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11
그러나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이 여자에게 다른 의미로 제대로 한 방 먹일 거니까.
“누나고 뭐고 모르지만… 이제 이것도 작성하시죠.”
“네?”
“이거까지 작성 안 하면 절대 안 도와줍니다.”
형우는 그 말을 하며 노예 문서를 내밀었다.
지영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아까도 말했다시피 순전히 자신의 여동생 때문이었다.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계약서를 작성하면서까지 지영과 대화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포션을 쓴 것도 지영에게 F구역에서 왜 자신을 이용하고 버렸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헌터수사부라는 말에 딴 이야기로 새긴 했지만, 이게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정말 숨이 붙어있을 정도만 포션을 먹이고 협박해서 노예로 만들어도 됐어요. 그쪽 상황이 어떻든 말이에요.”
“…….”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래도 전 범죄자가 아니기에 이러는 겁니다. 저는 정말 여기 억울하게 끌려왔어요. 제가 무슨 범죄를 저질러서 끌려 온 게 아니라고요. 근데 국가 단체라는 헌터수사부 사람은 그 사람을 그저 이용만 하고 버렸네요. 그 덕분에 정말 억울하게 죽을 뻔했어요. 여하튼 저도 그 때문에 계약서만으로는 못 믿겠습니다. 노예 문서도 같이 작성해주세요.”
형우는 다시 노예 문서를 내밀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계약서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계약서가 설마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그 말에 지영이 입을 다물었다.
계약서 자체가 문제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계약서로 계약을 맺게 되면 허점이 너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여기에 사인 안 하시면 탈출 중간에 버리고 갈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건 계약 위반이잖아요!”
“계약 위반이요? 계약서 잘 보고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네?”
“계약서 한번 잘 보시라고요.”
그 말에 지영은 적었던 계약서를 바라봤다.
‘신지영의 탈출을 돕는 대신 신지영은 박형우의 여동생 박선우를 보호해줘야 한다.’
간단하게 적힌 내용이었지만, 별문제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형우의 말을 듣고 보니 계약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신지영의 탈출을 돕다. 그리고 그 탈출이 중간에 실패하든 성공하든 신지영은 박형우의 여동생 박선우를 보호해줘야 한다.’
“…….”
분명 내용엔 탈출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
탈출이 실패해 밖으로 못나게 되면 오히려 지영이 계약서 위반이 될 터였다.
사실 이 계약서는 정말 문제가 많았다.
확실한 내용이 안 들어가거나 해석의 여지가 있으면 그쪽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다 보니 그걸 악용해서 많은 사기가 있었다.
얼마 전 용준의 문제로 박 사장에게 상담을 한 번 받은 덕분에 형우는 그걸 잘 알았고 이번엔 잘 이용했다.
지영이 형우를 속였던 것처럼 이번엔 형우가 지영을 속였다.
그게 보이자 지영은 당황했다.
“제가 설마 순진하게 또 도와주길 원했다면 정말 오산입니다. 당신 덕분에 생사를 넘으면서 많이 배웠거든요.”
사실 처음 소정에게 계약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굳이 여러 말들을 하며 계약서까지 작성한 이유는 정말 동생 때문.
그러나 동생 때문이라도 지영에게 말리는 건 바라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이럴 줄 전혀 몰랐던 소정이 옆에서 토끼 눈을 하고 바라봤다.
“그래도 이건…….”
“안타깝네요. 오늘 사람 하나 죽겠네요.”
“반대가 되리라곤 생각 안 해보셨어요? 겨우 블링크를 가진 거 가지고 절 협박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꺄악!”
지영은 그 말을 하며 소정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목에 칼을 댔다.
“이제 어쩌실래요, 아저씨? 이 아이는 계약서에 없네요.”
주룩.
소정의 목에 칼이 닿으면서 약간의 피가 흘렀다.
“당신 정말 헌터수사부 맞아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제가 탈출해야지만 내가 본 것들을 밖에 알릴 수 있어요.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에요. 다 말은 못했지만 마약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그런다고 자기 살자고 애를 인질로 써요? 헌터수사부도 경찰처럼 똑같이 국민 보호하고 도와주는 곳이잖아요?”
“…….”
형우의 말에 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심정을 보여줬다.
