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6-12
스으으.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황무지.
잡초 하나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엔 생명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황무지는 그냥 보기에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살아있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황무지엔 계속 스산한 바람만 불어왔고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런 황무지에 생명체가 나타났다.
새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그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남녀구분할 것 없이 아름다운 그들은 뭔가 불평 어린 표정으로 황무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불평 어린 표정조차 아름다워서 평범한 이라면 바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후우… 천계가 그립구나.”
“나 역시…….”
“우리가 왜 이런 곳에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사실 오티움에 속한 천계의 천족들이었다.
정확히는 인간계과 천계, 나아가 오티움의 신들까지 배반한 타천사였다.
그런데 그들이 오티움도 지구도 아닌 전혀 다른 장소에 왜 있는 것일까.
“이게 뭐가 중요하다고 지키라는 건지…….”
타천사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웅. 우웅.
뒤에는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는 거대한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거대한 덩어리.
온통 검게 칠해진 그것은 둥근 공과 같았다.
다만, 공이라고 하기엔 크기가 상당했다.
대충 봐도 오우거 두셋 합쳐놓은 크기의 검은 구체는 넓은 그늘을 만들어낼 만큼 컸다.
다만, 저것의 정체가 무언인지는 도저히 짐작이 안 갔다.
“그것보다 점점 불안해지는군. 소식을 전해주던 동족들의 발길도 끊어지고… 마지막 들려온 소식도 영 안 좋았는데…….”
“엑시디움이 지구란 곳에서 철저히 밀리고만 있다는 그 소식 말인가?”
“정말 아직도 믿기질 않는군.”
그들이 가장 최근에 들은 소식은 바로 엑시디움이 지구의 인간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신들의 동족들 대부분이 적에게 죽었고 바소르의 이인자이자 천사들의 리더인 엘루나마저 전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때 그들이 받은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강한 엑시디움이 밀리다니… 역시 아직도 인사니오의 저주 때문인가?”
“최근에 대규모 ‘전송’ 덕분에 간부들은 좀 더 강한 힘을 쓸 수 있지 않았나? 거의 R+급에 다다른다고 들었는데…….”
R+급이라는 말에 다들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R+급이면 중급 신과 상급 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능력을 가진 간부와 휘하 부하들의 힘이면 예전에 강대했던 오티움의 힘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할 수준이다.
다만, 문제는 그 정도 전력을 가지고도 지구의 인간 따위에게 밀리고 있다는 거였다.
“살고자 바소르와 엑시디움을 택했는데 이러다가 이곳에서 고립되는 건 아닌지 불안하네.”
“그것만큼 최악이 없을 것 같군.”
다들 그 말에 몸서리쳤다.
안 그래도 이곳에서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자기 혼자 움직이고 있는 검은 덩어리 따위를 지키고 있는 일도 힘겨웠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이 황무지에 버려지는 것은 정말 최악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그냥 황무지가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이기도 했다.
이전에 엑시디움이 점령한 차원 중 하나이자 지금은 땅 말고는 남은 게 없는 차원이었다.
이런 곳에서 고립된다면 아마 자살할지도 몰랐다.
물론 벗어날 방법이 있기는 했다.
‘엑시디움 종족.’
그들 중 하나라도 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을 데리러 와줄 엑시디움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모르는 타천사들은 그저 불안감에 떨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우웅! 촤아악!
“음?!”
“통로다!”
“누가 오는 건가? 잠깐. 조금 큰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커다란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게이트의 크기가 워낙 큰 나머지 검은 구체마저 단번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삼킬 수 있는 것 같다가 아니라 정말 검은 구체를 삼키고 있었다.
“저게 대체?!”
“마,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타천사들은 다급히 검은 구체를 붙잡았다.
철컹! 철렁!
“끄으윽!”
“끌려간다!”
검은 구체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잡아끌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10명이 넘는 타천사들이 그것에 끌려갔다. 그리고 같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스아아악! 쿵!
검은 구체와 타천사들을 삼킨 게이트는 마치 큰 철문이 닫히듯 쿵 소리를 내며 모습을 감췄다.
모든 게 사라진 황무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스산한 바람만 불어왔다.
“다들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아니, 안 괜찮아! 이건 도대체 무슨 신종 미친 짓이야?”
아이슬란드를 덮쳤던 파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형우는 살아남은 소수를 죽이곤 돔 안에 갇혀 있던 통합군을 꺼내줬다.
물론 아직도 섬 전체가 물바다였기에 바닥까지 통째로 들어서 꺼낸 뒤 조금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겼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이건 진짜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격이 다르구나. 진짜 격이 달라.”
못해도 수십만은 넘는 적들을 그것도 대한민국보다 큰 아이슬란드 전체를 뒤덮을 파도로 쓸어버린 형우는 진짜 ‘규격 외’ 존재였다.
그러나 형우도 이걸 위해 조금 무리를 했다.
민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쳐서 이들을 꺼내줄 생각도 못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많은 힘을 소모했다.
그래도 소모된 힘은 다시 회복할 수 있었고 이걸로 많은 시간을 벌었으니 형우 입장에선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물론 그 최고의 선택 덕분에 대법관은 속된 말로 ‘똥줄’이 탔다.
‘저 무식한 놈…!’
대법관은 방어막 안에서 형우가 벌인 짓을 보곤 경악했다.
최소한 꽤 긴 시간을 끌어줄 것으로 생각했던 두 번째 함정이 너무 쉽게 막혀버렸다.
처음 이곳에 함정을 준비할 때 대법관은 총 3개의 단계를 준비했다.
첫 단계는 이미 형우가 부숴버린 큐브였고 다음이 부서진 큐브와 몬스터 웨이브였다.
