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추풍낙엽 유럽 증시 01
<99>
“Sir! 죄송합니다. 방해해서.”
“무슨 일인가요?”
조금 늦은 아침.
시차 문제도 있고.
전날 밤늦은 시간까지 수영장에 있다 보니 나는 무척 피곤했다.
그래서 평상시보다 나는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
그사이 버틀러 욘이 몇 번 찾아왔고.
그러던 중, 욘은 붉은 밀랍 인장이 찍힌 편지를 가져와 나한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저한테 온 게 맞나요?”
그러자 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 다비노 카페에서 앤디 볼턴씨께서 객실 배달 시스템을 통해 직접 부탁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발송자가 앤디 볼턴이라는 사람이라는 건데.
근데 앤디 볼턴?
내가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 문양은 대체 뭘까.
붉은 밀랍에 찍힌 문양은 바로 왕관을 쓴 사자의 문양이다.
뭔가 범상치 않아 보였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편지를 받은 뒤, 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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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넓은 거실.
이 크루즈선의 객실은 한 사람이 머물기엔 너무 크고 화려하다.
따로 서재도 있는데.
이 서재는 오리엔탈풍의 에그셸 래커(eggshell lacquer) 무늬가 매우 매혹적인 곳이다.
한편, 서재의 인터넷 라인 속도는 투자사 사무실의 인터넷 회선 속도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 뛰어난 속도 때문에 여기선 직접 투자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잠시 후,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고.
이때, 좌측 대형 창 너머로 시원한 수평선의 모습이 그림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바다 구름과 어우러진 아득한 수평선의 모습.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확 날아갈 듯한 그런 빼어난 장관이다.
근데 이 편지는 대체 뭘까.
문양도 예사롭지 않고.
편지 봉투의 재질도 일반 편지 봉투가 아니었다.
그런 편지를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 한쪽을 잡아당겼고.
똑! 하는 소리와 함께 밀랍이 깨지며 편지가 개봉되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편지지를 꺼냈는데.
부드러운 종이 질감이 느껴지는 편지지를 펼치자.
아주 우아한 영어 필기체 문자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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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해석하지?
굉장히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요즘 한국인들한텐 익숙하지 않은 글자체가 아닌가.
무척 읽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물러설 수가 없어, 두 눈에 힘을 꽉 주고서 정신없이 집중했고.
간간이 인터넷 정보를 뒤져가며,
그 편지 내용을 파악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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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그리고 한참 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룩셈부르크로 날 초대하겠다는 말인데.
가장 하단에는 ‘장(Jang)’이라고 적힌 간단한 서명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대공이 직접 쓴 편지가 아닌가.
그래서 더 놀랍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편지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어젯밤 그와 대화를 했을 땐, 다음에 좀 더 긴 대화를 하자고 했는데.
그러나 아침 10시쯤, 이런 편지를 나한테 보내온 것이다.
룩셈부르크로 날 초대한다고?
그리고 엔디 볼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잠시 후, 편지지를 편지 봉투에 넣은 뒤.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지금 몇 시지?
와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지금 나가면, 이 편지의 발송자를 만날 수 있을까.
아까 버틀러 욘은 ‘로즈 다비노 카페’에서 앤디 볼턴이 이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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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자!
그때부터 샤워도 하고.
머리도 말리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면서.
나는 잠시 잡생각도 했다.
밤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현주는 아직 자고 있을까.
박지훈 상무와 조관형 상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들은 어제 어떻게 하루를 보냈을까 등등.
호기심도 생겼고.
궁금함도 생겼다.
그렇듯 잡다한 생각들이 좀 많아졌으나.
그럼에도 나는 서둘러 하얀 와이셔츠 차림에 정장 슈트를 입은 뒤.
곧바로 객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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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선내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요란하게 들어오고 있다.
이 시각은 손님들이 거의 없는 한적한 시간대인 것 같았고.
카페 분위기도 조용함과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한편, 앤디 볼턴씨를 찾는다고 하자, 웨이터는 잠시 후 안쪽 공간으로 날 안내했는데.
그러고는 그는 손 제스처를 한 뒤 물러섰다.
이때 내 시야엔 수많은 서류들을 정신없이 살피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돋보기안경을 끼고 있고.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노인.
그 노인은 그렇게 그곳에 앉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만 하얀 상태일 뿐.
노인의 눈빛은 무척 강렬해 보인다.
한편, 내가 그쪽으로 다가서자, 그 인기척에 노인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고.
치켜뜬 눈으로 날 주시하다가.
갑자기 묘한 탄성과 함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서류 뭉치 사이에서 사진 하나를 뽑아냈는데.
그건 바로 내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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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반갑소. 나는 앤디 볼턴이라고 하오.”
앤디 볼턴?
내가 받은 그 편지를 발송한 그 사람이 아닌가.
우선, 우리는 인사를 나눴고.
이후,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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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근데 뜻밖의 제안을 받아서 그걸 어떻게 해석할지 몰라 좀 당혹스럽습니다.”
“하하.”
그러자 갑자기 웃는 앤디 볼턴.
그는 잠시 날 쳐다보다가.
돋보기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탁자 테이블 서류 뭉치 사이에서 또 다른 사진 하나를 꺼내 툭 던졌다.
대체 무슨 행동이지?
