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박현주 01
<130>
박지훈 상무는 현주의 표정을 계속 살폈다.
‘녀석,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요즘 어두웠던 현주의 얼굴.
얼굴이 무척 살아났다.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현주야, 알겠어?”
“응.”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쁘지?’
오늘따라 동생의 용모가 더 빛이 나고 있다.
짙은 눈썹.
선명한 아이라인.
투명한 듯한 피부.
눈동자는 새카만 보석처럼 반짝이는데.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무척 윤기가 가득하다.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 모습도 무척 잘 어울린다.
“가자. 현주야.”
두 사람은 잠시 후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 예약석에 앉았다.
점점 저물어가고 있는 하루.
그 도심의 바쁜 일상이 보이는 창가 자리다.
그런데 사실 두 사람은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상태다.
먼저 도착해 김한수 대표를 기다리려는 목적도 있고.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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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녁 먹은 뒤 그때부턴 같이 움직여. 오늘 좀 늦게 집에 와도 돼. 아버지한텐 내가 잘 말씀드릴게.”
“오빠, 대체 무슨 말이야?”
“야, 야, 넌 도대체 몇 살이야? 연인끼리 좀 오래 있는 게 대체 무슨 문젠데? 12시 전에만 집에 와. 아니지. 늦어도 1시까지. 1시까진 무조건 와야 돼. 알겠어?”
이때, 현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 잘 생각해. 김한수 대표, 인기 없겠어? 아주 젊어.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부자야. 어젯밤 SBC 특집 방송 나온 거 봤지?”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한수 대표, 인생 자체가 드라마야. 고졸이었다며? 지금 한국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고?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힘들게 살았어. 만약 김한수 대표가 공장에서 계속 일을 했다면, 어떻게 됐겠어? 사람 일이란 누구도 몰라.”
현주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박지훈 상무는 말을 이어나갔다.
“낮에 친구들한테서 다른 이야기도 좀 들었는데, SBC 장태우 PD가 갑자기 유명해진 거 알아?”
“······?”
“장태우 PD, 김한수 대표 특집 방송 기획한 사람.”
현주는 호기심을 살짝 보였다.
“기똥차게 예쁜 여자 연예인들이 김한수 대표 소개해달라고 줄을 섰다잖아. 장태우 PD한테 김 대표 연락처 달라면서···.”
현주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작년에 26살, 이제 겨우 27살. 김 대표 정말 젊어. 그런데도 인생 자체가 드라마야. 그래서 사람들이 갑자기 김한수 대표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됐다고 하잖아. 사람 됨됨이도 더 좋게 보게 된 것 같고. 앞으로 너 많이 긴장해야 돼.”
현주는 두 손에 깍지를 낀 뒤,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너만 아는 김한수가 아니다. 알겠어?”
한편, 박지훈 상무는 뭔가 생각이 많아진 동생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다가, 곧이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너도 이제 참한 아가씨만 될 게 아니야.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저번엔 의상실이나 헤어샵에 같이 갔잖아?”
현주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적극성이야. 크루즈 여행 때 수영장도 같이 갔다며? 현주야! 잘 생각해 봐! 김한수 대표 성격.”
“성격···?”
“뭐든 하자고 하면 김한수 대표는 다 하잖아?”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현주.
“정말 원만한 사람 같지 않아? 싫은 내색도 잘 안 하고. 근데 그게 왜 그러겠어? 어릴 적부터 힘들게 살았으니까. 사람 됨됨이가 달라.”
박지훈 상무는 거기까지 말한 뒤, 물을 조금 마셨다.
“봐. 신기하지 않아? 내가 정말 잘 알지? 남자는 원래 남자가 더 잘 안다니까. 그러니까 넌 내 말만 들어.”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다시 말하지만, 지금부턴 무조건 적극적으로 움직여. 괜히 삐져서 끙끙 앓고 있지 말고. 너는 이만큼 했는데, 김 대표는 뭘 해주지도 않는다? 그딴 생각! 하지도 마! 김한수 대표 정말 바빠. 하루 최대 수면 시간이 3시간이라고 하더라. 니가 먼저 해. 알겠어?”
