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18
“와······.”
소정이는 어느새 날뛰던 뀨우를 품에 안고는 놀라고 있었다.
블랙 머천트가 에피리아라고 소개한 그곳은 거대한 숲이자 하나의 마을이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부터 숲의 중앙까지 엘프들이 거주하는 곳인지 자연과 조화로운 마을이 존재했다.
“허… 이런 곳이 있다니…….”
감옥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는 곳이었다.
특히 이종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더더욱.
그런데 중요한 건 자신을 왜 이곳으로 데려왔냐는 거였다.
두 번 구해준 대가?
그거라면 랜덤 박스만 던져줘도 충분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런 곳을 굳이 공개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인 의뢰서의 내용.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 때문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따라오게. 자네를 헤치는 일은 없을 걸세. 내 생명을 걸고 약속하네.”
팟!
“…!”
그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블랙 머천트의 몸에서 빛이 튀어나왔다.
그것에 놀라 뒷걸음질치자 빛은 따라와 형우의 몸으로 흡수됐다.
“이, 이게?”
“엘프의 맹세일세. 어길 수 없는 절대의 약속.”
엘프의 맹세는 지구에선 알려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구에서 엘프는 몬스터였다.
이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 본능의 몬스터.
그런 엘프들은 엘프의 맹세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사실 이건 상위층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들에게 엘프는 일명 진실의 종족으로 불렸다.
평소 거짓말을 안 하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 엘프의 맹세 때문이기도 했다.
이 맹세는 어기는 순간 맹세를 한 엘프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 때문에 약속을 어길 수 없는 진실의 종족이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순간, 나는 죽네. 내가 이 많은 재산을 버리고 죽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게.”
블랙 머천트는 그 말을 하면 씨익 웃어 보였다.
“끄응…….“
형우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블랙 머천트를 바라봤다.
다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금 엘프의 맹세를 하고 빛이 형우에게 들어온 순간 그게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후우… 네.”
결국, 형우는 블랙 머천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쿠구궁! 쏴아아아!
사방에 어둠에 깔린 어느 공간, 하늘엔 번개가 치고 땅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게다가 비바람과 함께 날아다니는 수많은 돌조각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과 부딪히며 자신을 소모했다.
도저히 생물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곳에 오자마자 1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꿋꿋이 걸음을 옮기는 누군가가 있었다.
“…….”
회색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말없이 어디론가 걸어갔다.
비와 바람, 그리고 돌조각들이 부딪혔지만 마치 벽에 튕기듯 퉁겨나가 그에게 조금의 피해도 주지 못했다.
쿠구궁!
번개는 그런 그에게 조명을 비춰주듯 쉴 새 없이 쳤다.
잠시 후, 그는 거대한 돌무덤이 있는 곳 안으로 들어갔다.
돌무덤의 안은 밖과 달리 고요했다.
마치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밖에서 들리는 모든 소음이 차단되어 들리지 않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는 그곳 안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엔 다른 이가 존재했다.
검은 로브를 입은 그는 뒤를 돌며 머리에 쓴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익숙한 모습이 드러났다.
“대법관.”
놀랍게도 그는 법정에서 형우의 판결을 내렸던 판사였다.
“오랜만이라 더 반갑군, 쿠라.”
대법관은 쿠라에게 반갑다고 말했으나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완벽한 무표정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쿠라는 흠칫하며 회색 두건을 벗었다.
그러자 검은 피부의 미녀가 나타났다.
정말 흑진주 같은 검은 피부는 그녀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해줬다.
그러나 지금 쿠라의 미모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안해, 대법관. 바로 죽을 줄 알았는데 안 죽네. 나도 그렇게 계속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몬스터 웨이브 그것도…….”
“그럼 처음부터 손을 쓰면 되지 않았나?”
쿠라가 변명처럼 쏟아낸 말을 대법관이 잘라냈다.
대법관의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쿠라의 안색은 점점 안 좋아졌다.
“어, 어쩔 수 없었어. 나름 노력을 하긴 했는데…….”
“…나름?”
“…….”
계속된 압박에 결국 쿠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다른 이가 등장했다.
“어허, 쿠라한테 너무한 거 아냐?”
“쿠라라고 열심히 안 한 게 아니라고. ‘개입’할 수 없는 우리로선 이 정도면 정말 최대한 힘을 쓴 거야.”
