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10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안에 있던 이종족 지휘관들이 보였다.
그들은 형우가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리자시여.”
“교황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인사로 형우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느새 소문이 퍼진 건지 교황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형우는 그들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해주고 자리에 앉았다.
곧 다들 자리에 앉자 크루바가 상황을 설명해줬다.
“지금 상황은…….”
형우가 예상한 대로 그들은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다른 감옥의 죄수들은 전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전선이 밀린 것부터 여기 아르덴에서 5일째 힘겨운 수성 중이라는 말까지 모든 상황을 들은 형우는 안색을 굳혔다.
‘협공을 받았어도 크루바가 밀릴 정도라니…….’
크루바는 신물을 얻고 R급에 가까운 힘을 얻었다.
정확히 힘의 크기를 비교하자면 R-급보단 강하고 R급보단 약한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크루바를 밀어붙일 정도면 확실히 적들이 강해진 게 맞았다.
‘잘 못 하면 나도 당하는 거 아냐?’
크루바는 새로 합류한 S급 헌터의 수가 12명이라고 했다.
형우과 최소와 최대로 잡은 수의 중간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이들이 일곱 이상 모이면 그때부터 크루바가 못 버틴다고 알려줬다.
그럼 나머지와 다른 S급들이 합치면 충분히 크루바와 형우를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승부를 가늠할 수 없게 된다.
“그러고 보니 그댄 어떻게 이리 빨리 온 건가? 증원을 요청한 지 아직 5일도 안 지났는데…….”
크루바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계속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다 보니 본부에 원군을 청한 상태였다.
이미 근처에 퍼져 있던 병력들은 다 집결한 상황이었으나 그것으론 부족했다.
정확히는 S급 이상의 고급 인력이 필요한 상황.
안 그래도 형우가 와주길 바라고 노르덴 요새로 들어서자마자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건 5일 전이었다.
형우가 드레이크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알았기에 아무리 빨라도 최소 10일 이상을 잡았다.
그런데 형우는 그 기간을 반이나 줄였다.
예상한 것보다 2배는 빨리 왔으니 크루바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본부 너머 지역엔 아직 지호의 워프 게이트도 설치가 안 된 상태.
“신탁이 있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신탁?!”
“오오, 역시 인사니오 님의 총애를 받는 대리자십니다…!”
“신탁이라니…….”
“아아, 인사니오시여.”
신탁이라는 말에 다들 감탄과 경의를 담아 형우를 쳐다봤다.
신탁이라는 것 자체가 쉬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차 침공으로 인사니오의 제외한 모든 신이 소멸하기 전까지 대륙에 있었던 신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형우가 신탁을 받았단 말에 다들 가만히 있질 못했다.
“하하…….”
형우는 호들갑을 떠는 그들을 어색하게 쳐다봤다.
사실 형우에겐 인사니오는 그저 능력 있는 강태공 아저씨였다.
신앙은커녕 존경심도 거의 없었다.
의뢰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선 정말 감사하고 있으나 그게 다였다.
지구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상당히 모호하고 흐릿했다.
그런 세계에서 몇십 년 살아온 형우였고 특별히 믿는 종교도 없었기에 사실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금제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봐온 모습이 낚시뿐이라서 그런지 더 그랬다.
여하튼 형우는 인사니오에게 일주일 전 신탁을 받았고 이들은 5일 전에 증원을 요청했으니 그들에겐 통신을 취한지 5일 만에 도착한 거였다.
“그래서… 신탁 내용이 뭔가?”
크루바는 손을 들어 다른 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물어봤다.
“다른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나타날 거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노르덴으로 가라 하셨고요.”
“꽤 상세한 신탁이군.”
“지금은 인과율(因果律)을 신경 쓰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형우의 대답에 크루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탁은 원래 상당히 모호한 형태로 내려왔다.
뜻의 의미를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번 신탁을 어렵게 표현했다면…….
‘빛이 머리 위로 향했을 때 새 검을 잡은 죄지은 자들이 삭막한 대지로 향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나올 터였다.
이것도 답을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지만, 아예 모르고 봤을 땐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말이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모호하고 어려운 말로 신탁을 내려준다.
이유는 간단했다.
차원에 최소한으로 개입하기 위해서였다.
