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상류사회 02
<54>
“저기인 거 같은데.”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나는 서둘러 어느 유명 디자이너의 의상실 쪽으로 다가갔다.
어둑어둑해지는 길거리.
길거리 가게마다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
한편, 그 의상실은 무척 세련된 현대식 10층 건물의 2층, 3층을 쓰고 있는데.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에 한 상태다.
건물 앞쪽으로 주차 공간들이 있긴 하지만.
이 시간대는 상당히 번잡하다고 했고.
실제 온갖 외제차들이 그 앞쪽 도로에서 주차를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주차를 다른 곳에 하길 잘 했어.’
그렇게 시간을 아낀 덕에 나는 좀 더 빨리 건물로 들어설 수 있었다.
#
“혹시 예약하셨어요?”
의상실 입구, 데스크.
아리따운 여자 직원.
그녀는 예약 여부부터 물어봤고.
나는 예약자 ‘박현주’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직원은 환하게 웃었고.
데스크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직원이 다가오더니 의상실 안쪽으로 친절하게 날 안내했다.
#
‘와! 근데 서울에 이런 데가 있었구나.’
태어나 처음 오는 곳.
사실, 돈이 있음에도 나는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의상실은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여길 예약한 사람은 미래증권 박현주씨가 아닌가.
근데 미래증권 직원이 어떻게 화려한 곳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플래티넘 다이아 등급이라서.
일부러 이런 곳에 예약을 했던 걸까.
그런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박현주 자신도 여기서 드레스를 맞춘다고 했다.
‘역시 좀 이상한데’
묘한 위화감.
그 이상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반색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박현주였다.
단아한 오피스룩, 정장 바지 차림인 그녀.
유럽풍 소파에 앉아서 어느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날 쳐다봤고.
나는 즉시 그쪽으로 다가갔다.
#
“현주씨.”
“아, 선생님! 오셨어요?”
박현주는 바로 일어섰다.
나도 마주 인사했고.
이때, 메이크업이 짙은 긴 머리의 디자이너도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날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인사하며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어머, 안녕하세요? 저는 디자이너 송지연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김한수라고 합니다.”
나도 명함을 꺼내 건넸다.
“KH투자파트너스? 아, 투자 일을 하시나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송지연 디자이너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박현주 쪽을 쳐다봤다.
“현주씨, 그럼 이분이?”
“네, 그래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박현주.
“아-아!”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탄성이 들려왔고.
다시금 날 유심히 쳐다보는 송지연 디자이너.
그녀의 입꼬리가 이때 슬쩍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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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할까요? 대표님 의상부터 봐 드릴까요? 근데 현주씨는 좀 전에 상담이 이미 끝나서 피팅을 바로 할 수 있거든요.”
잠시 후, 송지연 디자이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잠깐 설명했고.
내 의사를 바로 물어봤다.
한편, 나는 이곳 절차가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는데.
“그럼 저도 상담을 진행하는 겁니까?”
“네. 당연하죠. 그럼 혹시··· 대표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현주씨 피팅하는 것부터 먼저 보시겠어요? 중간중간 상담은 진행하면서···.”
이때, 내 앞에서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는 박현주.
그런 박현주를 한번 쳐다본 뒤.
나는 이런 명품 의상실을 예약해준 고마움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왕 돈을 쓰는 거, 쓸 때는 정말 제대로 써야 한다.
워크샵 참석 목적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파티 참석 목적이 아닌가.
뛰어난 투자자들.
금융인들.
그리고 그들이 모이는 곳.
제대로 된 격식과 의상으로 내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KH투자파트너스 대표로서 말이다.
“···뭐, 현주씨 덕분에 이런 좋은 곳도 알게 됐는데, 그럼 그렇게 하죠. 현주씨! 먼저 피팅하세요.”
“네. 죄송한데, 그럼 저부터···.”
그러고는 박현주는 다른 직원과 함께 한쪽 피팅 룸으로 이동했다.
