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박현주 02
#
밤늦은 시간.
우리는 한남동 집에 도착했다.
“···아, 이 그림이구나!”
현주는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거실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을 유심히 쳐다봤다.
사실, 보통 가격이 아닌 작품들이다.
이런 명화들을 박물관도 아닌 집에서 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코앞에서 바라보며.
신기한 듯 쳐다보는 그녀.
현주는 잠시 후 외투를 벗었다.
나는 얼른 외투를 받았고.
옷걸이를 가져와 한쪽에 걸어뒀다.
“···이런 그림들은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혹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문가들이 조언해준 것은, 작품을 상자에 넣어 따로 보관하라고 했어요. 무산성 상자에다가. 주변 환기도 잘 돼야 하고, 어두운 곳이 좀 더 좋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거실 에어컨 및 통풍 장치 등을 가리켰다.
“다행히 여긴 환기도 잘 되고 있고,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 위치죠. 그래서 당분간 걸어두려고요. 나중엔 상자에 넣어 보관할 생각인데, 보관 장소는 그때 만들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 맞죠?”
“네.”
한편, 현주는 밝은 색채의 그 그림 앞에 계속 서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모습이 점차 나에게 무척 색다르게 느껴졌다.
과거, 미래증권 직원으로서 그녀는 이 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없이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주씨.”
“네?”
고개를 돌리는 현주.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다.
“혹시 음료수 좀 드시겠어요?”
“음료수요?”
“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음. 저는 아무거나 좋아요.”
“과일주스, 어때요?”
그러자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현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와인 같은 건 있어요?”
“네! 있습니다. 그럼 혹시 샴페인 같은 건 어떠세요? 최근에 아주 좋은 걸 사둔 게 있는데.”
“네, 저는 좋아요.”
“그럼 현주씨! 제가 응접실에서 마실 수 있게 세팅할게요.”
“저도 도울까요?”
“아뇨. 괜찮아요. 금방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냥 여기서 잠시 보고 계세요.”
그러고는 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갔고.
와인 저장고에 있는 샴페인 하나를 꺼냈다.
1995년도에 출시된 샴페인인데.
아주 대단한 명품 샴페인이다.
돔 페리뇽 화이트 골드 1995년산.
은백색으로 요란하게 빛나는 샴페인 병.
이 병에는 돔 페리뇽 마크가 선명했고.
첫눈에 봐도, 보통 샴페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사실, 돔 페리뇽 브랜드는 샴페인 쪽에서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는 17세기까지 올라간다.
17세기, 프랑스 오빌리에 지역의 수도원에서.
와인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효모의 과다 증식으로 인한 기포 생성 문제.
즉, 와인 숙성통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한 수도사는 바로 피에르 페리뇽이다.
그는 스파클링 와인, 즉 샴페인의 제조방법에 대한 기틀을 확립한 사람인데.
돔 페리뇽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상표이다.
잠시 후, 나는 튤립 모양의 크리스털 잔들과 샴페인을 응접실 탁자 위에 세팅했고.
간단한 안줏거리와 치즈 등도 빠르게 준비했다.
#
“현주씨! 현주씨!”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는 거실로 뛰어갔다.
“준비 다 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살짝 놀랐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현주가 내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살짝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있다.
무척 묘해진 상태.
그 상태로 잠시 있다가.
“현주씨, 피곤하죠?”
“···아뇨. 괜찮아요.”
탐스러운 그녀의 머리카락도 내 어깨에 닿아 있다.
“···우리 이제 응접실로 갈까요?”
“···네.”
우리는 곧이어 응접실로 들어갔다.
#
혼자 살다 보니 거의 쓰지도 않는 응접실.
응접실의 화려한 샹들리에는 모처럼 환하게 빛을 밝혔다.
주변 창문들은 커튼이 내려져 있어.
지금 이곳은 우리만의 완벽한 공간이다.
“···이쪽에 앉으세요.”
“···네.”
현주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뒤, 샴페인을 조심스럽게 오픈했다.
이때, 기포가 확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오픈했는데.
현주는 좀 놀란 눈으로 샴페인 병을 쳐다봤다.
이 샴페인이 어떤 것인지 그녀도 잘 아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샴페인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빈티지니까.
맛 자체도 특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와인 같은 거 좋아하세요?”
잠시 후, 샴페인을 튤립 모양의 크리스털 잔에 따라주자, 현주는 향을 먼저 음미한 뒤 나한테 그렇게 물었다.
“네. 간혹 즐기는 편입니다.”
“언제부터요?”
“아, 그냥 얼마 전부터요.”
사실, 회귀 전, 나는 와인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점의 문제가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난했던 노동자인 나.
그런 내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취미다.
그래서 현주는 내가 와인을 즐긴다는 말에 약간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
“···좀 놀랐어요.”
“뭐가요?”
“그림도 봤고, 거실에 있는 소품들도 보다 보니··· 많이 꼼꼼하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거실을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잘 아시는 분 같고. 소품 하나하나가 보통 귀한 게 아닌 것 같던데, 어떻게 그렇게 꾸미셨어요?”
‘역시 알아보네.’
미래그룹 출신답게 그녀의 눈썰미는 대단했다.
한남동 이 집으로 이사한 이후, 나는 틈틈이 거실 소품들을 구매했는데.
마치 회귀 전의 나로 돌아온 듯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고.
어떤 소품은 개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도 있었다.
어느덧 나는 라면, 김밥만 먹던 노동자 김한수가 아니었다.
#
“···우선, 마시죠. 샴페인 맛이 괜찮을 겁니다.”
“네.”
그리고 우리는 음미하듯 샴페인의 맛을 즐겼다.
순간, 우리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샴페인의 향에 취한 것도 있었고.
이 분위기에 취한 것도 있었다.
