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99화 (99/138)

97화 베르겐

<95>

“자, 자, 다 모이셨죠?”

좌우를 살폈다.

두꺼운 외투, 그리고 정장 차림의 조관형 상무와 박지훈 상무.

그리고 털모자가 달린 화사한 외투를 입고 있는 박현주.

기내에 싣고 갈 몇몇 캐리어들을 끌고 있는 경호원들은 각각 격식에 맞춰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들인데.

그들의 눈빛은 전보다 더 예리해 보였다.

‘저기 강민정도 있네.’

머리를 뒤로 묶고 총기 가득한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녀.

단순 특수부대 출신인 것을 넘어서, 해외 PMC 경험까지 갖고 있는 그녀.

어느덧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되는 강민정은 지난 10여 년간 남들이 겪지 못한 경험들을 두루 겪은 것 같았다.

특히,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대표님?”

한편, 내가 너무 뚫어지라 쳐다봤을까.

내 좌측에 있던 그녀.

작은 목소리로 내 그런 시선을 주지시켰고.

나는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 상무님, 박 상무님과 인사를 하셨죠?”

“하하. 좀 전에 했습니다. 명함도 주고받았고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박 상무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행에 이렇게 동참해 주셔서 깊이 감사합니다.”

시원하게 머리를 뒤로 넘긴 박지훈 상무.

그는 잘 생긴 용모에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키도 크고 늘씬한 체격인데.

좋은 가문 출신이면서 눈매 역시 아주 서글서글했다.

“하하! 제가 더 감사합니다. 대표님과 동행하며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일전에 도움을 주신 DLS 설계 건은 홍콩 투자은행에 계획안을 전달했습니다. 현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하아! 바짝 쪼는 듯한 느낌입니다. 대표님! 근데 이제 시간도 다 된 것 같은데, 우리 이제 탑승하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비행기 탑승과 관련하여 안내 방송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We are now inviting passengers with small children and any passengers requiring special assistance···.”

곧이어 좌석별 입장도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이때 사람들한테 눈짓했다.

사실, 여행 전, 모두가 너무 바쁘다 보니.

거의 시간에 딱 맞춰 공항에 도착했고.

서둘러 출국 수속을 마친 뒤 공항 라운지에 들를 시간도 없이 약속 장소인 이곳 게이트에서 서로 만나게 된 상태다.

다만, 간단히 인사를 마친 우리는 이제 같이 움직였다.

#

“현주씨! 들어가시죠.”

내가 웃으며 손짓하자 박현주는 입가에 미소를 보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늘따라 박현주의 분위기가 좀 색다르지 않은가.

평소의 단정한 회사원 분위기에서 벗어나.

겨울임에도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긴 부츠를 신고 있는 그녀는 얼굴 피부가 마치 백옥같이 빛났다.

두 눈은 투명할 정도로 맑았고.

유난히 빛나는 듯한 모습인데.

그 밝은 표정 때문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생길 정도다.

한편, 우리는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추며 걸어갔고.

이때, 박지훈 상무와 조관형 상무는 흠칫하더니 서로 알아서 앞장서서 걸어갔다.

“손님, 여권과 티켓은 같이···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탑승 게이트 앞, 항공사 직원의 확인을 마친 뒤.

우리는 비행기 연결 통로를 통해 차례로 걸어갔다.

마침내 우리가 도착한 곳은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 있는 비행기 객실.

그런데 기존 예약들 때문에 모든 좌석을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맞출 수가 없었고.

여섯 좌석은 퍼스트 클래스.

4개의 좌석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끊은 상태다.

할 수 없이 경호원 4명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넘어갔다.

#

“와, 여긴 처음인데.”

잠시 후, 작은 탄성이 김성태 팀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김성태 팀장의 옆에 서 있는 강민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조용히 좌석에 착석했고.

한편, 나는 그런 그들을 한번 쳐다본 뒤, 내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흠. 나쁘진 않네.’

눈앞으로 큰 스크린이 있고.

좌석 자체를 침대처럼 쓸 수가 있다.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과 비교한다면, 더없이 넓고 쾌적한 곳이다.

