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공장을 인수하다 02
<51>
여름이라 늦게 저무는 해.
그래도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는데.
아직도 열기는 가득하다.
후끈한 주변 공기.
편의점으로 들어선 나는 시원한 콜라 하나를 샀다.
그러고는 편의점 안, 창가에 앉아 잠시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주로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조금 낯선 사람들.
아마 최병우 변호사가 보낸 경호원들일 것이다.
'근데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암튼···.'
후줄근한 여름 반바지.
대충 입은 듯한 반팔 티셔츠.
고시원 사람들과 위장한 경호원들이 하나둘 오고가고 있었고.
그런 모습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문득 옆방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근데 정장은 왜 아직도 안 돌려줄까? 연락도 오지 않고.’
혹시 취업에 실패했나.
긴장할 때마다 그렇게 말을 더듬거렸는데.
취업 면접을 통과하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혹시 면접을 계속 보러 다니나.’
이삿날 이후, 어느덧 거의 한 달가량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혹시 다른 문제가 없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듯 골똘히 생각하던 사이.
누군가 창가 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여름철이라서 짧은 정장 스커트를 입은 여자.
그런 여자가 이쪽으로 바삐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박소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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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많이 기다렸어요?”
새카만 눈동자.
그 눈동자로 그녀는 날 빤히 쳐다보다가.
걱정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몹시 미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뇨. 저도 방금 전에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다시 고개를 드는 박소희.
“이제 막 약속 시각 7시인 걸요. 절대 늦으신 건 아닙니다.”
그제야 표정이 밝아지는 박소희.
나는 다시 말했다.
“그럼 퇴근하시고 바로 오신 거죠?”
“네.”
그렇게 대답한 박소희는 어느새 내 지척으로 다가왔다.
이때, 오묘한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어우러졌고.
내 코에 와 닿았다.
“근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한편, 박소희는 먼저 자리를 옮기자고 했고.
그래서 나는 즉시 제안했다.
“저 아래쪽, 큰 길가 쪽, 작은 카페가 있거든요. 거기로 가죠.”
시원한 콜라를 이미 다 마셨던 나는 콜라 캔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편의점에서 바로 나왔고.
이때, 박소희는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며 앞으로 걸었다.
반사적으로 내가 한번 쳐다보자 씩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여자.
그런데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 몰라도.
무척 요조숙녀 같았고.
언행을 무척 조심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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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경리과 직원.
박소희.
그런데 그녀는 작은 공장에 다니는 회사원답지 않게 외모가 상당히 뛰어나다.
옷 감각도 나름 나쁘지 않다.
생각보다 옷을 잘 입고 다니고 있고.
활발한 성격이다 보니.
아마 남자들이 많이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여자였다.
‘거기다가 대학도 나왔다고 했지.’
김창식 반장이 그때 술 마시면서 했던 말이다.
보통, 이런 작은 회사의 경리과 직원은 대체로 상고 출신일 가능성이 큰데.
박소희는 여하튼 대졸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박소희를 슬쩍 곁눈질하며 다시 쳐다봤다.
외형적인 모습은 역시 부족한 점이 없다.
어색함이나 싸구려 티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박소희와 함께 나는 계속 걸었고.
잠시 뒤, 우리는 골목길 아래쪽, 큰 길가로 접어드는 입구, 작은 카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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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커피 두 잔.
“네, 감사합니다.”
아르바이트 점원.
그 점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는데.
우리는 조금 구석진 곳에 앉았고.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잠시 서먹서먹했으나.
그 커피가 나오자마자, 드디어 대화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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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씨.”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근데, 오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의견 구할 것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멈칫하던 박소희.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직 말이 없다.
“소희씨. 죄송한데, 제가 좀 다른 일들이 있어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내가 바쁘다는 시늉을 하자.
박소희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한수씨. 먼저,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먼저 양해를 구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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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참 뒤.
“······으음, 그러니까 김도철 사장! 그 사람이 소희씨 명의의 계좌들을 관리하고 있었다고요?”
“네. 그래요.”
