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16
펠은 신전의 지붕 위에 나타난 마족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마족들이 이곳을 알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교단에서도 정말 극소수만 알고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의외로 친절한 마족 덕분에 조금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인데? 재밌는 거 하나 말해줄까? 우리가 과연 어떻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까나.”
색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한 서큐버스는 펠 일행을 오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전혀 짐작이 안 됐기에 다들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이런… 아예 감도 못 잡고 있네?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뭐 어쩔 수 없지. 특별히 바로 알려줄게. 너희가 지나온 마을. 이 정도면 이제 알겠지?”
“뭐라?!”
그 말을 들은 펠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서큐버스를 바라봤다.
저 말 한마디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형우가 지나왔고 습격을 받았던 마을은 사람을 죽이고 식량만 뺏는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족에게 사람을 팔아넘기기까지 하는 듯했다.
오티움의 배신자들처럼 말이다.
여하튼 덕분에 위치가 노출된 듯싶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위치가 노출됐다 해도 이곳이 아니라 포스튠의 수도 레시스토에 있는 크레아 교단으로 가리라 생각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뒤쫓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정확히 이곳 신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
그런데 곧 그 의문도 풀 수 있었다.
저벅저벅.
신전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는 마족이 아니었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크레아 교단의 신관.
왜 마족들이 있는 곳에서 신관이 걸어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펠은 그 이유보단 걸어나오는 인물에 더 놀라고 있었다.
펠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베르딕 대주교!”
“오랜만이오, 제1 성기사 펠.”
안에서 나온 건 베르딕 대주교였다.
비대한 몸짓과 대주교에 어울리지 않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대주교라고 누구나 다 인자한 인상일 수는 없지만, 그는 아주 달랐다.
욕심이 가득 담긴 얼굴.
더는 가면을 쓸 일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래 보였다.
“미안하네.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었네. 이대로 간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아내와 아이마저 모두 죽을 게 뻔하니까 말일세.”
“어찌 대주교란 자가 성혼을 하고 심지어 교단까지 배신까지 하는가!”
펠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교단의 제1 성기사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펠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교단을 위해서만 일해왔다.
크레아에게 순종적인 건 당연했고 배반이란 전혀 생각조차 못 했다.
물론 이건 펠만 그런 게 아니었다.
크레아의 교도 대부분이 그랬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썩은 뿌리는 있었다.
그 썩은 뿌리 중 하나가 바로 베르딕 대주교였다.
그러나 썩었다 하더라도 설마 자신이 모시던 신을 배반하고 동지를 적에게 팔아먹는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 이제 보니 꽤 거물이 걸렸네?”
마족 하나가 제1 성기사라는 말에 이채를 띠었다.
제1 성기사는 성기사 중에서 가장 강한 이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였다.
물론 그 위로 또다른 직위가 있었고 주교들이나 추기경들을 제외한 칭호이긴 했다.
그래도 제1 성기사의 칭로를 받을 정도면 10위권 이상의 강자.
그런 강자를 처리할 기회가 왔으니 마족들에겐 횡재나 마찬가지였다.
탓.
바닥에 착지한 그 마족은 뒤로 손짓했다.
그러자 다른 마족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둘러쌌다.
드드득. 드득.
그리고 뒤이어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언데드는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부터 하급 스켈레톤까지 다양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을 조종하는 게 바로 대주교 베르딕이라는 거였다.
아예 신관에서 네크로맨서로 전직했는지 베르딕은 언데드를 운용해 펠 일행을 겹겹이 포위했다.
“…….”
순식간에 포위된 펠 일행은 긴장한 채로 마족과 언데드들을 경계했다. 그리고 잠시의 대치가 이뤄졌다.
다만,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선공한다! 공격!”
펠이 먼저 공격을 외쳤다.
어차피 공격을 당할 바엔 먼저 공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신이시여! 저에게 악을 벌할 힘을 주소서!”
“성스러운 힘을!”
그들은 각자의 성호를 외치며 신성력을 사용하며 마족에게 달려갔다.