차원은 여러 가지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인과율이었다.
인과율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랬다.
‘A라는 이가 B를 살려줬다. B는 목숨을 살려준 A에게 선물을 줬다.’
‘A라는 이가 죽어가는 B를 무시했다. B는 죽었고 그걸 알게 된 친구 C가 A를 죽였다.’
즉, 원인이 발생하면 그에 따른 결과가 파생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이 개입할 때였다.
신이 차원에 간섭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답은 차원의 붕괴였다.
겨우 신이 개입 좀 했다고 차원이 그렇게 간단히 날아가냐 하는 의문을 표할 수 있으나 세밀히 들여다보면 정말 큰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신들은 차원을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각자 오티움이라는 땅에 뿌리는 내리고 있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이 움직이면 아래 뿌리가 흔들리고 땅이 흔들린다.
한마디로 신의 힘 자체가 워낙 강대하고 차원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라 영향을 무조건 미치게 된다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인과율에 위배되는 신탁도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두루뭉술하고 흐릿하게 전달됐다.
그러나 이젠 상관없었다.
‘이미 차원이 붕괴하고 있으니까.’
이미 뿌리가 뽑혔는데 거기에 잔가지 몇 개 더 뽑았다고 티가 나는 게 아니었다.
“여하튼… 인사니오 님 덕분에 그대가 빨리 왔군.”
“예. 그리고 큰 도움이 될 원군들도 데려왔습니다.”
형우는 그 말을 하며 뒤를 바라봤다.
다만, 형우의 뒤에 있는 건 민희뿐이었다.
봄이는 막사로 향하던 중 홀로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치료소로 갔다.
신관의 숫자가 늘어난 덕분에 포션 외에 부상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도가 생기긴 했으나 아직 그 수가 상당히 부족했다.
게다가 인사니오의 힘이 약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신관들의 신성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치료력이 약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A급 그레이트 힐을 가진 봄이의 능력을 확실하고 강했다.
덕분에 봄이가 벌써 수십을 살리고 있었기에 크루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일단 가서 쉬고 있어라. 당장 오늘 저녁에도 바소르가 쳐들어올 수 있으니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형우는 막사를 나왔다.
어차피 전략이나 세부사항에 대해서 형우가 알아야 할 게 없었다.
따로 작전도 없었고 총력을 다해 막는다가 다였으니까.
그리고 그날 저녁 크루바의 말대로 정말 바소르가 쳐들어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넘이 시간.
적들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는 말을 무시하고 막 저녁 식사 준비를 끝낸 시간에 쳐들어왔다.
“적이 움직인다!”
땡땡땡!
적의 움직임을 확인한 경계병이 시끄럽게 종을 울렸다.
“빌어먹을 놈들! 지들은 밥도 안 처먹나.”
“내 저 바소르 놈들의 피로 오늘 저녁을 대신하고 만다!”
“모두 집결! 빠르게 집결해라!”
병사들은 투덜거리면서 빠르게 성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성벽의 배치가 끝났다.
지금 하는 전투는 일반적인 공, 수성전이 아니었다.
능력 위주의 공격과 방어가 주로 이뤄질 능력자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벽엔 B급 이상의 실력자들만 올라간 상태였다.
나머지는 주로 보급이나 비상시 대체 인력이었다.
B급 이상이 성벽에 투입되다 보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많네…….”
종소리를 듣고 바로 올라온 형우는 바소르의 병사 수를 보고 안색을 굳혔다.
대충 보기에도 십만이 넘는 병력이 물결치며 노르덴으로 다가왔다.
다만, 십만이 넘는 병력 중 제대로 공격하는 숫자는 만 이내일 터였다.
성벽에 있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실력자 위주의 공격이 될 테니까 말이다.
길목을 막고 있는 요새를 공격하는데 C급 이하가 와봤자 거치적거릴 뿐이었다.
“기죽이려고 무력 시위하는 거겠죠?”
봄은 십만 대군을 보며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겠지. 물론 그거 말고도 이유가 있을 테고.”
“이유요?”
“여기 넘어가면 우리가 했던 방식 그대로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려 할 테니까.”
“아아…….”
봄이는 형우의 말을 이해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뿌우우우!
그때 나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적이 빠르게 접근했다.
“공격 준비!”