“여하튼 전 못 써요. 그리고 계약서는 다시 써요. 안 그러면 제가 이 애한테 어떻게 할지 몰라요.”
“그럴 수 없을 걸요?”
“…?”
“속박! 블링크!”
팟!
“앗!”
형우는 속박을 쓰자마자 블링크로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칼을 뺏었다.
칼을 뺏자마자 소정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오빠.”
“소정아, 괜찮아?”
“전 괜찮아요.”
소정은 일부러 웃어 보이며 괜찮다 말했다.
그러나 형우는 안 괜찮았다.
“일단 이 포션으로 치료해.”
형우는 억지로 포션을 소정에게 전해줬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영에게.
“아저씨는 도대체 능력이 몇 개인 거예요?”
지영은 형우를 경악과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블링크와 속박은 원래 없던 능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긴 것도 모자라 C구역에 치료제를 사러 올 정도로 여유까지 생겼다.
지영의 입장에선 이 모든 게 정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 능력은 본인보다 아래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3개요.”
“에?! 세 개나 된다고요? 도대체 어떻게 세 개나 있는 거예요?”
“원래 소켓이 세 개였고 후천적으로 생겼어요.”
무능력자가 후천적으로 능력이 생긴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 같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해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언제 상대 심장을 찔러도 모를 사이였으니까.
다만, 3개라는 건 어차피 알려진 이야기였다.
E구역에서 신우 길드의 B급 헌터 장현민과 싸움을 벌이며 속박과 윈드, 블링크 이 세 가지를 모두 사용했다.
그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어차피 곧 퍼질 소문이었다.
다만, 형우는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좋았다.
‘내 능력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인사니오에게 의뢰서를 받아 성공하면 또 새로운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전보다 더 나쁜 능력이 나올 수도 있다만, 여하튼 능력은 계속 쌓일 터였다.
그게 원래 상대가 알고 있는 정보에 허점을 제대로 찌를 수 있다는 게 핵심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일부로 정보가 퍼지는 걸 막지 않았다.
물론 막기도 힘들었지만.
E구역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만 수백이 넘었다.
그 중엔 형우 길드의 소속이 아닌 다른 길드나 구역에서 온 이들도 많았다.
그들을 다 죽이고 입막음을 한다는 거 자체가 불가능이었다.
각설하고 형우의 말에 지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러나 뭐라 말할 순 없었다.
뺏긴 칼이 자신의 목에 향해 있었으니까.
“이제 그만 쓰시죠. 더 추해지지 말고요, 누님.”
“아저씨, 나 정말 나가야 해요. 제발 부탁해요. 이것만은 제발.”
이제 힘으로 불가능해지자 지영은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글썽였다.
그런데 이전과 같은 연기가 아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사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모습에 찜찜했던 형우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노예 문서 신경 안 쓰고 사셔도 됩니다. 저는 제 동생만 안전하면 되니까요. 내가 그쪽을 어떻게 할 생각 없어요. 저는 정말 확실하게 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어서 쓰세요.”
‘물론 제가 할 생각이 없는 거지만요.’
형우는 그 뒷말을 삼키며 미소 지었다.
“…….”
지영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던 그녀는 결국 알겠다며 노예 문서에 사인했다.
그래도 탈출해서 밖으로만 나가면 노예 문서는 효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2,000년 형을 선고받은 형우가 밖으로 못 나올 거라 확신했으니까.
“피곤하실 텐데 좀 쉬세요. 어차피 점심때나 움직여야 할 거 같으니까요.”
“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처진 목소리.
생기발랄과 안하무인이 공존하던 지영이 아니었다.
형우는 지영은 놔두고 소정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제 지영의 탈출을 도와야 했기에 먼저 준비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날 점심.
지영은 어제의 일과 아침의 일로 인해 피로가 다시 쌓였는지 아침 내내 잠을 잤다.
형우는 그사이 미리 근처 쉘터에 블링크로 소정을 두고 왔다.
안타깝게도 블링크는 동반 1인이 한계였다.
강화를 최대한 했음에도 늘어난 건 이동 거리뿐.
지영과 도망을 가야 하는데 한 명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경로의 쉘터를 찾기 위해 쉘터가 그려진 지도까지 샀다.