“근데 ‘결손액 보전’이란 게 대체 뭔가요?”
한편, 나는 그 용어를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봤다.
그녀의 입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아, 회계 과정에서 간혹 결손액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런 결손액을 처리하지 않고서 놔두면 이익배당이 안 돼요. 이런 목적 외에도 사소한 문제들이 겹쳐서 결손액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는데, 이런 걸 보전하기 위해 일부 계좌 자금을 임시적으로 쓰기도 합니다. 일종의 편법이라고 할 수 있죠.”
“편법?”
“네. 자금을 넣었다가 바로 뺄 수 있는 임시 계좌들이 그런 결손 보존 목적 외에도 관행적으로 필요한데, 저는 입사 초기에 사장님 요청으로 그 계좌들을 만들어 드렸어요.”
“아아, 근데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
“그냥 관행이라고 하셨고, 계좌에 들어가는 자금도 수십만 원, 수백만 원 수준이라고 하셔서 제가 만들어드린 건데.”
박소희는 그러면서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근데 은행 일 때문에 저번 달에 은행 지점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 지점의 직원이 제가 VIP 고객이라면서···.”
“네? VIP 고객? 혹시 그럼 그 계좌에 돈이 많이 들어가 있었어요?”
박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요?”
“놀라지 마세요. 삼, 삼십 억 원 정도.”
30억 원?
이야아-아.
나는 솔직히 놀랐다.
사실, 내 수준에선 큰돈은 아니지만.
대강화학 같은 회사 수준에선 상당한 거금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그 돈은 바로 김도철 사장의 비자금.
아니, 회사에서 횡령한 돈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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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한테 왜 이런 이야기들을 고백하세요?”
잠시 후, 나는 좀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박소희를 쳐다봤고.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좀 전의 그녀의 대답은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는데.
그래서 나로선 놀람과 함께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저는 사장님 일이라 계좌 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수씨가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들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었고. 저도 갈수록 불안해서···.”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수심이 짙어지고 있는 박소희의 미간.
그런데 흠칫흠칫 좌우를 살피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난 것 같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죠? 소희씨! 아직 다 말 못 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이왕 말한 거, 그냥 속 시원하게 말씀해 보세요!”
사실, 조금 전, 나는 왜 나한테 그런 고백을 하냐고 물어봤는데.
지금은 속 시원하게 말하라고 그렇게 재촉하게 되었다.
다소 이율배반적인 모습.
그런 내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박소희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 몇 가지 질문들을 먼저 나한테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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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한수씨! 회계장부 열람을 요청했다면서요?”
“네. 그랬죠. 그 이야긴 김도철 사장한테서 들었습니까?”
이때, 박소희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사장실을 오가다가 우연히···.”
“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요? 소희씨는 대체 뭘 알고 싶은데요?”
내가 다시 재촉하자.
박소희는 뭔가 생각하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작년에 퇴사하신 한수씨가 주요 주주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그 이유는 대충 알겠어요. 정덕씨 때문이죠?”
사실, 저번에 최병우 변호사와 함께 공장을 방문했을 때.
최병우 변호사는 정덕의 사건에 대해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박소희는 바로 내 상황을 적절하게 유추하고 있었다.
확실히 머리가 좋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때 박소희는 다른 이야기들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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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씨가 변호사를 데려오는 바람에, 그리고 그 회계장부가 곧 노출된다는 사실에 저는 많이 걱정스러워요.”
“혹시 그 계좌들 때문인가요?”
“네. 그것도 있고, 그리고···.”
그런데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나.
“사실, 제가 정말 불안한 건··· 아! 근데 제가 이런 말들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소희씨! 그러지 말고 그냥 말씀하세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다시 재촉했는데.
뜸을 들이고 있어 무척 답답하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한편, 박소희는 무언가 갈등하는 듯.
동공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고.
갈증이 생긴 듯 커피를 조금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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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무래도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냥 말씀드릴게요.”
그 순간, 내 양미간은 살짝 접혔는데.
잠시 후, 내 귓가엔 뜻밖의 이름이 들려왔다.
