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6-24
크레아.
그녀의 마지막은 화려했다.
결코, 본래 본인의 힘을 잃고 겨우 부활한 비루한 신의 모습이 아닌 화려한 전성기의 거대한 차원을 거느린 주신의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크레아의 빛은 화려했고 강렬했다.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보는 인사니오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인사니오는 과거 오티움에서 크레아와 거의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레아 덕분에 태어난 게 바로 인사니오였다.
결과적으로 세계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난 것일 뿐이지만 태초라는 의미는 남달랐다.
지구로 비유를 들자면 크레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나오는 땅의 여신 가이아와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있음으로써 차원이 성장했고 다른 신들도 생겨났다.
크레아는 오티움에 있는 모든 신의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 어머니의 마지막 죽음을 바라보는 인사니오의 마음은 심란했다.
[크레아…….]
한숨이 가득 섞인 말로 마지막 크레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크레아는 이미 빛으로 산화했다.
그녀의 빛은 화려하게 퍼져나갔고 주변의 모든 어둠을 밀어냈다.
스아!
어둠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끝까지 빛과 맞섰다.
그러나 크레아가 최후에 보인 빛은 만만하지 않았다.
본인의 영혼까지 소멸시키면서 불태운 화려한 빛은 계속 어둠을 밀어냈다.
비록 오래가지 않을 빛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엑시디움의 존재감을 모두 없앨 만큼 컸다.
화아악!
잠시 후, 엑시디움의 차원이자 지금은 파편이 된 이곳은 빛의 세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일행들은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꽃?”
놀랍게도 어둠에 가려졌다가 빛으로 드러난 그 세상은 꽃동산이었다.
드넓은 등판에서 생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푸른 새싹과 꽃이 한가득 보였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벌한 중압감과 어둠에서 싸워왔다.
그런데 꽃동산이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게 이 차원의 본래 모습이었다.
생명.
그게 이 차원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자 엑시디움이 애써 감추고 있던 본인의 치부였다.
[본 주인은 본인의 정체성을 버리려고 하지만 차원은 아직도 그걸 간직하고 있구나.]
인사니오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때 누군가 형우 일행의 앞에 나타났다.
저벅저벅.
천천히 걸어오는 그는 인자한 얼굴의 남자였다.
유별할 것 없는 외모였지만 표정에서 착함과 인자함이 드러났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 해주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
형우는 그를 보며 경계했다.
얼굴이 어떻든 간에 엑시디움의 차원에서 나타날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엑시디움.
모습을 드러낸 건 분명 엑시디움이었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이전에 엑시디움에게 느껴지던 강렬한 기세와 압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엥?”
[…….]
엑시디움의 말에 형우는 대놓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엑시디움에게서 나올 말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러나 곧이어 나온 엑시디움의 말에 다들 크게 놀랐다.
[저는 여러분이 방금까지 만났던 엑시디움과 분리된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면 완벽히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죠.]
[설마 당신은…?]
엘리안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엑시디움을… 아니, 다른 엑시디움에게 말했다.
[예, 엑시디움의 본래 인격체인 ‘생명’입니다. 최초의 인격체이지만 지금은 ‘분노’에게 모든 권한을 잃은 상태입니다. 만약 조금 전 거룩한 희생을 하신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주도권을 잃고 있었을 겁니다. 최근 분노가 많이 약해진 틈을 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굳게 주도권을 쥐고 있더군요. 지금도 완벽히 권한을 얻은 게 아니고 잠시 대화할 틈 정도만 얻은 겁니다.]
다른 엑시디움, 생명은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듣는 형우 일행은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부상 중이던 민희는 부상도 잊고 멍한 표정으로 ‘생명’을 바라봤다.
“분리된 인격체라면 이 차원의 마지막에 분리된 건가요?”
