묻혀 버렸다.

막시는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힘들어 보였다. 경갑주라 해도 갑주를 입고 있어서 더 그랬다. 요른은 그를 일으켜 주려고 말에서 내려서 손을 내밀었다. 요른 자신은 마법으로 발이 빠지지 않게 할 수 있었으니까. 막시가 마주 잡아 주기까지 기다릴 걸 그만 급한 마음에 먼저 막시의 손을 꽉 잡아 버렸다.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장갑도 벗겨져 버린 그의 맨손을.

막시는 요른의 손이 닿은 걸 느끼자 소스라쳤다. 요른은 그의 안면이 싹 변하는 걸 눈앞에서 선명하게 보았다.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막시의 얼굴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표정으로.

막시는 요른의 손을 뿌리치고는 대신 쓰러져 있던 말의 몸체를 붙잡고 어떻게든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안장 옆의 고리에서 말채찍부터 빼 들어서 요른의 뺨을 후려갈겼다.

[징그러운 새끼가.]

막시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차갑게 내뱉는 게 요른의 귀에 들어왔다.

채찍에 맞아 터져 나간 뺨보다 그 말이 훨씬 더 아팠다.

막시는 진지에 도착해서는 그날 밤 요른의 천막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사과했다. 하지만 요른은 그 일을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떠오르면 여전히 너무 아팠다.

그가 자신을 징그럽다고 해서 아픈 게 아니었다. 다만 그날 손을 뻗어 그에게 닿아 버린 게 끔찍하게 미안했다. 그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안 하고 싶었는데, 또 저질러 버린 것이다.

돌이켜 보면 막시는 아주 어릴 때부터도 결코 요른을 건드리지 않았다. 거의 종일 같은 자택의 같은 방에서 지낸 적도 있는데도 팔이 닿을 만한 거리로는 아예 들어오지를 않았고, 꼭 건드려야 할 일이 있을 때라도 늘 두꺼운 승마용이나 검투용 장갑을 낀 채였다. 그러니까 눈치챘어야 했는데.

열일곱 살의 그날에야 요른은 마침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막시는 요른을 혐오한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손이 잠시 닿는 것조차 생리적으로 못 견딜 정도로 혐오하고 경멸한다.

그 정도 혐오를 참고 꾹꾹 누르면서 평소에는 요른에게 그렇게 잘 대해 주고 있다. 역시 막시는 대단하다고 요른은 생각했다.

그런 그가 정말로 좋다.

그러니까 자신도 조금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이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요른 쪽에서도 그를 배려해 줘야 한다. 예를 들어, 그의 파트너가 되는 건 아무리 성황 전하의 명이라도 절대로 거절해야 한다.

성황의 명으로 한번 공식 파트너가 되면 적어도 삼 년은 내내 같이 훈련하고 활동해야 한다. 전장에서는 같은 방이나 막사에서 자는 게 보통이다. 막시가 그런 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요른은 생각했다.

‘내 쪽에서 어떻게든 꼭 기각시켜야 해.’

그는 다짐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간에.’

병사들이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요른도 말과 마구를 반납하고 성 밖으로 발을 옮겼다. 밤이 늦어서 마법으로 작은 빛을 만들어서 공중에 띄워 놓아야 했다.

걸으면서 요른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는 분명 곧 병사 몇을 보내 올 것이다. 성황이 뭐라 했든 그는 자기 조카가 죽은 값을 요른에게 치르게 하리라.

‘보병 두셋쯤을 보내오려나.’

베스퍼는 그들에게 동화 열 닢씩이나 맥주 한 통씩쯤을 약속했으리라. 그 정도 보상이라면 농민 군역은 살인만 아니면 뭐든 해 줄 테니까. 요른은 충분히 이해했고, 대충 마음의 준비를 한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요른이 숙식하는 강사용 기숙사 특실은 2층짜리 조그만 목조 건물로, 시내 외곽의 작은 숲속에 혼자 뚝 떨어져 있다. 그는 잠시 성의 외벽을 따라 걷다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숲으로 접어드는 오솔길을 한참 따라가야 한다. 요른은 베스퍼의 보병들이 아마 골목길이나 아니면 오솔길 입구쯤에서 덮쳐 올 거라고 예상했다.

오솔길로 들어가기 직전에 역시나 누군가가 요른을 뒤에서 덮쳤다. 그들은 요른의 무릎 뒤를 발로 차서 쓰러뜨린 다음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입에 재갈부터 물렸고, 그다음 때리기 시작했다.