그리고 내 옆 공간에 조관형 변호사가 앉았는데.

바로 건너편 쪽에는 박지훈 상무, 박현주가 각각 앉았다.

그리고 내 좌측 뒤쪽에 김성태 팀장, 강민정이 각각 앉았다.

#

“흠. 흠. 대표님, 근데 죄송합니다.”

“네? 무슨···?”

“제가 실수했습니다.”

“실수라뇨?”

“검사 출신들이 이럴 땐 눈치가 없습니다. 자리 지정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자.

조관형 상무는 인상을 쓰더니 한쪽을 눈짓했다.

그는 박현주 쪽을 눈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전 괜찮습니다.”

“으으. 괜찮긴요?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조관형 상무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마 아까 비행기 탑승 때, 박현주와 내가 나란히 걷던 모습을 봤기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 조관형 변호사는 대강화학 일 외에도 여러 법무적인 일들까지 다 맡다 보니 무척 바빴고.

내가 박현주와 함께 이야기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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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대표님. 저기 좀 보세요. 두 분은 남매라서 그런지 역시 말이 없네요.”

힐끔 쳐다본 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그렇진 않을 걸요. 박 상무님 성격이 얼마나 활발한데요. 현주씨도 성격이 좋고···.”

그러나 그 말을 나는 다 끝내지 못하고 곧 입을 닫았다.

박지훈 상무와 박현주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슬쩍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흠칫하며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역시 좌석 지정이 잘못되었나 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뭘 어쩌겠나.

그래서 그냥 생각을 접었고.

나는 이제 자세를 좀 더 편히 했다.

#

와아, 근데 왜 이렇게 좋지?

이런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설치 비용 자체가 수천만 원에서부터 수억 원에 달한다고 하더니.

좌석 자체가 확실히 느낌이 좋다.

여행이 무척 편안해질 것만 같은데.

사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런 좌석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사치지만.

그럼에도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버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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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좋아.

그럼, 이제 좀 잘까?

피곤하기도 했고.

지난밤, 나는 밤새 회사 일들을 한 터라.

그리고 인수합병 일들까지 크게 신경을 쓰다 보니, 이제 피로가 스르륵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피로함 자체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 같았다.

바쁜 연말.

그 바쁜 연말의 일들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상황.

그 상황 때문에 그들 모두가 지금 무척 피곤한 것 같았다.

비행기 이륙 직후 나는 잠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조금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좌우에선 작은 호흡 소리 외에도 코 고는 소리들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다들 피곤한 것이다.

다만, 오로지 강민정씨만 또렷한 눈으로 자신의 앞쪽 스크린을 보고 있었고.

그녀는 한 번씩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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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조금만 더 자자.

우리의 첫 목적지는 바로 핀란드 헬싱키.

앞으로 긴 시간을 더 날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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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도요···.”

“저도요.”

“저도 라면 주세요.”

“저도 라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한참 뒤.

잠에서 깨어난 뒤 슬쩍 배고픔을 느끼던 중.

나는 이내 웃음이 와르르 밀려왔다.

퍼스트 클래스 좌석 가격이 얼만데, 스튜어디스가 라면을 슬쩍 언급하자 다들 라면을 먹겠다고 난리다.

그런데 잠시 후.

담당 승무원이 이제 내 의향을 묻자, 나는 흠칫하며 생각하다가.

나 역시 피식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저도 라면요.”

“네. 그럼 정성껏 준비해서 가져오겠습니다.”

사실, 고시원에서 죽도록 먹었던 라면인데.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희한하지 않은가.

다들 라면을 먹겠다고 하니.

풀코스 기내식을 먹기 전, 나도 라면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근데, 확실히 여기 누워있으니까 라면이 당기긴 하네.’

라면이라면 질색해야 할 나마저 이런 모습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퍼스트 클래스 = 라면’ 이라는 상투성에서 벗어나.

지금은 그저 끌리는 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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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너무 맛있겠다.”

잠시 후, 젓가락을 손에 쥐고서 탄성을 지르는 조관형 상무.

