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5-3
예상치 못한 등장에 형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차민을 바라봤다.
에피리아 이후에 아예 본 적도 없었고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았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 오티움의 일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을 초기에도 공들여서 계속 수색을 했다.
물론 방수혁을 찾으면서 같이 곁다리로 찾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수색을 했는데 못 찾을 정도면 솔직히 반쯤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민이 커다란 자루 하나를 들고 멀쩡히 살아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걸 보고 형우는 경계했다.
‘변절자.’
상대는 계약에 의해 묶여 있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노예 문서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약 때문에 차민은 아직도 엑시디움의 명령을 받고 있을 수도 있었다.
엑시디움은 오티움의 대부분을 앗아가고 통로까지 막는 치밀함을 보였으니 차민으로 뭔가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좀 다른 말이었다.
“내가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당신이 도와주겠다고? 엑시디움의 개가?”
형우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연히 믿을 수가 없었다.
꽤 시간이 지나긴 했으나 서로 칼부림까지 한 사이인데 뭘 보고 믿겠는가.
그런데 그때 차민의 뒤에서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형!”
“용준이?!”
이곳에서 자신을 형이라 부를 이는 정용준 한 명뿐이었다.
그런 용준과 벌써 일 년 이상 만나질 못했다.
그러니 반가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쉽사리 그걸 표현할 수 없었다.
용준은 분명 밖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당연히 의심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용준의 옆에 있는 30대 남자의 정체도 의심스러웠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하하… 그게…….”
형우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용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은 천천히 이야기했다.
처음 지구로 돌아가서 있었던 일과 그동안 선우와 지영과 함께 무슨 일이 있던 것, 갑자기 던전 게이트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며 있었던 일까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말했다.
‘아…….’
형우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탄식했다.
대규모 전송이야 이미 형우가 나오기 전부터 엑시디움이 벌이던 짓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선우를 도와주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핑계를 대기엔 죄책감이 컸다.
‘오빠라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얼굴도 못 비치고 한 번을 도와주지도 못하고…….’
형우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오르는 자괴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형우는 마지막으로 아직도 가지고 있는 용준의 노예 문서로 마지막 확인을 거쳤다. 그리고나서 최종적으로 인사니오에게 도움까지 받고 모든 의심을 없앤 형우는 용준을 끌어안았다.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
“에이, 남사스럽게 왜 이래요?‘
용준은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형우에겐 많은 의미가 담긴 포옹이었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용준에 대한 고마움, 미안함 등.
수많은 감정이 포옹 하나에 담겨 있었다.
형우는 용준과 나름 진한 포옹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김민규 씨.”
“괘, 괜찮습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이렇게 했을 겁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지금 저에겐 민규 씨가 은인이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형우는 계속해서 고맙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일행이 오기 전까지 말이다.
“용준 오빠?!”
“뀨우!”
상의할 게 있어 광장으로 형우를 찾아왔던 형우 일행은 처음 보는 이들과 있는 모습을 보며 경계했다.
그러나 거기엔 소정이 용준을 알아보면서 경계는 사라졌다.
“응? 소정아, 아는 사람이야?”
“네! 용준 오빠!”
봄이의 말에 소정은 그 말을 하곤 달려나갔다.
실제로 소정과 용준이 지낸 기간이 많진 않았지만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적게 보낸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도 아니었고.
“소정이?”
다만, 오히려 용준 쪽에서 소정을 못 알아볼 뻔했다.
처음 만났을 때 15살이었던 소정은 제대로 먹지 못해 더 어려 보였다.
그러나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은 덕분에 지난 2년간 큰 성장을 했다.
그 2년은 아이를 여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 때문에 용준은 한참 바라본 뒤에야 소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아! 이제 소정이 시집가도 되겠다! 몰라보겠는데?”
“오빠, 못 본 사이 너무 아재 된 거 아니에요?”
“아재라니! 내가 학교 다녔으면 아직 고3이라고.”
소정이의 말에 용준은 발끈했다.
“나이 속인 거 아니에요?”
“이 꼬맹이가!”
“나 꼬맹이 아니거든요. 이런 꼬맹이 본 적 있어요?”
“…….”
그러나 곧 소정의 행동에 용준은 입을 다물었다.
