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101화 (101/138)

99화 전설의 투자자 02

<97>

“···이쪽으로 오십시오.”

크루즈선 내에서 귀족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디오 티 베네디카’.

이 레스토랑의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는 공손하게 우리를 한쪽 자리에 안내했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이어 파란 눈의 웨이터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

와아, 근데 여긴 진짜 멋지네.

도대체 얼마나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으면 이렇게 화려할까.

두리번거리는 현주는 눈이 조금 커지는 것 같았다.

“길게 쭉 뻗어 있어 롱 갤러리(long gallery) 느낌도 나죠?”

내가 그렇게 품평하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갤러리 같지만, 좀 더 화려한 것 같아요.”

밝고 붉은 색채의 벽면.

그리고 아주 화사한 금빛 조명들.

이 조명과 벽면이 서로 어우러져 곳곳에서 무척 빛나는 듯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중세 왕들, 귀족들, 기사들의 초상화들은 우리의 눈에는 확실히 이국적인 느낌인데.

식사를 위한 테이블 역시 금빛과 붉은색들이 잘 조화가 되어있고.

주변 손님들의 옷차림 때문에.

마치 중세 시대로 우리는 타임 점프를 한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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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우리는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메인 요리를 먹기 전, 애피타이저와 와인부터 즐기게 됐는데.

“어떻습니까? 레이디?”

웨이터는 와인 테스팅을 하는 현주를 가만히 응시하며 기다렸고.

스왈링을 마친 뒤 와인 한 모금을 입에 넣고는.

가볍게 공기도 흡입한 뒤 와인을 음미한 현주.

그녀는 이내 웃으며 와인에 대한 칭찬을 간단히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며.

때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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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씨.”

“네?”

한참 뒤.

내가 갑자기 부르자, 고개를 드는 현주.

“저쪽 앞쪽 좌측. 저기 계신 분들 있죠.”

현주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아.”

이때, 가볍게 탄성을 지르는 그녀.

“아까 갑판에서 본 적이 있죠? 기억나요.”

“네. 맞아요. 근데, 제가 여기서 계속 주시하다 보니, 뭔가 좀 다른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나는 좀 더 설명했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중년 신사분과 귀부인. 저분들은 누가 봐도 대단한 귀족 같지 않아요? 근데 저 사람들마저도 좀 전에 저 노부부한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때, 현주는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금 그쪽을 쳐다봤다.

“지나가던 귀부인들은 저분들한테 무릎을 구부리며 경의를 표했고. 웨이터들도 무척 조심하고 있어요. 저 옆쪽 테이블도 보세요. 옷차림은 저희랑 비슷해도, 상당히 젊은 사람들이죠?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는 거, 보이시죠?”

슬쩍 쳐다보던 중, 현주는 이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시겠죠? 제가 봤을 땐, 저 사람들, 아주 작위가 높으신 분들이 분명합니다.”

그 말에 현주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저는 아직도 좀 이상해요.”

“네? 뭐가요?”

“유럽 귀족들은 너무 생소해서.”

하긴, 현대판 귀족이라고는 하는 재벌가 일가들도 진짜 유럽 귀족들을 보게 된다면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적 차이가 그만큼 크니까.

대단히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근데 한수씨, 이 크루즈는 어떻게 예약했어요?”

사실, 지금 상황만 본다면, 단순히 돈만 가지고선 쉽게 예약되지 않을 그런 곳이다.

“그래서 조관형 상무님께서 많이 고생했어요. 결국, 나중엔 제 영문 계좌증명도 따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현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이런 크루즈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전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아, 저도 우연히 옛날에 알게 됐는데, 그게 마침 지금 기회가 돼서··· 아, 죄송합니다. 현주씨. 잠깐만요!”

이때, 내가 갑자기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한 뒤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고는 곧장 그 노부부 쪽으로 다가섰는데.

이때 주변에선 아주 따가운 시선들이 나한테 집중되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누가 특별히 날 제지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내가 크루즈 승선 손님인 게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았다.

한편, 나는 가까이 다가갔고, 곧이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막 테이블에서 일어서던 노부부는 잠시 멈칫하며 날 쳐다봤고.

이내 두 눈엔 이채가 살짝 돋아났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아마도 내 일행들을 제외하면.

이런 내 모습은 이곳에선 좀 특이할 수밖에 없다.

좀 관심을 끌었나?

곧이어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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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의 그 친구로군요. 이자벨, 잠시만··· 허허. 젊은이, 대체 무슨 일인가?”

“아, 죄송합니다. 불쑥 튀어나와서. 혹시 저희가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디서 한번 뵌 것 같아서···.”

그러자 잠시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노인.

노인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 다른 곳이 아마 이 배의 갑판 쪽일 걸세. 아까 석양을 보지 않았나?”

“아! 맞습니다. 거기였군요.”

“이제 의문이 풀렸나?”

“네. 감사합니다. 근데 저보다 눈썰미가 대단하시군요. 저희가 거기 있던 걸 다 기억하시는 걸 보면···.”

그러면서 슬쩍 현주 쪽을 뒤돌아봤는데.

어라?