나 역시 잠시 놀란 듯 김이 살짝 피어오르는 라면을 쳐다봤다.

물론, 평범한 라면이다.

송송 썰어 넣은 대파 조각들.

그 조각들이 위에 올려져 있고.

노란색 라면의 색채는 좀 자극적이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라면 국물과 풀어진 달걀은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인데.

휴우.

가볍게 한번 바람을 불며.

라면 면발을 식힌 뒤.

그때부터 나는 정신없이 라면을 입에 넣었고.

면발이 끊어지지 않게 쭉 빨아올렸다.

곧이어 MSG가 가득한 국물을 연거푸 먹고 나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고작 라면인데.

내가 라면 예찬론자도 아닌데.

고시원에선 어쩔 수 없이 돈을 모으려고 먹었던 라면.

근데 여기선 왜 이렇게 맛이 있을까.

분위기에 전염된 느낌도 있었고.

한편으론 라면의 파괴력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는 슬쩍 쳐다보니.

우리는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에 탄 게 아니라.

마치 분식집에 온 사람들처럼.

박현주, 강민정마저 신나게 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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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ies and gentlemen, we are approaching Helsinki-Vantaa international airport··· Please return your seat and tray table to the upright position···.”

한편, 그로부터 한참 날아간 비행기는 우리나라 12월 날씨와 다름없는 핀란드 헬싱키에 마침내 도착했는데.

곧이어 우리는 연결편을 통해 이제 노르웨이 베르겐을 향해 출발했다.

<96>

“우와아! 여긴 동화 나라 같네요.”

조관형 상무.

그는 무척 놀란 듯 좌우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무척 이쁜 항구 도시인 베르겐.

북유럽 최고의 항구 도시이며 상업지구라고 하는 이 베르겐은 유럽 특유의 독특하고 이쁜 건물들이 가득한 곳인데.

우리는 어느새 베르겐에 도착한 뒤.

그 베르겐 도심을 가로지른 끝에 이제 북유럽 바다가 보이는 항구를 바라보게 되었다.

무척 신선한 공기에 물결이 넘실거리는 듯한 이곳 항구.

이 항구의 협만은 빙하로 인해 형성된 좁고 깊은 지형으로써.

이런 피오르 지형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피오르 지형이기도 했다.

“혹시 유럽 쪽 건물들이 왜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아시는 분 계세요?”

항구 주변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살펴보던 내가 그렇게 묻자, 박현주는 바로 대답했다.

“쓸 수 있는 땅이 부족해서 서로 붙인 거라고 들었어요.”

“네. 잘 아시네요. 이런 곳은 지형이 무척 험해서 그럴 수밖에 없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무척 아름다운 모습인데.

일종의 색채적 조화 때문인 것 같았다.

깨끗한 하얀색 벽면.

그리고 옅은 주홍빛 지붕들.

그런 색채가 사방에 어우러져 있다 보니.

동화책 속의 나라는 저절로 뇌리에 떠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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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대기실에 조금 쉬다가.

어느덧 시간에 맞춰 초호화 크루즈 승선을 위한 대기 라인에 잠시 줄을 섰고.

그러고는 곧이어 승선이 허용되었다.

사실, 이번 크루즈 여행은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추가적인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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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박지훈 상무가 슬그머니 다가와 사정을 물어봤다.

“대표님, 저 크루즈, 하루 숙박료가 룸 하나당 3만 달러라고 하셨죠?”

“네.”

“호텔 최상급 룸보다 더 비싸군요.”

“대신에 이런 스케쥴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약자가 꽉 차 있지 않아, 저희가 중간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요. 조관형 상무님이 이 예약 때문에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아, 그럼, 조 상무님한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근데 더 중요한 게, 저 안에 승선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박지훈 상무는 호기심이 더 커졌다.

“조 상무님이 슬쩍 알아봤는데, 아랍 왕족들 외에도 유럽 귀족들, 연말 휴가를 즐기는 사업가들, 영화배우, 유명 모델들,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 언급에 박지훈 상무는 뭔가 조금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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