남자 셋이 요른의 마른 몸을 깔아뭉개고 몇 번 얼굴을 차고 머리를 밟았으며, 옆으로 눕혀서 토할 때까지 배를 찼고, 손가락이 몇 개 부러질 때까지 오른손을 땅에 대고 군화로 짓이겼다.

요른이 제 구토물에 기도가 막혀 죽지 않게끔 둘은 잠시 재갈을 풀어 주었다. 흘릴 만큼 다 흘려 내고 기침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가 이번에는 엎드리게 만들어 허리를 깔고 앉아 팔을 뒤로 비틀었다. 비틀면서 남자는 제 동료에게 물었다.

“할래?”

“오늘 피곤해. 대충 했다고 거짓말하자.”

“난 진짜로 할래. 넌 망만 보든가.”

“별…… 알았어.”

남자 한 명이 요른의 튜닉을 걷어 올리고 벨트에 손을 댔다. 상황을 파악하고서 요른은 터진 입술로 얼른 주문을 외웠다.

병사 셋 다 순식간에 기절해 버렸다. 요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막시는 절대로 저항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다 받아들이라고. 언제나 타인이 옳고, 너는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막시는 두 가지 예외를 제시했다. 아직 막시 본인도 기사 후보생에 불과하던 시절, 굳은살이 잔뜩 배기긴 했어도 여전히 뼈대가 덜 익어 가느다랗던 검지와 엄지를 하나하나 꼽아 보이며 그는 요른에게 강조했다.

[너는 얼마든지 당해도 돼. 하지만 남이 너무 큰 죄를 짓게 만들면 안 돼.]

응. 요른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면서도 일단 끄덕거렸다. 막시가 눈치챘는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부연했다.

[첫째. 내가 막아 주긴 하겠지만……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자제를 못 할 때도 있거든. 혹시 죽을 거 같으면 저항해. 남이 살인죄를 지으면 안 되거든. 전장에서는 예외지만, 정령들은 평화 속의 살인자는 용서하지 않는대. 그럼 널 죽인 사람은 평생 정령들한테 미움받는 저주에 걸리는 거야. 그러면 안 되겠지?]

요른은 그제야 이해하고서 끄덕거렸다. 막시는 참 설명도 잘한다.

[둘째, 강간도 안 돼. 강간을 하면 사람이 점점 비틀린 음욕에 찌들게 된대. 남을 강간한 사람은 앞으로 제대로 된 연애도 결혼도 못 하는 거야. 그것도 평생 저주에 걸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지? 그러니까 강간당할 거 같으면 그것도 저항해.]

응, 응. 요른이 끄덕거리는 걸 보자 막시는 반색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미 꼽고 있던 검지를 한 번 더 폈다가 굽히면서.

[아 참, 셋째로, 너는 있잖아. 그…… 평범한 교합도 안 돼.]

요른이 잠시 멍하니 있자 막시가 마저 설명해 주었다.

[소문이 나 있잖아. 넌 혹시 마물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난 안 믿어. 하지만…… 혹시, 혹시 모르잖아. 그러니까 만전을 기하자는 거야. 혹시 네가 마물과 사람이 섞인 아이라면 너와 자는 사람도…… 너와 어떻게든 섞일 수도 있지 않겠어? 병이 전염되듯이 말이야. 본인이 섞이든, 그…… 여자라면, 혹시라도 아이라도 생기면 말이야.]

막시가 슬픈 얼굴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평생 누구랑 교합하면 안 돼. 여자든 남자든 마찬가지야. 알았지? 꼭, 꼭 내 말 들어. 절대로 하지 마. 그런 욕정 자체를 버려.]

처음 막시가 그렇게 말해 주는 걸 들었을 때 요른은 아직 아홉 살이었다. 막시는 열세 살이었다. 요른은 의미도 잘 모른 채로 끄덕거렸다. 사실 막시 본인도 아직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막시는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요른을 불러다 앉혀 놓고 손가락을 꼽으면서 당부하곤 했다. 요른이 그새 잊었을까 봐 걱정이라도 하듯이. 머리에 단단히 주입시키고 싶은 듯했다. 남에게 너로 인해 살인죄를 짓게 하지 마라. 강간죄를 짓게 하지 마라. 그리고 타인과 교합하지 마라.

요른의 열다섯 살 생일 때도 막시는 또 그를 친히 자기 서재로 불러다 놓고, 과자도 나눠 주면서, 엄지와 검지를 차례로 꼽아 가며 당부했다. 그 모양을 바라보며 요른은 생각했다. 막시, 그 세 번째 건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 없는데. 나는 어차피 그런 일은 평생 하고 싶지 않아.

