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93화 (93/138)

91화 푹풍이 부는 곳

<89>

“이용훈 전무님.”

“네, 말씀하십시오.”

“페이퍼 컴퍼니 쪽에 대해서도 좀 잘 아시죠?”

“아, 대표님도 자금을 좀 분산시킬 생각이십니까?”

“그것보단 다른 목적입니다.”

“그럼, 국내 아니면 해외? 혹은 조세회피처 쪽에 설립하실 겁니까?”

페이퍼 컴퍼니는 국내에서도 만들 수 있다.

다만, 의미가 없다.

“당연히 조세회피처를 통해 설립해야죠.”

“자칫 국세청이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대표님 같은 덩치는 국세청이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혹시 방법이 있습니까?”

“현지인을 활용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현지인을 활용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방법이 좀 있는데. 그러니까···.”

이용훈 변호사는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아주 낮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유심히 들었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뒤.

나는 내 의견을 다시 전달했다.

“그 방법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외로 이체할 자금은 대략 만 달러 정도, 그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만 달러? 그 정도는 개인도 송금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까?”

“그 정도면 국세청은 영원히 관심이 없겠죠?”

“아, 당연히 없겠죠. 그럼, 혹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방법은···.”

“네. 그 방법은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현재 이태리에 체류 중인 오스틴 강한테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업무 조율을 마친 뒤, 나는 다른 이야기들도 꺼냈다.

“그리고 시행사 일들을 많이 하셨으니까 아마 이 전무님께서는 더 잘 아시겠지만, 돈이 움직이는 곳이 늘 전쟁터가 아닙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파악하려고 노력하면서.

이용훈 전무는 곧이어 대답을 시작했다.

“맞습니다. 투자는 내 돈 빼앗기는 게 아니라 남의 돈을 먹는 일입니다.”

“혹시 지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미국 정부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이 전무님은 기억하십니까?”

“아, 미국에서요? 그때 신문을 많이 봤었는데.”

“그럼 조금 설명해 드릴게요. 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구제금융’ 정책이라는 대형 금융 지원책을 입안했습니다.”

“기억납니다. 규모가 엄청났던 것 같은데.”

“대략 7천억 달러 정도 됩니다. 천문학적인 수준의 구제금융이죠. 그리고 그 돈을 금융권에 모조리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미국 금융권은 뭘 했는지 아십니까?”

“음, 글쎄요.”

“막대한 임원 배당금 지급, 직원 인센티브 지급, 건물 개조·보수 등, 잡다한 일 쪽에도 그 돈을 썼습니다. 세계 경제는 파탄이 났는데, 구제금융 덕분에 살아난 그들은 여전히 돈 잔치를 벌였죠.”

“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바로 알겠습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바로 그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말은 죽지 않는다. 거대한 금융그룹은 잘 죽지 않습니다.”

노련하고 영리한 이용훈 전무.

이때,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알아차린 것 같았다.

사실, 좀 전의 페이퍼 컴퍼니 건도 홍콩인 마빈 칭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고.

이번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저희도 힘을 가져야 합니다. 거의 사라지지 않을 그런 강력한 힘 말입니다···.”

#

그러니까 핵무기 하나 만들자.

금융 핵무기.

압도적 자금을 바탕으로.

뭐든 쓸어 버릴 수 있는 그런 무기.

마빈 칭 때문에 나한테 그런 목표가 생겼는데.

이후, 나는 다소 흥분한 듯.

회사 업무에 미친 듯이 몰두했다.

그러다가 꽤 시간이 경과된 뒤.

문득 스마트폰을 만졌는데.

새로 들어온 문자메시지를 발견하고는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

[선생님, 혹시 차고 디자인안은 보셨어요?ㅠ 죄송합니다ㅠ]

이른 아침, 눈길에서 잠시 만났던 유진 인테리어 박유진 사장.

그녀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아차! 연락 주기로 했었는데.

나는 즉시 문자를 보냈다.

[유진씨, 최대한 빨리 작업 시작해 주세요. 제가 아침에 정문 열쇠 맡길게요]

그러자 바로 문자가 다시 왔다.

[감사합니다! 아니면 제가 아침 7시에 들를까요? 몇 가지 확인할 것도 있는데···.]

[네. 7시에 뵙죠]

그렇게 연락을 마친 뒤.