그러나 현주는 이번에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현주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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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리고 이건 솔직히 대답해 봐.”
“뭘···?”
“김한수 대표랑 잘 된다면, 정말 결혼할 생각은 있어?”
순간, 당황한 모습의 현주.
그러나 박지훈 상무가 답을 재촉하듯 쳐다보자.
현주는 한참 뭔가를 생각하다가.
잠시 후 박지훈 상무를 쳐다보며.
대답 대신에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럼 됐어! 이제 진도 좀 나가자!”
그러면서 박지훈 상무는 벌떡 일어서더니.
현주의 옆으로 가서 앉았고.
“잘 들어.”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뭔가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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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김한수 대표 같은 사람은 무조건 정에 약해. 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할머니도 돌아가셨다며? 이 세상에 누가 있겠어? 그는 투자에 있어 아주 냉철한 사람이지만, 내가 봤을 땐 확실히 정에 약해. 그래서 넌 옆에서 무조건 도와주려고 노력해 봐. 그러다 보면···.”
그런데 바로 그때.
박지훈 상무는 흠칫하며 말을 멈췄다.
의아해하며 동생이 쳐다보자.
그는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지금 약속 시간 20분 전이지?”
현주는 바로 시간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벌써 왔네.”
의아해하며, 현주는 고개를 돌렸다.
“저기 온다. 저기···.”
그 순간, 박지훈 상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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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박 상무님, 언제 오셨어요?”
사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20분가량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지훈 상무와 현주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우선, 웃으며 악수했고.
잠시 후, 현주를 쳐다봤다.
이때, 순간적 감정은 복잡해졌는데.
아무래도 서먹서먹하겠지.
뭔가 이상하겠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무언가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듯 복잡한 상념에 잠시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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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가늘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으로 쏙 들어왔다.
현주가 갑자기 내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 귀 쪽으로 얼굴을 내민 뒤.
자신의 왼손으로 입가를 가렸고.
그러고는 내게 귓속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갑자기 와 닿는 따뜻한 입김.
나도 모르게 움찔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천사의 목소리처럼 내 귀에 들려왔다.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조금 고개를 뒤로 빼며 날 쳐다보는 현주.
그 바람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데.
그래도 어색하게 웃으며 뭔가 말하려다가.
바로 앞의 인기척에 나는 그쪽을 먼저 쳐다봤다.
아차! 박지훈 상무가 있었지.
현재, 눈이 동그래진 박지훈 상무의 모습.
그 모습이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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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우선, 자리에 앉죠. 현주씨 자리에 앉아요. 박 상무님도 앉으시죠. 우리 앉아서 이야기하죠.”
너무 놀란 박지훈 상무.
이때, 현주는 먼저 앉았다.
나는 그녀의 의자를 살짝 밀어준 뒤.
곧이어 나 역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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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흠! 저는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일어서는 박지훈 상무.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곧이어 내 옆에 앉은 현주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아, 죄송합니다. 현주씨.”
이때,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현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많이 바쁘신 거 알아요.”
“아, 그래도···.”
사실, 어쩔 수 없이 미안한 감정이 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 쉽게 괜찮다고 하자.
뭔가 이상했는데.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내가 오해했나?’
너무나도 살가운 반응.
그 때문에 모호했던 감정들은 눈 녹듯이 소멸했다.
이때, 현주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무척 반짝이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 시선이 내 두 눈을 투영하는 것 같았고.
그러자 나도 모르게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아스가르드’ 수영장의 밤 12시 축제.
젊은 남녀들이 모두 키스를 할 때.
얇은 수영복을 입은 우리는 너무 추워 서로를 꼭 껴안았는데.
그때의 스킨십과 내 심장 소리는 갑자기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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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두 사람 정말 어울리네요! 대표님, 이럴 게 아니라 이거 받으세요.”
