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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78화 (78/138)

76화 철광왕 02

<71>

“···이사님, 그래서 저희도 DLS(derivative linked securities) 부분에 진출할 생각입니다. 한번 검토해 보시고 좀 도와주십시오.”

한세증권 최세진 상무.

그는 안경을 고쳐 쓴 뒤, 계속 눈치를 살피며 컨피덴셜 서류를 데스크 위에 올려놨다.

그러나 보는 듯 마는 듯 관심조차 없는 남자.

글로벌 헷지 펀드 ‘랜드브리지 펀드’의 나단 메이어 킴 이사다.

혼혈이고 한국인의 피도 섞였으나.

행동과 말투는 무척 차갑고.

무척 계산적인 중년 남자다.

한국말을 할 수 있음에도 그는 언제나 영어만을 쓰고 있다.

“저희가 최근에 좀 다급합니다. 미래증권, 한신증권 등에서 이미 홍콩계 IB 쪽과 역외펀드를 구상하고 있고, 저희도 숨통을 틀 필요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한번 검토라도 해 주시겠습니까?”

최세진 상무는 다시금 요청하며 숨이 꽉꽉 막히는 듯했다.

넥타이를 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하아, 답답해서 미치겠네. 좀 뭐라 말이라도 하던가.’

한국 입국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신경을 써 준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나단 메이어 킴 이사가 한국 생활에 불편하지 않도록 자신은 지금껏 많은 신경을 써주고 있는 상태다.

한세빌딩 20층.

상당히 조망권도 좋은 위치.

그런 위치에 오피스를 잡는 데 신경을 써 준 사람도 바로 자신이었다.

잠시 후, 나단 메이어 킴 이사는 두 손 손가락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앉은 채로, 최세진 상무를 차갑게 노려봤다.

움찔하는 최세진 상무.

“최 상무님.”

“네. 이사님.”

“DLS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날아든 질문.

최세진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아, DLS는··· 가입자 그리고 설계자 혹은 판매자와의 계약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떤 DLS가 많이 팔릴 것 같습니까?”

DLS 상품은 많이 팔릴수록 특정 기초자산에 대한 헷지가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담감도 커진다.

가입자에게 약정수익률을 지불하게 되면, 증권사, 운용사 등은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

“그야 가입자 입장에선 약정수익률이 크면서도 안정된 수익이 보장될 때 선호도가 더 높아지는 거 아닙니까?”

그 순간, 나단 메이어 킴 이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웃음 소리가 없는 무척 차가운 웃음이었고.

그런 모습을 보는 최세진 상무는 기분이 절대 좋을 리가 없다.

“상무님을 비웃는 게 아닙니다. 이게 바로 한국의 현주소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나 나단 메이어 킴 이사는 절대 친절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서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 설계된 DLS는 더러운 냄새만 가득 차 있어요. 손익분기점과 기초자산의 변동성이 괴리되어 있고, 헷지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어요. 차라리 수준을 인정하고 ELS(equity linked securities)부터 먼저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그 말이 끝이었다.

나단 메이어 킴 이사는 더는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오피스 한쪽, 벽면 선반에 자리 잡고 있는 큼직한 에스프레소 머신 쪽으로 걸어갔다.

민망한 표정을 짓던 최세진 상무.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 가져온 서류들을 얼른 수거했다.

그러고는 간단히 목인사를 한 뒤.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에이, 씨팔. 욕 나오네.”

어떻게 저런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사람을 너무 무시한다.

그래도 여러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공들여 설계한 DLS 상품인데.

특히, 이 DLS 분야는 새로운 자금조달수단이자.

획기적인 수익원으로 현재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중소형 증권사에서도 설계·출시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중인데.

‘근데 우리 실력이 부족하다고?’

수준을 인정하라는 말이 바로 그게 아닌가.

