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6-25
“허무하네, 진짜.”
“그러게요. 너무 허무해요.”
형우와 민희는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콰드득!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있는 그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형우 일행이 있던 엑시디움의 차원이었다.
비록 파편에 불가능했지만 엑시디움의 힘으로 잘 버티고 있던 그곳은 그곳의 주인이 없어지면서 무너졌다.
형우 일행은 무너지는 그 차원을 보며 뭔가 허무했다.
“그렇게 격하게 싸웠는데 결말이 너무 간단해서 그런가……. 이곳에서뿐만 아니라 오티움에서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지구에서도 1년 가까이 보냈는데 그 허무함이 한 번에 밀려와서 그런지 좀 그러네.”
형우는 한쪽 가슴이 손을 올려놨다.
쉼 없이 달려왔던 만큼 식어버린 심장이 느껴졌다.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그걸 느끼는 듯했다.
그래도 그걸 떠나서 한 가지는 확실한 게 있었다.
“어쩌건 이겼다.”
형우는 그 말을 하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쉽든 어렵든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더는 누군가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침략자들을 모두 격퇴했으니까.
[형우, 뭐 하고 있나?]
“네?”
인사니오는 형우를 부르며 어디론가 앞서나갔다.
그 모습을 형우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겼으면 승전보를 전해야지 않겠나?]
[늦으면 우리가 먼저 전할지도 몰라.]
두 신은 묘한 웃음을 보이며 먼저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형우는 밝게 웃으며 뛰었다.
“아, 아. 네! 그렇죠. 승전보를 알려줘야죠. 이건 지구 출신이 먼저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먼저 좀 가겠습니다!”
“제가 먼저 갈 거예요!”
그 모습을 본 민희는 허겁지겁 뒤를 따라갔다.
-에필로그.
타다닷!
“에릭! 이리 와! 자꾸 도망가면 엄마가 혼낸다!”
“헹! 싫은데?!”
“에릭!”
인천공항 내부.
이제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공항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엄마로 보이는 여인은 천방지축 날뛰는 에릭을 잡기 위해 고전 중이었다.
그러던 중 에릭의 앞에 무언가 있는 걸 보고 엄마가 소리쳤다.
“에릭, 앞에 조심해!”
툭!
“악!”
막 달려가던 에릭은 무언가에 부딪혀 악 소리를 냈다.
앞을 제대로 안 보고 다닌 대가를 톡톡히 받아낸 에릭은 뭐와 부딪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어어…….”
그런데 에릭은 부딪힌 대상을 확인하곤 그대로 얼어버렸다.
거대한 키에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남자는 몬스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위압감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한 에릭을 향해 거구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에릭의 엄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남자가 에릭에게 해코지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에릭을 일으켜주곤 엄마에게 데려다줬다.
"P-503 차원에서 오신 분들 맞습니까?“
“…네? 아! 네, 네. 맞아요.”
그녀는 뭘 말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목에 걸린 무언가를 보곤 황급히 대답했다.
목에 걸린 그것엔 ‘P-503 차원, 임시 등록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P-503이면 8번 게이트로 가셔야 합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안…내요?”
“예, 따라오십시오.
반쯤 얼이 빠진 모자(母子)는 남자를 따라갔다.
“어쩌다 따로 떨어지셨습니까?”
“아, 화장실 좀 갔다가 애가 도망가서 길을…….”
에릭의 엄마는 부끄러운지 뒷말을 삼켰다.
사실 애가 날뛰고 다닌 건 둘째 문제였다.
화장실을 처음 갔을 때 뭐가 뭔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H-503 차원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안내해준 이들은 친절했으나 여성 인력이 좀 부족하다 보니 이 부분까진 세세하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그 결과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 기다리기 지루했던 에릭이 무리를 벗어났다.
에릭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니 에릭의 엄마도 당연히 같은 차원의 사람들과 멀어졌다.
남자는 단번에 뭐가 문제였는지 알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이곳이 워낙 넓어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 왔을 땐 이곳이 워낙 넓어서 헤맸습니다.”
