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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102화 (102/138)

100화 전설의 투자자 03

<98>

“···그래서 한국에서 왔다고?”

“네. 저희는 한국인입니다.”

“투자업을 하고 있다고 했나?”

“한국에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한수’라고?”

“네.”

“허허. 내 이름은 ‘장(Jang)’이라고 하네. 여긴 내 연인 이자벨.”

장(Jang)?

그리고 이자벨?

나는 속으로 그 이름들을 한 번 더 곱씹어봤다.

잠시 후, 노인은 노부인에게 눈짓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한텐 다른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종종 여기서 볼 것 같은데, 우리 다음엔 좀 더 긴 대화를 나누도록 하세. 어떤가?”

“네. 저희는 좋습니다!”

“그리고 자네, 나한테 볼 일이 있는 게 맞지?”

“아.”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바로 필연이 아닌가.”

필연이라?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눈치가 있다 보니, 아주 대단한 분이신 거 같아서, 대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면서도, 계속 쫓아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게 필연인가?”

“아!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허허. 허허허!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 갑자기 자네들이 이런 답답한 곳에 와 있어 내가 많이 놀랐네. 허허허!”

노인은 뭔가 나한테서 재밋거리를 본 듯 환하게 웃었고.

잠시 후, 노부부는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이제 우리 테이블에서 멀어졌고, 저 안쪽 자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까지 클럽 안의 모든 시선들이 우리한테 집중되었으나.

그 시선들이 이제 해소되었고.

그 와중에 나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리고 곧이어 박현주에게 눈짓했다.

“나가죠. 현주씨.”

그러고는 우리는 조용히 일어섰고, 클럽 밖으로 나갔다.

사실, 노인이 누군지 알아낼 단초는 조금 전에 얻었다.

장(Jang), 그리고 이자벨.

성씨도 없는 간단한 이름이지만.

그 노인이 자기 이름을 거짓으로 이야기할 것 같진 않았고.

잠깐의 대화도 한 터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야간 실내 수영장, ‘아스가르드’ 수영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

“···한수씨, 혹시 생각해 봤어요? 그분들 대체 누군지?”

잠시 후, 객실에 잠깐 들른 현주.

그녀는 수영복을 따로 챙겨서 나왔는데.

밖에서 기다렸던 나는 다시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아스가르드’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걷던 중.

현주는 갑자기 그렇게 물어봤다.

어느 순간,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노부부의 존재.

한편, 나는 그 질문을 좀 더 생각하다가.

이내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

“···장, 그리고 이자벨. 기다리면서 이것만 가지고서 검색을 좀 해 봤어요···.”

“그래서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순간, 그녀는 놀란 듯 날 쳐다봤다.

“높은 신분의 귀족 혹은 그 이상···.”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어느 노인의 사진이 선명하게 떠 있는데.

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섰다.

그리고 이내 입이 떡 벌어지고 있었다.

#

“룩셈부르크··· 대공??”

“네. 여러 번 검색했고. 아까 이야기해준 이름이 정확해서 사진들을 통해 결국 찾았습니다.”

“그럼 이분이···?”

“네. 기사를 확인해 보니까 오래전에 아들에게 양위를 한 것 같고. 이자벨이라는 분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오래된 연인인 것 같습니다.”

“근데 사진과 좀 다르긴 하네요.”

“가발 때문이죠.”

“아.”

“현주씨. 그럼, 룩셈부르크가 어떤 곳인지 아세요?”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대답을 했다.

“서유럽의 작은 나라, 대공(Grand Duke)이 통치하고 있는 입헌군주제 나라. EU(유럽연합)를 비롯하여 북대서양 조약기구 등 주요 국제기구들이 위치하고 있는 나라. 대단히 부유한 나라. 저는 이 정도만 알고 있어요.”

“근데 더 놀라운 게 있죠. 룩셈부르크는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세계 금융의 도시입니다. 룩셈부르크 GDP의 40%가량이 금융인데. 자산운용, 즉 펀드 산업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근데 저도 얼핏 들은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쪽과 교류가 별로 없다 보니···.”

“네. 교류가 별로 없긴 하죠. 하지만 유럽에서 팔리는 글로벌 펀드의 25%가량이 룩셈부르크에서 만들어진 펀드입니다. 이곳 전체 펀드 운영자산 규모도 엄청난데, 아마 2조 유로를 넘어서고 있을 겁니다.”

“와, 엄청나군요. 근데 왜 그렇게 금융이 강세죠?”

“세금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UBS 같은 글로벌금융 투자은행도 자사의 글로벌 펀드는 룩셈부르크에서 만들고 있다.

그만큼 룩셈부르크 세금이 싸기 때문.

이 세금은 펀드 자산의 최대 0.05% 수준인데.

다른 세금 비율도 우리나라와 비할 수 없이 낮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세금도피처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는데.

여하튼 그렇게 대화가 계속 이어지며.

우리는 ‘아스가르드’ 수영장에 잠시 후 도착했고.

각자 탈의실로 이동했다.

한편, 나는 샤워를 먼저 한 뒤,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서 이제 밖으로 나왔다.

#

‘와, 근데 여긴 낮에 본 것과 완전히 다르네.’

베네치아를 연상케 하는 드넓은 수영장의 모습.

낮에 봤던 그 모습은 변하지 않고 동일한데.

이 크루즈선에 이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있었나.

수많은 남녀들이 이곳 수영장에 몰려와 있었다.

이곳의 전체 조명은 야간 시간대임을 드러내듯 다소 어두운 편인데.

그러나 달빛 같은, 그리고 별빛 같은, 그런 색채의 조명들이 곳곳에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편, 그런 로맨틱한 분위기 때문인지.