타인은 늘 무섭다. 그런 자들과 몸을 섞는다니, 강제가 아닌 한 어차피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생일 선물로 고급 잉크와 깃펜을 받아 프란첸가의 성에서 나오면서 요른은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는 막시가 나왔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도, 긴 속눈썹과 보기 좋게 도톰한 입술과 단정한 턱선도, 넓고 반듯한 어깨도 향기가 날 정도로 무척 아름다웠다. 현실에서보다도 더.

잠에서 깨어 요른은 비틀거리면서 마도 학원의 기숙사 침대에서 일어나 바지를 벗고, 속옷도 벗어서 손에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개인 욕실도 딸린 특실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낮에 미리 받아 놓았던 물을 마법으로 데워서 빨래를 하고 끈적해진 성기도 씻어 냈다.

다 씻고 나서도 요른은 잠시 멍하니 욕실에 머물렀다. 그는 막시가 매년 검지를 두 번씩 꼽아 가면서 두려워하고 있던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너는…… 평범한 교합도 안 돼. 알았지? 그런 욕정 자체를 버려.]

막시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부터 스며 나와 귓가를 두드렸다. 막시는 늘 복잡한 얼굴로 말하곤 했다.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지만, 한편 어딘지 뿌리 깊은 혐오와 공포를 품고 있기도 했다.

‘그랬구나.’

매년 바로 코앞에서 마주 보면서도 그 얼굴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 밤에야 겨우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막시는 어릴 때부터 아주 영특했다. 요른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욕정을 품는다면 누구에게 품게 될 것인지 그는 소년 시절부터도 너무도 명백하게 예측하고 있었고…….

그날 밤 요른은 평생 처음으로 그저 맞은 데가 아파서가 아니라, 아무 맞은 데도 없는데도 지독하게 슬퍼서 울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욕실 바닥에 꿇어앉은 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이러면 안 돼…….’

그는 자신의 성기를 잘라 버릴까도 생각했다. 정소도 몸속에서부터 녹여 버릴 수 있다. 어차피 평생 남과 교합할 일도 없는 몸이다.

하지만 그러면…… 열다섯 살의 요른은 궁중 마도 협회의 흑마술 대책부서에서 진행 중인 인체 실험을 떠올렸다. 요른은 계약서에 분명 자기 손으로 서명했다. 그러니까 당시 그는 자기 몸을 멋대로 변형시킬 권리가 없었다.

요른은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거세 대신 마법을 써서 관련 부위의 감각을 극히 둔하게 만드는 데에 그쳤다. 소위 말하는 불감증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 둔 것이다.

열일곱 살 때 막시한테서 말채찍으로 얼굴을 맞고 나서 요른은 더욱 똑똑히 깨달았다. 막시는 요른의 손이 잠시 스치는 것도 싫어한다. 하물며 요른이 자신에게 훨씬 더 깊은 욕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싫어할까. 얼마나 끔찍할까.

막시. 막시, 미안해. 아무리 성감을 최하로 낮춰 뒀대도 간질거리는 듯한 감각은 남아 있었다. 좋은 음식을 맛볼 때나 훌륭한 그림을 접할 때, 음악을 들을 때의 미감에 가까운 감각. 막시의 모습이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뇌리에 거의 아로새겨지듯이 아름답게 스며들 때면 요른은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피곤하다. 절룩대며 스물한 살의 요른은 숲의 오솔길로 들어섰다. 다리도 아프고 온몸이 너무 기진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특실 건물에 도착한다.

베스퍼 폰 크라우스는 며칠 내로 두어 번쯤 더 병사를 보내올지 모른다. 아니면 본인이 직접 접근해 올 수도 있다.

그가 요른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건 오늘 조카 일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요른이 일 년 전에 그를 거절했던 탓도 크리라.

베스퍼는 아마 요른을 쉽게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을 것이다. 마법사란 종족은 입만 못 쓰게 해 두면 보통 아무 힘도 없으니까. 수호 마법진을 새긴 고급 종이를 갖고 다닌다면 모르겠지만, 요른은 평상시에 진의 휴대를 허가받을 만한 직위는 아니었다. 마도 학원 교수 중에서도 부교수부터야 허가가 떨어진다.