나는 큰 창가 쪽으로 다가가, 가만히 바깥 정경을 한번 쳐다봤다.

밤새 펑펑 내렸던 눈들.

군데군데 하얀 흔적들이 조금 남아 있을 뿐.

대부분 정리가 된 상태다.

다만, 날씨가 몹시 추운 듯.

행인들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여기저기 오가고 있다.

‘그럼, 그다음으로 그 휴가 건들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우선, 유럽 출장 개념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잠시 후, 나는 그 생각에 푹 빠져들었는데.

크리스마스-연말 휴가 관련된 일이며.

이것을 업무 출장으로 진행한다면 확실히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이 경비는 철광석 풋 옵션 청산 이익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그 시세 차익은 아마 단순 여행·쇼핑 비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돈이 될 텐데.

문제는 이 출장 겸 휴가를 나 혼자서 갈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을 데려갈 것인가.

그것도 결정해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즉시 미래그룹 그룹비서실 김상권 실장한테 먼저 전화했다.

#

그리고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면서.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는 시각.

이번에는 박현주한테 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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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씨.”

“네?”

“한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지금 통화할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그러고는 잠시 뒤.

박현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 가능해요. 무슨 일이세요?”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시면,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같이 저녁도 드시면서 이야길 나누고 싶습니다. 시간이 안 되신다면, 제가 내일 오전 중으로 미래증권으로 갈게요. 그때 잠시 뵙죠.”

그러자 갑자기 대답 없이 조용해졌는데.

뭔가 다른 일들이 있나 싶어 나는 다른 이야기도 꺼냈다.

“아, 너무 급작스럽게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 중이라도 잠깐이면 괜찮으니까 그때 뵙죠.”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저는 시간 괜찮아요.”

“괜찮으시다고요?”

“네.”

“아, 다행이다.”

“대표님 일이라면 괜찮습니다. 전무님 지시도 계셨고, 부사장님 지시도 계셨고.”

“아, 근데 현주씨! 그렇게 강박관념을 가지실 필요는 없으신데.”

그러자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고 한참 조용해졌다.

“현주씨?”

“현주씨!”

몇 번이고 부르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무척 작은 목소리.

“혹시 전화 상태가 안 좋은가요? 제가 다시 걸게요.”

“아뇨. 잘 들립니다. 그리고 사실··· 저 역시 대표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저한테요?”

“네.”

“그럼?”

“대표님! 저녁 6시까지 오실 수 있으세요?”

“네. 그래요. 그럼 그때 뵙도록 하죠.”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현주가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후 5시 30분.

어느덧 직원 퇴근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는데.

이때 미래그룹 그룹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내 요청이 수락됐다고 했고.

박명식 회장과의 식사는 저녁 식사 자리가 아니라 점심 식사 자리로 스케쥴이 조정됐다는 거다.

괜찮냐는 비서실의 물음에 나는 바로 괜찮다고 했고.

생각보다 빠르게.

내일 점심으로 식사가 결정되었다.

장소는 미래그룹의 영빈관인 성북동 ‘미래원’.

웅장한 대저택을 개조한 곳으로 한옥식 궁궐이나 다름없다고 알려진 곳인데.

박명식 회장은 이곳에서 저명인사들과 종종 식사자리를 가진다고 한다.

여하튼 그렇게 결정된 뒤.

잠시 후, 약속 시간에 맞춰 경호원들과 함께 움직였고.

미래증권 도로 앞에서 박현주를 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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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요리가 나오기 전에 각자 용건을 말하는 게 어떨까요?”

강남의 모 특급호텔 중식당.

그곳에서 주문을 마친 뒤.

나는 그런 제안을 했다.

내가 박현주한테 할 말이 있고.

박현주도 나한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새카만 눈동자로 날 차분하게 쳐다보고 있는 박현주.

두꺼운 외투를 벗은 뒤, 현재 검정 블라우스에 체크무늬 롱스커트 차림인 그녀는 뭔가 그윽해진 눈으로 잠시 날 쳐다보다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살짝 만진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혹시···.”

“네?”

“혹시···.”

그러다가···.

“한세증권 사내이사 제안을 받으셨죠? 혹시 수락하셨어요?”

근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아, 한세증권 이사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직 결정은 안 했지만, 수락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자 눈이 바로 커지는 박현주.