그사이 나는 워크샵에 입고 갈 드레스 코드에 대해 송지연 디자이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송지연 디자이너는 턱시도 의상 사진들이 가득한 사진첩들을 계속 보여주다가.
중간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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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대표님. 혹시 현주씨랑은 어떻게 아시게 됐어요?”
“아, 현주씨요?”
“네.”
“아아 뭐, 일 때문에 그냥 만나게 됐습니다.”
“일 때문에? 근데 파티장에 같이 가시는 거 아닌가요?”
하긴, 같이 가는 거라고 할 수 있다.
동행의 개념이니까.
“네. 그렇긴 한데, 그냥 일 때문입니다.”
“일 때문? 음. 아까 봤을 때도 좀 알겠던데, 그럼 역시 두 분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신 거네요?”
“네?? 저희가요? 아, 아뇨! 절대 아닙니다.”
그러자 내 목소리에 놀란 듯 살짝 눈이 커지던 송지연 디자이너.
그러다가 그녀는 입을 가리며 웃다가.
뒤로 조금 몸을 뺐다.
“죄송합니다. 실은, 제가 오해했어요. 현주씨가 남성분을 데려오신다기에 제가 잠시 오해했어요. 정말 일 때문에 만나신 것 같네요.”
그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현주씨랑 많이 친하거든요. 저희 컬렉션을 자주 이용해주시다 보니···.”
그런데 그 순간.
뭐? 뭐??
나는 순간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한,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몇 번 이상하게 여겼던 생각들.
미래증권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플래티넘 다이아 등급 회원들.
그런 회원들에 대한 관리를 고작 말단 직원이 맡을 수가 있는가.
‘역시 좋은 집안 출신이었나?’
또한, 이런 의상실을 자주 찾는 건 보통 재력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지난 행동들을 떠올려 보면.
날 몇 번씩 뚫어지라 쳐다보긴 했으나.
늘 예의가 무척 발랐고.
목소리 톤도 늘 일정했다.
‘음. 가정 교육을 잘 받은 것 같아.’
근데 이거 점점 더 수상한데.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래서 나는 묘했던 생각을 머릿속에 정리한 뒤.
잠시 후, 상담 중에 내 의혹을 슬쩍 송지연 디자이너한테 물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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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현주씨는 쫌··· 사서 고생하시는 것 같아요. 회사 일이란 게 절대 쉽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 아시네요. 대표님, 잘 아시나 봐요? 현주씨가 늘 하는 말이, 항상 일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네. 맞아요. 근데 어쩌겠어요. 할아버지께서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 오라고 하시는데. 현주씨는 그래도 뭐든 잘 하시잖아요.”
“그쵸. 잘 하긴 잘 하죠. 근데, 역시 할아··· 아니, 회장님이 문제시죠.”
“어머, 대표님! 혹시 뵀어요? 회장님을?”
나는 대답하지 않고 디자이너를 쳐다봤다.
“회장님도 여기 자주 오시는데. 현주씨 가족분들이 여기 주요 고객이세요.”
그 순간, 내 두 눈엔 아마 빛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척하며.
나는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근데 회장님 의상 취향은 어떠세요? 그분이 좀··· 근엄하시고 아마 보수적이다 보니···.”
“아! 대표님도 잘 아시네요. 투자 일을 하시는 분들이 좀 딱딱한 편인데. 워낙 긴장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회장님도 그러시고. 근데 대표님은 좀 그렇지 않으신 것 같은데. 많이 웃으시는 걸 보면···.”
“아뇨. 저도 딱딱한 편입니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은 걸요. 보세요. 말씀도 잘 하시고. 근데, 박지훈 상무님은 요즘 얼마나 딱딱한데요. 상무 일이 쉽지 않나 봐요. 현주씨도 오빠를 좀 가여워하는 것 같고···.”
나는 다시 놀랐다.
박지훈 상무?
박현주의 오빠?
“근데, 대표님은 미래증권 분들과 같이 일을 많이 하시나 봐요? 혹시 박지훈 상무님하고도 잘 아시는 사이인가요?”