프란첸가의 후계자인 막시밀리안이 노골적으로 요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다니긴 하지만, 그는 아직 신인이다. 올해 쉰 살에 제후도 한 번 지내본 베스퍼쯤 되는 위치에서 보면 막시밀리안은 아직 설익은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런 어린애의 위협은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도 있다. 정 뒷일을 없애려면 요른을 위협해서 발설하지 못하게 할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일 년 전 여름, 베스퍼는 요른을 저녁에 제 별장의 서재로 들여보내 커튼을 친 후, 마음 놓고 아예 제 바지부터 먼저 벗은 후 요른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하지만 요른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이제는 막시가 당부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강간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 앞에서는 아예 옷 한 점도 벗어서는 안 될, 여름에도 긴 옷만 입고, 더워도 소매조차 걷어 올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궁중 마도 협회의 실험에 참여하면서 그럴 사정이 생겨 버렸다.

베스퍼는 그날 결국 실패했다. 요른의 셔츠 단추 하나 풀어내지 못했다. 요른의 어깨와 팔꿈치를 탈골시키고 양 발목을 다 부러뜨리는 데에 만족했을 뿐이다. 요른은 단순한 구타에는 저항하지 않으니까.

베스퍼는 하인들의 눈이 닿지 않게끔 한밤중이 다 된 후에야 뒷문으로 요른을 내보내 주었다. 요른은 발목에 끊임없이 회복 마법을 걸어 겨우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만 유지하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가자마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오늘은 그래도 그날보다는 오히려 훨씬 덜 맞았어.’

요른은 생각했다. 병사 셋이 달려들어 봤자 이래저래 베스퍼 폰 크라우스 하나만 못하다. 그 노련한 성기사는 완력만으로 치자면 막시밀리안보다도 더 세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여기서 끝이면 좋겠다고 요른은 생각했다. 내일이나 모레 또 한 번 덮쳐오든지 말든지, 오늘은 더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요른은 마침내 2층짜리 작은 목조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재킷을 벗어 현관 옆의 옷걸이에 걸어 둔 다음 그는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코피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접질린 발목이 아파서 계단 난간을 오른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부러진 손가락이 걸리적거렸다.

‘귀찮아.’

요른은 사실 일반 치료 마법보다 훨씬 뛰어난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령 마법’ 말고는 써서는 안 된다. 아무도 안 볼 때는 써도 될 거 같은데, 막시는 절대로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그냥 피를 질질 흘리면서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오늘 전장에서 이미 막시가 쓰지 말라던 마법을 써 버렸는데, 또 금지된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른손을 쓰기가 어려워서 왼손으로 열쇠를 꺼내 침실 문을 따고 들어가면서 요른은 조금 울적하게 속으로 곱씹었다. 들키지 않았으면 했는데.

요른도 성황 전하의 눈이 어디에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막시가 위험했으니까 들킬 걸 각오하고 그 마법을 썼던 거다. 요른은 그러나 성황께서 막시밀리안의 면전에서 그 일을 언급하실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바로 그 일을 들어 요른을 막시의 파트너로 임명하겠다 하실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미안해, 막시.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미안해. 하지만…….’

되뇌던 끝에 요른은 마치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너는 물론 엄청나게 강하지만, 무적은 아니잖아.’

오늘 그 마물은 특별한 놈이었다. 근육량도 엄청났고, 아홉 마리가 몹시도 잘 섞여 있어서 움직임도 복잡했다. 아니, 성황께서는 아홉 마리라고 하셨지만 요른이 보기에는 수십 마리도 넘었다. 작은 곤충이나, 몸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섞여 들어간 건 성황께서도 얼른 알아보지 못하신 것 같았다.

아무리 막시처럼 마물을 많이 상대해 온 노련한 기사라도 그놈이 어디로 치고 들어올지는 예측하기 힘들었으리라. 요른은 자신이 마법을 쓰지 않았더라면 막시의 머리가 바닥에 뒹굴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 꼴은 당연히 볼 수가 없었다.

요른은 막시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단, 막시의 목숨이 위험할 때만 빼고. 그건 예외다. 막시 본인이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막시는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가 주지는 않을 것이다. 막시는 요른더러 공격 마법은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했다. 요른은 말을 더듬으니 타이밍이 어긋나기 쉬운데, 그건 전장에서는 치명적이다. 특히 전송과 공격 마법을 동시에 쓰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다.

요른이 두 마법을 함께 쓰는 법을 개발해 낸 건 삼 년쯤 전의 일이다. 별 뜻 없이 만들어 냈지만, 문득 이런 마법은 혹시 막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막시를 집 근처 숲속 한적한 곳으로 불러다가 눈앞에서 시전해서 보여 주었다. 하지만 막시는 바로 표정이 굳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요른을 나무랐다.

