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5-21
유럽의 발칸 반도.
지금은 오크가 활개치고 다니는 몬스터의 천국이지만 이곳엔 여러 국가가 속했었고 수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만한 사건은 단 하나였다.
사라예보 사건.
1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방아쇠가 되었으며 이후 전 세계에서 수백, 수천만 명의 희생자가 나오게 될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발칸 반도라는 곳을 떠올렸을 때 다들 유럽의 화약고이자 세계대전의 시작점으로 다들 기억했다.
물론 그런 건 이미 잊혀진 뒤였다.
몬스터가 나타난 이후로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더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까.
요즘 세대에게는 정말 잊혀진 일이었다.
만약 몬스터가 나오지 않았다면 3차 세계대전이 언제가 일어나 사람들의 뇌리에 더 박힐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에 사는 이들에게 이곳은 화약고였다.
아니, 이미 터져버린 화산이었다.
“리나, 조금만 더 힘내. 이제 좀 있으면 목적지가 보일 거야.”
“하악… 하악… 안드레, 나… 더는 못 가겠어.”
폐허가 된 도시 근처의 험난한 산에서 두 남녀가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리나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이미 둘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보름을 계속 이동해왔다.
둘 다 D등급에 속하는 헌터긴 했으나 몬스터를 피하며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이렇게 장시간 이동하게 되면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중간중간 마주친 몬스터를 상대하고 도망치기도 했으니 한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둘은 단 하나, 생존지가 있다는 기대감에 이곳을 오르고 있었다.
계속 소식을 듣기 위해 사용하던 구식 라디오에서 이곳에 아직 저항 중인 생존지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정확히는 산에 있는 동굴 안에서 생존 중이었는데 방어하기도 좋은 지형이었고 산에서 내려가면 도시가 바로 있어 식량 조달도 어렵지 않다는 말이었다.
라디오에선 그 말을 전하며 생존자의 합류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둘은 바로 몸을 움직였다.
저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지기엔 모든 게 다 망가져 있었다.
일말의 기대라도 있는 지금, 무조건 그곳에 가야만 했다.
털썩.
“리나…!”
결국, 리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안드레는 깜짝 놀라 달려가 리나를 안아 들었다.
다행히 힘들어서 넘어진 것일 뿐 탈진하거나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갔다간 곧 그렇게 될지도 몰랐다.
“날 버리고 가. 너라도 살았으면 좋겠어.”
“리나…….”
안드레는 리나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꿨다.
“후우-”
그 모습에 안드레는 큰 결심을 한 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리나를 뒤로 엎었다.
“안드레?! 그러지 마. 날 데려가려다가 너도 죽어.”
“그래도 갈 거야, 리나.”
안드레는 그 말을 하곤 리나가 뭐라고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전진만 했다.
다행히 몬스터와 상대하는 일은 없었다.
중간에 몬스터를 만나긴 했으나 운 좋게 걸리지 않고 피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 후 드디어 목표했던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이 예상했던 공간이 아니었다.
“좌, 좌표가 여기 맞지?”
“…응.”
라디오에서 알려줬던 좌표를 몇 번이나 확인한 둘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찾던 그곳이 맞기는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무너진 바리케이드였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너머로 보이긴 했으나 모두 파괴됐다.
그 모습만 봐도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
“…….”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순간 둘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여기까지 오려고 모든 걸 소모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들의 근처에 와이번이 나타났다.
“끼아아악!
“끼아아!”
열 마리의 와이번이 정확히 이곳을 향해 날아왔다.
“아아… 끝났어…….”
안드레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와이번 하나라면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로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열 마리는 불가능했다.
저 정도 숫자를 따돌리기에 그들은 너무 나약했으니까.
결국, 둘은 최후를 예감하고 서로 마지막 입맞춤을 나눴다.
“끼아아!”
쿵.
그리고 다시 한번 와이번의 비명이 들렸을 때 최후를 직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건지 아니면 이미 죽었는데 인지를 못 하는 건지 잔뜩 의문이 생겼다.
결국, 안드레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 한 명이 그들 앞에 있었다.
그는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바라봤다.
“아아,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잘 보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세요. 보기도 좋네요. 하하!”
그 능청스러운 말에 둘은 어색하게 떨어져야 했다.
휘이잉! 휘잉!
푸른 상공 위 와이번 열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와이번들은 바람을 가르는 느낌을 즐기며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 위에 사람들 수십이 겁을 잔뜩 먹은 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건 민규였다.
민규는 그들이 겁먹든 말든 크게 신경 안 쓰고 계속 주변만 둘러봤다.
언제 비행 몬스터가 덮칠지도 몰랐고 혹시 중간에 엑시디움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민규의 신경은 오직 그쪽으로만 향한 상태였다.
덕분에 사람들의 혼란은 점점 더 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와이번은 일반 여객기보다 훨씬 더 빨랐고 그들의 앞에 펼쳐진 작은 막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어 비행에 큰 무리가 없다는 거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민규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와이번을 착륙시켰다.
민규가 와이번을 착륙시킨 곳은 옛 인천공항 부지이자 현재 공항 겸 와이번 사육지로 쓰이는 곳이었다.
“이게 다 뭐야?”
“…여기만 재앙을 빗겨나간 건가?”
와이번에서 내려와 땅을 밟은 그들은 처음 보는 신천지에 넋을 놨다.
인천공항은 정말 혼자서 재앙을 빗겨나간 듯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멀쩡한 건물들과 비행기, 거기에 수십 기의 와이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충성! 수고하셨습니다, 준장님!”
