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21
‘끄응… 왜 안 되는 거지?’
크루바와 민희가 합류한 이후 형우는 별다른 싸움 없이 대치만 했다.
마족이나 천족에게 잘만 되던 흡수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
‘흡…!’
형우는 힘을 다 강하게 줬다.
그러나 여전히 소용없었다.
다만, 완전 소용없던 건 아니었다.
“…….”
엘루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고 신성력을 가득 끌어올려 형우에게 힘이 흡수되는 걸 막았다.
그건 정말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신성력이 의지를 배반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걸 붙잡는 건.
그러나 다행히 뺏기진 않았다.
무슨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힘에선 우위를 가졌다.
게다가 엘루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엘루나 님에게 신성(神聖)을…!”
“엘루나 님에게 신성(神聖)을…!”
파아앗!
엘루나의 뒤에 있던 타천사들이 두 손을 모으고 신성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신성력은 그대로 엘루나에게 나아갔다.
스르륵.
신성력은 그대로 엘루나에게 흡수됐다.
흡수된 신성력은 방어하느라 소모됐던 힘을 채워줬다.
물론 이건 형우의 능력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형우가 하는 건 근원을 뺏어오는 일이었다.
여러 종류의 힘마다 그걸 쓸 수 있게 해주는 그릇이 존재했다.
그릇엔 항상 꽉 차 있지만 소모하면 바닥까지 비워지기 마련.
지금 엘루나가 하는 일은 그 빈 그릇을 채우는 일이었다.
온종일 야구 경기를 뛰었던 선발 투수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음 등판일까지 쉬는 휴식을 단번에 회복시켜주는 거였다.
그러나 형우는 달랐다.
그 그릇 자체를 그냥 뺏어오는 일이었다.
그릇과 그릇 안에 든 모든 것을 강탈하는 것과 채우는 것.
이게 둘의 차이였다.
‘고속 충전이 따로 없네. 아니, 고속 충전이랑 비교 자체가 안 되려나?’
형우는 순식간에 힘을 회복한 엘루나를 보며 인상을 썼다.
형우도 흡수를 위해서 힘을 소모했다.
엘루나가 하는 방어에 비해 많은 힘이 드는 건 아니었으나 상대가 저렇게 계속 회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달랐다.
저 타천사들을 쓸어버리기 전까지 지치지 않는 상대를 상대해야 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엘루나에 뒤에서 보조 배터리 역할을 하는 천사만 해도 백이 넘었다.
결국, 더 이상의 흡수는 무의미했다. ‘빠르게 처리한다.’
대충 힘을 쓰는 걸 보며 형우는 그녀와 자신의 수준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호각지세(互角之勢).
그녀는 다행히도 형우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것 또한 문제였다.
호각지세라는 말은 보조 배터리의 도움을 받는 엘루나가 유리하다는 거였으니까.
물론 새로 얻은 힘과 인사니오의 힘이 있으니 절대 질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다만, 형우는 빠르게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곤 몸을 움직였다.
“약화.”
화아악!
제일 먼저 사용한 건 S급 약화.
“이런 잔재주를. 캔슬.”
“…!”
엘루나가 캔슬이라 말하자 적을 향해 날아가던 가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곤 형우가 깜짝 놀랐다.
“뭐야? 속박! 염력! 통제!”
형우는 연달아 디버프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엘루나의 단 한 마디에 모든 디버프가 사라졌다.
“캔슬!”
허무하게 세 개의 디버프가 사라졌다.
그제야 엘루나의 표정이 풀어졌다.
처음 겪어보는 흡수에 당황했던 엘루나는 적의 공격이 모두 막히자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었다.
“당신은 잔재주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가 보군요. 아까 처음 그건 도대체 뭐였죠?”
“친절하게 답해줄 거로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 아니죠.”
“그리고…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금방 까먹는 건지 모르지만 이게 주력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스아!
형우는 그 말을 하며 회색 오러를 만들었다.
회색의 오러는 잠깐잠깐 금빛과 흰빛, 검은빛을 번갈아가며 냈다.
그걸 본 엘루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
‘처음 보는 기운…….’
성벽에 날아오는 저것을 처음 막았을 때 엘루나는 꽤 고생했다.
애써 태연하게 쉽게 막은 듯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날아든 잡종 같은 오러를 뭣도 모르고 막는다고 타격은 입을 터였다.
덕분에 다음 이어진 형우의 흡수를 막는데도 고생을 했다.
그런데 그게 또다시 나타나자 엘루나은 안색을 굳히고 조용히 힘을 끌어올렸다.
“하아압!”
형우는 길게 기합 소리를 내며 엘루나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엘루나도 무기를 들었다.