[이런 건 다시는 쓰지 마. 다시 이런 마법을 쓰면 나 화낼 거야.]

막시의 말을 듣고 요른은 우울해졌다. 막시가 요른에게 화를 낼 거라고 예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말 나쁜 짓일 때만 그는 그렇게 덧붙이곤 했다.

요른은 자신이 정말로 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전송과 공격 마법을 동시에 쓰는 게 그렇게까지 나쁘고 멍청한 짓일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자신은 역시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혼자서는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막시가 이렇게까지 사사건건 손을 뻗어 도와주지 않는 한.

요른은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절대로 두 마법을 동시에 쓰지 않겠다고 막시에게 단단히 약속했다. 이 마법은 평생 봉인해 두겠다고.

하지만 삼 년 후 오늘, 요른은 결국 막시의 등 뒤에서 전송과 공격 마법을 동시에 사용해 버렸다.

막시는 내일이나 모레쯤 요른을 성으로 부를 것이다. 막시는 자신이 화를 낼 거라고 예고해 둔 일에 대해서는 정말로 깐깐하게 화를 내고 지나간다. 아무리 오래전에 한 말이라도 기억해 두고는 그대로 지킨다.

그는 요른에게 직접 손을 대지는 않는다. 하인이나 수하 병사를 시켜서 벌을 주곤 한다. 거꾸로 묶어서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물에 넣거나, 말채찍으로 정해진 횟수만큼 등을 때리곤 한다. 어떤 식으로 벌을 받고 싶은지 요른 스스로 고르게 해 줄 때도 있다.

요른을 때리는 건 마찬가지라고 쳐도 막시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막시는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때리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면 화를 낼 거라고 미리 말을 해 두고서, 요른이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만 딱 그만큼 벌을 준다. 스스로 맺어 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막시는 언제나 기사답게 행동해.’

성기사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은 늘 규칙에 따르며 바르고 정갈하게 산다. 요른에게 벌을 주는 것도 그 삶의 양식의 일부다. 막시의 올곧은 모습을 사랑하는 만큼 요른은 그가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도 늘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쨌든 막시가 벌을 준다고 해도 내일이나 모레의 일이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아무리 베스퍼라고 해도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요른은 스스로를 달래듯이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들어오자마자 그는 진이 그려진 이불보를 수납장에서 꺼내서 침대 위에 덮어놓았다. 이러면 자는 동안 상처가 조금은 회복될 것이다. 입으로 계속 주문을 걸어 주는 것만큼은 못하지만 진도 효과가 있다. 이렇게 얻어맞는 일이 하도 자주 있다 보니 이불보 몇 개를 손봐서 아예 미리 진을 그려 두었던 터다.

침대 옆에 서서 피에 젖은 웃옷 단추에 손을 대며 요른은 살짝 긴장이 풀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단추 근처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이 순간 딱 굳어졌다.

두개골 안쪽에 새겨 두었던 마법진이 뇌를 송곳으로 후비듯이 신호를 전해 오고 있었다.

요른은 의식을 집중하고 이동할 채비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막시의 낭랑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안 돼.]

그는 딱 잘라 말하지 않았던가.

일 년쯤 전, 요른은 조금 특이한 전송 마법 하나를 개발했다. 그가 알기로는 이런 마법을 쓸 줄 아는 다른 마법사는 아직 없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는 지치지도 않고 또 희망이 싹텄다. 혹시 이건 정말로 막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시는 요른이 편지를 보내 초대하자 얌전히 숲으로 와서 요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아 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답지 않게 미간에 주름까지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안 돼. 넌 왜 자꾸 이런 나쁜 것만 개발하는 거야. 앞으로 절대 쓰지 마. 나 진짜 화낼 거야.]

막시의 나지막하고 울림 좋은 목소리가 요른의 귓가를 두드렸다. 막시는 이어서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이단 마법인지 요른에게 잘 설명해 주었다. 정령계 전송 마법이란 소리와 영상을 전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런 건 누구 눈에 띄면 정령 마법이라고 우길 수조차 없는,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죄악이라고.

요른은 어깨가 축 늘어진 채 고개를 끄덕거렸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실제 사물을 전송하는 마법, 특히 생명체를 전송하는 마법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대로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요른은 막시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막시가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낼 만큼 나쁜 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단 하나의 예외 상황이 아니라면.