“혹시 이유가 있으세요?”

“솔직히 말해서 대학성적증명서 등을 요구하더라고요.”

“어머!”

순간, 놀랐다가 이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박현주.

“그래도 잘됐네요. 한세증권 사내이사 건을 전해 듣고서, 저희 미래증권에서도 사외이사에서 사내이사 추진 건으로 바꾸기로 했거든요.”

“근데, 도대체 그게 무슨 차이가 있죠? 그리고 제가 시간도 없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요?”

“대표님이 저희 사내이사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제가 대표님 업무 대부분을 맡게 될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 승진합니다.”

“······?”

“과장으로요.”

“와아! 과장이라고요?”

“네.”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속 승진 같은 느낌인데.

이제 박현주는 과장이 되는 건가.

“그럼, 이제 대표님 차례세요.”

“네? 아아!”

나는 정신을 차렸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현주씨!”

그러고는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혹시 유럽 쪽은 여행 가보셨어요?”

“유럽? 네! 대학 다닐 때 여러 번 가봤어요. 근데 유럽은 왜요?”

“투자·금융 쪽으로 유럽 시장 역시 아주 큰 시장입니다. 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의 눈에는 대체로 먼 나라 같은 느낌이죠. 영국 FTSE 100지수, 독일 DAX 30지수, 이태리 FTSE MIB 지수, 프랑스 CAC40지수, 스페인 IBEX 35지수 등, 유로존을 중심으로 결집된 유럽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투자처입니다.”

박현주는 조금 흥미롭다는 듯 날 쳐다봤다.

“대표님, 유럽에도 진출하시려고요?”

“네. 우선, 한번 들어보세요. 유럽은 글로벌 금융 거부들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는 탄탄한 곳입니다. 저변이 아주 넓고 안정적이죠. 유럽 최대 자산운용사 아문스자산운용. 이곳이 최근에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혹시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드디어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그리스 재정 위기가 있어 유로존은 변동성이 너무 심하지 않을까요?”

박현주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만한 국가 재정 운영, 그리고 천문학적인 사회복지 지출.

이것은 바로 그리스의 심각한 국가 부채를 만든 원인이다.

2010년 5월, 그리스는 재정 긴축 정책을 입안했고.

EU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그리스는 과거 IMF 시대 한국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개선 의지가 부족했고.

사회적 회생 동력 역시 무척 약한 편이다.

그래서 구제금융 체제이지만, 그럼에도 디폴트선언 압박은 아직도 심한 편이다.

문제는 이게 그리스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해 있는 나라.

이런 그리스의 악재는 유로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EU가 적극적으로 그리스를 도우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부활은 절대 쉽지 않다.

최근의 핫 이슈는 결국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여부, 그리고 디폴트 선언 여부 등이다.

“사실, 환율 조정을 통한 통화정책 변화는 그리스 경제 회복의 실마리가 될 수 있죠. 그러나 유로존에 포함된 그리스는 자국 통화정책을 국가 주도적으로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유로존 가입에 대한 역작용이죠. 그리스의 지속적인 불안정성은 결국 유럽 전체 금융시장에 더 큰 불안정성을 만들 겁니다. 저 같은 하이 리스크 투자자들한텐 기회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유럽권에 관심이 크시군요?”

“근데 미래증권도 똑같이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저희도요?”

“미래증권 선물사업본부가 더 성장하기 위해선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변 확대?”

“네! 새로운 투자처 확보, 투자 유치, 고객 유치, 이런 전문 매니징을 하기 위해선 유럽 시장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좀 더 쉽게 풀리지 않을까요?”

이때, 박현주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늘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적인 부분들도 있습니다. 유럽에는 유명한 은행들과 회사들도 많죠. 유니크레딧 은행, 스탠다드 차티드 은행. 그리고 세계 금 시세 예측에 주요 자료가 될 수 있는 금 채굴업체인 랜드골드 같은 곳도 있습니다. 국내 기업의 현지 기업과의 협력을 유치하면서, 국내 기업을 위한 다양한 IB 업무도 가능할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럼, 아까 말씀하신 유럽 여행은···.”

“네! 비록 일정은 좀 급작스럽긴 해도, 그런 유럽을 중심으로 투자 탐방을 진행해 보려고요.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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