“조상구 부장님이···.”
그렇듯 갑자기 튀어나온 조상구 부장에 대한 언급.
나는 흠칫했고.
좀 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니까 사장님 지시로, 지난 2월에 부장님이 뭔가 중요한 일을 맡으신 것 같아요. 부장님은 주로 각종 지출 내역과 원료 구입 서류, 기자재 구입 서류 등을 주로 보시거든요. 경리과 과장님은 서류가 준비되면 모조리 들고서 부장님한테 가는데. 나중에 결재된 서류들을 보면, 중간중간 이상한 것들이 많았어요. 원료 납품 회사가 중간에 바뀌기도 했고. 이상한 회사의 원료를 사 오기도 했고···.”
그렇다면 원료 불량의 원인이 바로 조상구 부장이란 말인가.
그리고 정덕이가 문제가 됐던 것도 바로 원료 불량 때문이 아닌가.
“아, 그래서요?”
“···원료 납품사를 바꾸면서, 책정된 금액과 차액이 발생하는데, 그걸 모두 영수증 조작해서 사장님 계좌, 아니 제 계좌에 들어간 것 같아요. 액수가 너무 많아져 저도 좀 당혹스러운데. 제품 불량률도 같이 높아져 요즘 반품이 많이 쏟아지고 있거든요. 저번 분기 영업이익 흑자? 그런 건 다 가짜예요.”
그렇게 은밀한 내부 사정을 다 이야기하는 박소희.
그런데 그녀는 곧이어 더 놀라운 이야기도 꺼냈다.
“근데 그 조 부장님이 저한테···.”
“······??”
“저한테 제안을 하셨어요.”
“제안? 대체 어떤 거요?”
“불량 손실금에 대해 자기가 무조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사장님한텐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회계 부문은 공인회계사랑 잘 하고 있으니까 전혀 걱정할 거 없다면서···.”
“그럼 혹시 대가는요? 대가가 있죠?”
즉, 묵인에 대한 대가 말이다.
“아, 나중에 일이 좀 정리되면, 제 몫도 있다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잠시 후, 나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러나 금방 전반적인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박소희가 갑자기 왜 저런 고백들을 하는지도 잠시 후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저는 불안해서 죽겠어요. 불법이라는 걸 아니까 퇴사까지 생각했는데. 제가 이대로 나가게 되면, 제 계좌의 돈들은 어떡하죠? 거래 흔적도 남아 있을 텐데. 소액이 아니라 너무 큰 거액이라···.”
결국, 눈물까지 글썽이는 여자.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그 회계장부가 얼마나 부실했으면 박소희가 저렇듯 난리일까.
공인회계사까지 짜고 친 회계장부 조작.
그러나 회귀 전과 달리, 갑자기 내가 개입하자.
범행이 미처 완숙되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고.
회귀 전엔 모든 책임을 김도철 사장한테 넘기고 결백을 주장했던 박소희.
그런 그녀는 이제 사안이 심각해질 것을 우려하여.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한발 먼저 발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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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그런 박소희의 변심(?) 때문에 좀 더 빨리 사안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후, 최병우 변호사한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는 즉시 검찰에 이 사실을 통보했는데.
그리고 며칠 뒤.
전격적으로 공장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었다.
한여름, 8월 중순을 지나가는 동안.
검찰은 김도철 사장, 김도형 전무, 조상구 부장, 경리과장, 공인회계사, 박소희씨 등에 대한 전격 소환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조사가 끝나자마자, 각각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는데.
결국, 여우(?) 같은 박소희만 빼고 모두가 구속되었다.
한편, 검찰은 뭔가 석연찮은 조상구 부장에 대해 집중 수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코스닥 기업의 회계 부정 및 대형 횡령 사실에 대해 전격적으로 수사 결과를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
김도철 사장의 구속 당일.
대강화학 종목은 엄청난 악재가 터졌고.
장중 주가는 곧바로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이때, 내가 앞서 진행했던 열 번째 대강화학 투자는 드디어 꽃이 환하게 피는 바로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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