이 신호가 맞다면, 방금 막시밀리안의 심장이…….

기숙사 특실 안,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요른은 터진 입 속에서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의 침실로 전송했다. 성황국 수도 외곽에 위치한 프란첸가의 별성 안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안전한 곳에 감춰져 있는 그 방 안으로.

* * *

“막시.”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요른은 막시밀리안의 애칭을 불렀다. 처음에는 속삭이듯이 하다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막시.”

답은 없었다.

기척도 없었다. 요른은 제일 먼저 침대 위를 살폈지만 막시는 거기 없었다. 요른은 자신의 집 일이 층을 다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넓은 침실 안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가구들 사이사이를, 침대 밑과 커튼 틈새를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신호가 전해져 온 좌표가 여기니까 막시의 몸은 살았든 죽었든 여기 있어야 맞다. 요른은 수 번은 더 막시밀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문 바깥에 호위병이 서는 날이라면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혹시 막시가 창밖으로 떨어졌나 해서 창문도 살펴보았지만, 창은 열렸던 흔적조차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요른은 무릎을 덜덜 떨면서 벽 한쪽에 손을 대고 기대어 섰다. 안 그러면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채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막시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내 마법에 착오가 있어서, 틀린 신호가 날아왔던 거야.

십 년 전, 요른은 막시의 생명 징후에 이상이 발생하면 자신의 머리로 바로 신호가 전해지게끔 몰래 마법을 걸어 두었다. 그의 심장 바로 위 갈비뼈 안쪽과 요른 자신의 두개골 안쪽에 각각 서로 상응되는 마법진을 새겼다.

막시는 물론 요른이 자신의 몸에 그런 마법을 걸어 뒀다는 걸 알면 끔찍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요른의 얼굴을 말채찍으로 때렸던 그때보다도 더 얼굴이 일그러질 테고, 요른에게 어떤 상상할 수도 없는 벌을 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시 열한 살이던 요른은 마법을 썼다. 그것만은 막시의 지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예외 상황’이라고 생각했었다. 화를 내고 벌을 줄 막시 본인이 죽어 버린다면 어차피 다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그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후 십 년 동안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 요른의 머릿속으로 신호가 전해져 왔다. 막시밀리안 폰 프란첸은 죽었다, 이 세계에서 그의 숨은 멈췄고 심장도 더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요른은 다시금 자신을 달래듯이 되뇌었다.

프란첸 가문의 성에는 근위병이 상시 근무하고 있고, 날에 따라 개인 호위병이 침실 앞을 지키기도 한다. 막시가 이 성안에서 이렇게 순식간에 손쉽게 암살당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방 안에 아무런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요른은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다. 신호가 들어온 직후에 날아왔으니, 정말로 막시가 죽었다면 여기 시체라도 있어야 한다. 자연사라면 물론이고 암살이라도 마찬가지다. 범인은 시체를 옮길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막시는 역시 지금 어딘가 다른 곳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거다. 아직 밤이 그렇게 늦지는 않았다. 거실이나 살롱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와인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고,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을 수도 있다. 요른 자신의 마법이 뭔가 어긋나서 이상한 신호를 보내온 것뿐이다.

그래도 요른은 침실에서 계속 기다리기로 했다. 막시가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해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시는 언젠가는 자러 올 테니까,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전송 마법으로 사라져 버리면 된다. 두 번이나 막시 몰래 전송 마법을 써 버리는 건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요른은 그렇게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몸도 머리도 마음먹은 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커튼 뒤에 숨기는커녕 그는 방 안을 정신없이 휘돌아 다녔다.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으로도 끊임없이 뭐라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막시는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른.”

울음이 나올 뻔했다.

요른은 실제로 울기 시작했다.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려 보자 익숙한 인영이 침실과 욕실을 연결해 주는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렇구나.’

막시는 그냥 제 방에 딸린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던 거야.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요른은 뒤늦게 깨달으며 웃었다. 막시는 방의 그림자 진 벽 쪽에 서 있어서 얼굴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창으로 들어온 달빛의 가장자리가 닿아 몸의 윤곽 일부만은 희미하게 드러나 보였다. 고급 비단으로 된 파자마로 갈아입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요른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내 마법이 뭔가 잘못되었던 것뿐이야.