큐브에 남아 있는 ‘가짜’들로 적을 혼란스럽게 하고 지구에 있는 인류 대부분을 전멸시켰던 그 대량의 ‘전송’을 다시 한번 재연해서 인간들에게 시간을 끌려 했다.
마지막 세 번째 함정이 시간이 좀 걸렸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지친 건 맞지만 시간은 전혀 끌지 못했다.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 몇몇 부하들에게 오티움까지 오가게 만들었다.
오티움엔 여전히 전송 장치들이 남겨져 있었고 적들이 섬에 발을 밟았을 때 그걸 은밀히 지구에 옮겼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몬스터들을 긁어모아 전송으로 아이슬란드에 보냈으나 결과는 ‘망(亡)’이었다.
덕분에 대법관의 머리는 불나게 움직여야 했다.
“자, 이걸 어떡하면 부숴버릴 수 있을까?”
툭. 툭.
형우는 방어막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저 반투명한 막처럼 보여서 간단히 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강도는 쉬이 깰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형우도 이미 몇 번 시도를 해봤지만 균열은커녕 흠집도 안 생겼다.
“인사니오 님이 또 도와주시면 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인사니오 님은 리타이어셔서 도와주실 수 없어. 안에서도 힘 좀 많이 쓰셨고. 회복하시려면 시간이 꽤 걸릴걸?”
형우의 말에 성민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은 시간이었다.
원래 대법관이 생각하던 것보다 빨리 끝났으니 그사이에 뭐든 생각해내고 실행하면 된다.
형우 일행은 방어막에서 물러나 심각한 회의를 시작했다.
“최대한 능력을 모아볼까? 한 번에 집중하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안 통했던 방법인데 될까요? 차라리 좀 힘을 회복한 뒤에 하는 게…….”
일행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사이 형우는 통합군 전체를 대한민국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그들의 역할은 끝이었다.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통합군은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도 짐만 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말은 안 했다. 그리고 그들 중 유독 아쉬워하는 이가 있었다.
블랙 머천트는 아쉬운지 계속 뒤를 돌아보다가 억지로 발걸음을 뗐다.
그 모습을 보고 형우는 그냥 남아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블랙 머천트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형우는 그들을 다 돌려보내고 다시 일행에게 갔다.
“뭐 좋은 의견 나온 거 있어?”
“아니요…….”
“없지. 있을 리가 없지.”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회의 자체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저 방어막을 부수려면 그만큼 힘이 필요했다.
힘쓰는 건 당연히 형우와 인사니오, 나머지 신들이 주체였고.
의견이랄게 있을 리가 없었다.
“굳이 이걸 부숴야 해요?”
그런데 그때 소정이 특이한 의견을 냈다.
“응?”
“부숴야지 안에 있는 대법관을 꺼내지.”
“뭐 생각해낸 게 있어?”
다들 의아한 눈으로 소정에게 말했다.
형우는 궁금하다는 듯 물어봤다.
“그냥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면 되잖아요?”
“어?”
“아!”
“그래, 그렇지!”
그 말에 다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정의 말은 즉 그냥 저 방어막째로 오티움에 보내버리자는 거였다.
굳이 힘쓸 거 없이 오티움에 보내버린 뒤 그곳을 소멸시키면 됐다.
어차피 소멸 직전인 차원이기에 바로 소멸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이동 통로로 쓸모가 있어서 놔뒀지만 이렇게 쓸 일이 생겼으니 바로 소멸을 시켜도 나쁘지 않았다.
“바로 하자!”
“예!”
형우 일행은 바로 방어막에 달라붙어서 옮길 준비를 했다.
‘이, 이런!’
대법관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이런 식의 전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설마 오티움으로?’
그 생각이 들자 저들이 어떻게 행동할 건지 바로 예상이 갔다.
그러자 대법관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준비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건만…!’
형우 일행이 터무니없게 시간을 단축하고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자신을 끝장내는 중이었다.
원래는 검은 영혼석의 힘으로 대법관에게만 인사니오가 걸어놓은 저주를 풀려고 했다.
이걸 하기 위해선 사실 저주에 걸린 대상이 적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검은 영혼석으로도 엑시디움 종족 전체의 저주를 푸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사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예비 함정이었다.
엑시디움 종족이 대법관 외에 모두 죽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함정마저 허무하게 끝날 조짐이 보이자 결국, 대법관은 하지 말아야 할 금단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다 너희들이 자초한 악몽이다.”
대법관은 그 말을 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게이트를 해안가에 생성했다.
우웅! 파아앗!
“뭐야?!”
“지원군이라도 오는 건가?”
게이트가 열리자 다들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경계했다.
그런데 곧 그들의 긴장이 허무하게 풀렸다.
“아아악!”
“억!”
“여, 여긴 어디야?”
게이트에서 나온 건 타천사들이었다.
그들은 꼴사납게 엎어졌고 형우 일행은 김빠진 콜라를 보듯 바라봤다.
“겨우 얘네들이 지원군이야?”
“정말 마지막 발악인가 보네. 그래도 1초는 버티겠다.”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놈들을 부른 게 아니다!”
대법관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고 검은 영혼석의 힘을 모두 사용해 방출했다.
촤아아아!
방출한 힘은 마침 게이트 안에서 빠져나오는 커다란 구체에 그대로 흡수됐다.
“저건 뭐야?”
형우는 대법관이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보낸 저 구체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겉보기엔 정말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구체였다.
굳이 특징을 잡자면 커다랗다는 것과 색이 검다는 것, 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구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웅.
그리고 구체의 앞부분이 갈라졌다.
그것에 형우 일행은 다시 긴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그 긴장이 풀어졌다.
“엥?”
“팩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