금발과 남성과 흑발 여성이 그 말을 하며 다가왔다.
대법관은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러나 쿠라와 달리 그들은 대법관을 보고도 별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히죽거리며 웃는 얼굴로 걸어왔다.
“어차피 다른 카드도 있잖아. 이럴 땐 써먹으려고 놔둔 거 아니야?”
“그에겐 블랙 머천트를 잡으라 시킨 것 잊었나? 그가 등급이 높다 하더라도 몸은 하나다.”
“몸은 하나지.”
흑발의 여자가 장난기 가득한 대법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으로 대법관의 몸을 쓱 훑었다.
색기가 가득한 몸짓으로 점점 대법관의 몸 아래로 손이 내려갔다.
탁.
“손대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라.”
“칫. 재미없게.”
손이 잡히자 흑발의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자 대신 금발의 남자가 말을 해줬다.
“블랙 머천트와 목표가 접선했어. 한꺼번에 같이 처리하는 건 어때?”
“같이?”
“그래, 같이. 딱 지금 처리하기 좋은 곳에 있거든. 그에겐 지금 좋은 장난감이 있으니 제대로 깽판 칠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렇게 해라. 그분께선 더 이상의 지체를 용납하지 않으실 거다.”
“아아, 잘 알지. 개입도 할 수 없는 그 용납.”
금발의 남자는 누군가에게 비아냥거렸다.
그 반응에 지금까지 계속 무표정하던 대법관의 표정이 변했다.
“레닉!”
“나 귀 안 먹었어. 조용히 말해.”
“…….”
레닉은 대법관의 분노에도 태연하게 반응했다.
그 모습이 대법관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흑발의 여자는 무안한 표정으로 둘을 말렸다.
“자자, 둘이 그만해. 우리끼리 싸워서 뭐 좋을 게 있다고.”
“아, 알겠어. 테메. 여하튼 우리는 이만 가볼게. 쿠라, 한번 잘 해봐.”
“아, 응.”
탓.
쿠라는 혹시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잽싸게 도망갔다.
그와 동시에 레닉과 테메, 대법관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다는 듯이.
“뀨, 뀨우!”
“얘 엄청 귀여워!”
“꺄악! 너무 귀엽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엔 엘프들이 형우와 소정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겁없는 아이들이 뀨우를 보고 달려들었고 덕분에 경계가 약간 허물어졌다.
물론 뀨우는 그 대가로 열심히 희생당하고 있었다.
“엄청 귀엽지? 얘가 내 거라고.“
“뀨우우…!“
게다가 소정마저 거기에 어울려 버리니 안타깝게도 뀨우의 편은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구만.“
블랙 머천트는 아이들에게 볼을 꼬집히는 뀨우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음? 혹시 뀨우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알다마다. 우리와 가장 친한 종족이었으니 말일세. 물론 안타깝게 그들 모두 멸종했었네.“
블랙 머천트는 그 말을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멸종이라니요?”
“하나가 살아 있으니 이제 멸종은 아닌가? 허허. 어찌 되었건 저들은 마지막 날 그들의 신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네.“
“마지막 날?”
“으흠… 다른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자넨 이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지.”
블랙 머천트는 그 말을 하며 마지막 날을 설명해줬다.
다만, 그 설명을 듣자마자 형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상이 있다고요?”
“허허, 자넨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연 발생? 아니면 자네가 사는 곳의 과거?”
“음…….”
그 말에 형우는 말문이 막혔다.
의문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명쾌한 해답을 얻은 적이 없었다.
지구에서든 감옥에서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였으니까.
그나마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거라면 관리자가 지구를 멸망시킬 거라는 정도?
사실 그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정보였다.
“우린 자네와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었네. 그곳의 이름은 오티움.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지.”
블랙 머천트는 오티움에 대해 이어서 말했다.
오티움에는 엘프뿐만 아니라 드워프, 인간, 오크, 페어리, 뀨우의 종족인 드라코 등이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몇몇 지성이 떨어지는 트롤, 오우거 등이나 언데드 몬스터들은 적이었지만, 나머지 종족들은 서로를 인정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등장한 강력한 침략자에 의해 그 평화는 풍비박산 났다.
“엑시디움 종족. 그들이 나타났네.”
엑시디움은 일명 차원의 약탈자, 악의의 종족이라 불렸다.