“홀리 소드.”
팟.
엘루나가 만든 무기는 홀리 소드.
신성력으로 만든 검이었다.
성기사나 일반 천사 중에서도 최상위에 선 이들만 쓸 수 있는 신성 마법.
물론 엘루나에겐 별 게 아니었다.
엘루나는 밝게 빛나는 홀리 소드를 들어 형우의 공격을 막았다.
휙! 퍼엉!
“큭…!”
“흡!”
두 검이 부딪히자 깡 소리가 아닌 펑 소리가 났다.
계속해서 검이 부딪힐 때마다 펑펑 소리가 났고 주변에 있던 이들은 다 느낄 수 있을 만큼 충격파가 퍼졌다.
그 광경에 크루바와 민희를 포함한 바소르들이 잠시 힐끗 바라봤다.
‘저 오빠는 언제 또 저렇게 강해진 거야?’
민희는 형우를 보며 경악했다.
이전엔 그래도 아주 조금은 따라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쫓아갈 수 없는 높은 하늘이 보였다.
그저 검을 서로 주고받기만 하고 있었는데 그걸로 생긴 충격파가 몸을 밀어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만약 저기에 붙어서 싸웠다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땅을 구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을 수도 있었다.
“감히 우릴 상대하면서 딴생각을 하느냐?!”
“…!”
잠시 형우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법으로 방어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 결과 마족 하나가 민희의 앞까지 파고들었다.
민희는 전형적인 마법사 타입이었다.
근접전에 약했고 최대한 적의 접근을 막으면서 데미지를 주는 전투를 추구했다.
게다가 캐스팅이 빠르다고 해도 이렇게 앞까지 근접하게 되면 민희의 마법으로 상대하긴 정말 까다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민희의 마법적 재능과 실력은 분명 탁월했다.
그러나 아직 경험이 상당히 부족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은 다양한 상황에서 대처가 유연하지 못하단 이야기였다.
경험이 충분한 마법사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적을 밀어낸 뒤 다시 거리를 벌렸을 터.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를 못한 민희는 그대로 넘어졌다.
‘안 돼…!’
민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뭔가가 날아왔다.
슈우우욱!
“뭐야?!”
검을 찔러가던 마족은 옆에서 번쩍이며 날아오는 빛무리를 보며 기겁했다. 그리고 급하게 피하려 했으나 자신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뀨우!”
콰악!
“악!”
자신의 다리를 문 도마뱀을 보며 마족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조차 하면 안 됐다.
덕분에 공격을 그대로 허용했으니까.
콰아아앙!
“크아악!”
“더블 캐스팅! 프리징! 아이스 스톰!”
촤자작! 휘이잉!
민희는 빛무리에 공격받아 괴로워하는 마족에게 더블 캐스팅으로 프리징과 아이스 스톰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로 당한 마족은 그대로 얼음 동상이 됐다.
“언니! 괜찮으세요?!”
“스톤 윌! 괜찮습니까?”
민희는 그제야 자신을 도우러 온 성민과 도영, 수정이 보였다.
사실 그들은 처음 민희가 전투에 투입됐을 때부터 도우려 했다.
그러나 당장 나서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족 하나하나가 A급은 가뿐히 씹어먹을 능력을 가진 이들.
결국, 타이밍을 맞춰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성공해 마족 하나를 처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아직 30이 넘는 마족이 있었으나 민희만 멀쩡하다면 문제없었다.
지원군은 그들만이 아니었으니까.
까앙!
“어디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깜둥이 새끼들아!”
칼리만은 거대한 배틀 엑스 한 쌍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리고 그 뒤로 엘프와 수인족 등 여러 종족의 강자들이 왔다.
모두 최소 S급 이상.
엘루나와 형우의 전투라면 몰라도 민희와 크루바의 전투엔 확실히 도움이 될 이들이었다.
물론 그 이하 병력들은 도움이 전혀 안 될 게 뻔했기에 두고 왔다.
“가자, 아르카의 전사들이여!”
“인사니오의 축복을!”
그들은 우르르 몰려와 마족과 천족을 상대했다.
“미친…!”
“다크 캐논! 어디서 버러지들이!”
수가 적은 마족들은 S급 여럿이 합류하자 순식간에 밀렸다.
민희 한 명에게도 막혔던 상태였는데 이들까지 있으니 더 패색이 짙어졌다.
‘다행이네.’
엘루나와 싸우는 와중에 아르카의 지원이 온 걸 보고 형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걱정되던 차였다.
크루바라면 몰라도 민희 혼자서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나름 R급의 능력을 보여주는 민희였으나 경험도 부족했고 마법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상황.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아르카의 지원이 오면서 고민은 사라졌다.
