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39화 (39/138)

39화 나비 효과

#

에휴, 시장이 좋지 못하단 말인가.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하지만, 그 때문에 앞으로 인터뷰 일정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뭐. 나중에 하면 되니까.’

그렇듯 그저 간단하게 생각하고.

이내 내 생각을 접으려고 하다가.

문득, 나는 다른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정작 중요한 게 따로 있지 않은가.

‘내 인터뷰 가치가 많이 높아지겠는데.’

파생시장에 불어닥친 위험성 경고.

일반 투자자들의 이탈 가속화.

삭풍이 만연하는 현재 시장 분위기.

파생 시장 점유율을 키우려던 여러 증권사들의 고민은 그래서 한층 커질 것이다.

사실, 잘 나가던 파생시장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는 기분이었던 기존의 내 인터뷰.

그런데 분위기가 바뀌다 보니.

내 인터뷰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더 커질 수가 있다.

‘다이아 등급 2년 보장? 이젠 그것도 가능해질 것 같은데.’

거기다가 내가 또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턱을 만지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씩 웃었다.

마침 좋은 게 생각났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가치가 변하는 법이다.

물론, 최수경 전무가 내 새로운 요구를 받아줄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협상은 충분히 해 볼 만했다.

#

‘그럼, 우선 내일 편안하게 이사만 하면 되겠다.’

그렇듯 그 생각들을 이제 마무리하던 중.

이때, 갑자기 잡념인 듯.

다른 생각들이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릿속 한옆으로 잠시 접어뒀던 생각들.

그런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퇴원했던 유강석.

강석이 일이 아직 남아 있었고.

한남동으로 이사하기 전.

내가 다녔던 공장 사람들을 한번 챙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투자 이야기도 해야 하나?’

한남동 저택으로 이사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돈 이야기가 나올 텐데.

역시 그건 좀 망설여진다.

갑자기 투자 성공으로 부자가 됐다?

어쩌면 김창식 반장은 졸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덕이한테 먼저 연락이나 해 보자. 공장 상황이 어떤지 확인 좀 하고···.’

그리고 저녁엔 강석의 집에 잠깐 들를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잡았다.

이후, 잠깐의 신호음이 이어졌는데.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공장 후배인 정덕의 목소리.

그런데 이때, 나도 모르게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뜻밖의 떨림.

정덕의 목소리에서 그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33>

“형··· 어떻게 지냈어요?”

“나야 뭐 똑같지. 넌 어때? 아픈 덴 없고?”

“그냥 뭐··· 그래요. 공부는 잘 되고 있어요?”

“열심히 하긴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몇 달 뒤에 수능인데.”

“11월 맞죠? 그럼, 얼마 안 남았네.”

“그래. 얼마 안 남았지. 그래서 걱정도 많이 되고.”

“형은 뭐든 잘 하니까 잘 될 거예요.”

“고맙다. 근데 어머님은 잘 지내셔?”

“네.”

“동생은?”

“네. 괜찮아요.”

“근데 혹시 너, 다른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아뇨. 그런 거 없는데.”

“종혁이랑은 잘 지내고 있고?”

“···네.”

“야, 룸메랑 같이 사는 거 힘들지 않냐? 그래도 고시원보단 나을 거야. 같이 잘 지내고, 서로 의지하고.”

“······.”

“근데 요즘 공장은 어때?”

“······.”

“아이씨, 안 들려?”

“······.”

“야! 최정덕!”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냥··· 똑같이···.”

“야! 똑같다고? 공장도 문제없어?”

그러자 이내 다시 조용해지는 녀석.

이상했다.

첫 목소리부터 녀석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어.

계속 이것저것 물어본 건데.

공장 이야기가 나오자 뜻밖에도 녀석은 침묵하고 있었다.

“야! 무슨 일 있지?”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가 커졌다.

이때, 학원 강의가 어느덧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고.