한편, 그로부터 한참 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박지훈 상무는 뭔가를 정장 안주머니에서 꺼내 나한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의아해하며 묻자, 박지훈 상무는 웃으며 대답했다.
“작은 선물입니다.”
작은 선물?
그런데 봉투를 열어보자 그 안엔 영화 티켓 두 장이 들어있다.
“식사를 일찍 시작한 만큼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저녁 8시 관람 티켓인데, 어때요? 괜찮죠? 동생이랑 같이 가세요.”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잠시 굳었다.
왜냐하면, 이때 나도 모르게 ‘파머 밀 코퍼레이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간밤에 진행된 투자.
‘파머 밀 코퍼레이션’의 주가는 갑자기 반전했고.
종가는 282.76달러를 찍었다.
콜 옵션의 가치는 미친 듯이 뛰었는데.
오늘 시세 모니터링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이었다.
‘이걸 어떡하지?’
그러나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현주를 볼 면목이 없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8시쯤 시작해서 10시쯤 끝나는 것 같은데. 끝나면, 바로 집에 데려다주고. 그러고는 최대한 빨리 와서···.’
머릿속으로 나는 재빨리 계획을 짠 뒤.
이내 웃으며 흔쾌히 응했다.
“네. 시간은 됩니다. 이것저것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대표님. 유럽 구경도 잘 했고, 영국 IB은행과의 미팅도 모두 잘 됐습니다. 모두 김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렇듯 감사의 말들을 서로 주고받다가.
잠시 후, 우리는 디저트를 먹은 뒤 일어섰다.
“현주씨, 이제 가죠.”
한편, 박지훈 상무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곧장 영화관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131>
‘근데 좀 덥다.’
아니지.
내가 이래도 되나.
잠시 후, 영화를 보는 와중에.
나는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좀 당혹스럽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은 현주.
그녀는 팔걸이를 살짝 올린 뒤.
어깨와 머리를 나한테 기댔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현주의 맞은편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더 밀착하게 된 것 같았고.
이때 좋은 향기가 계속 나한테 밀려 들어왔다.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내 어깨와 내 팔에 닿았고.
한 번씩 귓속말을 하는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져, 내가 한 번씩 움찔움찔할 정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는 ‘아스가르드’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천장이 반쯤 열려 있는 밤하늘.
그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
그리고 무척 차가운 바람들.
그 바람 속, 그 별 무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밀착하게 되자.
그때 느꼈던 묘한 갈증들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묘한 느낌은 회귀 전, 박유진 이후 그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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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유진씨랑은 어쩌면 잘 될 뻔도 했는데···.’
회귀 전, 그때 우리는 자주 만났고.
꽤 오랜 기간 동안 밤을 같이 보낸 적도 있다.
거의 준 동거의 개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어느 순간, 유진은 멀어졌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녀는 거리감을 유지했고.
우리는 이내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여사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그 갈증.
지금 내 옆에 밀착해 있는 현주 때문에 다시금 그 갈증은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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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씨.]
[네?]
[···영화 끝나고, 집에 잠깐 놀러 가도 돼요?]
귓속말을 하는 현주.
나 역시 귓속말을 했는데.
그러나 이때 나는 좀 놀랐다.
한남동 집에 놀려오겠다고?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그래도 되나???
[너무 늦지 않을까요?]
[···그림들을 좀 보고 싶어요. 런던 경매소에서 낙찰받은···.]
아, 그게 거실에 있었지.
한편,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집에 늦게 들어가도 돼요?]
[12시 전까진··· 괜찮아요.]
그렇다면 달리 막을 방법도 없다.
할 수 없이 나는 미국증시 모니터링 시간을 좀 더 뒤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임범준 과장한테 미리 연락을 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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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는데···.
어느덧 영화는 끝났고.
우리는 곧장 영화관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제 한남동 집으로 향했는데.
유난히 청초하게 떠오른 달.
그 달이 빛나는 밤은 어느새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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