의아해하며 또 다른 사진을 쳐다보던 중.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제 당신에 대해 흥미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분이 누군지 이미 아시죠? 당신 같이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사진을 슬쩍 들었고.
그의 예리한 눈빛을 대하는 순간, 나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룩셈부르크 전임 대공(grand duke)이신···.”
그러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룩셈부르크가 어떤 나라인지는 알고 있소?”
이때,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볼턴은 서류 몇 장을 꺼내 나한테 내밀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한편, 볼턴은 자신의 돋보기안경을 다시 착용했고.
그 상태에서 그대로 눈을 치켜떴다.
“아직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잘 모르오. 내가 확인한 바로는 한국에서 뛰어난 투자가라는 것 정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누군지 잘 모를 거요. 하지만 적어도 유럽 금융에 관심이 있어 유럽으로 날아온 게 아니오? 대공 전하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테고.”
볼턴은 갑자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대공 전하께서는 평생 유럽 통합과 안정, 평화에 힘쓰신 분이시오. 수많은 자금을 유치했고, 그 금융의 힘으로 유럽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하셨소. 그 성공적인 업적 중의 하나가 바로 룩셈부르크라고 할 수 있소. 금융중심지, 이걸 만드신 분이오.”
그러나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룩셈부르크를 통한다면, 유럽 전역에 대한 투자가 아주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소. 수많은 금융투자사들이 갈수록 룩셈부르크로 모이고 있고. 그렇다면 대체 그게 어떤 초대인지 혹시 알겠소?”
잠시 후.
나는 몇 분 정도 생각을 더 이어가다가.
얼굴을 억지로 부드럽게 했다.
마치 유럽의 홍콩 같은 느낌.
그곳이 바로 룩셈부르크가 아닌가.
그런 룩셈부르크로의 초대.
“혹시, 룩셈부르크 시민권을 말하는 겁니까?”
슬그머니 팔짱도 끼며 내가 그렇게 묻자, 볼턴은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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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시민권이라?’
보통, 외국계의 평범한 일반인이 룩셈부르크 시민권을 받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꼭 시민권이 필요하나.
사실, 내가 대공 같은 사람과 인연을 만들려는 이유는 유럽 귀족사회, 상류사회로 다가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룩셈부르크 시민권이 언급되고 있었고.
그러나 그때 다시 번쩍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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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볼턴과 몇 가지 대화를 더 진행한 끝에 대화를 마쳤고.
그러고는 카페에서 나온 뒤.
곧장 내 객실로 돌아왔다.
이후, 그에게서 받은 서류들을 보면서 잠시 고민했는데.
지금 당장 시민권 획득이 아니더라도.
룩셈부르크 증시투자 시스템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근데 이런 것들은 잘 이용하면 대박이 터질 수도 있겠는데.’
나도 모르게 턱을 만지며.
깊은 생각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100>
“현주씨, 컨디션은 어때요?”
“네. 괜찮아요. 한수씬 어때요?”
“네. 저도 좋습니다.”
어제 야간 수영장 일 때문에 조금 어색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관계 진전이 생긴 것도 아니었고.
갑판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영장 일까지 이어지다 보니, 저절로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다.
“근데 박 상무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조 상무님도요?”
잠시 후 만나게 된 박지훈 상무와 조관형 상무.
그들은 무척 피곤한 표정이다.
계속 하품을 하고 있었고 계속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하! 새벽에 박 상무님과 함께 카지노에 갔다가, 그 바람에 시간이 좀 오바됐습니다.”
맞아. 여긴 카지노 홀도 있었지.
“박 상무님은 괜찮으세요?”
“먹먹한데,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옵니다.”
목소리가 축 가라앉은 듯한 박지훈 상무.
그러나 금방 표정이 다시 살아났다.
“하하, 정말 신나게 놀았어요! 조 상무님이 정말 멋지신 분이시더라고.”
그러면서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
같이 움직이다 보니 두 사람은 브로맨스가 무척 커진 듯 몹시 친해진 모습이었다.
“혹시 어디 어디 가 보셨어요?”
“저희는 카지노에 좀 있다가, 밤 10시부턴 쭉 파티장에 있었습니다. 다시 새벽엔 카지노로 넘어가서 놀다가···.”
즉, 쉴 새 없이 놀았다는 말.
하긴, 여행 첫날인데.
“그럼, 파티장은 어땠습니까?”
파티장 ‘그란데 마나 달 시엘로’.
그곳은 유명 배우, 모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분위기가 그냥 미친 듯이 좋던데요. 많이 붐비지도 않았고.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들도 몇몇 봤습니다!”
그렇게 한참 떠들다가, 박지훈 상무는 동생 현주를 힐끔 쳐다봤다.
“근데, 대표님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현주가 혹시 못되게 굴진 않던가요?”
그러자 현주는 갑자기 두 눈에 힘이 팍 들어가는 모습인데.
이때, 나는 과하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저곳 구경을 좀 했고, 현주씨 덕분에 많이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말을 마친 뒤.
나는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데 좀 중대 사안이 발생했습니다. 어쩌면 유럽 투자 시점이 확 앞당겨질 수도 있고. 내일 당장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거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유럽 투자라는 말에 눈이 커진 그들에게 손짓하며.
이제 본격적인 회의를 위해 나는 그들을 실내 소형 회의실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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