복도에 있던 수강생들이 서둘러 강의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들어갈 수가 없어, 우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도대체 왜 그래? 무슨 일 터졌어? 혹시 김 반장님한테 무슨 문제 있어?”

그러자 한참 만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반장님은 문제없어요”

김 반장님한텐 문제가 없다?

이거 진짜 묘한 어투가 아닌가.

나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 공장은 잘 다니고 있어?”

“······.”

“야! 잘 다니고 있냐고!!”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인마! 말 좀 해! 말 좀!”

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오자, 그제야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사실대로 말할게요.”

사실?

대체 무슨 사실?

“저 그만뒀어요.”

그만뒀다?

도대체 뭘?

“공장··· 그만뒀어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정덕이가 공장을 그만뒀다고?

순박한 녀석.

정이 많은 녀석.

나름 재치도 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

그러나 가정환경이 안 좋아 공고에 진학했고.

녀석은 공고 졸업과 함께 화학 공장에 입사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돈도 벌지만.

나하곤 다르게 녀석은 저축을 하지 못한다.

매달 받는 월급의 절반가량을 어머니한테 보내고 있다.

어머니가 사고로 휠체어 신세이기 때문.

녀석에겐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도 있는데.

그 월급의 절반이 바로 그들의 생활비였다.

그래서 녀석은 늘 궁핍하다.

룸메와 같이 원룸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아주 허름한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다.

전기세, 수도세 등 모든 것들을 극단적으로 아끼며.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녀석이었다.

“야, 최정덕! 똑바로 말 못 해! 도대체 무슨 문제가 터진 거야? 무슨 문제냐고?”

내 목소리가 그렇게 커지자, 정덕은 할 수 없다는 듯 잠시 후 설명했다.

“형! 그냥 개인적인 문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

그러나 내가 절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안 되겠다! 좀 만나자! 너 강남으로 올 수 있어? 아니다! 내가 저녁에 다른 데 갈 일이 있으니까 너희 원룸 근처에서 보자. 내가 거기로 갈게. 저녁 7시. 됐지?”

그러자 정덕은 시간이 안 된다고 했다.

“왜? 왜 시간이 안 돼?”

“형. 내가 지금 택배 일을 하고 있는데, 여기 마포 쪽이라서···.”

택배 일?

정말 공장을 그만뒀나 보다.

“알았어!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 근처에서 보자. 저녁에 내가 다시 연락할게.”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

하! 도대체 갑자기 뭐지?

왜 공장을 나갔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정덕이한테 택배 일도 나쁘지 않다.

공장 일이나 택배 일이나.

실제 월급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도대체 뭘까.

공장 일에 만족하던 녀석.

그런 녀석이 갑자기 공장에서 나왔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최정덕.

녀석은 공장이 부도났을 때, 나와 함께 공장에서 나왔고.

회사 퇴직금이랑 3개월치 월급이 떼인 상태에서.

진하게 소주를 마신 뒤.

그날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었다.

그런 기억이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데.

이런 이른 시기에 공장에서 나왔다?

너무 뜻밖이었다.

#

할 수 없이 강석의 집에 들르는 것을 잠시 늦추기로 했다.

그래서 학원 수강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마포로 넘어갔다.

그 일대를 돌며 택배 배달 일을 하고 있다는 정덕.

중간에 전화를 몇 번 한 끝에 약속 장소를 간신히 잡았고.

약속 장소인 어느 기사 식당에 마침내 도착하자.

의외로 정덕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택배회사 로고가 박혀 있는 작업 조끼를 입고 있는 녀석.

그리고 반팔, 반바지 차림인 녀석은 이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구석진 자리에서 일어섰다.

#

“···택배 일, 진짜 하는 거였네?”

내가 유심히 쳐다보며 묻자, 정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오랜 만이야.”

“근데 너는 얼굴이 왜 그렇게 상했어?”

“내 얼굴? 그래도 형 얼굴이 좋아서 좋다.”

“야, 앉자.”