그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잘은 모릅니다.”
“아, 그러시구나. 잠깐만요. 지금 현주씨 나오네요.”
갑자기 송지연 디자이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편, 내 유도신문에 당해 이것저것 말을 해 준 송지연 디자이너를 힐끔 쳐다보다가.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이상해서 그냥 물어본 건데.’
진짜 박현주씨의 할아버지가 회장 직책을 갖고 있는 것 같았고.
그녀의 오빠는 미래증권 상무인 것 같았다.
미래증권 박지훈 상무?
그리고 박현주···.
순간,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가 넘어왔다.
‘하아, 최수경 전무.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들을 해 주지 않았을까.’
하긴, 미래증권 박명식 회장의 성격을 잠시 생각해 본다면.
최수경 전무로선 박현주를 그냥 일반 사원으로서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박명식 회장의 손녀란 말이지.’
귀족 클럽이나 다름없는 다이아 회원들에 대한 관리를.
그래서 박현주가 전담해서 맡았나 보다.
맡을 만한 위치가 되니까.
그래서 맡았다는 그런 상황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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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쁘다.”
잠시 뒤.
나는 놀란 듯 박현주를 쳐다봤다.
송지연 디자이너는 지금 이쁘다고 난리였고.
갑자기 확 변해버린 박현주의 모습에 나 역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을과 여름이 교차하는 9월.
이런 계절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칵테일 드레스.
무릎 아래 늘씬한 두 다리와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칵테일 드레스.
우아하면서 무척 시원한 그런 모습이었다.
이 시기에 답답함을 줄 수 있는 롱 드레스와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모습인데.
특히, 드레스에 맞는 구두까지 착용한 그녀.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내내 웃고 있었고.
그 웃는 모습까지 무척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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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세요?”
“네?”
송지연 디자이너가 갑자기 다가왔고.
나한테 의견을 물었다.
“같이 오셨으니까, 의견을 좀 주시면···.”
“아, 드레스도 좋고. 무척 잘 어울리고··· 이쁘고, 매력적인데요.”
“오오, 매력적이다? (호호)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직 피팅할 의상들이 아홉 벌 정도 더 남아 있으니까, 지금 드레스는 꼭 기억하셨다가 다른 드레스들도 보시면서 한번 판단해 보세요.”
“근데, 죄송한데, 앞으로 아홉 벌이나 더 남았다고요?”
나는 눈이 살짝 커졌다.
“너무 많은가요?”
송지연 디자이너의 설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쳐다보게 되었고.
나는 이내 흠칫했다.
이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데.
“혹시 저는 몇 벌이나 입어야 합니까?”
“대표님 의상은 좀 전에 확인해 보니까, 대략 여섯 벌 정도 될 것 같네요. 우선은 피팅하시면서 괜찮은 옷들을 고르시면 됩니다. 세밀한 치수 같은 건 나중에 저희가 따로 조정할 거니까요.”
괜찮은 옷들?
그러니까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을 골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마냥 박현주를 기다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할 일도 많은데.
그래서 박현주씨한테 먼저 말하고, 내 의상부터 입어볼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때 문제가 있었다.
도무지 대화할 틈이 없다.
피팅을 한 뒤 사진을 찍고.
다음 피팅을 위해 바로 피팅 룸으로 들어가 버린 박현주.
도저히 대화할 틈이 없는 상태였다.
‘어떡하지? 시간이 좀 아까운데.’
그 와중에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고.
그런 당혹스러운 내 모습이 어느덧 눈에 띄었는지.
송지연 디자이너가 내 옆으로 다가왔고.
슬쩍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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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바쁘세요?”
“네. 좀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이렇게 하시죠. 대표님도 지금 바로 피팅을 하시겠어요?”
“제가 바로 할 수 있습니까?”
“좀 전에 먼저 의상 한 벌이 들어왔는데, 그것부터 입어보시겠어요? 미경씨, 여기 좀 부탁드려요.”
그래서 잠시 후 나는 담당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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