[예, 맞습니다. 그때 분리됐습니다. 부끄럽게도 신으로서 분노를 참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안에 있던 악마가 깨어났습니다. 아니, 악마가 아니라 제 미숙한 부분이 드러난 것이겠지만요.]
“허어…….”
짧은 대화였지만 형우 일행은 대충 상황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생명’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여러분들에게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유배를 당한 엑시디움은 자신의 차원이 소멸 직전에 달하자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 분노는 새로운 이명을 만들었고 그 순간 새로운 인격체가 생겨났다.
어떻게 그런 인격체가 생겨났는지는 그런 정황으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소멸해가는 차원의 원통함이 그 순간 엑시디움에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새로운 인격체가 생기고 본래의 인격체는 주도권을 완벽히 뺏겼다.
안 그래도 유배 중 피폐해졌던 ‘생명’은 아예 모든 권한에서 배제됐다.
그 이후 ‘분노’는 차원을 파괴하며 난봉질을 하고 다녔다.
[저는 엑시디움을 말리기 위해 내부에서 계속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서로 반발을 일으키는 생명과 분노는 점점 육체를 무너트렸죠. 그러나 그게 더 최악으로 치닫는 일인지는 상상을 못 했습니다.]
육체의 균형이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분노는 에너지를 더 갈구했다.
더 많은 차원을 부수고 다니며 힘을 길렀고 점점 생명을 압박했다.
이건 원하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내부의 균형이 깨지며 자폭하려 했던 의도와 다르게 점점 피해자만 많아졌다.
그러나 생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괴롭혔고 계속 조금씩 성과를 보였다.
최근엔 아예 엑시디움을 거동조차 못 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오티움과 지구에서 연이은 실패. 그 덕분에 더 크게 그를 흔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을 다시 침략하게 된다면 그것도 한때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한마디로 형우 일행 덕분이라는 거였다.
분노를 흔드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힘이 공급되지 않자 그 틈을 노려 제대로 타격을 줬다. 그리고 알맞은 타이밍에 형우 일행까지 나타났으니 ‘생명’의 입장에선 정말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막을 방법은 있습니까? 저희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형우는 기대를 담아 말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냉정했다.
[그대들의 힘으로는 엑시디움을 막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러면 되지도 않는 거 가지고 계속 그 장황한 말을 한 거예요?”
민희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냈다.
막을 방법이 없다면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했단 말인가.
[그대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 힘을 저에게 빌려준다면 가능합니다.]
[힘을 빌려?]
[…?]
“그게 무슨…….”
스으으. 스으으.
형우 일행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빛이 넘쳐났던 공간에 점점 어둠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크레아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웠던 빛이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생명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요?”
[예.]
생명은 의아해하는 형우와 일행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일행들은 생명과 함께 무언가를 준비했다.
잠시 후 크레아의 빛은 어둠이 모두 먹혔다.
화아악!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차원 전체를 다시 장악했다.
싱그러운 꽃과 풀은 모두 사라졌다.
다시 어둠이 차원을 지배하자 기분 나쁜 기운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과 함께 엑시디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연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크레아의 빛에 타격을 받아 본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본체는 ‘생명’의 모습과 똑같았다.
[감히…….]
마치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한 말이었다.
빛이 생겨나며 잠시 ‘생명’이 밖에서 활동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엑시디움은 더 화가 난 상태였다.
게다가 버러지라고 생각했던 크레아에게 한 방 제대로 당해 잠깐이라도 밀렸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엑시디움 분노를 드러내면서도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잠시 밀려났던 사이 ‘생명’과 형우 일행 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엑시디움은 불안했다.
분노의 크기와 다르게 행동은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형우 일행의 모습마저 안 보였다.
그게 엑시디움을 더 긴장하게 했다.
[흥! 그래 봤자 겨우 버러지들. 모조리 흡수해서 내 힘으로 만들어주겠다. 그리고 그 힘으로 너희 차원을 뭉개주마.]
엑시디움은 그 생각을 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이제 장난 따윈 없었다.