형우는 그 쉘터 중 그나마 제일 안전하면서 숨겨진 곳에 소정을 두고 왔다. 그리고 여관으로 돌아오자 지영이 잠에서 깨어났다.
다만,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하아, 여기에 그 길드 인원이 이렇게 많을 리 없는데… 설마?”
지영은 설마 하면서 창밖을 힐끗 바라봤다.
창밖에선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수십 명씩 지나갔다.
그냥 지나가는 인원이 아니라 분명 지영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인원이었다.
“아무래도 정보를 푼 거 같아요. 이러면 온 길드에서 다 추격할 텐데…….”
헌터수사부는 죄수들에게 원수 중의 원수였다.
경찰과 범죄자의 사이처럼 그들의 관계도 같았다.
그 때문에 감옥에 가끔 헌터수사부 인원이 떴다는 말이 들리면 다들 경쟁적으로 움직였다.
복수의 의미도 있고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우리 길드에선 헌터수사부를 이겼다고 말이다.
그것 말고도 이벤트적인 느낌도 있었다.
갑자기 게임에서 이벤트 몬스터가 뜬 거 같은 느낌.
각설하고 딱 봐도 같은 소속이 아닌 무리끼리 지나다니는 걸 보니 분명했다.
“나가야겠는데요? 어서 준비해요.”
“네.”
우당탕탕!
그때 밖이 시끄러워졌다.
“빨리 나가요!”
그러자 지영이 급해졌다.
어느새 정말 코앞까지 쫓아왔다.
그래도 일반 여관이다 보니 찾는데 좀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C구역이 워낙 대도시였으니까.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빨랐다.
인원이 워낙 많이 풀리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형우는 느긋했다.
“뭐해요?”
지영이 어이없다는 듯 형우를 쳐다봤다.
형우는 느긋하게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잠깐 이것 좀 쓸게요.”
형우는 아까 나갔을 때 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나선다지만 혹시 모를 얼굴을 노출은 피하고 싶었다.
“풉! 그게 뭐예요?”
급박한 상황임에도 웃겼는지 형우가 쓴 가면을 보고 지영은 웃음이 터졌다.
“뭐긴요. 토끼 가면이죠.”
형우의 몸은 A급 헌터가 되면서 꽤 탄탄하게 변했다.
체형 자체가 우락부락한 건 아니었지만, 슬림한 몸에 탄탄한 근육이 붙은 몸으로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앙증맞은 토끼 가면을 쓰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쾅! 쾅!
그러는 사이 그들이 있는 2층으로 누군가 올라와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영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바로 블링크로 도망쳐요!”
“저한테 계획이 있어요.”
“네?”
“잠시 귀 좀.”
급박한 상황에서 형우는 지영에게 짧게 계획을 이야기했다.
처음엔 지영의 표정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어둡긴 했으나 형우가 제안한 무언가가 그래도 실현 가능성이 있으니 지영은 일단 따르려고 했다.
그 사이 죄수들은 문 앞까지 다가왔다.
“여관 주인이 여기에 남녀가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럼 바로 부숴!”
소정을 지영으로 착각한 거였지만, 그들에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냥 여자만 확인하면 됐으니까.
쾅!
그들은 바로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손에 든 종이와 지영의 얼굴을 살피곤 웃었다.
“여깄었네, 짭새 년이.”
“뭐하냐? 빨리 저년 잡아!”
죄수들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달려왔다.
헌터수사부를 잡는다는 건 그들에게 훈장과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잡은 헌터수사부가 미녀면 더 좋은 일이었고.
그러나 그들이 SH길드 지부에서 제공 못 받은 정보가 있었다.
혹시 등급을 알면 꺼릴까 봐 SH길드 지부에선 얼굴에 대해선 몽타주를 그려줬지만, 능력에 대해선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프리징!”
촤자작!
“아악!”
"A급 헌터!“
“아악! 도망쳐!”
A급 능력 프리징이 펼쳐지자 가장 먼저 달려왔던 선두는 그대로 얼었다.
뒤에서 운 좋게 능력에 안 맞은 죄수 몇은 그걸 보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자, 이제 가볼까요.”
“후우… 네.”
형우이 움직이자 지영은 안색을 굳히며 따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방향은 도시 밖 문이 아니라 도시 안 깊숙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