까아아앙! 까앙!
“홀리 크로스!”
“턴 엔데드!”
“카아악!”
“죽어라, 다크 캐논!”
콰앙! 쾅!
큰 폭음과 함께 두 세력의 전투가 시작됐다.
‘크레아의 신성력? 확실히 지금 인사니오의 신관들이랑 느낌이 비슷하네.’
형우는 신성력을 사용해 싸우는 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조신 크레아의 힘을 흡수한 인사니오였기에 지금 크레아의 종들이 쓰는 신성력과 확실히 같았다.
두 기운이 같다는 걸 느끼자 뭔가 확실히 과거로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의 버러지야, 죽어라!”
그런데 그때 형우를 노리고 마족 하나가 날아왔다.
어찌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형우를 공짜 사냥감으로 여기고 온 듯했다.
“흡!?”
형우는 깜짝 놀라며 급하게 검을 들었다.
스르륵.
그때 자연스럽게 형우의 검에 신성력이 깃들었다.
‘어?’
까아앙!
자연스럽게 써진 신성력은 검을 감쌌고 그 덕분에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퍽!
“끄악!”
형우가 잠시 머뭇거린 사이 마족은 사정없이 발로 배를 찼다.
배를 맞은 형우는 그대로 땅을 굴렀다.
“안톤!”
그 모습을 보곤 펠이 달려와 마족에게 검을 휘둘렀다.
스악!
“커억!”
단 한 번의 칼질에 마족이 양단됐다.
그 모습을 보며 형우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헌터들이 막 배우는 칼질이랑 완전 다르네.’
정말 군더더기 없는 칼질이었다.
게다가 힘과 스피드마저 확실했기에 마족이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죽어버렸다.
“정신 차려라, 안톤! 이곳은 전장이다! 전장을 몇 번 못 겪어봤다고 봐주는 검술 교관 따윈 이곳에 없다!”
“예!”
‘전장… 참 많이 겪어봤는데…….’
형우는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펠이 얼마나 많은 전투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형우도 경험이 적은 건 아니었다.
지구에 처음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살기 위해 억지로 싸운 적도 많았다.
감옥에 와서는 솔직히 전장의 연속이었고.
중간중간 편할 때가 있었지만 정말 많이 싸워왔다.
어느덧 형우에게도 전장이란 참 친숙한 존재가 됐다.
다만… 안톤은 아니었다.
타악!
“크윽!”
이번엔 다른 마족이 형우를 공격했다.
그러나 가벼운 내려치기를 막은 것조차 버거웠다.
안톤은 헌터 등급으로 치면 잘 봐줘야 D급이었다.
그러나 마족들은 최소 B급 이상이 대부분.
덕분에 잘 못 하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아니, 99%의 확률로 게임 오버 될 거 같았다.
“어설프구나! 버러지 중에서도 버러지가 잘도 이런 곳에 껴 있었구나!”
“시끄러워!”
마족은 형우를 조롱하며 몰아붙였다.
덕분에 힘겹게 방어를 했다.
그러는 사이 상황은 나빠졌다.
애초에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펠 일행의 숫자는 계속 줄었고 금세 위기가 찾아왔다.
스아악!
“커억!”
“안톤! 저 마차에 든 물건을 꺼내라!”
또다시 형우를 도와준 펠은 중간에 있는 짐마차에서 무언가를 빼 오라고 시켰다.
그 말에 형우는 일단 달려갔다.
‘그런데 무슨 물건인지 어떻게 알아?’
형우는 인상을 쓰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물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펠이 지목한 마차엔 딱 상자 하나만 있었으니까.
“이거 말입니까?”
“열어라!”
“예?!”
“상자를 열어라!”
이 와중에도 펠은 마족을 막고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형우를 재촉했다.
“네!"
형우는 대답하고 바로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끼이익. 파아앗!
“끄아아악!”
“아아악! 더러운 크레아의 힘이…!”
상자에는 작은 구슬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서 뿜어져 나온 건 크레아의 신성력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농축된 신성력.