소정은 상체를 들이밀며 무언가를 자랑했다.
그 돌발 행동에 용준은 얼굴을 붉혔다.
감옥에서 살았기에 가능한 개방적인… 아니, 개방적인 걸 넘어선 스타일이긴 했다.
여하튼 밖에 물을 많이 먹은 용준은 그 행동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나 소정은 자기가 이겼다 생각하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뀨우! 뀨우!”
“어? 뀨우도 오랜만이야.”
용준은 마침 화제를 돌릴 거리를 찾아 기쁘게 뀨우를 안았다.
초반엔 좀 다투긴 했어도 뀨우와도 꽤 잘 지냈었다.
그래서 그런지 뀨우도 오랜만에 만나는 용준을 반겼다.
“길드장님, 저 사람 차민 아닙니까?”
어느새 형우의 옆으로 다가온 도영은 차민을 보곤 조용히 속삭였다.
이미 차민에 대해선 대부분 소문이 났다.
문지기로 활동하면서 유명세를 얻긴 했으나 그거 말고도 인간을 배신하고 관리자의 편에 붙었다는 소문도 퍼진 뒤였으니까.
그래서 차민을 알아본 도영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물론 형우도 아직 차민에 대해선 경계를 푼 건 아니었다.
차민이 감옥으로 들어온 민규와 용준을 도와줬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게 호의에서 이뤄진 건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일어진 건지 몰랐다.
그러나 차민도 본인에 대해서 해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저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때가 되었는지 차민은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뭐라고 말할까.’
어쩔 수 없었다.
사정이 있었다.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말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한 것과 달리 차민이 보여준 건 말이 아니었다.
와르르.
아까부터 들고 왔던 거대한 자루.
차민은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그리고 형우는 그것을 보며 경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감옥의 문 입구.
수많은 죄수가 들어오고 나갔던 죄악의 장소.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는 빈 동굴일 뿐이었다.
애초부터 원주민이라는 게 없었긴 했지만… 그래도 원주민이라 부를 수 있었던 이종족과 죄수들은 형우와 함께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 남은 건 제약에 묶여 있었던 에피리아의 엘프들뿐이었다.
그나마 이들이라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말하기엔 그 피해가 너무 뼈아팠다.
여하튼 그 때문에 감옥은 텅텅 비어있었고 엑시디움은 감옥의 문을 닫으면서 더 이상의 유입은 없었다.
‘신나게 가서 깽판 치고 있겠지.’
‘전송’은 그들에게 걸린 힘의 제약을 풀기 위한 장치였다.
넘어가는 것 자체는 언제든 가능했다.
그런데 그들이 굳이 그 장치를 이용한 이유는 전송 장치를 쓰며 한데 모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인사니오가 힘을 회복함과 동시에 반대급부로 엑시디움의 힘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돌파구로 한 번에 모인 에너지를 흡수해 지구로 넘어가는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아르카를 전멸시키고 형우를 이곳에 가뒀다.
게다가 적은 양이지만 지구에 간섭 가능한 힘을 얻었다.
엑시디움은 정말 일석이조(一石二鳥), 일석삼조(一石三鳥) 이상의 성과를 얻었고 반대로 형우는 그만큼의 피해를 받고 이곳에 버려졌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차민의 등장으로 형우에게 활로가 열렸다.
“음… 길드장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이거 먹었다가 체하는 건 아니지?”
도영과 성민은 형우와 무언가를 번갈아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안한 표정과 다르게 형우는 확신을 가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을 거야. 아, 문제가 하나 있긴 하겠네.”
“네?”
“문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기겁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둘을 보며 형우는 피식 웃었다.
“아마 생각한 거 이상의 쾌락을 느낄 게 뻔하니까 미리 입에 마스크 써놔. 아, 좀 그쪽으로 약하다 싶으면 기저귀도 끼고.”
“하… 하…….”
“…대꾸할 힘도 없다.”
형우의 말에 기가 빠진 그들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들고 고민하는 그건 바로 검은 영혼석이었다.
차민의 자루에서 쏟아진 건 놀랍게도 검은 영혼석 더미였다.