단 한 방에 모두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음!]
파앗!
그때 갑자기 바닥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엑시디움은 바로 그걸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반응하기도 전에 그게 엑시디움을 강타했다.
그런데 막상 공격을 받은 엑시디움의 표정이 애매했다.
[전송? 아니, 힘을?]
놀랍게도 엑시디움이 받은 공격은 공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힘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놀랍게도 엑시디움이 가장 잘 아는 방법이었다.
이미 점령한 차원으로 다른 차원을 공격할 때 쓰는 방법인 ‘전송’.
그걸로 엑시디움에게 힘이 전달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엑시디움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누구라도 이해하긴 힘들었다.
왜 적이 본인에게 힘을 전해준단 말인가.
그러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다른 인격을 느끼면서.
[이걸 노렸구나. 그냥 얌전히 소멸될 것이지, 이따위 발악을…!]
[이건 발악이 아니다. 내가 나을 막으려 할 뿐이다.]
[끄, 끄아아악!]
엑시디움의 비명을 시작으로 내부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힘은 ‘분노’가 아닌 ‘생명’에게 전달해준 거였다.
어둠에 가려지기 전 생명은 형우 일행에게 힘을 빌려달라고 했다.
오직 본인만이 마지막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며 말이다.
형우 일행은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믿고 따랐다.
어차피 이제 변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암울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냥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엑시디움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걸 믿고 말한 대로 힘을 전송시켜줬다.
오직 ‘생명’에게만 말이다.
파아아앗!
힘은 계속 끊임없이 전해졌다.
형우 일행 전체가 합쳐서 전해준 힘이 하나로 합쳐지자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졌다.
여전히 엑시디움을 이기기엔 부족한 힘이었지만 그 힘이 없을 때도 괴롭혀왔던 ‘생명’이었다.
힘이 더해지자 더 치열하게 내부를 괴롭혔다.
“된 건가?”
형우 일행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엑시디움이 괴로워하자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생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우, 지금입니다!]
“합성!”
형우는 생명의 신호와 함께 바로 능력을 사용했다.
오랜만에 나온 형우의 능력 합성이었다.
검은 영혼석을 만든 이후 전혀 사용할 일이 없던 능력이기도 했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엑시디움은 코웃음을 쳤다.
합성은 지금 쓰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굳이 쓰인다면 쓸 수 있겠지만 형우의 능력 따윈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R급 능력이라면 조금이나마 통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 봤자 그게 그거였다.
내부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엑시디움이라도 콧방귀만 끼면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헉!]
엑시디움은 당황했다.
합성을 막으려고 했지만 막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합성의 능력으로 내부의 모든 것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내부의 모든 게 섞이기 시작했다.
두 인격체와 새로 주입된 기운을 포함해서 주변의 기운까지 모두.
그 기운들이 섞이며 내부에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원래도 분노와 생명은 섞일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 때문에 생명이 계속 엑시디움을 괴롭히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그게 합성으로 섞이기 시작하자 불협화음이 생겨났다.
거기에 형우 일행의 기운마저 더해지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이, 이익!]
엑시디움은 전력을 다해 합쳐지는 걸 막았다.
그러나 생명이 계속 방해하고 있었다.
애당초 공격을 그대로 허용하게 한 것도 생명의 힘이었다.
이게 처음부터 형우 일행과 노렸던 방법이다.
형우 일행의 힘을 받아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합성으로 서로 기운을 섞이게 만들어 폭발시킨다.
그게 최종 목표였다. 그리고 이 역시 생명… 엑시디움의 희생을 바탕한 작전이었다.
[끝이다, 나의 실수여.]
엑시디움은 엑시디움에게 종결을 고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엔 수많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 없…!]
엑시디움은 마지막까지 버티려고 했다.
정말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렇게 버텨왔고 분노를 표출했던 모든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간단하고 처량한 죽음.
그러나 거스를 순 없었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