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23
크라센 평야.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르른 대지에 드문드문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 플라닉 트리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구(舊) 크라센 영지에 속한 평야였다.
크라센 영지는 원래 왕국으로 시작한 국가였으나 엘핀에 종속되면서 공국으로 격하됐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더 위세를 잃었다.
나중엔 공작령으로까지 격하됐고 영지도 상당 부분 분할됐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크라센 영지에선 크라센 평야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크라센 평야는 동부에서 남부 바소르 본부까지 이어졌다.
강 너머까지 같은 명칭을 유지하기란 상당히 힘들었지만 크라센은 그걸 가능하게 했다.
크라센 영지만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기사단.
그 기사단의 힘 덕분에 엘핀 왕국에서도 크라센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곳 평야만큼은 엘핀이 멸망할 때까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평야는 반 이상은 마기가 감염되어 이전의 생기를 잃은 상태였다.
거대한 플라닉 트리는 마기에 오염되어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됐다.
그 덕분에 평야는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그리고 그 평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인사니오시여!”
“바소르를 죽여라!”
“아르카 놈들을 막아라!”
“버러지들에게 죽음을···!”
콰아앙! 카앙! 캉!
폭음과 병장기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현재 크라센 평야에선 양측 포함 십만에 가까운 병력이 충돌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누가 하나 우세가 없는 싸움.
전투는 계속됐다. 그리고 5만의 병력을 맡은 민희는 중앙에서 마법을 뿌리고 있었다.
“더블 캐스팅! 플레임 샤워! 윈드 스톰!”
화르륵! 화아악!
더블 캐스팅으로 만들어진 마법은 5서클 플레임 샤워와 6서클 윈드 스톰.
어느새 6서클에 오른 민희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시너지 효과가 큰 마법을 조합해서 썼다.
“둠 실드!”
“다크 서클!”
민희의 마법이 날아가자 마족 둘이 회색의 둥근 실드와 검은 고리를 사용했다.
쉬이익!
검은 고리는 플레임 샤워에서 사방으로 뿜어진 불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나머지 윈드 스톰을 둠 실드가 막았다.
그러나 워낙 전방위적인 마법이었기에 전부를 막을 순 없었다.
“부, 불이 붙었어!”
“으아악!”
바람을 타고 날아온 화염은 한 번에 두 개의 데미지를 줬고 큰 피해를 줬다.
“······.”
그러나 민희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쓴 마법에 비해서 피해를 준 게 적었다.
이 정도라면 굳이 위력이 큰 마법이 아니라 적당한 마법 여럿을 쓰며 피해를 주는 게 더 나았다.
그러나 실상은 또 그렇게 안 됐다.
실제 그렇게 피해를 주려고 해도 적이 계속 마법을 막으면서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제가 또 존재했다.
마기로 가득 찬 남부를 공격하다 보니 마기에 오염되는 이들이 속속 생겨났다.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되지만 마기가 가득한 곳에서 신성력의 힘은 약해졌고 전투할 때마다 전부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
결국, 그 말은 전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끌고 갈수록 아르카에 불리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막상 해결책을 내놓으려고 해도 딱히 없었기에 민희는 지금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민희는 옆에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수인족 카링에게 말했다.
카링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수인족이었다.
언뜻 보면 지구에서 한창 유명했던 애니메이션의 녹색 괴물과 같이 나오는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그러나 귀여운 외형과 다르게 150살이 넘은 수인족의 족장이었다.
게다가 S급의 능력 외에 종족의 특성인 민첩한 몸놀림 때문에 상급 마족마저도 상대하기 꺼렸다.
“내가 봐도 뭔가 이상한 듯하구나. 아이야, 다른 군단에도 통신을 해보거라.”
카링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할머니 같은 말투를 썼다.
“아, 네.”
‘히잉··· 말투랑 얼굴이랑 적응이 안 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말투에 민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귀여운 것에 약한 민희는 당장에라도 카링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저 말투를 들을 때면 뭔가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 대놓고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도대체 이것의 실체가 무엇일꼬…….”
카링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전장을 둘러봤다.
전장은 공격보다 방어 위주로 늘려갔다.