“공격을 준비해라! 선두에게 타격을 줘야 한다!”
적들이 달려오자 크루바의 명령에 따라 다들 신속하게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일정 거리에 다가온 순간 능력의 향연이 펼쳐졌다.
“공격!”
“공격하라!”
“윈드 스톰!”
“라이트닝 체인!”
“플레임 스트라이크!”
콰아아아!
B급부터 S급까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선제공격을 날렸다.
다채로운 색으로 이뤄진 수백 개의 공격이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은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공격을 그대로 뒤집어쓰게 생겼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곧 충돌했다.
퍼엉! 콰아아앙! 콰아앙!
순간 십만 병력이 모두 가려질 만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형우도 대비를 못 하고 저 공격에 맞는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뭐, 뭔가 이상한데?”
“저놈들이 저렇게 쉽게 허용할 리가 없는데…….”
병사들 대부분은 공격 성공에 기뻐하기보단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번을 제외하고 총 5번의 전투를 하면서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선제공격에서 피해를 주긴 했어도 그게 다였다.
아무리 많은 공격이 날아갔어도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에 A급 이상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다 같이 막으면 막을 수도 있었고.
그런데 그 공격을 모두 허용했으니 다들 의아해할 수밖에.
“음?”
그런데 그때 형우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건 뭔가 친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게 뭔지 전혀 파악이 안 됐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하나 있었다.
“크루바 님! 오른쪽 성벽 아래에 브레스를!”
“스으으읍!”
형우의 말에 크루바는 의심하지 않고 바로 브레스를 사용했다.
“크아아아!”
파아아앗!
괴성과 함께 입에서 브레스가 뿜어져 나갔다.
콰아앙!
브레스가 땅에 닿으며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급히 그곳을 벗어나는 무리가 보였다.
“저, 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나타난 거야?!”
“공격! 공격해!”
“파이어 랜서!”
“슬로우!”
병사들은 다급히 능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유유히 공격을 피하며 성벽 위로 접근했다.
형우는 바로 몸을 날렸다.
“통제.”
“…!”
“디버프?!”
R-급 통제에 걸린 그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공격을 푸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며 통제의 힘을 풀어버렸다.
형우는 그 모습에 놀라면서도 공격을 계속 이어갔다.
“매스 블링크! 오러 블레이드!”
파앗! 까아앙!
“크윽!”
매스 블링크로 가장 기운이 크게 느껴지는 이의 뒤로 갔다. 그리고 연달아 오러 블레이드로 공격을 날렸지만 바로 막혔다.
갑작스레 자세를 틀며 막느라 검이 부딪히는 순간 온몸에 데미지가 왔다.
다만, 상대는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었다.
“대단한데? 누런 도마뱀 인간 말고 또 이런 실력자가 있을 줄이야.”
금발의 서양인은 웃으면서 형우에게 말했다.
“넌 누구야?”
“나? 나는 질리언.”
“질리언? 아!”
질리언이라는 이름을 듣자 순간 형우는 그가 누군지 알게 됐다.
‘찰스 질리언.’
미국 최대의 살인마라 불리는 아니, 학살자로 불리는 질리언은 무려 만여 명을 살해한 S급 헌터였다.
몬스터 웨이브 때 밀려오는 몬스터를 내버려 두고 대피소에 모인 시민들을 학살하고 다닌 희대의 미치광이.
‘어느 순간 안 보였는데… 역시 여기로 잡혀 들어왔나?’
형우는 질리언을 향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질리언은 적대감 따윈 신경 안 썼다.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짙게 미소 지었다.
“하하, 누군지 알았으니까 제대로 해보자고. 물론 넌 알려줄 필요 없어. 곧 죽을 거니까.”
스멀스멀.
그 말을 끝나고 질리언의 몸에서 진득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검은 연기는 검으로 모여들었다.
덕분에 질리언의 검엔 검은 오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형우는 마기를 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왜 제가 친숙하지?’
분명 마기는 처음 본 기운이었다.
한 번도 못 겪어본 기운이 이상하게도 친숙했다.
스윽.
형우는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맞대고 있는 검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형우가 손을 움직인 순간 마치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마기가 형우에게 흡수됐다.
“뭐, 뭐야?!”
당황한 질리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진짜 놀란 건 형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