<132>
그로부터 시간이 쭉 흘러.
어느덧 자정이 훌쩍 지난, 밤 12시 25분.
좀 전, 경호원 류대식 부팀장이 운전하는 차가 다시 집에 도착했다.
그 전에 나는 현주가 살고 있는 성북동 집으로 그녀를 바래다줬고.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시간은 어느덧 그렇게 된 상태다.
한편, 나는 외투를 벗자마자 임범준 과장과 통화를 하면서 바로 서재로 뛰어갔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급박해서가 아니다.
파머 밀 코퍼레이션의 주가는 장중에 다시 뛰었고.
현재, 주가가 330달러 선까지 무섭게 치솟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선 콜 옵션 추가 매수가 필요 없다 보니, 특별히 작업할 것도 없다.
즉, 지금은 조용히 관망하는 게 맞는 그런 상황이었다.
#
컴퓨터를 얼른 켰고, 모니터들을 켰다.
그러고는 서둘러 각 차트를 띄웠고.
현재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봤다.
그러다가 이내 나는 약간 실망하며.
몸을 조금 뒤로 뺐다.
‘역시 드디어 박스권으로 들어갔네.’
주가가 334.49달러를 찍은 뒤.
호가창은 거대한 매도 박스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인데.
빡빡하게 들어선 매도 물량들 때문에 추가 상승을 더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들은 수익 실현을 위한 거대한 매도 물량들이 확실한데.
그런 물량들이 장내에 봇물 터지듯 나오자.
하방 압박은 더 거세어졌고.
현재, 주가 상승을 꽉 틀어쥐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
“···임 과장님! 계속 모니터링해 주시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혹시 주가가 갑자기 무너져도 절대 청산 시도를 해선 안 됩니다! 이 점은 반드시 지켜주세요. 아직 청산 시점이 아닙니다.”
다시금 전화상으로 업무 지시를 한 뒤.
나는 각종 기사들을 검색해 봤다.
여전히 파머 밀 코퍼레이션의 호재기사는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조만간 터지긴 터질 것 같은데.’
한편, 나는 좀 더 차트 흐름을 지켜보다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대폭발(?)의 시기가 아니라면.
샤워부터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생각들을 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고···.
#
잠시 후, 나는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이내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현주와 샴페인을 마신 뒤.
그때 있었던 일들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
정원을 보며 바람을 좀 쐬자는 현주의 제안.
그 제안에.
우리는 샴페인 잔을 들고서 정원으로 나갔다.
한편, 경호원들은 내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저택 바깥에서 정차·대기 중인 상태였다.
곧이어 우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잠시 바람을 쐤고.
어느 순간,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긴 시선이 이어지다가.
그러고는 우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갑자기 내가 다가섰고.
내 입술이 차가운 바람 속에 닿았다.
시린 듯, 그 찬 바람이 사르르 녹아들었고.
우리의 심장은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얼굴이 닿은 현주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나는 이때 살짝 눈을 뜨고 있다가.
약간 짓궂게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현주의 얼굴은 확 달아오른 듯.
귓불이 아주 발갛게 변한 상태였다.
#
“하하.”
나도 모르게 웃다가, 1층으로 올라갔고.
곧이어 옷을 벗은 뒤, 샤워를 시작했다.
‘와아, 시원하다.’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들이 술술 잘 풀리지?
처음엔 뭔가 쫓기는 듯, 뭔가 켕기는 듯한 느낌도 있었는데.
현주와 만난 뒤.
다시금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투자 쪽도 분위기가 무척 좋다.
파머 밀 코퍼레이션은 이제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조만간 숙명적인 하락도 터질 것이다.
‘무조건 낮출 거야. 무조건 무섭게···.’
오랜 경험 때문에 나는 그런 변화가 이미 예측된다.
수익 실현의 압박도 거셀 거고.
마지막으로 그 펀드 쪽에서 차트를 무섭게 뭉개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포지션들을 꽉 쥐고 있으니까.
그들은 숨통이 꽉꽉 막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압박에도 나는 버텨야 한다.
잡고 있는 것들을 아직 풀 때가 아니기 때문에.
더 꽉 잡고 있어야.
내 손에 있는 것들은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다.
#
‘···하아, 근데 유진씨는 어떡하지?’
잠시 후, 머리를 말리면서.
나는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호감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회귀 전, 처음 만나게 된 시점과 지금 시점이 달라서 그럴까.
지금의 박유진은 눈빛 자체가 아주 적극적이다.
회귀 전의 내가 더 적극적이었다면.
지금의 유진은 나보다 더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한숨이나 다름없는 탄성을 질렀다.
회귀 전에는 늘 애매했던 포지션.
그땐 대략 ‘여사친’ 정도의 관계만을 생각하고서 좀 더 자유로웠다면.
지금은 갑자기 여러 관계들이 좀 더 깊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내 위치가 좀 이상해졌다.
마치 내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마치 그런 상황.
그래서 나는 좀 더 깊이 고민했다.
사실, 두 여자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 매력에 따라 내 마음도 간혹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그 때문에 나는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이번 생애는 회귀 전과는 크게 다를 거라는 느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내 뇌리를 강렬하게 때렸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회귀 전에 내가 무척 사랑했고 좋아했던 박유진.
지금은 무척 가까워진 박현주.
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가야 할까.
아니면, 박현주에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잠시 후, 다시 서재로 내려갔다.
#
그런데 그로부터 몇 분 뒤.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발신자는 바로 임범준 과장이었다.
“···대표님! 지금 주가 변화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 순간, 나는 한동안 혼미했던 머릿속을 정리한 뒤.
모니터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큰 폭의 상승.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파머 밀 코퍼레이션의 주가.
그런데 그 주가가 지금 무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