바소르는 먼저 도발하거나 제대로 충돌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나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
몇 번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추격을 안 했는데 계속 그런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벌써 방어만 하던 바소르들은 몇 번 전투하더니 퇴각할 준비를 했다.
이런 전투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아무리 바보라도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벌써 이런 고착화 상태가 보름 이상 이어졌다.
‘제일 문제는 왜 병력을 나눠서 온 거지?’
원래는 병력을 한데 모아 한 번에 전투하려 했다.
그게 서로 편했고 빠르게 승부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적이 병력을 나눠서 전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위치가 언제든 뒤를 노리겠다는 듯한 곳이어서 대비를 해야 했다.
게다가 몇몇은 아예 뒤를 넘어서 거점을 공격하겠다는 듯 나섰기에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나눴다.
그래서 형우나 크루바, 민희가 각각 3개의 군단을 이끌고 밑에 사단을 나눠 전방위적인 공격과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제 지켜야 할 게 바소르보다 아르카가 많았기에 하나라도 적이 새어나가면 문제가 생길 터였다.
“그럼 연락해볼게요, 카링 님.”
민희는 퇴각하는 바소르 병력을 보며 다른 군단으로 통신을 걸었다.
민희의 통신을 시작으로 아르카는 통신을 통해 회의를 거듭했고 이 상황을 타개할 계책을 내놓았다.
스스윽.
하늘이 마기로 가려져 검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어두운 밤, 일단의 무리가 어두운 숲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그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 것 같았다.
뭔가 애매한 표현이긴 했는데 그게 딱 맞는 말이었다.
마치 자연에 동화가 된 듯 그들에겐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마저 그냥 숲에서 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얼굴을 검은 두건으로 가리고 어디론가 천천히 이동했다.
“이 속도를 계속 유지하며 이동한다. 그리고 계속 아티팩트로 스캔하면서 이동하도록.”
끄덕.
리더로 보이는 이는 정말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나머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다들 손에 든 검은 봉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 봉의 정체는 E구역 지하 투기장에서 등급을 속이는 이들을 찾기 위해 썼던 물건이다.
등급 측정기.
겉보기엔 평범한 봉이지만 대상의 등급에 따라 색이 변하는 물건이었다.
블랙 머천트가 파는 물건 중 가장 실용성이 높은 물건이었는데 이게 사실 이 용도가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측정기는 기운을 느끼는 부분에 특화되어 있어 함정 같은 걸 찾는데 탁월했다.
그 덕분에 능력으로 만든 함정이든 마법으로 만든 함정이든 다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세밀하게 만들어놨다면 바로 찾기 어려울 수 있기에 그들은 천천히 이동하면서 마치 지뢰를 피해 다니듯 움직였다.
“후우… 정지. 여기서 잠시 쉰다.”
한참을 이동하던 그들은 리더의 명령에 몸을 멈췄다.
위험한 장소는 넘겼는지 리더는 소리만 크게 내지 말고 편히 쉬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다들 두건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살 것 같다.”
“엄마 지갑에서 돈 훔칠 때 빼곤 이렇게 긴장해본 적이 없는데…….”
두건을 벗자 형우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우, 민희, 도영, 성민, 봄이, 소정.
이제는 익숙해진 멤버 구성이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 각 종족 실력자들이 보였다.
그들도 꽤 긴장했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건 형우였다.
형우는 여유롭게 리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면서 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습니까?‘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 거 같습니다. 것보다… 대리자님은 참 대단하시군요. 보통 이 정도 이동했으면 다들 지치기 마련인데…….”
“하하…….”
어색하게 웃는 형우는 흥미롭게 보는 리더의 정체는 쉐이드 종족의 수장 ‘룽’이었다.
일명 암살자 종족으로 불리는 그들은 종족 명대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이들이다.
주로 의뢰를 받아 대상을 암살하고 대가를 받는 식으로 살아왔는데 그 때문에 마족으로 몰리기도 했다.
심지어 외모도 마족과 비슷하게 생겼기에 더더욱.
그러나 그들은 나름 원칙을 가지고 암살했다.