그때 수십 명의 군인이 다가왔다.
그중 리더로 보이는 대위 계급장의 남자가 민규를 향해 경례했다.
“나 준장 아니라니까요. 쩝, 여하튼 잘 데려다줘요. 난 갑니다.”
“충성!”
민규는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와이번들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던 이들은 대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부터는 제가 인도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저,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누구고요?”
대위의 말에 리나가 질문을 던졌다.
안타깝게도 지금 여기 있는 인원 대부분이 자세한 설명을 하나도 못 들었다.
“준장님께 설명을 못 들으셨습니까?”
“생존지라고만 들었는데 이건…?”
그저 생존지로 데려다 주겠다는 말만 들었을 뿐.
물론 처음엔 그 설명만으로도 충분했다.
생존지라고 해봤자 그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 정도로 여겼으니까.
그런데 막상 와보니 규모 자체가 달랐다.
지금 이곳 인천공항의 규모는 상당했다.
“이동하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위는 그 말을 하곤 정중하게 뒤를 가리켰다.
뒤엔 큰 차량 세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에 나눠타고 영종대교를 건너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놀랄만한 광경을 보게 됐다.
“서, 서펜트…!”
“서펜트가 저렇게 얌전히 있다니?!”
놀랍게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거대한 서펜트들이 지키고 있었다.
서펜트들은 마치 경계를 서듯이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새 발의 피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입이 벌어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에 입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곳이 같은 지구에 있는 장소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
가는 길 내내 도시밖에 안 보였다.
상가와 민가 등등, 수많은 문명이 복구됐다.
다만, 10층 이상의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긴 했지만.
“정말 이곳만 재앙을 빗겨나간 것 같은데.”
“아니야. 이거 다 새로 지어진 거야, 안드레. 빗겨나간 게 아니라 다 재건한 것 같아.”
“아…….”
리나의 말대로 모두 새로 지어진 거였다.
건물이 뭐 하나 노후화된 게 하나 없었다.
그제야 모든 게 새로 지어졌다는 걸 안드레는 알게 됐다.
그때 동승 중이던 헌터 출신 장교가 리나의 말을 거들었다.
“모두 4개월 동안 새로 지어진 것들입니다.”
장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4개월이요?”
“그럼 그 악몽에서 겨우 2개월 만에 극복하고 복구를…?”
둘은 경악했다.
하늘에 빛의 기둥이 내려오고 시작된 몬스터 웨이브로 전 세계가 망한 지 이제 겨우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이 정도로 문명을 복구했으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이제 더 놀라실 겁니다.”
장교는 그 말을 하며 그들을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그들을 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장교의 말대로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이종족들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을 보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멕시코 서부.
형우는 와이번을 타고 멕시코를 수색 중이었다.
형우 일행은 2개월 전까지만 해도 엑시디움 일족과 혈투를 벌였다.
엑시디움의 계획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니, 정확히는 고군분투라기보다 가지고 놀았다.
크루바와 강해진 형우를 엑시디움이 막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필사적으로 마법진과 탑을 만들던 엑시디움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처음엔 그저 어디 골방에 숨어서 작업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엑시디움 종족은 발견되지 않았다.
형우 일행이 그동안 엑시디움 일족을 잘 찾을 수 있었던 건 맨해튼에서 승리 이후 미국의 군사위성을 얻은 덕이었다.
초강대국이자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국가였던 만큼 위성도 많았고 기술도 훨씬 진보된 상태였다.
왜 항간에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알 것 같았다.
미국은 UFO를 발견해 그 기술을 얻어 발전했다는 소문.
덕분에 신명 나게 엑시디움을 쫓아다녔고 많은 성과를 얻었다.
바소르의 전멸.
엑시디움 종족의 절반 사살.
엘루나 흡수.
그러나 이후 완벽히 자취를 감춘 덕에 군사위성뿐만 아니라 형우 일행도 지구 전체를 수색했다.
어디 지하에 박혀 소규모라도 계속 에너지를 모으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2개월 동안 계속 수색을 했으나 지구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불안감이 계속 증폭되고 있었다.
띠띠띠. 띠띠띠. 그때 형우의 주머니에서 위성 전화가 울렸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길드장님, 바쁘십니까?]
전화를 받자 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충성 소리만 듣다가 전화로 도영의 목소리를 들으니 형우는 왠지 반가웠다.
“아, 도영이야?”
[예.]
“나야 뭐 하고 있는지 잘 알잖아. 그런데 왜?”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위성으로 뭔가 발견했는데 확인이 필요하답니다. 위치가 제일 가까운 게 길드장님이셔서 전화를 했습니다.]
“갈라파고스? 거기가 어디야?”
[대략적인 위치는 세계 지도에서 과테말라와 에콰도르의 수도를 수직으로 이어보면 나옵니다. 자표는 -0.570809, -90.470005입니다.]
형우는 바로 지도를 피고 위치를 확인했다.
확실히 형우가 가기에 제일 가까운 위치였다.
“OK. 갔다 와 볼게.”
[예, 길드장님.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뒤 형우는 바로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는 위치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한참 날아가던 도중 유적지로 보이는 곳을 지나게 됐다.
그때 인사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곳에서 무언가 느껴진다.]
“예?”
그냥 평범한 마야 문명의 유적지였다.
형우도 뭔가 특별히 느껴지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인사니오는 뭔가를 먼저 느끼고 말했다.
“저기서 뭐가… 어?”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고 말하려고 할 때 형우도 느낄 수 있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엑시디움의 기운은 아닌 것 같은데…….”
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와이번을 하강시켰다. 그리고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