형우는 마음을 놓고 전력을 다해 엘루나를 상대했다.
그러나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빨리 끝내려던 전투는 점점 길어졌다.
“엘루나 님에게 신성(神聖)을…!”
“엘루나 님에게 신성(神聖)을…!”
“아, 짜증 나게!”
좀 기세를 꺾을만하면 보조 배터리가 가동됐다.
보조 배터리가 엘루나를 완전히 충전해놓자 다시 처음 상태로 돌아왔다.
신성력의 특성인지 몸 상태마저 원 상태로 돌려놨기 때문.
형우는 질린 눈으로 타천사들을 바라봤다.
일부러 저쪽을 먼저 노리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엘루나가 방해했다.
게다가 단단한 방어막이 보호하고 있어 엘루나가 계속 방해하는 한 깨부수긴 어려웠다.
‘이래서 성바퀴, 성바퀴 하는구나.’
형우는 과거 게임에서 힐을 하는 힐러들을 비꼬았던 용어를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스으으.
형우는 일단 최대한 마기의 비율을 높여서 오러를 사용했다.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제일 데미지를 크게 줄 방법이었다.
그러자 회색 오러에도 변화가 왔다.
딱 봐도 회색이었던 오러가 애매한 색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마기의 비율을 높이면서 형우도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민희야, 마족들 죽이지 말고 하나씩 던져!”
“네?”
“하나씩 던져줘!”
“네, 네?”
형우의 말을 이해 못 한 민희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트랜스퍼!”
그러자 곧 그 말을 이해하곤 빈사 상태의 마족 하나를 형우에게 보내줬다.
“무슨 짓을 하는 건가요?”
엘루나는 형우가 하는 행동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거죠.”
“이익…!”
형우는 엘루나 특유의 존댓말을 따라 하며 날아온 마족을 잡았다. 그리고 힘을 흡수했다.
스으으.
“아, 아아악!”
마족은 비명을 지르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형우에게 잡힌 순간 개미지옥에 빠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족은 끝까지 마기를 빨렸고 결국 미라처럼 마른 채 바닥에 떨어졌다.
툭.
그리고 그 모습이 계속 반복됐다.
어차피 노리지 못하는 보조 배터리를 건드리는 건 어려워도 마족들의 힘을 흡수하며 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우는 아예 대놓고 마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마족을 노렸다.
“마, 막아!”
“아아악!”
마족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엘루나는 그 모습을 보며 처음엔 당황했다.
그러나 곧 잔인한 손속을 보여줬다.
“홀리 익스플로젼!”
빛나는 구체가 형우에게 날아가 터졌다.
콰아아앙! 콰아앙!
“아악!”
“엘루나 님! 끄아악!”
형우를 목표로 하고 터트리긴 했으나 피해는 마족들이 더 컸다.
형우는 태연하게 방어를 하며 마기를 계속 흡수했다.
“사, 살려줘! 항복할 테니까, 제발…!”
마족은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구걸한다고 살려줄 형우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마족이 미라가 되어 죽었고 그 행동은 계속 반복됐다.
그 모습을 형우 일행은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음… 형우가 악당 같은데…….”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네요.”
“뀨우!”
“뀨우는 오빠가 악당인 거 같데요.”
어느새 혼자 독무대가 됐다.
마족들을 상대하던 그들은 뒤로 물러났고 나머지 아르카들은 크루바를 돕기 위해 전장을 바꿨다.
덕분에 역할이 붕 떠버려 그들은 팝콘을 두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마기가 더욱 강해진 형우는 엘루나를 밀어붙였다.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가진 거죠?! 큭!”
퍼엉!
엘루나는 경악하며 형우의 공격을 막았다.
마기가 점점 더 강해지자 엘루나는 공격을 막는 것도 점점 더 버거워졌다.
게다가 문제는 마족들을 깽판 치는 게 끝나면 이젠 크루바를 상대하는 다른 천족들에게 갈 게 뻔했다.
엘루나는 형우에 비해 잃을 게 많은 상황.
형우가 마족이나 천족을 처리하면 힘이 더 강해진다.
반면에 엘루나는 아르카들을 처리하기 위해 힘을 지속적으로 소모해야 했다.
뒤에서 힘을 주는 보조 배터리도 엄연히 한계란 게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래, 어차피 뒤에 준비된 것도 있으니…….’
생각을 마친 엘루나는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 퇴각한다!”
엘루나는 후를 기약하며 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뒤따라서 바소르의 병사 전원이 펠리아를 버리고 도망쳤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형우 덕분에 수상 도시이자 동부 관문인 펠리아를 쉽게 얻은 아르카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입성했다. 그리고 진격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