“네? 이곳 차원 분이 아니신 건가요?”
찰랑.
“예. 저는 G-518 차원에서 왔습니다. 귀하보다 한 1년 정도 빨리 이곳에 왔습니다.”
남자는 목에 걸린 신분증을 보여줬다.
에릭의 엄마가 걸고 있는 것과 비슷해 보였지만 조금 차이가 있었다.
신분증엔 스캇이라는 이름과 등록 연도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출신 차원인 G-518도 보였다.
“P-503 차원은 미치광이 둘이 있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말 많이 했어요…….”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P-503 차원의 원래 이름은 세리아.
풍요와 번영이란 뜻을 가진 차원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주신도 그 이명을 가지고 있어 정말 풍요로웠다.
그러나 차원까지 소멸시킨 미치광이 둘이 태어나며 풍요는 절규로 번영은 소멸로 끝났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끝난 게 아니었다.
파편으로 나뉘었을 때도 둘은 살아남았고 남은 이들을 노예로 부리며 착취를 당했다.
심지어 죽고 사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그곳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지구라는 차원에서 온 이들이 미치광이 둘을 죽이고 그곳의 주민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줬다.
그대로 있으면 곧 파편마저 소멸할 그곳에서 말이다.
그렇게 구함을 받고 밖으로 나온 그들은 ‘폐기장’을 벗어나 지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지구에서 도착한 곳이 이곳 인천공항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이곳의 직원들은 원하지 않으면 이곳에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른 차원으로도 보내줄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을 이들은 없었다.
이미 앞서 이곳 차원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들은 탓이었다.
상급 신 이상의 힘을 가진 이가 둘에 중급 신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신들은 차원의 침략자 엑시디움을 물리친 강력한 신이라고도 말해줬다.
그 말을 듣고선 다른 곳으로 갈 P-503 차원의 사람은 없었다.
이미 한차례 당한 전례가 있었으니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머물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덜 고생하실 겁니다. 국가에서 무상으로 주택을 보급해주고 충분한 양의 식량과 자금도 지원해드릴 겁니다. 정착해서 계속 생활할 수 있게 바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도 여럿 제공해드리고 아이를 위해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줄 겁니다. 아이를 혼자 두게 될 경우 돌봄 서비스로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
끊임없이 스캇의 말에 에릭의 엄마는 정신을 못 차렸다.
앞서 처음 차원에 대한 설명도 대단했는데 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차원에서 온 이들은 이곳의 정책에 그래도 덜 놀란 편이었으나 에릭의 차원은 지구로 치면 중세에 불과한 문명이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이런 서비스도 있습니다. 아, 그리고 보니 P-503 차원분들은 운 좋게도 서울 근처의 양주로 가시니 그 혜택을 더 보실 겁니다. 나중에 문제가 있거나 정책에 의문이 있으시면 언제든 양주시청을 방문해주시면 됩니다.”
“여긴 신계인가요…?”
에릭의 엄마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기준으로는 신계가 아닌 이상 이런 영화를 누릴 수 없었다.
“하하, 신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신계이기도 하죠.”
스캇은 그 말을 하며 앞을 가리켰다.
“다 왔습니다. 저곳이 8번 게이트입니다.”
“안내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에릭의 엄마는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여기 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8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셔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시면 바로 배정된 자택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스캇이 절도있게 인사를 하곤 사라졌다.
스캇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간결한 인사임에도 동작이 꽤 멋있었다.
에릭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에릭, 어서 가자.”
“엄마.”
“응?”
“나도 크면 여기서 일할래요.”
멀어지는 스캇을 보며 에릭은 존경과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스캇은 특별한 걸 보여준 게 없었지만 에릭에겐 뭔가 강렬한 울림을 줬다.
“그래, 우리 에릭은 할 수 있을 거야. 엄마도 꼭 그렇게 되길 바랄게. 그러면 엄마는 우리 에릭이 참 자랑스러울 것 같구나.”
“아이고! 어디 가셨었어요? 한참 찾았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다른 분들은 수속이 끝나서 이제 가시기만 하면 끝이에요.”