영리한 현주는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노부인의 입가엔 갑자기 미소가 생겨났고.

노부인은 현주의 인사에 반응하며 머리를 살짝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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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식사는 다 하셨습니까?”

“했네. 다 했어. 나이가 들면 많이 먹을 수가 없어, 이제 그만 일어나려고. 근데, 근래에 내가 그대들을 본 적이 없는데?”

“저흰 오늘 승선했습니다.”

“하아, 그렇군. 아주 좋은 선택이네.”

이때 노부인도 입을 열었다.

“혹시 두 사람은 부부인가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부부가 아닙니다.”

“약혼?”

“그것도 아닙니다.”

이때, 나는 현주를 쳐다봤고, 현주는 날 쳐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서로 지었다.

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더 만발해지더니 노부인을 쳐다봤다.

“허허. 이자벨. 내 예측이 맞지 않나. 참 좋은 시절이지.”

그러자 노부인도 미소를 짓다가, 곧이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 반가웠습니다. 근데 우리는 이제 가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선을 긋는 노부인.

이때 자신들을 구태여 소개하지 않았고.

우리한테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부부는 어느새 서로 조용히 붙었고.

아주 가볍게 팔짱을 끼더니 천천히 레스토랑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경호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주변을 에워쌌고.

우리는 저절로 뒤로 조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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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한수씨, 대체 누구일까요?”

잠시 후, 테이블에 메인 요리가 나왔는데.

하지만, 메인 요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노부부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리는 온통 머릿속이 혼란해진 상태였다.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위가 있고.

완전히 다른 품격이 느껴지는 듯한 그런 사람들.

한편, 웨이터들을 차례로 부른 뒤.

그 노부부에 대해 물어봤으나.

웨이터들은 하나 같이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만,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특별한 건 없고, 손님이라서 저희가 예의를 갖춘 것뿐인데···.”

“아뇨. 죄송합니다.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적어도 하루 한 번 정도는 꼭 오시는데···.”

“아뇨. 잘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른다는 말로 하나 같이 내 질문을 회피했는데.

‘그래서 더 수상하단 말이야.’

앞서 승선 때의 일이다.

젊은 스페인 귀족의 이름.

카를 데 하이덴 마리찰라르 백작.

그 이름을 술술 읊었던 크루즈 승무원들.

그때와 비교한다면, 이건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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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씨, 우리 식사하고 좀 쉬었다가, 보르본 도나티앵 클럽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아스가르드 수영장은 자정 무렵에 가면 될 것 같고. 혹시 어떠세요?”

그러자 박현주는 잠시 생각했다.

“개장 시각이 밤 8시라고 했죠?”

“네. 현주씨.”

“그럼, 잠깐 객실에 들러 옷부터 갈아입고, 클럽으로 가죠. 거긴 드레스 코드가 없다고 했어요.”

“아, 그럼 그게 좋겠네요. 그렇게 하죠.”

“우리 이제 일어날까요?”

그 말에 나는 먼저 일어섰고.

이때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듯.

곧이어 일어서는 현주의 손을 나는 살짝 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엔 선명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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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어느덧 밤 8시.

고상한 귀족 클럽, 보르본 도나티앵.

이 클럽은 딱 8시에 맞춰 문이 열렸는데.

이때, 몇몇 사람들은 일찍부터 문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개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클럽 내부의 모습.

그런데 나는 놀랍기도 하지만,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클럽 자체가 마치 오래된 수도원 도서관 같은 분위기이기 때문.

오래된 장서(藏書)의 냄새가 진동하는 듯한.

딱 그런 느낌이 가득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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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이쪽이 괜찮으신가요?”

잠시 후, 우리는 웨이터가 지정해준 테이블로 갔고.

현주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그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편, 다시 의상이 바뀐 현주.

좀 더 무난하면서도 간편한 드레스 차림인 그녀는 탐스러운 머리를 한쪽으로 모은 뒤 조용히 착석했고.

우리는 차와 쿠키 등을 시켰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는 사이.

나이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한편, 그들은 낯선 우리를 힐끔 쳐다보긴 했으나.

그저 작은 호기심만 보일 뿐.

누구도 우리한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각자 모여 앉았고.

각 테이블에서 수다를 떨며 서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한참 흘러갔는데···.

이제 점점 지루해지던 그때.

클럽 보르본 도나티앵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고는 누군가가 천천히 클럽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던 나는 갑자기 눈이 커졌다.

그런 내 모습에 현주도 고개를 돌렸다.

“어, 저분은···?”

현재,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걸어오고 있는 노인.

그리고 차분하게 노인과 보폭을 맞추고 있는 노부인.

그런데 이때, 아주 놀라운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났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그들이 하나둘 일어서더니.

그들 노부부에게 하나같이 경의를 표하지 않는가.

그사이, 그들은 우리 테이블과 가까운 곳까지 왔는데.

나는 현주와 함께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때, 마치 우연처럼 다시 노인과 눈이 마주쳤고.

노인은 즉시 날 알아본 듯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편, 노부인도 우리 쪽을 쳐다보던 중, 표정이 조금 변했는데.

눈앞의 노인은 묘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이제 내 쪽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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