수영장 안쪽, 썬베드 쪽.

여기저기서 남녀가 서로 밀착한 채 아주 진한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강렬한 것.

귀를 자극하는 강렬한 사운드.

그 음악에 몸을 맡긴 이들은 흡사 과감한 노출마저 꺼리지 않는 듯.

흥분해서 상의 탈의를 하는 여자들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빅 붐스!!”

“지저스!!”

“와-아아아아-아!!”

#

“한수씨!”

그리고 이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박현주의 목소리였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커지고 있었다.

#

그 수영복 브래지어만으론 다 가려지지 못한 그녀의 하얀 속살.

그녀가 저렇게 글래머스했나.

나는 놀란 듯 쳐다봤는데.

아주 짧고 얇은 핫팬츠에.

허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크롭탑을 입고 있는 그녀.

이미 몸매가 거의 다 드러난 모습이었다.

이때, 나는 뜨끔해졌다.

처음 대하는 그녀의 노출에 당혹스러웠기 때문.

사실, 회사원 박현주의 모습.

드레스를 입은 박현주의 모습 등.

이런 모습들에 익숙해 있다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자, 일시적으로 멈칫했던 것이다.

#

“저기로 가죠.”

“네.”

그런데 이때.

“어머!”

깜짝 놀라는 현주.

그녀는 몸을 움츠리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확! 붙었는데.

서로의 어깨와 허벅지마저 밀착됐다.

“현주씨. 다치지 않았죠?”

“···아, 네.”

“근데 저 여자들, 저렇게 빨리 달리다간 미끄러질 텐데.”

우리의 옆을 빠르게 지나간 여성들.

그 때문에 묘한(?) 일이 우리한테 발생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의 몸이 서로에게 계속 닿기 시작했다.

#

“···와아아!! 드디어 카운트 다운 시작합니다!!”

텐!!

텐···.

나인!!

나인···.

에잇!!

에잇···.

세븐!!

세븐···.

한편,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자, ‘아스가르드’ 수영장의 열기는 거의 폭발할 것 같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열기를 일부러 식히려는 듯.

자정 무렵이 되자, 드디어 야간 별빛 쇼가 시작되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천장 일부의 덮개가 열리면서.

천장 일부가 환하게 열리는 방식인데.

그 열린 공간을 통해 실제 별빛이 쏟아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함께 외치던 카운트 다운은 그렇게 끝났고.

드디어 천장 일부가 묘한 소리를 내더니, 스르륵! 좌우로 열리고 있었다.

이때, 아주 차가운 바닷바람이 확 밀려왔는데.

동시에 사방의 조명들이 일제히 꺼졌다.

그러자 그 위로 요란한 별빛들이 선명해지며 드디어 요란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척 시린 듯한.

그러나 무척 아름다운 광경.

그 광경에 잠시 놀라, 나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때 아주 당혹스러운 표정을 다시 지었다.

사방 곳곳, 여기저기.

바로 옆에서.

바로 뒤에서.

그리고 바로 앞에서.

곳곳에서 묘한(?) 소음들이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 행위 자체에 무척 노골적인 서양의 젊은 남녀들.

이 시간은 바로 이런 거였다.

밤하늘의 별빛을 보는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고.

바로 연인들의 키스 타임이었던 것.

그걸 뒤늦게 깨닫고서 당황하는 나만큼.

내 옆에 있는 박현주 역시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

“···현주씨 어떡하죠?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지금 바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캄캄하기도 하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이리저리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없죠. 근데··· 좀 추워요.”

괜히 별들을 잘 보겠다며.

수영장 중앙 자리를 차지한 건.

순진한(?) 우리의 실수였다.

지금 열린 천장 쪽에선 차가운 바닷바람이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는데.

그래서 주변 연인들은 더 격렬하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중이다.

#

“혹시 많이 추운가요?”

“···아, 조금···.”

어둠 속에서는 슬쩍 보이는 박현주의 모습.

몸을 갈수록 떨고 있는 것 같다.

하필, 머리 위에서 큰 구멍이 있다 보니 차가운 바람들이 숭숭 쏟아진다.

이때, 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잠시 후,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

“현주씨.”

내가 손을 뻗자, 그녀는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무척 차갑다.

이때, 자연스럽게 좀 더 가까워졌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

그러고는 가만히 있는데.

순간,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반면, 그녀는 조금 더 깊숙이···.

내 쪽으로 밀착하고 있었다.

#

“···볼턴! 그럼 자네가 한번 확인해 보고. 신상 정보가 확인되면 나한테 알려주게. 나는 크루즈 주인한테 전화를 해 볼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대공. 한데, 대공께선 구태여 그 젊은이들한테 관심을 가지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흠. 내가 이 나이에 무슨 특별한 관심을 가지겠나? 고작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분인데. 다만, 동양에서 젊은이들이 여기 크루즈에 왔네. 흥미롭지 않나? 귀족이나 군주라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를 이들이 날 그렇게 주목한 걸 보면, 나도 갑자기 흥미가 생기네.”

“그럼 제가 서둘러 정보를 확인해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주게. 그리고 ‘UC 칼 자산운용’의 새로운 펀드 건은 EU 평화를 위한 사안들을 바탕으로 한번 만들어 보게.”

“네. 그 일은 제가 앤드류 칼 회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허허. 이자벨. 이제 갑시다. 시간이 많이 되었구려. 볼턴, 그럼 잘 부탁하네. 우리 내일 또 보도록 하세···.”

그 시각, 아주 긴 대화를 마친 노인은 드디어 보르본 도나티앵 클럽을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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