그러고는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럼 언제부터 일을 시작한 건데?”

“한 3달 전에.”

“3달?”

나는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녀석이 공장을 그만둔 게 최근 일이 아니라 이미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내가 무심했네. 미안하다.”

“형이 뭘 미안해?”

“야, 암튼 미안하다.”

그 말에 정덕은 고개를 숙인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형, 우리 저녁부터 시키죠.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래, 뭐 먹을래?”

“돼지 불고기 백반. 형은?”

“나도.”

“이모! 여기 불백 2개요!”

아직 일이 남아 있다는 녀석.

그래서 무척 바쁘다고 한다.

“근데··· 다시 묻자! 넌 도대체 왜 공장에서 나왔어?”

“형, 그게 중요한 일인가요? 이미 지난 일인데···.”

“야, 그래도 말할 수 있잖아!”

“그냥 이렇게 형 얼굴 보니까··· 난 그걸로 좋은데.”

“야! 개똥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공장에서 나왔어?”

내가 약간 성을 내며 다시 묻자, 녀석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녀석의 머리카락.

한껏 짓눌린 머리카락들.

얼굴 피부는 햇볕에 그을렸고.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새카만 동공은 다행히 또렷했다.

그리고 잠시 뒤.

녀석은 드디어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그러니까 내가 예전 맡았던 그 라인이 다시금 터졌다고? 내 라인 말이지?”

“네.”

“하필, 니가 그 라인을 맡고 있다가 독박을 썼다고?”

“네. 그냥 운이 나빴어요. 재료가 불량인데, 그것도 모르고···.”

“불량? 그렇다고 그럴 리가? 왜 갑자기 그게 계속 터지지?”

“모르겠어요. 제 생각엔 요즘 재료가 좀 이상해져서. 불량률도 많이 높아지고 있고. 반장님도 많이 깨지고 계셔요.”

“그렇다고 해도! 조상구 부장이 감히 네 목을 쳤다고? 감히 네 목을?”

“전 운이 나빴어요. 반장님이 많이 도와주려고 하셨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에이씨! 그게 다 지난 일인데.”

그 순간, 갑자기 뭔가 날카로워지는 정덕의 눈빛.

목소리도 조금 거칠어졌다.

그 순간, 나는 아직 뭔가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근데 너 아직 말 못 한 거 있지?”

“아, 아니에요.”

“야! 뭔데? 말해 봐! 다 말해! 다 말해 보라고!”

그렇듯 내가 계속 재촉하자, 정덕은 할 수 없다는 듯 이번에도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지난 과거, 우리는 둘 다 퇴직금과 3개월치 월급을 떼였는데.

적어도 나는 퇴직금을 받고 공장에서 나왔다.

그런데 정덕은 퇴직금을 받지도 못했고.

3천만 원 정도의 피해 보상 각서를 쓰고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 3천만 원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

“정말 니가 잘못했어?”

내가 다시 묻자, 정덕은 억울해했다.

“재료가 문제였다니까요!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해도 위쪽에선 듣지도 않고. 아으. 진짜 미치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돈이 어딨어요? 변호사 살 돈도 없는데.”

그냥 고졸이라고 해서 우습게 본 것이다.

“그래서 조상구 그 새끼는 그 지랄을 하고 있어?”

“네. 더 심해졌어요. 반장님도 많이 힘들어 하시고···.”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형. 그만해요. 저 빨리 먹어야 돼요. 아직 일도 안 끝났고.”

그러면서 정덕은 재빨리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식욕이 사라진 상태다.

녀석이 3천만 원 각서를 썼다는 사실에 너무 분개한 상태라.

도무지 숟가락을 들 수가 없었다.

공고 3년 후배이기도 하고.

공장 후배이기도 한 녀석.

날 많이 따랐던 녀석.

동생 같은 녀석이다.

“야, 정덕아.”

입에 가득 음식을 넣고 씹던 녀석은 날 쳐다봤다.

#

0