사실, 최근에 국내 증권사에선 금리연계형 DLS 상품 설계 쪽에 주로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기초자산을 일반적인 ‘금리’가 아닌.

다른 자산에 포커스할 땐 이런 설계가 무척 어려워진다.

최근, 미래증권에서는 무척 어렵고 고난위도인 WTI유 국제유가에 맞춘 DLS 상품을 개발한다고 하고.

그 때문에 자신은 요즘 유망한 ‘금 선물’에 맞춘 DLS 상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우리더러 주가연계형 ELS부터 하라고?’

하! 열 받아.

그러나 뭐라고 항변할 수도 없다.

글로벌 헷지 펀드의 이사.

그 직책이 가진 무게감이 상당하기 때문.

실제, 나단 메이어 킴 이사가 한세증권에 와 있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도 한세증권은 이미 상당한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특별히 언론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여의도 증권가엔 그 소식이 쫙 퍼졌고.

저번 달, 한세증권 주가는 여러 번 상한가를 치기도 했다.

몇 달 전과 비교한다면, 주가가 무려 40%가량 상승한 상태다.

‘근데 우리 설계가 엉망이라고?’

주가 급등은 나름 감사한 일이지만.

그의 차가운 대응에 무척 화가 난 최세진 상무.

그는 자신의 오피스에 돌아온 뒤.

다시 서류들을 책상 위에 펼쳤다.

#

DLS는 일종의 계약이다.

특정 범위 내에서 기초자산인 신용, 금리, 실물 자산, 원자재지수 등의 가치가 묶여있으면, 이때 약정수익을 가입자에게 지불한다.

문제는 그 수익이 생기는 범위를 어떻게 지정하느냐.

이 범위를 교묘하게 설정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DLS 상품 자체가 선물·옵션과 같은 제로섬 게임의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

가입자가 약정 수익을 얻게 되면, 증권사, 운용사 등은 그만큼 손해를 본다.

그러나 기초자산의 큰 변동세가 나타나게 되면, 대다수 가입자는 원금 100%를 상실하게 되는데.

반면, 증권사 혹은 운용사 등은 이때 헷지적 접근이 되면서 수익을 챙기며.

변동세에 따른 리스크를 또한 상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DLS는 교묘한 보험 같은 것이다.

이런 DLS 상품은 주로 외국계 투자은행들이 만든 뒤.

증권사, 은행 등이 판매하는 형식인데.

최근엔 증권사들이 그 설계 및 발행·운용에도 직접 참여하고 있는 중이었다.

#

‘알 수가 없네. 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내가 봤을 땐 아주 잘 뽑았는데.’

이마를 잡고서 최세진 상무는 한동안 서류와 씨름했으나.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정말 ELS(Equity Linked Securities)에 포커스를 맞춰야 하나?’

주가연계증권 ELS.

그만큼 설계가 쉽고.

가입자들도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상품이다.

“에이씨!”

쾅! 소리가 나도록.

데스크를 내려친 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연말인데.

한세증권은 올해도 암울하기 그지없다.

뭐가 되는 일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

최근,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 현성철강.

그러나 이 회사는 현재 갈수록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선물투자본부에선 구리 선물 매도포지션 때문에 피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태다.

의욕적으로 DLS 파생을 만져보려고 했으나.

이것 역시 곤경에 처한 상태다.

‘에이, 시팔! 현성철강도 문제야! 왜 자꾸 철광석 가격이 오르냐고!’

최세진 상무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

“···Goddamn! 나이가 적든 많든, 한국은 다 멍청이들뿐이군.”

나단 메이어 킴 이사는 작은 커피잔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받은 뒤.

자신의 데스크로 돌아왔다.

그래도 자신의 취향에 맞춰.

에스프레소 머신이 오피스에 들어와 있어.

그것만은 그저 만족스러울 뿐이다.

잠시 후, 그는 몇 개의 서류들을 넓은 데스크 위에 여기저기 뿌려놨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봤고.

