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6-20
처음으로 듣는 엑시디움의 목소리.
음습하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에 형우는 순간 긴장을 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그 목소리는 안 그래도 옥죄이는 이 차원의 기운이 억눌린 형우를 더 버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형우는 그래도 나았다.
민희는 마치 숨을 참는 듯이 얼굴이 빨개지면서 괴로워했다.
“하아··· 하아······.”
형우는 그냥 기분만 그런 정도라면 민희는 실질적인 데미지를 받고 있었다.
“오러.”
형우는 바로 보랏빛 오러를 사용했다.
감옥의 신이 가진 신성력을 가득 담은 오러는 보랏빛으로 넘실거렸다.
그걸 바로 민희에게 전달했다.
스아아.
오러는 이전에 인사니오가 차원의 파편에서 구출해줄 때처럼 전신을 감쌌다.
이전처럼 막이 보이는 게 아니라 바로 흡수됐지만 효과는 비슷했다.
“하아··· 오빠, 고마워요.”
민희는 곧 안정됐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엑시디움.
드디어 최종 보스를 만나게 됐다.
[그대가 엑시디움인가?]
인사니오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을 했다.
그러나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사방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연기 같은 게 계속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연기들은 마치 뱀 같았다.
스멀스멀.
영악한 뱀과도 같이 몸을 스르륵 움직이며 형우 일행을 맴돌았다.
그러던 중 연기들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하나로 모이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청소기로 흡입해 하나로 한데 뭉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계속 모이기 시작하자 점점 부피가 커졌다. 그리고 끝에 왔을 땐 거의 30M가 넘는 검은 괴물이 서 있었다.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은근 쫄리는데······.’
어차피 신의 경지쯤 올랐으면 크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5살 꼬마의 모습으로도 거대한 오우거를 이길 수 있었으니까.
몸의 크기가 힘의 크기와 절대 비례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부에 축적된 신성력으로 판가름이 나는 싸움이었다.
다만, 그렇긴 해도 거의 10층 높이의 아파트 한 채가 앞에 나타나니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그렇다. 내 이름은 엑시디움. 만나게 되어 반갑다, 집 잃은 꼬마야.]
[······.]
엑시디움의 그 말에 인사니오는 입을 닫았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이런 모욕엔 화를 참기 힘들었다.
그것도 집을 부수게 한 장본인이 그런 말을 뱉으면 더더욱.
[이제 보니 셋은 집을 잃은 꼬마고 둘은 간신히 지켜낸 꼬마구나. 조합이 참 멋지군. 그래, 버러지들끼리 왜 여기까지 왔나. 미리 죽여달라고 온 건가, 아니면 살려달라고 빌기 위해 온 건가?]
“저게···!”
그래도 일행 중 제일 순한 편인 민희도 발끈할 정도로 엑시디움의 도발을 저열했다.
그러나 확실히 다들 영향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티움의 신들이 잃은 건 그냥 집이 아니었다.
오티움은 그들에게 집이자 고향, 가족이 있는 모든 곳.
자신이 만든 피조물 대부분을 잃었을 때 신들은 그 하나하나가 자신의 아이를 잃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차원까지 소멸했는데 그 원수가 바로 앞에서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으니 도발에 안 걸릴 수가 없었다.
[네놈에게서 분명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도 돌연변이로 태어나거나 후에 태어난 신이 아닌 한 차원에서 태초로 태어난 주신의 기운이 말이다. 그런 신이 왜 이딴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냐?!]
어느새 인사니오는 평소에 쓰던 말이 아닌 격해진 말투로 이야기했다.
다만, 그 말에 좀 놀라운 말이 들어가 있었다.
‘주신?’
주신이란 호칭을 쓰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신이 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거기서 주신이 될 가능성도 작지만 기회만 있으면 되는 건 쉬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주신의 기운을 이어받기만 하면 됐다.
죽여서든 물려받아서든.
그럼 그 차원의 주신이 되는 거였다.
그러나 태초라는 의미는 아주 남달랐다.
그 차원이 생길 때부터 같이 태어난 신.
그 신에게만 붙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대게 그런 신은 파괴와 거리가 완벽히 먼 경우가 많았다.
아니, 아예 없었다.
태초의 신이 그러기란 정말 힘들었으니까.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지구의 신 그란디타스도 태초의 신이었다.
하급 차원이기에 유일한 신이었고 지구에선 최초, 태초의 신이었다.
그런 주신이 자신의 차원에 쏟는 애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란디타스가 좀 더 유별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신들이 덜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에게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부모가 중요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차원은 똑같은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태초의 신이 파괴를 일삼는 파괴자가 됐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태초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구나.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우웅. 우웅.
엑시디움에게 심경 변화가 있는지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어둠이 변했다.
화아악!
"뭐, 뭐야?"
어둠만이 존재했던 차원이 전혀 다른 차원이 됐다. 그리고 변한 차원은 마치 '태초'의 모습 같았다.
[차원의 최초… 내 오티움의 모습 같아.]
크레아는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모습은 차원이 최초로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이었다.
하늘은 빨겠고 땅은 없었다.
오직 물만이 존재했다.
물론 이것도 완전히 태초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주에서부터 행성이 만들어지는 등 수백억, 수천억 년의 과정이 지난 뒤였지만 태초의 신에겐 이게 최초였다.
