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눈 내리는 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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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앉으세요.”
“네. 회장님.”
인사를 마친 뒤, 우아한 의자에 앉았다.
‘금빛 색채에 와! 조명도 밝고, 정말 화려하구나.’
영빈관으로 쓰이고 있는 미래원은 그 겉모습이 비록 고풍스러운 한옥 형태지만.
내부는 유럽 대귀족의 저택 혹은 프랑스 궁궐 같은 화려함이 가득했다.
그 화려함 속에 작은 인간이 갇힌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문득 든다.
“핫핫. 너무 겉치레가 심하죠?”
백발이 성성한 박명식 회장.
그는 노쇠해진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의 눈 밑엔 깊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데.
홀쭉해진 볼과 주름진 이마 등등.
비록 대단한 금융그룹을 일궈낸 성공한 기업가이지만 그럼에도 거친 세월의 여파를 비껴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이미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인 박명식 회장.
“아, 아닙니다. 저는 미래그룹을 존중합니다.”
아무리 이곳이 화려하다고 해도, 미래그룹의 판단일 뿐.
제3 자인 내가 미래원의 화려함을 꼬집을 필요는 없다.
“핫핫. 투자를 하다 보니, 외국인 손님들이 참 많습니다. 이곳 자체가 일종의 상술이죠. 투자를 유치하거나 투자 도움을 받기 위해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처음 이곳이 만들어지고 나서 너무 밋밋해서 성가셨는데, 이젠 너무 화려해서 거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외국인 손님들은 다들 너무 좋아하더군요. 여기가 오래전에 사라진 대한제국의 궁궐 같다면서요. 대한제국이 뭔지도 모르면서. 핫핫.”
잠시 후,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그런데 프랑스식 정찬인 듯 음식이 조금 조금씩 나왔는데.
그러나 음식을 담고 있는 그릇들 역시 하나 같이 예술작품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전통 도자기와 각종 그릇들을 모방한 듯하면서도.
더 화려하고 더 우아한 모습들이다.
내가 신기해서 쳐다보는 모습을 박명식 회장은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쳐다봤다.
“그럼, 식사를 시작하죠.”
그러고는 드디어 점심 식사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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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를 바라보는 뛰어난 식견. 그 통찰력에 대해선 여러 경로를 통해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 회장님, 근데 저는 운이 좀 좋았습니다.”
“으음. 투자에서 운은 없다고 봅니다. 한 번의 운에 기고만장해졌다가 다른 투자들을 모두 날리는 이들을 저는 수도 없이 봤습니다.”
한국 증권계의 역사를 같이한 박명식 회장.
그는 그렇듯 자신의 투자 철학을 간간이 곁들였는데.
“···그리고 대표님의 손이 유독 굵직굵직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형 매수 행위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지난 코스피 콜 옵션 때도 그랬고.
지난 철광석 투자 때도 그랬다.
위험한 선물옵션 시장에서.
나는 장내에 나온 계약들을 무진장 쓸어 담았다.
완벽한 헷지 전략에서가 아니라.
일방통행이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거나 다름없는.
그런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워런 버핏은 투자 대상을 발굴하면 10만 주, 20만 주 단위가 아니라 천만 주, 6천만 주 단위까지 대량 매수를 한다고 합니다. 회장님. 근데 저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물 주식이 아닌 선물옵션 쪽은 그만한 효과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
박명식 회장은 또 말했다.
“그리고 워런은 자신이 매수를 하면서도 주가를 끌어올리고 그 종목의 악재도 훨훨 털어 버리는 무서운 투자자가 아닌가요? 김 대표님도 이제 그런 느낌들이 좀 듭니다.”
“아, 아닙니다. 회장님! 저는 절대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내 힘으로 어느 종목의 ‘악재’를 털어낼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주식 투자와 선물옵션 투자 방식엔 확실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 점들도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투자와 관련된 각종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식사 중에 계속 이어갔는데.
한편, 잠시 후, 박명식 회장은 이제 개인적인 질문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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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론, 대학 입학도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근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박명식 회장은 나에 대해 정말 많이 아는 것 같다.
한편, 나는 그 대답을 하기 전, 조금 자세를 달리했다.
“회장님. 근데 말을 좀 편히 하셔도 됩니다. 투자계에서 보면, 제가 너무 까마득한 후배 입장입니다. 박지훈 상무님조차 제 선배뻘입니다.”
“아, 박지훈 상무보다 연배가 어리다고 했죠?”
“네.”
박현주의 오빠, 박지훈 상무는 올해 33살.
나보다 나이가 많다.
“핫핫.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김 대표, 고맙네.”
그러면서 박명식 회장의 눈꼬리가 주르르 길어졌는데.
그는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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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학을 준비한다고?”
“네. 내년 3월부터 대학을 다닐 생각입니다.”
“늦은 나이에 대단한 의지로군. 그럼, 어느 대학을···?”
이때, 박명식 회장의 두 눈이 약간 날카로워졌는데.
나는 모른 척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국대 경영학과···. 늦었지만, 여길 다닐 생각입니다. 다행히 수능 성적은 그 정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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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러갔고···.
미래원 본관.
그룹의전비서실.
그곳의 문이 어느 순간 갑자기 벌컥 열렸다.
이때, 박명식 회장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깜짝 놀란 직원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 회장님!”
이때, 후다닥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의전비서들.
박명식 회장을 지척에서 모시는 비서들인데.