요른은 오늘 잘못을 겹겹으로 했다. 전장에서 이미 막시가 쓰지 말라는 마법을 썼고, 인체 전송 마법도 사용했고, 가택 침입까지 했다. 게다가 얘기하다 보면 막시의 몸에 지난 십 년간 마법을 걸어 두었다는 사실도 아무래도 들킬 것 같았다. 막시는 엄청 화를 내고 요른에게 아주 심한 벌을 줄 거다. 평소보다 몇 배는 심한 벌을.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막시는 지금 살아 있다. 멀쩡히 살아서 요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요른은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이를 악문 채 몇 걸음 뒷걸음쳐서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한쪽 벽의 거의 반을 차지한 격자창에서 들어온 달빛이 얼굴에 닿지 않게끔.

그래 봤자 막시가 벽의 램프를 켜 버리면 소용이 없긴 할 거다. 막시는 기사 중에는 극히 드물게도 본인도 조금은 마법을 쓸 줄 알았고, 이미 진이 그려져 있는 탁상 램프를 점등하는 것 정도는 손쉽게 했다.

하지만 막시는 램프 불을 켜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 숨은 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다시 운을 떼어 요른에게 물어 왔다.

“요른. 여기서 뭐 해?”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하고 낮았고, 어딘지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요른은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울음이 목을 완전히 막아 버려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베스퍼가 보내온 병사들에게 맞았던 통증도 뒤늦게 되살아났다. 안심해서 긴장이 풀린 탓이다. 요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아예 벽 한쪽에 등을 푹 기대어 버렸다.

막시는 딱히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을 바꿔서 물어 왔을 뿐이다.

“오늘이 며칠이야?”

“어, 으, 응?”

“오늘 몇 년 몇 월 며칠이야? 요른, 네가 지금 너무 상태가 이상한 거 같아서 제정신인지 시험해 보려는 거야. 대답해.”

“처, 처천, 백…….”

요른은 숨을 몰아쉬었다. 안 그래도 목이 막혀 있는데 말더듬이 습관까지 돌아와 버린 탓에 그는 답 대신 염소처럼 꺽꺽 소리만 내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입을 꽉 다물어 봤자 이가 딱딱 마주치며 떨렸고,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막시가 살아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매일같이 서로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눠 왔지만 그게 얼마나 기적이었던지 요른은 지금 이 순간에야 새삼 깨달았다. 막시는 전방에서 가장 위험한 마물들과 대치하는 성기사이며, 유력한 제후 후보에 프란첸 공작가의 독자다. 언제든 적의 손에 죽거나 암살당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요른이 그러고 있자 막시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 잘 못 하겠으면 그냥 머리로 전해 줘도 돼.”

“어, 어어, 응?”

“머리에서 머리로 전하는 거. 너 어릴 때는 잘했잖아.”

“하, 하하하지, 말…….”

막시가 다시는 쓰지 말라고 했던 ‘마법’ 중 하나다. 아직 요른이 약속의 개념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막시는 요른을 설득하느라 아주 진을 뺐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막시밀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내가 하지 말라고 했었지.”

그러고는 잠시 숨을 멈추듯이 했다. 침묵이 아찔하게 틈을 벌린 다음에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아. 이제 나한테는 해도 돼.”

“어……?”

“우리끼리는 괜찮아. 네 머리에서 내 머리로 전해 줘.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야?”

―성황국력 천칠백이십오 년 팔월 이십 일.

요른은 가만히 전해 주었다. 요른 자신의 감정이나 다른 상념은 묻어나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가능한 한 순수한 정보 내용만 걸러내서 전했다. 막시가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으, 응.”

“그러면 오늘…….”

막시가 왠지 물에 점점 더 깊이 잠겨 가는 듯한 목소리로 읊었다.

“오늘, 성황이…… 그런가? 맞아? 그자가 오늘 너더러 내 파트너가 되라고 했던가?”

“어……. 응.”

답해 놓고 요른은 얼른 덧붙였다. 막시가 성황을 하대하는 투로 말하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할 말이 더 급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해 볼게. 생각해 둔 게 있어. 우리 파트너 되기 전에 모의 훈련 한 번 할 거 아냐. 내가 그때 전송이랑 공격을 동시에 쓰다가 좌표를 서로 잘못 맞춰서 심하게 다치는 거야. 그러면 나는 트라우마로 다시는 그 마법을 못 쓰게 될 거 아냐. 그런 마법사는 쓸모가 없으니까 기사의 파트너가 될 수 없고.”

막시는 반응이 없었다. 불안해져서 요른은 말을 좀 더 재촉했다.