형우도 그렇게 많은 양의 검은 영혼석이 만들어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이게 다 방수혁 덕분이라니.”
형우는 그 말을 하며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영혼석을 쳐다봤다.
차민은 놀랍게도 오래전부터 방수혁을 주목하고 있었다.
붉은 영혼석과 검은 영혼석.
이 두 개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걸 알게 된 뒤로 차민은 방수혁의 뒤를 캐며 이것에 대해 알아갔다.
그러나 엑시디움의 지원을 받고 있어도 커다란 세력을 가진 방수혁을 어찌하긴 힘들었다.
강한 S급이라 해도 그는 단일 세력이다.
아무리 혼자 어찌 해보려 해도 뒤를 캐는 게 다였다.
에피리아를 공격했을 땐 명령과 더불어 반지라는 아티팩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지어 뒤를 캐면서 S급이 하나 더 있다는 것과 그 밑에 검은 영혼석으로 만든 무수한 A급 헌터가 있다는 말을 듣곤 방수혁이 자리를 비우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S구역 공략에서 방수혁이 몰락하며 상황이 변했다.
안 그래도 자리를 비운 사이 검은 영혼석이 만들어지는 최대의 거점의 찾아냈고 딱 맞춰서 방수혁도 돌아왔다.
조금의 혈투가 있긴 했지만 차민이 엑시디움에게 받았던 다른 아티팩트 하나를 소모하여 이길 수 있었다.
덕분에 거기 있던 모든 시설을 독차지하게 됐다.
더불어 합성 능력을 가진 죄수 하나 덕분에 차민은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차민은 R급 능력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건 형우와 같은 R-급 능력이었다.
사실 여기엔 문제점이 존재했는데 R급을 만들기 전 S급 영혼석을 하나 만들어놨다.
그 만들어놓은 영혼석을 다시 한 번 방수혁을 죽이고 얻은 S급 영혼석과 합쳤는데 그 때문에 R-급이 됐다.
‘합성을 한 번 이상한 영혼석은 다음 합성에서 능력이 떨어진다.’
이게 형우가 R-급 통제를 얻은 이유였다.
여러 실험을 통해 그 이상의 것을 만들기 위해 차민은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S급 영혼석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실험은 거기서 그쳤다.
물론 그건 형우를 만나기 전이었다.
형우를 만나면서 부족했던 S급 영혼석을 대량으로 채웠다.
사실 차민이 형우를 찾아오겠다 마음먹은 건 형우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형우가 점점 강해진다는 걸 듣고 그게 모두 검은 영혼석 덕분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형우는 인사니오 덕분에 강해진 거였지만 말이다.
여하튼 지금은 S급으로 만든 수많은 R급 영혼석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R급 영혼석이 생존자 전원에게 주어졌다.
차민은 R급 영혼석과 더불어 인사니오의 덕분에 계약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엑시디움이 다 버리고 간 덕분에…….’
모든 걸 막아놓고 갔기에 모든 걸 버린 게 됐다.
덕분에 인사니오의 능력으로 차민의 계약을 무로 돌릴 수 있었다.
“S급도 감지덕지한데 그 이상의 등급인 R급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네요.”
다들 신기한 표정으로 검은 영혼석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미 형우가 먼저 시범을 보였기에 다들 영혼석을 흡수했다.
스르륵.
“아아…!”
“하아…….”
순간 쾌락의 바람이 불어왔다.
관계로 얻는 쾌감과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덕분에 진정되는데 꽤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사이 형우는 블랙 머천트에게 받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수의 씨앗이라…….”
블랙 머천트가 형우에게 건네준 건 세계수의 씨앗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이게 엘프들을 살려주고 지구에 힘이 되어줄 것이라며 건네받은 거였다.
물론 키우는 건 엘프들의 몫이었다.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차민 덕분에 지금 감옥의 문이 활짝 열린 상태였다.
‘가서 심어보면 알겠지.’
“후우…….”
“진짜 중독될 거 같아.”
어느새 일행은 진정이 됐다.
형우는 그 모습을 보곤 문으로 다가갔다.
“자, 이제 제대로 반격하러 갑시다.”
스르륵.
형우는 그 말을 하며 문 너머로 움직였다. 그리고 다들 차례대로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