뒤늦게 나타난 그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한편, 사무실 일부 직원들은 재빨리 뛰어가 김상권 실장을 불러왔고.
김상권 비서실장은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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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십니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김상권 실장은 다급히 물었고.
그 와중에 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한 의전 비서들을 째려보기도 했다.
한편, 박명식 회장!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김상권 실장을 노려보다가.
곧이어 쩌렁쩌렁한 고함을 질렀다.
“김 실장! 비서실 전체 다 갈아엎어!”
당황한 김상권 실장.
“따라와!!”
더 당황한 김상권 실장.
이때, 휙! 몸을 돌린 박명식 회장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서 누구보다도 빨리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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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규 사장 부르고, 김인범도 불러! 최수경 전무도 부르고!”
“네. 회장님.”
“그리고 승남이와 현주 엄마는 따로 불러!”
“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미래원 본관 중역회의실.
이곳 중역회의실은 오로지 미래증권 관계자들만 쓰는 회의 공간인데.
이곳은 다른 미래원 공간들과 달리 아주 투박한 곳이다.
긴 테이블 하나에 간단한 의자뿐.
벽면도 그저 하얀색 벽면일 뿐이다.
아주 밋밋한 모습.
특별한 인테리어가 적용되지 않아, 다소 삭막한 모습이다.
다만, 한쪽에 세워져 있는 미래그룹의 그룹 깃발만은 다소 화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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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근데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신지?”
아직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김상권 실장.
박명식 회장은 현재 고령의 나이를 잠시 잊은 듯했다.
요근래에 저렇게 강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그런데 문제는 저런 변화가 나타날 때면, 그룹이 발칵 뒤집히곤 했다.
차남 박승규 사장이 갑자기 미래증권 사장에 취임할 때도 그랬고.
박현주, 박지훈 상무의 부친이자, 미래증권 사장이었던 장남 박승남 고문이 사장 직위에서 해제되어 고문으로 전락할 때도.
박명식 회장은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때로는 무척 냉정하면서도.
때로는 무척 단호한 박명식 회장.
한편, 그의 우측 이마 쪽에선 선명한 핏줄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김 실장!!”
“네!”
“넌 대체 뭣 하는 놈이야?”
순간, 시선이 흔들리며 얼굴이 잔뜩 굳어지는 김상권 실장.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해. 나도 실수를 하니까. 한데, 승규(박승규 사장)는 이번에 큰 실수를 했어.”
김상권 실장은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하찮은 것들에 정신이 팔려 천억 원짜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게 아니라, 미래의 움직임에 더 주목을 했어야지.”
미래의 움직임?
김상권 실장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그 단어가 뭘 말하는지 모호하기 때문.
그게 미래그룹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저 김 대표는 유럽을 간다고 하더군.”
“······!?”
“저 김 대표는 한국대 경영학과에 다닐 거라고 하더군.”
“······!?”
“철광석 같은 것들은 새로운 금융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하더군.”
한편, 김상권 실장은 다른 대목에서 놀랐다.
“회장님! 한국대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한국대 경영학과! 김상권 실장! 이제 알겠나?”
“아, 네. 회장님.”
“내가 나이가 들어, 잠시 머리가 멍청해졌지만. 더 늦기 전에 바꾸자! 승남이한텐 바로 연락해!! 내일부턴 회사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네! 회장님.”
그러나 김상권 실장은 참지를 못하고 이유를 물어봤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질문이 있습니다.”
박명식 회장은 김상권 실장을 쳐다봤다.
“···혹시 김한수 대표 때문입니까?”
그러자 박명식 회장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쩌렁쩌렁한 고함을 질렀다.
“쓸모없는 놈!! 승규(박승규 사장) 그놈도 저러겠지! 쯧쯧쯧!”
박명식 회장의 짜증.
그 짜증은 계속 그렇게 메아리쳤는데.
그로부터 20분 뒤.
긴급 호출을 받은 미래증권 임원들은 속속 미래원 중역회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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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눈이 좀 많이 내리네요.”
뒷좌석에 앉은 뒤.
잠시 후,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석 쪽을 쳐다봤다.
운전석의 김성태 팀장.
그리고 조수석의 강민정 경호원.
두 사람은 이때 백미러를 통해 혹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본 뒤, 차례로 대답했다.
“저번 출근길 사태가 있고 나서 스노우 타이어로 교체해 뒀습니다. 눈길 운전엔 괜찮을 겁니다.”
“대표님! 인근 전철역을 통해 이동하는 방법도 확인해 뒀습니다. 그리고 대체 수단 쪽도 확인 중에 있습니다.”
각기 다른 대답이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근데 식사들은 하셨어요?”
“네. 수행진 식당이 있어, 거기서 식사했습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최근에 먹은 것들 중에서 가장 맛있었습니다.”
곧이어 강민정 경호원도 대답했다.
“랍스터 요리, 스테이크 요리 등이 나왔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후식도 엄청 맛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미래그룹 영빈관다운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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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와아, 근데 눈들은 왜 이렇게 많이 쏟아질까.
정말 눈들이 많이 내리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
펑펑 쏟아진다는 느낌인데.
사실, 오늘 일기예보와 다르게, 눈이 좀 더 일찍 쏟아진 것 같다.
이미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고.
도로 진입 이후, 차량 속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마치 눈앞의 도로는 하얀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 차량은 거북이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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