그때쯤 신의 자아가 형성되니까 말이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나의 세계의 모습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서 난 심심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뭘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뭘 할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잠을 잤다. 아주 기나긴 잠을. 그리고 그 잠이 끝났을 때 난 놀라고 말았다. 내 세계에 스스로 진화한 기특한 생명체가 등장했으니까.]
화악.
다시 배경이 변했다.
변한 배경에선 땅도 있었고 식물도 있었다. 그리고 생명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도 생겼다.
행성이 기나긴 시간을 보내며 겨우 단세포에 불과했던 세포가 점점 커졌고 땅이 생기면서 거기에 맞게 진화를 했다.
그때부터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가능해졌다.
[나는 기뻤다. 그것들을 본 순간 아주 기특하더구나. 내가 뭔가 해주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성장한 그것들을 보며 나는 생각을 했다. 기특한 그들에게 조금의 도움을 주자고.]
화악!
또 한 번 배경이 바뀌었다.
겨우 구분만 됐던 생물들이 이젠 엄청난 진화를 했다.
지구로 치면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들이 문명을 이뤘고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그들은 오티움처럼 마나와 오러를 이용하는 마법사와 기사가 있었다.
그 힘으로 국가가 만들어졌고 그 힘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엑시디움은 모두 포용했다.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바로 엑시디움이었으니까.
[나는 내 차원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잘못이 있어서 이해하고 사랑으로 넘어갔다. 그게 맞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었다.]
화악!
이번에도 말이 끝나자 배경이 변했다.
다만, 이번 장면은 좀 충격적이었다.
차원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있고 행성의 반 이상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붙잡혀서 어딘가에 갇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형우는 순간 붙잡힌 그가 누구인지 눈치를 챘다.
[이게 나의 모습이다. 그렇게 수천 년이 지난 뒤 나는 나의 피조물들에게 붙잡혀 봉인됐다. 차원을 반 이상 부숴놓고 심지어 나의 자리까지도 넘봤다. 그나마 나에게 다행인 것은 그들이 날 소멸시키진 않았다는 거였다. 어디에 또 쓰일지 모르는 이용 가치 때문에 날 살려뒀다. 그리고 그게 그들에겐 재앙이 됐다.]
우우웅. 우웅.
이번에도 감정 변화를 보여주듯이 주변이 떨려왔다.
엑시디움은 자신의 차원에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폐위당한 태초의 신이었다.
물심양면 모든 걸 퍼주는 신이었지만 그의 아이들은 그 은혜를 다른 식으로 갚았다.
상급 차원이었기에 자신 말고 다른 신들이 많았고 그 신들과 함께 반기를 들어 차원의 주신을 바꿔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왕위 찬탈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차원은 피폐해졌다. 그리고 차원이 붕괴 조짐을 보이자 엑시디움은 분노했다.
사랑한 차원이 그것도 자신이 사랑한 이에게 파괴되려 하자 그때 느낀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고 그 파장은 컸다.
[나는 생명의 신 엑시디움. 그러나 그 날은 이후로 나는 분노의 신이 됐다. 그리고 내 차원은 소멸했지.]
새로운 이명 분노를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얻은 엑시디움은 그 힘으로 차원을 완벽히 소멸시켰다.
그런데 운 좋게도 엑시디움은 살아남았다.
바로 이곳으로 오면서 말이다.
[그 이후부터 모든 차원을 부수기 위해 돌아다녔다. 나의 분노는 멈출 줄 몰랐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첫 이명이 지금은 붙잡고 있구나.]
‘이게 무슨 말이지?’
형우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얼굴을 굳혔다.
[이곳까지 온 너희에겐 나의 역사를 들려줘도 괜찮다고 여겼다. 비록 버러지지만 그래도 그 버러지 중에서 나은 버러지니까 말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역사였으니 말이다.]
‘엑시디움 놈들이 버러지, 버러지 거리더니 얘한테 나온 말이었어. 그 주인에 그 부하네.’
매번 들으면서 제일 거슬렸던 단어였다.
자기들은 얼마나 잘났기에 버러지라고 부르는 지 말이다.
대법관이나 다른 간부들에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거슬렸는데 그 단어의 원흉이 여깄었다.
화악! 쿠우웅. 화르르륵!
다시 한 번 배경이 바뀌고 이번엔 용암이 흐르는 활화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의 거대한 콜로세움에 형우 일행이 놓였다.
[그래도 내 역사에 기록된 버러지들인 만큼 특별히 대우를 해주겠다. 이곳에서 최후를 맞을 대우를.]
스아아아!
그 말이 끝나고 엑시디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엔 그저 검은 연기가 모인 거대한 집합체에 불과했다면 지금의 완벽히 다른 개체로 변하고 있었다.
휘익! 화르륵!
배경을 장식하고 있는 용암과 바위들이 엑시디움에게 날아와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몸집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큰데 얼마나 더 커지려고?”
“…….”
다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전이 거의 아파트 10층이었다면 지금은 13층 가까이 늘어난 것 같았다.
겨우 3층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 3층 차이가 주는 압박감은 은근히 컸다.
쿵!
곧 합체 변신이 끝난 엑시디움은 거대한 육체를 자랑하며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럼 시작하지.]
엑시디움은 그 말을 하며 스산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