덕분에 마족과 언데드들은 신성력에 노출되어 괴로워했다.
“지금이다! 오래 효과를 못 볼 테니 빠르게 움직여라!”
펠은 상자에 있던 구슬을 안톤에게 던져주고 안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다들 펠을 신전 안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마족들이 따라붙었다.
“어딜 도망치느냐!”
“신이나 그 밑에 버러지들이나 수준이 참 허접하구나!”
마족들은 펠 일행을 조롱하며 도발했다.
“감히 크레아 님을!”
거기에 넘어간 몇몇이 마족들에 의해 죽어 나갔다.
그러나 굳이 도발에 걸리지 않아도 펠 일행의 숫자는 차근차근 줄고 있었다.
목표한 곳에 도착했을 땐 100명이 넘던 인원이 열밖에 안 남았다. 그리고 거기엔 형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단 펠이 계속 보호를 해준 덕분이었지만.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다.
“이런!”
“하필 문이…!”
그들이 목표한 곳은 신전 안에 숨겨진 하나의 방이었는데 그곳의 문은 상당히 컸다.
게다가 힘으로 닫히는 게 아닌 신성력을 주입해야만 열리고 닫히는 식으로 설계됐다.
덕분에 그들은 문을 여는 동안에도 계속 적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을 닫을 때가 됐을 땐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안톤! 너 혼자 들어가라!”
“하, 하지만!”
“말할 시간 없다! 너라도 살아서 임무를 완수해라! 제단에 구슬을 올리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형우는 그 말에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안톤이라면 상당히 망설였을 테지만, 안톤이 아닌 형우였기에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형우는 조각을 제단 위에 올려놨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펠 님?!”
“너는 살아라.”
“…!”
펠을 그 말을 하며 최후의 일인이 될 때까지 문을 지켰다.
“아무도 못 지나간다!”
푸욱! 파아아아!
바닥에 검을 꼽은 펠은 몸 안에 있는 모든 신성력을 뽑아냈다.
“크아악!”
“아아아악!”
신성력에 닿은 마족들은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어디서 잔재주를!”
“어서 저놈을 죽여라!”
그러나 사라진 만큼 다시 숫자를 더해 펠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사이 계속 신성력을 다 주입받은 문이 닫혔다.
쿵.
“펠!”
그 순간 형우가 아닌 안톤의 마음으로 펠을 불렀다.
그러나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스으으. 사아악.
마치 시간이 빨리 흐르듯이 주변이 변해갔다. 그리고 방금까지 안톤이 서 있던 곳에 눈을 감은 형우가 나타났다.
“후우…….”
형우의 몸에 활력이 드는 걸 느끼며 조용히 눈을 떴다.
‘내 몸이 이렇게 강했었나?’
정말 약했던 안톤에서 다시 원래의 힘이 돌아오자 형우는 쓰게 웃었다.
안톤이 수만 명 몰려와도 이길 수 없는 게 바로 형우였다.
아니, 거기에 있던 마족들 전부 덤벼도 이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정말 상황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후우… 이제 좀 낫네. 그런데 여긴 뭐지?”
급박한 상황엔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제단이라기보단 뭔가 막는 용도로 만들어놓은 느낌이었다.
[수고했다.]
“인사니오 님?”
그때 인사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거라.]
인사니오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형우에게 전해줬다.
팟!
빛과 함께 작은 구체가 나타났다.
“음?”
얼떨결에 구체를 받아든 형우는 그걸 신기하게 바라봤다.
실체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생김새의 구체였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형우는 다음 의문을 풀기 위해 인사니오의 말을 기다렸다.
[그걸 제단 위에 올려놓아라.]
제단을 바라보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밝게 빛나던 구체가 먼지가 쌓인 채 검게 변해있었다.
“여기에 올립니까?”
형우는 물음 아닌 물음을 하며 구체를 구슬 옆에 올려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스르륵. 화아악!
그 순간 구체가 빛을 잃었던 구슬에 흡수되며 밝은 빛을 냈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