최소한 악인 이상의 평을 받고 그러한 행동을 한 자.
그런 이들에 한해서 의뢰를 받았다.
물론 이러든 저러든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으니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배척됐다.
그러다 아르카에 소속되어 지금은 그들의 정보원 겸 암살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동화라……. 능력으로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네.’
쉐이드 종족의 동화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까지도 자연에 동화되게 만들어줬다.
동화 상태가 되면 완벽히 자연에 동화되어 상대가 그들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마법이나 능력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해소됐고.
물론 그 이상의 것은 걸릴 수 있기에 등급 측정기를 사용하며 바소르의 내부로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부로 이동하는 이유는 얼마 전 회의의 결과 때문이었다.
계속 시간을 끄는 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고 형우를 포함함 몇몇 실력자들을 추려 이렇게 움직이게 됐다.
“아, 그런데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좀 더 들어가야 합니다. 아직 본부 밖이니까요. 경계가 워낙 삼엄해서 많이 돌아가는 통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옆에서 형우 일행은 다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마기를 막으면서 가는 것도 정말 고역인데 아직도 멀었다니…….”
그 모습을 보며 룽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기만 넘으면 안에선 좀 편할 겁니다.”
룽이 가리킨 곳엔 검문소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수십, 수백의 무리가 나뉘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가축? 그럼 설마… 아니죠?”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그리고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쉐이드는 형우의 말에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쉐이드는 일행들을 노예로 위장시켰고 쉐이드들은 마족 출신 노예 상인의 모습으로 변장했다.
“정지. 어디서 오는 누굽니까?”
검문소 앞으로 가자 다크 엘프 하나가 길을 막았다.
“꼭 설명해야 하나?”
룽은 아까 형우를 대하던 모습과 다르게 위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압도적인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그러자 다크 엘프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래도 말을 해주셔야…….”
그런 와중에도 꿋꿋이 다크 엘프는 자신의 말을 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점점 버티기 힘들어지자 더 말을 꺼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그를 옥죄이던 마기가 사라졌다.
“허가서다.”
룽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그러자 빠르게 그걸 확인한 다크 엘프는 다시 돌려주면서 경례를 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다음에도 날 귀찮게 하면 그땐 정말 죽이겠다.”
“예, 예!”
약간의 살기를 흘리며 말하자 다크 엘프는 군기가 바싹 든 신병처럼 대답했다. 그리고 룽은 유유히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통했네.’
형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마기는 전부 형우가 뿜어낸 거였다. 그리고 허가서는 아르카에서 최근에 노예 상인 하나를 죽이고 챙겨놨던 물건이었다.
다만, 하필 마기를 못 쓰는 아르카에선 전혀 쓸모 없는 거였지만 형우가 있어서 이렇게 쓰이게 됐다. 그리고 덕분에 쉽게 안으로 들어왔다.
“와아… 저게 뭘까요?”
안으로 들어오자 거대한 조형물이 하나 보였다.
소정은 그 조형물을 보며 감탄했다.
“대형 전송 장치인 거 같은데…? 그동안 봐왔던 거라 차원이 다르게 크긴 하네.”
그동안 대륙을 돌아다니며 전송 장치를 여럿 부쉈기에 전송 장치의 모습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마치 파리에 있는 에펠탑과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었는데 지구로 몬스터나 이종족을 보낼 때 사용됐다.
그런데 그것들에 비해서 여기 있는 전송 장치는 상당히 컸다.
아직 전송 장치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는데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게다가 주변에 작은 장치도 6개나 더 있었다.
‘뭘 하려는 걸까.’
형우는 그것을 불길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그런 형우 일행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알고도 들어온 건지… 쯧쯧.”
바소르의 주인이자 마왕인 데브릭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곧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여하튼 집 앞까지 왔는데 선물은 줘야지.”
데브릭은 그 말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 뒤에는 얼마 전까지 노르덴 요새에서 전투했던 질리언과 그 패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죄수들도 보였다.
그들은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초점을 잃은 채 검게 물들어 있었다.
“가라.”
“…….”
“…….”
데브릭의 명령에 그들은 말없이 형우 일행을 향해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