그들 종족은 차원 에너지 ‘나투라’와 ‘악의’ 먹으며 살아가는 기생 종족이었다.
차원을 점령하여 그곳의 에너지를 한계치까지 뽑아먹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약탈자이기도 했고.
그들이 더 악랄한 건 차원이 다시 복구할 힘은 놔둔다는 거였다.
그렇게 나중에 힘을 복구하면 다시 또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차원엔 한계가 있었다.
계속 데미지를 입은 차원은 결국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오티움은 그렇게 두 번 약탈 당한 차원 중 하나였다.
“처음 약탈 이후 차원의 평화와 조화는 사라졌네. 그들에게 붙은 배신자도 등장했고. 덕분에 오티움은 평화 따윈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됐네.”
그러나 삼삼오오 분열된 그들에게도 엑시디움에 저항하는 이들은 존재했다.
그들은 끝까지 차원의 붕괴를 막기 위해 노력했고 처음엔 방관했던 오티움의 신들도 도왔다.
“처음엔 그들도 엑시디움이란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당했었네. 차원의 에너지를 뺏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차원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이십이나 되는 모든 신이 나섰지. 그 중엔 인사니오가 있었네.”
“…!”
인사니오라는 말에 형우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많은 신 중에 딱 집어서 인사니오를 언급했다.
그건 이미 형우에 대해서 눈치를 챘다는 거였다.
“이미 자네에게 풍기는 기운으로 알고 있었다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네.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한 신이자 마지막 엑시디움에게 강력한 저주를 건 신. 그가 바로 인사니오였으니까.”
“저주? 무슨 저주를 걸었습니까?”
“다른 신들의 힘을 모아 자신의 몸 조각으로 나눴고 거기에 그들의 힘을 봉인하고 다른 차원으로 조각을 보내버렸네. 다른 차원에 개입할 수 있게 만들어줬던 그들의 힘을 자네의 차원을 보내버린 것이지. 그 때문에 아마 자네의 차원은 난리가 났을 거네. 그리고 덕분에 그들은 지금 이곳을 포함해서 다른 차원에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 없는 상태네.”
“그럼 설마…?”
“설마가 맞을 걸세. 자네 몸에 있는 그것. 인사니오의 힘을 담은 그 조각이네. 물론 반의반 쪽도 안 되는 조각이지만 말일세.”
“아…….”
이제 좀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가려져 있던 것을 알게 되니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다만, 아직 물어봐야 할 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인사니오가 왜 당신을 싫어하는 겁니까?”
“허허, 오티움이 멸망한 마지막 날 어쩔 수 없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결전을 피했네. 그것 때문에 삐진 걸세. 그렇게 이유를 설명해줬는데. 쯧쯧, 신이 그렇게 쪼잔해서야.”
“쪼, 쪼잔하다니…….”
형우는 블랙 머천트의 말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한편으론 인사니오도 많이 삐진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대로 싫었다면 방관이 아니라 죽이라고 했겠지. 보상을 두둑이 주고.’
정말 악의를 가졌다면 자신도 그랬을 터였다.
보상엔 A급이든 S급이든 주고 블랙 머천트를 죽이라고 내용을 넣었을 거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 말은 인사니오도 섭섭한 것일 뿐, 이해는 한다는 뜻일 터.
“흠흠… 여하튼 자네가 가진 인사니오의 조각. 그것을 찾기 위해 아마 자네를 죽이려 들 것이네.”
“그렇군요…….”
이제야 관리자가 적이라고 말한 인사니오의 말이 이해가 됐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해주면 좀 좋아. 괜히 머리만 심란하게 만들고.’
형우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론 S급도 함부로 이기기 힘들다는 용병을 데리고 다니신다던데 왜 그 용병 없이 다니신 겁니까?”
“흠… 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네. 그 덕분에 그와 떨어지게 됐지.”
“습격이요? 누구에게 습격을?”
어느 간 큰 인물인지 무려 블랙 머천트를 건드렸다.
지금 이곳에 들어오면서 만난 7명의 엘프만 하더라도 S급에 준하는 이들.
누군지 몰라도 앞으로 제대로 복수를 당할 터였다.
“자네들에게도 유명한 인물일세. 그는…….”
콰아앙! 콰앙!
그때 갑자기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형우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나타났다.
“문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