눈 끝이 한 번씩 경련하듯 떨리곤 했다.

그러고는 그는 서류 하나를 뽑아 가져왔고.

안경을 끼고는 그 서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대강화학 최대주주 김한수]

현재 지분율 96.78%.

코스닥 거래가 정지된 이후.

오히려 지분율은 늘어난 상태다.

‘장외 물량들을 모조리 쓸어 담고 있다?’

에바 가보르 이사가 은밀하게 진행했던 프로젝트.

그러나 실패한 프로젝트다.

톡. 톡.

검지로 데스크를 톡톡 치다가.

잠시 후, ‘현성철강’ 재무 정보들이 기록된 서류를 뽑아 들었고.

그것도 역시 유심히 살펴봤다.

순간, 그의 입꼬리가 스르륵 길어졌다.

둘 다 먹음직스러운 물건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는 이미 늦었고.

하나는 충분히 덤벼들 가치가 있다.

‘한데 이건···.’

[대강화학 최대주주 김한수]

현재 지분율 96.78%.

‘뭔가 알고 들어간 녀석일까?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일까? 96.78%? 으음, 전자일 가능성이 커.’

이쪽은 이미 길이 막힌 상황이다.

뒤늦게 장외 물량 매수에 나섰으나.

물량은 이미 품귀된 상황.

‘공격적이고 아주 재빨라. 위험할 정도로.’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가.

곧이어 현성철강 자료를 다시 응시했다.

지난 두 달간, 자신이 진행했던 일들 중의 하나가 바로 현성철강 지분 확보.

현성철강 쪽은 이미 진입을 위한 충분한 교두보가 확보된 상태다.

‘대강화학이 더 매력적이지만···.’

현성철강은 철광석 호가 폭등 때문에 위태롭고.

한세증권을 이용한다면 좀 더 쉽게 먹어치울 수 있다.

‘한데, 철광석 독점 위험성이라? 도대체 누가 이런 위험한 일을 성공시켰을까?’

고민하던 킴 이사.

그는 잠시 후 또 다른 서류를 뽑아 들었다.

이번 서류는 최근에 M&A 시장에 핫 매물로 등장한 어느 회사.

어느 대형 회사에 대한 서류였다.

#

“···아! 부사장님, 그럼 협력 컨소시엄을 구성하자는 제안이십니까?”

수능이 끝난 다음 날.

철광석 선물 호가 폭등 덕분에 기분 좋게 점심 무렵 회사에 도착했고.

바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미래증권 김인범 부사장의 전화가 왔다.

IB투자본부에서 새로운 기업투자 건을 준비 중에 있다는 말.

특히, 기업 매물의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협력사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할 생각이라고 했다.

각계 전문가 리소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대형 인수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자 현재 준비 작업 중에 있다고 했다.

“···혹시 관심이 있습니까?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기업의 전망을 보고서, 기업을 키우는 투자 방식입니다. 최대 투자사 여섯 곳이 참여하면서 투자 리스크를 줄이되, 공격적으로 인수전에 뛰어들 생각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자료를 한번 보시고 연락주십시오. 저희 IB투자본부에서 실무를 맡고 있는 안희영 차장이 대표님을 직접 찾아뵐 겁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한편, 전화를 끊은 뒤.

나는 곧바로 ‘대현통운’에 대해 검색해 보다가.

다시 싱가포르 거래소(SGX)의 현시간 철광석 선물 차트를 유심히 확인했고.

곧이어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인수합병 건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우선 이쪽 물량들도 풀 때가 된 것 같아.’

조금 전 다시 12월물 철광석 선물 호가가 10% 고지에 다다랐고.

엄청난 수급이 몰려들며.

역사적인 철광석 고점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건 더 기다릴 게 아니야! 드디어 엄청난 수익 실현 타임이 된 거야!’

점점 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았고.

내 두 눈엔 힘이 바짝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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