“아, 네.”
그때 8번 게이트에서 직원이 달려와 둘은 안으로 끌어갔다. 그리고 이제부터 공식적인 지구의 시민이라는 증명을 해줄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줬다.
이어서 몇몇 절차를 끝내고 모자는 거대한 수송 헬기를 타고 양주로 이동했다.
수송 헬기 안, 사람들은 불안과 설렘이 반반 섞인 감정을 안고 멍하니 있었다.
그때 에릭이 소리 질렀다.
“와아! 엄마, 저기 봐요!”
“응? 아…….”
에릭의 말에 밖으로 바라봤던 에릭의 엄마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상공에서 바라본 서울은 정말 대단했다.
“와…!”
“멋지다…….”
다른 이들도 서울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그 정도로 서울의 모습은 멋졌다.
수려한 산과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도시.
게다가 계획도시로 만들어진 서울은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깔끔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신계보다 더 신계 같은 이곳을 보며.
이스케이프 길드 본부.
“뀨우! 뀨우!”
“이리 와! 이리 와!”
“뀨우!”
여전히 일방적으로 사이좋은 뀨우와 탐욕… 아니, 룩스는 본부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룩스.
탐욕에게 새로 붙은 이름이었다.
라틴어로 빛이라는 뜻을 가진 룩스는 빛나는 존재, 여명, 구원 등을 뜻을 가졌다.
앞으로 지구에 축복만이 있기를 바라며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뀨우에겐 반대의 뜻으로 통했다.
매번 등에 올라타 괴롭히기만 하는 룩스는 뀨우에게 재앙이었다.
“뀨우-!”
뀨우는 도움을 바라며 소리쳤다.
그런데 아무도 뀨우를 도와주지 않았다.
주인인 소정과 평소 중재자 역할을 했던 형우마저 말이다.
원래라면 이쯤 됐을 때 형우가 항상 중재를 해줬다.
뀨우가 불쌍해서라기보단 계속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게 싫어서였다.
그러나 형우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빠! 네에? 나 오빠 정말 좋아해요. 그러니까 저랑 사귀어주세요.”
“형우 오빠? 10살 넘게 차이 나는 애랑 사귀어서 범죄자 소리 들으실 건 아니죠?”
“그, 그게…….”
형우는 민희와 소정의 사이에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엑시디움이 소멸하고 3년이 지났다.
그사이 성인이 된 소정은 그동안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냈다.
아예 대놓고 형우에게 구애를 펼쳤다.
마치 그동안 티를 안 낸 걸 보상이라도 받듯이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자극을 받은 여인이 있었다.
민희도 그 모습을 보고 형우에게 적극적으로 대쉬를 했다.
민희와 소정에게 형우는 자신을 구출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수년간 같이 지내오며 정까지 들은 상태였다.
게다가 강하기까지 했다.
반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채운 상대가 바로 형우였기에 어찌 보면 그녀들의 감정은 정말 자연스러운 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둘이 본색을 드러내자 곤란해진 건 형우였다.
물론 둘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이 겪은 조건 역시 형우에게 모두 적용되는 거였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 없는 형우였다.
덕분에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인사니오 님, 도와주세요.”
형우는 근처에 있던 인사니오에게 SOS를 보냈다.
그러나 들려온 말은 더 황당했다.
[굳이 고민할 거 있는가? 형우는 그대는 신이다. 굳이 인간의 법칙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그대들 역시 이제 곧 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신이라면 일부다처든 일처다부든 얽매이는 게 더 어리석은 거다.]
“아…!”
“아?!”
그 말에 둘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눈을 맞췄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둘은 눈으로 빠르게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은 평화였다.
물론 형우에겐 평화가 아닐지 몰랐지만.
그걸 눈치챈 형우는 소리쳤다.
“인사니오 님-!”
형우는 인사니오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러나 인사니오는 이미 웃으며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형우는 두 여인에게 둘러싸여 행복 아닌 행복을 누렸다.
(1~151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