“그런 경우를 마법사들 사이에서 많이 봤어. 자기 마법에 다치면, 트, 트라우마가 생겨. 그그래서 그 마법은 아예 못 쓰게 되는 거거야. 아아니면 아예 몇 달쯤 아무 마법도 못 쓰게 되되는 일도, 있으니니까……. 나나, 파, 팔 같은 거 하나, 없앨게. 그 그러면 서, 성황도 미, 믿어, 주주시실, 거…….”

서둘러 내뱉다 보니 입술에 경련이 일면서 요른은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곧 입을 도로 다물어 버렸다. 막시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끝에 불쑥 엉뚱한 지시만 내렸을 뿐이다.

“요른, 조금만 앞으로 나와 봐. 모습이 안 보여. 달빛 안으로 나와.”

요른은 주춤거렸다. 하지만 곧 막시의 부탁에 따랐다. 요른이 창가에 서서 윤곽을 드러내자 막시가 물었다.

“다쳤어?”

“어…….”

“누가?”

“그냥…….”

“나야?”

“어?”

“내가 그랬어?”

“마, 막시, 무슨 말인지…….”

“내가 그랬지?”

“아, 아니야. 보병 몇 명이 그랬어.”

“죽여 버리지 그랬어.”

“막시……?”

“네 마법이면 파리처럼 죽여 버릴 수 있잖아.”

“무, 무슨, 그런 거 안…….”

“괜찮아.”

막시가 말했다.

“앞으로는 다 죽여 버려.”

요른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아까부터 그저 피곤해서 막시의 목이 잠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다.

문득 요른은 막시가 우는 건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요른이 여섯 살, 막시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겪었던 그 입양 사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이제는 훌륭한 어른이 된 막시밀리안이 어둠 속에서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와 요른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요른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막시에게 사정을 물어볼 겨를도 없이 막시가 먼저 요른의 몸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청동 같은 가슴과 팔 사이에 갇혀 요른은 숨이 턱 막혔다. 막시가 눈치챘는지 팔을 살짝 늦춰 주면서 요른의 머리를, 등과 어깻죽지를 쓰다듬었다. 요른은 이제 마치 밀도 높고 따스한, 아주 깊은 물 속에 잠긴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막시가 요른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오열하는 소리가 요른의 귀를 찔렀다.

요른은 눈을 깜박거렸다. 눈앞에 이상한 향기 같은 잔상이 떠돌아다녔고 귀는 어떤 빛에 물들어 거의 멀어 버린 것 같았다. 사람에게 안겨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건 막시의 몸이었다. 그의 팔, 코끝에 와 닿는 체취, 어둠 속에서도 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아아, 요른은 생각했다. 이건 꿈이구나.

어쩐지 이상했다. 막시가 죽었다는 신호가 오질 않나, 그래서 와 봤더니 멀쩡히 살아 있질 않나. 게다가…… 요른은 방금 달빛에 설핏 비추어 본 장면을 눈 안에서 되새겼다. 막시는 어째 그새 머리도 더 길어졌고 뺨에는 흉터가 생겨 버렸다. 내 꿈이라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거겠지.

막시는 요른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면 싫어할 거다. 멋대로 막시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알면 정말 끔찍하게 소름 끼쳐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무시무시한 죄책감이 심장을 좀먹어 가기 시작했다. 빨리 깨어나야 해.

요른은 애써 몸을 뒤틀어 보았다. 하지만 꿈속의 막시는 그의 몸을 놓아 주지 않았다. 품 안에 가둬 둔 채 등이며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어 댔을 뿐.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그는 요른의 몸을 놓아 주며 말했다.

“요른, 회복 마법을 써. 정령 마법 말고, 다른 거.”

“하지만…….”

“빨리. 낫게 해. 아프잖아.”

요른은 마법을 썼다. 부러졌던 오른손 손가락들이 돌아왔고 금이 가서 삐뚤어져 있던 콧대가 다시 곧게 붙었다. 요른의 몸이 낫자 막시가 다시금 짙은 새장에 가두듯이 끌어안아 양팔로 단단히 옥죄었다. 요른은 나중에는 포기하고 그저 새벽이 알아서 찾아와 잠을 깨워 주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서녘의 새하얀 달빛이 동녘의 붉은빛에 자리를 넘겨주고 떠날 때까지도 요른은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이 머리가 좀 더 긴, 뺨에 작은 흉터가 새겨진 막시는 완전히 동이 틀 때까지도 요른에게 닿아 있었다. 팔은 풀어 주었지만 대신 손을 꼭 잡은 채, 그는 밤새 우느라 쉬어 터진 목소리로 요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너는…….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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